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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7:32:44

카파도키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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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키아 왕국
Καππαδοκία
파일:갈라티아 튀르키예.png
기원전 90년경 로마의 동맹국인 카파도키아 왕국.
<colbgcolor=#dc143c><colcolor=#fff> 기원전 331년 ~ 서기 17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마케도니아 왕국 로마 제국
위치 튀르키예 중부
수도 마자카
언어 그리스어, 고대 페르시아어, 아람어
종교 조로아스터교, 그리스 다신교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주요 국왕 아리아라테스 1세(BC 331~BC 322)
아리아람네스(BC 280~BC 230)
아리아라테스 4세(BC 220~BC 163)
아르켈라오스(BC 36~17)
현재 국가 튀르키예

1. 개요2. 역사3.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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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헬레니즘 아나톨리아 동부를 다스린 페르시아계 왕조. 아케메네스 제국 시절 카파도키아 (카트파투카) 사트라프이던 아리아라테스 1세가 본국의 멸망 후 기원전 332년 자립하여 건국되었다. 비록 기원전 322년 헬레니즘 제국에게 일시적으로 멸망당했으나 기원전 301년 아리아라테스 2세 아르메니아 왕국의 도움으로 그리스인 사트라프를 축출하고 왕국을 재건하였다.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와 결혼 동맹을 유지하다가 마그네시아 전투 후 로마의 동맹이 되어 대립하게 되었고, 대가로 리키오니아 킬리키아 등지를 얻었다. 하지만 기원전 100년을 전후로 하여 비티니아 왕국 니코메데스 3세 폰투스 왕국 미트리다테스 6세가 침공하여 점령하였고, 후자는 자신의 아들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웠다.

반세기 간의 혼란 후 로마군이 개입하여 기존 왕족이 아닌 귀족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이로써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다. 이후 완전히 로마에 종속되어 아리오바르자네스 3세 아리아라테스 10세가 각각 로마 장군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처형될 정도로 약화되었다. 로마 제국 초기 카파도키아는 파르티아와의 완충 지대로 존속하였지만 서기 17년 티베리우스는 마지막 군주 아르켈라오스를 폐위하고 카파도키아를 속주로 삼았다. 3세기 이상 존속하며 카파도키아 왕국은 조로아스터교 페르시아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그리스 문화를 수용하여 헬레니즘 국가 중 하나로 분류된다. 또한 카파도키아 왕국 시절 수도였던 마자카 (카이사레아)는 현재 튀르키예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카이세리이다.

2. 역사

아리아라테스는 대대로 카파도키아 사트라프를 역임하며 아케메네스 왕조에 충성을 바친 가문의 일원이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조부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여러 차례 승리했으나 공모자들의 배신으로 붙잡혀 처형당한 다타메스라고 한다. 한편, 아버지 아리암네스는 카파도키아 사트라프를 맡았고, 남자 형제 홀로페르네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이집트 원정에 참여해 군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흑해 인근의 북부 카파도키아 사트라프로 부임했고, 킬리키아와 접한 남부 카파도키아는 미트로부자네스가 다스렸다.

그러던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 원정을 단행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승리한 뒤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가를 따라 진군하면서 여러 도시를 잇따라 공략했고 남부 카파도키아도 제압했다. 이후 부하 사빅타스를 남부 카파도키아 총독으로 임명하여 북부 카파도키아도 마저 정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이소스 전투에서 패퇴한 2만 페르시아 기병대가 나바르자네스의 지휘하에 소아시아로 쳐들어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아리아라테스는 나바르자네스와 연합하여 사빅타스를 공격해 죽여버리고 남부 카파도키아를 마저 장악했다.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 때 카파도키아 기병 분견대를 이끌었던 아리아케스가 바로 그였을 가능성이 있다.

가우가멜라 전투 후 샤한샤 다리우스 3세는 이란 동부로 달아났지만, 그는 카파도키아 왕국을 세우고 아리아라테스 1세를 칭하면서 알렉산드로스에 끝까지 대립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3만 보병과 15,000명의 기병을 통솔해 서쪽에 이웃한 프리기아를 통치하는 안티고노스 1세와 킬리키아의 통치자 발라크로스의 정복 시도를 무산시켰다고 한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한 후 공동왕 필리포스 3세 알렉산드로스 4세의 섭정을 맡은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지배를 유일하게 거부한 그를 무찌르기로 결심했다. 기원전322년, 페르디카스와 에우메네스가 이끄는 제국군이 카파도키아로 쳐들어갔다. 아리아라테스는 이들에 맞서 항전했지만 2차례의 전투 모두 패배하여 생포된 뒤 여러 친척과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아리아라테스 1세의 조카 아리아라테스 2세는 소수의 추종자와 함께 가까스로 탈출한 뒤 아르메니아에 은신했다. 이후 20년간 숨죽여 지내던 그는 기원전 301년 소아시아의 지배자 안티고노스 1세 입소스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1세 리시마코스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으면서 소아시아 일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아르메니아인들의 지원을 받고 카파도키아로 복귀해 왕국을 재건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1세가 카파도키아 일대를 포함한 동부 소아시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기에,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다.

기원전 280년 왕위를 이어받은 아리아람네스는 셀레우코스 1세가 트라키아 원정 도중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하면서 제국이 혼란에 휩싸인 틈을 타 독립했다. 딸들 중 한 명을 안티오코스 2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히에락스와 결혼시키고, 안티오코스 2세의 딸 스트라토니케를 자신의 아들 아리아라테스 3세와 결혼시키는 등 셀레우코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갔다. 이에 안티오코스 2세는 기원전 255년부터 그와 함께 카파도키아를 통치하는 아리아라테스 3세에게 바실레프스 칭호를 부여했다. 기원전 230년 안티오코스 히에락스가 셀레우코스 2세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카파도키아로 망명한 것을 받아주기도 했다.

기원전 230년 제4대 국왕으로 즉위한 아리아라테스 3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이 연이은 내란과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카타오니아를 차지했다. 기원전 220년 제5대 군주로 등극한 아리아라테스 4세는 기원전 193년 안티오코스 3세의 딸 안티오치스와 결혼했고, 셀레우코스 제국과 로마가 전쟁을 벌일 때 셀레우코스 제국 편에 섰다. 기원전 190년 12월 마그네시아 전투 때 1,500명의 갈리아 보병과 카파도키아 기병 2,000명을 안티오코스 3세에게 지원했다. 그 후 로마가 갈라티아를 침략하자 갈라티아를 지원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3세가 로마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자, 그는 로마를 두려워해 사절단을 보내 앞으로는 로마에게 복종할 테니 왕국을 유지하게 해달라고 청했고, 로마 원로원은 은 600달란트에 달하는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이를 용인했다. 그 후 그는 로마의 지지를 받는 페르가몬 왕국과 손을 잡기로 하고, 딸 스트라토니케를 페르가몬 왕 에우메네스 2세와 결혼시켰다. 그 결과 전쟁 배상금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카파도키아는 로마의 동맹국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카파도키아의 타아나, 마자카, 카이사레아 시를 재건했고, 로마와 그리스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기원전 183~179년 에우메네스 2세가 폰토스 왕국의 군주 파르나케스 1세와 전쟁을 벌이자 에우메네스 2세 편에 서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을 재건한 안티오코스 4세와 우호적인 협약을 맺고 페르가몬 왕국, 셀레우코스 제국과 함께 친선 관계를 이어가며 왕국을 발전시켰다. 그러던 기원전 172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페르가몬과 함께 로마의 편에 섰다. 그러나 로마는 카파도키아가 잠재적인 적국인 셀레우코스 제국과 연합하여 강성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기에, 갈라티아에게 자치권을 줘서 그들을 견제하게 했다. 기원전 163년, 갈라티아는 로마의 부추김을 받고 카파도키아 일부 영토를 병합하려 했으나 격퇴되었다. 또한 콤마게네 왕국의 프톨레마이오스가 멜리타니를 공격했으나 역시 격파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안티오치스는 그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좀처럼 태어나지 않자 아리아테스와 오로페네스를 자기가 낳은 아이로 속여서 후계자로 삼게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안티오치스가 두 딸과 미트리다테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에 그녀는 남편에게 진실을 밝혔고, 아리아테스는 약간의 용돈을 받고 로마로 보내졌고 오로페네스는 아이오니아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 후 미트리다테스는 이름을 아리아라테스로 바꾸고 그리스로 유학가서 철학과 문학 작품 전반을 숙달했다. 기원전 163년 아리아라테스 4세가 사망하자, 그는 국내로 돌아와서 아리아라테스 5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제6대 국왕 아리아라테스 5세는 즉위하자마자 로마와의 동맹을 갱신하고자 사절을 보냈다. 원로원은 친로마 성향인 그를 좋게 봤기에 기꺼이 동맹을 갱신했다.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했다. 그런데 남편이 사망한 후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던 어머니 안티오치스가 딸과 함께 불분명한 상황에서 살해당했다. 안티오코스 5세의 섭정을 맡았던 리시아스가 두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과 갈등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진상을 밝혀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단지 유물을 반환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어머니의 유골이 도착하자, 그는 아버지의 무덤에 합장시켰다.

기원전 163년, 로마는 갈수록 강성해지고 셀레우코스 제국과 친하게 지내는 카파도키아 왕국을 경계하여 갈라티아인을 꼬드겨서 카파도키아 일부를 공략하게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아리아라테스를 문책하기 위해 마르쿠스 유니우스가 이끄는 사절단을 파견했다. 아리아라테스는 로마 사절단을 잘 대접하면서 로마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후 대 그라쿠스가 이끄는 또다른 사절단이 찾아왔을 때도 역시 융숭하게 대접하면서 로마를 끝까지 지지하겠다고 맹세했다. 이에 로마는 카파도키아 왕국에 대한 경계심을 버리고 그를 인정했다.

기원전 161년,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던 데메트리오스 1세가 로마를 탈출한 뒤 안티오키아로 잠입한 후 정변을 일으켜 사촌인 안티오코스 5세와 리시아스를 처형하고 셀레우코스의 새 군주로 등극했다. 그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데메트리오스 1세가 로마의 허락을 받지 않고 왕위에 오른 걸 비판하면서 원로원이 나중에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한 어떤 결정을 내리든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해 로마의 호감을 얻어냈다. 얼마 후 데메트리오스 1세가 누이 라오디케를 그와 결혼시키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이것이 반로마 정책으로 여겨질 걸 두려워하여 거절했다. 이후 1만 달란트 짜리 왕관을 로마로 보내면서 데메트리오스 1세가 자신에게 결혼 동맹을 제의했지만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에 원로원은 그에게 왕실의 휘장인 홀과 상아 보석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결혼 동맹 제의가 거절당하자, 데메트리오스 1세는 이참에 카파도키아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아이오니아로 보내진 뒤 아리아라테스 5세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오로페르네스를 자기 편으로 끌여들어 자금과 군대를 지원해 카파도키아에서 활개치게 했다. 아리아라테스 5세는 페르가몬 왕국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페르가몬 왕 에우메네스 2세가 곧 사망하는 바람에 별다른 지원을 얻을 수 없었다. 기원전 158년, 데메트리오스 1세는 카파도키아를 전격 침공하여 아리아라테스 5세를 폐위시키고 오로페르네스를 새 왕으로 앉혔다.

아리아라테스 5세는 로마로 망명한 뒤 그들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 1세가 로마에 파견한 사절인 미티아데스와 오로페르네스의 사절인 티모테우스와 디오게네스가 의원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쳐서 의원들을 설복시키는 바람에 실패했다. 원로원은 아리아라테스와 오로페르네스가 권력을 공유할 것을 제안했지만 양자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아리아라테스는 페르가몬의 새 군주 아탈로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아탈로스 2세는 아리아라테스의 누이이자 형 에우메네스 2세의 아내였던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했으며,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전례도 있었기에 그를 기꺼이 도와주기도 했다.

아리아라테스 5세는 페르가몬 왕국의 지원에 힘입어 기원전 157년 또는 156년에 카파도키아를 되찾았고, 오로페르네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망명했다. 이보다 전, 오로페르네스는 아리아라테스와의 갈등이 자신에게 손해를 입힐 경우를 대비해 프리에네의 아테나 신전에 400달란트를 맡겨뒀다. 아리아라테스는 프리에네에 사절을 보내 그 돈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프리에네 시는 오로페르네스가 아직 살아있으니 그럴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에 아탈로스 2세와 함께 프리에네 시를 공격하여 주변 일대를 약탈했다. 프리에네 주민들은 로도스와 로마에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결국 프리에네 시는 배상금을 아리아라테스에게 지불하고 그의 지배를 따르기로 했다.

기원전 155/154년, 비티니아 프루시아스 2세와 아탈로스 2세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그는 자신을 도와준 아탈로스 2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당시 페르가몬군에 합류한 카파도키아 군대의 수장은 그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였다고 한다. 한편, 오로페르네스는 안티오키아에서 지지자들을 모아 데메트리오스 1세를 타도하려 했다가 발각당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오르페르네스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지만, 셀레우키아에 가두고 생명을 빼앗지 않기로 해, 그가 아리아라테스의 정적으로 남도록 했다.

기원전 150년, 아리아라테스 5세는 데메트리오스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를 아탈로스 2세,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함께 지원했다. 그 결과 데메트리오스 1세는 전쟁에서 패해 목숨을 잃었고,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새 군주로 등극했다. 이후 수십년간 나라를 평온하게 다스리던 그는 기원전 132년 아리스토니코스가 로마의 페르가몬 왕국 병합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를 도와 반란을 진압하기로 했다. 그러나 기원전 130년 아리스토니코스와 손을 잡은 트라키아인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했다. 나중에 반란이 진압된 뒤, 로마는 자신들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그에게 보답하기 위해 카파도키아 왕국에게 리카오니아와 킬리키아를 넘겨줬다.

아리아라테스 5세는 생전에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 1세의 딸 니사와 결혼하여 6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가 기원전 130년에 전사한 후, 니사는 막내아들 아리아라테스 6세를 왕위에 올려놓고 섭정을 맡은 뒤, 다른 다섯 아들을 권력 유지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독살해버렸다. 이후 아들이 점차 성인이 되어가자, 니사는 그마저 죽이려 했으나 왕조에 충성하는 사람들의 분노를 사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미트리다테스 5세는 누이인 니사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를 명분으로 삼고 카파도키아를 침공했다. 그러나 로마의 제지를 받자 방침을 바꿔 아리아라테스 6세와 자신의 딸 라오디케를 결혼시켰다. 아리아라테스 6세는 이 결혼에서 두 아들 아리아라테스 7세, 아리아라테스 8세, 그리고 딸 니사를 낳았다. 그러나 그의 지위가 공고해지면서 폰토스의 간섭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기원전 116년, 그는 돌연 괴한의 습격으로 암살당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의 사주를 받은 카파도키아 귀족 고르디오스가 자객을 보내 아리아라테스 6세를 암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뒤이어 아리아라테스 7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나이가 많이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라오디케가 14년간 섭정을 맡았다. 그러던 기원전 102년, 비티니아 왕국의 군주 니코메데스 3세가 카파도키아를 침공해 단숨에 굴복시키고 라오디케와 결혼한 뒤 카파도키아 왕을 겸임했다. 그러자 미트리다테스 6세가 누이와 조카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군을 이끌고 카파도키아로 쳐들어가 비티니아군을 몰아낸 뒤 아리아라테스 7세를 카파도키아 왕위에 복위시켰다. 그러나 아리아라테스 7세가 고르디오스를 중용하길 거부하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기원전 101년에 아리아라테스 7세를 암살하고 9살된 사생아 아리아라테스 9세를 왕위에 세우고 고르디오스를 섭정으로 세웠다. 카파도키아 백성들은 이에 반발하여 아리아라테스 7세의 동생 아리아라테스 8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리하여 카파도키아는 아리아라테스 8세 지지파와 아리아라테스 9세 지지파로 양분되었다.

기원전 96년, 미트리다테스 6세가 파견한 폰토스군이 카파도키아로 쳐들어가 아리아라테스 8세를 폐위시키고 아리아라테스 9세를 카파도키아의 단독 군주로 군림시켰다. 아리아라테스 8세는 해외로 망명했지만 기원전 95년에 사망했다. 그러자 니코메데스 3세는 자신의 아들을 아리아라테스 6세와 라오디케의 세번째 아들로 위장시키고 로마에 사절을 보내 이 아이를 카파도키아 왕위에 앉히라고 요구했다. 이에 미트리다테스 6세는 환관 고르디오스를 로마로 보내 아리아라테스 9세가 아리아라테스 5세의 아들이라고 우겼다.

원로원은 한동안 어느 쪽의 말이 옳은지 이해하지 못해 별다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기원전 95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가 이끄는 사절단을 파견해 아리아라테스 9세를 폐위시키고 폰토스군을 카파도키아에서 철수하게 했다. 원로원은 카파도키아 공화국을 세울 계획을 세웠지만, 카파도키아인들이 왕을 원하자 그들이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게 했다. 주민들은 논의 끝에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를 새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대로 카파도키아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2세에게 카파도키아를 공격해달라고 설득했다. 기원전 93년, 티그라네스 2세는 미트리다테스 6세의 설득을 받아들여 카파도키아를 침공했고, 그는 로마로 도망쳤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카파도키아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아들 아리아라테스 9세를 다시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기원전 92년 킬리키아의 총독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폰토스에 "당장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를 복위시키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하겠다"라고 위협하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복위를 인정하고 아들을 폰토스로 불러들였다.

기원전 89년,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발발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폰토스를 침공한 비티니아-로마 연합군을 섬멸한 뒤 카파도키아로 쳐들어가 그를 축출하고 아들 아리아라테스 9세를 카파도키아 왕에 복위시켰다. 그는 몇몇 수행원과 함께 로마에 망명했다. 기원전 85년 술라가 이끄는 로마군이 미트리다테스 6세를 무찌르고 다르다누스 협약에서 폰토스 왕국이 그동안 점령한 모든 영토를 반납하게 했다. 그리하여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는 카파도키아 왕위에 복귀했고, 아리아라테스 9세는 얼마 안가 사망했다. 그러나 카파도키아 일부 지역은 미트리다테스 6세의 수중에 남았다.

기원전 83년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발발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의 로마군을 격파한 뒤 카파도키아로 쳐들어가 더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이에 술라는 사절을 보내 미트리다테스 6세와 그를 화해시켰다. 이때 미트리다테스 6세와 모니메 왕비의 딸 아테나이스가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의 아들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와 결혼했다. 기원전 79년,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폰토스군이 카파도키아 영역 다수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며 그들을 쫓아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시 술라가 사망한 뒤 정국 혼란에 휩싸였던 로마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티그라네스 2세가 이끄는 아르메니아군이 카파도키아로 쳐들어가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새로운 수도 티그라노케르타로 강제 이송시켰다. 그는 이를 막을 힘이 없었기에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기원전 73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휘하 로마군에게 식량 및 물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루쿨루스가 폰토스를 공략한 뒤 미트리다테스 6세를 숨겨준 아르메니아를 응징하러 진군할 때도 지원했다. 그러나 루쿨루스가 병사들의 항명으로 인해 더 이상 공세를 이어갈 수 없게 되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 때를 틈타 역공을 가하여 폰토스를 탈환하고 카파도키아로 쳐들어가 그를 축출하고 카파도키아를 집어삼켰다. 그는 로마의 소아시아 속주로 달아나 로마군의 보호를 받았다. 기원전 66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폰토스군을 격파하고 카파도키아를 해방시켰다. 그는 왕국으로 돌아간 뒤 3년간 통치를 이어가다 기원전 63년 아들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에게 왕권을 양도하고 퇴위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는 무능해서 시리아의 로마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게 뇌물을 주고 그의 보호를 받아야만 했다고 한다. 그러다 기원전 51년 키케로가 킬리키아 총독에 부임하기 직전에 반로마 세력의 음모로 암살당했다. 이후 장남 아리오바르자네스 3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콤마나의 대제사장 아르켈라오스가 정권을 뒤엎으려 들었다. 이때 킬리키아 총독으로 부임한 키케로가 개입하여 그의 왕위를 공인했다. 그 과정에서 그를 폐위하고 아리아라테스 10세를 옹립하려는 음모에 어머니 아테나이스까지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어머니를 국외로 추방했지만 동생은 건드리지 않았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다.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편을 들었지만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대패한 뒤 이집트로 망명했다가 살해당하자 카이사르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 후 파르나케스 2세가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6세 시대의 영토를 탈환하고자 카파도키아, 비티니아, 소 아르메니아를 잇따라 공격해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이에 소아시아 총독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칼비누스는 이 당시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치르며 위태로운 지경에 몰려있던 카이사르의 구원 요청에 따라 2개 군단을 보내버렸기 때문에 그들을 당장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에 시간을 끌기로 하고, 파르나케스 2세에게 "당장 빼앗은 모든 영토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로마와 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그 후 제36군단을 이끌고 코마나로 이동하여 최근에 현지인들로부터 징집한 1개 군단, 갈라티아 2개 군단을 집결시켰다.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는 카파도키아 보병 10,000명, 그리고 기병 1,000명을 이끌고 로마군과 합세한 뒤 칼비누스와 함께 폰토스로 진격했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참패했고, 파르나케스 2세는 카파도키아로 재차 쳐들어가 여러 도시를 함락하고 그곳에 살던 로마 시민들을 학살하고 소년들을 거세했으며, 국고를 약탈했다. 그러나 보스포로스 왕국에서 사위 아산드로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파르나케스 2세는 더 이상 공세를 펼치지 않고 흑해를 건너 크림 반도에 있는 보스포로스 왕국으로 진군했다.

얼마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마무리하고 소아시아로 이동하자, 그는 카이사르를 찾아가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던 걸 용서해달라고 청했다. 카이사르는 그를 용서하면서 폰토스를 물리치는 데 필요한 물자와 병력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는 요구에 충실히 따랐고,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젤라 전투에서 폰토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파르나케스 2세는 보스포로스로 도주했다가 그곳의 지도자 아산드로스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소 아르메니아를 카파도키아에 편입시키면서, 그의 동생인 아리아라테스 10세를 그곳의 왕으로 임명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발발했다. 그 후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친 카이사르 인사인 아리오바르자네스 3세를 경계해 제거해버리기로 했다. 결국 기원전 42년, 아리오바르자네스 3세는 카시우스가 보낸 로마군에게 살해당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아리아라테스 10세는 수년간 통치를 이어갔지만 기원전 36년 애첩 글라피라의 아들이자 코마나 대제사장 아르켈라오스의 아들이기도 한 아르켈라오스를 카파도키아 왕으로 세우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 의해 처형당했다.

아르켈라오스는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 때 안토니우스에게 병력과 물자를 지원했으며,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간의 내전이 발발하자 안토니우스를 지지했다. 하지만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옥타비아누스 편으로 돌아섰다. 기원전 25년, 아우구스투스 황제로부터 항구 도시인 엘라이우사 세바세테와 그 주변 킬리키아 해안, 소아르메니아 일부 지역을 수여받았다. 그는 그 대가로 해적들을 근절하고 파르티아에 대항해 견고한 요새를 짓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궁전을 엘라이우사 세바세테로 이전하고, 가르사우라 마을을 아르켈라이스로 개명하고 행정 중심지로 개편했다. 기원전 23년, 그는 신하들에게 폭정을 일삼고 파르티아와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 그는 막 공직 생활을 시작한 젊은 티베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티베리우스는 재판에서 그를 변호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이리하여 그의 왕위는 공고해졌다.

한편, 그는 딸 글라피라를 헤로데 대왕의 아들 알렉산드로스와 결혼시켜서 유대 왕국과의 사이를 돈독하게 하였다. 기원전 7년 헤로데 대왕이 알렉산드로스와 갈등을 벌인 끝에 처형해버리자, 그는 딸을 마우레타니아의 왕 유바 2세와 결혼시켰다. 유바 2세는 문학과 과학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여러 저작을 집필했다. 그 역시 유바 2세와 교류하면서 지리학과 광물학에 관심을 보였다. <바위와 강들>이라는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고, 광물학과 관련된 여러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훗날 대 플리니우스는 ' 박물지'에서 광물을 다룰 때 그의 저서를 많이 참고했다. 또한 기원전 8년 폰토스 왕국의 군주 폴레몬 1세가 죽고 미망인인 피토도리다가 폰토스 여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피토도리다와 결혼하고 그녀와 그녀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아르탁세스 3세 폴레몬 2세를 카파도키아 궁정에서 지내게 했다.

이렇듯 통치를 무난하게 이끌어가며 카파도키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폰토스, 유대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였으나, 기원전 6년 로도스 섬에 은퇴한 티베리우스를 냉대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아르켈라오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가 될 게 분명하고 티베리우스는 끝물이라 여겼기에 그렇게 행동했지만,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몇년 후 요절해버렸고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공인되면서 그의 운명이 결정되고 말았다. 티베리우스는 과거에 자신의 변호 덕분에 무죄 판결을 받아낸 적이 있었는데도 경멸어린 태도로 대했던 그에게 깊은 원한을 품었다. 17년, 티베리우스는 그를 로마로 소환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반역 혐의로 긴급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고,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옥중에서 사망했다. 타키투스는 그가 노령으로 인한 병환으로 사망했다는 설과 자살했다는 설을 역사서에 동시에 기재했다. 그가 사망하면서 카파도키아 왕국은 멸망했고, 왕국의 영역은 로마 제국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3.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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