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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0년경 로마에 복속한 콤마게네 왕국
1. 개요
그리스어 Κομμαγηνή영어, 라틴어 Commagene
튀르키예어 Kommagene
헬레니즘기 아나톨리아 동부를 다스린 페르시아계[1] 왕조. 본래 아르메니아 왕국에서 갈라진 셀레우코스 왕조의 속국이었으나 종주국의 쇠퇴 후 자립하였고, 국왕들이 평균 27년씩 재위하며 안정을 유지하였다. 특히 40여년간 즉위한 안티오코스 1세는 콤마게네를 대표하는 유적 넴루트 다으 능을 조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콤마게네 왕국의 주요 도시로는 사모사타, 제우그마, 아르사메이아 (카흐타) 등이 있었다.[2]
기원전 1세기 로마와 헬레니즘 국가들 간의 전쟁에서 콤마게네는 중립을 지켰으나 결국 로마에 복속되었고, 파르티아와의 완충 지대로 남았다가 서기 17년 로마 제국에 병합되었다. 다만 38년 안티오코스 4세가 옹립되어 왕국으로 부활, 한때 아나톨리아 동부 대부분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후국으로 성장했으나 이를 견제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72년 로마 제국에 병합되었다. 다만 저항하지 않았기에 왕실은 로마의 귀족 가문으로 예우되었다. 콤마게네는 이웃한 카파도키아 왕국과 마찬가지로 기존 페르시아 문화에 점차 그리스적 요소를 더하여 다양하고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2. 역사
넴루트 다으의 안티오코스 1세 두상 | 인근 수도 아르사메이아의 악수 부조[3] |
콤마게네 지명은 히타이트의 후계국 중 하나인 쿰무후에서 유래되었고, 왕국 자체는 고대 아르메니아 왕국을 다스린 오론테스 (예르반드) 왕가의 방계인 프톨레마이오스가 기원전 201년 안티오코스 3세의 아르메니아 분할 시에 콤마게네 사트라프로 임명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40여년간 셀레우코스 왕조의 봉신으로 지내던 그는 안티오코스 4세 사후 혼란을 틈타 기원전 163년 왕을 칭하며 독립을 선포하였고, 이렇게 성립된 콤마게네 왕국은 2세기간 유지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왕으로써도 33년 통치하여 무려 70여년간 집권한 후 사망하였고, 아들 사메스 2세[4]도 21년간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후자의 아들 미트라다테스 1세는 셀레우코스 조와 결혼 동맹의 일환으로 안티오코스 7세의 딸 라오디케아 7세와 결혼하며 그리스 문화를 수용하였고, 그 역시 39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안티오코스 1세도 40여년간 통치하였다.
그는 특히 기원전 62년 넴루트 다으에 신전 겸 왕릉을 건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페르시아 의복과 그리스 조각 기법이 활용된 넴루트 왕릉은 대표적인 헬레니즘 유적으로 평가된다. 한편 외치에 있어 그는 로마- 폰투스 왕국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으나 티그라네스 2세의 점령에서 벗어나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지원하며 로마의 동맹이 되었다. 다만 같은 페르시아 문화권인 파르티아와 점차 가까워졌고, 로마에 패배한 파코로스 1세를 수용하며 결국 로마와 틀어졌다. (기원전 38년) 이에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의 로마군이 수도 사모사타를 포위하였고, 안티오코스 1세는 1천 탈란트의 배상금 및 로마와의 재동맹을 제안하였다. 바수스는 이를 수용했으나 그의 상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거부하여 바수스를 해임, 자신이 직접 포위를 이어갔으나 함락에 실패하였다. 이로써 안티오코스 1세는 배상금 액수를 3백 탈란트로 줄일 수 있었다.
아드야만 도의 카르쿠쉬 능과 독수리를 얹은 도리아식 기둥
카시우스 디오에 의하면 기원전 31년 안티오코스 1세는 파르티아의 프라아테스 4세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뒤를 이은 그의 장남 미트리다테스 2세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 편에 참전했다가 패전 후 아우구스투스 측으로 전향했는데, 그 대가로 유프라테스 강의 도하처인 제우그마를 로마령 시리아에 할양해야 했다. 기원전 29년에는 동생 안티오코스 2세가 콤마게네 사절 피살 혐의로 로마로 소환되어 처형되었다. 기원전 30년 넴루트 다으와 함께 콤마게네의 양대 유산인 카르쿠쉬 능을 조성한 미트리다테스 2세는 10년 후 사망하였고, 미트리다테스 3세의 8년 치세를 거쳐 손자 안티코스 3세는 30여년간 재위한 후 사망하였다. (서기 17년) 그후 로마 병합을 두고 찬반 여론이 일었고,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카파도키아 왕국과 함께 로마 속주로의 병합을 택하였다. 그후 왕자 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에서 성장하였고, 친누이 이오타파와 결혼하였다.
그렇게 20여년이 지난 후 칼리굴라 황제는 안티오코스 4세를 왕으로 봉하며 그동안 콤마게네에서 나온 세금과 킬리키아 지방 통치권까지 주었고, 이로써 콤마게네 왕국은 부활하였다. (38년) 안티오코스 4세는 53년 킬리키아의 야만족을 평정하고 55년 네로 황제의 명으로 파르티아 원정에 파병했으며, 59년에 코르불로와 함께 아르메니아 원정에 종군하는 등 로마의 주요 동맹 중 하나로 활약하였다. 그 대가로 61년 아르메니아 일부를 병합하였고, 카파도키아 일부도 통치하게 되었다. 네로 사후 안티오코스 4세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옹립되자 지지를 표하였고, 그의 아들 티투스의 예루살렘 포위를 도왔다. 또한 안티오코스 4세는 이사우이라에 게르마니코폴리스 (에르메넥), 킬리키아에 이오타파 (아이탑) 등의 도시를 세웠다. 하지만 72년 시리아 총독 카이센니우스 파에투스는 콤마게네가 파르티아와 동맹하여 반란을 꾀한다며 고발하였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그의 폐위를 결정하였다.
3. 멸망 후
로마 황제 카라칼라가 콤마게네에 세운 세베루스 다리
아테네 시내 중심부에 남아있는 필로파포스 영묘 유구. 좌우 석상은 각각 안티오코스 4세와 필로파포스 자신이다. |
아르사메이아의 콤마게네 왕궁을 맘루크 왕조 시절 요새로 개조한 예니 칼레
안티오코스 4세는 콤마게네로 진입한 로마군[5]에 맞서지 않고 항복하여 로마에서 명예로운 대우를 받으며 여생을 보내었다. 사후 에피파네스 왕자는 아테네로 이주해 정착했는데, 그의 딸 율리아 발빌라는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에 동참하였고 아들 필로파포스는 아테네에 지금도 남아있는 영묘를 세웠다. 그의 후손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콰드라투스는 3세기 로마의 원로원 의원 겸 역사가로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