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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2 20:33:25

라울 6세 드 고쿠르

성명 라울 6세 드 고쿠르
Raoul de Gaucourt
생몰년도 1371년 ~ 1462년 6월 10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고쿠르
사망지 프랑스 왕국 파리
아버지 라울 5세 드 고쿠르
어머니 보몽뒤가티나이의 마르그리트
배우자 잔 드 프레이
자녀 샤를, 장, 라울, 마리
직위 루앙의 세네샬, 시종장, 오를레앙 수비대장, 도피네 총독, 파릉사의 그랜드마스터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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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맞서 싸웠다.

2. 생애

1371년경 프랑스 왕국 고쿠르에서 고쿠르, 아쟁쿠르, 루자르케스의 영주인 라울 5세 드 고쿠르와 보몽뒤가티나이의 마르그리트의 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 라울 5세 드 고쿠르는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시종장, 보케르의 세네샬, 루앙의 집행관을 역임했으며, 독일, 아라곤, 제노바, 시칠리아 등 여러 나라에 외교 활동을 수행해, 샤를 6세에게 필요한 자금을 받아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1417년 7월 24일 루앙의 침대에서 정체 불명의 인물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13살 때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시종이 되었으며, 샤를 6세가 1388년 10월 부르봉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의 독일 여행에 동행했다. 1396년 느베르 백작 장 1세[1]와 함께 헝가리로 가서 기사 작위를 받고 니코폴리스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프랑스에 돌아온 그는 아르마냑파에 가담했고, 1411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시종이 되었다. 1411년 10월 14일 부르고뉴의 생클루 다리를 기습 공격해 아르마냑파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아르노 기욤 드 바르바잔을 구출했으며, 1414년 필리프 드 생폴이 이끄는 부르고뉴군을 격파한 뒤 드뢰와 톤네르를 포위했다.

1415년 루앙의 집행관에 선임된 그는 그해 8월 17일에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아르플뢰르 해안에 상륙한 후 아르플뢰르를 공략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병사들을 이끌고 아르플뢰르에 진입한 뒤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한 달간 항전했다.( 아르플뢰르 공방전) 그러나 구원군이 끝내 오지 않자 9월 22일에 도시 내 주요 관료 및 장교들과 함께 아르플뢰르 성문 열쇠를 가지고 헨리 5세를 찾아가 넘겨줬다. 이후 칼레로 끌려가서 10년간 포로 생활을 한 끝에 풀려난 그는 도팽 샤를에게 가담했고, 1427년 몽타르지 공방전에 참가해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1428~1429년 오를레앙 공방전 당시 도팽 샤를의 초대 시종장이자 오를레앙의 수비대장으로서 오를레앙을 사수했다. 그의 아내 잔 드 프레이는 시농에서 잔 다르크의 처녀성 검사에 참여했다. 1429년 잔 다르크와 함께 잉글랜드군을 오를레앙에서 물리쳤고, 뒤이은 루아르 원정 파테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랭스 행진에서 샤를을 호위했고, 7월 17일 랭스에서 거행된 샤를 7세의 프랑스 국왕 대관식에 참석했다. 그해 10월17일 시농 마을과 성의 대장에 선임되었고, 뒤이어 도피네 총독에 임명되었다.

1430년 5월 20일 라 코트생앙드레에 민병대 1,600명을 집결한 뒤 6월 11일에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가 도피네를 공략하기 위해 파견한 루이 2세 드 샬롱알레의 부르고뉴군과 오랑주 공국 연합군 4,000명을 안통에서 기습 공격해 궤멸시켰다.( 안통 전투) 1431년 라니쉬르마른 공방전에 참여해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을 격파하고 라니쉬르마른 요새를 구원하는 데 일조했으며( 라니쉬르마른 공방전), 1433년 몽상뱅상에서 군대를 모집한 뒤 푸아투, 앙주, 투렌, 블레조아에서 일련의 습격 작전을 전개한 뒤 메인으로 가서 잉글랜드군과 수 차례 전투를 벌였다.

1433년 샤를 7세의 고문에 발탁되었고, 143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를 찾아가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1436년 2차 파리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뒤이은 몽뜨흐 공략에도 참여했다. 1438년 교황 에우제니오 4세를 찾아가 나폴리 왕국의 왕위를 놓고 경쟁하던 앙주의 르네 아라곤 국왕 알리폰소 5세 사이의 평화 문제를 논의했다. 1440년 장 드 뒤누아,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장 2세 달랑송, 샤를 1세 드 부르봉, 도팽 루이,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 등이 샤를 7세를 상대로 프라그리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샤를 7세에게 끝까지 충성해 왕이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했다.

1441년 말 아르플뢰르 근처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 잉글랜드군에게 체포된 뒤 자식들을 인질로 넘긴 후에야 풀려났다. 1443년 8월 도팽 루이와 함께 디에프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1448년 루앙으로 파견되어 잉글랜드 대표단과 함께 휴전 위반에 대한 보상 문제를 논의했으나 결렬되었다. 1449년 11월 10일 샤를 7세가 해방된 루앙에 입성하는 행사에 참석했으며, 루앙과 지조르의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451년 아라스 조약과 관련하여 랭스 대주교와 부르고뉴 공작과의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1453년 자크 1세 드 샤반이 사망한 뒤 프랑스의 그랜드마스터가 되었다. 1462년 6월 10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3. 가족



[1] 훗날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