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국공내전의 대체역사를 논하는 문서.2. 1945년, 양측의 휴전 수긍으로 인한 분단
1945년 10월, 일본군이 무장해제 및 물러난 직후[1] |
1945년 10월, 일본군이 완전히 중국 대륙에서 빠진 직후 무렵, 만주는 소련이, 중원평야는 공산당이, 서부와 남부는 국민당이 장악한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국민당이 공산당을 상대로 선제전쟁을 벌이지 않고, 미국과 소련의 중재를 따라서 평화롭게 휴전하고, 이 국경이 고착화 될 경우를 가정한다. 다만 국민당의 군세가 더 강하고, 일본을 상대로 희생도 더 컸으며, 핵을 단독보유한 미국 등 연합국의 발언권이 더 컸다고 가정한다.
중국공산당은 "만리장성 이북 + 허베이성/산둥성" 영토를 갖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가장 반공인 염계군벌과 공산당의 본진인 옌안시가 서로 반대편에 있어 갈등이 생기기 쉬운 판도를 정리하기 위해, 옌안시의 공산당에게 미군이 베이징시를 양도하는 형태를 생각할 수 있다.
- 이 경우 연운 16주를 쥔 요나라vs 북송 또는 금나라vs 남송+ 서하 구도와 비슷해진다. 만리장성/ 산해관의 자연국경을 경계로 했던 명말청초보다 북방이 더 영토를 가지게 되는 구도다.
- 국민당의 수도는 그대로 난징시가 되고, 중공의 수도는 베이징시/ 선양시가 되었을 것이다.
- 중공은 만주국의 뒤를 이어 소련의 위성국 신세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중공이 앞서다가 결국 국민당이 추월하는, 현실 남북한 경제와 같은 역사가 흘러갔을 것이다. 일제가 만주에 남긴 공업시설이 매우 컸기에 중국공산당이 비등하지만, 중일전쟁 이전에도 아시아 최대 제철소가 상하이에 있었던 것처럼 만주와 대륙의 격차는 점차 벌어질 것이다.
- 상임이사국 지위를 쥔 중화민국은 'China', 중공을 'Manchuria (PRC)'로 호칭하며 미승인국 취급하려 시도했을 것이다. 소련의 비토로 현실의 남북한처럼 민주, 공화 등으로 이름붙이거나, 북중국/남중국으로 이름붙여 중공을 승인국에는 올리게 될 것이 예상된다.
베트남에선 북부에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내려온 중화민국군이 국공내전 때문에 급격하게 철수하며 공백이 생기는 일이 없거나 지연되었고, 이로서 연합세력으로 참전까지 했던 민족독립정부인 베트민이, 도와줄 곳이라곤 중공 뿐이었기에 친공세력인 북베트남으로 변질되는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 재식민지화의 야욕을 가진 프랑스에 의해 1946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일어나겠지만, 베트남의 좌우합작 민중들과 중화민국에서도 정당한 반발이 일어, 미국도 지원을 끊으며 조기 종결된다. 베트남에 좌우합작 다당제 정부가 들어서게 되며,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다.
1950년 중국의 티베트 침공은 그대로 발생했을 수도 있다. 현실에선 티베트의 뒷배인 영국이 사라졌고, 친미 파키스탄을 경계하려 친소 인도가 중국에게 카슈미르를 양보받으려 티베트 합병을 묵인하면서, 청나라를 계승한 중국이 영국에게 빼앗긴 정당한 영토를 주장하며 티베트를 침공했다. 이 대체역사에서도 친소 인도를 친미 파키스탄/중국으로 포위하기 위해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는 것을 미국이 묵인했을 가능성이 있다.[2]
1950년 한반도에선 6.25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다. 이로서 남북한끼리 큰 원한을 갖게 되진 않는다. 북한은 현실의 베트남, 쿠바처럼 1인독재체제가 자리잡기 어렵다가 집단지도체제로 넘어가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냉전이 종료하면서 남북한은 독일통일과 같은 해에 평화롭게 점진적 통일을 선언하고 자잘한 사회갈등을 시작했을 수 있다. 반면 냉전 이후에도 만주+북중국 지역은 만주국/ 요나라/ 금나라처럼 북방에서 독립적 정체성을 가지는 중견국가로 잔존할 수도 있다. 한반도 통일이 중원-만주 통일보다 먼저 일어날 가능성이 높으므로, 양측 관계는 한국-만주 관계로 불렸을 것이다.
3. 1947년, 중화민국의 완전 승리
크게는 낙관적인 예측과 비관적인 예측이 가능하고, 그렇게 메이저한 소재는 아니지만 관련 역덕들에게는 영원한 떡밥거리가 되고 있다. 이는 우파를 비롯한 국민당 옹호 측에서는 공산당의 "건국신화"가 서방의 우호적인 좌파 역사가들에 의해 멋대로 대중에 유포되어 버렸다는 시각을, 공산당 옹호 측에서는 무능한 장제스를 이념적으로 복구하려는 소수의 무리수라는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쟁거리는 과거 베트남 전쟁과 68운동 이후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까지 옹호했던 좌파 역사가들의 전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표적으로 국내에선 1970~80년대 일련의 저작에서 문화대혁명을 긍정적으로 서술했던 리영희가 있다.[3]
주류 학계에선 1970년대 이후로 중국에 대한 시각이 대격변을 겪게 되면서 중일 전쟁 당시 국민당의 활약이나 장제스의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다는 과거의 시각에서 보다 진일보하여 장제스의 난징 정부 기간(1927년 ~ 1937년)을 황금의 10년이란 표현으로 칭송하는 주장까지 나오는 수준이다. 이 기간의 눈부신 경제 성장은 장제스 비판론자의 대표격인 로이드 이스트만까지 인정하는 편이다.
긍정적인 관점은 장제스가 무슨 짓을 하든 마오쩌둥보다는 잘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 문화대혁명의 거대한 실책으로 중국의 경제, 문화, 정치 등등 거의 모든 분야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때문에 인구가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일본이 중국을 총 경제규모에서 초월했을 정도로 쇠락해버린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방 후에나 제대로 된 경제 성장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는 마오쩌둥이 중소결렬 이후 스스로를 스탈린의 진정한 후계자로 여기고 전 중국 국민에 스탈린 식의 경제정책을 적용하겠다는 정신나간 발상을 하기 시작한 탓인데, 스탈린을 그 정도로 추종하지 않았던 장제스는 이런 식의 뻘짓을 벌일 이유가 없다.
부정적인 관점은 장제스고 뭐고 중국은 여전히 최악의 상태 한 마디로 설명이 가능하다. 상술한 대로 장제스는 난징 정부 시절 괄목할 만한 개혁을 이뤄낸 것은 맞으나 해당 개혁도 한계가 컸고[4] 중일전쟁 탓에 그나마 이루어놓은 것도 싹다 리셋이 되어버렸다. 일본이 열심히 개발해놓고 간 만주국의 인프라라도 남아있으면 모를까 그마저도 소련이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이후 싸그리 뜯어갔다. 게다가 안그래도 딱히 청렴하지 않았던[5] 중국국민당이 중일전쟁의 여파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지 모르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원 역사에서는 국부천대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장제스에게 반발할 만한 세력이 싹다 공산당 쪽에 붙거나 쓸려나갔고, 대만 자체가 땅면적도 작고 토착 군벌 세력도 없는지라 장제스가 철권을 휘두르면서 나름 순조롭게 개혁을 이뤄나갈 수 있었으나, 중국 본토를 통치해야 한다면 그 부담이 수십배로 커진다. 중국국민당은 원래 매우 부패한 상태였고 이같은 문제가 해결되는 시간은 꽤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이 된다. 국부천대 이후 대만을 봐도 계엄령을 내리고 장제스의 독재 체제가 이어졌는데 과연 대륙에서 머무른다고 해도 국민당의 부패가 사라질까? 국민당은 당시 형식상 기본틀은 민주주의 국가였지만 소위 '훈정' 이라는 꼬리표 하나 달고선 권위주의 체제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이와 같은 문제 때문에 국민당에 대한 중국 국민들의 신뢰는 바닥을 쳤고 수십년간의 내전, 일본과의 전쟁으로 경제고 뭐고 다 박살이 났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지지와 민심이 쏠려 결국 국공내전에서 패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와 같이 봤을 때 국민당이 승리한다 해도, 장기간으로는 중국은 매우 암울한 상황을 보낼 것이다는 여론이 압도적이다.
전반적으로는 당장은 (1950~60년대) 모택동 시절보다 좋을지 모르겠으나 장기적인 무언가는 장담할 수가 없다. 중화민국의 통일로 인하여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 것이라고 단언하여 가정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렵다. 해당 질문 자체가 중국이 어찌하여 백년국치를 딛고 나름대로의 강대국으로 세계에 올라설 수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과 엮여 있다.[6]
가능성은 높지 않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흐름을 크게 바꾸거나 아예 30년대로 돌아가서 시안 사건같은 불상사 없이 중국공산당을 포함한 국민당에 반대할 만한 인간군상들을 싹다 제압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인데, 45년 종전 이후에는 상술한 대로 개판이 되어버린 중국을 어찌어찌 이끌고 전쟁 이전보다 훨씬 규모가 커진 홍군을 몰아낸다는 엄청난 과업을 달성해야 한다. 최소한 이치고 작전 정도는 없어야 하고, 중국 전역을 담당하는 미군 지휘관이 스틸웰 보다는 인심이 있는 사람이라 중국의 실정을 이해하려고 노력정도는 해야 뭔가 답이 나온다.
한국에게는 나름대로 이점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단점이 더 많다고 생각되는 시나리오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소련이 국공내전에 개입해서 만주를 점령해 버리는 짓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북한은 완전히 고립되어 버릴 가능성이 크고, 덕분에 6.25 전쟁 발발 가능성이 0에 가깝게 낮아지며 [7] 한국 전쟁이 발발하지 않은 덕분에 안그래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고급인력이 전쟁 피해로 쓸려나갈 일이 없었을 것이고, 전반적인 문화적인 타격이 적었을 것이다.
반대로 경제 성장이 매우 어려워진다. 미국은 중국이 통째로 공산화된 이후에도 한국을 그닥 중요한 지역으로 보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까지 가서야 한국 정부를 본격적으로 신뢰해줬을 정도. 만약 중국이 공산화를 피한다면 미국에게 있어 한반도의 중요성은 수직하락할 것이고, 그만큼 경제적인 지원을 받기가 어려워졌을 것이다.[8] 게다가 중화민국과 연결된 화교의 경우 실제 역사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국외의 화교는 일체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화교는 낙오상태가 되었고 박정희 정권때 화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펼칠수 있었지만 중화민국이 승리했다면 화교에 대한 적극 투자를 했으면 했지 화교를 탄압할 경우 장제스의 내정간섭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세계 십수위의 경제대국인 현실의 대한민국과는 달리 화교를 전혀 견제하지 못한 채 화교자본에게 경제를 장악당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처럼 되었을 가능성까지도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미국 등 서방국가는 차라리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덩치 큰 중국 위주로 지원을 활발히 했을 것이지, 21세기 현재 한국은 세계 10위 경제대국이 아닌 몽골이나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처럼 유라시아 대륙의 변방국가로 머물렀을 것이다.[9]
중화민국과의 외교 또한 문제가 되는데, 장제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최대물주였던만큼 한국에게 있어 중국 전체를 통일한 중화민국의 영향력은 매우 컸을 것이다. 문제는 장제스가 한국을 마냥 좋아해서 지원해준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장제스를 위시한 국민당 지도층은 한반도를 회복해야 하는 고토 수준으로 인식했다.[10] 뿐만 아니라 중국 국민당은 제주도는 일제가 만든 비행장이 있고 군수지원함 기지도 될 수 있는 전략적 가치가 있는 섬이라 중국이 관할하는 것을 원했던 것은 물론 울릉도와 독도 역시 소련에 넘겨주지 말고 중화민국이 신탁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토적 야욕을 드러낸 적이 있다. #[11][12]
통일 중화민국은 위와 같이 한반도를 자신의 영향권에 넣고 위성국화시키기 위해 사사건건 간섭하려 들었을 것이고 심하게는 조공책봉관계 같은 것을 맺으려 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된다면 광복 직후의 한국 입장에서는 명목상으로는 독립을 이룬 독립국이지만 지금의 북한처럼 중국의 전략적 속국이 되는 결과에 불과한만큼 상당한 수준의 반중 감정의 폭풍이 몰아닥쳤을 것이고, 한중 분쟁이 터지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불가능이 아니다.
중국 국민당과 중화민국의 존재 때문에 한국에서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군부독재 정권은 없었을수도 있다. 설령 이들이 쿠데타로 집권했더라도 실제 역사처럼 반공을 내세운 장기집권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고 박정희와 전두환은 재평가는커녕 한국판 스탈린이나 사담 후세인 정도로 철저한 악인으로 격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역사에서는 중국 국민당이 대만으로 천도했기 때문에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중국 국민당이 중국 대륙을 통일했다면 박정희나 전두환을 굳이 선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 국민당은 군벌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면서 중국을 통일했기 때문에 박정희나 전두환 세력을 일종의 군벌 정도로 봐서 표면적인 외교관계에서는 우호적인 척 했어도 속으로는 싫어했을 것이고 한국에 민주화 세력이 어느정도 있었으면 민주화 세력에 더 우호적이였을 것이다. 민주화 세력이 중국에 더 우호적이였던 것도 있고[13][14] 중화민국 입장에서 볼 때 군부독재 체제에서 군사력을 증강하려 했던 군사정권보다는 민주주의를 한국에 빨리 정착시켜서, 한국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군부독재로부터 한국인들을 해방시킨 해방자 이미지를 만드는 동시에[15] 한국의 국론이 최대한 합쳐지지 못하도록 하는게 더 이득이였을 것이다.[16][17] 군부독재, 핵개발 정책으로 인해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은 중화민국 뿐만 아니라 미국[18], 소련[19]에게 단단히 찍혀 경제제재를 당했을 것이고, 그래서 박정희나 전두환은 집권하더라도 재임기간 경제성장을 못 이끌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민주화 이후에 경제제재가 풀려서 민주적으로 집권한 정부가 경제개발을 주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중국 국민당과 박정희가 혈맹급으로 친해서 중국 국민당이 박정희와 전두환의 민주화 탄압을 지원했더라도 마찬가지다. 민주화를 탄압하는데 외세를 끌여들였으니 박정희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이미지는 국민들에게 전혀 안 먹혔을 것이고, 민주화가 진행된 이후에는 계엄령 이후 장제스가 대만에서 격하당한 것처럼 박정희와 전두환은 완전히 격하당하고 박정희와 전두환의 이름은 언급하는것조차 금기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반공같은 확실한 집권명분이 없기 때문에 박정희의 입지는 불안정했을 것이다.[20][21] 설령 원 역사대로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더라도 박정희를 몰아내겠다며 또 다른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사례가 빈번했을 수도 있고 한국사에서 별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그냥 군부독재자 1호 정도로 남았을 것이다.[22][23]
어느 쪽으로 역사가 흘러갔든지간에 중화민국과 중국 국민당이 있는 한 박정희나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배경이 가능했을지나 의문이고 설령 쿠데타가 성공했다한들 민주화된 한국에서 긍정적으로 재평가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일본에게는 기회가 된다, 일본 열도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요한 자리인데, 일본이 공산화되기라도 하면 소련 해군의 손에 태평양 자유이용권이 공짜로 떨어지는 것이고 미국은 쿠바 미사일 위기 이전에 제 2차 미드웨이 해전을 걱정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현실화되는 터라 일본의 경제 재건을 도와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24] 중국이 공산화되지 않아 미국의 철수가 지연되어 경제 재건이 완료되는 시기가 늦춰지기는 하겠지만[25] 중화민국이 전쟁으로 무너진 나라를 복구하기에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으며 반일 감정을 불태우며 일본을 어떻게든 엿먹이려고 했을 중화민국은 현실 역사의 중공이 대약진 운동 시기에 동남아시아 시장에 섬유류 등의 경공업 제품을 주력 수출품으로 밀고 있던 일본의 수출시장을 빼앗아서 경제 성장과 국민 생활수준을 저하시키고 정치 불안정까지 가속화시켜 중공에 굴복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것처럼[26] 일본을 수출시장에서 밀어내고 일본 경제를 무너뜨리려고 하지만 실패로 끝나서 오히려 일본 경제가 위기를 넘기고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거의 견제하지 못하는 것에 더해 일본이 동남아 지역의 영향력까지 확대해 나갔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고 중화민국은 미국이 일본 편을 드는 것이 꼴 보기 싫어서 소련에 붙거나 아예 제3세계의 맹주가 되겠다며 미국과 거리를 둘 수도 있으니[27][28][29] (중화민국이 그런 식으로 나갔다면) 미국은 당연히 중화민국보다 일본 편을 들게 되어 80년대 일본 버블경제와 플라자 합의를 피했을 가능성도 나름 있었을 것이다.
작은 디테일이지만 만약 어떤 이유에서든지 공산당이 종전 이전에 쓸려나가 장제스가 국공내전 걱정을[30] 할 일이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오키나와 섬의 행방이 흥미로워진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오키나와를 중국령으로 인식하고 섬을 전후 중국에 넘겨줄 구상까지 했으나, 의아하게도 장제스 본인이 거절하면서 무산되었다.[31] 만약 장제스가 오키나와 중국합병을 어떤 이유에서든지 받아들였다면 오키나와의 처분에 대해 종전이후 족히 수년간 중국-일본 간의 정치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가능성이야 많겠지만 양국이 모두 어떤 이유에서든 오키나와를 놔주기 싫어했다면, 아예 독립시켜 버리고 중국-일본 양국과 일종의 국경통행 자유화 협정을 맺어 동시에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back to the 에도시대 같은 모양이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비슷한 시나리오를 다룬 대체역사물은 스탈린의 편지 정도이다.
4. 1948년~, 양측의 전쟁 중단으로 인한 분단
중국 남북분단을 가정한 지도[32][33] |
중국이 중국국민당(여당)과 중국공산당(야당)이 공존하는 양당제 국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서로를 말살해야 하는 적으로 여겼기 때문에, 국공합작이 깨지고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무승부로 끝났다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
- 국공 내전보다는 중국 전쟁이라 불릴 것이다.
- 남중국은 일본이 타이완에 남겨둔 기술을 활용하여 경제 발전을 크게 이룰 가능성이 있다. 특히 위 사진처럼 분단이 이루어질 경우 해양 진출로의 거의 전부를 남중이 독차지하므로 해양무역을 통해 경제 발전이 훨씬 가속화되었을 것이며[36] 중화민국이 초강국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았을 것이다. 아무리 일본이 중국 동해안을 초토화시켰다지만 중화민국은 중국 전통의 곡창지대인 강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애당초 우위에 있는데다 공산주의 포위 명목으로 통일한국, 일본과 같이 미국이 지원을 많이 했을 가능성이 높다.
- 중화민국은 장강 이남의 거대한 경제력을 이용하여 동아시아에서 뛰어난 입지를 차지할 수 있게 되며, 1980~90년대 일본처럼 자본주의 진영 맹주 미국을 위협하는 경제대국 2위 자리를 차지했을 수 있다. 특히 중화민국이 일본 수준의 1인당 GDP까지 챙겨가는(실제로는 인구가 너무 많아서 그 정도는 어렵겠지만.) 경제성장이 이뤄질 경우 훨씬 대놓고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국력에 도달했을 수 있어서 소중분쟁이 아닌 미중분쟁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자본주의 국가 특성상 중소분쟁 같은 군사적 충돌보다는 미중 무역전쟁 같은 돈의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 반대로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는 소련에게 지원을 많이 받아서 발전을 어느정도 하고 소련 견제를 위해 미국과 데탕트가 일어날 가능성은 높았기에 개혁개방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겠지만, 현대 중국처럼 급격히 성장을 할 가능성은 낮았을 것이다. 애당초 강남 지역을 중화민국에게 내주고 시작한데다, 양쯔강 이북인 경우는 중국판 비무장지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 북중은 안전하게 쓸 수 있는 해로가 사실상 극동 지역만 남게 되므로 해양 진출이 매우 곤란해질 것이다. 따라서 육로 무역에 치중할 수밖에 없으며 공산권 무역을 위해 소련 영토를 지나는 루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서 소련 의존도가 훨씬 높아졌을 것이다. 물론 남중과의 체제 경쟁을 위해서도 소련의 지원을 받아야 하므로 이중으로 소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특히 현재 중국의 경제 발전은 데탕트를 거치면서 서구의 기술과 자본을 지원받아 개혁개방을 성공시킨 덕분인데, 중화민국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면 소련에 묶여 개혁개방을 시도할 수도 없고, 한다해도 서구의 지원을 받을 수 없어서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37] 결국 현재보다 훨씬 폐쇄적인 국가가 되었을 것이며, 그런 폐쇄성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처럼 군대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양쯔강변에서의 군사적 충돌은 매우 격해졌을 수 있다.
- 중공이 경제성장도 실패하고 부유한 남중과 체제경쟁을 벌이다보니 공산권 맹주 소련의 중공 지원이 늘어날 수밖에 없고, 중국 대륙이 통째로 공산권에 포함되어 있는 안보적 메리트를 상실하므로 대미 군사적 리스크는 커질 수밖에 없다. 즉, 소련에 가해지는 압박이 더욱 커지며, 동구권 붕괴가 더욱 가속화될 수도 있다.[38]
- 하나의 중국 개념이 시기가 지날수록 더욱 강화되어 상호 충돌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혹은 1개만 존재하였다가 2개 이상의 정권으로 바뀐 한국처럼 2개의 정부로 쪼개지듯이 두 개의 중국으로 탈바꿈하려는 움직임이 클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2개의 중국이 공존하는 양상이 나오게 되고 하나의 중국을 위시한 무력 충돌, 갈등 따위의 걱정은 없을 수 있다.
- 냉전기에는 남중(홍콩, 마카오 포함)+한국+남월+미국+일본 VS 북중+북한+북월+소련+몽골로 치열한 대립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다만 만주랑 가까운 북한은 몰라도 북베트남의 경우 중국국민당이 대륙을 통일했어도 비슷하겠지만 중국 남부를 중화민국이 지배했다면 중공이나 소련의 지원을 못받게 되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패배하여 프랑스에 의해 재식민지화되었거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포기했어도 중화민국이나 미국에 의해 공산화가 저지되었을 것이다. 이는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마찬가지.
- 중국이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낮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무장을 미국이 막지 못했던 것처럼 남중과 북중은 거의 반드시 핵무기 경쟁을 벌였을 것이고, 때문에 제3차 세계대전 발발 위기도 잦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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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보다는 "제2차 중국 전쟁"이 일어나고 거대한 중국의 특성상
제3차 세계대전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 6.25 전쟁이 터졌다면 북한은 100% 멸망했을 것이다., 북한이 살아남은 건 중국의 지원이 제일 큰데, 이런 대치 상황에선 국력을 온전히 6.25 전쟁에 올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중국이 6.25 전쟁에 병력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중화민국을 쫒아내는 데 성공하고, 티베트와 위구르도 점령한데다 남부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 2차 국공내전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중국에서의 거대한 대치 상황 때문에 중공은 한반도에 개입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김일성도 한국 침공을 단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8월 종파 사건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현재의 북한이 김씨 일가 독재체제가 된 것은 휴전 이후 김일성이 적화통일 실패의 책임을 물어 연안파와 소련파를 대거 숙청했기 때문이다. 6.2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김일성이 누굴 숙청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력이나 명분이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고, 초기 북한의 집단지도체제가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훨씬 정상국가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쩌면 동구권 붕괴 때 민주화에 성공하면서 한국과 평화통일에 성공했을 수도 있다.
- 인도차이나 반도에 널리 퍼진 공산화 위기감이 한층 낮아졌을 것이다. 특히 베트남 전쟁에선 북베트남이 아닌 남베트남이 이겼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북베트남이 이렇게 영향력이 커진 것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받은 게 상당했고, 미국이 북진금지를 한 것도 바로 중국과 또 다른 분쟁이 터질 우려가 높았기 때문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만약 양쯔강에서 국민당이 방어에 성공했다면 베트남은 현재의 사회주의 공화국이 아닌 남베트남의 후신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비슷한 시기에 공산화가 된 라오스와 캄보디아 등 역시 마찬가지로 공산화에서 벗어나거나 최소 지금과는 다른 사건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대혁명은 북중에서만 일어났을 것이고 남중에서는 문화대혁명과는 관계없이 문화재들이 대부분 보존되었을 것이다. 다만 내분을 틈탄 침공을 우려해서 문화대혁명까지 이르게 되는 뻘짓을 서로 자중해서 일어나지 않거나, 문화대혁명 발생 초기, 중기쯤에 점령당해서 파멸적 결과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공산도 크다.
-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 더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고, 마카오 역시 포르투갈의 보호령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된다.[39] 다만 조약대로 기간이 지난 후에 도로 중국(중화민국)에 복귀할 가능성도 있다. 홍콩 섬 자체는 영국에 할양하였으니 계속 유지될 수 있겠지만 섬 단독으로 경제를 꾸려가는 것이 힘든 만큼 무리를 하지 않는 이상 결국 돌려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90년대 말에서야 홍콩과 마카오가 반환된 이유부터가 그 이전까지는 죽의 장막으로 유명한 폐쇄적인 나라였던 중국이 서방 국가와의 대화창구로 써먹을 겸, 이 두 도시를 인질삼아서 이런저런 외교 분쟁에서 서방 측에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 고의로 반환을 거부한 탓이 컸다. 그랬던 것이 냉전이 끝나서 더 이상 이렇게 할 필요가 없어진 중국 측에서 그제서야 홍콩과 마카오에 대한 반환 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만일 중화민국이 중국을 통일했으면, 같은 친미, 친서방 국가인 만큼 이 두 도시에 대한 반환 협상이 좀더 일찍 성사되었을 것이다. 물론 마카오는 당시의 종주국인 포르투갈의 독재자인 안토니우 살라자르가 해외 식민지들을 놓지 않으려고 머리 굴리던 것을 생각하면 바로 반환받기는 어려웠을테지만, 역시 본국에서 너무 멀고 포르투갈이 중화민국한테 군사적으로 밀린다는 점에서 인도가 역시 포르투갈령이던 고아를 무력으로 되찾은 것처럼, 중화민국군이 무력으로 마카오를 점령했을 공산이 크다. 아니면 광저우만 처럼 90년대 이전에 중화민국에 반환되었을 수도 있다. 특히 포르투갈의 경우 카네이션 혁명 이후 중국에 마카오를 지속적으로 반환하려 하였지만 중국이 외교적 고립으로 인해 마카오를 외교 창구로서 두고 싶어 하였기에 90년대 이전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 티베트, 위구르는 몽골처럼 독립국이 될 것이다. 다만 이 둘은 중화민국 및 중화인민공화국 둘다 중국 영토로 여겨지고 있었고 세계에서도 미승인국이었기에 남북중국이 계속해서 종주권을 행사하여 하나의 중국을 유지하려 들었을 것이다. 다만, 남중과 북중 간에 내전과 대치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 먼 곳까지 관할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다. 티베트와 위구르는 소련과 북중 및 남중, 그리고 인도 간의 분쟁을 막기위한 완충국 정도의 지위는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중, 위구르는 위치 상의 이유로 북중국과 소련의 영향을 받아서 공산화가 되거나, 최소한 그 정도는 아녀도 친소나 친중 성향의 정권이 들어섰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완충국 역할을 하는데 실패했다면, 위구르의 일부 또는 전체가 소련의 구성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 미국-중국 패권 경쟁도 현재처럼 격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심해진 건 제1위,제2위인 것도 있지만, 둘 사이의 정치성향이 너무 다른 것도 있다. 만약 분단이 되었다면 현재의 미국-러시아 관계처럼 패권경쟁은 있겠지만 격렬하진 않았을 것이다.
일단 공산당이 재건에 성공하여 중국이 분단했다는 가정을 적용한 경우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이다. 여기서는 1935년 옌안에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를 포함한 마지막 공산당 잔당이 모두 국민혁명군에게 사살됨에 따라 제1차 국공내전이 종결되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국민당의 실정과 굴욕 외교 덕택에 유리한 재기 조건을 갖춘 뒤, 류사오치와 펑더화이가 1950년 11월 신장에서 '신장 소비에트'를 결성하여 간쑤성 등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1953년 4월에 제2차 국공내전이 벌어졌다. 실제 역사에서처럼 국민당은 개털려서 베이핑과 톈진을 잃었고, 1956년 2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산둥성의 교주만과 관동주, 만주국을 영유하고 있던 일본 제국이 "황허 남쪽에서도 전쟁하면 우리도 참전함!"이라고 위협(소위 ' 도조 선언')하자 결국 공산당이 협상에 응하면서 마침내 그 해 7월 6일 허난성 정저우에서 황허를 경계로 한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그리하여 소설의 배경인 1987년 현재 중국 대륙은 황허 남쪽의 중화민국, 황하 북쪽의 중화 인민 공화국, 랴오허 동쪽의 만주국, 이렇게 3국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중화 인민 공화국의 통일 정책 및 만주국과 중화민국에서 전개되는 학생 운동권의 통일 운동이 지속되면서 대륙 통일을 향한 열망이 뜨거워지고 있다.
한편 라이트 노벨 풀 메탈 패닉에서는 대체역사 배경으로 남중국과 북중국으로 나누어져 있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의 경우 원역사처럼 장제스의 무리한 만주 진공으로 대차게 말아먹으면서 공산당에게 승기가 넘어가자 미국의 주선으로 UN이 휴전을 제의하는데 승기를 잡은 공산당이 휴전 제안을 거부하자 우한에 원자폭탄을 투하해[40] 공산당을 강제로 협상장으로 끌어내면서 장강을 경계로 분단된다. 장제스는 군벌들의 내분과 내정의 무능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거센 민주화 시위에 하야하지만, 중공의 대약진 운동의 여파로 혼란이 거세지고 군벌들이 준동하자 그의 복귀 여론이 다시 거세져서 복귀, 군벌들과 피터지게 싸운 끝에 드디어 절대 권력을 얻는다. 중공의 혼란을 틈타 유진 킴의 조언대로 3S 정책을 펼쳐서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도 성공하지만 반대로 북중국은 마오쩌둥이 남중국을 빠르게 따라잡겠다고 대약진 운동을 하는 바람에 분단이 고착화된다.
5. 1949년~, 중화민국의 국부천대 미실시
1949년 2월 장강 방어선도 무너지고 난징시가 함락되자, 국민당은 처음에는 타이베이시로 가지 않고 청두시에 눌러 앉으려고 했다. 즉 쓰촨성, 윈난성, 구이저우성 등을 기반으로 대륙에 잔류하며 중원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치하는 천하이분지계인 것이다.5.1. 중화민국 생존 성공시
타이완 섬 대신 쓰촨성이 중심지가 되었을 것이며 수도는 청두였을 것이다. 그에 따라 지금과 같이 중국 본토인과 구별되는 대만인이라는 정체성은 옅었을 것이다. 물론 섬 지역의 특성상 내륙인들과는 좀 다른 지역색이 강했을 테지만 적어도 " 나는 중국인이 아닌 대만인이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실의 중화민국보다는 적었을 것이다.다만 중국 서남부 지역은 대만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중화민국이 중국 서남부+대만으로 구성된다면 중화민국 본토와 대만 사이의 단절 현상이 심각해졌을 것이므로 대만 지역의 독자적인 정체성은 오히려 현실의 중화민국과 비슷했을 수도 있다. 심지어 대만에서 중국 서남부로 가려면 적대관계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영공을 지나야 하므로 항공을 통한 교류도 인도-동남아를 거쳐 빙빙 돌아가야 겨우 가능할 정도가 되어 대만 지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홍콩, 마카오와 유사하게 높은 자치권을 보장하는 형태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하이난까지 차지했다면 하이난 지역도 대만 지역과 유사했을 것이다.
또한 대륙의 분단이 지속되면, 중국 서남부 지역의 중국인들이 '사천인'이나 '서남인'으로서 지금의 대만인들과 비슷하게 중원의 중국인들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다. 또한 중국 국민당이 미국, 영국, 포르투갈, 티베트, 위구르 등의 지원을 얻어가며 중공과 맞서서 북쪽으로는 중원을 도모하고 동쪽으로는 중국 중남부 내륙을 엿보며 동남으로는 중국 동남부 연해지대를 노려 제2의 북벌과 반공 대륙을 시도했을 것이다.
외국에서 부르는 국호의 경우 서남부 지역만 차지한만큼 남중국-북중국으로 불리기에는 무리가 있고 서남부 지역의 대표적인 지역인 쓰촨으로 불릴 가능성이 높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서남부를 제외한 중국 영토와 인구의 80% 가량을 차지하는만큼 중국으로 불릴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중국-쓰촨(사천)으로 대응되어 불릴 것이다. 다만 양안관계라는 단어는 사용이 불가능한만큼 양국의 관계는 '양중관계'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한국에서는 주로 사천으로 불렸을 것이다.
중국 서남부의 인구/영토를 고려하면 대만만 차지한 작은 섬나라인 현실의 중화민국보다는 국력이 훨씬 강해지므로[41] 국제적으로도 중화민국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UN상임이사국 자리는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내주더라도 UN가입국 지위나 다른 국가들과의 수교 정도는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이같은 중국 분단의 정세는 남북으로 이념대립 중이었던 한반도에서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중화민국과의 대립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이 불확실해진 상황에서 김일성이 남침을 주저할 것이므로 6.25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남침을 강행할 경우 중공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북한이 와해될 수도 있다.
티베트, 위구르의 경우 아래의 중국의 남북분단 시나리오와 유사하게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과의 대립으로 미처 흡수하지 못해서 독립을 유지할 가능성이 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 서남부를 제외하면 상당수 국력을 보존하게 되므로 아래의 중국의 남북분단 시나리오 때보다는 독립 가능성이 낮다. 또한 중화민국(사천)의 국력이 티베트, 위구르의 흡수를 도모할 정도는 되지 못하는만큼 중화민국(사천)이 티베트, 위구르와 연합해서 중화인민공화국에 대응하는 형태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
5.2. 중화민국 생존 실패시
이 경우 중화민국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을 것이다. 타이완섬은 바다 너머 있었기에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쓰촨성은 남쪽에 베트남 민주 공화국, 북쪽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있어 고립당한다.윈난 성과 쓰촨 성에 국민당군이 상당수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죽지세로 밀린 끝에 버마와 태국 국경선을 넘어서 피난가게 되므로 이들 지역으로 수도를 옮겼다면 피난 과정에서 와해되거나 지배 영토가 하나도 없는 망명 정부 수립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내륙 깊숙이 있어서 유사시 미국이 항공모함 등으로 도와주러 오기 매우 어려운 지역이다.
쓰촨 지역으로의 피난이 위험요소가 많았던 걸 고려하면, 국민당의 대만 이전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1930년대 중국공산당이 장강 이남 지역에 건설했던 해방구 중화 소비에트 정권이 국민당군의 공격으로 무너지자, 홍군 주력부대가 서쪽으로 도피하는 와중에 중국공산당 내에서 최종목적지를 두고 마오쩌둥은 산시성, 장궈타오는 쓰촨성을 주장하면서 내분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이때 쓰촨성으로 들어간 장궈타오의 제1방면군은 불과 1년만에 국민당군한테 탈탈 털려서 극소수의 간부들만 거지꼴로 마오쩌둥이 자리잡은 옌안으로 도주한 사례가 있다. 물론 이 때는 군벌이 더 강한 시기긴 했지만 어쨌건 쓰촨성으로 도망간 장궈터오를 털었던 것이 다름아닌 중국 국민당이었다. 스스로 이미 쓰촨으로 도망간 세력을 털어본 경험이 있던 것이다.
이 경우 대만 섬은 국민당군의 주력이 중국 서남부에 몰리므로 섬을 지킬 병력이 매우 부족해서 생각보다 일찍 중공군에게 접수될 가능성이 높다. 대만 독립파들은 국민당 정권이 옮겨오지 않았다면 인민해방군은 대만을 자국이라 생각하지 않아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티베트 등을 생각한다면 인민해방군이 대만에 안 들어올 리가 없다. 중화민국이 21세기까지 존재하는 이유는 당시 인민해방군이 안 들어온 게 아니라 못 들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이난 섬의 경우 타이완섬에 필적하는 크기를 가지지만 불과 20 킬로미터 정도의 충저우 해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서 대륙과 가깝기 때문에 때문에 결국 중국에 넘어갔지만, 타이완 해협은 충저우 해협보다 6배 이상 폭이 넓다. 그 때문에 중화민국 정부도 힘든 피난길이 되었다.
5.3. 대만공화국 또는 미국령 대만의 선제 건국
국공내전 말기에 미국이 대만공화국미국의 주도 하에 대만공화국 수립에 성공했거나 아예 미국령이 되었을 경우에도 국민당이 망명하긴 하겠지만 이미 이때는 중화민국이 완전히 멸망하고 명실상부한 독자적인 대만의 국가가 성립되고 말았으니 타이완 민주국의 재래로써 신생 대만인이나 난민(...)으로 대우 받게 된다. 이에 따라 국민당 망명인 출신인 외성인보다 대만 현지인인 본성인이 더 빨리 득세하여 외성인 우위의 관계가 역전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건물 하나라도 얻어서 임시 정부를 수립하긴 하겠지만 대만공화국이 됨으로써 본토 수복이란 명분이 상실되고 또 괜히 대륙을 자극했다간 대만국 혹은 미국령 대만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별 행동을 못할 가능성이 크다. 기껏해야 대륙에서 가져온 유물들로 일종의 관광사업을 하는 정도. 그리고 이때의 중국은 국민당 정부로서의 대만이 아닌 미국 보호하의 대만국, 특히 미국령 대만과 대치한다면 진먼 포격전 같은 무력도발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될것이다. 대신 중국 측에서 간첩 등을 파견해서 미국령 대만인들을 선동하는 게릴라 작전을 펼칠 수도 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만이 유일한 중국으로 남았기에 중화민국의 계승 국가로 인정받아 UN 상임이사국 자리를 손쉽게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생 대만국은 중화민국의 영향에서 더욱 완전히 벗어나 대만의 독자적 국가로써 대만, 대만인으로써의 정체성이 더 빨리 발양 확립되기에 여전히 남아있는 외성인(국민당)을 비롯해 대만의 정체성 문제로 인해 현재의 중국-대만과의 양안관계 및 대만 독립운동이 미국까지 끼어들은 문제로 훨씬 복잡해질 것이다. 지금의 "대륙 VS 국민당/민진당"이였던 것이 "중공 VS 대만공화국 or 미국령 대만 VS 대만 독립운동세력 or 국민당 망명정부"으로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단, 국민당의 경우 2.28 사건을 일으킨지라 대만에 정착할 경우 오히려 분노가 가시지 않은 대만인들의 테러 대상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영토 그런 거 없이 괌 등지로 망명해서 건물 하나를 얻어 망명 정부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때 중공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대만이 미국의 괴뢰국이라거나 홍콩과 마카오처럼 식민지로 점령당했다는 주장을 했을 것이고 미국과 수교할 시기에 대만 반환 약속을 협상 조건으로 걸어 미국령 대만을 똑같이 특별행정구로 돌려받아 완전한 중국 통일을 이룰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어도 범록연맹 같은 독립파가 존재하겠지만 홍콩의 우산 혁명에서 보듯 큰 위세를 발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만공화국이거나 미국이 대만을 독립시킬 경우 중화민국이 아닌 대만국이 현재처럼 미승인국으로 대치했을 확률이 높다.
또한 홍콩이 영국물을, 마카오가 포르투갈물을 먹었듯 대만도 한국, 서독이나 하와이, 괌, 오키나와처럼 대만 고유문화와 미국 문화가 혼합되고 더 나아가 대만인 역시 미국인들과 혼혈된 지역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미국이 넘긴다는 것도 웃긴 것이 국교수립할 시점에서 중국은 핵보유국이고, 미국의 패권을 위협할 수 있는 강대국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오키나와의 미군시설이 여기로 다 몰리고, 홍콩의 기능도 빼앗아 경제적으로 부유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놔두는 것도 미국의 능력을 우습게 보는 셈이다.
6. 1950년, 중화민국의 하이난 섬 방어 성공
대륙에서 국공내전이 거의 마무리되는 1950년까지도 하이난 섬은 중화민국이 통치했다. 대만 섬도 그렇지만 당시 인민해방군의 빈약한 해공군 전력으로 바다 건너의 섬을 공략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민해방군이 1950년 4월 16일에 민간어선 수백 척을 동원하여 하이난 섬에 상륙하여 공세를 벌이고 결국 중화민국군은 철수했다. 이곳을 접수한 다음 최종 목표가 바로 대만 섬 점령이었는데 미국이 대만 해협에 군함을 파견하고 6.25 전쟁이 터지면서 대만 진공을 무기한 보류했다. 하이난이 몇 개월만 더 버텼다면 지금 와선 대만과 같이 공산화를 피할 가능성도 있었다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 본토와 하이난섬을 가르는 충저우 해협은 폭이 약 30km 정도로 타이완 해협에 비해 크게 좁아서, 해군이 거의 없다시피했던 인민해방군도 민간 어선을 징발해 건너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난보다 훨씬 작은 진먼 섬을 지켜낸 진먼 전투처럼 국민당군이 분전해서 하이난 섬을 지켜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하이난 섬은 섬이긴 하지만 대만 섬보다 훨씬 대륙과 가깝기에 중공의 공격으로 인한 분쟁 충돌로 지속적인 하이난 포격전을 겪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작은 섬인 진먼과 달리 하이난 섬은 중화민국 영토의 절반에 가까우므로 하이난 섬을 공격하는 것은 사실상 중화민국(+ 미국)과의 전면전 또는 국공내전의 재개를 뜻하므로 진먼만큼 쉽게 공격하진 못했을 것이고 오히려 평화로웠을 수도 있다.
하이난 섬이 중화민국 휘하에 남았다면 대만과 함께 중화민국의 양대 중추지로 남아 있었을 것이고 중화민국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당장 중화민국의 실질 강역만 해도 배로 커진다. 한편 하이난 섬은 당시 광둥성에 속해 있다가 중공 치하에서 1988년 하이난성이라는 별개의 성으로 승격되었지만 만약 중화민국 휘하에 남았다면 대만 섬과 함께 양대 중추지가 되므로 1950년대 쯤에 하이난성으로 좀더 일찍 승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중화민국 치하에서 하이난은 광둥에서 분리되어 특별행정구로 있었다. 또한 중국의 경우 화동, 화남 연해 해안가 및 남중국해가 대만-해남의 중화민국에 봉쇄까지는 아니지만[42] 중화민국군과 미군이 하이난 섬 일대에서도 활동하게 되므로 해양 진출이나 중화민국, 미국과의 대치에서 중국이 현재보다는 약간 더 불리해졌을 것이다. 다만 중화민국 입장에서도 하이난 섬은 지키기 까다로운 지역이 되는데 대만섬보다 훨씬 중국과 가까운데다가 진먼과는 달리 인구도 대만섬의 절반 정도로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유사시에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이난 섬에 대한 안보 위협으로 인해 중화민국, 특히 하이난 섬 지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오히려 커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대만인이라는 의식은 더 엷었을 것이며 중화민국의 정체성이 더욱 강했을 것이다. 현실의 중화민국에서는 대만 이외의 중화민국 실질 영토는 매우 작아서 그 지역들이 거꾸로 대만에 동화되고 있는데[43], 비대만 영역이 상당히 커진다는 의미이니. 한편 거의 비슷한 크기의 멀리 떨어진 두 섬이 하나의 나라를 구성하는만큼 하이난과 타이완 사이의 지역감정이 커질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집권을 유지하기는 어려우므로 대만과 하이난의 연방공화국으로 전환할 가능성도 있다. 수도의 경우 인구가 2배 가량 더 많고 면적도 약간이나마 더 넓은데다 중국과 거리가 있어 안보적으로 유리한 대만 지역에 있겠지만 현실의 중화민국과는 달리 타이완-하이난 간 교류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대만섬 북부의 타이베이시가 아닌 하이난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타이난시나 가오슝시로 정해질 수도 있다.
하이난의 경우 지리적으로 중국과 매우 가까운데다 역사적으로도 중국의 귀속된 시기가 대만보다 훨씬 길며 대만처럼 50년간 일본의 식민지로 지내며 중국대륙과 별개의 역사를 가진 시기가 있지도 않았으므로 현실에서의 대만의 푸젠성과 유사하게 중국과의 교류를 지지하고 독립에 반대하는 성향이 강했을 것이다. 즉, 범람연맹의 텃밭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독립운동의 양상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중화 정체성을 부정하는 강경파는 대만-하이난 연방 공화국으로의 '독립'을 주장하는 파와 개별적인 대만 공화국, 하이난 공화국으로 분할 독립을 주장하는 파로 세분화되었을 듯하다. 독립성향은 하이난보다는 대만이 더 강했을 것이다.
하이난 섬을 유지함으로써 중화민국의 영토는 2배, 인구는 1.5배 가량이 되므로 국력이 대만만 차지했을때보다는 더 나았겠지만 결국 중화인민공화국보다는 훨씬 약한건 매한가지이므로 UN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건 마찬가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하이난의 존재감이 진먼, 마쭈보다 훨씬 크기에 국제적으로 '타이완'이라고 불렸을 가능성은 낮고 유력한 이름은 '타이완-하이난'이다. 한국에서는 '대만-해남'으로 불렸을 수도 있다.
또한 양안전쟁 발발시 지금보다 중화민국에 훨씬 유리할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자신들의 바로 코앞에 있어 자신들을 겨눌 비수가 될 하이난 섬을 놔두고 바로 대만을 칠 가능성은 낮을테니까. 아무리 중공이라해도 자유진영에 속해있는 인구 1000만[44]의 하이난 섬을 점령하려면 상당한 국력과 시간이 소모될 것이고[45] 그 동안 미국 등 범서방 진영은 중화민국을 구원할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대신 이렇게 되면 양안전쟁에서의 최전선은 대만이 아니라 하이난이 될 것이다.
또한 중화민국(의 하이난 섬 지역)과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외교관계 및 교류가 더욱 활발했을 것이다. 냉전시기에는 공산국가들과와는 군사적인 대립이 있었을 수도 있다. 특히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이 하이난 섬을 북베트남을 공격하는 전초기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고 베트남 전쟁이 실제 역사보다 미국, 남베트남에 유리해졌을 것이다.
7. 1951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완전 승리
중국이 양안통일( 적화통일)된다면 타이완성은 고스란히 중공에 접수된다. 자유진영 방어선 중 하나인 대만이 사라져서[46] 대한민국, 일본에 대한 미국의 원조가 실제 역사 이상으로 커졌을 것이다. 중국은 해양진출에 거리낌이 없어져 동남아시아까지 공산화 위협에 맞닥뜨렸을 것이다. 원 역사에서 공산화를 경험했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뿐만 아니라, 태국이나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까지도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1]
자주색(소련)+붉은색(공산당) vs 하늘색(미국)+파란색(국민당)
[2]
다만 중화민국이 티베트를 침공해서 합병에 성공했어도,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했을 가능성은 훨씬 낮다. 중화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처럼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 탄압은 덜했을 것이고(티베트 불교는 티베트인 뿐만 아니라 한족, 만주족, 몽골족들도 믿는 종교다보니 티베트 합병 자체에는 찬성해도 달라이라마나 판첸라마를 숙청하는건 찬반이 다소 엇갈렸을 것이다.) 중국 내에서 종교 지도자 지위만 보장받아 이어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
[3]
리영희는 말년에 자신의 정보부족으로 오판했었다고 사과를 하긴 했지만, 별 반향은 없었다.
[4]
간단히 요약해서 2차 세계대전 발발 무렵까지 기아로 인해 수백만 단위 사망자가 튀어나왔다. 중국판
한강의 기적 같은건 절대 아니었다는 소리.
[5]
조지프 스틸웰과
장제스의 알력 다툼도 이 점에서 비롯되는데, 국민당 치하 중국은 봉건제 국가마냥 장제스가 군벌들을 적당히 돈과 군사력으로 구슬려 자기 아래에 묶어놓은 형태였다. 당연히 돈이 줄줄 샌다. 역사가 레이 황은 아예 중세국가라고 평했을 정도.
[6]
일례로 국민당군에서 복무한 적 있는 역사학자 레이 황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거시적인 시각에서 장제스와 국민당이 중국의 상부구조를 만들었고, 마오쩌둥과 공산당이 하부구조를 다시 꾸렸으며, 덩샤오핑과 그의 추종자들이 개시한 경제개혁이 상부와 하부의 제도적인 연결을 다시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누가 정권을 잡으면 중국이 훨씬 더 빠르게 발전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주장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
[7]
설렁 김일성의 고집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다고 해도 홀로 고립된 북한이 현실처럼 분단되는 무승부를 거둘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우며 북진통일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8]
국부천대 2년 전인 1947년에 미군정의 정치고문이었던 조셉 제이콥스의 한국이 앞으로도 정치적 미숙성으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이 활개치고 다닐 게 뻔하며 제대로 발전하는 것을 기대할 수가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당연히 극동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아주는 데 일조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치도 없어서 미국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니까 쓸데없이 원조하지 말고 그냥 손절하자는 내용의 보고서가 미국 내각회의에서 트루먼에게 보고되었고 육군장관 로버트 페터슨은 딘 애치슨에게 한국은 자원도 없는데 그따위 지원해봤자 효과도 별로 없을 나라를 원조하자고 하면 국회가 반대할 것이고 미국이 다른 데 쓸 예산까지 축소당할 우려가 있다면서 한국에 대한 원조를 반대하며 주한미군도 한반도에서 최대한 빨리 빼버리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출처:대한민국의 기원, 이정식 출판사 일조각
[9]
한 예시로 필리핀은 화교가 전체 인구의 1.3%에 불과하지만 경제의 60%를 장악하고 있으며 경제 사정이 더 좋은 인도네시아도 전체 인구 4%에 불과한 화교가 경제의 80%를 장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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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반도를 중국대륙과 똑같은 색으로 칠해놓은 지도를 만들던 것은 물론 지배층만이 아닌 지식인들도 한반도는 일본에게 빼앗긴 중국의 고유영토이니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11]
다만 신탁통치는 흔히 하는 오해와는 달리 영토를 빼앗거나 식민지로 만들려는 것과는 별 연관이 없으며 실제로도 신탁통치를 실시한 지역이 신탁통치국에게 병합된 사례는 전무하며 신탁통치국들은 경제적 부담때문에 빨리 신탁통치를 끝내고 싶어한 것이 현실이다.
[12]
또한 어차피 통일 중화민국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아 위성국화될 대한민국을 굳이 섬 몇개 얻겠다고 반 중화민국 감정을 고조시켜 위성국으로 만드는 난이도를 높이는 것은 실리적이지 않으므로 제주도나 울릉도, 독도를 중화민국이 가져갔을 가능성은 낮다.
[13]
실제 역사에서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은 중국과 무난한 관계였다.
[14]
친미하고 친중하고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중화민국이 공산당 1당 독재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친미 성향의 정치인들이 친중성향의 정치인들에게 공산당이니 빨갱이니 공격을 할 수가 없다. 더구나 중화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달리 미국과 비슷한 체제의 국가이고 사이도 나쁘지 않았으므로 중국이 패권국으로 떠오른 21세기라면 모를까 적어도 냉전 시기에는 한국 정치에서 친미가 반중으로 이어지거나 반중이 친미로 연결되지지 못했을 것이다. 냉전 이후에도 친중과 친미를 겸했겠으나, 아무래도 친중성향이 더 강하게 나타났을 것이다. 미국이 한국인들이 거부하는 친일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고, 중국이 미국보다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현재 한미동맹급으로 우호적이지는 않고 그냥 평범한 우호관계였을 것이다.
[15]
장제스가 국공내전 승리 후 한반도를 중국의 일부로 합병했을 거라는 얘기도 있으나, 대한민국이 독립되도록 결정적으로 도운게 장제스 본인이였다는걸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갓 내전이 끝나서 중국 내부를 정리하는 것도 벅찰 뿐만 아니라, 굳이
친중 성향을 보였던 대한민국을 합병해봤자 반중정서만 키우고 역효과만 났을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한국의 민주화 세력을 친중으로 만들어서 한국인들을 괴롭히던 군부독재를 몰아내고 한국을 계속 반일친중 국가로 놔두는게 중화민국 입장에서 외교적으로 더 이득이다.
[16]
역사적으로 중국에 있던 국가들이 한반도에서 독재를 하던 군사정권이나 군사쿠데타를 곱게 본 사례는 드물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하자
이세민이 왕을 시해하고 하극상을 했다는 이유로
여당전쟁을 일으키거나,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여요전쟁을 일으켰었고,
여몽전쟁 또한
최씨 정권이 대몽항쟁을 이어가자 침공한 것 등. 예외가 있다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나
무인정사 정도다. 다만
제3차 요동정벌이 증명하듯 이성계 역시 뒤에서 매우 경계했다.
[17]
민주주의 체제의 사례는 아니나, 19세기 중후반 이전 조선시대 붕당정치가 치열하고 보복이 심했던 이유 중 하나가 조선과 중국 왕조들의 관계가 조용했기 때문이였다.(물론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전쟁은 있었으나 단기전이였고, 청나라가 중국 통일을 한 이후로는 친명이니 친청이니 특정 외세를 가지고 당파 싸움이 크게 일어나진 않았다.) 현재처럼 중국이라는 외부위협이 없었으니 양 진영이 적국에 부역한 매국노니 부역자니 이러면서 당쟁을 벌이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고 국론을 모으는게 극히 어려웠다. 그랬기 때문에 국민당이 독재를 이어가든 포기하든 한국의 민주화세력을 지원해서 잠재적 안보위협을 제거해려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18]
미국의 경우 반독재 감정 때문에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을 실제로도 그리 안 좋아했고, 김영삼과 김대중 같은 민주화 세력이 있었는지라 굳이 좋게 볼 이유가 없다.
[19]
박정희, 전두환 모두 반공성향의 독재자인데 소련 입장에서 좋아할리가 없다. 특히 박정희는 소련 앞마당에서 핵개발을 시도하려 했으니 소련은 박정희를 당연히 소련의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봤을 것이다.
[20]
박정희가 옹호받는 이유 중 하나인 개발독재 같은 경우는 어디까지나 불법 쿠데타 이후의 행적이기 때문에 확실한 집권명분이라 보기 힘들다. 박정희가 쿠데타 이전에 유명했던 독립운동가도 아니요, 6.25 때 앞장서서 나라를 구한 전쟁영웅도 아니고, 통일의 주역도 아니였다. 대중에게 각인된 인물이 아니였으니 쿠데타 이전에 전국민적 영웅이라는 이미지가 생길리 없다. 장제스와 비교해도 박정희의 정치적 입지에는 한계가 있는데, 장제스는 집권 이전에 쑨원의 후계자라는 타이틀과 중국 통일등을 통해 전국민적 입지를 이미 갖고 있던 상태였으니 장기집권이 가능했던 것이다.
[21]
우습게도, 비슷한 예가 박정희, 전두환과 반대 진영의 독재자였던 스탈린인데, 스탈린 역시 경제 발전과 독소전쟁등의 성과가 있으나 그건 그가 그 당시 독재를 해서 가능했던 성과들이였기 때문에 면죄가 되지 못한 것이고 그래서 흐루쇼프에 의해 격하당한 것이다.
[22]
만약 중화민국이 대륙에 건재한 상태에서도 대한민국에 군부독재정권이 나타났다면, 이집트의 경우보다 더 심각했을 것이다. 이집트는
가말 압델 나세르,
안와르 사다트,
호스니 무바라크 등 군부독재자들이 계속해서 대통령을 이어가고 있으나, 이들이 장기집권이 가능한 이유는 아랍의 불안한 정세와, 중국이나 소련 같은 강대국들이 지정학상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못하며, 외교적 스탠스도 미국과 소련을 왔다갔다 하는 등 동맹에 구애받지 않고, 결정적으로 모두 박정희와 전두환보다는 국민적 입지가 탄탄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나세르의 경우 박정희처럼 쿠데타로 집권했으나 박정희처럼 식민 당사국이였던 영국에 부역한 적은 없으며, 쿠데타 대상이였던
파루크 1세 역시 답이 없을 정도의 부패하고 무능의 끝판왕 군주라 쿠데타가 일어나 폐위를 안당하는게 더 이상한 인물이였다. 그리고 이집트의 초대 대통령은
무함마드 나기브지만, 겨우 1년 재임한지라 사실상 이집트 초대 대통령은 나세르라고 봐야 한다. 대한민국 건국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적이 없으며,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써 건국자의 입지를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가 사실상 태종 대접을 못받는 것과 대조된다. 사다트 역시 나세르 옆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였고 나름대로 지분이 있었다. 장기집권한 무바라크 역시 종종 이집트판 전두환이라고 불리지만 정통성 측면에서는 전두환과 비교하기 미안한 수준이다. 일단 무바라크는 부통령 신분으로 암살된 사다트의 대통령직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전두환에 비해 정통성은 탄탄했다. 군인으로서 입지도 전두환과 하늘과 땅 차이였는데, 이집트 공군을 2년만에 재건시키고
제4차 중동전쟁의 실질적 총사령관으로써 시나이 반도를 탈환했으며, 6:17의 불리한 교환비로 이스라엘 공군을 격퇴시키는 등 비교적 유능한 군인이였다. 무바라크는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도 이미 제 4차 중동전쟁의 영웅으로 한때 이집트의 국민적 영웅이였던 반면, 전두환은 6.25전쟁 때 참전하긴 했으나 학도병 신분이였으며 이후 일어난 베트남 전쟁에서도 딱히 군인다운 성과라는 걸 보여준 적이 없다.
단지 자기에게 아첨하는 인물들만 잘 통솔하는 정도의 카리스마만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전두환은 박정희 사후 합수부장이 된 이후에나 전국민한테 얼굴이 각인된 인물이다. 이집트는 군부독재자들의 경력이 한국보다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쿠데타가 빈번한 편인데, 바로 옆의 강대국인 중화민국이 건재한 상황에서, 이집트의 군부독재자들에 비해 내세울 배경이 매우 떨어지는 박정희, 전두환이 장기집권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23]
이럴 경우
박근혜는 대통령은커녕 유력 정치인도 못되었을 것이다. 애초에 박근혜가 무능함에도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인데, 박정희가 그냥 군부독재자 1호가 되어버리면 박근혜한테 갈 후광이고 뭐고 없었을 것이다.
[24]
냉전 문제를 빼고 보더라도 일본을 계속 점령하고 있는 것보다는(차라리 아예 병합해버리면 모를까, 미국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빨리 친미국가로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훨씬 싸게 먹히고 이득이 된다.
[25]
한동안 일본 정치에 미국의 입김이 강했을 수는 있겠으나, 점령에 드는 비용이 끝없이 불어나는건 미국입장에서도 좋은게 아니라 아무리 늦어도 50년대 초중반에는 군정이 끝났을 것이다. 원역사보다 수십년이 늦춰지거나 그런건 아닌 셈.
[26]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에 중공산 제품을 싸게 사는 대신 나중에 갚으라고 차관까지 제공하면서 일본이 중공에게 동남아 시장을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긴장하게 하는 기염을 토했다,
정작 납기일부터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품질도 개판이라 흐지부지되었으며 일본은 섬유를 넘어 라디오와 TV같은 전자제품과 자동차도 수출하는 수준까지 발전했지만.
[27]
우습게도 현실 역사에서는 닉슨이
핑퐁 외교의 일환으로 갑자기 방중을 발표하여 일본에게 통수를 쳤지만 그래도 미국은 일본은 소련 편에는 안 들어갈 거라고 예상했던 적이 있었다.
[28]
물론 실제로 이렇게 되었다면 중화민국이 소련에 대량으로 경제원조를 해줘서 소련 붕괴가 늦춰지거나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가능성도 있는데 여러모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대중국 경제의존도가 대단히 높아지고 있으며 나중에는 중국의 경제식민지가 될 수도 있다는 예상이 나오고 있는 러시아와 비슷한 양상이 될 것이다.
[29]
이렇게 되면 1990년대 냉전 종식과 미국의 단극체제 구축은 어려웠을 것이다. 일단 중화민국이 실질적으로든 명목상으로든 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했을 것이기에, 중화민국에 경제 압박을 가하는 것은 미국이 주장하는 민주주의적 가치 보호에 정면으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 압박의 결과로 중화민국에서 반미정권이 민주적으로 들어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이 민주주의 체제였음에도 미국이 일본에게 플라자 합의를 강제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이 미국에 종속되었기 때문인데, 중화민국은 그런 경우도 아니였기에 중화민국이 미국보다 군사적으로 열세라 한들 군사적으로 압박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20세기 초반부터 외교관계를 이어온 미국과 중화민국 특성상 시간이 흐를수록 교역 규모도 증가했을 것이고 아무리 세계 최강국 미국이라한들 폭발적으로 성장한 중화민국과 갑자기 연을 끊었다면 미국 또한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결국 명분이 없어서 미국은 중화민국이 성장하는걸 두고 볼 수 밖에 없다. 만약 공산권이 중화민국의 경제 지원에 힘입어 현재까지 지탱되었다면, 미국은 공산권 견제비용과 공산권 국가들의 경제부담비를 동시에 지출하는 모순된 상황을 맞이했을 것이고(즉, 공산진영 국가들이 중화민국을 통해 미국의 지출에 간접적으로 기생하는 형태로 살아남았을 것이다.), 고로 미국의 지출이 실제 역사보다도 높아 단극체제를 달성한다하더라도 지금보다 유지가 힘들었을 것이다.
[30]
공산당이 없었다면 원래는 그 이후의 문제였을 소련이라든가, 만주라든가, 신장 자치구라든가, 북한이라든가 다른 걱정거리가 대두되었겠지만.
[31]
반대로 장제스는 류쿠 독립 혹은 중국 이양을 원했지만 미국 측에서 거절했다는 말도 있다.
[32]
중화민국이 실제 역사처럼 1945~1947년 동안 뻘짓하며 중원을 다 잃어버렸지만, 1948년 장강을 둘러싼 난징 공방전에서 전세를 고착화시키는 데엔 성공했다는 가정.
[33]
이 지도에 티베트 지역과 위구르 지역은 빠지게 된다.
[34]
그러나 남명은 단명했는데 1년만에 중국 역대 남조 국가들의 핵심지역인 남경을 빼앗기고 이어서 복건성 일대도 내주는 바람에 도망자 집단으로 전락했으며, 급기야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는 버마(미얀마)로 망명했다가 오삼계에 의해 송환당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35]
유럽은 아무래도
중국어 교육이
간체자 중심이지만
미국은 중국과 수교한 지 40년이 넘었음에도 간체자 일변도의 교육을 하진 않는다. 간체자와 정체자와 공존하는 편이다. 그러니 외교 관계라는 것이 어찌 보면 절대적이진 않다. 대만을 봐도, 미국과 단교 후에 미국식 영어 교육을 폐기하면서 외교 관계가 있는 벨리즈, 마셜제도, 세인트빈센트그레나딘 같은 나라가 쓰는 영어로 교육 방식을 바꾼 것이 절대 아니다. 계속 미국식 영어 교육을 유지한다. 바티칸(중화민국의 수교국) 박물관 역시 중국어 안내에서 간체를 사용한다.
[36]
물론 단정할 수 없다. 해당 사진처럼 분단이 이뤄질 경우 양쯔 삼각주부터 후베이까지의 내륙 수운이 파괴되고 난징-상하이 일대는 최전선으로 전락한다. 전통적인 경제-물류 중심지가 파탄나고 국토가 분단되는 지경에 이르며 안보 압력도 극심해지는데 해양 진출로가 있다고 발전이 훨씬 가속화되라라 장담하긴 어렵다.
[37]
베트남 같은 경우도 서구와 연을 끊은 통일 직후에는 사실상 최빈국이었다. 개혁개방 후 서구 자본을 받아들이고 자본주의 논리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그나마 현재 수준까지 올라온 것이다.
[38]
그러나
중소결렬 이후 적성국에 가까운 사이였고, 그 이전에도 베이징과 모스크바의 관계는 우방이라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역으로 소련이 북중국을 종속시키는 이점을 누릴 수도 있다.
[39]
동아시아 유일의
영국 영토인 홍콩은 실제대로
1997년 중국에 공식 반환되었고 마카오 역시
1999년 말쯤에 반환되었다.
[40]
일본 본토 공습에 시달린 일본이 일찍 항복하면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한이 최초로 원자폭탄을 맞은 도시가 되었다.
[41]
위에서 언급된
쓰촨성,
윈난성,
구이저우성을 모두 차지했다고 가정하면 2023년 기준 인구가 1억 6천만명 정도가 되며 대만까지 합치면 1억 8천만명으로 2억명 가까이 된다.
[42]
당연하지만 대만과 하이난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영해 상으로 중국이 두 섬 사이를 통과해서 지나가지 못하는건 아니다.
[43]
예를 들자면 대만인이나 진먼인들이 진먼을 대만의 일부로 인식한다거나, 물론 자신은 절대 대만인이 아니라는 진먼 사람도 있다.
[44]
이는 현재 중국의 하이난 성 인구 기준으로 만약 중국 국민당이 하이난 섬 사수 및 유지에 성공했다면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으로 인해 중국 대륙에서 수많은 난민이 몰려들어와 인구가 지금의 하이난 성 보다는 많을 것은 확정이다.
[45]
게다가 이 시나리오에서의 하이난은 말 그대로 중공과 직접 대치하는 최전방이라서 중화민국 정부에서 작정하고 하이난 전 지역을 요새화 시킬 가능성이 높기에 더더욱. 실제로 중화민국에서 중국 대륙과의 최전방인 진먼 섬을 요새화 시킨 상황이다.
[46]
현실 역사에서는 중공이 대만 섬까지 접수하고 적화통일을 해버리려던 차에 북한의
김일성이
6.25 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로 파병을 하게 되면서 대만 침공이 미뤄지게 되었다. 거대한
타이완 해협이 대륙으로부터의 공격을 막는 장벽 역할을 하는 대만은 정크선 개떼 러쉬로도 손쉽게 점령이 가능했던 하이난과 달리 2020년대 세계 2위 규모의 해군을 확충한 현대 중공 입장에서도 제대로 된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해군이 거의 없다시피하던 당시 중공 입장에서 대만을 집어삼킬 수 있었을 확률은 낮다. 그리고
마오쩌둥이 1958년에 대만은 내부 불만을 돌리는 데 써먹어야 한다고 자신의 주치의였던 리즈쑤이한테 털어놨을 정도로 대만 침공을 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