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18:07:38

리영희

리영희
李泳禧
파일:리영희선생.jpg
<colbgcolor=#808080><colcolor=#fff> 출생 1929년 12월 2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
사망 2010년 12월 5일 (향년 81세)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
본관 평창 이씨
부모 아버지 리근국, 어머니 최희저
배우자 윤영자
자녀 딸 이미정, 아들 이건석
학력 경성공립공업학교 (졸업)
국립해양대학교 (항해학 / 학사)
노스웨스턴 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 석사수료(연수))
병역 대한민국 육군 소령 전역
직업 군인, 언론인, 대학교수, 사회운동가
언어 한국어, 일본어, 영어
종교 무종교
활동 기간 1950년 ~ 2010년
필명 호(號) : 향사(鄕史), 닉네임 : 사상의 은사

1. 개요2. 생애 및 활동3. 평가4. 논란
4.1. 문화대혁명 및 중국공산당 미화
4.1.1. 과오에 대한 인정?
4.2. 카다피에 대한 옹호4.3.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가 아니다?4.4. 기타
4.4.1. 반박
4.5. 총론
5. 조선일보와의 관계6. 저서7. 편역서
7.1. 리영희 평전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www.jeonlado.com/496_00297_28_%EB%A6%AC%EC%98%81%ED%9D%AC1.jpg

대한민국의 언론인, 사회운동가. 근현대에 태어난 세대중 드물게 이름에서 두음법칙을 사용하지 않는 인물이다.

2. 생애 및 활동

본관은 평창(平昌)이다.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 출신이다. 조선총독부 농림국의 문관으로서[1] 평안북도의 영림서(營林署)에서 삼림주사로서 근무하는[2] 리근국(李根國)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의주사범학교와 경성공립공업학교 가운데 후자를 택하게 되어 경성에서 고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50년에 국가에서 학비와 숙식비를 전액 부담하는 국립해양대학(현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였다. 항해 실습을 하다가 여수·순천 10.19 사건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한다. 진압군 병력을 수송하는 선박에서 항해 실습을 하다가 여수항까지 가게 되었다고.

항해학을 전공했으나 수업은 영 재미가 없었고, 영문학 작품에 심취하여 다수의 책들을 섭렵했다고 자술했다. 이후 경북 안동에 있는 안동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 중에 6.25 전쟁이 발발해 그 해 군에 자진 입대한 뒤 전방에서 3년 반, 전후 후방에서 3년 반 총 7년간 복무했다. 국군 장교로 임관해 통역 업무를 맡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시에 미군 고위 장교들은 사적으로 통역관들을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 고문관들과의 사이는 데면데면했다고. 오히려 여자들을 부대로 들여보내 재미 좀 보려는 고문관들의 태도와 한국인을 무시하는 모습에 격분해 권총결투를 신청한 적도 있다 한다. 그리고 이 때 목격한 민간인 학살(11사단 거창 양민 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악행과 각종 부패상을 체험한 것은 그가 훗날 진보성향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상하였다.[3]

포병이나 공병, 보병과는 달리 의무나 통역같은 특수보직은 인원이 적었기 때문에 장기복무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후방에서는 미군 의료FM을 번역하거나 국군인쇄창에서 보병장교신분으로 재직했으며, 전훈을 인정받아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나 인사기록 부실로 누락이 되었고, 소령으로 제대 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57년부터 1964년까지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를 지냈다. 5명 뽑는데 200명 넘는 지원자가 몰렸는데, 그 중 앞의 4명은 전부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 출신이고 자기가 5등으로 들어왔다 한다. 1960년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언론대학원을 연수했다. 1964년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를 거쳐 1965년부터 1968년 7월까지 조선일보와 합동통신 외신부장을 각각 연임했다.[4]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하는 내용의 사설들을 여러 차례 기고한 것이 문제되어[5] 중앙정보부로부터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후 1968년 7월 조선일보를 반강제로 퇴사하고 1971년까지 합동통신 부장을 지냈으며 위수령 등에 항의하는 '64인 지식인 성명’ 참가로 강제 해직되었다.

1980년 저서 《 전환시대의 논리》로 반공법 2년형을 살고 출소하였다.

1972년부터 한양대 문리대학교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던 중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76년 해직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지내고 1980년 3월 복직됐으나, 그해 5월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되었다. 1984년에 복직했으나 1985년 일본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독일 연방 교회사회과학연구소에서 연구하고 1987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 캠퍼스의 정식 부교수로 초빙되어 '평화와 갈등' 특별강좌를 강의하는 등 전두환 정권 내내 해외에 있어야 했다. 이후 귀국했으며 1988년 한겨레신문사 이사 겸 논설고문에 취임했다. 1995년 한양대학교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했다. [6]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을 당시 리영희는 반전운동에 적극 나섰었다.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가 함락된 직후 열린 4월 12일 ‘국제반전평화 공동행동의 날’에 집회에 참여하여 미국의 이라크 침략은 미군의 바그다드 함락으로 개전 3주 만에 성공을 거둔 듯 보였지만 이후 더 큰 재앙들을 예고 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 #

2000년대 후반부터 간경변으로 투병하다 2010년 12월 5일 81세를 일기로 서울특별시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타계. 묘지는 광주광역시의 5·18 민주묘지(5.18 묘역)에 있다.[7]

루쉰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롤모델로 삼았다. 발언이나 저술한 글들을 보면 루쉰에 대한 존경심이 매우 진하게 나타난다. 특이하게 루쉰을 한국 한자음인 '노신'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3. 평가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리영희, 『우상과 이성』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공과, 극렬한 마오주의자[8]에 친북 사상가였다는 흑역사가 공존하는 입체적인 인물. 권위주의 독재 정권 시절 정권의 논점을 조목조목 반박, 한국 현대사에서 왜곡된 국제적 사실들을 밝혀냈었다. 예를 들어 베트남 전쟁에 대해 그는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은 이념대립이 아닌 반제국주의 성향이 짙다.'고 최초로 정의내린 인물이었다. 후에도 베트남 전쟁 때의 대한민국 국군의 과오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기도 했으며 진보정부를 옹호, 보수정부들에 대해서만 전반적으로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외에도 단순한 반공논리만이 주입될 뿐 외부 정보가 거의 차단되었던 1970년대에 세계의 객관적 시각들과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소개하여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매카시즘을 조장하는 기존 방송이나 언론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중국 일본과의 외교문제나 미국의 동북아 전략 등이 국가의 통제를 넘어 제대로 소개되면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가했던 것.

이 때문에 그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 1974년작)는 당시 많은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책으로 간주되었는데, 문재인이 가장 좋아한 책으로 꼽기도 했다. 2005년 KBS 1TV의《TV 책을 말하다》에 출연했을 때 문화평론가 진중권이 같이 출연하여 과거의 자신에게 끼친 리영희 저작의 영향에 대해 강조하기도 했다. 이른바 유신시대와 5공 시대 운동권 대학생들의 '사상의 은사'였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북한에서 행해진 학살을 눈 감아주거나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남한 주도의 학살만 부각하거나, 마오쩌둥이 벌인 수많은 학살과 문화 파괴 행각은 무시한 채 중국 공산당을 미화했다. 몇 십 년이 지난 뒤에 스스로 자신의 당시 서술이 편파적이었음을 자인하기도 했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아직 리영희가 살아있던 시기( 2010년 4월 19일)부터 쓰던 평전이 있다. 다만 호평이 어느 정도 강한 것은 감안할 것.[9] 그는 리영희를 "한국의 소크라테스"로 평했다.

4. 논란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냉전기에 사상의 은사인 그의 역할은 인정하나, 과오도 상당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과거 마오이스트를 자처했다가 뉴라이트로 전향한 안병직 교수 등이 그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시장주의를 강력히 옹호하였다. 극단론자들은 '의식화의 원흉'이라고까지 그를 맹비난한다. 그리고, 반박 항목들을 보면, 단편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어떤 진단을 내려서인지 뭔가 성급하고 미래에 대한 혜안이 좀 부족해 보인다는 느낌 역시 지울 수 없다는 입장이 있고 현대에 있어 리영희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가 미래 예측이나 사안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의 부정확함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문화대혁명 옹호'의 경우, 본인이 접할 수 있었던 정보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문제점을 회피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리영희의 가장 큰 과오로 지적된다. 단, 문화대혁명의 전모와 실체에 대한 증거들이 객관적으로 공론화되고 거의 합의가 완료되기 이전, 당시 접할 수 있던 정보를 선택적으로 취합해야 했다는 당시 시점은 고려될 필요가 있다.[10]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가 쓰여진 것은 1977년이므로 21세기의 공감대를 기반으로 감정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또한, 당시(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에 국내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해 진행된 분석이 별로 없었다는 점도 옹호여론을 뒷받침한다.

리영희 스스로도 인정했던 자신의 문제점이 있다면, 다소 몽상적이기까지 한 인간주의와 정신론의 신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물질에 대해서 극도로 적대적이었으며 서방 자본주의 체제는 물론이고 스탈린의 소련조차도 산업화를 해서 관료제 부패 사회가 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산업화된 비인간적이고 비양심적인 사회에 대한 대척점으로 정신주의적이고 인간주의적인 유토피아에 가까운 어떤 사회를 제시했는데, 문제는 그 대안으로 갖다놓았던 것이 문혁 하의 중국이라서 나중에 엄청 욕먹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주의적이란 사회가 혁명을 위해 사람들을 때려죽이고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수령의 가오를 위해서 지진으로 수십만 깔려죽는 것도 아랑곳않는 사실상 비양심적 체제였다는 것이 드러난 후 히틀러랑 다를바 없었다는 것으로 입장을 전환하며 물질과 정신이 조화되어야 한다고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하지만 정신론에 대한 집착은 말년에도 어느 정도까진 남아서 북한을 수천만명의 인민들의 자주성을 박탈하는 수령제 독재로 비난하면서도[11] 부정부패가 없고 민족 정통성을 가진 나라라서 남한이 배워야 한다고 평가하는 등 몽상적인 면모도 여전히 보였다.

4.1. 문화대혁명 및 중국공산당 미화

"문화대혁명이라는 급격하고 웅장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미국 기자들만 모를 뿐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지 오래다."
"이러한 문화혁명의 과정이 무시무시한 내부 숙청이 아니라 이론정립과 토론, 자기비판, 설득 등 매우 인간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리영희 교수는 마오쩌둥 중국 문화대혁명을 자신의 저서에서 지나치게 미화하였다.

대표작 《 전환시대의 논리》 《8억 인과의 대화》(약칭 대화, 1977년 작)[12]에서 리영희는 문화대혁명을 '이 때까지의 자본과 물질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려는 세계관으로의 전환'이라고 하거나 '물질주의에서 정신적 실존적 인간의 본연을 고민하는 단계로 세계가 변화한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또한 마오이즘을 일종의 인민주의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는 유물론적 서구 세계관이 일상 생활이나 정신적인 부분은 개혁이 시도되지 않았음을 들어 이야기 한 것이다.

리영희 문혁관 자체가 리영희 특유의 인간주의, 정신론에 대한 과도한 신념을 기반으로 한 몽상이 많았는데 그 마지막 단계가 탕산 대지진 칭송이었다. 1976년 탕산 대지진과 뉴욕정전 사태를 비교하며 ‘탐욕에 물들어 약탈이나 하는 미국인들보다 중공 시민들의 시민수준이 높다’면서 사회주의와 마오쩌둥 문혁 체제의 우수성이라고 칭송했다. 자본주의의 ‘미개함’을 비교하며 '인간주의'를 앞세운 마오쩌둥 체제가 우월하다고 하는 한편, 문혁 체제가 20년은 더 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하자 서구의 공산주의 및 사민주의 지식인들처럼 그가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고 격렬히 비난하였다.

무엇보다 독재정권에 맞서 진실을 파헤치겠다던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중국에서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던 시절 중국 독재정권의 문화대혁명 미화 선전을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믿어 버리고 잘못된 정보를 대중에게 전파한 것은 분명 비판 받을 만한 부분이다. 불과 3년 뒤인 1980년, 같은 조선일보 출신인 조갑제 기자가 5.18 당시 목숨 걸고 광주로 들어가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주장한 북한군 침투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낸 것과 심히 비교되는 일이다.

4.1.1. 과오에 대한 인정?

그는 이후 90년대가 되어서 이것과 관련된 질문을 다시 받았을 때 문화대혁명기간 중 홍위병에 의한 구습 타파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표면적으로 비슷한 성격이긴 한 68혁명이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며, 68혁명의 당사자들 역시 문화대혁명을 자신들과 동급으로 여기는 큰 오류를 저지르고 있었다.[13]

문재인은 자신의 책 《운명》에서 이 문화대혁명에 대해 리영희에게 물어보았고, 리영희는 그의 질문에 솔직하게 자신의 착오를 인정하였다. 그는 그 당시에 중국에 대한 정보가 크게 부족하였다고 첨언하였다. 그의 책 대담집인 《리영희의 대화》(약칭 '대화')에서도 과거 문화대혁명 오판에 대한 자기고백을 했다. 리영희는 동구권 붕괴와 문혁에 대한 실상이 알려진 후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인데,90년대 여러 지식인들과의 대화에서 홍위병들이 야만적인 행위를 많이 했다고 자신의 주장을 수정하는 한편, 문화대혁명을 히틀러의 아리아인 주장에 비견하고, 굶어죽어가는 중국 인민들의 사정을 무시하고 정신론만 강조한 자신의 과거 주장은 몽상병에 가까웠다고 아주 강하게 자아비판하며 물질과 정신의 조화가 필요하다고 입장을 선회했다.

그러나 세계를 여행했던 지식인이 문화대혁명의 실체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반박도 있으며, 그의 문혁과 마오쩌둥에 대한 인식은 아직까지도 그의 개인사에 대한 가장 큰 논쟁거리들 중 하나이다. 다만 유럽의 신좌파나 한국 586 중에서도 아직까지도 문화대혁명과 마오쩌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모든건 간악한 미제놈들의 음해라며 정신승리 하고 있는걸 생각하면 늦게나마 자신의 과오를 깔끔하게 인정한 몇 안되는 학자 중의 하나기도 하다.

4.2. 카다피에 대한 옹호

2005년에 출간된 대담집인 '대화'에서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를 옹호하기도 했는데, 그때 시점에서도 카다피는 35년째 독재 중이었다[14]. 과연 '반(反) 시장제국주의적 활동'이라는 이름만으로 이러한 독재를 용인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극찬한 카다피는 2011년 들어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자국민을 전투기로 폭격하고 용병까지 동원해서 학살하는 악질적인 본성을 드러내다 결국 사살당했고, 해당 내용은 갈 곳을 잃게 되었다. 이건 70년대도 아니고 21세기의 오류다.

하지만 위의 비판은 사실관계에서 오류가 있다. 초창기의 카다피는 '젊은 혈기의 혁명가'로서 '아프리카의 체게바라'로까지 불리며 진심으로 리비아 시민들을 위한 정치를 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것은 그보다 못 했으면 못 했지 나을 게 없는 왕당파와 반동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오랜 장기 집권으로 부패하여 독재로 리비아 국민들을 힘들게 하고 민주화 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한 것은 결코 옹호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해당 대담집에서의 발언은 카다피 집권 당시의 유전 국유화 등의 조치를 보고 그 때 당시 자신이 느낀 반가움을 이야기 한 것이다. 그리고 위 비판 단락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70년대 집권 초기의 카다피가 받은 평가는 2010년대 이후에 받은 평가와는 전혀 다르다. 애초에 해담 대담집 자체가 전체적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대상을 분석한 학술서라기보다는 단편적인 대담 모음집이며, 카다피에 대한 언급 역시 '카다피라는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총체적인 평가가 아니라 70년대의 자신을 회상하면서 그때 자신에게 큰 충격을 안겨 준 사건들 중 하나로 카다피가 집권 직후 시행한 유전 국유화 등 반 시장제국주의 정책을 이야기 한 것이다.

또한 카다피의 경우 핵포기 선언 이후 2000년대 서방에서도 민주주의적인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카다피에 대한 평이 독재자라는 이미지가 부각된 것은 2011년 아랍의 봄부터 본격적이었으며, 실제로 서방 사회에선 자마히리야에 따른 카다피의 직접민주주의가 1인독재와는 다른 체제임을 주장을 하기도 했었다.[15]

4.3.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가 아니다?

" 80년대 한국사회에서 모든 지식인과 교수, 정책수립가, 정당 관계자들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법리를 뒷받침하는 소위 유엔총회 결의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라는 이 법률이 얼마나 사실과 다르며 허위이고, 해석을 견강부회했던 집권자들의 자위적인 해석인지, 또 완전히 거짓에 의한, 우상에 의한 미신인지를 밝혀나갈 때 무척이나 고통받았다"
오마이뉴스, "부시 재집권, 이제 반동의 시대 열린다" 2004년 11월 4일
리영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정부가 UN에게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형식상 총선거가 실시된 38선 이남 지역에서의 유일 합법정부인 것이지, 한반도 전체의 주권을 가졌다고 보는 것은 확대해석이란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역사교과서 집필시안 세 가지 쟁점
<포럼>歪曲 국사 교과서 修正 거부해선 안돼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는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뿐이다

1948년 12월 대한민국 정부 승인이 '한반도 전체' 범위인지 아니면 38선 이남 범위인지는 2010년대 후반 시점까지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어 온 내용이다. 그러나 최근 학계에서는 결의 내용뿐 아니라 결의 도출의 역사적 맥락까지 고려하여, '한반도 전체'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는 견해가 다수 제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한 1948년 UN 결의문 제195호(III)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Declares that there has been established a lawful government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aving effective control and jurisdiction over that part of Korea where the Temporary Commission was able to observe and consult and in which the great majority of the people of all Korea reside; that this Government is based on elevations which were a called expression of the free will of the electorate of that part of Korea and which were observed by the Temporary Commission; and that this is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
출처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마지막의 'that part of Korea and which were observed by the Temporary Commission; and that this is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이다. 대체로 이 문장만을 번역하여 한국의 주권 범위를 해석해 왔으며, 특히 마지막의 Korea의 범위가 한반도 전체인지 아닌지가 주요 쟁점이었다. 그러나 문장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문장의 해석만으로 접근하면 그 실질적 의미가 상당히 모호해서 논쟁이 생길 수밖에 없는 문장이다. 이러한 애매한 결의문이 채택된 것은 당시 한국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기타 자유진영 국가들의 대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한반도 문제 해결은 미소공동위원회 협의를 통한 조선임시정부 수립이라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미소공위가 최종적으로 결렬되고,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함으로서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려 했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는 결의문 제112호(II)를 발표하여 한국에서의 선거 실시 및 정부 수립,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선거 감시를 결의하였다. 한국에서 수립될 정부의 지위를 규정한 내용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Recommends that the elections be held not later than 31 March 1948 on the basis of adult suffrage and by secret ballot to choose representatives with whom the Commission may consult regarding the prompt attainment of the freedom and independence of the Korean people and which representatives, constituting a National Assembly, may establish a National Government of Korea. The number of representatives from each voting area or zone should be proportionate to the population, and the elections should be under the observation of the Commission;
출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설립과 선거 감시를 규정한 유엔 결의에서는 한반도 전체에서의 총선거 실시를 통해 국회를 수립하고, 이를 통해 한국의 중앙정부/전국정부(National Government)를 수립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한국에 방문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소련과 김일성 세력의 반대로 38선 이북을 방문할 수 없었으며, 결국 '가능 지역', 즉 38선 이남에서만 선거를 진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총선거를 통한 국회 및 정부 수립도 38선 이남의 대한민국으로만 한정되었다.
미국으로서는 당연히 유엔 결의를 통해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전체(All Korea)의 유일한 합법정부 또는 중앙정부/전국정부로 승인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 호주·캐나다를 비롯한 영연방 국가, 인도 등 자유진영 내 수많은 국가들이 이러한 미국의 주장에 반대했다. 즉 38선 이남 선거를 통해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결의 제112호에서 의도한 National Government와 동일한 것인지에 관해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38선 이북의 인민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영향을 주었지만, 38선 이남의 정부를 전국정부로 승인하는 것이 사회주의 진영의 선전 소재로 사용될 수 있었다는 우려 또한 상당한 위력을 가졌다. 이처럼 미국의 우방국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전국정부로 승인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고, 미국이 자신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 한국 정부에 대한 법적 승인 자체가 미뤄질 가능성이 높았다.[16]
따라서 미국은 한발 물러나서 All Korea나 National Government가 포함되지 않은 결의문을 통과시키는 것에 동의했다. 미국이 자국의 입장을 어느 정도 관철시키면서도 한국 정부를 한반도 전체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규정하지 않는 합의한을 도출했는데, 그것이 바로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라는 표현이었다. 즉 제195호(III)은 애초부터 미국과 기타 자유진영 국가들의 견해 차이를 조율하기 위해 상당히 애매하고 중의적인 표현을 채택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17] 그리고 미국과 대한민국 정부는 해당 표현을 한반도 전체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해석해 왔고,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리영희에 대한 비판 논거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유엔에서도 상당히 많이 통용된 국제적인 견해를 살펴보면, 한국 정부를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하는 것에 대한 상당한 거부감이 있었고 미국이 이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즉 유엔 결의에서는 총선거의 정당성과 총선거를 실시한 지역에서의 대한민국 정부의 주권을 명백히 인정하지만, 선거가 실시되지 않은 38선 이북 지역에 대한 대한민국의 정당성은 논쟁의 여지가 상당하기에 이를 명확하지 않은 애매모호한 문장으로 규정하였다. 만약 저 부분이 명백하게 한반도 전체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대체되고 미국이 이를 고집했다면, 유엔임시위원단 내부나 유엔총회에서 상당한 반대가 제기되고 한국 정부의 승인 그 자체가 상당히 차질을 빚었을 가능성이 명백했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주장은 당시에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없는 주장이었으며, 이러한 의견 차이 하에 유엔 결의가 만들어졌다.
물론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원인은 1차적으로는 유엔임시위원단의 38선 이북 방문을 반대한 소련 및 김일성 세력에게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 문제와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 전체의 주권을 대표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일단 38선 이남에서만 선거가 진행되고 정부가 수립된 이상, 38선 이남의 정부를 전국정부로 인정해야 한다는 미국의 견해를 지지하는 국가만큼이나 한국 정부를 한반도 전체의 전국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국가들도 상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미국의 주장이 국제사회에서 일방적으로 관철될 수는 없었고, 각자가 애매한 표현의 결의문을 자신의 의도대로 해석하는 상황이 지금까지 반복되어 왔다. 이러한 총회 결의 도출 과정을 고려하면, 당시 상황에서는 리영희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4.4. 기타

2000 남북정상회담 6.15 선언 이후 남북관계가 긍정적으로 보였을 때에 북한이 변하는 만큼 남한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남한이 우익세력이 강한 것은 40년 전과 다를 것이 없는데 북한은 남한과 대화를 하면서 변해왔으니 남한은 최소한 그만큼, 가능하면 그 이상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그 외에 군사정권 시절의 인권 탄압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판하면서도 북한 주민들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비판의 강도가 덜하다고 지적되는 경우도 있으나, 이런 지적은 한국의 극단주의적 보수우파가 흔히 사용하는 색깔론 종북몰이의 전형으로써 진지하게 반론할 가치조차 없다. 상술된 바와 같이 리영희 자신이 이미 북한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조목조목 충분히 보여준 바 있는데 이런 입장조차 '상대적으로 비판의 강도가 덜하다'고 지적받아야 한다면, 무슨 발언 할 때마다 글자수 세서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과 남한 내 문제에 대한 비판의 길이라도 맞춰야 한단 말인가? 애초에 대한민국 사회의 구성원이 자기 자신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한국 사회 내부의 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장 한국 사회 내에서 북한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정치세력중 하나라는 자유한국당 소속 정치인들의 발언만 보더라도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보다 한국 내의 적대정파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더 자주 하며, 이는 한국 내 정치세력이라는 입장상 당연한 것이다. 위와 같은 논지에 따르면 자유한국당에 대해서도 '적대 정파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판하면서도 북한 주민들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비판의 빈도가 낮다'라는 비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논지는 합리적인 비판이라기보다는 그저 리영희를 친북이라고 몰아가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꼬투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4.4.1. 반박

우선적으로, 상술된 탭에선 각종 논리적 오류들로 점철돼있다는 것을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려한다. 거의 모든 문장에서 감정을 적재하는 오류를 볼 수 있으며, 글에서 "리영희에 대한 비판은 곧 색깔론적 종북몰이"라고 단정하는 부분은 흑백논리에 해당한다. 모든 비판을 색깔론과 종북몰이로 귀결시켜, 비판의 정당한 측면이나 다양한 관점을 무시한다. 리영희에 대한 비판을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과 남한 내 문제에 대한 비판의 글자 수를 맞춰야 한다는 말인가?"로 과장, 왜곡하는 부분은 허수아비 때리기의 전형이다. 이는 상대방의 주장을 실제보다 극단적으로 만들고, 그 왜곡된 주장을 공격하는 방식이다. "자유한국당도 상대 정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북한에 대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적다"는 식으로 반박하는 부분은 피장파장의 오류이다. 다른 정치세력의 행동이 리영희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근거는 되지 않는다. "그저 리영희를 친북이라고 몰아가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꼬투리"라고 주장하는 부분은 의도 추정의 오류이다. 리영희에 대한 비판이 리영희를 '친북'으로 몰아가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 하고 있는데, 이 문장은 상대방이 리영희에 대해 비판을 가한 의도가 순수한 비판이 아니라 '친북'으로 몰아가기 위한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이는 상대방이 실제로 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독자가 그 비판 자체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리영희는 거창 양민 학살의 잔혹성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해왔다. 이런 사람이 모택동의 잘 한 점을 이야기한다면, 그의 말을 들어왔던 사람들은 모택동의 1,000만 양민 학살의 잔혹성이나 천안문 3천 학살, 위구르 학살도 비난하길 기대할 것이다. 베트남 전쟁을 이념전쟁이 아닌 생존전쟁이라며 북베트남을 칭찬한다면, 그의 말을 들어왔던 사람들은 북베트남 정부가 전후 처형한 최소 6만 5천에서 최대 10만 이상의 민간인에 대해 격분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마찬가지 입장에서 ‘반공주의’도 아니고 ‘광적인 반공주의’라며 반공이념으로 생사람을 잡았던 학살사건에 대해 인권침해를 이유로 극도의 분노를 표출한 '대화’ 740여 쪽 중에 반공이 생기고 국민들 사이에 퍼지게 된 본래 원인인 ‘북한 무장공비의 이승복 가족 학살’이나 북한 간첩에 의해 우리 국민이 죽은 사건에 대한 단 한 문장의 언급이라도 있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전혀 없다.

이런 이중적인 태도를 '그저 리영희를 친북이라고 몰아가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꼬투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리영희 교수는 “나는 막연하게 이념이나 이론 조작이 아닌, 엄밀한 실증적인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남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해. 우선 찾아야 하고, 읽어야 하고 평가하고 판단해야 하고, 정확하고 치밀하게 체계화해서 글을 써야 하는데, 이것은 너무 힘든 작업이야. 글 하나 쓰기 위해 몇 천 페이지를 읽어야 할 때도 있어”,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저서 대화(2005년)에 “중국 공산당의 혁명운동 철학과 전략 그리고 파란만장한 궤적은 일본공산당의 그것과 비교의 전제조차 안 되겠지. 중공혁명은… 태평천국의 혁명(1851-64)이라는 업적의 유산입니다… 태평천국은 완전 평등주의에 입각한 공상적 공산주의사회를 목표로 했고… 그들의 이념과 인간적 덕성과 정치적 목표와 같은 것을 알면 알수록 감탄을 금할 수 없어요.” 라고 서술한다.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에는 박정희 정부의 경제 발전과 같은 공은 놔두고 과인 독재를 비난했던 사람이 왜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은 공, 즉 '그 속에 담긴 뜻'을 중요시하고 과는 그 당시에 몰랐다는 식으로 대충 넘어갈까? 본인이 여러 책에 걸쳐 문화대혁명을 긍정적으로 소개했으면 책임감 때문에라도 문화대혁명에서 박정희 정부의 독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학살을 고발해야 하지 않을까? 박정희 정부도 그 속에 담긴 뜻은 충분히 있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이는 2005년에 '박정희의 인본주의 사상은 알면 알수록 감탄을 금할 수 없어요. 혼란스러운 사회를 군인들이 정리하고 정권을 민간에 이양한다는 약속을 하다니. 독재는 제가 그 당시에 경험해 보지 않아 잘 몰라요.' 라고 옹호하는 꼴과 똑같은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태평천국의 혁명을 우상화하기 위해 리영희는 동학농민전쟁의 사상적 원천이 중국에 있다고 주장한다. “태평천국농민전쟁은 중국공산당의 사상으로 전수되기 이전에 이미 조선으로 그 사상이 전달되어, 평등사회를 목표로 하는 동학농민전쟁(1891-94)의 지도이념으로 개화(開花)했지요.”

동학은 수운 최제우가 유불선의 사상을 섭렵하면서 민족고유의 독창적인 신앙으로 체계화한 것인데, 리영희는 태평천국의 사상이 동학의 지도이념으로 개화했다고 우기는 것이다. 최제우가 동학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중국을 방문하고, 태평천국농민전쟁의 자료를 공부하며 교훈을 얻기라도 했다면 리영희의 주장에 타당성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점을 들어 그의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이중성을 비난할 수는 있어도 그가 종북이라고 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이와 같은 논지가 '합리적인 비판이라기 보다는 그저 리영희를 친북이라고 몰아가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꼬투리에 불과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4.5. 총론

모든 인물이 그렇듯, 리영희에게도 공과가 있다. 리영희는 한국 민주화와 운동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러나 현대에 검증한 결과 리영희의 저작에 적지 않은 오류가 있고 매우 편파적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향력과 그의 주장에서 옳은 것은 인정하되, 그의 오류 역시 숨기지 않고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리영희에 대한 평가에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관점이 개입되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가 힘든 면이 있다. 이는 리영희가 한국 현대사와 정치에 대한 막대한 영향을 끼쳐서 그 정치적 영향에 대한 평가 역시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영희에 대한 평가는 대개 공정하기보다는 진영에 따라 편파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좌익은 리영희를 '민주화 운동의 의식적 은사'나 '민중 계몽의 선구자'라고 부르며 신격화하다시피 한다. 그래서 그의 공만을 최대한 부각하고 과는 은폐거나 아예 부정, 미화하기에 급급하다. 반면, 우익은 그를 '극좌파 선동가'나 '운동권의 거짓된 사상가'라고 부르며 폄하하기 일쑤이다. 우익은 그의 공은 일축하고 정보의 오류나 편파성만을 부각한다.

물론 리영희라는 인물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그 공과 과를 논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만, 리영희라는 인물이 한국의 민주화, 더 나아가 한국 현대정치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력이 막대한 만큼 이 인물에 대한 사회적 평가 역시 상당부분 정치적 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민주화 운동 세력으로부터 '의식화의 은사'로 추앙받는 인물인 만큼 그 반대 세력으로부터는 '의식화의 원흉' 이라는 적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이 양 세력의 후예들이 정치권을 주도하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리영희에 대한 평가는 상당부분 학술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그러나 이런 논리는 모든 것을 정치화 시키는 논리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는 힘들 것이다. 또한, 그래서 학술적인지 정치적인지 그 정도를 따질 때에는 '논거'를 더욱더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좋은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을 어느 정도는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민주화 운동 세력의 계승을 주장하는 정치세력들이 이 인물을 '사상의 은사'로 추앙하는 만큼 상대 정치세력으로써는 이 인물의 학술적 성과를 비판함으로써 상대 정파의 사상적, 이론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리영희의 담론 상당수가 '당대에는 독자의 인식을 완전히 전환시켰다고 할 정도로 충격적이었지만, 현대의 기준으로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 이기 때문에 리영희의 담론이 저평가되는 면이 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베트남 전쟁에 제국주의적 요소가 있다'는 리영희의 분석은 지금으로써는 그저 다양한 관점 중 하나로써 상식적인 주장일 뿐이지만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베트남전은 반공 성전'이라는 고정관념을 뒤흔든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 또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즉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의견이 다른 좌우파가 동등하게 균형이 맞아야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좌파 자체를 범죄시하고 집권 정파가 반대파(야당)을 탄압하고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당시로써는 독자의 인식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들었다고 할 만큼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주장이었던 것이다. 즉, 리영희의 분석과 주장이 얼마나 정확하고 지혜로웠는지를 따지려면 일단 리영희의 핵심적인 주장 중 상당부분이 현대에 와서는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상식으로 여겨지는 것의 상당 부분이 불과 30~40년 전의 한국 사회에서는 지극히 이단적인 주장이었고, 리영희는 이런 과거의 상식을 뒤흔들어 현대의 새로운 상식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 중 하나라는 것이다.

또한 리영희에 대한 비판의 핵심인 '문화대혁명에 대한 오판'이 리영희의 전반적인 주장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역시 중요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물론 문화대혁명에 대한 리영희의 판단이 오판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고, 리영희 자신도 이를 '사상적으론 훌륭하지만 현실적으론 안좋은 일들이 많았다'며 인정했다. 그러나 <8억인과의 대화>나 <전환시대의 논리>의 주제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분석' 이 아니라 '한국 사회 내의 인식 전환'이며 이 맥락에서 해당 저작의 중국론 역시 한국 사회 내에서 '중공'에 대한 인식 전환, 즉 중화민국 정통론에 경도된 기존의 중국관에서 벗어나 중화인민공화국을 이해와 대화의 대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18] 시대적인 측면에서 중국이라고 하면 곧 중화인민공화국을 연상하는 현대의 독자들은 실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70~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중국이란 곧 대만의 자유중국(중화민국)을 의미했고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서는 '정당성 없는 찬탈정권'이라는 인식이 주도적이었으며, 심지어 92년의 한국-대만 단교 당시에도 '어차피 세계적으로 공산정권들은 다들 무너지고 있으니 중공정권도 오래는 못갈 것' 이라는 논리로 대만과의 관계를 우선시할 것을 주장하는 주장도 적지 않게 제기되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리영희의 주장을 '중화민국(대만) 일변도로 편향된 중국관에 대한 인식 전환의 필요성 제기'로 해석한다면 문화혁명에 대한 오판으로 주장의 근거 중 하나가 무너진 것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주장 자체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5. 조선일보와의 관계

리영희는 조선일보, 특히 반공주의적인 논객 선우휘와의 관계가 별로 좋지 못하였는데, 이는 선우휘가 조선일보에서 편집국장이던 1968년 박정희 정부의 외압으로 사임하게 한 탓도 있었다. 애초에 리영희가 선우휘의 사상을 혐오한 것도 있었다. 물론 동시에 이를 반대로, 애초에 그럴만한 사람이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19]

또한 리영희는 후에 주필이 되는 신참기자인 김대중을 좋게 보지 않았는데, 김대중 이후에 다른 기자들이 다 잘리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면서 의아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대중 주필은 후에 반민주적이고 특정 정치 정당을 대변하는 논조나 해외 논설의 왜곡 번역 문제 등으로 선우휘에 가까운 비판을 받았다.[20]

6. 저서

7. 편역서

7.1. 리영희 평전

리영희 저서나 편역서는 아니지만, 전 독립기념관장이자, 민주화 운동가인 김삼웅 씨가 쓴 리영희 평전 또한 리영희를 아는데 있어서 읽어볼 만하다. 일반인들이 어렵지 않게 리영희의 일대기를 알 수 있는 책이다.


[1] 일본 제국 관료제는 현대 시대의 1급~9급 공무원(국민의 충복)이 아니라 중세 시대의 정1품~종9품 문무관리(국왕의 충복)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전근대의 군주국을 다스리는 문무관리는 근현대의 공화국을 다스리는 공무원에 비해서 권력이 매우 센 편이다. [2] 일본령 한반도에서 영림서들의 숫자는 최다 37개소에 이르렀는데, 평안북도에서 활동하는 영림서들의 숫자는 최다 9곳에 이르렀다. [3] 참으로 아이러니 한건 리영희의 통역을 신뢰했던 사람은 바로 제임스 밴 플리트였다. [4] 이때만 해도 조선일보의 성향은 지금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 [5] 당시 일반인은 물론 자기가 데리고 있던 기자들도 베트남 전쟁은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성전'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고 한다. [6] 이후 산본에 있는 수리산 근처의 아파트에서 살았다.현재 군포시 중앙도서관에 가면 그가 기증한 도서들이 있다. [7] 1980년 5월 17일 ‘광주소요 배후조종자’로 구속돼 해직되었기 때문이다. [8]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리영희가 마오주의자였다는 것이 극우 세력의 프레임 씌우기와 종북 몰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문화대혁명의 나쁜 점은 하나도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찬양한 사실은 명백하며 절대 변하지 않는다. [9] 원 링크는 삭제되었으므로 저자의 추도사 링크로 변경 [10] 문화대혁명의 권위자인 중앙대학교 백승욱 교수도 40~50년 전에 쓰인 리영희의 글을 가지고 이게 틀렸네 저게 틀렸네 21세기에 편하게 품평하는 것부터가 무의미한 일이라고 평가한다. [11] 김씨 일가 독재에 대해서 리영희는 매우 부정적이었으며, 김일성 역시 히틀러에 견주었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 체제는 실패했다고 분명히 단정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소련의 붕괴가 사회주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80년간 사회주의 실험한 사람들이 안된다고 하는데 서울에서 책 몇권 읽고 된다고 하는 주장이 얼마나 비과학적이냐고 깠으며 고르바초프에 대해서도 3류 사상가라는 비난에 맞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12] 중국의 당시 인구를 말한 것으로 일종의. 편역서이다. 후에 1983년에는 《10억인의 나라》라는 책을 다시 냈다. [13] 그 덕분에 유럽의 좌파중에도 문화대혁명이나 심지어 캄보디아 폴 포트를 관료적 공산주의를 개혁하려는 새로운 시도로 받아들이고 높게 평가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놈 촘스키도 그랬다. [14] "신생 독립국가인 리비아에서 쿠데타로 서구제국주의의 괴뢰왕조를 전복한 카다피 육군중령은 즉시 시장제국주의 자본이 소유했던 유전의 국유화를 단행했어요. 이것은 아랍세계 인민이 결정적으로 서방 자본주의의 착취를 거부하는 몸부림이었어……국내 현실로 말미암은 질식과 절망의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과 같은 기쁨을 느꼇어." [15] 참고로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에서 부통령이던 부시는 차우셰스쿠가 루마니아의 정치와 경제를 발전시켰고, "인권에 대해 존중"해왔다고 칭찬했다.(패권인가 생존인가 p.143) [16] 미국은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를 즉시 승인하려고 했다. 그러나 유엔에서의 승인 없이 미국이 독자적으로 법적(de jure) 승인을 단행하면 큰 파장이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에 대한 사실상(de facto) 승인만을 진행하고 법적 승인은 미뤄둔 상태였다. 훗날 초대 주한미국 대사로 부임하는 무초가 정부수립 이후 대사 자격이 아닌, 대사와 동급의 특별대표로 파견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17] 한국현대사에서 이처럼 외교문서의 중의적 표현을 남겨둔 사례가 하나 더 있다. 한일협정에서 대한제국기 일본과 맺은 조약을 '이미(already) 무효'라는 애매한 문구로 규정하여 한일 양국에서 서로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도록 한 것.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18]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건전한 취지가 그의 중공과 문혁을 찬양한 행적을 정당화할 순 없다. [19] 선우휘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반공주의적 성향으로 더욱 굳건하게 변화하여 그 당시( 80년대) 운동권의 비판 순위 제1대상이었다. [20] 리영희는 "내가 일군 최고의 성과이자 최악의 상처"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