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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17 11:54:17

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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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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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quaestor
1. 개요2. 기원3. 역할의 확대4.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시기

1. 개요

고대 로마의 관직. 국고를 감독하고 감사를 수행하는 관료로, 쿠르수스 호노룸(명예로운 경력)의 첫번째 단계이다.

2. 기원

콰이스토르(Quaestor)는 "질문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동사 콰이로(quaero)에서 유래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등 고대 로마 역사가들의 저서에는 로마 왕국 시기에 "콰이스토레스 파리치디(quaestores parricidii)"라는 직함을 가진 이들이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존속살해 사건을 조사하고 인민 재판에 사건의 경위를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현대 학자들은 이 관직은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임명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로마 공화국 시기에서도 이들은 사형에 해당하는 심각한 범죄 사건을 조사하고 인민 재판에서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이는 기원전 2~3세기 즈음에 사라졌다.

로마 공화국이 수립된 첫 해인 기원전 509년, 두 집정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는 공공 금고와 공유지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콰이스토레스 아이라리(quaestores aerarii)"를 선임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들이 존속살해 사건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던 콰이스토레스 파리치디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다. 공화국 초기에는 2명이 이 직책에 지명되었지만, 기원전 450년 12표법이 반포된 후 평민 출신의 재무관 2명을 별도로 뽑기로 하면서 4명으로 늘어났다. 나중에는 집정관들이 임의로 선정하지 않고 코미타 트리부타(Comitia Tributa: 35개의 부족 민회)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3. 역할의 확대

재무관은 초창기에는 '에어라리움(Aerarium: 공공 재정)'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여기에는 국고에 저장된 금과 동전의 통제 및 관리, 재무부의 열쇠 보관, 모든 공적 경비 및 세금 수급 및 영수증 관리, 공무서의 확인 및 보관이 포함되었다. 또한 로마와 전쟁을 벌이다가 패배한 부족 및 도시 국가들로부터 배상금 및 공물을 수령하고 감사하는 일도 수행했으며, 전쟁을 통해 확보된 공유지를 관리하고 경매하는 임무도 맡았다. 그리고 건축 비용, 군대 급여, 사원 유지비, 사회장 비용, 도로 유지, 주화 주조 등을 포함한 다양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인출해야 하는 국비를 계산하여 원로원에 보고하고 시행했다.

한편, 그들은 특정 집정관과 언제나 함께 있어야 했다. 집정관이 공무를 위해 로마에 있을 때 재무와 관련된 조언을 해줬고, 집정관이 전장에 나섰을 때 동행하면서 무기, 군량 등 군사 물자 수급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해 집정관을 도왔다. 재무관은 집정관을 상관으로서 성심껏 따를 의무가 있었고, 집정관은 재무관의 조언을 존중할 의무가 있었다. 이렇듯 끈끈한 관계를 맺었던 만큼 집정관과 재무관 사이에 클리엔텔라 관계가 형성되는 일은 지극히 흔했다. 재무관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집정관의 후원을 통해 성공적인 정치 경력을 이어가고자 했고, 집정관은 자신의 든든한 지지 기반이 되어줄 인재를 포섭하고자 했다.

그러다가 로마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탈리아 전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자, 재무관의 숫자와 역할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기원전 267년에 2명의 재무관이 추가되었다. 이들은 이탈리아 내 동맹시들이 로마에 보내는 물자를 감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섬이 로마의 영역에 들어오자, 이 섬들을 관리하기 위해 재무관 2명이 추가되었다. 이후 로마가 지중해 세계에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재무관의 수는 계속 늘어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독재관으로 군림하던 시기에는 20명에 달했다. 이제 재무관들은 로마 전역의 여러 주요 지역 및 도시에서 활동했으며, 집정관 및 총독들의 보좌관으로서 세금과 공물을 징수하고 군대에 복무할 신병을 모집했다.

또한 단지 재무 임무만 수행하던 것에서 벗어나 사령관으로부터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기도 했다. 가령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당시 재무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술라의 지시를 받들어 전투선을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한 뒤 지중해 동부로 항해하여 해전을 수행하고 여러 섬과 해안 도시들의 귀순을 받아냈다. 또한 재무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누만티아 전쟁 시기에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의 지시에 따라 2만 로마군을 포위한 아레바키족과 협상한 끝에 로마군이 온전히 빠져나오는 것을 용인받는 대가로 그들의 독립을 보장하고 로마에 공물을 바치지 않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로마 정계는 이민족의 아량으로 풀려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만키누스, 그라쿠스를 비롯한 장수들을 모조리 재판에 회부했다. 그라쿠스와 다른 부관들이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만키누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협약을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원로원의 의지로 누만티아에 알몸으로 넘겨졌다. 하지만 누만티아인은 로마의 배신을 한 사람에게만 물 수 없다며 만키누스를 되돌려보냈다.

4.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시기

카이사르의 내전을 통해 절대 권력을 손아귀에 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재무관의 수를 40명으로 늘렸다. 이는 지중해 전역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기존보다 훨씬 많은 전문 관료가 필요한 현실에 따른 것이면서도, 명예로운 경력의 출발점인 재무관에 오를 기회를 대폭 확대함으로써 추종자들을 늘리려는 정치적 계산이 가미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재무관의 수를 도로 20명으로 줄였으며 국고를 관리하는 권한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본래 재무관은 군대에서 10년간 활동하지 않으면 선임될 수 없었지만, 독재관 술라가 최소 연령을 30세로 설정했고 아우구스투스가 25세로 낮췄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민회에서 재무관을 선출하던 관행을 폐지하고 원로원에서 선출하도록 했고, "콰이스토리스 아우구스티(quaestores Augusti: 아우구스투스의 재무관)"로 일컬어지는 재무관 2명은 황제의 메시지를 통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파트리키 집안의 젊은이들로, 파트리키를 회유해 황실에 충성을 바치도록 유도하려는 아우구스투스의 의도로 선임되었다. 한편, 재무관을 지낸 인물이 원로원에 자동으로 들어가는 관례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도 이어졌다.

하지만 제정 체계가 확고히 자리잡으면서, 재무관은 점차 유명무실해졌다. 황제가 국고 관리 권한을 회수한 이래, 그들은 그저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만 수행했다. 네로 황제는 이들을 검투사 경기, 서커스 등 대형 행사의 감독관으로 세웠다. 나중에는 지방에서도 황제의 총애를 받은 에퀴테스가 이들을 대신해 세금과 공물을 수급하면서, 재무관은 일종의 명예직이 되었다.

서기 4세기에 집권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콰이스토르 사크리 팔라티(quaestor sacri palatii: 신성한 궁전의 재무관)"를 신설했다. 이들은 황제의 대변인으로서 법률을 제정하고 법정에서 패소한 이들이 황제에게 보낸 항소 및 총독들의 보고서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황제의 직속 법률 고문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상당한 권력과 영향력을 갖췄다. 안티오쿠스 추존(Antiochus Chuzon)은 테오도시우스 2세 시기 재무관으로서 테오도시우스 법전을 편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트리보니아노스(Τριβωνιανός)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재무관으로 활동하면서 로마법 대전 편찬에 크게 기여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다뉴브 강 하류를 경비하면서도 행정 업무를 병행하는 "콰이스토르 엑세르키투스(quaestor exercitus: 육군의 재무관)"을 신설하기도 했지만, 이후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을 볼 때 금방 사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신성한 궁전의 재무관'은 9세기 경 다양한 분쟁을 해결할 임무를 수행하는 사법관인 콰이시토르(quaesitor)로 변경되었고, 이후에는 명예직으로서 14세기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