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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가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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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가가린
Ю́рий Гага́рин | Yuri Gagarin
파일:aviation_gagarin.jpg
본명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
Ю́рий Алексе́евич Гага́рин
Yuri Alekseyevich Gagarin
출생 1934년 3월 9일
소련 러시아 SFSR 자파드주 그자트스크군 클루시노[1]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스몰렌스크주 가가린군 클루시노)
사망 1968년 3월 27일 (향년 34세)
소련 러시아 SFSR 블라디미르주 키르자치군 노보숄로보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블라디미르주 키르자치군 노보숄로보)
묘소 크렘린 벽 묘지
서명
파일:유리 가가린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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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아버지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가가린 (1902~1973)
어머니 안나 티모페예브나 가가리나 (1903~1984)
배우자 발렌티나 가가리나[2] (1957년 결혼)
자녀 딸 옐레나 유리예브나 가가리나[3] (1959년생)
딸 갈리나 가가리나[4] (1961년생)
종교 러시아 정교회[5]
신체 157cm
소속 정당
[[소련 공산당|]]
복무 소비에트 공군
1955년 ~ 1968년
최종 계급 소장[6] (소비에트 공군)
주요 서훈 소비에트 연방 영웅 (1961)
레닌훈장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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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일생
3.1. 우주 비행사가 되다3.2. 지구는 푸르다3.3. 이후3.4. 사망
4. 기타5. 관련 문서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небо очень и очень темное, а Земля голубоватая.
우주는 매우 어두웠으나, 지구는 푸르렀습니다.
당신은 우리 조국에 영광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당신은 용기와 영웅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당신은 우주를 관통한 최초의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니키타 흐루쇼프 # #
소련 우주 비행사이자 군인이며,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주에 나간 인간으로 기록된 인물이다. 게다가 미국 최초의 우주인 앨런 셰퍼드의 탄도 비행[7]과 달리 제대로 지구 궤도를 돌았다.[8]

2. 상세

Нас к торжеству коммунизма ведёт!
우리를 공산주의의 승리로 인도하라![9]

세계 최초의 유인우주선 계획인 보스토크 계획에 발탁되어 1961년 4월 12일에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유인 우주비행에 처음으로 성공했으며, 이 업적으로 20세기에 가장 유명한 소련인이 되었다.

그의 성공은 개인 차원을 넘어 냉전 당시 소련의 체제 우위를 선전하는 데 적극 활용되었고, 미국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보다 야심찬 유인 달탐사 계획, 즉 아폴로 계획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유리 가가린이 미국보다 먼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돌지 않았으면 달 착륙은 1980년대 후반이나 1990년대에 한두 번 가고 말았거나, 아폴로 프로젝트도 연구 성과에 비해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낭비였기에 아예 역사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냉전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실효성 없는 달 착륙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냉전 시기 이후로 인류는 더 이상의 달착륙을 하지 않고 있다.[10][11]

보스토크 프로그램은 사람이 타지 않은 7번의 우주 비행선 개발 비행 끝에 유인으로 발사되었으며, 유인 비행은 가가린의 비행을 포함해 6번 모두 성공적으로 끝냈다.

3. 일생

소련 스몰렌스크 주 그자츠크[12] 근처의 시골 마을 클루시노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가가린은 목수, 어머니 안나 티모페예브나 가가리나는 목장 노동자로 소 젖을 짜는 일을 했고, 당시 소련 사회의 순수한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그와 그의 가족은 나치 독일군 치하의 소련에서 살았고 독소전쟁시기 가가린은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비행조종사의 꿈을 가지게 된 건 독소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끝난 이후 다시 학교를 다니던 유년시절이었다.

보수적인 아버지는 학비가 들까 봐 가가린이 도시로 나가서 학교를 가는 것을 그다지 원치 않았으나, 가가린은 "학교는 공짜예요!"[13]라고 말해서 허락을 받아냈고, 이후 가가린은 모스크바 근교의 기술 학교(테흐니쿰)에서 금속 제련 관련 교육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 뒤 공부를 계속하여 기술 학위를 얻고자 사라토브 산업 학교를 다니며 동시에 인근 항공연구소에서 비행기 조종을 배웠다. 이때 가가린은 자금 사정이 여유롭지 않아 볼가 강의 항만 근로자로 일했었는데 그럼에도 가가린은 자신의 돈이 생기면 부모님을 위한 선물을 사는데 돈을 다 써버렸다고 한다.

그 뒤 오렌부르크에 있는 공군사관학교에 1955년 입학하였는데 이때 가가린은 2인용 훈련기 착륙에 서툴렀다고 한다. 이 때문에 퇴교 위기에도 처했었는데 다행히도 연대장은 가가린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기로 했고 그의 교관은 가가린의 좌석에 쿠션을 깔아주어서 그의 시야가 확보될 수 있도록 도왔다.[14] 당연히 그는 성공적으로 착륙 했고 그는 1957년부터 홀로 임무를 수행 할 수 있게 된다. 가가린은 166시간 47분의 조종 시간을 쌓았으며 이에 1957년 졸업하여 공군에 중위로 임관, 루오스타리 항공기지에 배치받는다. 이때 오렌부르크 간호학교 출신의 아내 발렌티나를 모스크바에서의 5월 1일 노동절 행사에서 만났다고 한다. 둘은 11월 7일 결혼을 했다. 가가린이 아내와 교제하게된 계기는 그녀가 유일하게 그를 튕긴 여자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가린의 친구 또한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고 하는데 그녀를 가가린에게서 떨어지게 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1959년 가가린은 비행시간 256시간을 달성했고 상위로 진급함과 더불어 3급 비행사가 된다. 이때 루나 3호가 발사됐는데 가가린은 여기에 관심이 많았고 바부슈킨 중령의 지원으로 더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1960년 다른 19명과 함께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요구 조건에 의하여 보스토크 계획을 위한 소련의 우주인 선발 프로그램을 거쳐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 되었다.

3.1. 우주 비행사가 되다

당시 소련 우주 프로그렘의 수석 기술자가 보스토크 1호의 캡슐에 들어갈 우주비행사의 조건을 정했는데 체중은 72kg이 넘으면 안됐고 키는 170cm 보다 작아야 했었다. 가가린은 키가 매우 작고(157cm) 가벼웠기 때문에 조건에 부합한다고 평가받아 보스토크 계획의 우주비행사 양성 프로그램의 신체검사를 통과하였다고 한다.[15] 이전에 그는 작은 키 때문에 공군 비행사가 되지 못할 뻔했지만 우주비행사로 선발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우주비행사 후보생은 3,000여 명의 공군 파일럿들을 대상으로 선발된 19명이었는데, 가가린은 여러가지 비행 실력, 신체적 조건, 집중력, 그리고 인품까지도 이들 중 최상위권이었고, 게르만 티토프와 함께 최종으로 선발되었다. 둘 중에 능력으로 선택은 누구로 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정치적인 이유에서 가가린이 뽑혔다.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를 선발하는 작업이라서 소련 체제 특성상 정치적인 고려가 들어가는 것은 당연했다.[16] 심사 당시 알렉세이 레오노프, 게르만 티토프, 유리 가가린 등의 후보가 올랐는데[17], 가가린은 최종 후보로 뽑힐 정도로 기량 및 능력도 출중했고, 출신성분조차 평민 출신 노동자 집안이라(가가린의 아버지는 위에 있지만 목수로 확고한 노동자였다. 티토프의 아버지는 교사였고, 레오노프의 아버지는 전기기술자로 노동자이긴 했지만 가가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노동자 느낌이 덜 났다.) 평등한 사회를 약속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홍보하기엔 안성맞춤이라 만장일치로 선발되었다고 한다. 즉 다른 후보자들의 기량도 가가린과 맞먹는 수준으로 뛰어났지만 출신성분의 상징성이 가가린이 너무나 좋았던 것. 그래도 첫 발사 이후 티토프는 가가린의 뒤를 이은 두번째 우주비행사가 되었으며 레오노프가 인류 최초의 우주 유영 타이틀을 가지고 있고 다른 후보자 일부도 이후에 우주여행을 했기에 출신성분 때문에 차별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소련의 첫 유인 발사라는 엄청난 상징성을 위해 여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가졌던 가가린이 먼저 올라간 것이다.

3.2. 지구는 푸르다

그가 탄 우주선 보스토크 1호
Поехали!
가자!
보스토크 1호의 발사 당시
궤도 비행 중 "지구는 푸르다"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18] 정확히 말하면 착륙 후인 1961년 4월 12일자 이즈베스티야[19]에 실린 기사에 나온 말로 원문은 다음과 같다.
Юрий Гагарин рассказывает: небо очень и очень темное, а земля голубоватая. Все хорошо видно.
유리 가가린이 말했다. "우주는 매우 어두웠으나, 지구는 푸르렀습니다.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유리 가가린이 우주 비행사로 선발이 될 당시 그의 계급은 상위였는데 이제껏 사람을 우주로 보낸 전례가 없었는지라 인간이 우주로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련군[20]은 가가린을 우주선에 실어서 우주로 내보낸 직후 그의 계급을 상위에서 2계급 특진시켜서 소령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사실상 이것은 그를 전사한 것으로 처리한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가가린은 무사히 살아서 귀환했고, 새 계급을 그대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훈포장 대상자급 대우를 받아 대령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했는데 가가린이 사망 시 달고 있던 계급장이 대령이었다. 사망하면서 순직처리하여 소장으로 승진했는데, 사실 미국도 최초 우주인인 앨런 셰퍼드에게 최종적으로 소장, 중국도 양리웨이에게 소장 계급을 달아 준 것을 보면 가가린도 장군계급을 단 것이 어색한 것은 아니다.

가가린이 착륙했던 장소는 원래 예정지에서 약 400km 떨어진 곳이었는데 통신 수단이 없어서 가가린은 지구에 돌아온 직후에 한동안 소련 당국과 연락할 수 있는 통신 수단을 찾아 헤맸다고 한다. 그래도 알렉세이 레오노프처럼 아예 야생에 떨어진 건 아니고 사라토프 주의 어느 농장에 착륙했다. 귀환 우주인과 처음 만난 사람은 농부와 그녀의 손녀가 되었다.[21]

3.3. 이후

찰스 린드버그의 이름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대서양을 두 번째로 횡단한 사나이의 이름을 누가 안단 말인가?[22]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우주로 갔을 때, 한 미국 국회의원이 분통을 터뜨리며 한 말[출처][24]

인류 최초로 우주공간을 비행한 인간으로서 나는 아마도 영원히 기억되리라. 앞으로 우주 체류와 관련해서 또 다른 기록이 나올 것이고, 어쩌면 인류는 달까지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지의 장막을 걷고 가장 처음 대기권 밖으로 발을 내디딘 공적만큼은 온전히 나의 몫일 터이다.
유리 가가린, 《지구는 푸른빛이었다》 15쪽.

소련은 우주 분야의 성취를 통해 적지 않은 정치적 효과도 보았다. 피그만 침공 5일 전인 1961년 4월 12일, 소련 우주인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지구궤도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 아프리카 대륙 상공을 지나면서 가가린은 식민주의와 싸우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에게 격려 메시지를 보냈다. 3주 후 미국인 앨런 셰퍼드가 우주 비행에 성공했지만 궤도 비행에는 못 미쳐 빛이 바랬다. 이후 서유럽인의 40%가 소련이 전체 군사력 및 전반적인 과학적 성취 면에서 미국을 앞선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우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에 불안을 느낀 케네디는 이례적으로 상하 양원합동회의를 요청하고 그 자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자유냐 압제냐 하는 전쟁에서 이기려면 우리나라는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다시 안전하게 지구로 귀환시키는 목표를 달성해야 합니다.” 이 연설이 있고 나서 1년 가까이 지난 시점인 1962년 2월 존 글렌은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지구궤도 비행에 성공했다. 지구궤도를 세 바퀴 돌고 아슬아슬하게 귀환했지만 미국인의 사기를 드높이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62년 8월, 소련은 다시 지구궤도를 17바퀴 도는 우주비행선 보스토크 3호를 발사하고, 그다음 날에는 보스토크 4호까지 쏘아 올렸다. 이듬해인 63년 6월에는 일주일간 궤도 비행을 함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우주선에는 최초의 여성 우주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도 타고 있었다.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524~525쪽.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간의 첫 우주공간 진출이라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대업적을 세우고, 약 1시간 30분 간 우주 공간에서 머물다 지구로 돌아온 그는 소련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당시 소련과 우주 경쟁 관계에 놓여 있던지라 소련의 우주개발 업적들에 내심 찜찜한 반응을 보였던 미국에서조차 가가린을 열렬히 환호하는 반응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그 후 가가린은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소비에트연방의회 대의원이 되었으며, 소련 최고 영예인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소련은 자신들의 체제우월성 및 우주기술의 과시를 위해서 가가린을 전 세계에 보내 연설회 및 기자회견, 팬사인회 등을 열었다. 가가린은 30여개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냉전이 한창이었으나, 가가린은 공산권만 아니라 영국, 캐나다, 프랑스와 같은 서방국가에서도 대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소련은 가가린의 미국 방문도 계획했으나, 국민 사기를 고려한 케네디 대통령의 명령으로 미국 방문은 불허되었다. 하지만 1965년 프랑스에서 제미니 4호의 승무원이었던 에드 화이트[25]와 제임스 맥디빗을 만날 수 있었다. 이때 미국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 프랑스 총리 조르주 퐁피두 등 서방의 지도자들과도 대거 만났고 인도로 초청받아 네루 수상과도 회담을 가졌다.

이와 함께 우주비행 2년만에 대위에서 대령에 이르는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되었다. 이후 우주비행사 훈련센터의 부센터장을 맡게 되었다. 우주에 다녀오기 전까지는 어쩌면 평범한 비행장교였고 대위였으나, 그 이후로는 이처럼 갑작스레 드높은 명성을 얻었기에 가가린은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고 대중 노출에 따르는 이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과음을 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훗날 존 글렌이나 아폴로 11호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이 미국에서 높으신 분들에 의해 우주 비행이 금지되었듯이, 가가린 역시 소비에트연방 영웅이 위험한 우주 비행으로 목숨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높으신 분들에 의해 우주비행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래도 가가린은 우주 개발에 있어 계속해서 참여했고 블라디미르 코마로프의 목숨을 앗아간 소유즈 1호 미션 당시 백업으로 근무했다. 당시 가가린은 우주선이 너무 위험하니 발사를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코마로프에게도 줄기차게 설득을 이어갔으며, 심지어 "그럼 내가 타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소련 정부에서도 가가린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렇게 하면 안전에 좀 더 신경을 써 줄 거라고 봤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발사는 강행되었고, 1967년 4월 24일 소유즈 1호가 낙하산이 펴지지 않는 사고가 발생해서 탑승한 코마로프가 사망했다. 이는 인류 최초의 우주인 사망사고였다. 게다가 폭발에 휘말려서 그야말로 코마로프는 숯덩어리 형태로 도저히 사람 형체가 아닌 모습으로 남았다... 코마로프의 유해 사진이 있는 곳. 끔찍하니 클릭시 주의를 보면 코마로프의 유해를 보며 소련 측 높으신 분들[26]이 착잡한 얼굴을 하고 남은 게 있는데 충격을 엄청 받은 듯. 그래서 소련의 높으신 분들은 이런 코마로프의 사고를 보고 가가린의 목숨을 훨씬 중히 여기게 되어 우주 비행이 더욱 철저히 금지되었다.

3.4. 사망

그 이후 가가린은 우주센터에서 일하느라 정지되었던 전투조종사 자격을 회복하기 위해, 친구인 테스트 파일럿 블라디미르 세료긴과 함께 MiG-15UTI 훈련기에 탑승해 훈련비행을 하다가 추락사고로 34세에 사망했다. 이때 그의 계급은 대령이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단순사고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KGB는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조사했고,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당시 KGB 문서도 단순사고로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가가린은 자신이 우주비행 중 잘못될 것을 걱정해서, 가기 전에 가족들에게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관련 기사

사망 후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진 후[27] 소련의 영웅들이 묻히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고 소장으로 추서되었다.

4. 기타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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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클루시노에 있는 가가린의 집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2] 1935년 12월 15일 출생했으며, 2020년 3월 7일 8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3] 미술사학자, 현재 모스크바 크렘린 박물관의 총책임자다. [4] 플레하노프 러시아 경제 대학의 경제학 교수 겸 학과장이다. [5] 의외로 집에 이콘도 걸어놓고 우주 비행 직전 딸한테 세례도 줄 정도로 독실한 신자였다. "우주에서 신을 보지 못했다"는 발언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이는 흐루쇼프의 발언이 와전된 것이다. [6] 생전 최종 계급은 대령이였으나 순직 이후 1계급 특진하여 소장이다. [7] 이쪽은 좀 억울할 수도 있는 게 가가린의 성공 때문에 급하게 쏜 면이 있다. [8] 미국에서 최초로 궤도 비행한 우주인은 그 유명한 존 글렌. [9] 참고로 위 영상은 TB CCTP (일명 USSR TV)라는 당 산하 방송국의 사인 온오프 영상이다. 유리 가가린은 57초에 나온다. [10] 물론 반대로 미국이 우주를 먼저 갔다고 한들 소련 또한 달 착륙을 목표로 설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체제 경쟁에 의한 산물이라 한들 이러한 투자는 양국의 우주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아낌없이 이끌어냈다. 비록 그것의 결과가 과도한 돈지랄로 인해 미국조차도 한동안 때려치고 소련은 아예 무너지긴 했지만, 불가능을 가능케 한 점에서 우주 탐사와 달 탐사 모두 유의미한 업적을 지니고 있다. [11] 그러나 근미래에 우주 개발이 진행된다면 착륙할 지도 모른다. 화성을 목표로 한 마당에 달 착륙을 못 할까. 기술은 우리가 신경쓰지 않고 있는 상황에도 눈부신 속도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사상 최초의 슈퍼컴퓨터 세계 최초의 상용 CPU 지금의 일반 컴퓨터보다 계산 능력이 딸리는데. [12] 동쪽으로 모스크바, 서쪽으로는 벨라루스 공화국과 인접해 있다. 지금은 그의 이름을 따서 가가린 시로 개칭되었다. [13] 당시 소련에서는 초등 교육까지는 무료였다. 대학 교육 과정을 무상으로 전환한 것은 1955년부터였다. 1930년대부터는 중등 및 고등전문교육기관과 같은 노동자ㆍ농민 전문학교나 군사학교 등을 점차 무상화하게 됐다. 지식인을 양성하는 대학의 경우 1940년 기준으로 1년 학비가 150~300루블이었는데, 당시 노동자 평균 임금이 300~400루블인 점과 의료 및 주거가 무상인 점 세금이 낮은 점을 감안하면 비교적 저렴했다. 참고로 1955년 기준 소련 노동자 평균 임금은 525루블이며, 학비가 계속 인하된 점을 고려하면 결코 비싸지 않았다. 물론 모든 것이 파괴되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대학교육까지 무상화하려던 노력은 잠시 연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전후 재건기에 점진적으로 대학 학비를 인하했다. 그렇게해서 1955년이 돼서야 대학교육도 전면적으로 무상화 됐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할 점은 그 초등교육의 무상화도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이 실행되고 나서야 자리 잡았다는 점과 이런 것을 시도한 나라가 당시로서는 소련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 [14] 그가 157cm의 단신이 었기 때문에 시야각이 확보가 안됐을 것이다. [15] 미국의 첫번째 우주비행사 양성 프로그램인 머큐리 계획에서도 의도적으로 키가 작은 사람을 뽑았다. 지금도 우주비행사 선발 기준에 키가 6피트(182.88cm)를 넘으면 결격사유가 된다. [16]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여서, 닐 암스트롱을 달에 처음 발을 디딜 사람으로 뽑은 이유 중 하나가 과시욕이 없다는 것이었다. [17] 가가린 뿐만 아니라 레오노프와 티토프도 모두 소장, 대장으로 승진했다. [18] 일본 쪽에서 나온 이설로는 "지구는 푸른 베일을 감싼 신부와도 같았다"(地球は青いヴェールをまとった花嫁のようだった)고 했다는 말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19] 러시아의 일간지로 당시엔 소련의 국영지였다. [20] 정확히는 국방장관이었던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의 제안. [21] 여담으로 당시 낙하산을 메고 낙하하는 가가린을 보고 느낀 점을 농부의 손녀가 회고하기를, 밖에 나가봤는데, 무슨 주황색 물체가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우리 농장에 착륙했다.라고 했다. [22] 대서양을 두 번째로 무착륙 횡단한 사람은 버트 힝클러(Bert Hinkler)이다. 무모하지만 꼼꼼하고 빈틈없는 조종사였다고 평가되며, 영국-호주 간 비행거리를 단축하려고 시도하다 1933년 이탈리아에서 사망했다. [출처] 라이프(잡지) 1961년 16호 [24] 우주에 두 번째로 간 사람은 앨런 셰퍼드(Alan Bartlett Shepard, Jr/1923~1998)이다. 당연히 가가린 만큼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알려진 수준인데, 그도 그럴 것이 1971년 아폴로 14호를 타고 에 가서 발자국을 남긴 다섯 번째 지구인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달에서 최초로 골프를 친 사람이다. 냉전 시대에 미국인으로서 더 위대하다며 열폭한 미국이 열심히 홍보해주고, 일찍 사고로 요절한 가가린과 달리 제법 오래 살면서 늘그막까지 살았으니 그도 나름대로 이름을 널리 알린 편이다. 하지만 1980년대 한국 인명 백과 사전에서 가가린은 꼭이라고 할 정도로 자주 나왔지만 셰퍼드는 생략된 경우가 많았다. 되려 달에 처음으로 간 암스트롱이 더 자주 나오곤 했다. 당시 미국 과학잡지를 번안하여 국내에서 출판하던 '사이언스'를 보면 존 글렌(궤도비행), 앨런 셰퍼드, 닐 암스트롱, 샐리 라이드(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인) 등 미국의 우주비행사 위주로 우주비행 약사를 소개하는데, 거기서도 스푸트니크와 유리 가가린이 나온다. [25] 이분은 미국인 최초로 EVA를 실시한 우주비행사이지만, 아폴로 1호의 화재때문에 1967년 순직한다. [26] 제일 뒤의 장교는 오버코트를 입고 있어 계급 식별이 불가능하지만 앞줄 왼쪽은 공군 대령이며 그 옆의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교는 모표에 날개 마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육군 중장으로 추정된다. [27] 1:56~2:55 부분에서 가가린의 요절에 대한 소련 주민들의 반응을 볼 수 있으며, 10:52~10:59 부분을 보면 훌쩍이는 사람도 보인다. [28] 2020년 3월에 타계했다. [29] 1959년생. [30] 1961년생. [31] 불가리아에서 대놓고 이런 팝송이 나올 정도로 문자 그대로 인기가 폭발하고 있었다. [32] 그도 그럴 것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주라는, 도달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곳에 최초로 도달했고 지구의 진짜 모습을 보았으니 성인급으로 대접 안 받는 게 이상한 수준이다. [33]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로 우주 비행사로 선발되고 최초로 우주에 나간 흑인이 될 수 있었던 로버트 헨리 로렌스 주니어(Robert Henry Lawrence, Jr.) 소령이다. [34] STS-1 미션의 날짜 자체가 보스토크 1호 20주년과 같다. 원래 이틀 전에 발사하기로 되어있었지만 이런저런 문제로 미뤄지다가 우연히 겹쳤다. [35] 사실 징크스라기 보단 사람이 긴장함으로써 배뇨를 하고싶다는 욕구를 느끼는 거라 어찌보면 당연한 거다. 우주로 나가는게 얼마나 위험한지 훈련으로 뼈저리게 느끼는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로 나가기 직전에 느끼는 긴장감은 정말 그들만 알 것이다. [36] 반면에 맨 마지막에 나오는 인물은 역사적으로는 히포크라테스였으며, 최근에는 20세기의 인물들인 에드먼드 힐러리 다비트 힐베르트 등이 더 뒤에 추가되어 나오는 판본도 있다. [37] 여담으로 소련은 대중에게 잊혀졌다. 퍼라이어라는 소설에서 고대의 유물인 지구 최초의 우주 로켓 장난감을 보면서 옆에 적힌 CCCP가 뭐냐고 묻자 아무도 모른다는 내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