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국과 소련의 유인 우주진출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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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주 정책 Space policy of the United Stat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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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계획 1958~1963 |
제미니 계획 1964~1966 |
아폴로 계획 1961~1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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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토크 계획 1958~1963 |
보스호드 계획 1964~1965 |
소유즈 계획 1960~현재 |
머큐리 미션 패치 | 머큐리 모듈(우주선)[1] |
1. 개요
머큐리 계획(Project Mercury)은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진행된 미국의 첫 유인우주계획이며, 냉전시기 우주 경쟁에서 미국이 소련보다 먼저 인간을 우주로 보내기 위해 시작된 계획이다.1957년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성공시키자 미국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이에 소련보다 먼저 인간을 우주로 보내겠다! 라고 다짐했다.
그동안 미국의 우주 개발은 육해공군 및 기타 연구소에서 서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미국 정부는 이들 연구소들을 모두 통합하여 NASA를 설립한 후 그동안 중용하지 않았던 독일 투항자 출신의 베르너 폰 브라운을 총책임자에 앉혔다.[2]
NASA가 설립되고 베르너 폰 브라운의 주도하에 유인 우주 계획인 머큐리 계획이 추진되었다. 머큐리 계획은 1인승 유인우주선 계획이었으며 종료 후 2인승 유인우주선 제미니 계획과 3인승 유인우주선이자 달에 인간을 보낼 아폴로 계획으로 이어진다.
2. 머큐리 계획 초기
2.1. 우주인 선발
최초의 머큐리 계획은 7명의 우주비행사가 각각 2번의 비행(탄도비행과 궤도비행)을 하여 총 14번의 미션을 수행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고, 1961년 5월 인류 최초로 우주에 인간을 보낼 예정이었다.1958년에 머큐리 계획의 시작이 발표된 뒤, 일 년 후 1959년 4월 9일 NASA는 일곱 명의 우주비행사들(일명 머큐리 세븐)을 선발한다. 참고로 7명을 뽑은 이유는 성경에서 유래한 럭키세븐의 미신적 힘을 받으려고 했다는 것이 업계 및 NASA에서도 공공연한 비밀. 실제로 나사는 그 후로도 숫자의 저주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이야기가...[3]
왼쪽부터 앞줄은 월리 시라, 디크 슬레이튼, 존 글렌, 스콧 카페터, 뒷줄은 앨런 셰퍼드, 거스 그리섬, 고든 쿠퍼 |
또한 몇 마리의 원숭이와 침팬지도 선발되었으며, 그 중 두마리의 히말라야원숭이(샘과 미스 샘)과 침팬지( 햄과 에노스)가 우주로 가서 미션을 수행했다.
2.2. 우주선 시험 계획
머큐리 계획은 크게 4단계로 계획되었다.- 1. 우주선 자체의 성능 검증을 위한 시험
- 2. 우주선 내부의 상태 검증을 위한 시험
- 3. 탄도비행 미션(일명 머큐리-레드스톤)
- 4. 궤도비행 미션(일명 머큐리-아틀라스)
우주선의 자체 성능시험으로는 머큐리 모듈(즉 우주선)의 내구성 시험을 위한 지상시험과 강제 탈출 장치의 성능시험이 있다. 상승 중 탈출시험을 위해 만든 로켓인 '리틀 조'라는 로켓도 있으니 참고. 후속로켓이 아폴로 계획에서도 나온다.
우주선의 내부 상태를 검증하기 위한 시험은 먼저 계측장비를 넣고서 레드스톤과 아틀라스 로켓에 각각 조립한 후 쏘아본 후, 침팬지를 이용한 생체실험도 한다.
탄도비행에 사용하는 로켓은 2차 대전 당시 나치독일에서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가 개발한 V2로켓을 개량하여 중거리 탄도탄으로 쓰고 있는 미국의 레드스톤 로켓을 개량하였다.(개량해야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대표적으로 ' 포고 현상'이 있다.)
따라서 초반 두 번의 미션에 로켓 완성체의 이름은 우주선명-발사체명의 법칙에 따라 머큐리-레드스톤 이라 불린다. 하지만 궤도비행은 불가능한데, 레드스톤 로켓의 태생자체가 중거리탄도탄이고 40년대 기술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로켓자체가 궤도비행자체를 못한다. 따라서 그보다 무거운 사람이 들어가는 유인우주선은 아틀라스 로켓을 이용하여 탄도비행을 하게 된다.
따라서 탄도비행은 잠시 동안 진공의 상태에 우주선을 노출시켜서 우주인과 우주선이 우주공간에서 견딜 수 있느냐를 실험하게 된다. 또 과연 사람도 침팬지와 히말라야원숭이처럼 우주에서 견딜 수 있느냐를 실험하며, 아틀라스 로켓을 이용한 궤도비행에서는 우주선의 자세제어 로켓기술을 검증하며 향후 이루어지게 될 유인 우주 탐사계획에 필요한 선행기술을 확충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큰 문제없이 진행되던 계획이 1961년 4월 12일에 그만...
3. 소련의 성공으로 인해 변경된 계획
1961년 4월에는 소련에서 유리 가가린을 지구 궤도에 올렸다가 생환시키자 위기감을 느낀 NASA는 머큐리 계획을 대폭 수정했다.
수정 계획은 이렇다
- 미션은 우주인당 1번으로 축소한다.
- 초반 2번의 미션은 탄도비행을 한다.
- 나머지 5번의 미션은 궤도비행을 한다.
초기 계획에 비해 절반으로 축소되었다. 머큐리 계획 도중 미션의 계획과 규모가 아폴로 계획으로 한 번에 가기 힘들다고 판단. 중간에 제미니 계획을 새로 만든다. 이미 유리 가가린의 궤도 비행으로 머큐리 계획의 의미가 퇴색된 감이 있고, 소련보다 빨리 달에 간다는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머큐리 계획을 축소하고, 제미니 계획을 추진하기로 한 것. 이렇게 도입된 제미니 계획은 보여주기식의 의미가 강했던 머큐리 계획에 비해 철저히 실용적인 미션 위주로 구성이 되었다.
4. 미션
4.1. 무인 미션
미션명 | 로켓명 | 목적 | 발사일 | 성공 여부 | 특징 |
LJ-1 | 리틀 조[4] | 비상탈출장치 작동 시험 | 1959년 8월 21일 | 실패 | 발사 35분 전 누전으로 인해 비상탈출장치 오작동 |
BJ-1 | 빅 조[5] | 재진입 시험 | 1959년 9월 9일 | 부분적 성공 | 부스터 엔진이 분리되지 않았으나, 머큐리 모듈 모형은 재진입에 성공함 |
LJ-6 | 리틀 조 | 비상탈출장치 작동 시험 | 1959년 10월 4일 | 성공 | 5분 10초 동안 비행 |
LJ-1A | 리틀 조 | 최대 압력 상황(Max Q)에서의 비상탈출장치 작동 시험 | 1959년 11월 4일 | 일부 실패 | 발사 및 귀환에는 성공했으나 비상탈출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 |
LJ-2 | 리틀 조 | 고고도에서의 영장류가 탑승한 머큐리 모듈 탈출 실험 | 1959년 12월 4일 | 성공 | 샘이라는 히말라야원숭이가 탑승했다. |
LJ-1B | 리틀 조 | 최대 압력 상황(Max Q)에서의 비상탈출장치 작동 시험 | 1960년 1월 21일 | 성공 | LJ-1A와 동일한 목적, 이번에는 미스 샘이라는 히말라야원숭이가 탑승함 |
BA-1 | 비상탈출장치[6] | 비상탈출장치 작동 시험 | 1960년 5월 9일 | 성공 | 최초로 실제 머큐리 모듈을 이용한 실험 |
MA-1 | 아틀라스 로켓 | 아틀라스 로켓-머큐리 모듈의 호환성 확인 | 1960년 7월 29일 | 실패 | 발사 58초 후 발사체의 구조적 결함으로 이상으로 작동중단, 머큐리 모듈은 파괴됨[7] |
LJ-5 | 리틀 조 | 머큐리 모듈 비행 실험 | 1960년 11월 8일 | 실패 | 발사 16초 후 비상탈출장치가 조기 작동함. |
MR-1 | 레드스톤 로켓 | 머큐리 모듈 안정성 확인 및 레드스톤 로켓과 호환성 확인 | 1960년 11월 21일 | 실패 | 레드스톤 로켓의 이상으로 4인치 떠오른 뒤 작동중단. 비상탈출장치는 정상작동 영상 |
MR-1A | 레드스톤 로켓 | 무인 저 궤도 비행 실험 | 1960년 12월 19일 | 성공 | 15분 41초 동안 비행 |
MR-2 | 레드스톤 로켓 | 영장류가 탑승한 머큐리 모듈 실험 | 1961년 1월 31일 | 부분적 성공 | 역추진 로켓이 예상보다 먼저 분리되고 모듈이 침수되는 일이 있었으나, 탑승한 침팬지 햄은 무사했다. |
MA-2 | 아틀라스 로켓 | 아틀라스 로켓-머큐리 모듈의 호환성 확인 | 1961년 2월 21일 | 성공 | MA-1과 똑같은 목적 |
LJ-5A | 리틀 조 | 최대 압력 상황(Max Q)에서의 비상탈출시 영향측정 | 1961년 3월 18일 | 부분적 성공 | LJ-5처럼 비상탈출장치 오동작. 하지만 다른 목적은 달성했다 |
MR-BD | 레드스톤 로켓 | 레드스톤 로켓 부스터 안정성 실험 | 1961년 3월 24일 | 성공 | MR-2에서 발생한 로켓 문제를 해결 및 보완하기 위한 미션, 이 미션의 성공으로 레드스톤 로켓은 안정성이 확인되어 무인 실험이 종료된다. |
MA-3 | 아틀라스 로켓 | 아틀라스 로켓-머큐리 모듈의 궤도 진입 실험 | 1961년 4월 25일 | 실패 | 발사 40초 후 아틀라스 로켓의 유도시스템 이상으로 폭발, 머큐리 모듈은 재진입 성공 |
LJ-5B | 리틀 조 | 최대 압력 상황(Max Q)에서의 비상탈출장치 작동 시험 | 1961년 4월 28일 | 부분적 성공 | 리틀 조의 발사체 모터 하나가 4초 후에 점화되어 예상보다 높은 압력을 받게 됨, 하지만 머큐리 모듈은 무사했다. |
MA-4 | 아틀라스 로켓 | 지구 궤도에서의 머큐리 모듈 환경 실험 | 1961년 9월 13일 | 부분적 성공 | 일부 시스템에서 오차가 발견되었으나, 나머지는 매우 성공적이었다.[8] |
MS-1 |
블루 스코트 II 로켓[9] 위키 백과(영어) |
머큐리 모듈의 원활한 통신[10]을 위해 소형 통신위성을 궤도에 올림 | 1961년 11월 1일 | 실패 | 발사 43초 후 로켓에 이상이 감지되어 자폭함, 이후 머큐리 계획을 위한 소형 위성이 발사되는 일은 없었다. |
MA-5 | 아틀라스 로켓 | 궤도에서의 영장류가 탑승한 머큐리 모듈 환경 실험 | 1961년 11월 29일 | 부분적 성공 |
에노스라는 침팬지가 탑승함. 발사는 성공했지만 자세 제어 시스템의 이상으로 머큐리 모듈이 정상 위치를 이탈해서 제자리를 잡는데 연료를 너무 많이 소모했다. 그래서 예정된 세 번의 궤도 비행중 두 번만 돌고 귀환해야했다. 하지만 아틀라스 로켓의 안정성과 머큐리 모듈의 궤도 비행 가능성이 확인되었으므로 마침내 미국은 유인궤도 비행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
4.2. 유인 미션
머큐리 계획의 특징은 럭키7을 너무 좋아했다는 것이다.우주선마다 끝에7을 붙이며 머큐리라는 우주선의 제품명 외에 자신만의 애칭을 붙일 권한이 있었다.
따라서 발사순서별 이름은 아래와 같다.
파일럿 이름 | 미션명 (우주선명-발사체명) | 호출부호 | 주요 목적 | 발사일 |
앨런 셰퍼드 | 머큐리-레드스톤 3 (MR-3) | 프리덤7 (자유 7호) | 우주에 있는 우주인의 상태 평가 | 1961년 5월 5일 |
거스 그리섬 | 머큐리-레드스톤 4 (MR-4) | 리버티 벨7 (자유의 종 7호) | 우주에 있는 우주인의 상태 추가 평가 | 1961년 7월 21일 |
존 글렌 | 머큐리-아틀라스 6 (MA-6) | 프렌드쉽7 (우정 7호) | 궤도에 있는 우주인의 상태 평가 | 1962년 2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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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카펜터 | 머큐리-아틀라스 7 (MA-7) | 오로라7 | 궤도에 있는 우주인의 상태 추가 평가 | 1962년 5월 24일 |
월리 시라 | 머큐리-아틀라스 8 (MA-8) | 시그마7 | 9시간동안의 궤도비행 | 1962년 10월 3일 |
고든 쿠퍼 | 머큐리-아틀라스 9 (MA-9) | 페이스7 | 하루동안의 궤도비행 | 1963년 5월 15일 |
4.2.1. 머큐리-레드스톤 3호 ( 프리덤 7호)
프리덤 7호의 발사 순간 |
프리덤 7호 문서 참조
4.2.2. 머큐리-레드스톤 4호 (리버티벨 7호)
거스 그리섬이 탑승, 1961년 7월 21일 발사되어 15분 37초 동안 탄도비행을 하였다.프리덤 7호와 마찬가지로 레드스톤 로켓의 한계 때문에 탄도비행만 하고 귀환했는데, 비행 자체는 순조로웠으나 리버티벨 7호 캡슐이 바다에 착수했을때 갑자기 해치의 비상 분리장치가 작동, 해치가 분리되어 튀어나가버렸고, 그리섬은 하마터면 익사할 뻔했다. 그리섬은 겨우 구조되었으나 리버티벨 7호는 침수로 인해 바다로 가라앉아버려[11] [12][13] 왜 비상 분리장치가 작동했는지는 당시에 알 수 없었다. 기기 오작동 가능성 외에도 그리섬이 실수로 장치를 작동시킨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으나 그리섬은 이를 완강히 부인했는데, 그 증거로 존 글렌, 월터 쉬라, 고든 쿠퍼 모두 해치를 손잡이를 돌리다가 손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지만 그리섬만이 그런 상처가 없다는 점을 들었다. 결국 그리섬의 우주비행 자격은 유지되었다.
그리섬이 마지막에 익사할 뻔한 사실이 크게 보도되었지만, NASA는 머큐리 4호 비행 자체는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하였고, 그리하여 동일한 미션을 3회째 반복하기로 되어 있었던 머큐리-레드스톤 5호 계획을 취소하고 곧바로 머큐리-아틀라스 계획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섬은 그 후 앨런 셰퍼드가 메니에르병으로 비행자격 상실, 존 글렌의 우주비행사 은퇴로 인해 NASA 우주인단 최고참이 되어 제미니 계획의 첫 유인 비행인 제미니 3호 선장을 맡았고, 그 후 아폴로 계획에서도 첫 유인 비행인 아폴로 1호 선장이 되었으나 아폴로 1호 화재 참사로 순직하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리섬이 아폴로 우주선을 만들때 리버티벨 7호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치에 비상 분리장치를 삭제할 것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 아폴로 1호 화재 때 탈출하지 못하고 순직한 것이다....그 후 아폴로 우주선은 다시 해치에 비상 분리장치를 장착하였다.
리버티벨 7호 캡슐은 1999년 디스커버리 채널에 의해 바다에서 인양되어 현재 인디애나폴리스 어린이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4.2.3. 머큐리-아틀라스 6호 (프렌드쉽 7호)
프렌드쉽 7호의 발사순간 |
시작은 영 좋지 못했는데, 로켓과 머큐리 모듈의 분리가 2.5초 늦게 시작되어서 궤도에 진입할 때 제자리를 잡느라 연료공급장치에 있던 연료 27.4 kg중 2.4kg를 사용해야 했다. 그래도 그 이후에는 미국인 최초로 우주에서 일몰과 일출을 보는 등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였다. 다만 하와이 추적 스테이션을 지나던 중에 통신에 잡음이 생기는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비행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멕시코 추적 스테이션에서 yaw[14]제어 제트가 고도 제어 프로그램에 문제를 주고 있다고 보고함으로써 관제 센터는 절망에 빠지는데, MA-5과 동일한 상황이라 미션 조기중단의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동시에 글렌도 이상을 발견했는데, 자동 안정화 및 제어 시스템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지만 정작 우주선은 오른쪽으로 표류하고 있었다! 글렌은 우주선을 왼쪽으로 돌리기 위해 왼쪽 yaw 추진기를 작동시켰지만 반응이 없자 수동 제어 모드로 전환한 뒤 고도를 유지하기 위해 연료를 가장 적게 소모하는 플라이 바이 와이어 모드로 전환했다. 약 20분 후에 갑자기 추진기가 정상으로 돌아와서 글렌은 자동 제어모드로 변경했지만, 몇 분 후에 또 고장 나서 결국 미션 내내 플라이 바이 와이어 모드로 진행해야 했다.
관제 센터에서는 글렌이 문제를 잘 해결하고 있다고 판단했지만 다른 문제가 발견되었는데, 세그먼트 51이라는 센서에서 더 이상 우주선의 열 차폐가 제 위치가 아니라고 보고했다. 이 보고가 사실이면 재진입을 하다가 글렌이 사망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라서 관제 센터와 엔지니어들은 겨우 대응방안을 만들었지만 그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였다.
두 번째 궤도에서는 예정된 비행계획의 수행과 우주선의 고도 유지(자동 제어가 불가능하므로)를 동시에 하느라 글렌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한편 파일럿 관측 실험이 진행되었는데, 원래는 인도양의 추적선에서 풍선을 날려 보낼 예정이었지만 기상상태가 나빠서 낙하산 조명탄을 발사했지만 글렌은 주변에 있던 구름의 번개만 관찰할 수 있었다. 궤도를 다 돌 무렵 연료를 예상보다 더 많이 소모한 상태였지만 더 이상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마지막 세 번째 궤도에서는 예정된 파일럿 관측 실험이 기상 악화로 취소되었으며, 글렌은 농담으로 해병대 사령관에게 공식적으로 "정규 비행수당을 인상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했다.
세 번째 궤도를 다 비행한 후 재진입 절차가 시작되었다. 발사된 지 4시간 33분 만이었다. 세그먼트51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태였지만, 재진입은 시작되었고, 15분 후에 프렌드쉽 7호는 안전하게 대서양에 착수했다.
이후 분석결과, 세그먼트51의 보고는 잘못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돌아올 때까지 엔지니어들은 글렌에게 이상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나중에 이를 들은 글렌은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렌드십 7호 캡슐이 한국에 전시된 적 있었다. 우정 7호 서울에 오다
4.2.4. 머큐리-아틀라스 7호 (오로라 7호)
머큐리 7호는 스콧 카펜터가 탑승했으며, 머큐리 6호의 존 글렌과 똑같이 지구 궤도를 세 바퀴 돌고 귀환했다.그런데 카펜터는 비행 중 수많은 자잘구레한 조종 실수를 범했다. 당시에 머큐리를 타고 우주로 처음 나간 다른 비행사들도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넋이 빠져 약간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카펜터는 너무 흥분해서 우주 이곳 저곳을 보려고 자세제어 장치를 요리조리 이용하여 선체를 뒤엎고 돌리며 지구를 관찰했다. 때문에 비행 중 연료가 너무 많이 소모되어 하마터면 지구로 귀환하지 못할 뻔 했다. 게다가 귀환시 수동제어시스템을 끄지 않아 연료가 과도 소모되었고, 역추진 점화 로켓 각도를 잘못 설정하여 점화했으며, 예정보다 역추진 로켓을 3초 늦게 점화하는 등 실수를 연발했고, 결국 머큐리 7호는 예정된 착수 지점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착수했고, 통신이 두절되었다. 때문에 구조 헬기가 그를 발견할 때까지 3시간 동안 NASA는 그가 사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NASA는 카펜터의 여러 실수로 인해 우여곡절을 겪은 머큐리 7호 비행을 통해 다른 정상적인 비행에서는 알 수 없었던 머큐리의 장단점에 대해 보다 잘 파악하게 되었다....
스콧 카펜터는
4.2.5. 머큐리-아틀라스 8호 (시그마 7호)
시그마 7호는 월리 시라가 탑승했으며, 지구 궤도를 6바퀴 돌고 귀환했다. 이 계획은 머큐리 계획에서 가장 성공적인 미션으로 기록되어 있다.여담으로 이때 월리 시라가 오메가 스피드마스터를 차고 올라갔는데 NASA가 이를 알고 우주 공간에서 비상시에 사용 가능할 손목시계 Test를 진행하게 된다. 각종 테스트 결과 오메가 스피드마스터가 NASA에서 인증한 유일한 우주 선외활동 가능 시계가 되어 머큐리 계획, 제미니 계획, 아폴로 계획의 우주 선외활동에 사용되었다.
4.2.6. 머큐리-아틀라스 9호 (페이스 7호)
페이스 7호는 고든 쿠퍼가 탑승했으며 지구 궤도를 22.5바퀴 돌고 귀환했다. 미국인 최초로 우주에서 하루를 보냈으며, SSTV를 이용하여 tv중계를 하기도 하였다. 여기까지는 시그마 7호처럼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19번째 궤도를 돌 때부터 이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우선 0.05g 중력 경고등[15]이 켜졌지만 쿠퍼는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보고했고, 관제소에서도 데이터 분석 결과 단순한 오류로 판단하여 재진입을 하지 않는다. 이게 큰 실수였는데, 20번째 궤도를 돌때 쿠퍼는 자세 제어를 잃었고 21번째 궤도에서는 250V 메인 인버터에 전력을 공급하는 버스바에 쇼트가 발생하면서 자동 안정화 및 통제 장치에 전력이 공급되지 않게 되어 재귀환을 수동으로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21번째 궤도를 지날 때, 하와이와 잔지바르 통신소만 통신 범위에 있었지만 통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존 글렌은 쿠퍼가 새로운 재진입 절차를 준비하는 걸 도와주었다. 설상가상으로 인버터가 폭발하자, 쿠퍼는 자신의 우주복과 우주선에 이산화탄소 수치가 올라간다고 보고했으며, 잔지바르를 통과하면서 카펜터에게 “모든 것들은 작은 것들을 쌓는 것부터 시작된다.”라는 오래된 표현을 말할 정도로 쿠퍼는 상황내내 침착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글렌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으며, 쿠퍼는 우주선의 재진입 각도를 34 °로 정렬한 뒤 역추진 로켓을 발사했다.
15분 뒤, 고든 쿠퍼의 페이스 7호는 자동 제어 시스템의 이상에도 불구하고 가장 정확하게 착지했다. 이후 NASA는 머큐리 모듈의 안정성 문제와 예산 문제로 머큐리 계획을 종료시키면서 페이스 7호는 마지막 미션이 되었고, 이후 제미니 계획이 시작된다.
4.3. 취소된 미션
4.3.1. 머큐리-주피터 (MJ-2)
머큐리 계획 초기에는 레드스톤 로켓과 아틀라스 로켓, 주피터 로켓을 발사체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주피터 로켓을 이용한 머큐리-주피터는 예산문제와 아틀라스 로켓을 이용한 실험에서 더 좋은 자료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취소된다.4.3.2. 리틀 조 5A (LJ-5A)
리틀 조 5A는 돼지가 탑승할 예정이었던 미션이나 돼지의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어 취소되었다. 대신에 그4.3.3. 머큐리 풍선 비행 실험 계획
말 그대로 머큐리 모듈에 풍선을 달아서 최대 고도 24km까지 올린다음 바다에 떨어뜨려 모듈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는 계획이었다.하지만 연구진들은 루이스 연구센터의 고도 바람 터널(Lewis Research Center's altitude wind tunnel)에서 동일한 상황의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는데다가 역추진 로켓까지 사용이 가능하고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고 판단하여 이 실험 계획을 취소시킨다.
한편 소련도 보스토크 계획에서 비슷한 실험을 계획했으며, 실제로 시행까지 했지만 우주복에 이상이 있어서 탑승자(우주인이 아닌 공수 부대원이었다)는 사망했다.
4.3.4. 머큐리-레드스톤 3A (MR-3A)
MR-2의 역추진 로켓의 이상 분리이후, 로켓 연구의 총 책임자였던 베르너 폰 브라운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무인 미션(MR-BD)을 계획했으나 NASA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바로 레드스톤 로켓에 역추진 로켓을 제외하고는 문제가 없으니 일단 사람을 우주로 보내자는 계획이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MR-3A는 취소된다.
만약 MR-3A이 강행되었다면 인류 최초의 우주인은 유리 가가린이 아니라 엘런 셰퍼드가 되었을지도...
4.3.5. 머큐리-레드스톤 5 (MR-5)
레드스톤 로켓을 이용한 탄도비행으로 계획되었으며, 존 글렌이 탑승할 예정이었다.하지만 1961년 8월 소련이 궤도비행을 하루 동안 성공시키면서 NASA는 모든 탄도비행을 취소시킨다. 그리고 존 글렌을 아틀라스 로켓을 이용한 궤도비행에 투입시킨다.
4.3.6. 머큐리-레드스톤 6 (MR-6)
디크 슬레이튼이 탑승할 탄도비행으로 계획되었으나 MR-5와 같은 이유로 취소된다.4.3.7. 머큐리-아틀라스 7 (MA-7)(델타 7호)
왜 디크 슬레이튼의 델타 7호만 취소되었는지 물으실 건 당연한 이야기.디크 슬레이튼의 경우 원래 1962년 3월 16일에 머큐리-아틀라스7의 파일럿으로 선발되었으나 이틀 후 받은 건강검진에서 심장에 이상 신호가 발견되어 비행중지(그라운딩) 처분을 받고 우주에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공군에서도 그라운드된 파일럿을 테스트 파일럿으로 써먹을 리 없으니 기행직으로 밀리거나 퇴역해야 하는 상황이라 슬레이튼 본인도 갈 곳이 없었고, NASA 입장에서도 우주는 못 가지만 힘들게 키워낸 우주비행사[17]를 내보내는 것이 매우 아까웠기에 '수석 우주비행사'라는 당시에 없던 직위까지 만들어 그를 붙잡았다. 비록 우주는 나가지 못했으나 디크 슬레이튼은 대외 홍보직에 가까운 초창기의 수석 우주비행사를 거쳐 우주비행사 전체를 관할하는 승무원 디렉터가 되었고, 이 자리에서 제미니 계획과 아폴로 계획을 중추적으로 이끌며 다른 비행사들 이상의 업적을 올렸다. 그 후에도 계속 NASA에서 근무하면서 술, 담배를 끊고 건강 회복을 위한 여러 노력을 하여 20여년후 심장 박동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자 비행 자격을 되찾고 아폴로-소유즈 계획에서 우주에 오르는 꿈을 실현했다.
참고로 델타 7호는 본인이 원하던 애칭이라서 공식 문서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다.
4.3.8. 머큐리-아틀라스 9A (MA-9A)
고든 쿠퍼가 탑승할 예정이었던 궤도비행이었으며, 시그마 7호와 동일하게 지구 궤도를 6바퀴 비행할 예정이었다.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우주 비행사가 부족한 상황이라(카펜터는 백업파일럿, 존 글렌과 엘런 셰퍼드는 정치적 아이콘이 되어 비행 일정을 잡기 힘들었으며 슬레이튼은 심장 이상으로 지상근무직으로 밀리고 거스 그리섬은 머큐리-아틀라스 4의 사고 조사 중이었다.) 고든 쿠퍼는 지구 궤도를 18바퀴 비행하는 MR-9의 파일럿이 된다.
4.3.9. 머큐리-아틀라스 10 (MA-10)
엘런 셰퍼드가 탑승할 예정이었던 미션이며, 이번에는 우주에서 3일(!)동안 보낼 예정이었다.하지만 예산 초과와 페이스 7호의 실패로 인해 위험성이 크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여담으로 호출부호로는 프리덤 II이었다.
5. 결산
머큐리 계획이 성공적으로 종료되면서 미국은 우주에 사람을 보내는 부분에서만 겨우 소련을 어느 정도 따라잡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여전히 소련이 우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며, 이는 제미니 계획 초반까지 유지된다.
그래도 미국은 이때 얻은 유인 우주선 기술들을 제미니 계획에서 사용했으며, 이 덕에 소련을 따라잡을 수 있게 되었다.
애초에 머큐리 계획은 소련을 추격하기 위한 계획이 아닌 소련보다 먼저 인간을 우주로 보내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머큐리 계획이 성공하기 몇 개월 전에 소련이 유리 가가린을 우주에 보내는 데 성공하면서 머큐리 계획의 운명을 뒤바뀌게 된 것이었다.
머큐리 계획은 존 글렌이 궤도 비행이 성공한 후에도 2년여나 지속되었지만, 글렌의 비행으로 사실상 목표를 달성했고 이후 계획들은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NASA 또한 글렌의 성공 이후 바로 아폴로 계획과 이를 위한 새턴 로켓의 개발, 그리고 유인 비행 기술 터득을 위한 제미니 계획에 착수했다. 다만 제미니 계획이 실시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고 존 글렌 이후 머큐리의 나머지 비행들은 그 공백기를 채우기 위한 성격이 큰 것으로 보인다.
6. 여담
계획에서는 케네디 덕분에 미소 간 돈지랄 러시안 룰렛화 돼버렸지만, 우주계획 초기에만 하더라도 머큐리 계획은 소련의 동급미션 보스토크 계획의 대응미션으로서 사실 '사람+우주선'의 수 톤이상의 물체를 우주공간에 띄운다는 기술력 과시 미션이었다.이 때문에 사용된 로켓들도 아폴로 계획과 존드 계획(소련판 아폴로 계획, 후에 소유즈로 넘어간다)이외에는 양국 모두 현용 군사 로켓을 사용하여 발사를 했다.
즉 '우리 로켓이 이렇게 힘이 좋아서 몇톤 몇십 톤을 얹어도 궤도에 올라가니 서방(또는 동구권)나라들은 핵쳐맞기 전에 깝치지 말고 굴복해' 라는 무력시위였다.
7. 대중매체에서의 머큐리 계획
HBO의 다큐드라마 지구에서 달까지, BBC의 다큐멘터리 우주전쟁, 영화 필사의 도전,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제작한 When We Left Earth: The NASA Missions[18]의 1화, 히든 피겨스 등이 이 시절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
주황색 부분은 비상탈출용 로켓으로 로켓에 문제가 발생할 것 같으면 해당 부분의 로켓이 작동하면서 승무원이 탑승한 모듈이 로켓과 분리되게 된다. 다만 정상적인 발사가 진행된다면 우주 궤도에 오르기 전에 떨어져 나간다.
[2]
이전까지 미국 정부는 독일 투항자 출신인 브라운을 중용하지 않고, 미 해군의 뱅가드 계획 등을 우선적으로 지원했으나 연이은 실패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소련에게 뒤쳐지자, 그제야 위기의식을 느끼고 NASA를 설립하여 육해공 및 기타 항공우주 연구기관을 통합하였고, 폰 브라운에게 모든 권한을 주었던 것.
[3]
예시로
아폴로 13호의
13이 있다.
[4]
머큐리 모듈의 비상탈출장치와 열 차폐 시험을 위해 만들어진 고체연료 로켓
[5]
아틀라스 D 로켓, 이후 실험에는 아틀라스 LV-3B를 사용한다.
[6]
아래 사진 참고
[7]
이 미션에서는 비상탈출장치가 없었다.
[8]
이 성공은 큰 의미를 가지는데, 그동안 아틀라스 로켓은 세 번의 미션 중 두 번이나 폭발사고를 일으켜 신뢰도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유인 궤도발사가 불투명한 상태였으나 이 시험 발사의 성공으로 NASA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9]
미국의 관측 로켓
[10]
당시에는 동기 통신위성이 없는 상태였으며, 지상 통신국과 신뢰성이 떨어지는 HF통신을 이용해야 했다.
[11]
케이프 커내버럴 남동쪽 480킬러미터 대서양에 있었다고 한다. 수심은 약 4600m
[12]
참고로 타이타닉호가 있는 곳은 수심 3773m. 그보다 약 827m나 더 깊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13]
'리버티 벨' 이라는 이름처럼. 이때부터 NASA는 우주비행사들이 사령선의 이름을 짓는 전통을 버리고 미션 패치라는 새로운 전통을 도입하게 된다.
[14]
아래 사진 참고
[15]
원래는 재진입을 할 때만 켜져야 하는 경고등이다. 임무도중 이 경고등이 켜지면 기기 오류이거나 궤도에서 이탈했다는 의미.
[16]
이후 더글라스 사와 합병하여 맥도널 더글라스가 되고, 맥도널 더글라스는 이후 보잉에 합병된다.
[17]
우주비행사는 조종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매우 뛰어난 공학적인 지식, 냉철한 판단력 등 조종 이외의 분야에서도 매우 뛰어난 능력과 경험을 지닌 인재이기에 땅 위에서도 할 일이 많다. 우주비행사들은 훈련이 없을 때에도 우주선의 제작 과정에 관여하고, 다른 우주인의 미션에서
CAPCOM을 맡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낸다.
[18]
6부작으로 한국에서는 방영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