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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5 21:34:21

앙리 드 몽포르

파일:앙리 드 몽포르.jpg
성명 앙리 드 몽포르
Henry de Montfort
생몰년도 1238년 11월 28일 ~ 1265년 8월 4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케닐워스 성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우스터셔 이브샴
아버지 시몽 드 몽포르
어머니 엘리노어 플랜태저넷
형제 시몽, 아모리, , 잔, 리샤르, 엘레오노르
직위 도버 성주, 잉글랜드 남동부 5개 항구 관리자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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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시몽 드 몽포르의 장남이다.

2. 생애

1238년 11월 26일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케닐워스 성에서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 존 왕 앙굴렘의 이자벨의 셋째 딸인 엘리노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링컨 주교 로버트 그로스테스테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사촌인 에드워드 왕자와 친분을 맺었다. 1252년 6월 아버지와 함께 가스코뉴 원정을 떠났으며, 1256년 8월 또는 9월에 다시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1258년 6월 뤼지냥 가문이 잉글랜드에서 추방되었을 때, 그는 비밀리에 불로뉴로 들어간 뒤 주민들을 선동해 뤼지냥 가문 인사들이 항구에 막 내렸을 때 공격하게 해 여러 사상자를 양산했다. 1259년 9월 1일 아버지와 함께 다시 프랑스로 갔고, 프랑스 남서부의 비고르 백작령을 아버지로부터 양도받았다. 1260년 10월 13일, 남동생 시몽과 함께 에드워드 왕자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프랑스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 참여했다.

제2차 남작 전쟁 중인 1263년 6월, 남동생 시몽과 함께 켄트에 있는 켄터베리 대주교 사보이의 보니파시오의 영지를 파괴했다. 1264년 1월 루이 9세를 접견하기 위해 아미앵으로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었다. 이 사절단은 루이 9세에게 옥스퍼드 조례에 대한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와 귀족들의 갈등을 중재해달라고 부탁하는 임무를 맡았다. 루이 9세는 헨리 3세의 손을 들어줬고, 이에 시몽 드 몽포르 등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1264년 2월, 앙리는 웨일스 국경지대에 있는 몽포르 가문을 적대하는 영주들의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시몽 드 몽포르가 파견한 분견대를 지휘했다. 그는 2월 28일에 우스터를 함락하고 철저하게 약탈한 뒤 글로스터를 함락했다. 그러다가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가 접근하자 그와 휴전을 맺고 케닐워스로 물러났다. 시몽 드 몽포르는 장남이 에드워드 왕자와 휴전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해 아들을 거세게 질책했다. 그해 5월 14일에 발발한 루이스 전투에서, 앙리와 형제들은 아버지 시몽 드 몽포르의 지휘하에 왕실군을 격파하고 헨리 3세, 에드워드 왕자, 콘월의 리처드 등을 생포하는 데 일조했다.

1265년 1월, 앙리는 에드워드 왕자 영지의 일부인 체스터를 접수했다. 그 해 8월 4일, 아버지 시몽과 함께 이브샴 전투에서 에드워드 왕자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가 지휘하는 왕실군에 맞서 싸웠지만 끝내 패배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가장 먼저 전사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시몽 드 몽포르는 자기 군마가 죽은 뒤 장남마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렇다면 이제 죽을 시간이다!"라고 외친 후 몰려오는 적군과 격투를 벌이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이브샴 수도원에 아버지의 유해와 함께 묻혔다. 그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