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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7 19:46:24

피에르 드 몽포르

성명 피에르 드 몽포르
Piers de Montfort
생몰년도 1205년 ~ 1265년 8월 4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애스턴 캔틀로우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이브샴
아버지 투르스탄 드 몽포르
어머니 윌리엄 1세 드 칸틸루페 의 딸
형제 휴, 이사벨라, 랄프
배우자 앨리스 오들리
자녀 피에르,로베르
직위 보더제트 성주, 잉글랜드 의회 의장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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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2차 남작 전쟁에서 시몽 드 몽포르의 편에 서서 헨리 3세, 에드워드 왕자와 대적했다.

2. 생애

1205년경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애스턴 캔틀로우에서 기사 투르스탄 드 몽포르와 존 왕의 왕실 관리인이자 베드퍼드셔의 이튼 브레이 남작 윌리엄 1세 드 캔틸루프의 딸[1]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몽포르 가문의 방계 집안으로, 워릭셔의 헨리인아덴 마을 근처에 있는 보더제트 성을 중심으로 워릭셔의 상당한 영지를 경영했다. 1216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11살의 나이에 영지를 물려받았고, 외할아버지 윌리엄 1세 드 캔틸루프가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1236년 윌리엄 2세 드 켄틸루프와 함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를 떠났으며, 1242년 헨리 3세의 푸아투 원정에 참여했다. 이후 캠브리지에서 왕명에 의해 금지된 마상창시합에 참여했다가 영지를 일시적으로 몰수당했지만 1245년에 되돌려받았다. 한편, 보더제트 성에서 9마일 떨어진 케닐워스 성은 1244년부터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시몽 드 모옾르의 측근이 되었다. 1248년 초가을 시몽 드 몽포르가 가스코뉴의 세네샬로 재임했을 때, 그의 수행원으로서 활동했다. 1251년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더비셔의 호스턴 성 관리권을 받았지만, 1253년 가스코뉴로 돌아갔다.

1254년 여름 에드워드 왕자와 카스티야의 레오노르[2]의 결혼식 참여를 위해 카스티야를 방문했고, 그 해 9월 19일 보르도에서 왕의 부채에 대한 보증인을 맡았다. 그 후 2년간 헨리 3세의 지시에 따라 외교 임무를 수행했고, 1257년 왕립 평의회 의원에 선임됨과 동시에 웨일스 변경 지대에서 웨일스인들의 습격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스테퍼드셔와 슈롭셔의 보안관을 맡기도 했다.

1258년 4월 시몽 드 몽포르 등 여섯 거물과 함께 옥스퍼드 조례를 작성하고 헨리 3세에게 이를 지키라고 강요해 관철했으며, 왕의 이름으로 잉글랜드를 통치하기 위해 설립된 15인 위원회에 소속되었다. 1258년 옥스퍼드에서 의장으로서 의회를 주재했다. 1259년 가을 헨리 3세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와 파리 협약을 맺기 위해 파견한 사절단의 일원이었으며, 같은 해에 시몽 드 몽포르의 유언 집행자로 임명되었다.

1261년 4월 12일,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헨리 3세가 옥스퍼드 조례를 지키겠다는 맹세에서 해방시키겠다는 교황 칙서를 발표했다. 같은 해 6월에 이 소식이 잉글랜드에 전해지자, 피에르는 위원회 대표 3인 중 한 사람으로서 헨리 3세와 협상했다. 이후 웨일스 공국의 에버게브니 성 관리자로 선임되었으며, 1263년 2월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같은 해 2월 28일 우스터 공략전에 다른 귀족들과 함께 참여했다. 같은 해 7월 헨리 3세와 옥스퍼드 조례를 강요했던 귀족들간의 협약이 맺어졌고, 피에르는 코페 성과 셔번 성을 받았다.

1264년 제2차 남작 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하자, 피에르는 시몽 드 몽포르의 편에 서서 헨리 3세에 대적했다. 1264년 4월 2일에 헨리 3세의 사절들을 만나기 위해 브래클리로 향했다. 그러나 다음날 두 아들 피에르, 로베르와 함께 소 시몽 드 몽포르와 합류한 뒤 노샘프턴 성에 입성했다. 4월 5일, 헨리 3세는 노샘프턴 공방전을 통해 노샘프턴을 탈환했고, 피에르는 두 아들과 함께 생포된 뒤 윈저 성으로 이송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5월 14일 루이스 전투에서 시몽 드 몽포르가 왕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헨리 3세, 에드워드 왕자, 콘월의 리처드 등을 생포한 뒤 풀려났다.

1264년 6월 9인 위원회의 일원이 되어 시몽 드 몽포르의 지시에 따라 국정을 운영했으며, 9월 11일 루이 9세와 교황 특사를 상대로 시몽 드 몽포르 정부를 인정받기 위한 사절단 중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11월 16일 그와 그의 상속인은 레스터셔의 가스소프 영지를 받았으며, 12월 20일 휘팅턴 성과 헤리퍼드 성의 관리권을 받았다. 1265년 봄에 시몽 드 몽포르가 웨일스 변경지대의 반란을 진압하러 출진할 때 동행했으며, 왕실 인장의 공동 보관자도 맡았다.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에 참여했다가 시몽 드 몽포르와 함께 전사했고, 두 아들 피에르와 로베르는 부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 매장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3. 가족



[1]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2]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3세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