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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 동로마 제국 카이사르 Ἀλέξιος Μωσηλέ | 알렉시오스 모셀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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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알렉시오스 모셀레(Ἀλέξιος Μωσηλέ) |
생몰 년도 | 미상 - 미상 |
카이사르 재위 기간 | 831년 ~ 842년 이전 |
부모 | 알렉시오스 모셀레(조부 또는 아버지) |
형제자매 | 테오도시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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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의 카이사르. 836년 테오필로스 황제에 의해 카이사르로 선임되었지만 842년 이전에 테오필로스의 압력을 받아 사임하고 수도원에 들어갔다.2. 생애
콘스탄티노스 6세 치세 때 활동했던 알렉시오스 모셀레의 아들이나 손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트리키오스 직함을 가졌던 테오도시오스라는 형제가 있었다. 836년 테오필로스 황제에 의해 카이사르로 선임되었다. 당시 테오필로스는 테오도라 황후와 결혼한 뒤 831년 이전에 낳았던 콘스탄티노스 왕자가 요절해버리고 이후로 네 딸 테클라, 안나, 아나스타시야, 마리아 풀케리아가 잇따라 태어났지만 아들을 좀처럼 갖지 못하자, 아들이 태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여기고 그를 차기 후계자로 점찍었다. 이에 따라 카이사르로 선임된 그는 뒤이어 테오필로스의 막내딸인 마리아 공주와 약혼했다.836년 여름, 모셀레는 시칠리아를 잠식하고 있는 아랍인들을 정벌하기 위한 원정을 지휘했다. 그는 먼저 무슬림군에 포위되었던 세파루 요새를 구원한 뒤 여세를 몰아 서쪽으로 진격하여 그들에게 몇 차례의 패배를 안겼다. 그러나 838년 말 새로운 무슬림 지원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공세가 중단되었다. 그러던 중 테오도로스의 막내딸이자 자신의 약혼자였던 마리아가 사망했다. 이로 인해 테오필로스와의 인맥이 끊긴 데다, 정적들이 그가 무슬림들과 결탁하여 시칠리아에서 황제가 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모함했다. 테오필로스는 시라쿠사 대주교 테오도로스 크리티노스를 보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오라고 권고했다. 그는 황제의 부름을 받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다가 직위를 박탈당하고 투옥되었다. 알렉시오스 모셀레는 나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의 권고를 받아들인 테오필로스 황제에 의해 풀려난 뒤 지위와 재산을 회복했다.
840년 1월 19일, 테오필로스의 차남 미하일 3세가 태어났다. 이로 인해 모셀레의 입지는 위태로워졌다. 결국 그는 842년 이전에 테오필로스의 압력을 받고 크리소폴리스의 안테미오스 수도원으로 은퇴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