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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07:21:29

카탈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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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
Catalunya
파일:카탈루냐 기.svg 파일:Coat_of_Arms_of_Comunidad_Catalunya.svg.png
<rowcolor=#ffd400> 스페인의 자치 주로서의 주기(州旗) 세녜라(Senyera) 문장
<colbgcolor=#ffd400><colcolor=#ce2b2b> 명칭 카탈루냐어: Catalunya
스페인어: Cataluña
영어: Catalonia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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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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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주도 바르셀로나
면적 32,113km²
인구 7,672,699명
인구밀도 239명/km²
행정수반

살바도르 일라
주가(州歌) < 수확자들((Els Segadors))>[1]
도메인 .cat
1. 개요2. 상징
2.1. 이름2.2. 깃발
3. 주민4. 역사
4.1. 8세기 이전4.2. 바르셀로나 백작령4.3. 아라곤 연합왕국4.4. 스페인 제국4.5. 카탈루냐 반란(수확 전쟁)4.6.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4.7. 현대4.8. 카탈루냐 공화국 독립선언
5. 카탈루냐 독립운동
5.1. 독립하게 될 경우
5.1.1. 카탈루냐의 입장5.1.2. 스페인의 입장
6. 정치7. 문화8. 유명인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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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attachment/catalonia_map.png
지도상에 빨간색으로 칠해진 부분이 카탈루냐[2]

스페인 북동쪽 지방으로 북쪽은 피레네 산맥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프랑스와 경계를 이루고 동쪽과 남쪽은 지중해에 면하고 서쪽은 에브로 강 유역의 아라곤 지방과 발렌시아 지방에 접한다. 주도는 바르셀로나로 바르셀로나· 지로나·례이다·타라고나 4개 주를 포함한다. 카스티야 지역을 대표하는 마드리드와는 라이벌 관계고 유명한 엘 클라시코도 두 지역 간 자존심 대결이다. 면적은 32,108km²이고 7,523,0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스페인 내부에서도 바스크 지방과 함께 가장 분리주의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유명하다.[3] 이들의 상징기는 노란색 빨간색 줄무늬로 이루어진 깃발이다. 북부 산악 지대는 겨울이 춥지만 지중해에 면한 지대는 지중해 특유의 온화한 기후가 나타나는 편이다.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GDP는 근소한 차이로 2위고 1인당 GDP는 마드리드, 바스크, 나바라를 이어 4위다. 카탈루냐 지방의 1인당 GDP(€30,426, 2018년)는 스페인 전체 1인당 GDP(€25,730, 2018년)보다 높다. 수도인 마드리드 자치 지방과 비교하면 인구는 카탈루냐 지방보다 약간 작지만 1인당 GDP(€35,041, 2018년)는 카탈루냐 지방을 상회한다. 현재 카탈루냐 지방은 스페인 전체 인구의 16%, 국내총생산(GDP)의 19%를 차지하고 있다.

2. 상징

2.1. 이름

카탈루냐라는 이름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일단 라틴어식 이름 카탈로니아(Catalonia)에서 유래한 것은 확실한데 이 카탈로니아라는 이름의 기원이 불분명하기 때문.

고트족의 땅이라는 뜻에서 라틴어로 고티아(Gothia)라고 부른 것이 카탈로니아를 거쳐 카탈루냐가 되었다는 것이 유력한 설이지만 다른 여러 설들도 있다. 또 고트와 알란족을 합성해서 고트알란이 카탈루냐의 어원이 되었다는 추측도 있다. 성의 땅 혹은 성의 주인을 이르는 용어 castlan에서 왔다는 말도 있는데 이게 맞다면 카스티야와 유래가 같은 이름이 된다.

2.2. 깃발

파일:카탈루냐 기.svg
붉은 선과 노란 바탕으로 이루어진 깃발은 카탈루냐어로 세녜라(Senyera)라 한다. 별 뜻은 없고 '깃발'이라는 뜻이다.

정확한 기원은 학자들마다 주장하는 바가 다르지만, 통용되는 야사는 9세기 바르셀로나 백작이었던 다모공(多毛公) 윌프레도가 레콘키스타 중 전사하면서 자신이 남길 유산이 없나 죽어가며 고민하다 전우가 건내준 황금 방패에 피칠 된 손으로 손가락을 갔다 댄 것이 아라곤 왕국, 나아가 카탈루냐의 문장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1975년에 멸망한 베트남 공화국의 국기인 주황삼선기(朱黃三線旗), 황저삼선기(黃底三線旗) 바탕에 빨간 선을 하나 더 넣은 깃발과 닮았고,[4] 군인의 당직 계통인 당직사령 완장과도 매우 빼닮았다.
파일:에스텔라다.svg
에스텔라다
카탈루냐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깃발인 에스텔라다도 세녜라에서 유래했는데, 2017년 스페인 헌정 위기를 보도하는 국내 언론들이 세녜라라고 불러야 할 카탈루냐 주기(州旗)를 에스텔라다라고 부르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에스텔라다는 흰 별이든, 빨간 별이든 쿠바 독립주의자들이 만든 쿠바 국기의 별 문양을 왼쪽에 붙인 것이고, 세녜라 문장 자체는 아라곤 연합 왕국에서 사용하던 것이라 현대 아라곤, 발렌시아, 발레아레스 제도 등 아라곤 연합 왕국 소속 지방 자치단체들은 모두 사용하는 문장이다.

3. 주민

카탈루냐인으로 카탈루냐어를 사용하고 스페인의 주 민족이자 같은 라틴 계열 민족인 카스티야인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카스티야와 구별된다는 카탈루냐인의 인식은 카스티야에 대한 대항 의식과 카탈루냐 독립운동의 주된 근거기도 하다.

그런데 카탈루냐가 카탈루냐어만 사용하는 지역은 전혀 아니다. 정작 카탈루냐 주 내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는 스페인어(카스티야어)다.[5] 카탈루냐 자치 정부의 2008년 조사[6]에 따르면 15세 이상 카탈루냐인의 45.9%가 스페인어를, 35.6%가 카탈루냐어를 사용하고 12%는 모두 사용한다고 했다. 우선 스페인어와 카탈루냐어 사이에 유사성이 있어서 어느 정도 서로 대화가 통하며, 20세기 후반에 스페인 타지에서 카탈루냐로 일자리를 찾아 들어온 이주민의 영향도 크고, 카탈루냐 민족이라도 부모 중 한쪽이 스페인어 화자인 경우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또 프랑코 정권 기간 동안 카탈루냐어가 극심한 탄압을 받고 스페인어가 유일한 공용어였어서 카탈루냐인의 99%는 스페인어를 이해할 수 있고 88.8%는 스페인어로 쓸 수 있다. 특히 젊은 층이라면 스페인어를 사용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4. 역사

4.1. 8세기 이전

카탈루냐 지방은 2차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위치한 완충지대로 고대 로마 식민지였다.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가 점령한 도시였기 때문에 '바르카의 도시'라는 뜻으로 '바르키노'(Barcino)라고 불렸다. 이후, 히스파니아 시테리오르라는 속주로 편입되다가 BC 27년 로마 제정이 시작되었을 때 타라코(지금의 타라고나)를 수도로 하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라는 속주로 개칭되었다.

이후 사두정치 때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카르타기엔시스로 나누어지다가 5세기부터 로마 제국이 쇠퇴해지면서 서고트족들이 침입하면서 서고트 왕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711년 이슬람교를 앞세운 무어인들에게 정복된다.

4.2. 바르셀로나 백작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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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 레콩키스타 - 스페인 제국 - 현대
레콩키스타
(718년 ~ 1492년)
아스투리아스 왕국 우마이야 왕조
후우마이야 왕조
(코르도바 아미르국)
프랑크 제국 후우마이야 왕조
(코르도바 칼리파국)
갈리시아 왕국 레온 왕국 나바라 왕국 서프랑크 제국
레온- 갈리시아 왕국 프랑크 왕국 바르셀로나
백작령
갈리시아 왕국 나바라 왕국
카스티야 왕국 나바라 왕국 아라곤 왕국 타이파 분열·성립 함마드 왕조
갈리시아 왕국
포르투갈 백국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타이파

톨레도, 사라고사, 발렌시아, 바다호스, 세비야, 코르도바, 그라나다
레온 왕국 아라곤 왕국
나바라 왕국 아라곤 왕국 무라비트 왕조
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연합왕국 무와히드 왕조
타이파
발렌시아, 무르시아
카스티야 연합왕국 카스티야 연합왕국 아라곤 연합왕국 나스르 왕조
그라나다
카스티야 연합 왕국 }}}}}}}}}

801년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원정해 이슬람 세력을 공격한 다음 에스파냐 변경백령(Marca hispánica)을 설치했다. 에스파냐 변경백령은 여러 백작령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프랑크 왕국에 신종하는 백작이었던 바르셀로나 백작이 다른 변경백령을 상속, 흡수하면서 우월한 지위를 획득한다. 바르셀로나 백작을 중심으로 한 카탈루냐 지역을 '카탈루냐 군주국'으로 부르게 된다. 다만 카탈루냐 군주국은 독립 국가로서 실체가 있는 '왕국'이나 '공국'이 아니라 그저 바르셀로나 백작이 봉건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카탈루냐 군주국의 군주는 단지 '바르셀로나 백작'의 위치에서 주변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다.

서프랑크 왕국의 왕계가 끊어지고 파리 백작이었던 위그 카페 프랑스 왕국의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자 바르셀로나 백작은 세력을 믿고 프랑스와 오랫동안 이어져 온 군종 관계를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다.

4.3. 아라곤 연합왕국

파일:아라곤 왕국 국장.svg
아라곤 왕국의 왕실 문장
Casal d'Aragó
아라곤 왕국은 어린 여왕 페트로닐라가 즉위하기 전 이웃 국가 카스티야 왕국의 침공을 우려해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와 페트로닐라를 약혼시킨다. 약혼할 당시 페트로닐라는 고작 1세에 불과했다.

라몬 베렝게르 4세는 아라곤 여왕의 남편 자격으로 아라곤을 통치했고 두 사람의 장남 알폰소 2세가 아라곤 왕 / 바르셀로나 백작의 지위를 계승했다. 이로서 카탈루냐 지방은 아라곤 왕국의 새로운 중심부가 되었고 원래의 아라곤 내륙 지방은 중심지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아라곤 연합왕국(Corona d'Aragón, Crown of Aragon)에는 정해진 수도가 없었기 때문에 바르셀로나가 수도가 되지는 않았지만 원래 수도였던 사라고사는 졸지에 수도 위치를 잃고 아라곤 국왕이 대관식을 치르는 도시(...) 정도로 위상이 내려갔다. 이후 아라곤 연합 왕국의 국왕들은 대부분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나폴리에서 궁정을 꾸렸다. 흔히 노란색과 빨간색 줄무늬로 이루어진 깃발을 카탈루냐의 상징으로 쓰고 있는데 이것이 원래는 아라곤 왕국의 깃발이다. 현재의 아라곤 주는 이 줄무늬에 문장만 추가된 형태의 깃발을 쓴다.

13세기~14세기의 카탈루냐 지방은 남부 이탈리아를 손에 넣고 네그로폰테 같은 4차 십자군 이후 막장이 된 동지중해 그리스계 섬들과 교역망에까지 손이 닫던 아라곤 해양 제국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다. 레반트-지중해 교역망의 서쪽 관문 역할을 했던 바르셀로나의 부와 영광은 대단한 것으로 지금도 바르셀로나 시가지에 가면 당시 동방과의 무역을 통해 번 돈으로 휘황찬란하게 건축하고 장식해 놓은 왕성과 성당들을 볼 수 있다. 근세에 들어서 벼락 출세한 마드리드와 달리 바르셀로나의 부와 명성은 이렇게 중세부터 쌓아 놓은 뿌리 깊은 유럽의 부자 동네 중 하나로 이러한 과거의 번영은 지금까지도 카탈루냐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의 큰 일부다.

카탈루냐 지방에는 카탈루냐 의회(Corts catalanes)가 설치되었다. 현재의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이 의회를 '민족 자치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단, 이 의회는 교회의 대표, 봉건 귀족, 왕립 도시 대표 등의 제한적인 신분이 모여서 하는 전형적인 중세 유럽식 신분제 의회였다.

4.4. 스페인 제국

1469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왕세자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후계자 이사벨 1세가 결혼했고 1479년 페르난도 2세가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양국은 동군연합이 되었다. 이 때 카스티야의 왕은 아사벨 1세의 오빠인 엔리케 4세였는데 후계자인 이사벨이 자신이 원하는 프랑스나 포르투갈의 후계자가 아닌 아라곤의 페르난도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후계자 교체를 선언해서 또 한번[7]의 왕위 계승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것이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이다. 여기서 이사벨 1세가 승리하면서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시칠리아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두 왕은 각각의 궁정을 구성했는데 이사벨 1세의 카스티야가 영토와 인구가 3배 ~ 4배라는 압도적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카스티야 우위였다.

이후 카스티야 우위의 판세는 더욱 강해지는데 카탈루냐 경제의 중심이 되었던 지중해 무역이 오스만 제국의 대두로 침체해서 축소되었던 반면 카스티야 왕국은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으로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되었다. 단적으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지원한 것은 스페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는 무관하게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가 단독 지원해 (개인 재산까지 팔아가며)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 과실도 온전히 카스티야가 차지했다. 결국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도 카스티야로 이동하고 카탈루냐에는 부왕을 두고 통치하게 하면서 카탈루냐는 스페인의 일개 지방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하나의 국가처럼 취급되게 된 것은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후계자인 손자 카를로스 1세(카를 5세) 때의 일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아직 별개의 국가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카를 5세는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왕위를 별개의 절차에 의해 물려받았다. 아라곤의 경우 왕위 계승권은 오로지 아들에게만 전해졌는데 페르난도 2세가 남긴 유일한 혈족은 딸인 후아나였다. 일설에 의하면 페르난도 2세가 외국인이나 다름없는 장손(카를 5세)에게 왕국을 물려주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페르난도 2세는 이사벨 1세 여왕이 죽은 후 늦은 나이에 재혼해 아들을 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이후 카를로스 1세의 동생인 페르난도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다 카를로스와 페르난도의 부계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가 개입하여 결국 페르난도 2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아라곤 왕국의 왕위를 외손자인 카를로스 1세에게 넘길 준비를 다 해놓고 사망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mpire-Roman-Emperor-Charles-V.jpg
붉은색이 아라곤 연합 왕국, 자주색이 카스티야 연합 왕국, 그외의 노란색과 주황색 등은 조부모에게 상속받은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다.

아라곤 연합 왕국은 카를 5세의 넓은 영토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카를 5세는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해 독일로 떠났는데 외국인이나 다름없는 새 국왕에 반발해 스페인 각지(카스티야, 카탈루냐 가리지 않고)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몇 년이 지나도록 반란이 쉽게 진압되지 않자 마침내 카를 5세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독일 통치권을 위임한 후 스페인으로 귀국해 직접 반란을 무자비하게 토벌했다. 이렇게 되니 카탈루냐는 정말 찍소리도 할 수 없게 제국의 일부분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이어받은 것이 절대왕정의 일각을 담당하는 펠리페 2세였다. 이들 부자는 카탈루냐건 카스티야건 내부의 독립적 색채를 용납하지 않았고 펠리페 2세는 대놓고 카스티야에 궁정을 꾸림으로써 카탈루냐를 일개 지역으로 만들었다.

4.5. 카탈루냐 반란(수확 전쟁)

30년 전쟁 막바지인 1635년 프랑스-스페인 전쟁이 일어나면서 스페인 제국은 프랑스 왕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스페인 중앙 정부는 프랑스와 국경과 맞닿은 카탈루냐 지방에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한 군대를 주둔시키고 현지에서 물자를 징발했다. 이러한 조치는 펠리페 4세의 신임을 받던 명재상 올리바레스 공작 가스파르 데 구스만(Gaspar de Guzmán, Count-Duke of Olivares)에 의해 취해진 것이었다. 올리바레스에게 가장 중요한 정책 기조는 '공평한 과세'였다. 그동안 스페인 제국의 군사 활동에 대한 경제적 부담은 거의 전적으로 카스티야가 짊어졌는데 올레바레스는 이 문제를 시정하고 이제는 왕국 전체가 보다 '평등한 군사적 부담'을 지도록 하기 위해 카탈루냐에서도 군대 유지를 위한 물자를 징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말만 공평이고 평등이지 안그래도 메마르고 황량한 곳에 그나마 중세 양모산업으로 부흥했던 카스티야 경제가 스페인 왕실의 지속적인 착취로 박살나서 몰락하다보니 그냥 착취할 대상을 카탈루냐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군대가 카탈루냐에 주둔하며 물자를 징발하자 카탈루냐 농민들이 불만을 품고 1640년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카탈루냐 반란(Catalan revolt) 혹은 수확전쟁(Guerra dels Segadors)이다.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제네랄리타드를 이끌던 카탈루냐 귀족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아예 프랑스 왕국에 편입되기로 결의하고 프랑스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협상 과정에서 카탈루냐 귀족들은 자신들이 그때까지 유지해왔던 봉건적 특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였지만 당시 절대왕정을 추구하던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는 단칼에 거절했고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카탈루냐 귀족들은 '자치권과 자신들의 봉건적 특권(기득권)만 보장되면 어느 왕을 섬겨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백년전쟁기에 합종연횡의 내홍을 일삼는 대귀족들한테 학을 떼고 중앙집권적 절대군주정을 추구하던 프랑스 왕은 봉신들의 광범위한 자치권이 유지되는 카탈루냐에 대해 딱히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반란을 일으킨 카탈루냐 농민들의 생각과 이해 관계는 카탈루냐 귀족 지도자들과는 달랐다. 점차 카탈루냐 농민들의 불만은 카탈루냐 귀족 지도자들을 향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카탈루냐인들의 요청을 받아 출동한 프랑스군이 마침내 카탈루냐에 진주해 스페인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카탈루냐인들은 당초 약속과 달리 프랑스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았다. 자기들을 불러들인 카탈루냐인들이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자 프랑스군은 의욕을 상실했고 프랑스군은 수세에 몰리자 결국 카탈루냐에서 철수했다. 결국 카탈루냐 단독으로 바르셀로나 공성전이 벌어졌고 카탈루냐는 스페인 중앙군에 항복했다. 그러나 아직 프랑스-스페인 전쟁 와중이었기 때문에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카탈루냐는 계속 자치권을 어느 정도 보장받는 등 일단은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1659년 프랑스-스페인 전쟁이 최종적으로 끝나고 피레네 조약이 맺어진 결과 카탈루냐 영역 중 피레네 산맥 이북의 루시용(Roussillon)[8]과 페르피냥(Perpignan)[9]은 프랑스에 할양되었고, 세르다뉴 지방(Cerdagne française)[10]은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현재의 피레네조리앙탈(Pyrénées-Orientales) 지역이다.

4.6.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0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승하하자 후계자를 두고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앙주 공작 필리프( 펠리페 5세)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의 카를 대공( 카를 6세)이 서로 합당한 스페인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게 된다. 프랑스 루이 14세가 재빨리 자신의 손자인 필리프를 스페인에 보내 펠리페 5세로 즉위시켰으나, 영국, 네덜란드, 합스부르크 제국 등이 이에 반발하여 합스부르크의 카를 대공을 지지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1640년의 카탈루냐 반란 이후 카탈루냐-발렌시아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대공( 카를 6세)를 지지하며 전쟁에 뛰어들었다. 카탈루냐-발렌시아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로부터 그때까지 어느 정도 자치권을 보장받아왔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왕위를 이어받는다면 계속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절대왕정을 추구하는 부르봉 가문이 왕위를 이어받는다면 프랑스 남부 지방처럼 자치권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은 물론이고 카탈루냐어를 금지당하고 중앙정부가 강요하는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를 써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과거 사례를 보면 프랑스 중남부 지역은 물론이고, 1640년 반란 때 카탈루냐에서 프랑스로 넘어간 지역인 피레네조리앙탈(Pyrénées-Orientales)의 경우에도 프랑스어의 사용을 강요받아 더이상 카탈루냐어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카를 대공이 제1차, 제2차 바르셀로나 공방전에서 유리하게 이끌어 나갔지만 1711년 카를 대공이 갑작스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로 즉위하게 되면서 전황이 순식간에 뒤바뀌게 된다. 카를 6세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열강들이 태도를 바꾸어 부르봉 가문의 펠리페 5세를 스페인 왕으로 차례로 인정하면서 전쟁이 수습 단계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황제가 된 카를 6세도 스페인 왕위를 포기했다.

그러나 카탈루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끝까지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과 맞섰다. 마침내 스페인 부르봉군에게 바르셀로나가 포위되어 제3차 바르셀로나 공방전이 일어났고[11] 1714년 9월 11일 마침내 바르셀로나가 함락당하면서 완전히 진압되었다. 새로 스페인에 들어선 부르봉 왕조는 예상되었던 것처럼 강력한 중앙 집권화 정책을 실시했다. 1716년에 새로운 국가 기본법(Decretos de Nueva Planta)이 만들어져 카탈루냐는 최소한의 자치권을 완전히 박탈당하고 단순한 일개 주로 강등되었다.

4.7. 현대

1931년 4월 지방 선거에서 약진한 카탈루냐 공화좌파당(ERC)의 당수 프란세스크 마시아는 4월 14일 '이베리아 연방' 내에서 '카탈루냐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이 선언에 놀란 스페인 제2공화국 임시 정부는 카탈루냐의 독립을 철회시키고 대신 자치 정부 '제네랄리타드'를 구성하도록 했다.

1934년 10월 6일 제네랄리타드 데 카탈루냐의 수반인 ERC의 류이스 쿰파니스가 스페인 연방 공화국 내에서 카탈루냐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이 사태에 스페인 정부는 군을 투입해서 쿰파니스 등 자치 정부 각료를 해임하고 체포했고 쿰파니스는 30년형을 선고받았다. 1936년 좌파 인민 전선 정부가 들어서자 석방되었다.

20세기 초 독립파들은 이렇게 두 차례 카탈루냐 공화국의 설립을 발표했지만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은 제네랄리타드를 중지하고 자치 정부는 망명했다. 프랑스에 망명했던 쿰파니스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1940년 10월 15일 바르셀로나에서 총살당했다.

프랑코 집권기를 맞이하면서 스페인의 다른 모든 지역과 마찬가지로[12] 심하게 탄압당했다. 프랑코 사후 다시 자치권을 얻었고 1980년 첫 민주 선거 이래 조르디 푸욜(Jordi Pujol)이 이끄는 온건 민족주의 성향의 '융합과 통일(Convergència i Unió)'당이 장기 집권한다. 2003년 선거에서도 융합과 통일당이 1당이기는 했지만 카탈루냐 사회당-공화좌파당-녹색당[13] 연정으로 정권이 바뀌었고 2010년에 다시 융합과 통일당이 재집권한다. 그러나 연방주의자였던 푸욜과 달리 새 당수 아르투르 마스(Artur Mas)는 독립주의자였고 결국 2014년에 독립 투표를 강행했다가 공직 출마 금지 처분을 받는다. '융합과 통일'당도 분리주의 정당으로 변했고 결국 2015년에 사라지는데 이 당의 후계자가 카를레스 푸지데몬이 이끌었던 카탈루냐 유럽 민주당이다.

2010년 스페인 팀의 월드컵 우승으로 바르셀로나에도 스페인 국기를 볼 수 있다고 했지만... 2008년 이후 악화된 현재 스페인의 경제 상황으로 인해 독립 논의가 한창 달아오르고 있다. 카탈루냐는 스페인에서 가장 경제가 활성화된 지역이다.

4.8. 카탈루냐 공화국 독립선언

카탈루냐 자치 정부는 2014년 카탈루냐 독립에 대한 비공식 주민투표를 강행했지만 스페인은 인정하지 않고 아르투르 마스 지사를 공직 출마 금지 처분했다. 2015년 분리주의 세력이 다시 여당이 되면서 '2017년까지 공화국 형태로 독립'하겠다고 언급하였고 2017년 9월 카탈루냐 주의회에서 주민 투표법이 강행 통과되면서 2017년 10월 1일 분리 독립 주민 투표가 실시되었다(스페인 정부의 카탈루냐 금고 압수 등에도 약 47% 투표율에 9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 한편 스페인 정부는 반발하며 주민 투표 자체가 불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는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 법안 표결을 막겠다"고 공언했다. 카를레스 푸지데몬 자치정부 수반은 투표 결과 공표를 미루면서 스페인 정부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당연히 불발, 10월 21일 라호이 총리는 헌법 제155조를 발동해 카탈루냐 지치권을 정지하고 중앙정부 직할 통치를 선언했다.

독립 반대파가 대거 퇴장한 가운데 2017년 10월 27일 카탈루냐 의회에서의 독립 선포안 투표에 따라 카탈루냐는 독립을 선포했다. 카탈루냐 역사에서 등장한 5번째 카탈루냐 공화국[14]이다. 이전 네 번의 공화국(1641년, 1873년, 1931년, 1934년)은 예외없이 모두 단명으로 끝났다.[15] 결국 이번 5번째 공화국도 건국에서 멸망까지 4일 걸렸다. 푸지데몬은 독립 의사를 철회한 뒤 사법 처리를 피하기 위해 벨기에로 도피했고 10월 31일 스페인 헌법재판소가 카탈루냐 독립 선언을 폐기했다.

각국 외교 당국에서는 스페인과의 관계를 의식해 카탈루냐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정치권에서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감비아 외무부 트위터 계정으로 카탈루냐 독립을 승인한다는 글이 올라왔는데 진짜 감비아 외무부가 성명을 내고 그 계정은 가짜고 카탈루냐 독립을 인정한 적이 없다고 발표하는 촌극이 일어나기도 했다.[22]

같은 미승인국 처지에 있는 압하지야, 남오세티야는 현재 공식적으로 승인은 하지 않았지만 카탈루냐 독립에 대해 현재 우호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르차흐에서는 현재 스페인과 카탈루냐의 갈등이 평화적으로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였고 대만에서는 당시 '스페인과 카탈루냐의 상황이 두 정부간의 평화로운 대화로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모호한 반응을 보내고 있었다.[23]벨기에의 지방 정부인 플랑드르는 카탈루냐를 지지하지만 인정할지에 대한 여부는 벨기에 정부에 달려있다는 말을 했다.

한편 지역 정부인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는 '카탈루냐 정부의 노력에 이해와 존경을 표한다'라는 말을 하면서 지지를 밝혔고 플랑드르 자치정부도 우호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카탈루냐 내에서도 독립에 대한 회의적 반응이 많은데 10월 28일자 카탈루냐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55%는 카탈루냐 독립 선언에 반대한다고 답했고 찬성은 41%였다.[24] 11월 말에는 독립 지지 비율이 24%로 뚝 떨어졌다.[25]

이후 중앙정부 지명 수반인 킴 투라가 2018년 5웡 18일 취임했으나 이듬해 실시된 총선거에서 스페인 선거관리위원회의 지침을 어기고 친 카탈루냐 성향(노란 리본 패용)을 보였다. 스페인 대법원이 킴 투라의 취임 무효를 선언했다.
한편 푸지데몬 전 수반은 벨기에에 머물면서 2019년 실시된 유럽 의회 선거에서 당선, 의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카탈루냐어 위키백과의 카탈루냐 공화국 (2017)[26] 문서는 10월 28일에서야 작성되었고 10월 30일 기준으로도 토막글 수준이다. 스페인어 위키백과의 같은 문서가 훨씬 길다.

5. 카탈루냐 독립운동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카탈루냐 독립운동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카탈루냐 지역이 스페인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분리주의 운동을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5.1. 독립하게 될 경우

5.1.1. 카탈루냐의 입장

5.1.2. 스페인의 입장

6. 정치

파일:카탈루냐 의회 로고.svg
카탈루냐 의회의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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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카탈루냐 공화좌파당
20석
신임 공급
인민통일후보+ 이기자 카탈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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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카탈루냐 사회당
42석
]]
[[카탈루냐를 위한 모두|카탈루냐를 위한 모두
35석
]]
복스
11석
[[수마르|수마르
6석
]]
[[인민당(스페인)|카탈루냐 인민당
15석
]]
[[카탈로니아 동맹|카탈로니아 동맹
2석
]]
재적
135석
}}}}}}}}}

스페인에서 가장 좌파 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지금도 공화주의가 강세를 띈다. 이미 스페인 내전 당시에도 좌파 성향의 성지였다. 항상 이랬던건 아니고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오히려 경제적으론 스페인의 제도권 주류 우파인 카톨릭, 군부, 귀족들 같은 전통 보수주의 세력보다 더 친시장적인 카탈루냐 동맹당 (Lliga Catalanista) 같은 근대적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들이 스페인에서 처음 생기고 영향을 발휘했던 곳이 카탈루냐였다.

그러나 당시 카탈루냐의 산업화와 이에 따른 사회구조 변화와 맞물려 카탈루냐 민족주의에는 공감도 관심도 없는 스페인 국내 이주노동자들이 떼로 몰려들며 유명한 아나키스트 혁명노조인 CNT를 비롯한 극좌파가 급성장하는 와중 카탈루냐의 우파 상류층 부르주아 정치인들은 자치권 문제와 동시대 유럽 정치 사상사 전반의 경향이었던 전통 봉건-종교적 지주 계급 vs 신흥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계급간 성향 갈등으로 나머지 스페인의 주류 보수 정치권과 힘을 합치지 못했다. 결국 스페인 내전 전후쯤 되면 비카탈루냐인 노동계급 대중 민심은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하고, 카탈루냐 민족주의 판 내에서도 주도권을 프란체스크 마시아, 유이스 콤파니스를 비롯한 카탈루냐 좌파가 차지하면서 자유주의 성향 우파 카탈루냐 민족주의 정당, 단체들은 독립 정치 세력으로 명맥이 내전 이전부터 끊겼다.

이후로도 당연히 바르셀로나가 스페인 전국에서 1위, 2위하는 대도시인만큼 카탈루냐 출신 우익 인물들은 결코 적은게 아니지만 정치지도 상으론 이 사람들은 늘 그랬듯이 지역 정체성, 자치권 문제로 인한 나머지 스페인 전국적 우파 정치세력들과의 마찰로 독립 세력화를 못한다. 시민(정당) 정도가 유일한 예외. 그나마 프랑코 사후 민주화 과정에서 거대 지역 정치인 조르디 푸욜 (1930년 생) 중심으로한 중도 자유주의 정당인 통합과 화합(Convergència i Unió)이 지역 정치에서 강한 힘을 발휘했지만 이 당은 말 그대로 중도 자유주의 정당이지 본격 우파 정당이 아니고[31], 그나마 이 자유주의 세력도 2010년대 시민당의 부상과 침몰과 함께 다시 폭망한 상태이다. 결국 비슷한 분리주의 문제가 뜨거운 영국의 스코틀랜드처럼 실제 현지 사회의 이념적 다양성과는 별개로 정치 지형상으론 전국 단위 보수 우파 정당들의 아젠다와 현지 중도-우익 세력이 지역 민족정체성, 자치권 문제 때문에 근본적으로 엇갈리면서 우파 세력이 뜨지 못하고 좌파가 주도하는 지방이라 할수있다.

카탈루냐 자치 정부(Generalitat de Catalunya)는 그 기원을 135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현대의 자치 정부는 1931년 성립되었고 프랑코 총통 치하에서 1939년 폐쇄되었다가 1977년 재설립되었다. 임기 4년이고 의원내각제처럼 운영되고 있다. 선거는 4개의 주를 선거구로 나뉘어서 총 135석을 선출한다.

카탈루냐 자치 정부는 해외에 독자적인 대표부를 둘 수 있고 해외에 5개 대표부가 있다. (벨기에/유럽연합 브뤼셀, 독일 베를린, 이탈리아 로마, 영국 런던, 미국 워싱턴) 하지만 2017년 독립 사태 와중에 브뤼셀을 제외한 4개 대표부는 폐쇄되었다.

2024년 5월 12일 열린 지방의회 선거에서는 카탈루냐 분리주의자 사면법 통과 논의의 영향인지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이 28.0% 득표율로 42석을 차지하며 단독 원내 1당에 올랐다. 카를레스 푸지데몬의 복귀로 기대를 모았던 카탈루냐를 위한 모두(Junts)는 2위에 그쳤고, 직전까지 자치정부 수반을 차지하고 있던 카탈루냐 공화좌파당은 의석을 13석이나 잃으며 참패했다.

카탈루냐 공화좌파당과 수마르 신임 공급을 하는대가로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소수정부를 출범시키게 됐고, 이에 따라 살바도르 일라가 2024년 8월 10일, 2010년 이후 처음으로 사회노동당 출신 자치정부 수반직에 올랐다.

7. 문화

카탈루냐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세니(seny)가 있다고 자부하는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지혜, 사려깊음, 이성 같은 것을 뜻한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원을 이룬 채 추는 춤인 사르다나[32]와 축제에서 사람들로 탑을 쌓는 놀이인 카스텔[33]도 유명하다.

8. 유명인

일단 스페인 출신인데 이름이 Jordi면 98%가 카탈루냐인이 맞다고 보면 된다. 특히 강조해서 본인이 '호르디'가 아닌 '조르디'라 불러달라고 한다면 그건 100% 카탈루냐인.

9. 관련 문서



[1] 1993년 채택 [2] 행정 구역으로서가 아니라 카탈루냐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개념으로 볼 경우 발렌시아 발레아레스 제도도 포함되어 스페인 동부 해안가 대부분이 된다. [3] 발렌시아 발레아레스 제도도 카탈루냐 문화권이지만, 이 지역들은 카탈루냐 민족주의와 분리주의에 무관심 내지 냉담한 편이다. [4] 그래서 베트남 언론에서 카탈루냐 깃발을 주황사선기(朱黃四線旗, Cờ vàng Bốn sọc đỏ)라고 표현한 기사( 기사자료)가 존재하며, BBC베트남판의 카탈루냐 관련기사에서도 카탈루냐 깃발을 주황사선기로 표현하기도 했다. [5] 오히려, 카탈루냐어 사용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이웃한 동네인 안도라이다. 어찌보면 아예 카탈루냐어가 공용어인 곳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기도 하다. [6] # [7] 이미 카스티야 연합 왕국은 이전에 2번의 왕위 계승 전쟁을 치른바 있다. [8] 카탈루냐어로는 루세요(Rosselló). [9] 카탈루냐어로는 페르피냐(Perpinyà). [10] 카탈루냐어로는 세르다냐(Cerdanya). [11] 스피놀라, 포폴리, 베릭(제임스 드 피츠-제임스)이 여기서 활약한다. [12] 제외되는 지역이 별로 없다. 바스크처럼 대놓고 전쟁 상태같은 곳도 있지만 나머지는 뭐... [13] 카탈루냐 사회당은 스페인 사회당의 지역 정당이고 2017년에 스페인 잔류를 주장한 반면 공화 좌파당은 카탈루냐 독립주의 정당이다. [14] # [15] 길게는 1주일, 짧게는 9시간짜리도 있었다. [16] 북한 베네수엘라는 카탈루냐 독립 선언 지지를 나타냈지만 # 공식적 인정 발표는 내지 않고 있다. [17] 벨기에는 플라망 분리주의자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처지고 슬로베니아는 자기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독립했다. [18] 카탈루냐 수반 푸지데몬이 독립의 롤모델로 삼은 나라가 슬로베니아다. 하지만 결국 립서비스일 뿐 카탈루냐 독립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 [19] 카탈루냐 독립 인정은 않으면서도 양측의 대화와 타협을 촉구했다. 이스라엘은 카탈루냐 독립 문제에 대해 스페인을 지지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카탈루냐 공화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20] 독립 선언 이후 명시적으로 스페인 영토의 통합성을 지지한다고 밝힌 국가들이다. 그 이전에 입장을 밝힌 경우는 제외. 2017-10-29 0시(한국시간) 기준이다. # [21] 카탈루냐 독립 선언 이전에 '통합된 스페인을 지지한다'고 밝힌 바 있고 10월 30일 "스페인 정부의 통합된 스페인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지지하고 스페인의 헌법 질서 내에서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기대한다"고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밝혔다. # [22] # [23] # # [24] # [25] # [26] # [27] 카탈루냐 소재 7개 대기업 중 6개가 10월 초에 본사를 타지역으로 이전했다. [28] 국가 승인이 국가 성립의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좀 괴로울 수 있을 뿐. [29] AS 모나코 FC가 있는 모나코 공국은 '프랑스 리그 1'에 참가하고 있다. 이것은 모나코가 사실상 프랑스의 자치령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어서 가능한 구조다. 카탈루냐가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면 스페인에서 카탈루냐 구단들의 참가 거부를 할 수 있는 이유가 생긴다. [30] 스페인 전역의 실업률은 10% 중후반대고 그 중에서 청년 실업률은 30%-40%대를 넘나들고 그나마 취직한다 해도 비정규직이 태반인지라 실질 실업률이나 체감 실업률은 그보다 훨씬 높다. [31] 그리고 사실 더 본격적으로 따지면 중도 자유주의란 구체적인 이념도 아니라 전국 단위에선 그 옛날 아돌포 수아레스총리 시절 중도민주통합당 같이 푸욜 개인의 카리스마와 정치력을 따르는 정당에 가깝다는게 중론이다 [32] #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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