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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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복성군파의 역대 종주 | ||||||
복성군파 역사 시작 | → | 1대 복성군 이미 | → |
2대 오강군 이건[2] |
복성군파 초대 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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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중종의 왕자
복성군 | 福城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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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성군묘 전경 | |||
출생 | 1509년 11월 7일( 음력 9월 15일)[3] | ||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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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33년
6월 28일(
음력
5월 26일) (향년 2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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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경상도
상주 유배지 (現 경상북도 상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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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연평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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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학수(鶴壽) → 미(嵋) | ||
부모 |
부왕
중종 생모 경빈 박씨 |
||
형제자매 | 9남 11녀 중 장남 | ||
배우자 |
군부인
파평 윤씨 (郡夫人 坡平 尹氏) |
||
자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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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호 |
서성군(瑞城君)[5] → 복성군(福城君)[6] |
||
시호 | 정민공(貞愍公) |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왕족.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서손(庶孫)이자 11대 임금 중종의 서장자(庶長子)로 중종의 첫 자식이다.2. 생애
중종 4년(1509) 중종과 그의 후궁인 숙의 박씨[7] 사이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학수(鶴壽)였으나 후에 미(嵋)로 개명하였다. 본래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졌다가 복성군(福城君)으로 다시 봉해졌다. 문정왕후(성렬대비)가 중종 12년(1517) 입궁하자 이듬해(1518) 출궁했다.[8]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고 간원(諫院)이 또 아뢰기를,
"듣건대 잠저 시대(潛邸時代)의 본궁(本宮)을 복성군(福成君)에 내리시고 또 증축(增築)한다 하니, 대군(大君)이나 왕자군(王子君)의 가옥(家屋)에는 반드시 등급이 있는데, 위의 본궁은 본시 대군의 가옥 제도에 따라서 지은 것이라, 왕자군에게는 이미 과분한 것이어늘, 어찌해서 더 짓습니까? 이 일 때문에 사치하는 길을 보여서는 아니 되니, 더 짓지 말기를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본궁을 복성군에게 내린 것이 아니라 복성군이 받는 녹미(祿米)를 둘 곳이 없어서 이곳으로 실어간 것이지 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집은 바깥 행랑채가 없어서 부득불 증축을 한 뒤라야 쓸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내가 어찌 사치로써 군(君)을 인도하겠느냐? 나머지도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중종 13년(1518) 6월 12일 #
위 기사는 복성군이 중종의 사저(잠저 시절의 본궁)로 출궁하는 것을 대간들이 반대한 기록인데, 해당 기록에서 쌀을 잠시 놓아둔 것이지 그에게 준 것이 아니라는 중종의 말이 맞았는지 대간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중종의 잠저 시절 본궁으로 출궁한 사람은 적장녀인
효혜공주였다. 중종 19년(1524) 4월 19일의 기록
#에 "연성위(
효혜공주의 남편)의 집은 전하의 잠저의 구궁(舊宮)"이라는 대목이 나오며, 중종 23년 9월 23일
#에도 중종이 병환을 앓는 효혜공주의 문병을 가고자 했을 때 "더구나 이 집은 내 본궁이므로 사처와 같지 않은 까닭에"라고 중종 자신이 직접 말하였다. "듣건대 잠저 시대(潛邸時代)의 본궁(本宮)을 복성군(福成君)에 내리시고 또 증축(增築)한다 하니, 대군(大君)이나 왕자군(王子君)의 가옥(家屋)에는 반드시 등급이 있는데, 위의 본궁은 본시 대군의 가옥 제도에 따라서 지은 것이라, 왕자군에게는 이미 과분한 것이어늘, 어찌해서 더 짓습니까? 이 일 때문에 사치하는 길을 보여서는 아니 되니, 더 짓지 말기를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본궁을 복성군에게 내린 것이 아니라 복성군이 받는 녹미(祿米)를 둘 곳이 없어서 이곳으로 실어간 것이지 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집은 바깥 행랑채가 없어서 부득불 증축을 한 뒤라야 쓸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내가 어찌 사치로써 군(君)을 인도하겠느냐? 나머지도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중종 13년(1518) 6월 12일 #
중종의 계비요 윤임의 여동생이며 12대 임금 인종의 생모인 장경왕후가 중종 10년(1515) 인종을 낳은 직후에 숨을 거두었다. 그 뒤를 이어 왕비가 된 문정왕후도 가례를 올린 지 10년이 넘도록 왕자를 낳지 못하자, 복성군의 어머니인 경빈 박씨는 복성군을 왕으로 만들려는 야망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빈 박씨가 중종 22년(1527) 작서의 변에 연루되어 세자를 저주하였다는 혐의를 쓰자 그도 작호를 빼앗기고 어머니와 함께 유배를 갔다. 그런데 중종 28년(1533) 가작인두의 변이 일어나자 마침내 중종의 어명에 따라 어머니와 함께 본인도 사사되었다. 조선 역사에서 임금이 아들을 직접 죽인 것은 가작인두의 변과 임오화변 둘뿐이다.
하지만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은 사실 범인이라는 자백조차 나오지 않았는데도 무리하고 심증만으로 처벌한 사건이었다. 중종 36년(1541)에 세자(미래의 인종)가 중종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탄원하여 '복성군'으로 복구되었다. 하지만 경빈 박씨가 공식적으로 신분을 되돌려받았는지는 확실치가 않고, 중종은 두 모자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경빈 박씨-복성군 모자가 사사되는 계기가 된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을 일으킨 진범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유생 이종익(李宗翼)이 중종 27년(1532) 상소를 올려 '작서의 변은 김안로의 아들이자 효혜공주와 결혼한 부마 김희가 아버지의 사주를 받아 벌인 일'이라고 주장한 이래로, 김안로 세력이 사주했으리라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사건의 진실이 제대로 드러난 적은 없었고, 중종이 김희나 김안로를 작서의 변이나 가작인두의 변을 사주했는지 조사하라고 명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적당히 넘겼을 뿐이다. 중종의 태도를 보면 경빈 박씨 - 복성군 모자가 죽어야 한다고 스스로 납득하고 결정을 내렸고, 김안로가 죽은 뒤에도 이런 결정을 후회하지 않은 듯하다. 다만 후일 이약빙의 상소에 대한 중종의 반응을 보면, 자신은 당시에 차마 그리하고 싶지 않았으나 당시 권간들이 국정을 장악하여 복성군을 죽였고, 박씨의 죄로 인한 해가 복성군에게 미친 것이지 복성군의 죄는 뚜렷한 명분이 없다며, 복성군에 대한 자신의 추회를 사람들이 알게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기는 한다. 그것이 본인의 진심이든, 친아들을 죽인 것에 대한 일종의 이미지 관리이든 간에(...)[9]
복성군은 억울하게 죽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10] 민간에서는 동정론이 제법 있던 모양인지, 야샤에 따르면 이항복이 벼슬을 하기 전 복성군의 혼령이 이항복에게 나타나 자신이 신원된 줄은 알지만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이항복이 모두가 억울하게 죽었다며 안타까워한다고 하자 그 말에 매우 기뻐하며 그대는 장차 귀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3. 가족 관계
- 정부인 : 군부인 파평 윤씨(郡夫人 坡平 尹氏, ?년 7월 19일 ~ 1530년 8월 10일) - 윤인범(尹仁範)의 딸
3.1. 후손
동생으로 혜순옹주와 혜정옹주가 있다. 부인은 현감 윤인범의 딸인 파평 윤씨이며 슬하에 딸 이운환 한 명을 두었다. 두 동생과 딸은 복성군 처형 후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세자(훗날 인종)가 눈물로 간곡히 용서를 빌어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동생들은 작호가 박탈되어 폐서인이 되었다가 인종 재위 때 복성군과 함께 신원이 회복되었다. 윤씨 부인은 가작인두의 변이 터지기 전인 1530년에 해산 도중 사망했다.[12] 딸인 이운환은 장예원 사평인 최예수와 결혼했다.아들없이 죽어서 명종은 덕흥군[13]의 3남 하성군을 사후 양자로 입적시켰다. # # # 그러나 1567년 하성군이 명종의 아들로 입적한 뒤 선조로 즉위하면서, 복성군의 대는 다시 끊겼다. 선조는 복성군의 새 양자로 이복 동생 해안군의 아들인 오강군을 입적시켰다.
하지만 오강군도 적자가 없어서[14], 선조는 자신의 3남인 의안군을 복성군의 양손자로 입적시켰고 의안군이 요절한 후에는 4남 신성군을 후사[15]로 삼게 했다. 그런데 이게 '복성군의 양손자로 들인다'는 것이지, 정확하게 '오강군의 양자로 삼는다'는 게 아니라서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어쨌든 신성군이 복성군의 양손자가 되었는데, 그 역시 아들없이 죽어서[16] 정원군의 3남 능창군을 양자로 삼았다. 하지만 능창군이 역모에 말려 광해군 때 사사당하자[17] 다시 선조의 9남 경창군의 3남인 평운군을 양자로 삼았다.
하지만 평운군의 적손(嫡孫)이 없어서 양원군[18]의 5대손인 이유석의 3남을 입양했는데, 그가 바로 함릉군 이직(咸陵君 李㮨)이다. 그런데 함릉군 가문의 원래 뿌리는 경명군파[19]로, 양원군파로 입계한 것이다.[20] 다만 평운군에게 서자 함계군 이춘(咸溪君 李櫄)이 있기에 현재 남은 복성군 후손들은 실제로는 경명군과 경창군의 후손들이다.
4. 대중매체에서
-
2001년
SBS 드라마 <
여인천하>에서는 아역배우
오승윤
#[21][22]이 연기했다. 오승윤이 어린 시절을 연기하기는 했지만
작서의 변으로 사사당할 때 이미 성인이라서 이 때는 안홍진[23]이 연기했다. <
여인천하>의 복성군은
서자이기는 하지만
중종의 아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서
세자에게 나이
부심을 가진
캐릭터이다. 그래서인지 세자가 촐싹거린다고 뺨을 후려치면서
왕실의 예법을 갖추라는 정신나간 짓거리를 하기도 했다.[24]
이게 중종한테 알려졌으면 작서의 변 이전에 복성군은 사망이었다.이후 원자에게 손찌검을 한 죄로 문정왕후에게 불려왔을 때도 "왕실의 위엄을 위해 형으로서 훈계한 겁니다."하고 뻔뻔하게 주장하며 문정왕후에게까지 대들었다.[25] 왕의 자식들은 생모의 신분에 관계없이 무품이기는 했지만 원칙상 생모 대신 어머니로 모셔야 하는 중전에게도 저랬다는건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간 짓이었다. 이후 생모인뭬야!!경빈 박씨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들어와서 다짜고짜 복성군의 뺨을 후려치고 문정왕후에게도 무조건 잘못했다며 싹싹 빌어서 겨우 빠져나오게 된다. 드라마에서 중종도 나름 복성군을 총애해서 세자 후보 중 1명으로 고려하였고 제63화~제65화에서 원자를 포함한 왕자들을 모아 면접을 보았지만 낙점받지는 못했다.[26]
성인이 된 이후에도 대놓고 문정왕후에게 대들고 중종의 장남인 자신이야말로 세자가 되어야한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닌다. 생모인 경빈 박씨가 워낙에 다혈질이라 휘둘리는 모습이 자주 나오는데 실제 궁중 예법상 후궁 소생의 왕자군과 옹주는 무품이라 정1품~정5품에 불과한 후궁은 아무리 생모라도 존대해야 한다.[27] 이러한 궁중 예법은 대부분 무시되지만 2015년 KBS 드라마 < 붉은 달>에서는 영빈 이씨가 아들인 사도세자와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이 나온다. < 여인천하>에서도 평상시에는 경빈 박씨가 복성군을 절대 하대하지는 않는다. 감정이 격해졌을 때 아무리 넉넉히 봐줘도 어린이인 복성군에게 분노를 토해내는 일은 있어도 하대는 거의 하지 않는다. "이리 오시오.", "그만 물러가시오." 정도의 하오체를 보통 쓴다. 물론 말실수를 했을 경우 그런 거 없이 생모에게 불꽃 싸닥션을 맞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복성군 역을 맡았던 오승윤이 아역 시절에 꽤 험하게 굴렀다. 작서의 변이 일어나자 경빈과 함께 폐서인이 되어 유배당했지만 중종이 서장자인 복성군을 상당히 아꼈기 때문에 스스로 복권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28] 하지만 문정왕후와 중종의 후궁들부터 대비인 정현왕후까지 복성군 모자의 사사를 주장하자 이를 받아들인 중종의 명령으로 사약을 받고, 통곡하는 자신의 아내 앞에서 이것이 대통을 잇지 못한 왕자들의 운명이라고 체념하며 어머니를 부르짖으면서 사사된다.
[1]
후술하겠지만 선조는 즉위 전 하성군 시절에 복성군의 양자였다. 즉위하면서 명종에게 입적되어 자동으로 파양.
[2]
복성군의 이복동생
해안군의 아들. 후술하겠지만 기존의 양자였던 하성군이 명종에게 입적되어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자동으로 파양됐기 때문에 새로 입양되었다.
[3]
태지에 따르면 9월 29일 자시.
[4]
이복 남동생
해안군의 6남.
[5]
봉호는
충남
서산군(瑞山郡)에서 유래했다. 여담으로
광평대군의 증손자인 서성군이 있었는데, 원래 서성부정(瑞城副正)이었다가
1874년에 군(君)으로 추증되었다.
[6]
봉호는
전남
화순군의 옛지명인 동복(同福)에서 유래했다.
[7]
후에 경빈으로 승격되었다.
[8]
문정왕후는 1501년생이라 복성군보다 겨우 8살이 많았을 뿐이었다. 만약 중종이 죽은 해까지 살아있었다면 35살.
광해군과
인목왕후(소성대비)에 못잖은(이 쪽은 광해군이 9살 더 많은, 그야말로 아들보다 어린 여성을 계비로 맞아들인 케이스다)장성한 아들과 계비의 대립구도다.
[9]
다만 이렇게 반응은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이 때도 복성군의 신원은 회복되지 못하였다. 이약빙의 상소가 있고 2년 뒤 인종이 탄원한 끝에 복성군의 신원이 회복되었다.
[10]
그것도 현재 재위 중인 왕의 아들인데 말이다! 선왕의 아들이라면 역모에 휘말리는 등의 이유로 죽는 사례가 제법 있었다. 하지만 재위 중인 왕이 아들을 죽인 경우는 중종과 영조뿐이다.
[11]
이복 남동생
덕흥대원군의 3남
[12]
윤씨 부인은 복성군이 상주로 유배갈 때 따라 내려갔는데 이후 부친 윤인범의 병환을 이유로 서울에 올라와 머무르다가 대간들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13]
명종과
덕흥군 둘 다 복성군의 이복동생이다.
[14]
후에 이복동생인 서천군 이금(西川君 李錦)의 서차남인 화원군 이효성(花原君 李孝誠)을 양자로 들였다.
[15]
가계도를 따지면 복성군 다음에
신성군을 양자로 삼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즉 가계 상으로 조손(祖孫) 관계로, 봉사손(奉祀孫) 내지는 시양손(侍養孫)으로 봐야 마땅하다. 왕족에 대해 봉사손을 세운 경우는
광평대군이 그 예로, 그는
무안대군의 봉사손으로 지명되었다.
[16]
딸 외에 후사가 없다.
[17]
능창군이 역모로 죽지 않았다해도 이 집안 역시 서출인 외동딸 이외엔 후사가 없어 어찌되었든 양자를 다시 들여야 했었다.
[18]
성종의 16남(서14남).
[19]
성종의 11남(서7남).
[20]
함릉군의 고조부인 영천군 이정(靈川君 李侹)은 경명군의 친손자이다.
[21]
더 어린 쪽이 원자, 큰 쪽(오승윤)이 복성군이다. 2002년
KBS 드라마 <
매직키드 마수리>의 주인공
마수리 역을 맡았던 배우이다.
[22]
오승윤은 이 때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인터뷰했다.
[23]
아역이라도
고등학생 정도라면 분장 등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오승윤은
초등학생이라서 안홍진이 연기했다.
[24]
사실
명종이 태어나기 전까지 중종의 유일한 적자이자 문정왕후의 후원까지 받는 세자를 동궁 시절부터 눈엣가시로 여겼다. 또한 세자가 된 원자를 후원하는 문정왕후와도 사이가 나쁘다. 복성군도 경빈 박씨의
피가 어디간 건 아니어서 화풀이 대상으로 어린 이복동생을 때린 것이다.
[25]
다만 실제
역사에서 복성군은 문정왕후와 고작 8살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배우들의 비주얼 탓인지 복성군이 성인이 될 때 문정왕후는 제법 나이가 든 모습으로 변한다. 사실 이 드라마에서는 배우들의 나이
고증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지라 실제 역사에서는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조차 문정왕후보다 한참 연배가 많은
오빠로 나온다. 참고로 윤원형과도 삼촌과 조카뻘의 모습이지만 둘의 나이차이는 불과 6살 차이다.
[26]
처음엔 내가 세자가 되겠다며 야심을 보이지만 정치판을 보고는차라리 이름 없는 방계로 사는 게 속편하지 않을까?라며 어린 나이에 고민하는 모습도 보인다.
[27]
사실 당연히 현대인들인 시청자들이 익숙한 가족간의 암투를 묘사하기 위해 넣은 장면이지만, 조선시대 예법으로 보면 말도 안되는 장면들이다. 왕의 자식은 전부 무품이라도 정식으로 책봉된 왕세자는 적자와 서자를 따지기 전에 종친에 불과한 군 따위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며, 왕위계승자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건 역모로 여겨질 수 있는 짓이다. 애초에 세자가 되지 못한 왕의 아들들은 역모의 구심점이 될 수 있으므로 견제를 받고, 이런 오해를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마당에 내가 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떠들고 다니는건 상상할 수도 없다. 사적으론 몰라도 엄격한 왕실 예법에서는 아버지(상왕)과 어머니(대비)도 왕에게 존대를 해야하는 마당에, 나이 좀 많다고 세자에게 형 운운하는 건 말도 안되는 짓거리다. 또한 왕의 자식들은 생모가 누구든지 나이가 어떻든지 간에 중전의 자식으로 여겨진다. 폐모살제의 죄를 물어 쫓겨난 광해군은 '어머니' 인목왕후보다 9살이나 연상이었다. 또한 서자인 광해군이 세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난건 그가 세자로 책봉된지 14년이나 이후였기 때문이다. 이미 세자로 책봉된 시점에서 광해군은 단순한 군이 아닌 왕위계승자인데, 적자가 태어났다고 해서 갈아치우는 건 애초에 무리수다. 예법으로 따지면 복성군은 차기 왕이자 자신이 충성을 바쳐야하는 세자에게 감히 폭력을 휘두르고, 감히 자신의 어머니인 중전에게 대드는 역모+패륜 콤보를 저질렀기에 당장 처형당해야 정상이다. 또한 경빈은 후궁 주제에 감히 왕자에게 손을 댄 셈이다. 애초에 복성군이 왕이 된다고 해도 경빈 박씨는 생모로서 대접을 받을 수는 있어도 (중전이 쫓겨나지 않는 이상) 자신의 친아들을 아들이라 부르지도 못하며, 복성군이 왕이 되어도 그는 문정왕후의 자식이기 때문에 대비가 될 수도 없다.
[28]
실제 역사에서도 중종은
신하들의 복성군 사사 요구를 무려 19번이나 거절하기도 했으나 결국 마지막에는 사사를 허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