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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32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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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f0f0><colcolor=#0d164a> 선거 일시 | 11월 8일 5시 ~ 11월 9일 6시[UTC] | |||||
선거인단 | 531명 | |||||
투표율 | 56.8% (▼ 0.1%p) | |||||
선거 결과 | ||||||
후보 |
[[공화당(미국)| 공화당 ]] |
[[민주당(미국)| 민주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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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스테이트 | 캘리포니아 | 뉴욕 | ||||
승리 주 | 6 | 42 | ||||
선거인단 | ||||||
59명 | 472명 | |||||
전국 득표 | ||||||
39.7% 15,761,254표 |
57.4% 22,821,277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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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2년 11월 8일 치러진 미국의 대통령 선거.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부통령 후보 존 낸스 가너가 재선에 도전하는 공화당의 현직 대통령 허버트 후버와 부통령 찰스 커티스를 꺾고 미국의 제32대 대통령과 32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대공황으로 인해 인기가 폭락한 허버트 후버가 경제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개입과 금주법의 폐지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루스벨트가 현직 대통령을 상대로 전례가 없는 대승을 거두어냈다.[2] 이 선거의 결과로 당선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의 몰락과 케인스주의를 기반으로 한[3] 수정자본주의가 부상한 계기가 된 뉴딜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미국 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선거였다. 이 선거를 통해 남북 전쟁 이후 거의 70년간 일당우위정당제에 가까운 체제[4]를 구축한 공화당의 당세가 붕괴되었으며, 1953년까지 장장 20년에 달하는 민주당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다.
2. 배경: 대공황의 미국 1929~1932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둔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매우 높은 인기 속에서 임기를 시작한다. 미국 경제는 호황이었고 몇가지의 잡음을 제외한다면 후버의 재선은 사실상 따논 당상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곳 저곳에서 파열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농장의 불황은 말할 수준이 아니었고 1차 대전 전시 호황경제로 늘어난 공급량에 소비량이 따라가지 못해 공장에는 재고품만이 쌓여갔다. 그런데도 과열 투기로 주가는 끝 없이 상승했고 퇴임을 앞둔 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미국의 놀라운 공업생산력에 비하면 오히려 현재의 주가는 싼 편이라는 안일한 소리만 내놓으며 주식 버블 통제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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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0월 29일 주식을 회수하러 뉴욕 증권거래소에 몰려든 투자자들 |
물론 대중적인 인식과 달리 10월 29일의 주가 폭락이 실질적인 대공황의 시작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석유왕 록펠러, 케네디 가문을 비롯한 많은 거부들이 주가가 폭락하자 한탕을 노리고 저가에 주식을 매매하면서 일시적으로 주가가 안정되었기 때문이다.[5] 1930년까지 주가는 보합세를 기록했으며, 후버 대통령은 "위기가 완전히 지나간 것은 아니지만, 일단 최악의 시기는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라는 섣부른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후버의 예상은 처참하게 빗나갔다. 후버 대통령은 무너지는 농장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관세법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에 서명했다. 이 법은 관세품에 55%에서 400%에 달하는 관세를 매겨 미국의 사업을 외국의 값싼 상품으로부터 보호하고, 1930년의 회복세를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제정되었다. 하지만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통과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다른 나라들도 덩달아 보복관세 조치를 취했다. 이미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상원을 통과하기 이전 호주는 특별 관세를 크게 인상했고 스무트-홀리 관세법 통과 직후 일반 관세까지 올렸다. 캐나다는 1932년까지 3차례에 걸쳐 관세를 인상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미국산 자동차에, 스페인은 농산물에 막대한 관세를 부과했다. 윌리엄 보라와 같은 공화당 내 진보파들도 관세법에 반대하며 후버와의 관계를 단절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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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 존스 종합지수, 1929년-1932년 |
해를 넘긴 1931년, 불은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옮겨 붙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은행은 연쇄 파산을 시작했다. 무명의 화가 출신 극우 정치가 아돌프 히틀러가 세운 나치당은 대공황으로 지친 민중의 지지를 받아 독일의 온갖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투자자들의 불안을 자아냈고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동유럽에서 더욱 극심했다. 대륙의 기업가들은 금고에 보관해둔 파운드화를 금으로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영국의 금은 순식간에 동이 나버렸다. 영란은행은 몇달도 되지 않아 금본위제 포기를 선언했다. 파운드화가 무너지자, 한달 뒤 18개 국가가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선택지가 없었던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은행을 살리기 위해 달러를 들고 금을 달라고 요구했다. 미국의 금은 순식간에 유출되었고 은행은 더욱 빠르게 파산, 2,300개가 넘는 은행이 1931년 파산하면서 1931년은 1930년보다도 더욱 나쁜 상황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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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센트럴파크에 노숙자들이 세운 빈민촌 "후버빌" |
후버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서도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피력했다. 그는 시장이 자생적으로 일어설 것이라고 믿었고, 연설마다 금방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럴수록 더 많은 기업과 은행이 도산했다. 후버는 대통령이 이전과 같은 품위를 갖추면 사람들도 대통령을 보고 힘을 얻어 소비를 늘릴거라며 고급 식기구에 비싼 음식을 담아 매끼 먹었지만 정작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먹을 게 없어 쓰레기통을 뒤지고 무료 배식대에 줄을 서야했다. 그리고 연준은 금본위제를 사수하겠다는 명목 하에 1931년 10월 금리를 단숨에 2%p나 올렸다. 디플레이션은 더욱 심화되었고 미국인들은 버틸 수 없었다.
3. 정당 별 상황
3.1. 공화당
공화당의 상황은 참담했다. 이 당시에는 과학적 여론조사가 존재하지 않았지만[8], 전문가들은 만약 이 당시 여론조사가 행해졌다면 후버와 공화당은 미국 역사상 가장 낮은 수준의 지지율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9] 이미 1930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입증된 바 있다. 상원에서 공화당은 8석을 잃어 48석을 얻었는데 이때는 상원 정원이 96명일 때라, 부통령이 타이 브레이킹을 해야 가까스로 공화당이 과반을 넘는 수준이었다. 하원에서는 52석을 잃은 218석을 얻어 217석을 얻은 민주당과 미네소타 농민노동당[10] 연합을 불과 1석 앞지르는데 그쳤는데, 회기가 시작하기 전에 사망한 의원들과 그 보궐선거로 새로 당선된 의원들로 인해 개원 당시에는 민주당 219석 대 공화당 212석으로 공화당이 하원 과반 의석을 내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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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중간선거의 하원의원 선거 결과[11] |
후버는 당원 사이에서도 인기가 없었다. 이 당시의 예비선거는 실제 후보 지명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고 당원의 여론을 확인하는 작업 정도로 여겨졌는데, 여기에서도 후버가 무명의 전 상원의원 조지프 I. 프랑스에게 1,137,948표 대 861,602표로 밀리면서 체면을 구기게 되었다. 후버와 쿨리지 모두에 반대하고 본선에서는 루스벨트를 지지한 공화당 내 진보파 조지 W. 노리스도 13만 9,000표나 받았다. 또한 또다른 당내 진보파인 노동운동가 제이콥 S. 콕시 시니어(Jacob S. Coxey)[13]가 오하이오 프라이머리에서 무려 후버의 8배인 43%를 득표하며 승리하는 결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는 당시 후버의 대선 재출마가 당원들 사이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조지프 I. 프랑스는 예비선거가 종료되기도 전에 후보직을 사퇴해버렸고, 노리스 역시 공화당 내에서 폭 넓게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많은 공화당 중진 정치가들이 후버를 비난하면서도, 공화당이 대참패할게 뻔한 대선에 출마하는걸 "폭탄 돌리기"나 다름이 없이 여겨 출마하지 않으려고 했다.[14] 이런 이유로 후버가 다시 공화당의 재지명을 받는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허버트 후버는 압도적으로 공화당의 재지명을 받으며, 찰스 커티스 부통령도 찰스 G. 도스 등으로 교체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큰 잡음 없이 부통령 후보로 재지명된다.
3.2. 민주당
3.2.1.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부상
1928년 대선의 민주당 참패와, 대공황의 잿더미 위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일어섰다. 정치 명문가에서 귀족 자제처럼 부유하게 자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제임스 M. 콕스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한 적이 있는, 민주당 내 유력 정치가였다. 하지만 이듬해 휴가를 보내다가 찬 물에 빠져 온 몸을 꿰뚫는 것과 같이[15] 고통스러운 소아마비 장애 진단을 받고 반신 불수가 되어 휠체어 신세가 되었다. 루스벨트는 진지하게 정계 은퇴까지 고려했지만, 가족과 친구, 측근들의 만류 속에 정계에 남기로 했다. 루스벨트는 3년간 뼈를 깎는 재활 치료를 받았고, 휠체어 없이도 어느정도는 목발을 짚고 걸어다닐 수 있을만큼 병세가 회복되었다. 오랜 투병 끝에 그는 1924년 민주당 대선 전당대회에서 모두를 놀라게 하며 앨 스미스를 지지하는 기조 연설자로 참석했고, 여기서 감동적인 연설을 해[16][17] 청중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4년 후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함께 뉴욕 주지사 선거가 열렸는데, 루스벨트는 앨 스미스의 지지를 받고 뉴욕 주지사로 출마하여 뉴욕 주에서 패배한 앨 스미스를 앞지르고 0.6%p의 차이로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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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주지사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장애와 대공황을 딛어내고 미국에서 가장 큰 주의 성공적인 주지사가 된 루스벨트는 1932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가장 명확한 프론트러너였다. 실제로 이때 민주당 전국위원회(DNC)의 후원자였던 제시 스트라우스(Jesse I. Straus)[19]가 투표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전당대회 참석자들을 상대로 비밀 설문조사를 한 결과, 루스벨트를 선호하는 당원의 비율이 90%에 달한 주가 십중팔구였다고 한다. 1932년 1월 23일 루스벨트는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3월에는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이자 1928년 대선의 부통령 후보로 또다른 프론트러너였던 조지프 T. 로빈슨의 지지도 확보했다.
3.2.2. 앨 스미스의 반격
물론 루스벨트가 쉽게 대선 후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민주당은 1920년대 이후 북부의 도시 중심 파벌과 남부의 딕시크랫, 서부의 농촌 중심 파벌로 분열되어있었는데, 루스벨트는 앨 스미스의 후원을 받는 도시파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거기다 1929년 뉴욕주지사로 재직하면서 앨 스미스의 부패한 측근들을 내치는 과정에서 앨 스미스는 물론 부정부패에 찌들어있던 대부분의 민주당 도시파 리더들과 결별했기 때문에 루스벨트는 당 내의 거의 모든 주요 세력과 대립해야했다. 윌리엄 깁스 매커두와 텍사스는 존 낸스 가너 하원의장을 지지했고, 민주당의 도시 기득권 세력은 1932년 2월 출마를 선언한 전 뉴욕주지사 겸 1928년 대선 후보 앨 스미스를 지지했다. 이런 방식으로 다양한 이유로 루스벨트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앨 스미스, 존 낸스 가너, 윌리엄 깁스 매커두, 존 W. 데이비스[20] 등의 민주당 정치가들은 광범위한 "전당대회 반-루스벨트 동맹"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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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6월 27일 "타임"의 표지를 장식한 앨 스미스 |
그러나 루스벨트는 당원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처음에는 FDR이 스미스처럼 친-태머니, 친-기업이라고 믿었으나 FDR이 끊임없이 진보적 정책을 펼치자 결국 버튼 K. 휠러[22], 휴이 롱, 코델 헐, 앨번 W. 바클리, 조지프 T. 로빈슨 등 수많은 서/남부 출신 민주당원들이 루스벨트를 지지하게 되었고, 뛰어난 전략가 제임스 팔리(James Farley)[23]도 루스벨트를 지지함에 따라 당 내 세력의 충분한 지지를 얻었다. 또 루스벨트의 동맹이자 진보파의 중진이었던 토머스 J. 월시(Thomas J. Walsh)가 스미스의 동맹자였던 조엣 슈스(Jouett Shouse)를 626표 대 528표로 꺾고 민주당 전당대회 의장으로 선출되며 점차 판세는 루스벨트로 기울었다. 반면 앨 스미스는 1928년 정계 은퇴 이후 1931년까지 정계에 복귀하지 않음에 따라 많은 정치적 동맹을 루스벨트에게 빼앗겼고 태머니 홀에 대한 지배력도 일부 상실했다. 그 결과 1932년 7월 1일, 1차 전당대회 투표에서 루스벨트는 전체 1,154명의 대의원 중 666.25명을 얻어 전체 대의원의 57.73%를 장악, 201.75명(17.48%) 밖에 얻지 못한 앨 스미스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것이 앨 스미스의 패배와 루스벨트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앨 스미스가 노린 것은 바로 민주당 전당대회의 "2/3 룰"이었다. 2/3 룰이란 전체 대의원 1,154명 중 2/3인 770명이 동의해야 대선 후보가 될 수 있으며 그에 못미치는 투표를 받은 사람은 후보가 될 수 없다는 민주당의 고유한 투표 방식이었다.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 룰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24년 대선의 두 대권 주자였던 앨 스미스와 윌리엄 깁스 매커두의 치열한 경쟁으로 누구도 2/3을 얻지 못하자, 양 후보는 타협해 존 W. 데이비스라는 무명의 타협 후보를 대선 후보로 내보냈다. 앨 스미스는 이를 이용해, 1924년처럼 투표를 교착화시키고 전 클리블랜드 시장이자 윌슨 정부 미국 전쟁장관[24]이었던 뉴턴 D. 베이커(Newton D. Baker)를 타협 후보로 제시해 루스벨트의 대권을 좌절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즉, 가질 수 없으면 모두 불태워버리겠다는 심보였다.
3.2.3. 루스벨트-가너 타협
앨 스미스가 간과한 점은 자신 역시 루스벨트를 저지할만큼의 충분한 대의원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단지 다른 후보자들의 표까지 합산해 루스벨트의 2/3 획득을 저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루스벨트는 3차 투표에서 682.79명을 획득, 2/3 득표까지 87.21명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존 낸스 가너의 득표 대의원 수는 101.25명이었다.가너의 후원자는 크게 두명, 언론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 전 재무장관 윌리엄 깁스 매커두였다. 그런데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싫어했지만 타협 후보 뉴턴 D. 베이커를 국제연맹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에 더욱 싫어했기 때문에 스미스가 전당대회를 교착화시키는 전략에 휘말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1924년 대선에서 103번이나 재투표를 하여 결국 대선 출마의 꿈을 접어야했던 윌리엄 깁스 매커두는 앨 스미스를 천적과 같이 싫어했을 뿐더러 루스벨트에 동방상련의 감정까지 느끼고 있었다. 매커두와 허스트는 스미스와의 반루스벨트 동맹을 깨고 루스벨트와 협력해야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하였으며, 존 낸스 가너를 설득해 그와 그의 대표단이 루스벨트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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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너와 루스벨트 |
루스벨트는 자신을 지지해준 존 낸스 가너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북부 루스벨트와 남부 가너의 연합이 형성된 것이다. 오랜 대권의 야망을 꺾고 끝내 자신을 지지해준 윌리엄 깁스 매커두에게는 캘리포니아 주의 상원의원으로 출마할 수 있도록 도왔다.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이 된 앨 스미스[25]는 루스벨트를 비난하면서 그의 지지를 거부함으로서 사실상 간접적으로 허버트 후버를 돕게 되었다.
4. 최종 후보
4.1. 공화당: 허버트 후버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 ||||||
대통령 후보 지명자 | 부통령 후보 지명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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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클라크 후버
미국 제31대 대통령 |
찰스 커티스
미국 제31대 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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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버 대통령의 후보직 승낙 연설 |
4.2. 민주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 ||||||
대통령 후보 지명자 | 부통령 후보 지명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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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제44대 뉴욕주지사 |
존 낸스 가너
제39대 미국 하원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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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 후보의 후보직 승낙 연설 |
4.3. 기타 후보자
5. 선거 진행
5.1. 대공황
남북전쟁 이후 유지되어왔던 공화당 패권을 한번에 사라지게 만든 전대미문의 공황이다. 대공황이 세계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대공황 문서에서 확인하도록 하고, 여기선 미국 정치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만 다룬다.먼저 1차대전 직후의 정세를 알아야 하는데, 1차대전 직후 멀쩡한 땅을 찾기 힘들 정도로 거의 모든 땅이 완전히 쑥대밭이 된 유럽과 달리 미국은 본토가 대서양 너머인지라 딱히 큰 피해도 입지 않았고, 오히려 전쟁물자를 영국과 프랑스에 팔아치우는 물주 노릇을 하면서 큰 경제적 이익을 챙김과 동시에 채권국으로 급부상한다. 그럼에도 남북전쟁 이후 사람이 이렇게 떼거지로 죽은 전적은 없었기에 고립주의 여론이 급부상하게 되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사망 이후 혁신주의 계파가 거의 날아간 공화당은 슬슬 보수화되기 시작한다.[28] 이렇게 시민들은 고립주의를 원했던 반면 민주당과 윌슨 행정부는 시민여론과 완전히 반대되는 개입주의를 주창하고 있었기에 인기가 갈수록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윌슨 행정부 심판 여론을 모은 공화당은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정상적 상태로의 귀환’(Return To Normalcy)라는 표어와 함께 하딩- 쿨리지 티켓을 내세워 백악관을 탈환한다.[29]
공화당이 집권함과 동시에 전쟁이 끝나면 찾아오는 호경기가[30] 시작되면서 공화당은 실로 높은 지지율을 구가하게 된다. 이 미칠듯한 호경기 속에서[31]1918년부터 1928년까지 공화당은 10년간 상하원을 모두 독점했고 하딩 사망 이후 열린 2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공화당은 늘 민주당을 상대로 늘 압승을 거뒀다.[32]
그러나 1929년 10월 24일과 10월 29일에 걸쳐 주가가 급락했는데도 후버 행정부와 공화당원들은 시장불간섭주의를 신줏단지 모시듯 소중히 여겼기에 시의적절히 개입할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이후 모두가 알듯 대공황이 시작된다.
5.2. 보너스 군대 진압 사건
참전용사 수당을 지급해달라고 D.C.에 시위하러온 1차대전 참전용사들을 상대로 총질을 한 희대의 막장사건.당시 궁지에 몰려있던 후버 행정부는 참전용사들의 시위가 격화되면서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대응책으로 더글라스 맥아더 육군참모총장을 내세워 적당히 내쫓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맥아더가 “참전용사는 거의 없고, 저것들 죄다 빨갱이다”로 요약되는 발언을 한 직후 행정부의 기조와는 달리 기병대와 보병, 심지어는 탱크까지 동원해 비무장 상태의 참전용사들을 상대로 무력진압을 시작한다![33] 놀란 후버 행정부는 즉시 진압을 멈추고 본대복귀할 것을 명령했으나 맥아더는 씹고 참전용사들이 모여있던 곳으로 돌격한다.
진압 도중 심각한 과잉진압으로 신생아 2명이 최루가스에 질식사, 1명의 임산부가 유산, 진압군과 참전용사측 모두 합쳐 약 1000명 가까이 되는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놀랍게도 맥아더는 잘리지 않았고,[34] 후버는 대공황+참전용사에 총질이라는
5.3.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낙관주의
5.4. 금주법 논쟁
금주법도 뜨거운 이슈였다. 미국 금주법 문서에서도 보듯 금주법이 등장한 것은 시대적 배경과 요구가 있었고 음주를 통제해야 할 필요성 또한 있었으나 너무 안일한 사고로 제정된 금주법은 오히려 광란의 20년대 시기동안 밀주, 마피아 창궐, 범죄증가 등의 문제를 일으키며 미국의 암적 존재가 되었다. 이 때문에 AAPA 같은 반금주법 단체들이 생겨났고 이미 하딩 행정부에서 후버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전 시기동안 금주법 폐지 요구가 강하게 빗발쳤다.문제는 이 법을 만든게 공화당이었다. 공화당도 금주법의 폐해를 인지하고 있었고 때문에 완화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원하는 전면 폐지만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 때 루즈벨트가 들고 나온 카드가 금주법 폐지 공약이었다. 당시 금주법 폐지 공약에 얼마나 호응했냐면 AAPA가 루즈벨트 지지를 선언했는데 반금주법 단체가 금주법 폐지 공약을 내거는 후보 지지하는게 당연한게 아닌가 싶겠지만 이 AAPA가 GE나 듀폰 등 대기업들의 후원을 받는 단체였다. 그러니까 사실상 대기업들도 루즈벨트를 지지한건데 루즈벨트의 경제정책 뉴딜이 그들 성향과 맞지 않음을 감안하면 자기들 돈에 직결되는 경제정책의 차이는 금주법 폐지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금주법 폐지 이슈는 컸다.
6. 선거 결과
6.1. 지역별 결과
7. 여담
8. 관련 문서
- 미국 대통령 선거
- 뉴딜 정책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32년 대선과 진영만 바뀌었지 구도가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누적된 요인으로 인한 경제난, 인기 없는 현직 대통령, 경제 부흥의 낙관주의를 제시한 강력한 야당 후보. 공교롭게도 두 선거는 20~21세기 경제학의 쌍두마차인 수정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시효를 알린 선거로 평가받기도 한다.
[UTC]
[2]
재선에 도전하는 현직 대통령이 이정도로 크게 패배한 것은 미국 초기 시대를 제외하면 1837년 공황으로 인기가 폭락한
마틴 밴 뷰런, 석유파동의 여파와 중도 성향 무소속 후보
존 B. 앤더슨의 독자출마로 인해 대참패한
지미 카터 정도를 제외하면 없다.
[3]
루스벨트 자신은 케인스의 영향을 크게 받지는 않았지만, 루스벨트의 유산을 계승한 케인스주의적 경제 관료들이 최소한 1970년대 오일쇼크까지 주류를 차지했다. 실제로 공화당 대통령인 아이젠하워나 닉슨도 일부 정책에서는 케인스주의적인 처방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4]
민주당이 1860년~1928년 사이 선거로 배출한 대통령은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우드로 윌슨 단 두명, 그것도 클리블랜드는 공화당 내 계파 갈등(
블레인파와 콩클링파의 갈등에 더해, 공화당의 부정부패에 반대하는 공화당 내 반부패 그룹 "머그웜프"의 클리블랜드 지지)으로 인해, 윌슨은 태프트-테디 루스벨트의 분열로 인한 공화당 분당으로 인해 승리하였던 것이었고 두명 모두 대중득표에서 50%를 넘기는데 실패하였다.
[5]
케네디 가문은 금주법~대공황 시기 주식 헐값 매수, 보스턴 마피아와 결탁한 밀주 판매 등으로 떼돈을 벌어 보스턴에서 제일 가는 부자 가문이 되었다.
[6]
예외적으로 캘리포니아 농산물에 대한 관세를 원했던
하이럼 존슨은 관세법을 지지했다.
[7]
더글러스 A. 어윈 교수를 비롯한 사람들은 관세법의 효과가 과장되었고 이 가뭄이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8]
독자들에게 응답을 받아 민심을 체크하는 원시적인 여론조사는 존재했는데, 이 방법은 1936년 대선에서 본선에서 선거인단을 8명밖에 못받은
알프 랜던의 대승리를 예측하는 사고를 치면서 사장되고 조지 갤럽이 도입한 과학적 표본 기반 여론조사가 상용화된다. 이후 1937년
갤럽 조사가 시작되면서 FDR 2차 행정부부터 지지율 추세를 통계로 알 수 있게 되었다.
[9]
미국 역사상 가장 지지율이 낮았던 대통령은 지지부진한
한국전쟁 속에서 22%를 기록한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었고, 가장 부정평가가 높았던 대통령은 임기 말에
대침체를 겪으며 71%를 기록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었다. 대공황의 결과물과 1932년 대선 결과를 감안하면, 적어도 현행 방식으로 여론조사를 했으면 후버는 10%대 지지율과 70%를 우습게 뛰어넘는 부정평가를 기록했을 가능성은 100%였을 것이지만 훗날 미국의 대통령 지지율 추세와(대표적으로 사임 직전
리처드 닉슨의 최저 지지율이 24%, 최고 부정평가가 66%였다) 후술할 1930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생각보다 선방한 편이란 것을 감안하면 적어도 후버가 현 여론조사 기준
박근혜와
디나 볼루아르테마냥 한자릿수 지지율 + 부정평가 90%대를 기록했을 가능성은 비교적 낮은 편이다.(...)
[10]
이후
미네소타 민주농민노동당으로 합당
[11]
짙은 파란색이 민주당이 새로 획득한 의석을 나타낸다.
[12]
실제로 그는 대선 2개월 후인 1933년 1월 사망했다.
[13]
1890년대 당시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이른바 '콕시의 군대(Coxey's Army)를 이끌며 돌풍을 일으켰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너무 많이 선거에 출마해 정치적 자본을 모조리 소모하면서 '사시사철 후보(Perennial Candidate)'라는 낙인이 찍혀있었다.
[14]
이런 현상은 민주당이 참패한 1972년 대선에서도 반복되었다. 이때는 대통령이 아니라 부통령 후보 지명 당시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조지 맥거번은
휴버트 험프리,
월터 먼데일,
에드먼드 머스키,
테드 케네디에게 부통령이 되달라고 요청했지만 모두 거부했고 그 결과 무명의 상원의원
토머스 이글턴이 부통령 후보가 된다. 다만 이때는 폭탄 돌리기 문제도 있었지만 맥거번과 험프리 사이의 민주당 계파 갈등 문제도 있었다.
[15]
루스벨트는 이 때의 투병 생활을 "솜이불의 무게, 얼굴을 스치는 산들바람조차 내 온 몸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라고 회고했다.
[16]
"앨 스미스는 오류와 잘못된 행동을 공격해 그의 대적들을 무릎 꿇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하는 내용을 듣는 모든 자들에게 진실을 말할 뿐만이 아니라 의로움까지 전달하고자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대, 정치적 전장의 행복한 전사여!" (He has a power to strike at error and wrongdoing that make his adversaries luail before him. He has a personality that carries to every hearer not only the sincerity but the righteousness of what he says. lie is the "Happy Warrior" of the political battlefield!)
[17]
이 ‘Happy Warrior’는 1980년대 초반까지 민주당 진영에서 정치구호로 꽤 자주 쓰였다.
[18]
다만 이 과정에서
앨 스미스와 결별한다. 앨 스미스는 이후 FDR의 정적이 된다.
[19]
미국 최대의 백화점이었던 메이시 백화점의 소유주로, 1912년 부모가 타이타닉 호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유명하다.
[20]
1924년 대선 후보
[21]
주세페 장가라의 총격으로 루스벨트 대신 죽은 것으로 유명하다.
[22]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로버트 M. 라폴레트의 러닝메이트였다.
[23]
체신국장이자 DNC 의장을 지내게 된 사람으로,
리 애트워터,
칼 로브 등과 함께 미국 역사상 최고의 선거 전략가 중 한명이라 불리는 루스벨트 당선의 일등 공신이다. 32년 선거에서도 후버가 6개 주만을 이길 것을 정확히 예측했고 36년에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랜던을 과대평가할 때 "As Maine goes, so goes Vermont."라는 말을 남기며 랜던이 참패할 것을 예측했다. 여담으로 루스벨트의 우표 덕질 친구이기도 했다.
[24]
현 국방장관의 전신이었던 직책 중 하나다.
[25]
호텔 방에서 친구들이랑 같이 쉬고 있을 때 라디오 생방송으로 평생의 정적
윌리엄 깁스 매커두의 루스벨트 지지 선언 소식을 듣고 말 그대로 극대노했다고 한다.
[26]
이 외에도 다양한 슬로건이 사용되었는데 대체로 내용은 "
강을 건너는 도중에 말을 바꾸지 말자"[35]라는 식의 처절한 것들이었다.
[27]
로고송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후 해당 곡은 민주당의 관례적인 당가 취급을 받게 되었다.
[28]
물론 아직까지는 자기네들이
링컨의 정당이라는 인식이 남아있었기에 민주당에 비해 ‘비교적’ 인종문제에 관해선 진보적 스탠스를 취한다. 여하튼 본래 진보계 정당이었던 공화당은 이때부터 조금씩 우향우하기 시작한다.
[29]
이때 민주당은 텃밭이었던 남부만을 수성하고 스윙 스테이트 역할을 하던 북동부는 그야말로 탈탈탈 털렸다. 선거인단 404 vs 127로 털렸으니 뭐…
[30]
전쟁이 끝나면 참전용사들이 귀환하고 그들이 소비를 시작하며 경기가 일시적으로 좋아진다.
[31]
당시는 2020년대가 아니다! 1차대전이 막 끝난 1920년대임을 명심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산층이 각 가구당 자가용 1대, 라디오 1대씩은 가질 수 있던 시절이었다.
[32]
선거인단 수만 대충 따져봐도 1924년 대선에서 쿨리지 382인 vs 데이비스 136인 vs 라폴레트 13인, 1928년 대선에서 후버 444인 vs 스미스 87인으로 늘 참패했다. 남부만 간신히 지켜냈을 정도.
[33]
여담으로 이때 맥아더의 명령을 받아 최전방에 섰던 사람이
조지 S. 패튼이다.
[34]
이후 군축 관련해 FDR과 대립각을 세워 필리핀으로 전출가기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