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자스 주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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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 | |
<colbgcolor=#002569><colcolor=#fff> 제26대 캔자스 주지사 알프레드 모스먼 랜던 Alfred Mossman Landon |
|
출생 | 1887년 9월 9일 |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웨스트미들섹스 | |
사망 | 1987년 10월 12일 (향년 100세)[1] |
미국 캔자스 주 토피카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재임기간 | 제26대 캔자스 주지사 |
1933년 1월 9일 ~ 1937년 1월 11일 | |
학력 | 캔자스 대학교 (법학사) |
종교 | 개신교 ( 감리회)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대위[2] |
정당 |
|
배우자 |
마거릿 플레밍 (사별) 테오 콥 (재혼) |
자녀 | 낸시 랜던 캐서바움 (딸)[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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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화당 출신의 정치인이자 제26대 캔자스 주지사, 1936년 미국 대선후보.2. 생애
1887년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나 오하이오를 거쳐 캔자스로 이주했다.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진 은행업이나 석유회사에서 로비스트로 활동했으며, 1차대전 당시엔 미 육군 화학부대에 입대했고 전쟁이 끝나자 대위로 전역했다.1912년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공화당을 탈당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그의 진보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며, 1922년 자신과 마찬가지로 진보주의적 공화당원 출신의 캔자스 주지사인 헨리 앨런의 비서가 되면서 정치적 경력이 시작된다.
1924년 로버트 M. 라폴레트가 진보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을 때는 1912년과 달리 진보당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1928년 대선에서 허버트 후버가 캔자스의 표를 확보하는 데 공을 세워 캔자스 공화당의 지역당 위원장 자리에 오른다.
1929년 대공황이 일어난데다 1932년 미국 대선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뉴딜동맹을 등에 업고 일약 돌풍을 일으키며 당선되자 재정보수주의적이었던 캔자스 공화당의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으며, 공화당의 텃밭이었던 캔자스에서 주지사직을 민주당에 빼앗길 위험에 처하자 구원투수로 투입되어 민주당 출신 주지사인 해리 우드링을 아슬아슬하게 꺾고 주지사 자리를 탈환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재선을 노리는 후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그와 선을 긋는다.
주지사로 재직할 당시 뉴딜 정책의 대부분, 특히 노조 정책을 강력히 지지했지만 FDR 행정부의 일부 정책이 지나치게 예산을 낭비하고 대기업에 적대적이라는 이유로 비판했으며, 캔자스에서 대공황의 피해를 복구하는데 크게 공헌하면서 높은 평가를 받아 1934년 주지사 선거에서도 재선에 성공한다.[4]
이후 주지사로서의 명성을 기반으로 공화당 경선에 출마해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후보로 선출되지만, 정작 대선 후보가 된 뒤로는 선거유세에 상당히 소극적이었고 FDR의 높은 인기도 한몫하는 바람에 공화당 역사상 최악의 대선 패배를 겪는다.[5]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뒤엔 주지사 재출마조차 포기하고 석유 업계로 돌아갔으며, 이후 FDR 행정부에 입각해달라는 요청도 거절해가면서 다시는 정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3. 기타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공화당 공식 후보로, 역대 2위 후보들 중 역대 최저 선거인단(8명)을 가져간 인물이다.[6]여담으로 Hearts of Iron 4에서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할 수 있다. '확고한 입헌주의자'란 특성이 있어 이념 전향 방어 +50% 를 준다.
위 게임의 모드 카이저라이히[7]에도 1936년 대선후보로 등장한다. 카이저라이히 세계에선 FDR이 대통령이 못되고 소아마비가 악화돼 사망했다. 랜던이 대통령이 되면 FDR 대신 뉴딜 정책을 한다.
1936년 미국 대선에서 선거유세에 사용할 뱃지 등의 상징을 고향 캔자스의 상징인 해바라기로 통일해 '해바라기'라는 별명이 붙은 적 있으며, 정확히 60년 뒤 이를 동향 출신이자 똑같은 공화당 대선 후보인 밥 돌이 따라했다고 한다. 참고자료
알프 랜던은 당시 공화당의 난맥상 속에서 급진적 뉴딜에 대한 온건하고 양식적인 반론가로서 의미를 갖는다. 경제적 자유와 개인의 자유는 일맥상통하고, 경제적 자유를 비상시를 핑계로 제한하면 개인의 자유도 제한하게 된다는 논변가였다. 그러나 전국 선거에서 루스벨트의 경쟁자로서는 '행방불명'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무기력했다.[8] 무기대여법은 반대하지만 참전은 지지했고, 마셜플랜을 지지하면서도 중공의 승인은 필요하다고 봤던 실용적인 면모는 정치인보다는 사업가이자 행정가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캔자스 주립 대학교의 유명한 "랜던 강의"는 1966년 이래 그의 시그니쳐가 되었다.
4.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932 | 미국 주지사 선거 | 캔자스 |
|
278,581 (34.82%) | 당선 (1위) | 초선 |
1934 | 미국 주지사 선거 | 422,030 (53.51%) | 재선 | |||
1936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16,684,231 (36.54%, 8명) | 낙선 (2위) |
[1]
100년하고 33일을 더 살았다. 만약 현재 미국 최장수 대통령인
지미 카터(1924년 10월 1일생)가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전전날(2024년 11월 3일)까지 살아있다면 역대 대선 주자들 중 장수 기록 공동 2위 기록을 하는 것이다. 참고로 1위는 100세 6개월 2주의
스트롬 서먼드.
[2]
1918년에 육군 장교로 임관했으나, 프랑스 전선에 투입될 준비를 하던 도중
베르사유 조약으로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곧바로 고향인 캔자스로 돌아와 전역했다.
[3]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캔자스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했으며, 1978년에서 1997년에 거쳐 캔자스 상원의원직을 지내며 마지막
록펠러 공화당원 중 한 명으로서
에드워드 케네디와 함께 현대
메디케어 관련 법안의 모태가 된 케네디-캐서바움 법안(일명 HIPA법)을 제출하고 1987년 민권법에 찬성표를 던지는 등 주로 보건의료계와 민권운동 분야에서 활약했다. 참고로 1932년생으로 2022년 기준 90세인데 아직도 굉장히 정정한 상태이며,
2016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도널드 트럼프가 후보로 선출되자 반대 의사를 표했고 이후 캔자스에서 치러진 선거들에서도 공화당이 아닌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4]
당시 공화당 출신 주지사들의 평판은 정말로 엉망이어서, 1934년 주지사 선거 당시 미국 48개 주 중에서 재선에 성공한 공화당 출신 주지사는 캘리포니아 주지사인 프랭크 메리엄과 랜던 단 둘뿐이었다.
[5]
있단 선거인단에서 523 대 8로 515명차 패배했고 득표에서도 60.8% 대 36.5%로 24.3% 차 패배 당했다.
[6]
단 이는
18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출마한 적은 없지만
뉴햄프셔 주 선거인단 중 1명인 윌리엄 플러머가
멋대로 던진 표를 받아 선거인단 1명을 얻은
존 퀸시 애덤스의 기록을 제외한 수치이다.물론 공식 출마 후보 기준으로는 랜던이 기록한 8명이 역대 최저가 맞다.
[7]
1차대전에서 독일제국이 승리한 세계
[8]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이때 잡지 구독자 위주로 여론조사를 진행함으로서 유명한 초대형 여론조사 실패를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