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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올리버 칸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2. 클럽 경력
2.1. 카를스루어 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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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카를스루어에서 데뷔했지만 처음에는 필드 플레이어였다. 이듬해 카를스루어 유스에서 골키퍼로 뛰며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0년, 팀이 분데스리가로 승격한 후 그는 주전 골키퍼 자리를 차지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93-94 시즌 칼스루헤는 UEFA컵 준결승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고, 그 과정에서 8강에서 만난 스페인의 명문 발렌시아에게 메스타야 원정에서는 3:1로 패했으나, 홈에서 칸의 환상적인 활약에 힘입어 7:0이라는 믿기 힘든 대승을 거두며 4강에 진출한다.(독일에서는 이를 빌트파크슈타디온의 기적이라 칭한다.) 1994년에는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에도 발탁된다.
2.2. FC 바이에른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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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2일, 현역 은퇴 경기에서 |
2.2.1. 초창기 (1994~1998)
그의 활약상을 눈여겨 본 독일 최고의 명문 바이에른 뮌헨은 1994/95 시즌을 앞두고 역대 골키퍼 최고 몸값(2.5 M €)[1]을 들여 칸을 영입한다.이 당시 조반니 트라파토니, 오토 레하겔 감독 하에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선수단은 내외부로 사건사고와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라이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분데스리가에 UEFA 챔피언스리그까지 쓸어가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자존심을 구기고 있었다.
칸은 이적 후 거의 모든 경기에 출장하며 당시 FC 할리우드라는 비아냥을 듣던 바이에른의 해이해진 수비진을 휘어잡으며 주전 골키퍼로 군림했다. 그러나 도르트문트에게 2시즌 내리 리그 우승을 내주었고, 오토 레하겔 감독이 경질되고 프란츠 베켄바워가 임시감독으로 부임해 95/96시즌 UEFA컵 결승에서 지네딘 지단의 보르도를 꺾고 첫 메이저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바로 다음 시즌인 96-97 시즌에 칸은 복귀한 트라파토니 감독 하에서 생애 첫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한다. 이듬해에는 뮌헨에서 실패를 겪었던 오토 레하겔의 카이저슬라우테른에게 휘둘리며 리그를 내주었고, 그나마 DFB-포칼을 들어올린다. 그러나 팀의 불성실한 분위기 속에 다혈질의 트라파토니 감독 역시 분노의 인터뷰를 남긴채 떠난다.
2.2.2. 전성기(1998~2003)
그 다음으로 뮌헨에 부임한 감독은 전설로 남은 오트마어 히츠펠트. 그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보드진과의 마찰로 감독직에서 물러나 휴식 중인 상태였다. 히츠펠트가 부임한 첫 시즌부터 향후 몇년간 분데스리가와 유럽 절대강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바이에른에서 칸은 붙박이 주전으로 맹활약한다. 1999년부터는 은퇴 직전의 슈마이켈이나 당시 이탈리아의 신성 잔루이지 부폰, 각각 스페인, 프랑스 최고의 골키퍼 산티아고 카니사레스, 파비앵 바르테즈 등을 모두 재끼고 UEFA 올해의 골키퍼상을 4년 연속 독차지했다.1998-99 시즌 인터 밀란과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등 쟁쟁한 상대들을 상대로 선방 쇼를 보여주며 첫 챔피언스 리그 결승 무대를 밟았으나 맨유를 상대로 한 캄프 누에서의 결승전에서 전반 6분만에 터진 마리오 바슬러의 프리킥골로 앞서가면서 경기내내 맨유를 압도했으나 경기종료직전 두번의 코너킥에서 연달아 실점하며 순식간에 우승컵을 넘겨주고 만다.(영국에서는 이를 ' 캄프 누의 기적', 독일에서는 ' 캄프 누의 비극'이라고 명명한다.) 칸은 그나마 슈마이켈을 누르고 처음으로 UEFA 최우수 골키퍼로 선정된것에 만족해야했다.
2000-01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서 바이에른은 데이비드 베컴,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올레 군나르 솔샤르등이 이끈 맨유를 8강에서 만나 홈,원정에서 모두 승리하며 2년전의 패배를 되갚아주며 4강에 진출했고 라울 곤살레스, 루이스 피구가 선봉을 맡은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하였으나 역시 홈/원정 모두 승리하며 결승전에 진출한다. 특히 4강 1차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의 경기는 칸의 인생경기 급으로, 거의 하이라이트가 뮌헨vs레알이 아니라 칸v레알같은 경기가 나왔다. 칸은 무수한 선방쇼를 보여주며 지오반니 에우베르의 결승골을 지켜냈다.
2차전 홈에서도 옌스 예레미스의 프리킥 상황에서의 멋진 골과 지오반니 에우베르의 로빙골로 승리하며 바이에른은 2년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진출한다.
그리고, 칸의 클럽 생활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이 결승전에서 펼쳐진다.
산 시로에서 열린 결승전 상대는 스페인 최고의 스타 가이스카 멘디에타 등을 앞세운 라리가의 강호 발렌시아였다. 먼저 멘디에타에게 PK골을 골을 먹혔으나 당시 주장이었던 슈테판 에펜베르크도 똑같이 PK골로 갚아주며 동점, 그 후 득점없이 결국 경기는 승부차기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칸은, 무려 3개의 PK를 막아내며 드디어 팀에 빅 이어를 안긴다.[2] 경기 하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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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전설의 승부차기 선방 |
KAAAAAAAAAHN! DIE BAYERN!!
칸은 이 시즌 UEFA 올해의 골키퍼에 선정되었으며 결승전 종료 후 산티아고 카니사레스를 위로한 장면 덕분에 UEFA 페어플레이 상도 함께 수상한다. 칸은 인터뷰에서 "내가 카니자레스를 위로한건 그가 어떤 느낌일지 완전히 이해했었기 때문이다. 2년 전의 내가 그랬다"라고 소감을 밝혔다.[3] 그리고 2001년 발롱도르에서 3위를 차지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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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때의 공은 주장인 에펜베르크나 에우베르, 리자라쥐, 살리하미지치, 숄, 링케 등 팀원 모두의 공이었지만, 칸의 존재감은 이때부터 본격적이었다. 01-02 시즌 팀은 슈퍼컵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보카 주니어스를 꺾고 인터컨티넨탈컵을 우승했고, 챔피언스리그도 다시 한번 8강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만났지만 이번에는 3대2로 아쉽게 탈락, 리그/컵을 각각 도르트문트, 브레멘에 내주며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였지만 칸은 여전히 4년 연속 UEFA 올해의 골키퍼에, 6년 연속 키커 올해의 골키퍼에 선정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의 활약 덕에 FIFA 올해의 선수 2위에 올랐으며, 발롱도르도 2년 연속 3위에 올랐다. 특히 발롱도르 포디움에 2회 이상 이름을 올린 골키퍼는 현재까지도 칸이 유일무이하다. 당연히 2년 연속 포디움도 칸밖에 없다. 이것은 골키퍼 유일의 발롱도르 수상자이자 역대 최고의 골키퍼인 레프 야신조차 이뤄보지 못한 업적이다. 후배인 노이어가 2013년 FIFA 발롱도르 3위를 차지한 적은 있지만 칸처럼 2번 들지는 못했다. 그만큼 칸은 레전드였다.
그리고 2002-03 시즌, 리빌딩된 바이에른은 챔스에서는 로이 마카이의 맹폭에 충격의 조별 리그 탈락을 겪었지만 다시 한번 리그와 포칼을 동시에 석권하면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2.2.3. 황혼기 (2003~2006)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칸은 부상, 동기부여 부족, 사생활 문제 등으로 침체기를 맞는다. 동시에 세계 최고 골키퍼 자리는 결국 세리에 A와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맹활약을 한 아주리 군단과 유벤투스의 주전 수문장 잔루이지 부폰이 차지하게 된다.03-04 시즌에는 16강에 진출했으나 레알 마드리드에게 합계 2대1로 패했다. 하필이면 이 경기에서는 칸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뮌헨이 전체적으로 부진하던 와중에서도 홈에서는 나쁘지 않은 경기력으로 레알을 거의 꺾었으나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그리 좋지 못한 프리킥을 쉽게 막아놓고선 캐칭실수로 알까기를 내줘 동점골을 허용, 1대1 무승부로 끝나게 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포칼도 3부 리그팀 아헨에게 16강에서 발목잡히는 등 수난끝에 히츠펠트 감독도 경질되고 말았다. 물론 한시즌만에 폭망한 것은 아니고 여전히 유럽 정상급 키퍼 중 한명으로 활약했고 매 시즌 소수점대 실점률을 기록했으나 2000년대 초반같은 무적의 포스는 희미해지고 있었다. 칸은 이듬해 펠릭스 마가트 체제에서 04-05, 05-06 분데스리가, 포칼 2년 연속 더블 우승을 기록하는데 맹활약했다. 특히 2시즌 연속 DFB-포칼 결승에서 각각 샬케 04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상대로 엄청난 선방들을 보여주며 타이틀을 방어했다.
2.2.4. 히츠펠트와의 마지막 2년과 은퇴 (2006~2008)
2006-07 시즌 바이에른은 2003-04 시즌 못지않은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다. 전반기 팀은 강등권과 승점 4점차이나는 나락까지 떨어진데다 후반기에도 승격팀 보훔에게 0대0 무승부를 하는 등 졸전이 이어지자 2007년 1월, 펠릭스 마가트 감독은 경질되었고, 바이에른의 영광의 시대를 이끌었던 오트마어 히츠펠트가 다시 부임했다. 챔스는 인터 밀란을 누르고 1위로 진출했는데 하필 조 2위로 올라온 파비오 카펠로의 레알 마드리드 CF를 16강에서 만나고 말았다. 칸은 이케르 카시야스와 선방쇼 대결을 펼치며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데이비드 베컴의 프리킥을 환상적으로 슈퍼세이브해내는 모습을 보여줬다. 바이에른은 레알을 원정다득점으로 꺾었지만 8강에서 천적 AC 밀란을 만나버리며 탈락했다. 나락까지 추락했던 팀은 차츰차츰 순위를 올렸지만 4위로 마감하며 UEFA컵으로 좌천되는 수모를 겪는다.커리어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7/08 시즌, 칸은 히츠펠트 체제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바이에른의 더블을 이끌고 명예롭게 은퇴했다. 38세의 나이로 맞는 마지막 시즌까지도 소수점대 실점률로 방어해 냈으며, DFB-포칼에서 1라운드부터 4부리그 소속 SV 바커 부르크하우젠에게 뜬금 무승부를 거두며 승부차기까지 갔는데 여기서 2개의 슛을 슈퍼세이브 해내며 팀을 구해냈다. 더비 라이벌 관계인 TSV 1860 뮌헨과의 8강전에서는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PK 획득에 기여하는 롱패스를 성공시켰다. 결승전에서 클루게의 슛을 슈퍼세이브하는 등 커리어 마지막 순간까지 클래스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칸은 은퇴까지 무려 197회의 무실점으로 역대 분데스리가 골키퍼들 가운데 가장 많은 무실점을 기록했다. 2008년 5월 17일 헤르타 BSC를 4대1로 꺾은 리가 34라운드 마지막 경기가 칸의 공식전 은퇴전이 되었다.
그리고 2008년 9월 2일,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올리버 칸의 고별전으로 FC 바이에른 뮌헨과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간의 친선전이 열렸다. 칸은 이 경기에서 은퇴경기를 치르며 수많은 바이에른 팬들의 기립박수와 눈물속에서 그라운드를 떠났다.[5]
바이에른은 칸의 은퇴 후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어서 한동안 꽤 죽을 쒔다. 한스외르크 부트의 회춘으로 2009-10 시즌에 어떻게든 다시 우승은 했지만 골키퍼 문제는 여전히 불안요소였다. 프런트의 신뢰를 받았던 젊은 골키퍼 미하엘 렌징은 팬들에겐 전혀 신뢰받지 못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방출. 그 후 루이 반 할 감독을 비롯 바이에른 프런트는 역시 어린 선수인 토마스 크라프트를 신뢰하며 밀어주는 모습을 보였지만 렌징 수순을 타더니 역시 방출. 2011 시즌에 FC 샬케 04의 마누엘 노이어를 대체자로 영입했고, 노이어를 통해 비로소 바이에른은 골키퍼 문제를 해결했다. 노이어는 이적하자마자 1,011분 무실점 기록으로 칸의 1,004분 기록을 경신했고, 28세 때 109회의 클린시트를 달성해 칸의 최다 클린시트 기록도 경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칸도 인터뷰나 해설 중에 간간히 언급하는 걸 보면 노이어의 활약상에 흡족하신 모양.[6] 그리고 2021년 1월 24일 17시 18분, 분데스리가 2020-21 시즌 18라운드에서 바이에른 뮌헨이 샬케 04 원정 경기에서 4-0으로 클린시트로 끝내서 대승을 거둠과 동시에 마누엘 노이어는 423경기만에 올리버 칸의 기록[7]를 넘어서게 되었다.
여담으로 올리버 칸은 독일이 2014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자 인터뷰에서 그는 발롱도르 받을 자격이 있다고 크게 칭찬도 해줬다.
3. 국가대표 경력
3.1. 1994 FIFA 월드컵 미국
1994년 자신의 첫 메이저 대회인 미국 월드컵에 참가했지만, 이 때는 보도 일그너, 안드레아스 쾨프케라는 이미 정상급 골키퍼가 2명이나 있었기 때문에 3rd 골키퍼로 참가에 의의를 두었다. 조별 리그 상대에 대한민국도 있었기 때문에 이때는 알려지진 않았지만 대한민국과 칸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이때 그는 독일을 상대로 후반전이나마 몰아붙이는 한국의 투지와 정신력에 감탄했었다고 한다.[8]3.2. UEFA 유로 1996
두번째 메이저 대회인 유로 1996에서는 주전 골키퍼인 보도 일그너가 27살의 어린나이에 국대에서 물러나자 세컨드 키퍼였던 쾨프케가 주전을 차지[9], 역시 선배에게 밀려 서브 키퍼로 참가했다. 하지만 독일은 이 대회에서 결승전에서 체코를 꺾고 앙리 들로네 컵을 들어올렸다. 칸의 첫번째 국가대표 메이저 대회 트로피였다.3.3.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쾨프케가 이 대회에서도 주전을 차지하며 칸은 또 서브 키퍼로 참가한다.하지만 칸에게는 이 대회를 계기로 지금보다 더 힘든 길을 걷게 될 상황에 처한다. 영원할 줄 알았던 조국의 영광과 전력이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조별 리그에서 여타 대회와는 다르게 그다지 속 시원한 경기를 펼치지 못했고 16강전 멕시코전에서는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가기까지 하더니 결국 8강전에서 곪았던 고름이 터지고 만다. 처녀 출전국이자 이제 갓 만들어지기 시작한 나라인 크로아티아에게 0:3으로 완패해 시작 전 상대를 '코딱지만한 나라' 라고 비하하면서까지 임했던 경기에서 망신을 당한다.[10]
힘과 제공권을 앞세운 단단한 분업 축구를 장점으로 하던 독일 축구에 한계가 찾아온 것이다.
독일 국대의 주장 슈테판 에펜베르크는 4년전에 법규를 시전하는 바람에 국대에서 영구 퇴출당했고, 여전히 주전이었던 공격수 위르겐 클린스만은 3골을 넣었지만 노장축에 들어선 선수였고, 마테우스, 콜러, 헬머, 부흐발트 등의 주전선수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축구 역사에서 가장 커다랗고 꾸준한 발자취를 남겨왔던 독일은 전대미문의 침체기를 맞이한다.
독일은 충격에 휩싸였고 위기를 깨닫고 본격적인 개혁에 나선다. 이 대회를 끝으로 쾨프케는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으며 칸은 전차군단의 새 문지기가 된다. 하지만 조국의 영광을 다시 되찾아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어깨에 짊어지고 시작한 것이다.
3.4. UEFA 유로 2000
칸이 주전으로 나선 첫번째 메이저 대회. 2년 전과는 다르게 독일에는 새로운 젊은 선수들이 많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포르투갈, 잉글랜드, 루마니아와 한 조가 된 독일은 첫 경기 루마니아전에서 선제골을 내 주면서 끌려가다 숄의 중거리 골로 겨우 비기더니, 이전까지 강한 면모를 보여준 잉글랜드에게는 0대 1 패배, 그리고 마지막 포르투갈전에서는 세르지우 콘세이상에게 해트 트릭을 내주면서 0대 3으로 대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조 최하위로 광탈하고 만다. 칸은 콘세이상의 2번째 골을 알까기로 내주는 수모까지 당한다. 분데스리가 우승은 물론 챔피언스리그 우승까지 거머쥔 칸이지만 여전히 세계 축구의 흐름에 뒤떨어지는 국대의 전력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독일은 본격적으로 녹슨 전차라는 조롱까지 받아가며 그렇게 힘겨운 부진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3.5.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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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에서 열린 조별 리그 첫 번째 경기에서 독일은 사우디아라비아를 8:0으로 인정사정 없이 발라버리며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16강전 파라과이, 8강전 미국, 4강전 대한민국. 모두 독일의 그물을 가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칸은 엄청난 활약으로 무수히 많은 슛을 막아낸다. 특히 미국전에서 랜던 도노반을 필두로한 미국의 끈질긴 공세를 홀로 모조리 막아낸 칸의 활약은 전율 그 자체. 적어도 축구팬들은 이 대회만큼은 필드 플레이어도 아닌 골키퍼가 팀을 이끌고 결승으로 계속 밀어올리는, 레프 야신 이후로 다시는 보기 힘들지 모르는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15] 칸은 타국의 골키퍼들을 물론이요 필드 플레이어들조차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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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시 4강에서 그의 대활약상을 더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2002년 월드컵을 시청한 사람은 그의 환상적인 선방을 아마 잊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전반 7분 이천수의 논스톱 슛을 동물적인 반사신경으로 붕 날라 한손바닥으로 쳐냈던 것과 이천수의 크로스를 마치 매트릭스같이 뒤로 날아올라 라인 바깥으로 쳐낸 선방, 송종국의 슛을 세컨볼 없이 막아낸 선방 등이 있었다. 후에 이천수가 소회하길 2002년 당시 당돌했던 이천수는 어느 누구와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고 그 생각대로 4강까지 진출했고 위의 움짤의 슈팅을 찼을 때에도 100% 골이라고 확신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칸의 선방에 의해서 막히는 순간 '아 오늘은 질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고 한다.
결승전에선 카푸와의 충돌로 손가락 골절 부상을 당했음에도 끝까지 경기에 임했다. 이후 이 부상 여파로 인한 치명적인 캐칭 미스로 호나우두에게 선제골과 추가골을 내주며 2:0으로 패해 우승컵과 스포라이트를 브라질에게 뺏겼지만, 그는 누구도 이견을 낼 수 없는 대회 최고의 선수였다. 경기 도중 손가락 부상의 영향으로 첫 골을 먹히게 된 것도 있는, 칸의 입장에서는 운이 없었던 측면이 있는 건 사실이나 어쨌든 수상 당시 논란이 있었는데, 당시 골든볼 투표는 하프타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16] 전반전을 무실점으로 막은 칸이 수상할 수 있었고, 만약 경기 종료 후 투표를 실시했다면 호나우두가 골든볼을 탔을 것이란 얘기도 만만치 않게 나왔다.[17] 이 때문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2006 월드컵부터는 골든볼 투표를 하프타임이 아닌 후반전 종료 후에 실시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그런데 기껏 바꿔놨더니 지단이 골든볼 투표 1위를 한 상태에서 연장전에 박치기로 퇴장당해서 또 모양새가 이상해지긴 했다.[18]
이 대회에서 올리버 칸은 야신상[19][20]과 골든볼[21]을 모두 석권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역대 월드컵에서 골키퍼로서 골든볼(혹은 MVP)를 받은 선수는 칸 뿐이다. 심지어 야신상의 기원이 되는 선수인 레프 야신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22]
3.6. UEFA 유로 2004
2년 전의 대성공으로 독일은 자신감을 되찾았지만 칸과 발라크의 투맨쇼에 힘입은 성과라며 여전히 의문을 보내는 시선도 줄지 않았다. 위르겐 클린스만, 올리버 비어호프 이후 대형 골잡이와 창의적 미드필더의 부재, 수비진의 노쇠화 등등 여전히 약점이 많은 독일이었다.독일은 네덜란드전에서 경기 내내 칸의 선방쇼에 힘입어 겨우 무승부를 한데 이어 최약체 라트비아에게마저 무재배를 하며 탈락 위기에 처한다. 최종전 체코전에서 미하엘 발락의 멋진 선제골로 앞서가지만 곧바로 2골을 내주며 역전패, 결국 2무 1패 조 3위로 2대회 연속 조별 리그 탈락의 수모를 겪는다. 결국 루디 푈러 감독은 경질되었다. 이들에게 고전한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축구 역사에 변변한 발자취도 남긴 적이 없는 처녀 출전국인 라트비아에게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경기력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3.7. 2006 FIFA 월드컵 독일
루디 푈러의 후임으로 온 감독은 무려 칸과 같은 시기에 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던 젊은 초짜 감독 위르겐 클린스만이었다. 클린스만은 안드레아스 쾨프케 골키퍼 코치와 의견 충돌을 일으키면서까지 칸이 아닌 옌스 레만에게 골문을 맡기려고 했고, 칸 또한 역시 한 성깔 하는 레만과 신경전을 벌이며 주전 자리 수호를 위해 애썼다.[23] 하지만 레만이 아스날에서 챔피언스리그 10경기 연속 클린시트로 연속 무실점 기록을 갈아치우는 등 승승장구하는 사이 칸은 전성기보다 못 미치는 활약으로 인해 결국 뺏긴 주전을 다시 되찾아 오지 못하고 세컨드 키퍼로 조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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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에게 어울리지 않는 벤치에 쓸쓸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팬들은 매우 익숙지 않았을 것이다.[24] 하지만 대회가 다가오면서 현실을 받아들이며 후보로서도 최선을 다하는 프로로서의 정신을 보여주었고 아르헨티나와의 8강전 승부차기 직전에 레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독려하는 진정한 프로의 자세를 보여주기도 한다.[25] 서로 미소와 악수를 교환하는 모습은 훈훈함 그 자체였다.
월드컵 마지막 경기인 포르투갈과의 3·4위전에선 주장 완장을 달고 주전 골리로 출전하였다. 파울레타와 데쿠의 페널티 박스 안 슈팅은 물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프리킥까지 쳐내는 등 훌륭한 선방들을 보여주며 결과적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그래도 역시 아쉬운지 말없이 잔디 위를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그라운드를 둘러보기도 했다. 그리고 녹슨 전차군단의 오명을 받던 2000년대의 독일을 대표하는 선수로서 지난 영광의 세월을 뒤로 하고 월드컵 3·4위전을 끝으로 독일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4년 뒤에 비슷한 모습이 만들어졌다. 독일은 똑같이 스페인에게 0:1로 지는 바람에 이때와 똑같이 3·4위전에 진출했는데 이 당시 주전이었던 마누엘 노이어도 한스외르크 부트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하였다.
[1]
잔루이지 부폰의
유벤투스 이적 당시 5.2
M
€으로 기록이 경신됨.
[2]
경기가 끝난 후 통곡하는 상대 키퍼
산티아고 카니자레스를 위로하는 훈훈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카니자레스가 통곡한 이유는 그 전 시즌 준우승팀도 발렌시아였기 때문...
[3]
칸의 바이에른은
2년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맨유를 상대로 압도적인 경기를 펼치고도 후반 추가시간이었던 46분, 48분에 세트피스 상황에서 연달아 실점, 눈앞에서 우승컵을 뺏기며 종료 직후 바이언 선수들이 운동장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연출된 적 있다.
[4]
수상자는
마이클 오언이었는데
라울 곤살레스나 칸 중에 한 명이 수상했어야 된다는 논란은 아직도 있다.
[5]
이 때 칸이 교체아웃되면서 은퇴식이 열렸고,
영국의 성악가
폴 포츠가 초청되어 Time to Say Goodbye를 라이브로 불렀다.
[6]
여담으로 노이어는 샬케 시절 올리버 칸의 코너 플래그를 뽑는 세리머니를 따라하면서 뮌헨을 조롱한 적이 있다. 그래서 처음에 노이어가 뮌헨에 왔을 때 우리 레전드를 조롱한 선수가 어떻게 레전드의 후계자가 될 수 있나며 반대하던 팬들도 상당했다. 노이어가 잘하면서 그런 얘기는 쏙 들어갔지만.
[7]
196경기
[8]
당시 한국은 전반전에만 3골을 먹히며 부진했으나 후반전에 정신력으로 무장해서 2골을 따라잡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클린스만은 5분만 더 있었으면 자신들이 졌을거라고 얘기했을 정도. 여담으로 이 경기가 에펜베르크가 관중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고 그 뒤로 국가대표에서 영구퇴출 됐던 그 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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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쾨프케가 일그너보다 5살 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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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 출전국이긴 했지만 크로아티아 전력은 구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 갈라져 나온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다보르 슈케르와 로베르토 프로츠네스키, 즈보미디르 보반 등은 이미 유럽 명문클럽의 핵심 선수들이었다.
[11]
동시에 유로 2000 이후,
올리버 비어호프로부터 주장 자리도 물려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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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기는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여전히 잉글랜드 축구 팬이 독일을 조롱하는 데 꺼내는 1등
떡밥이다. 이때 유니폼에 이 날의 날짜(2001년 9월 1일)와 득점을 적어놓은 프린팅을 정식으로 발매해서 팔았을 정도다. 얼마나 많이 찍어내 팔았는지 한국에서도 상설 같은 데 자주 보였다. 더구나 이 경기의 주심이 그 유명한 이탈리아의
피에를루이지 콜리나 심판인데 이 심판이 독일의 경기를 진행하면 승률이 상당히 낮은 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해당 경기였고 결국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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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전설의 테크니션
메멧 숄과 차세대 에이스
제바스티안 다이슬러, 수비의 핵
옌스 노보트니 등 그나마 이름값 있는 주전들이 대회 전에 대거 부상당했고, 이 대회에서 5골을 넣으며 깜짝 스타가 된
미로슬라프 클로제는 대회 전까지 조국에서도
'대체 이 선수를 왜 뽑았냐.'라는 비판을 듣는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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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 골을 넣은 선수는 그 옛날
이영표와 같이
토트넘에서 활약했던
로비 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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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하게 따지면 더 찾을 수 있기는 하다. 단적으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파라과이 전력의 과반수 이상이라고 불리던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같은 경우라거나. 하지만 이때 파라과이는 16강에서 탈락. 굳이 비슷한 사례로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준우승팀 아르헨티나의
세르히오 고이코체아가 대표적인데, 워낙 대표팀에
최종보스가 있어서 스포트라이트가 쏠리지 않았지만, 이때 아르헨티나는 8강전과 4강전 연속 승부차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으며, 이는 역시 고이코체아의 미친 퍼포먼스 덕분에 이룬 성과였다. 물론 이 때의 마라도나의 활약도 대단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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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1998년 프랑스 월드컵까지는 결승전 시작 전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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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게 아니라 그날 경기를 하드캐리한 호나우두가 타지 못해 음모론까지 나오는 등 여파가 크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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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공식적으로 따지자면 비긴경기고 퇴장이 어느정도 분위기에 영향있을수 있지만 경기결과와 직접적인 상관은 없어 지단이 충분히 탈만하긴 했다. 퇴장당한 상황 또한 어느정도 옹호의 여지도 있긴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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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전이 열리기 전 수상이 확정되었다. 경쟁자였던
이운재의 대한민국과
뤼슈튀 레츠베르의
튀르키예가 4강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확정이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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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전에서 멀티골을 넣고 대회 8골을 넣은
호나우두가 골든볼을 수상할 수도 있었지만 골든볼 투표 마감이 결승전 하프타임까지여서 호나우두가 두 골을 넣기 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의 골든볼 수상에 이견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가히 절대적인 활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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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볼은 호나우두, 브론즈볼은
홍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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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회에서 보여준 칸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0의
레프 야신과
1966 잉글랜드 월드컵의
고든 뱅크스,
UEFA 유로 1992의
피터 슈마이켈,
2006 독일 월드컵의
잔루이지 부폰와 함께 단일 메이저 대회 역대 최고의 골키퍼 퍼포먼스로 평가받으며 이 중에서도 전세계 축구팬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퍼포먼스이다.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에서
에밀리아노 마르티네스,
야신 부누와
도미니크 리바코비치가 축구 역사에 남을 선방쇼를 보여주며 역대급 야신상 경쟁을 할 때 2002년 올리버 칸이 언급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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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만은 서브골리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친선경기에서 2자리 등번호 대신 9번을 달고 경기에 출장하기도 하는 등 성질머리로 칸에게 절대 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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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칸은 세컨드 키퍼가 되자 주변에서 대표팀 하차를 지속적으로 권유받았지만 본인이 최선을 다하겠다며 대표팀에 잔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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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이었을까, 레만은 승부차기에서 에스테반 캄비아소와 로베르토 아얄라의 PK를 멋지게 막아내며 팀에 승리를 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