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171B1C,#000><colcolor=#eeeeee,#dddddd>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 女子高生コンクリート詰め殺人事件 |
|
사건번호 |
헤이세이
21058 (平成[ruby(二一零五八, ruby=にいちゼロごはち)]) |
발생일 | 1988년 11월 25일 ~ 1989년 1월 5일 |
사건 발각 | 1989년 3월 29일 |
발생 위치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사이타마현 미사토시 (납치) 도쿄도 아다치구 아야세 (감금) 도쿄도 고토구 와카스 (시체유기) |
범죄 항목 |
약취유인(
납치,
유괴) 감금 성폭행( 강간, 윤간) 폭행 살인 사체유기 |
가해자 |
미야노 히로시(소년 A, 당시 18세) [주범] 오구라 유즈루(소년 B, 당시 17세) 미나토 신지(소년 C, 당시 15세 → 16세) 와타나베 야스시(소년 D, 당시 16세 → 17세) 나카무라 테츠오(소년 E, 당시 17세) 이하라 코이치(소년 F, 당시 15세) 그 외 최소 18명의 비행 청소년[1] 볼드체: 핵심 인물 |
피해자 | 후루타 준코/古田順子(당시 17세) |
판결 |
미야노 히로시(징역 20년)[2] 오구라 유즈루(징역 5~10년 부정기형) 미나토 신지(징역 5~9년 부정기형) 와타나베 야스시(징역 5~7년 부정기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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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8년 11월 25일부터 1989년 1월 5일까지 일본 도쿄도 아다치구에서 15~18세의 남성 비행 청소년들이 주 2회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귀가하던 17세 여고생 후루타 준코를 납치한 뒤 감금하며 온갖 가혹행위와 고문, 폭행, 성폭행 등을 저지르고 방치하여 살해한 뒤 시신을 콘크리트 등과 함께 드럼통에 넣고 유기하여 은폐한 사건이다.피해자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age(1989-01-04)]년이나 지났지만 해당 사건의 잔혹성, 극악무도함, 비인간성 그리고 사법당국의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때문에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는 사건이다.
해외에서는 都足立区女子高生監禁リンチ殺人事件( 도쿄도 아다치구 여고생 감금 린치 살인사건), Murder of Junko Furuta(후루타 준코 살인사건)이라고도 불린다.
피해자 후루타 준코(古田順子, 당시 17세)는 사이타마현 미사토시에서 태어나고 자라 사이타마현 야시오시 미나미가와사키 소재 모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으며[3] 1989년 3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전 판매점에 취직할 예정이었다.[4]
이렇게 그녀는 창창한 미래를 앞두고 있었으나, 후술할 극악무도한 범죄의 타깃이 되어 버렸고 이로 인해 18세 생일을 불과 2주 앞두고 사망했다.
2. 경과
2.1. 11월 25일
1988년 11월 25일 오후 8시 30분경, 사이타마현 미사토시에서 강간할 여성을 찾고 있던 미야노 히로시(소년 A, 주범, 당시 18세)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후루타 준코(당시 17세)를 발견했다. 그는 함께 있던 자신의 부하 미나토 신지(소년 C, 당시 15세)에게 "내가 잘 해 볼 테니 저 여자를 발로 차."라고 지시했다.잠시 후, 미나토 신지에 의해 타격을 받은 준코는 무릎이 까지며 도로 옆의 도랑에 자전거와 함께 넘어졌다. 그때 준코의 곁에 히로시가 나타나 "저 녀석은 이 마을의 유명한 변태다. 나도 저 녀석에게 칼로 위협당했다. 여긴 위험하니 데려다주겠다."라고 말을 걸었고. 둘은 대화를 하면서 천천히 준코의 집 쪽으로 걸어갔다.
히로시는 준코의 집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어두운 창고 앞에서 갑자기 태도를 바꿔 "나는 야쿠자의 간부다.[5] 야쿠자가 너를 사고로 위장해 차로 치어 죽이기로 되어 있다. 얼마 뒤 차도 이리로 오겠지만, 내게 몸을 바치면 용서해 주겠다."라고 말하며 준코를 키타아야세역에서 가까운 WINGS 호텔(사건 이후에도 그대로 영업 중)로 데려가 강간했다.[6]
최초 범행이 발생한 호텔 사진 |
이후 "원래는 야쿠자가 너를 죽이기로 되어 있었지만, 너는 내 여자친구와 닮았으니 살려 주고 싶다. 너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윗선과 잘 얘기해 볼 테니 그때까지 여기에 있어라."라고 말하며 준코를 안심시켰다.
그 직후, 히로시는 납치 당일 자판기 앞에서 행인을 대상으로 퍽치기를 하던 동료 오구라 유즈루(소년 B, 당시 17세)와 와타나베 야스시(소년 D, 당시 16세)에게 전화를 걸어 "여자를 하나 잡아 두고 있다. 너희들 같이 먹어 버리지 않겠냐?"라고 말하며 그들을 불러냈다. 이때 유즈루는 히로시와 전화를 하며 "여자를 돌려보내지 말아 달라", "그냥 납치해 버리자" 등의 말을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준코를 수차례 윤간한 뒤, 호텔에서 끌고 나와 근처 밤거리를 함께 돌아다녔다. 이때 준코는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생전 처음으로 술을 마시게 된다.[7]
도중 차 안에서 히로시가 준코에게 "신지가 너를 좋아한다. 신지와 사귀어라."고 명령했지만 준코는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남자를 사귀기 곤란합니다."라고 대답했고 이에 심기가 불편해진 히로시는 준코에게 "교육을 시켜주겠다."라고 말하였다.[8]
그러던 중, 히로시와 유즈루가 술을 마시러 자리를 떴고, 신지의 집 근처 공원에서 대기하던 나머지 일행들은 추위를 피해 가까웠던 신지의 집에 준코를 데려가 감금하게 된다.
2.2. 11월 27일
길에서 행인을 폭행하고 있던 히로시는 함께 어울리던 나카무라 테츠오(소년 E, 당시 16~17세)와 이하라 코이치(소년 F, 당시 15~16세)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겠다"라며 불러내어 23시경 신지의 집에 자고 있던 준코의 앞에 나타난다.히로시는 준코에게 겁을 주려고 감기약을 각성제인 척 복용하고 약에 취한 듯 행동하며 피해자를 넘어뜨렸다. 신지의 형이 쿠션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누르자 피해자는 소리치며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비명으로 인해 신지의 부모가 2차례 찾아온다. 먼저 신지의 어머니가 2층에서 나온 소음에 방문을 열어 확인하려 했으나 조명이 꺼져 스탠드만 있던 상태였기에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이후, 준코가 비명을 지르자 신지의 아버지가 올라와 문 앞까지 와서 ''너희들 지금 뭐 하는 거지?"라며 무슨 상황인지 물었으나 신지가 "상관하지 마"라고 소리 지르자 돌아갔다.
일련의 과정으로 화가 난 가해자들은 2시간 동안 준코의 허벅지와 다리를 집중적으로 폭행했고, 음부에 불을 붙인 뒤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입을 막고 윤간했다.
2.3. 11월 30일
사건이 일어난 미나토 신지의 자택 2층[9] |
5일에 걸쳐 3번 걸게 시키면서 "경찰서도 멀고, 저 차는 야쿠자의 차다. 도주하려고 하면 내가 너를 죽일 것이다."라고 협박하였고 전화를 할 때도 극청회의 일원들이 옆에서 감시했다. 그리고 그날 신지 어머니와 인사한 준코는 자신을 " 사이타마현의 고교생"이라고 소개했고 신지 어머니는 준코에게 "늦었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준코는 소년들에 의해 2층으로 끌려갔고 신지는 어머니에게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낸다."라고 말한 뒤, 2층으로 올라갔다.
2.4. 12월 5일
5일 뒤인 12월 5일, 신지 방을 청소하다가 쓰레기통에서 생리대를 발견한 어머니는 2층으로 찾아가 감시 담당인 야스시와 함께 있던 준코에게 "왜 집에 돌아가지 않았냐"라고 물었지만 야스시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던 준코는 대답하지 못했다.어머니는 준코를 가출 소녀라고 생각하고 이름을 물었지만 준코는 " 사이타마현에 사는 고교 3학년 학생이고, 취직이 결정됐다"라는 엉뚱한 대답밖에 하지 못하였고 어머니는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테니 어서 돌아가라"라고 말했다. 감시를 하고 있던 야스시도 "그래, 돌아가는 게 좋겠다"라고 말해 식사를 시킨 뒤 준코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분위기가 됐다.
그러나 식사 도중 신지와 아버지가 돌아왔고 신지의 아버지는 신지에게 "여자친구인가? 나에게도 소개해 주렴."이라고 말을 걸었으나 신지에 의해 묵살당했다. 그 후 준코는 소년들에게 이끌려 다시 2층으로 올라가게 됐다.
2.5. 12월 6일
신지의 가족들은 집에 낯선 소녀가 드나드는 걸 보고 신경이 곤두서 다음 날에 다시 찾아와 "이 집엔 남자가 2명(미나토 신지와 그의 형)이나 있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 거지?"[10], "여긴 그 야쿠자 같은 것들(미야노 히로시, 오구라 유즈루)도 있으니 얼른 돌아가렴."이라고 말을 걸었으나 이미 겁에 잔뜩 질려있던 준코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어머니는 "얼른 돌아가자"라며 준코의 가방과 소지품을 들고 내려왔지만 준코는 가해자들이 두려워 2층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준코 가방에서 나온 집 전화번호를 확인한 뒤 아들에게 구타당할 것을 염려해 시부모의 집으로 찾아가 준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신지 어머니가 "댁에 후루타 준코라는 딸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준코 어머니는 "지금은 준코가 집에 없습니다. 누구십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신지 어머니는 주저하다가 가짜 이름을 대고 끊어 버렸다. 경찰은 신지 어머니가 댄 가짜 이름을 토대로 수사했기에 준코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신지의 집에서는 신지의 아버지가 준코를 귀가시킬 채비를 시켰고, 신지의 형과 오구라 유즈루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럼 돌아가기로 한 거지? 어머니가 걱정하시니 얼른 집에 돌아간다고 전화하거라."
"괜찮아요. 전에도 전화했으니까."
"그럼 그쪽까지 데려다줄게."
"혼자서 돌아갈 수 있어요..."
"택시비 가지고 있니? 내줄까?"
"있어요. 괜찮아요."
"그럼 곧장 돌아가렴."
"알겠습니다."
"괜찮아요. 전에도 전화했으니까."
"그럼 그쪽까지 데려다줄게."
"혼자서 돌아갈 수 있어요..."
"택시비 가지고 있니? 내줄까?"
"있어요. 괜찮아요."
"그럼 곧장 돌아가렴."
"알겠습니다."
집 근처 공원에서 신지의 형은 준코를 귀가시키자는 쪽으로 유즈루를 설득했고 준코 또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테니, 제발 집에 가게 해달라"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유즈루는 신지의 부모가 자고 있을 때 집 앞의 전봇대를 통해 준코를 신지의 방으로 올려보냈고, 준코는 다시 감금당하게 된다.
이후, 어머니가 준코의 집에 전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나토 신지는 수 시간 동안 어머니를 폭행한다.
이 시점에서 신지의 부모는 피해자가 귀가한 것으로 인지하여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이미 준코가 귀가한 줄 알았다"라고 진술하긴 했지만, 아들의 폭행이 두려워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 가능성이 크다.
2.6. 12월 7일
12월 7일, 준코는 가해자 소년들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몰래 1층으로 내려와 신고했지만 얕은 잠을 자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깬 히로시에게 들켜버리고 만다.[11]강제로 전화가 끊기자 경찰은 역추적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히로시는 "여동생이 장난전화를 건 모양이다, 죄송하다"라고 말하며 무마시킨 뒤 전화를 끊었다.
히로시는 고함을 지르면서 자고 있던 다른 소년들을 깨워 "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냐"라고 물컵을 집어던지는 등 광분하며 호통쳤다. 신고한 것도 화나는데 히로시에게 혼나기까지 해서 유즈루, 신지, 야스시도 격분했다.
준코는 소년들에게 "한 번만 용서해 달라"라고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고 이것이 준코가 방 밖에서 한 마지막 행동이 되었다. 이때부터 준코는 죽을 때까지 방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지금껏 당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강도의 끔찍한 고문들을 당하게 된다.
특히 그녀를 짝사랑했던 오구라 유즈루는 이때부터 가장 집요하게 준코를 괴롭혔다.
그는 밖으로 나가기 전 준코에게 매우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게 한 뒤 돌아와서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져 있으면 무자비하게 폭행했고, 준코를 나체로 매달아 놓고 복부를 구타하거나 턱과 팔, 무릎을 탈구시킨 후 관절을 부러뜨리고 가위로 아킬레스건을 절단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유즈루의 이 만행은 신지의 집에 있는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되어 남아 있었다.
소년들은 12월 25일까지는 준코가 가지고 있던 3,000엔[12]으로 옷을 사서 갈아입히거나 음식을 먹이고 생필품을 사주는 등 배려 아닌 배려를 해주었고, 그때까지는 신지의 형이 컵라면, 빵, 우유, 계란 등을 준코에게 먹였었다.
그러나 12월 26일부터 준코가 1층의 변소에 다녀오는데 기어서 수십 분이 걸릴 정도로 쇠약해지자 이들은 하루에 고작 우유 2000cc만을 주었다.
옆방에 있던 신지의 형은 이후에도 소년들이 없을 때 한 번씩 준코를 도와주긴 했지만, 신지의 형 역시 동생과 동생 일행의 폭력에 잡혀사는 처지였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는 하지 않았다.
2.7. 1월 4일
약 한 달 뒤인 1989년 1월 4일, 미야노 히로시는 전날 마작에 크게 실패해 10만 엔[13]에 달하는 빚을 지고 야스시의 집에서 일행과 합류했다. 사실 12월 20일경부터 준코의 상태가 극히 심각해져서 그들은 준코를 처리하기 귀찮은 물건으로 여겨 한동안 찾지 않고 C의 집에 방치해 두고 있었다.히로시는 "마작에서 진 것도 다 준코 때문이야"라며 "오랜만에 준코를 괴롭히러 가자"라고 제안했다. 이에 다 같이 신지의 집으로 가 준코를 폭행했다.
오전 8시경, 그들은 탈진한 준코를 세우고 얼굴에 촛농을 떨어뜨리거나 소변을 먹였고 양옆에서 1명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른 1명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머리, 어깨 등을 번갈아 가며 구타했다.
이때에 대해 야스시는 "딱히 관심 있지는 않았으나, 히로시와 유즈루가 두려워 폭행에 가담했다."라고 증언했다.
준코가 자력으로 일어서려다가 넘어져 카세트 플레이어에 머리를 부딪혀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히로시는 준코의 죽음을 예감했지만 꾀병이랍시고 폭행의 강도를 높였다.
그리고 야스시가 1.74kg 짜리 아령을 준코의 복부에 떨어뜨렸으나 준코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소년들은 준코를 억지로 깨우기 위해 불로 준코의 피부를 지졌다.
준코는 처음엔 움찔했지만 후엔 미동조차 없어졌고 소년들은 "준코가 죽은 것 아닌가?"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신지는 "원래 이렇다"라고 말하였고 이에 안심한 소년들은 테이프로 준코의 발목을 묶어 방에 방치해두고 오전 10시에 막 개장한 사우나로 향하였다.
준코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니 감시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 전원 외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2.8. 1월 5일
시신이 담긴 드럼통이 발견된 현장[14] |
하루 외박을 한 소년들은 미나토 신지의 형에게 준코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연락을 받고 신지의 집으로 향한다.
당시 준코가 감금 당한 방은 안에서만 열 수 있었기 때문에 소년들은 바로 옆, 미나토 신지 형의 방 베란다에서 준코의 상태를 지켜봤는데, 준코가 이불 위에 쓰러져 있었다. 소년들은 "준코가 죽은 것 같다"라며 들어가길 꺼렸다.
소년들이 방으로 들어갔을 때, 준코는 이미 사망하여 싸늘한 주검이 된 상태였고 소년들은 준코의 시신을 바로 앞에 두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사망 확인이 된 날은 1월 5일이지만 부검 결과 실제 사망 시점은 소년들에게 마지막으로 폭행을 당한 1월 4일로 추정된다.
정말 안타깝게도 그녀의 기일(1월 4일[15])은 그녀의 생일(1월 18일)의 약 2주 전이었다. 또 준코가 납치(11월 25일) 된 지 3일 후(11월 28일)가 그녀의 어머니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전부터 그녀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를 만들고 있었다.
히로시는 대낮에 자신의 집 앞 주차장으로 공범들을 불러내어 준코의 시신을 이불로 싸맨 뒤 여행 가방에 넣고 테이프로 말아 자신이 일했던 타일 공장 근처에서 가져온 드럼통에 넣어 콘크리트를 넣고 돌과 벽돌 등으로 고정했다.[16]
그리고 그들은 드럼통을 검은 쓰레기봉투에 넣고 테이프로 밀봉한 뒤, 히로시가 빌려온 왜건 차량을 통해 도쿄도 고토구 와카스 14호지 해변 공원 정비 현장의 공터에 버리고 달아났다.[17]
원래 히로시는 드라마 <톤보>[18]의 마지막 회를 녹화한 비디오를 사서 꽃다발과 함께 넣으려 했다고 한다.
이 드라마에 대해서 준코가 말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를 같이 넣으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범인을 특정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라는 유즈루의 만류로 인하여 그만두었다.
피해자를 그렇게 잔인한 방식으로 죽여놓고 이제 와서 추모하는 것이 무슨 헛짓거리인가 싶지만, 후에 히로시가 밝힌 이유는 준코가 불쌍하다기보다는 준코의 원혼에 저주받기 싫어서.
만약 드럼통을 바다에 버렸더라면, 혹은 담당 형사의 말실수가 없었더라면 이 사건 자체가 영원히 묻혀버렸을 것이다.
3. 사건 발각 (3월 29일)
이 천인공노할 사건은 가해자들의 시체 유기로 인해 영영 묻히는 듯했으나 시체 유기로부터 약 3개월 뒤인 1989년 3월 29일 뜻밖의 일로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히로시는 사건 이전인 1988년 11월 8일에 있었던 또 다른 19세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간 치상 및 절도 등의 혐의로 네리마 소년 감별소에서 아야세 경찰서 수사관의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담당 형사가 실수로 "너 사람을 죽이면 안 되잖아?"[19]라는 질문을 했다.
이때 히로시는 부하들이 이미 사건에 대해 자백했다고 착각한 나머지 사건의 전모를 몽땅 불어 버렸다.[20] 정말 무서운 건 만약 담당 형사의 말실수가 없었거나, 시신을 바다에 버렸거나 시신을 매장할 때 또는 시신이 발견되더라도 시신을 심하게 훼손되어서 부검조차 할 수 없게 만들 정도였다면 이 사건은 실마리조차도 풀지 못하고 영원히 드러나지 않은 채 단순한 실종 사건으로 묻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히로시는 담당 형사에게 사건의 전말을 불기 시작했고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에 경찰은 반신반의하면서도[21] 현장에 다급히 출동해 범인들이 자백한 공터에서 콘크리트 범벅이 된 드럼통 하나를 발견했다.
드럼통의 틈새에서는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경찰은 즉시 크레인을 동원해 드럼통을 그대로 경찰서로 옮겼다. 이미 드럼통 하나의 무게만 해도 굉장히 무거운데, 거기다가 약 40kg가량 되는 준코의 시신, 이불, 가방, 그리고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까지 더해져서 전체 무게는 305kg에 달했다.
다음 날 오후, 경찰서에서 해체 작업이 시작됐고 곧 보스턴백에 담겨 두 이불에 싸인 준코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미 사망한 지 3개월 가까이 지난 데다 당시 온전한 상태로 사망해서 유기된 것도 아니라 부패가 매우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였다.[22]
당연히 경찰들은 히로시가 밝힌 사건의 전모가 사실임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23]
공판 당시 재판소는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였으며 배심원단이 실신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다.
4. 피해자가 당한 일
재판에서 공개된 범행이 워낙 끔찍했던지라 세상에 알려진지 [age(1989-03-29)]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가 되고 있는데, 인터넷 등지에서는 사실 확인이 안 된 범행들도 많이 적혀 있다.인터넷에 적혀 있는 글을 읽을 때 곧이곧대로 믿는 건 곤란하고, 와전된 범행 루머는 피해자의 유족에게도 상처를 줄 수 있다.[24] 아래에 서술한 내용은 헤이세이 21058 판결문에서 공개된 내용만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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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성제를 먹고 피해자에게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피해자를 억누르고 옷을 강제로 벗겨 윤간하였다. 그 후 면도기를 꺼내 음부를 제모하고 음부에다 성냥을 넣고 불을 붙였다.
- 12월에 피해자가 도주를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이에 분개하여 얼굴을 마구 때렸고 발목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 화상을 입혔다.
- 알몸 상태로 디스코의 곡에 맞추어 춤을 추게 하거나 자위행위를 강요하거나 피해자의 얼굴에 매직 펜으로 수염을 그리는 행위를 했다.
- 피해자의 음부에 철봉을, 항문에는 병을 삽입하였다.
- 시너를 흡인시키고 위스키, 소주 등 술을 강제로 마시게 했다.
- 겨울 한밤중에 피해자를 반나체로 베란다로 내쫓은 뒤 우유, 물 등을 다량으로 먹이고 담배 두 개비를 한 번에 빨게 하였다. 준코가 담배를 뱉자 소년이 좀 더 따뜻하게 해주겠다며 몸에 불을 붙였다.
- 12월 중 ~ 말에 걸쳐 #소년 A가 피해자가 흘린 소변을 밟았다는 핑계로 #소년 B, #소년 C와 함께 피해자의 얼굴을 여러 차례에 걸쳐 때려서 얼굴이 부어올랐는데 그걸 보고 재밌어하며 웃었다.
- 그 이후로 학대는 더 심해져서 피해자의 허벅지와 손 등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불이 꺼지면 다시 기름을 붓고 붙이는 걸 반복했는데 이 무렵 피해자는 그만 죽여 달라고 애원하였다.
- 입이나 귀, 항문이나 질에 불꽃놀이용 대형 폭죽을 넣고 동시에 터트렸다. 그 과정에서 준코에게 웃거나 노래 부르라고 했다. 표정이 웃다가 일그러지면 더 극심한 폭행을 가했다.
- 가해자 주범은 12월 중순경부터 주로 #소년 F에게 피해자를 감시하도록 맡겼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피해자에게 음식을 조금 밖에 주지 않았고 12월 말에는, 우유 조금만 주었다. 피해자는 영양장애와 가해자의 거듭된 폭행으로 극도의 쇠약상태에 빠져 식욕이 감퇴하고, 안면은 부어오르고, 화상 때문에 피부에 고름이 생겨 악취를 품겼다. 아래층 화장실에 가는 것도 어려워지자 하루 종일 거실에서 누워 있는 상황이 되었다.
- 피해자에게 양갱을 보여주며 이것은 무엇이냐고 물었고 피해자가 양갱이라고 대답하면 왜 이름을 함부로 부르냐고 하고 "양갱씨"라고 하면 왜 양갱에 " 씨"를 붙여 부르냐며 또 이를 핑계로 괴롭혔는데 폭행을 하고 나서 밀랍에 불을 붙인 뒤 피해자의 얼굴을 덮을 정도로 녹인 밀랍을 떨어뜨렸다. 이 때 피해자의 반응이 거의 없었다.
- 피해자가 쇠약해져서 화장실도 갈 수 없게 되자 음료팩에 소변을 봤는데 그걸 강제로 마시게 했다.
- 피해자의 얼굴을 돌려 차고 쓰러지면 강제로 일으켜 다시 차는 행위를 반복하였는데 이때 피해자가 넘어지면서 물건에 부딪혀 경련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피해자가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범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쓰러진 피해자를 계속 폭행하였다. 이때 피해자는 코피를 흘리고 화상을 입어 생긴 고름이 터져 피가 사방에 튀겨졌다.
- 가해자들은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서 비닐봉지로 손을 감싼 뒤 피해자의 전신을 마구 폭행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1.74kg 운동 기구로도 폭행한 뒤 소년 D가 이 기구를 어깨 높이에서 피해자의 복부에 2~3회 떨어트렸다.
- 소년 A는 반복적으로 기름을 피해자의 허벅지 등에 붓고 불을 붙였는데 피해자는 처음에는 손으로 불을 끄려는 등 저항을 하였지만 이윽고 반응이 거의 없었고 축 늘어져 쓰러졌다.
- 이러한 폭행은 피해자가 사망한 날 당일 오전 8시경부터 10시경까지 약 2시간에 걸쳐 끊임없이 이어졌고 결국 피해자는 숨을 거두었다.
4.1. 부검 결과와 사인
준코의 사인은 구타에 의한 외상성 쇼크와 위의 토사물에 의한 질식사로 추정되었다.인터넷에 준코의 시신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들은 대부분 해당 사건을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에 나온 장면이고 실제 시신은 상태가 훨씬 심각했다고 한다.
- [ 펼치기 · 접기 ] 시신 부검 당시의 기록 (열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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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 양발, 갈비뼈 등 전신의 뼈가 골절되어 있었다.
- 시신의 손발이 묶여있는 상태였다. 얼굴은 눈의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는데, 하반신은 얼굴보다 훨씬 더 참담한 상태였다. 온몸의 근육은 폭행과 화상 등으로 흐물흐물하게 녹아 있었고 고름과 진물이 흘러 범벅이 되어 있었다.[25]
-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탓에 아예 뇌가 축소되어 녹아 있는 상태였다. 코는 피와 고름으로 꽉 막혀 입으로 호흡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막도 심하게 파열됐기에 마지막엔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28] 너무나 가공할 고통 속에서 입술을 깨물어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모두 절단되어 있었다.
- 피하 지방의 두께는 평균치의 100분의 6이 채 되지 않아 극도의 영양실조 상태였다. 원래 체중인 53kg에서 36kg[29]으로 줄어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준코의 키가 165cm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저체중이다.
- 준코의 위장에선 지네와 바퀴벌레, 다량의 먼지와 쓰레기, 본인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소변과 대변, 어마어마한 양의 정액, 페트병 등 차마 말로 꺼내기도 힘든 것들이 발견됐다. 성기에는 비타민 음료 병 2개가 꽂혀 있었다. 준코의 몸 아래 쪽에 있는 장기들의 상태는 두 배로 심각했다. 대장은 너무나 큰 화상을 입은 상태였으며, 그 외의 기관들의 상태도 전부 정상이 아니었다.
- 셀 수 없는 횟수의 강간으로 인해 준코는 임신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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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 양발, 갈비뼈 등 전신의 뼈가 골절되어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망하기 전에 구출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의학기술로는 준코의 전신에 입은 화상과 전신의 뼈 골절, 온몸의 근육과 치아 전체 손상, 장기 외상과 화상, 스트레스성 전체 탈모, 극도의 영양실조 상태 등을 치료하기도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무엇보다 외상뿐만 아니라 극심한 후유증과 트라우마, 정신질환 등으로 인해 얼마 살지 못하고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준코는 임신한 상태였지만 낙태도, 출산도 하기 어려웠을 상태로 추측된다.
사망 당시부터 심각하게 손상되어 안면이 심하게 함몰 및 변형되어 있었고,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시신이 부패되었던 터라 외관만으로는 사인을 비롯한 신원 확인조차 쉽지 않았지만 손상된 시신에 남아 있던 지문과 치열을 조합하고 머리카락의 DNA 등을 검사한 결과, 1988년 11월 25일 밤에 아르바이트 후 귀가 도중에 행방불명된 사이타마현 미사토시 타카스 1번지에 거주했으며 현립 야시오 미나미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당시 17세의 후루타 준코임이 확인되었다.
시신 발견 당시, 온갖 사건 현장과 시신들을 봐온 베테랑 형사들조차 구토하며 기절하거나 오열할 정도로, 이 세상에서 본 적이 없을 만큼 잔인한 상태였던 준코의 시신은 과연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을 정도로 굉장히 참혹한 상태였다고 한다. 준코가 목숨을 잃은 방에선 벗겨진 그녀의 팬티만이 남아 있었다.
5. 반응
5.1. 피해자 측의 반응
준코의 부모님은 당시 준코가 야시오시 시내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뒤 귀가하지 않자,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냈다. 준코가 무사히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렸으며 일을 쉬어 가면서까지 준코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실종된 지 4개월이 넘어서야 겨우 찾은 준코는 납치되어 각종 폭행과 온갖 고문에 시달리다 고통스럽게 죽어있었고, 준코의 부모님은 이미 사망한 것도 모자라 참혹하게 변해버린 준코의 시신을 마주해야 했다.심각하게 훼손되고 부패된 딸의 시체를 본 준코의 어머니는 극심한 충격으로 인해 정신과에 다니게 되었다고 하는데, 한동안 준코의 어머니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그것도 모자라 세간의 시선에 시달려야 했는데 재판 당시 준코의 아버지 후루타 아키라(古田晃)는 "가는 곳마다, 지인들이나 모르는 사람들이 죽은 딸의 이야기를 집요하게 물으면서 물고 늘어지며 괴롭힌다"라고 통탄했다. 특히 "지인들은 질문하고 나서 위로라도 해줬지만, 기자들과 다른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면서 한탄했다.
추도사를 들으며 눈물을 보이는 준코의 지인들 |
준 짱, 어서 오세요. 이런 식으로 재회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팠죠? 괴로웠죠? 아무것도 모르고 생활했던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언제나 온화하고 밝았던 준 짱. 문화제 때 모두와 만든 핫피(일본 전통 축제 의상)는 정말 잘 어울렸었죠.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저희는 준 짱의 죽음을 절대 헛되이 하지 않겠습니다. 끔찍한 범죄가 없어진 평화로운 날을 보낼 수 있도록, 사회인이 된 저희들도 노력하겠습니다. 또 괴로운 일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갔던 준 짱을 생각하며 힘내겠습니다. 교장선생님이 특별히 졸업장을 들고 와주셨다고 하네요. 이로써 3학년 8반 47명은 전원
졸업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준 짱… 이제 고통도 괴로움도 없어요. 편히 잠드세요. 잘 가, 준 짱. 야시오미나미고교 3학년 8반 일동.
준코의 장례식은 학교 친구들, 가족,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4월 2일 일요일에 준코의 집에서 엄숙하게 치러졌다. 이 장례식에는 기자들도 많이 참석했다.[30] 원래 일본식 장례식은 고별식을 마치고 화장을 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시신의 상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부검이 끝나자마자 바로 화장을 하고 장례식을 시작했다.
준코의 묘지는 한번 유즈루의 부모에게 훼손된 후 다른 곳으로 이장했고 외부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31]
그리고 4월 초에 야시오 미나미 고등학교에선 준코가 돌아오리라 믿고 보관해 두고 있었던 졸업장을 그녀가 살던 집으로 보내줬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후 나온 관련인들의 진술도 통탄스럽다. "준코가 감금 도중 가장 많이 한 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해자들의 대답은 마치 짜고 친 것처럼 똑같았다. 바로 "나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거예요?"였다고.
사건의 전모, 자신의 딸이 얼마나 처참하고 끔찍하게 죽어갔는지를 알게 된 준코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쓰러져서 오랫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만 했으며, 준코의 아버지는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후에도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웬만해선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들이 준코의 신상정보를 전 세계에 알리기 시작하자 결국 언론사에 직접 찾아가서 "딸의 신상정보를 유출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라고 눈물로 호소하기까지 했다.
5.2. 가해자 측의 반응
자식이 저지른 범죄를 알게 된 히로시의 부모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집과 자산을 정리해 5천만 엔[33]을 준코의 부모에게 건넸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돈을 받으면 법적으로는 ' 합의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합의금 성격이라 정말로 법적으로 강한 처벌을 원한다면 받아서는 안 된다.[34]당시는 물론 현재도 상당히 큰 액수이지만, 이미 딸을 잃은 피해자 가족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히로시의 부모로서는 사죄를 할 방법이 그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사죄하고 싶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준코의 유가족에게 거절당했지만, 다른 가해자 가족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사과와 위로를 하고 용서를 구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가해자 가족 중 그나마 정상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히로시의 부모도 유즈루의 부모처럼 이혼한 것으로 보이는데 가해자들의 가족과 관련된 몇몇 영상의 처음 장면에서 수많은 짐 가방들을 잔뜩 든 상태로 기자들의 인터뷰도 거절하고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이 히로시의 어머니 미야노 시즈에인데[35] 히로시의 부모도 구제불능인 아들의 행동을 감당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히로시의 아버지의 혼외정사와 동거 이외에도 자식의 범죄 행각이 이혼 사유일 것이 사실상 확정이다.
유즈루의 부모는 참으로 그 자식에 그 부모란 면모를 대놓고 드러냈다. 어머니 오구라 에츠코는 자식이 전과자가 된 것에 분노해서 "이게 다 준코 때문이다" 라고 말하며 준코의 묘를 찾아가 부숴버리는 충격적인 짓을 저질렀다. 유즈루의 부모는 이 사건 이전부터 유즈루의 아버지의 혼외정사로 인해 별거 중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이혼했다. 유즈루의 아버지는 사과하기는커녕 " 노코멘트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준코가 죽은 지 [age(1989-01-05)]년이나 지난 후에도 여전히 조롱이라도 하듯 버젓이 사건 발생지 인근에 음식점을 차리는 등의 행태를 일삼으며 준코를 모욕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유즈루의 부모가 유족에게 지급한 위자료는 50만 엔[36] 정도로 매우 적었지만, 사건 후 곧바로 아파트[주소]를 구입하고, 유즈루에게 고급차를 사주는 등 유족에게 지불해야 할 돈을 자기 가족의 사리사욕을 위해서만 사용하였다. 유즈루의 부모는 사건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즈루의 어머니는 언론이나 이웃을 피해 차 안에서 생활하기도 했다고 한다.
준코가 감금된 장소를 제공한 미나토 신지의 부모는 "여학생이 2층에 있는 걸 내내 알고 있었으며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해서 그나마 제일 회유하고 노력했지만 아들이 두려워[38] 어쩌지 못했고 이미 돌려보냈다고 의심치 않았기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라고 진술했다. 그런데 사건이 밝혀지고 증거 확보를 위해 경찰관들이 들이닥쳤을 때 방의 바닥과 커튼, 베란다 벽 등이 모두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어머니가 깨끗하게 청소해서 집안엔 어떠한 증거도 안 남은 상태였다. 진짜로 몰랐을까?[39]
당시 미야노 히로시와 약혼을 하고 동거를 하던 야스시의 누나는 "후루타 준코가 그 집에 감금되어 있다는 걸 내가 알았더라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구출했을 것이다. 나는 전혀 몰랐다."라고 말했다고 하며 끝내 파혼했다.
6. 세간의 만행
일부 황색언론은 준코의 얼굴이나 교복, 수영복, 핫팬츠 차림의 사진 등을 그대로 노출하면서 행실이 불량한 아이였다느니, 불량배 패거리의 일원이었다느니 하는 등의 사실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내용들을 기사로 내놓는 추가적인 만행을 저질렀다.[40] 억울하게 납치당한 것도 모자라 온갖 끔찍한 가혹행위와 성폭력을 당하며 죽어간 준코에 대하여 애도를 표하기는커녕 말도 안 되는 누명까지 씌워버린 것이다.준코의 주변인들과 동급생의 증언에 따르면 준코는 최상위권의 성적에 결석도 1년에 두세 번 정도였으며 아르바이트도 아주 성실히 하는 등 불량학생과는 거리가 먼 아주 우수한 모범생이었다. 평소 준코는 생전에 교우 관계도 원만했고 밝고 명랑하고 누구에게나 웃으며 인사하는 상냥한 성격에 미인이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친구들에 따르면 준코가 아이돌을 동경했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엔 곧바로 근처의 가전 판매점에 취직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케이크 만들기가 취미였던 준코는 크리스마스에 어머니와 함께 케이크 만드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준코는 평소 부모를 공경하는 아이였으며 아르바이트도 졸업여행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준코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선 왜 준코가 출근을 안 하는지 몰랐다고 한다.
설령 피해자가 생전에 불량하다고 해서 범죄가 정당화 되지도 않지만, 준코는 살아생전 우수한 모범생인데다 아무 잘못도 없이 온갖 고문에 시달리다가 억울하게 죽은 것도 모자라, 죽은 후로도 준코를 각종 유언비어에 시달리게 만들어서 피해자의 명예까지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니 준코와 준코의 가족들까지 얼마나 억울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기자들은 피해자과 유족들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극성만을 노리며 본인들의 이득과 기사로 인해, 관련된 사람 목숨이 어떻게 될지 신경조차 쓰지 않은 보도에 환장해 근거도 없는 비난이 무고한 피해자인 준코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쏟아졌고, 당시 준코의 아버지는 범행 내용이 너무나 끔찍해서 아내에게 딸(준코)이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히 알리지 않으려고 했으나, 기자들이 쉴 새 없이 찾아와 사건에 대한 내용이 담긴 칼럼 등을 보내면서 준코의 부모에게 딸이 끔찍하게 살해된 일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결국 딸(준코)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었는지 사건의 내용에 대해 전부 알게 된 준코의 어머니는 누가 옆에 있어주지 않으면 자살할 것 같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다고 한다. 분노한 준코의 아버지는 딸의 실명 보도에 대한 문제점을 강하게 제기했으며 이후 준코의 가족들은 피해자의 유족들인데도 불구하고 아무 죄 없이 시선을 피하며 숨어 살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그녀의 억울함을 알겠습니까?》 란 책에선 "준코는 언론에게 다시 한번 살해당했다" 라고 기술하기도 했다.
덧붙여 준코는 범행을 당하기 전 미성년자 성폭행범에게 교제를 전제로 한 스토킹을 집요하게 당하고 있었으며, 이 남자가 가해자 일행에게 정보를 주고 준코를 협박했고 가해자들은 계획적 범행인 것이 탄로날 수 있음이 두려워 이 사실을 누설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범행에 계획성이 있었다고 보이면 형량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설에 대한 근거로 범인들이 평소 강간에 쓰던 차[41]를 쓰지 않아 준코를 협박할 자신이 있어 보였다는 점, 또한 준코의 집 근처가 인적이 드문 창고 앞이었음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한 점 등이 언급됐다.
7. 사건 외적인 영향
4년 뒤인 1992년에 일어난 이치카와 4인가족 살인사건의 범인 세키 테루히코는 이 사건의 범인들이 사형이 아닌 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을 근거로 "나의 범행은 별 거 아니다"라고 주장했으나 이 사건은 범행 수위와 별개로 1명이 살해된 것과 달리 이치카와 4인 가족 살인사건은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고, 무엇보다 범행 당시 테루히코가 만 19세로 성인이었기 때문에 2017년 12월 19일 얄짤없이 사형 당하게 되었다.[42] 일본은 법률상 나가야마 기준에 따라 2명 이상 살해할 시 어지간하면 사형 선고를 내리고 집행한다.추가로 이 사건이 발생한 시기에 도쿄, 사이타마 연쇄 유아납치 살해사건도 잇따라 발생했다.[43] 쇼와 시대에 극단적인 살인 사건이 총 2번 발생한 셈이며 이 때문에 무고한 유소녀 4명, 여고생 1명, 총 5명이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차이는 이 사건의 범인이 미성년자 소년들이었다면 옆 동네는 20대 청년 남성이 감행했다는 점이 있다. 더군다나 이 사건의 범인들이나 미야자키나 재판 후에도 반성의 여지가 전혀 없다. 다만 차이는 미야자키는 2008년에 사형당한 반면 이 사건의 범인들은 당시 청소년이었다 보니 사형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다.
너무 충격적이다 보니 한국에서도 사건 직후 심해지는 일본의 소년 범죄에 대한 기사에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미국, 유럽 등의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했다.
사실 형사의 말실수로 인한 우연한 계기로 범인들이 자백해서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한 채 진실을 뒷받침하기 위한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44]
범인들의 주변인은 모두 준코를 목격하거나 정보를 들었음에도 방관했고 심지어 동조하기까지 했다. 많은 사람이 상황을 알고 있었으나 누구도 경찰에 알리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용기를 내 알렸더라면 준코는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이 사건은 지극히 평범한 주택가의 한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렇듯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범죄가 일어날 수 있으며 그것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무시 해선 안 된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난 뒤 증거도 없이 묻힐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단 한 사람이라도 용기 있게 대처하였다면 피해자를 구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논픽션 라이터 후지이 세이지가 주범들과 공범, 그리고 목격자들을 만나 탐문한 걸 바탕으로 엮은 책 《소년의 거리》(개정판: 17세의 살인자)에 따르면 사건 관계자 대부분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여학생을 납치한 것은 알았지만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었다", "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신고하겠지.", "소년들의 보복이 두려웠다", "집에 돌려보냈다는 말이 미심쩍었지만 범인과는 친구였기에 믿었다"라고 말했다.
주범들의 명령에 따라 준코를 강간하고 폭행한 소년들 중 일부도 자신의 죄가 밝혀질 게 두려워 신고하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만 죄책감에 시달리는 게 두려워 친구를 범행에 끌어들인 소년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후지이 세이지는 "준코를 살해한 것은 주범들이지만 직접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그들 한 명 한 명의 무관심과 약한 마음 역시 확실하게 준코를 살해하는 일에 가담했다"라고 결론 내렸다.
미성년자는 제대로 된 가치관 형성이 아직 덜 형성된 시기인 만큼 어떻게 살고 어떤 환경을 겪느냐에 따라 정말 양극단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부류다. 현재 한국에서 자신이 촉법소년이랍시고 만행을 일삼는 청소년들이 많아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8. 환경적 요인
1990년경 촬영된 아다치구의 방치된 아파트 단지.[45] |
해만 지면 온갖 별의별 비행 청소년들이 어슬렁거리면서 싸움질을 하거나 오토바이로 밤새 엄청난 소음공해를 일으키면서 거리의 기물을 파손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며 필사적으로 이들을 못 본 척했고 비명 소리가 들리든 말든 눈을 돌리고 귀를 막았다. 주민들은 물론 아다치구 공무원들도 이들의 눈치를 봐야 했을 정도. 가해자들로 인해 납치당한 준코가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아무도 신고하지 않은 것은 주민들에겐 그냥 매일 들려오는 소음 중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46]
당연히 주민들은 이 사건 이전에도 "순찰 경관 좀 늘려 달라", " 분서를 설치해 달라"는 민원을 아야세 경찰서에 넣었지만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동안 묵살당했다. 사건을 주변에서 방관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동네에서 살기 위해서는 비행 청소년 패거리들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 동네는 사건 이후에도 도쿄에서 가장 소득이 낮고 치안도 안 좋기 때문에 여자가 혼자 살기 가장 위험한 동네로 유명하다.[47] 뭐 아다치구가 예나 지금이나 청소년/청년 야쿠자 조직으로 유명하니 말 다 했다.
결국 경찰의 방만한 대응은 이 참혹한 살인 사건을 불러왔고 이 사건 이후 인원 부족을 이유로 민원을 무시한 아야세 경찰서는 어디선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인력과 예산으로 순찰 경관을 늘리고 보안등을 추가로 설치했다.
첨언하자면 사건이 발생한 동네에서 이 사건을 주민들 앞에서 언급하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이미 [age(1989-01-05)]년 전 일이고 당시 거주하던 주민들[48]의 대부분은 사건 이후 재개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대부분 다른 곳으로 떠나 새로운 주민들이 자리를 채워서 당시에 있었던 일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일인데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기 때문.[49]
한편 준코가 태어나서 쭉 살았던 사이타마현 미사토시는 사건 이후에도 당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준코가 살던 집과 다녔던 고등학교도 그대로 남아 있다.[50] 그렇지만 이 지역에 가서 이 사건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 게 예의다. 이곳 사람들에게도 이 사건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니.[51]
9. 범인들에 대하여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 | ||
가해자 | ||
소년 A (당시 18세, 징역 20년) |
소년 B (당시 17세, 징역 10년) |
소년 C (당시 15~16세, 징역 5년) |
소년 D (당시 16~17세, 징역 5년) |
소년 E (당시 17세) |
소년 F (당시 15세) |
피해자 | ||
후루타 준코 (당시 17세) |
||
관련 기관·장소 | ||
사이타마현 미사토시 · 도쿄도 아다치구 · 도쿄도 고토구 · 일본 경찰 |
주범들의 히가시아야세 중학교 졸업사진 |
이들은 일반적인 양아치들과는 차원이 다른 악질이었다.
아다치구를 근거지로 하여 미야노 히로시를 중심으로 한 폭력단 극청회(極青会)[52]를 결성한 이들은 남녀노소 상대를 가리지 않고 폭행과 절도, 퍽치기, 강도, 유괴, 납치, 감금, 강간, 윤간, 상해, 강도강간, 강간상해 등 온갖 강력범죄들을 일삼았는데, 이 때문에 주민들은 해가 지면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극도로 자제했다고 한다.
이들은 준코가 감금되어 있던 시기에도 수많은 강력 범죄를 저지르고 다녔다. 여성을 폭행하고 강간, 윤간한 뒤 돈을 뜯어낸다던가, 행인을 폭행한다던가, 차를 훔친다던가... 사실 이런 괴물들에게 준코의 존재는 장난감에 불과했을 것이다.
굳이 인터넷으로 검색할 필요 없이 잊을 만하면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기 때문에 웬만한 일본인이라면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53]
9.1. 범인들의 관계
주범들은 모두 히가시아야세 중학교 출신이다.나이는 많은 쪽에서 적은 쪽 순으로
미야노 히로시(A) (1970년생) → 오구라 유즈루(B), 와타나베 야스시(D) (1971년생) → 미나토 신지(C) (1972년생).
미야노 히로시(A)와 오구라 유즈루(B)는 중학교 때부터 친한 선후배 관계로 지내왔다.
1986년, 미야노 히로시(A)는 와타나베 야스시(D)의 누나와 교제를 하게 되면서 그와 친해진다.
1987년, 히로시(A)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유즈루(B), 야스시(D)와 함께다니며 상해, 절도, 건조물 침입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게 된다.
1988년 7월, 신지(C)의 방은 불량 청소년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 유즈루(B)는 고등학교를 퇴학당하고 1년 뒤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기 때문에 신지(C)의 친구였던 F(1972년생)와 같은 학년이었다.
유즈루(B)는 F와 함께 여름 무렵부터 신지의 방에 자주 드나들며 신지(C)와 친해지게 되었고, 야스시(D) 또한 유즈루(B)[54]를 통해 신지(C)의 방에 출입하며 신지(C)와 친해지게 된다.
1988년 10월, 신지의 친구인 F는 오토바이를 도난당하게 된다. 히로시는 이를 되찾아주며[55] 신지를 비롯한 비행 청소년들과 급속도로 친해졌고, 그를 동경하는 불량배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히로시는 그들을 모아 "극청회"[56]라는 폭력단을 결성하게 된다.
두목 미야노 히로시(A)는 비행 청소년 무리에서 항상 주도적, 적극적인 역할을 하며 자신의 우위성을 과시했다. 그는 힘이 세고 싸움을 잘했던 데다가, 성격까지 매우 강압적이었기 때문에 같은 비행 청소년들에게도 두려운 존재였다.[57]
와타나베 야스시(D), 미나토 신지(C)는 수동적이고 자발성이 부족하며 무리를 이끌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오구라 유즈루(B)가 미야노 히로시(A)의 오른팔(부두목)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88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오구라 유즈루(B), 미나토 신지(C), 와타나베 야스시(D) 등은 미야노 히로시(A)를 통해 폭력단 관계자와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가 경영하던 꽃집과 폭력단 사무소에서 근무하게 된다.
9.2. 소년 A
자세한 내용은 미야노 히로시 문서 참고하십시오.9.3. 소년 B
자세한 내용은 오구라 유즈루 문서 참고하십시오.9.4. 소년 C
자세한 내용은 미나토 신지 문서 참고하십시오.9.5. 소년 D
자세한 내용은 와타나베 야스시 문서 참고하십시오.9.6. 소년 E
<colbgcolor=#171B1C,#000><colcolor=#eeeeee,#dddddd>본명 |
나카무라 테츠오 (中村 哲夫) (개명 전) 이와이 테츠오 (岩井 哲夫) (개명 후) |
|
출생 | 1971년 ([age(1971-12-31)] ~ [age(1971-01-01)]세)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히로시의 협박 때문에 강간에 가담한 공범. 가담에 거부하다가 주범들에게 폭행당했다. 중년이 된 후에는 고향의 술집에서 당시 사건을 별 생각없이 떠들고 다닌다고 한다. 여기서 알 수 있겠지만, 이쪽도 악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9.7. 소년 F
<colbgcolor=#171B1C,#000><colcolor=#eeeeee,#dddddd> 본명 |
이하라 코이치 (伊原 孝一) (개명 전) 가키히가시 코이치 (垣東 孝一) (개명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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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2년 ([age(1972-12-31)]~[age(1972-01-01)]세)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E와 함께 C의 방으로 불려와 강간에 가담했다. 사건 이후 소년원에 송치됐다. 출소 후 성인이 돼서 결혼해 딸 둘을 낳아 사이타마현 우라와시(현 사이타마시)에 거주했으나 잦은 문제와 범죄 행각을 일으켜서 쫓겨나 사이타마현 이루마시 또는 도쿄도 히노시로 이사 간 것으로 밝혀졌다.
9.8. 기타 공범들
확실하게 확인된 공범으로는 남성 17명, 여성 1명이 있다. 위의 6인 이외에 타케우치 쿠니, 아이다 코이치, 츠즈키 히로시, 카도 아키라, 하기와라 카츠히코, 무라카미 아키히로, 나무 류스케, 이시카와 아카네[58] 등 대부분 극청회 소속이었다.이들은 살인과 학대에 적극 가담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공범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준코를 강간하는 일에만 참여하는 줄 알고 불려왔다가 엮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공범 중 망보기 역할이었던 소년의 인터뷰에 따르면 '탈출시킬 기회도 있었고 아주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들이 무서워서 하지 못했다'[59]고 했다. 이들은 취재하러 온 기자들을 폭행하고 온갖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히로시 패거리는 '사람을 샌드백처럼 장소 가리지 않고 어떻게 저 정도로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구타하고 상대가 울면서 용서를 빌거나 기절해도 폭행을 계속했다고 한다. 준코가 "나 이제 어떻게 돼요?"라고 묻자 공범 소년은 그들이 무서웠기 때문에 "명령받아서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주범들은 부하들이 명령을 듣고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적극적으로 폭행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신발을 집어던지거나 2층에서 베란다 밖으로 집어던지거나 준코가 보는 앞에서 집단폭행을 가하는 등 물리적으로 위협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항은커녕 신고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고 하며, 후에 준코가 어떻게 당했는지 알게 되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10. 판결
이 사건의 심각성이나 기타 죄책을 감안해도 일본 사법부의 판단은 엔자이와 직접적으로 유사하진 않더라도 일종의 병폐이고 소년범이라고 해도 과도한 선처를 한 점을 보아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볼 수 있다.설사 사형이나 이에 준한 극형이 나올 성질의 범행이 아니더라도 법원의 양형 이유 등을 살펴보면 일단 도쿄 지방검찰청은 미야노 히로시부터 와타나베 야스시까지 총 4인을 "상호 공모에 의한 미필적 고의에 따른 살인, 외설 목적의 유괴, 약취, 감금, 강간, 사체유기 등의 각 죄로 피고인들이 가정 형편에 있어서 불우하게 성장했음을 감안해도 일본 소년범죄 사상 보기 드문 중대하고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매우 잔악하고 무자비하게 피해자에게 고통을 안겨 사회적인 물의를 빚은 점을 참작해야 한다"면서 피고인 미야노 히로시(A)를 주범으로 공소 사건의 발단을 만든 배후라며 무기징역을, 오구라 유즈루(B)를 "미야노 히로시(B)의 최측근으로서, 미야노 히로시(A)의 버금가는 지위로 하여금 공소 사건을 주동해, 종국에는 공소 사실에 기재된 범행을 자행하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라며 징역 13년을, 미나토 신지(C)와 와타나베 야스시(D)는 준코에 대한 범행에는 가담했지만 피고인 A와 B의 주동 하에서 소극적으로 응한 점을 참작해 각 부정기형으로 징역 장기 10년, 단기 5년의 형을 법원에 구형했다.[60]
하지만 1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피해자를 위 사건 공소 사실의 범죄로 인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에 이르렀다는 검찰의 주장은 인정되고, 그 범죄의 심각성 또한 반인륜적이어서 형사 책임은 무겁지만 아직까지 미성숙한 미성년자들에 의한 집단 범죄의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극단적인 사태에 놓인 상황에서 정상적인 사리 판단을 하지 못해 불행한 측면에 빠졌음을 감안해야 하고, 수감 생활 도중 반성문을 제출한 것을 보아 교정의 필요성이 인정된다"라며 소년 A는 무기징역에서 법원 선고가 가중감경되어 징역 17년, 소년 B에게 장기 10년, 단기 5년, 소년 C에게 장기 6년, 단기 4년, 소년 D에게 장기 4년, 단기 3년을 선고했다.
심지어 돈을 받고 범인들을 변호해 주겠다고 자청하는 변호사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61]
2심 도쿄고등법원에 이르러 "피고인들이 반성하고 이후의 소년범으로서 교정 등의 갱생 필요성을 감안해도 유족이 엄벌주의로 처벌하기를 탄원하고 있고 해당 사건의 죄책이 사회적 통념에 비춰보아 매우 흉악하고 중하다"면서 1심에서의 양형이 가중돼 소년 A에게 징역 20년, 소년 B에게 장기 10년, 단기 5년, 소년 C에게 장기 9년, 단기 5년, 소년 D에게 장기 7년, 단기 5년이 확정됐지만 유일하게 상고해 1심으로 확정됐다.
재판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는 이들 이외에도 가담한 100여 명의 가해자가 더 있지만 그들은 직접적으로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점을 고려해 대부분 약식절차로 처분돼 가볍게 처벌받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동생의 범행을 방관, 방치했다고 볼 수 있는 C의 형도 피고인 4인의 공범으로 살인 및 사체유기와 강간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지만 소년보호 처분을 받는 것으로 끝.
이들은 일본에 소년법이 없었다면 사형이 선고되었을 자들이다.[62]
당시 기록에 따르면 법정에서도 그들은 "준코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가 죽는다는 생각조차 할 여지가 없었다."고 말한 것으로 적혀 있었다. A는 "준코는 단지 운이 없어서 바보같이 잡혔던 것뿐이다."라고 말하고 반성조차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나가면서 자신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에게 적반하장으로 "억울한 사람을 이렇게 끌어들이고 부끄럽지도 않냐"라고 하고 욕설까지 퍼부었다.
게다가 그는 눈물을 흘리긴 했으나 그것은 피해자에게 저지른 짓에 대한 반성의 눈물이 아니라 병신같이 잡혀 버린 나 자신이 불쌍해서 흘린 눈물이었다고 한다.
분노한 준코의 부모는 피고인 측의 면회 신청 및 성묘를 금지했고 그 비통한 심정을 재판소에 토로했다. 준코의 아버지는 재판 증언 당시 "피고인에 대한 원 판결의 과형은 너무 가볍다"라고 했다. 그나마 형량을 제일 많이 받은 A도 준코의 부모 입장에선 죽일 놈인데 나머지도 미성년자라고 해도 가벼운 형벌을 받았다.
다만 소년법의 적용뿐만 아니라 사형 판결을 내리는 일본 사법부의 관행에 비춰 봤을 때 판사들이 사형 판결까지 나올 성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말도 있긴 하다.
다수를 살해하거나 유괴살인 혹은 살인 전과가 있는 상황에서의 추가적인 살인은 사형 선고가 원칙이지만 그 외의 살인에 대해선 가급적이면 사형 선고를 회피하거나 주범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일본 사법부의 관행이었기에 20년 이상 선고가 불가능한 소년법의 적용과 더불어 A에게만 엄한 판결이 나온 것이란 분석이다.
현재도 달라진 것이 거의 없어서 간혹 나오는 일본의 사형 집행 기사를 보면 사형수 대부분이 사람을 두 명 이상 죽이거나 살인 재범, 유괴살인 등을 저지른 범죄자들뿐이다.
11. 관련 매체
11.1. 다큐멘터리
1989년 방송된 다큐멘터리.[63] |
1995년 발매된 다큐멘터리 비디오 (부제: 망가진 17세들 ~壊れたセブンティーンたち~)[64][65] |
11.2. 영화
-
나카무라 히로무 감독의 영화
콘크리트
2003년 출판된 논픽션 《17세, 악의 이력서》를 바탕으로 2004년에 제작된 영화. 제작사에 수많은 협박 전화 등이 와서 개봉이 미뤄졌으며 당사는 '희망이 없는 청소년들의 미래를 그린 의도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유감'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는 이 사건을 범인 소년들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11.3. 만화, 소설
-
진 현대엽기전
상업지 작가인 우지가 와이타가 그린 만화이다. 영화보다도 더한 막장. 작가가 서문에 "이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묻히고 있는 데다, 이런 일을 세상에 알려서 다시는 같은 사건이 벌어지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기 위해 본 작품을 그렸다"라고 적어 놓기는 했으나, 피해자가 납치당한 뒤 강간, 폭행, 고문, 살해당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이 내용의 전부다. 피해자가 강간당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성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폭행과 고문을 적나라하게 전시하고 있다. 경각심을 주기 위해 그렸다는 말은 핑계일 뿐 작가가 료나물 소비자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
일본 료나 소설
끝나지 않는 여름방학
작가가 공식적으로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피해자가 가혹행위를 당한 기간이 대략 40일 정도라는 점, 가해자가 4명이라는 점, 그리고 온갖 극악무도한 육체적, 정신적, 성적 가혹행위가 자행된 것까지 굉장히 유사하다.
- 천사의 나이프
-
IWGP 시리즈 2권 <소년 계수기> 中 '물 속의 눈동자' 편
치하야 여고생 감금 사건이라는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 온 사건이 등장한다. 성폭행 후 성기에 불을 붙여서 화상을 입히거나 하는 등 비슷한 부분이 많다.
-
소년탐정 김전일 시즌 2
에피소드 중 하나인 켄모치 경부의 살인의 중심 소재인 3년 전의 사건의 모티브이다. 그 때문에 여기 나온 가해자들도 실제 사건의 가해자들 못지않은 말종 흉악범들이다. 다만 이 만화가 청소년들도 보는 만화이다 보니 해당 작품 내에서의 3년 전 사건의 수위는 실제 사건과 비교하면 많이 순화된 편이다. 물론 그 피해자인 토가미 마리나도 몹쓸 악행들을 당하다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
17세.(17歳。)
후지이 세이지가 글을 쓰고 카마타 요지가 그림을 그린 합작. 부제는 '여고생 감금 살인 사건'.
모티브는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 사건이지만 후지이 세이지가 여러 청소년 범죄에 대해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재해석됐다. 청소년 범죄는 어째서 일어나는가, 왜 아무도 피해자를 구하지 못했는가, 법과 사회의 문제점, 어떻게 하면 같은 범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까 등에 대해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
Crónica de una muerte anunciada(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주인공이 살해당할 것을 알고도 그대로 방관한 마을 사람들이 나오며 어찌 보면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 사건과 비슷하다. 방관한 이유도, '농담인 줄 알았다.' 등의 변명으로 일관한 것도 비슷하다. 주인공이 숨을 거두기 직전에 주인공에게 경고하기 위해 주인공을 찾아다닌 의대생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
휴먼버그대학교
이쥬인 시게오 에피소드에서 일부 각색되어 묘사되었다. 주범은 20년 동안 복역하고 피해자의 아버지를 폭행해 돈을 빼앗았다 피해자의 아버지가 의뢰를 걸어 능지형 고문을 43일 동안 받고 숨지는 것으로 표현된다.
11.4. 영화
-
지옥
지옥 탐방을 다룬 이시이 데루오 감독의 1999년작 고어 영화. 이 영화에서 이 사건의 범인들은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일으킨 옴진리교 교주이자 테러리스트 아사하라 쇼코와 함께 지옥에서 최고의 벌을 받으면서 말 그대로 집행관들에게 장기자랑에 인(人)수 분해를 당한다. 이 사건에 대한 감독의 격렬한 분노가 드러나는 장면.
11.5. 노래
- the GazettE의 노래 ' 체온(体温)'
12. 유사 사례
- 일본
- 도치기현 린치 살인사건[66]
- 나고야 아베크 살인 사건
- 대한민국
-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
- 성남 지적장애 소녀 살해 암매장 사건
- 홍은동 여중생 살해 시신 유기 사건
- 용인 10대 엽기 살인사건
- 김해 여고생 살인 사건
-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
[1]
남성 17명, 여성 1명
[2]
당시 일본 소년법에 의해 20년 이상은 선고할 수가 없었다.
[3]
오빠와 남동생이 있었다고 알려졌지만 무남독녀 외동딸로 더 많이 알려진 만큼 형제자매에 관한 정보는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4]
학교에서 손꼽는 우등생이었음에도 대학에 가지 않고 가전 판매점에 취직한 이유는 일본은 한국과 달리 대학은 가는 사람들만 가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일본은 대졸과 고졸의 임금격차가 거의 나지 않는다.
[5]
실제로 미야노 히로시는 야쿠자 조직인 극동회 청년부 산하 조직인 극청회의 두목이었다. 현재는 극청회에 관하여 아무 소식이 없는데 히로시가 수감된 후 사건이 발각됨과 동시에 와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6]
1995년 제작된 다큐멘터리에서는 히로시가 장난삼아 준코 머리에
껌을 뱉어 붙이는데 실제로는 껌을 씹고 있지 않았다.
[7]
준코는 사고 한번 안 쳐본 모범생이었던지라 술을 마셔본 적이 전혀 없었다.
[8]
사실 당시 준코는 6세 연상인 카와무라라는 이름의 23세 남성과 연애 중이었다. 이 남성은 기자와의 인터뷰에 응하기도 했는데 준코의 친구와 자신의 친구가 연애 중이었고 이들 커플과 동행하여 1987년 여고생들의 여름 방학에 함께 별장으로 여행을 가면서 알게 되어 연애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굳이 극청회 패거리에게 밝힐 이유도 없고 밝힌다고 하더라도 남자친구까지 납치 또는 해코지를 당할 수 있으니 거짓말로 둘러댄 것으로 추정된다.
[9]
당시 2층에서는 미나토 신지와 그의 형이 살고 있었다.
[10]
사실 첫날부터 이미 당한 상태이긴 하다.
[11]
바로 집 밖으로 탈출하면 살았을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도망치면
야쿠자에게 살해당할 것"라며 히로시에게 끝없이 세뇌를 당했기에 전화기로 향한 모양. 실제로 히로시는 "이때 준코가 짐을 싸 놓고 옷도 처음에 입었던
교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라고 증언했다.
[12]
2024년 5월 24일 기준 한화 약 2만 6천 원.
[13]
2024년 5월 24일 기준 약 87만 원.
[14]
사진으로 추정하건대
도쿄도
고토구 와카스 2-3-2(東京都江東区若洲2丁目3−2) 주변으로 보인다. 사건 이후에 창고가 세워졌다.
[15]
시신 발견은 1월 5일이지만, 사망 시점은 마지막 폭행을 당한 1월 4일로 추정.
[16]
이 과정에서 흘린 콘크리트는 그 장소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17]
아야세 강 근처에 버리려 했으나 유즈루가 "집 근처라 귀신이 되어 나올 거 같다"라며 무서워했다고 한다.
[18]
TBS 테레비에서 방영했던
야쿠자 드라마. 일본판
야인시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19]
담당 형사가 이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 사건이 영영 묻혔을 지도 모른다.
[20]
이전에 유즈루와 신지 등 부하들이 여성을 상대로
납치 및 강간 치상을 저질러
소년원에 들어가 있었는데 히로시는 이미 이들이 진상을 불었다고 착각했다.
[21]
아무리 막 나가는 불량 청소년이라도 이렇게까지 극악무도한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형사가 의심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히로시의 착각과 달리 부하들의 자백은 없었던 데다가 잡혀온 이유도 이 사건과 무관했다.
[22]
대부분의 시신 유기 사건은 사망한 지 몇 년이 지나서 시신이 백골로 발견되어 신원 확인에 며칠씩 걸리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많은데 준코의 시신은 그나마 일찍 발견돼서 바로 다음날 신원이 확인되었다.
[23]
준코의 부모는 딸의 시신이라도 찾게 해 줘 고맙다면서 히로시의 담당 형사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24]
부검 결과와 사인 문단 역시 마찬가지로 매우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커서 걸러서 보는 것이 좋다.
[25]
육안으로도 근육은 물론, 뼈가 보이는 부분이 일부 있었을 것이다.
[26]
200여 개 정도가 그녀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고 한다.
[27]
스트레스 뿐만 아니라 유즈루가 준코의 머리를 우스꽝스럽게 일부러 밀어버린 탓도 있다.
[28]
다큐에서도 마지막에는 준코가 소년들의 말을 잘 듣지 못한다.
[29]
BMI 상 165cm에 53kg 면 19.47로 정상으로 뜨지만 165cm에 36kg 이면 BMI 13.22로 말기 암 투병 환자의 수준일 정도로 심각한 저체중이다.
[30]
오열하는 여학생들 앞에 전통 의상을 입은 남자가 보이는데
일본의
신토식 장례에서 망자의 명복을 비는 사람이다. 그리고 준코의 친구가 추도사를 읽을 때 집 안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조용히 추도사를 듣고 있는 사람이 아버지고 그 옆에서 망연자실한 채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는 사람이 어머니다.
[31]
준코 때문에 자신과 아들의 인생이 망가졌다며 피해자인 준코의 묘지를 훼손하였다.
[32]
추도사는 영상의 1분 9초부터 들을 수 있다.
[33]
단순 환율로 따지면 한화로 5억 가량으로 1989년의 물가를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였다.
당시 일본의 버블경제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최소 수십억 정도로 볼 수 있다.
[34]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가해자 측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가 가해자가 재판 과정에서 참작되어 처벌을 피하거나 약한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다.
[35]
후술하겠지만 아들이 2006년에 가석방될 때까지는 그 자리에서 이불 판매업을 하면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이혼 후 남편과 아들과 별거했어도 도쿄에서 그대로 살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36]
한화 약 500만 원.
[주소]
사이타마 현 야시오시 중앙 4-21-12
[38]
상술했듯 미나토 신지는 자신의 어머니가 준코의 집에 전화한 사실을 알게 되자 어머니를 4시간 동안 구타한
패륜아이다.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와 형도 폭행하는 집 안의 폭군이었다.
[39]
다만 미나토 신지는 자기 친부모조차 폭행하는 가정폭력범에 인간 말종이었으니 미나토 신지의 부모는 정말로 사건에 대해 몰랐지만 미나토 신지가 자기 부모를 시켜서 증거인멸을 시도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40]
당시 일본의 고령층은 수영복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언론은 그들을 자극하기 위해 저런 식으로 보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41]
소년들은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도 지나가는 여성을 강제로 차에 태워 강간하거나 절도하는 등의 범죄를 최소 90건 넘게 저질러 왔다고 한다.
[42]
그가 언급한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은 범행 당시 가해자들의 나이가 15~18세였기 때문에 소년법에 따라 20년 이상의 형벌을 받지 않은 것이다.
[43]
정황상 날짜별로 따지면 유아 납치 살해 사건 쪽이 먼저 발생한 사건이다.
[44]
다만
공구리 문서에 나와 있듯이 콘크리트로 시체를 매장해도 악취가 나서 시신 자체는 언젠가 발견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면 너무 늦게 발견돼서 신원 확인조차 못 했을 것이다.
[45]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많은 낡은 아파트들이 재개발 지역으로 정해져 주민들을 다른 데로 이주시키는 건 그 당시 일본에서 흔했다.
[46]
당시 일본의 가옥은
내진설계를 위해 법적으로 목조 가옥으로 지어야 해서 방음이 되지 않았다. C의 집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수십 채의 주택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주택가였다.
[47]
2019년에도 500여 점에 달하는 인간과 동물의 백골이 민가에서 발견됐고 90년대 최악의 소년 범죄라고 불리는
사카키바라 사건의 범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48]
즉, 당시에 거주했다가 다른 지역으로 사라진 이들도 알고 보면 후루타 준코와 비슷한 사건들의 피해자도 있었고, 가해자도 있었고, 목격자 내지 방관자도 섞여 있었다. 가해자들이 일으킨 사건의 피해자가 후루타 준코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49]
한국으로 비유하면
동탄신도시 주민들에게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50]
애초에 문제를 따지자면 아다치구가 문제였지 사이타마현 미사토시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름 정상적인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기에 해당 사건을 문제 삼아 굳이 갈아엎을 필요가 없다.
[51]
거기다 피해자의 연고지이다 보니 피해자의 이웃들, 피해자의 학교 동창도 상당수 살고 있다. 많은 세월이 지나 이제서야 잊을 법 한 상처를 타지에서 온 외부인들이 다시 건드린다고 생각해 보자.
[52]
야쿠자의 폭력단 중 하나인 극동회(極東会, 교쿠도카이)의 청년부 조직.
[53]
마치 한국인들이
강호순,
유영철,
조두순에 대해 피해자의 가족, 지인이 아니어도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54]
유즈루와 야스시는 동갑이었던 데다가 같은 히가시아야세 중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미 서로 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라면 히로시를 통하여 같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며 친해졌을 수도 있다.
[55]
도난범을 폭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6]
야쿠자의 지정폭력단 중 하나인 극동회의 청년부 조직이다.
[57]
평소에는 자상한 성격이었다가, 한번 화가나면 아주 무섭게 돌변했다고 한다.
[58]
위에 나온 여성 1명이다. 미야노 히로시와 함께 준코의 얼굴에 매직으로 수염을 그리며 놀렸다.
[59]
소년들은 밤늦게까지 놀다가 늦잠을 자기 일쑤였는데 그 틈을 타서 몰래 준코를 밖으로 내보내고 망을 보는 것이었다.
[60]
이 사건이 일본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무렵에 검찰은 위 소년 4인을 소년부에 송치했다가 소년부 판사의 역송치 결정으로 일반 형사재판을 진행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61]
A는 구치소에 있는 동안 어떤 책을 읽곤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큰 중죄인지 깨달았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 서술했듯이 출소 후에도 범죄를 저지르는 등의 행보를 일으킨 것을 보아
거짓된 눈물일 수도 있다.
[62]
다만 "이런 극단적인 사건 때문에 소년법을 폐지하는 건
UN 아동권리협약때문에 무리"란 게 일반적인 주장이다. 소년법을 폐지하겠다고
UN 아동권리협약 비준을 철회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볼 때 오히려 엄청난 손해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소년법의 비판에 대한 반론에 관해 읽어보면 왜 소년법을 폐지하지 않고 폐지할 수 없는 것인지 알 수 있다.
[63]
범인들의 인적 사항과 주변인들에 대한 인터뷰가 주된 내용이다.
[64]
범행을 재연한 영상들이 있어 사건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65]
현재 연령 제한이 걸려있지만
해당 링크에서 볼 수 있다. 해당 링크에서 재생이 안된다면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1시간 분량의 원본 영상이 7개의 파트로 나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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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이 사건은 가해자가 4명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피해자가 1명이지만 고의적인 살인이라는 점과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남성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이 사건의 주범격인 하기와라 카츠히코(19)와 우메자와 아키히로(19)에게는
무기징역을, 무라카미 히로키(19)에겐 징역 10년을 선고하고 비교적 혐의점이 작은 소년(16)은 소년원에 수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