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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20:30:46

야마다 히사시

야마다 히사시 관련 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bordercolor=#000019><tablebgcolor=#000019> 파일:오릭스 버팔로즈 엠블럼.svg 오릭스 버팔로즈
역대 1라운드 지명선수
}}} ||
{{{#!wiki style="margin: 0 -10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0 -10px -5px"
{{{#ec1c24 {{{#!folding [ 한큐 브레이브스 ]
{{{#555555,#aaaaaa
<tablewidth=100%>
1965년 ~ 1988년
1965년 1966년 1차 1966년 2차 1967년 1968년
나가이케 아츠시
(長池徳士)
미즈타니 타카시
(水谷孝)
히라바야시 지로
(平林二郎)
와타나베 카즈오
(渡辺一夫)
야마다 히사시
(山田久志)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미와타 카츠토시
(三輪田勝利)
코마츠 켄지
(小松健二)
와타나베 히로키
(渡辺弘基)
이시다 마코토
(石田真)
에가와 스구루 (6)[1]
(江川卓)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1978년
야마구치 타카시
(山口高志)
스미토모 카즈야 (6)
(住友一哉)
사토 요시노리
(佐藤義則)
마츠모토 쇼지
(松本正志)
세키구치 토모유키 (1)
(関口朋幸)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키노시타 토모히로 (1)
(木下智裕)
카와무라 카즈아키 (6)
(川村一明)
야마오키 유키히코 (1)
(山沖之彦)
에노키다 켄이치로 (1)
(榎田健一郎)
노나카 테츠히로 (1)
(野中徹博)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2]
시라이 타카유키
(白井孝幸)
이시이 히로시 (1)
(石井宏)
타카기 코지 (1)
(高木晃次)
이토 아츠노리 (2)
(伊藤敦規)
사카이 츠토무 (2)
(酒井勉)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c74b {{{#!folding [ 오릭스 브레이브스 - 블루웨이브 ]
{{{#555555,#aaaaaa
1989년 ~ 2004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사토 카즈히로 (1)
(佐藤和弘)
하세가와 시게토시
(長谷川滋利)
타구치 소 (2)
(田口壮)
코바야시 히로시 (1)
(小林宏)
히라이 마사후미
(平井正史)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카세 토시히로
(嘉㔟敏弘)
이마무라 후미아키 (1)
(今村文昭)
스기모토 유우 (3)
(杉本友)
카와구치 토모야 (2)
(川口知哉)
아라카키 나기사 (6)
(新垣渚)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야마구치 카즈오 (3)
(山口和男)
우츠미 테츠야 (6)
(内海哲也)
오가와 유스케 (3)
(小川裕介)
카토 다이스케 (3)
(加藤大輔)
카토 타츠오
(歌藤達夫)
히라노 케이이치 (3)
(平野恵一)
2004년
카네코 치히로 (3)
(金子千尋)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9e751f {{{#!folding [ 오릭스 버팔로즈 ]
{{{#555555,#aaaaaa
2005년 ~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T-오카다 (1) (4)
(T-岡田)
노부에 다이스케 (1) (4)
(延江大輔)
니와 마사야 (1) (4)
(丹羽将弥)
카이 타쿠야[3]
(甲斐拓哉)
후루카와 슈이치
(古川秀一)
히라노 요시히사 (3) (5)
(平野佳寿)
코마츠 사토시 (3) (5)
(小松聖)
코바야시 켄지 (1) (5)
(小林賢司)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고토 슌타 (1)[4]
(後藤駿太)
아다치 료이치 (1)
(安達了一)
마츠바 타카히로 (1)
(松葉貴大)
요시다 카즈마사
(吉田一将)
야마사키 사치야
(山﨑福也)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요시다 마사타카
(吉田正尚)
야마오카 타이스케
(山岡泰輔)
타지마 다이키 (2)
(田嶋大樹)
오타 료 (1)
(太田椋)
미야기 히로야 (1)
(宮城大弥)
2020년 2021년 2022년 2023년 2024년
야마시타 슌페이타 (1)
(山下舜平大)
무쿠노키 렌
(椋木蓮)
소타니 류헤이
(曽谷龍平)
요코야마 세이야
(横山聖哉)
}}}}}}}}}}}} ||
(1) 하즈레 1라운더: 첫 지명에서 중복 지명된 선수의 교섭권 획득에 실패했을 때 차순위로 선택한 선수.
(2) 중복 지명 당첨
(3)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한 제도로, 선수를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4) 고교생 드래프트
(5)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2005년~2007년의 3년간은 고교 선수와, 대학&사회인 야구에서 뛰었던 선수의 지명이 분리되어 있었다.
(6) 지명 후 미입단

[1]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아니면 입단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다른 팀의 지명을 모두 거부했다. 1973년에는 한큐에 지명되었으나 거부하고 대학에 진학하였으며, 1977년에는 크라운라이터(現 세이부)의 지명을 거부, 1978년에는 한신의 지명을 거부하고 이른바 '공백의 1일'사건을 일으켰으나 일본야구기구의 중재로 결국 코바야시 시게루와의 맞트레이드를 통하여 쿄진에 입단하게 된다. [2] 다이에와 마찬가지로 시즌은 한큐로 치렀으나, 시즌 직후 매각되어 드래프트는 오릭스로 참가했다. [3] 투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포수와는 음이 같지만 한자가 다르다. 그 쪽은 「甲斐拓也」 [4] 1라운드 복수 지명 추첨에서 무려 3번이나 떨어지고 나서 지명한 선수(...) 2022년까지 뛰다 2023년 주니치 드래곤즈로 트레이드되었다. 여담으로 이 해 오릭스가 1라운드에서 순차적으로 지명한 복수지명 선수는 오이시 타츠야(세이부)- 이시미네 쇼타(롯데)- 야마다 테츠토(야쿠르트).
킨테츠의 1라운드 지명선수는 틀: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라운드 지명선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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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word-break: keep-all" <tablebordercolor=#000019> 파일:오릭스 버팔로즈 엠블럼.svg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9e751f> 1936春夏 1936秋 1937春~1937秋 1938春 1938秋
미야타케 사부로 키타이 마사오 이시다 미츠히코 미야타케 사부로 오다노 카시와
<rowcolor=#9e751f> 1939 1940 1941 1942 1943
아사노 카츠사부로 시게미츠 미치오 아사노 카츠사부로 하시모토 쇼고 텐포 요시오
<rowcolor=#9e751f> 1944 1946~1948 1949 1950~1952 1953
카사마츠 미노루 텐포 요시오 이마니시 렌타로 텐포 요시오 시바타 에이지
<rowcolor=#9e751f> 1954 1955 1956~1958 1959 1960
카지모토 타카오 시바타 에이지 카지모토 타카오 요네다 테츠야 카지모토 타카오
<rowcolor=#9e751f> 1961 1962 1963 1964 1965
요네다 테츠야 이시이 시게오 카지모토 타카오 요네다 테츠야 아다치 미츠히로
<rowcolor=#9e751f> 1966 1967 1968 1969~1971 1972~1973
이시이 시게오 요네다 테츠야 이시이 시게오 요네다 테츠야 아다치 미츠히로
<rowcolor=#9e751f> 1974 1975~1986 1987~1989 1990 1991
타케무라 카즈요시 야마다 히사시 사토 요시노리 호시노 노부유키 사토 요시노리
<rowcolor=#9e751f> 1992~1994 1995 1996~1998 1999~2000 2001
호시노 노부유키 사토 요시노리 호시노 노부유키 코바야시 히로시 카네다 마사히코
<rowcolor=#9e751f> 2002 2003 2004 2005~2007 2008
에드 야날 요시이 마사토 구대성 카와고에 히데타카 카네코 치히로
<rowcolor=#9e751f> 2009 2010 2011 2012 2013~2014
코마츠 사토시 카네코 치히로 키사누키 히로시 알프레도 피가로 카네코 치히로
<rowcolor=#9e751f> 2015 2016~2017 2018 2019~2020 2021~2022
브랜든 딕슨 카네코 치히로 니시 유키 야마오카 타이스케 야마모토 요시노부
<rowcolor=#9e751f> 2023 2024~2025
야마시타 슌페이타 미야기 히로야
}}}}}}}}} ||

야마다 히사시의 수상 경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nipponseriesflag2000.png 1977년 일본시리즈 최고 수훈 선수( MVP)
후쿠모토 유타카
( 한큐 브레이브스)
야마다 히사시
( 한큐 브레이브스)
오오스기 카츠오
( 야쿠르트 스왈로즈)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bordercolor=#3fb1e5>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퍼시픽 리그
역대 MVP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fff> 1950 1951 1952 1953 1954
벳토 카오루
마이니치 / 외야수
야마모토 카즈토
난카이 / 내야수
유키 스스무
난카이 / 투수
오카모토 이사미
난카이 / 내야수
오오시타 히로시
니시테츠 / 외야수
<rowcolor=#fff> 1955 1956 1957 1958 1959
이이다 토쿠지
난카이 / 외야수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내야수
이나오 카즈히사
니시테츠 / 투수
스기우라 타다시
난카이 / 외야수
<rowcolor=#fff> 1960 1961 1962 1963 1964
야마우치 카즈히로
마이니치 / 투수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포수
장훈
토에이 / 외야수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포수
조 스탠카
난카이 / 투수
<rowcolor=#fff> 1965 1966 1967 1968 1969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포수
아다치 미츠히로
한큐 / 투수
요네다 테츠야
한큐 / 투수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외야수
<rowcolor=#fff> 1970 1971 1972 1973 1974
키타루 마사아키
롯데 / 투수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외야수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외야수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포수
카네다 토메히로
롯데 / 외야수
<rowcolor=#fff> 1975 1976 1977 1978 1979
카토 히데지
한큐 / 내야수
야마다 히사시
한큐 / 투수
찰리 매뉴얼
킨테츠 / 외야수
<rowcolor=#fff> 1980 1981 1982 1983 1984
키다 이사무
닛폰햄 / 투수
에나츠 유타카
닛폰햄 / 투수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내야수
히가시오 오사무
세이부 / 투수
부머 웰즈
한큐 / 내야수
<rowcolor=#fff> 1985 1986 1987 1988 1989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내야수
이시게 히로미치
세이부 / 내야수
히가시오 오사무
세이부 / 투수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 외야수
랄프 브라이언트
킨테츠 / 외야수
<rowcolor=#fff> 1990 1991 1992 1993 1994
노모 히데오
킨테츠 / 투수
궈타이위안
세이부 / 투수
이시이 타케히로
세이부 / 투수
쿠도 키미야스
세이부 / 투수
이치로
오릭스 / 외야수
<rowcolor=#fff> 1995 1996 1997 1998 1999
이치로
오릭스 / 외야수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 투수
마츠이 카즈오
세이부 / 내야수
쿠도 키미야스
다이에 / 투수
<rowcolor=#fff> 2000 2001 2002 2003 2004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외야수
터피 로즈
킨테츠 / 외야수
알렉스 카브레라
세이부 / 내야수
조지마 켄지
다이에 / 포수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외야수
<rowcolor=#fff> 2005 2006 2007 2008 2009
스기우치 토시야
소프트뱅크 / 투수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내야수
다르빗슈 유
닛폰햄 / 투수
이와쿠마 히사시
라쿠텐 / 투수
다르빗슈 유
소프닛폰햄 / 투수
<rowcolor=#fff> 2010 2011 2012 2013 2014
와다 츠요시
소프트뱅크 / 투수
우치카와 세이이치
소프트뱅크 / 외야수
요시카와 미츠오
닛폰햄 / 투수
다나카 마사히로
라쿠텐 / 투수
카네코 치히로
오릭스 / 투수
<rowcolor=#fff> 2015 2016 2017 2018 2019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외야수
오타니 쇼헤이
닛폰햄 / 투수, 외야수
데니스 사파테
소프트뱅크 / 투수
야마카와 호타카
세이부 / 내야수
모리 토모야
세이부 / 포수
<rowcolor=#fff> 2020 2021 2022 2023 2024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외야수
야마모토 요시노부
오릭스 / 투수

/
}}}}}}}}}

}}} ||
야마다 히사시의 역임 직책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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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003595><tablebgcolor=#003595> 파일:주니치 드래곤즈 엠블럼.svg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 ||
{{{#!wiki style="margin: 0 -10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555,#aaaaaa
1936년 ~ 현재
초대
이케다 유타카
(1936)
2대
마스 카이치
(1937)
3대
네모토 유키사토
(1938~1939)
4대
코니시 토쿠로
(1940~1941)
5대
혼다 치카요시
(1941~1942)
6대
마스 카이치
(1942~1943)
7대
미야케 다이스케
(1944)
8대
타케우치 요시카즈
(1946)
9대
스기우라 키요시
(1946~1948)
10대
아마치 슌이치
(1949~1951)
11대
츠보우치 미치노리
(1952~1953)
12대
아마치 슌이치
(1954)
13대
노구치 아키라
(1955~1956)
14대
아마치 슌이치
(1957~1958)
15대
스기시타 시게루
(1959~1960)
16대
노닌 와타루
(1961~1962)
17대
스기우라 키요시
(1963~1964)
18대
니시자와 미치오
(1964~1967)
19대
스기시타 시게루
(1968)
20대
미즈하라 시게루
(1969~1971)
21대
요나미네 카나메
(1972~1977)
22대
나카 토시오
(1978~1980)
23대
콘도 사다오
(1981~1983)
24대
야마우치 카즈히로
(1984~1986)
25대
호시노 센이치
(1987~1991)
26대
타카기 모리미치
(1992~1995)
27대
호시노 센이치
(1996~2001)
28대
야마다 히사시
(2002~2003)
29대
오치아이 히로미츠
(2004~2011)
30대
타카기 모리미치
(2012~2013)
31대
타니시게 모토노부
(2014~2016)
32대
모리 시게카즈
(2017~2018)
33대
요다 츠요시
(2019~2021)
34대
타츠나미 카즈요시
(2022~2024)
35대
이노우에 카즈키
(2025~)
:일본시리즈 우승 / : 센트럴리그 우승
}}}}}}}}}}}}}}} ||
}}} ||
파일:external/c2.atwiki.asia/4fda647fb8ed377cca4e.jpg
야마다 히사시
山田久志 | Hisashi Yamada
출생 1948년 7월 29일 ([age(1948-07-29)]세)
아키타현 노시로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아키타현립 노시로고등학교
신체 176cm, 77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 언더핸드 스로)
사회인야구 후지제철 카마이시(1967~1969)[A]
프로입단 1968년 드래프트 1순위( 한큐)
프로경력 한큐 브레이브스 (1969~1988)[A]
지도자 경력 오릭스 블루웨이브 투수코치 (1994~1996)
주니치 드래곤즈 투수코치 (1999~2000)
주니치 드래곤즈 수석 겸 투수코치 (2001)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2002~2003)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 ( 2009 WBC)

1. 개요2. 프로 입문 전3. 현역 시절4. 은퇴 이후5. 여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전직 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現 야구해설가.

한큐 브레이브스의 최전성기를 이끈 원클럽맨 프랜차이즈 선수이자 일본프로야구 언더핸드 스로 투수들 중 통산 최다승인 284승을 기록한 투수다.

2. 프로 입문 전

1948년 7월 29일 아키타현의 노시로 시 태생인 야마다는 고교 선수였던 형 츠토무의 뒤를 이어 야구를 시작했고, 형의 모교이던 노시로 고교로 진학했다. 원래 포지션은 3루수 였지만 2학년 여름 고시엔 대회 예선 때 자신의 실책으로 끝내기 패배를 당한 것을 계기로 투수로 전향했다고. 고등학교 졸업 당시 와세다대학, 아지아대학 등 에서 입학 제의가 왔으며 부모도 대학 진학을 권유했으나 사회인야구팀 후지제철 가마이시에 입단했다. 후지제철 시절부터 투구폼을 사이드암 스로에서 언더핸드 스로로 바꾸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3. 현역 시절

파일:external/crayfish-study.sakura.ne.jp/MUS-MEMOPIC01.jpg
현역 시절 역동적인 투구폼을 자랑하던 야마다

1967년 드래프트 회의 때 하위권인 11번으로 니시테쓰 라이온즈에 지명 되었으나 거부하였고, 이듬해인 1968년 한큐에서 1위로 지명[3]하였지만 척추 분리증으로 인한 허리 통증으로 재활에 들어가는 바람에 약 1년을 쉬고 1969년 시즌 도중 비로소 한큐 유니폼을 입었다.[4]

입단 첫해엔 7경기 등판에 1패, 평균자책 5.40 으로 부진했으나 2년차 시즌인 1970년 팀의 주력 투수이던 요네다 테츠야, 가지모토 타카오, 아다치 미츠히로 사이에서 실력을 드러내며 선발 한 자리를 꿰차고 10승 17패, 평균자책 3.19로 나름대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1971년 22승을 거두고 평균자책 홀더(2.37)가 된 것을 시작으로 1986년까지 17시즌 연속 두 자리 승수를 거두는 등 명실상부한 한큐의 에이스로 이름을 날렸다.

야마다는 언더핸드 스로 투수임에도 속구 스피드가 상당하여 힘을 앞세우는 파워피칭으로 타자들을 압도하곤 했는데, 당시 한큐 감독이던 니시모토 유키오가 항상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컨트롤이다"라고 다그쳐도 야마다는 "무슨 말씀을! 직구에 힘만 있으면 한가운데로 던져도 절대 못 칩니다!" 라고 대놓고 반발할 만큼 상당한 배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야마다가 은퇴한 지 20년 이상 지난 후, 옛 스승을 문안하러 온 야마다에게 니시모토가 그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까지 나한테 정면으로 대든 녀석은 네놈밖에 없다" 며 쓴웃음을 지었다는 얘기도 있다.[5]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정면 승부만 고집하다 1971년 일본시리즈 3차전 때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 사다하루에게 끝내기 라뱅쓰리런 홈런을 두들겨 맞고 피눈물을 흘린 적도 있고(...), 통산 피홈런 2위(490피홈런) 기록을 갖고 있다.[6]

그러나 1972년 시즌 이후 고질적인 무릎 통증으로 자신의 무기이던 구속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1973~1975년까지 두 자리 승수는 거두었지만 평균자책이 야마다답지 않게 3점대 후반에서 4점대 초반을 오가는 부진에 빠졌다. 결국 야마다는 팀 대선배이자 동료인 아다치 미츠히로에게 전수받은 싱커를 새로운 구종으로 장착[7]하며 기교파 투수로 변신, 1976년 26승 7패 5세이브, 평균자책 2.39로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다. 또한 한큐의 1975~1977년 3년 연속 일본시리즈 제패에도 큰 공을 세웠고 그 중 1977년엔 2승 1세이브를 기록하며 한큐의 일본시리즈 3연패에 크게 공헌하며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8][9]

이후로도 한큐의 에이스로 활약한 야마다는 1982년 4월 29일 롯데 오리온즈를 상대로 통산 200승을 거두었고,[10] 1975년부터 1986년까지 12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라는 진기록도 세웠다. 1986년 14승을 끝으로 연속 두 자리 승수 시즌이 17년에서 중단됐고, 이듬해인 1987년(그해 7승 7패, 평균자책 3.72)에 통산 2,000탈삼진을 달성[11]했으나 이미 야마다의 기량은 눈에 띄게 쇠퇴했다. 결국 1988년 4승 10패, 평균자책 4.88의 시즌 기록을 끝으로 장장 20년 동안 이어 온 현역 생활을 마감, 그라운드를 떠났다. 추가로 야마다는 이해 한큐 브레이브스의 시즌 최종전이자 한큐의 이름을 걸고 치르는 마지막 경기였던 1988년 10월 23일 대 롯데 오리온즈 홈경기 더블헤더 2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완투승을 기록, 본인의 현역 마지막 경기와 더불어 한큐 구단의 마지막을 승리로 빛내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12]

야마다의 통산 성적은 654게임 등판 3865이닝, 283완투 31완봉, 284승 166패 43세이브, 2058탈삼진, 평균자책점 3.18이다.

4. 은퇴 이후

현역에서 물러난 야마다는 NHK, 닛칸스포츠 등에서 해설가로 일하다 1994년 한큐의 후신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투수코치로 현장에 복귀해 1995-1996시즌 2년 연속 퍼시픽리그 제패와 1996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했으나, 에이스 투수를 혹사시키는 경향이 강했던 오기 아키라 감독과 투수 기용 문제로 갈등을 일으켜 1996년을 끝으로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다시 해설가 생활을 하던 중 1999년 주니치 드래곤즈 투수 코치로 취임해 1999년 센트럴리그 우승을 함께했고 2002년 호시노 센이치의 후임 감독으로 임명되어 취임 첫 해엔 팀을 리그 3위로 이끌었으나 다음 해인 2003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해임당했다.[13][14]

2004년부터 CBC(중부일본방송)의 해설가로 활동 중이며, 2009년 WBC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로 감독인 하라 다쓰노리에게 투수 기용의 전권을 거의 다 위임받아 마운드를 이끌며 일본의 WBC 2연패에 공을 세웠다.

2006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5. 여담

6. 관련 문서



[A] 후술하겠지만 지병 때문에 드래프트 지명 후 바로 프로에 입단하지 않고 이듬해 시즌 후반기에 입단했다. [A] [3] 이 해 한큐의 드래프트는 1위 야마다 히사시, 2위 가토 히데지, 7위 후쿠모토 유타카라는 3명의 명구회 회원을 배출한 희대의 황금 드래프트였다.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로 손꼽히는 1968년 드래프트에서도 가장 풍작을 거두었던 팀이 한큐였다. [4] 여담으로 계약금을 많이 받기 위해 구단에 부상을 숨기는 선수들이 많은 상황에서 야마다는 허리가 아프니까 치료한 뒤에 입단하겠다며 솔직하게 실토한 것을 기특하게 생각한 한큐 구단 임원이 사이닝 보너스를 더 얹어 주었다고 한다. [5] 당시 철권통치의 대명사로 경기 중이라도 형편없는 플레이를 벌인 선수에게 주먹을 날리는 것을 서슴지 않던 니시모토 앞에서 대든다는 것은 목숨은 내다 버리는 것이라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야마다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실력을 가진 선수였으니 니시모토가 참고 넘어간 듯 하다. [6] 단, 원체 언더핸드 투수가 피홈런에 약하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7] 야마다는 직구 중심의 피칭에 한계를 느끼고 아다치에게 싱커를 가르쳐 달라고 했지만 아다치는 "직구가 통한다면 싱커는 던지지 않는 게 좋다" 며 싱커 그립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야마다는 굴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매일같이 연구를 거듭하였고 이 모습에 감명받은 아다치는 마음을 바꾸어 야마다에게 싱커 던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다치는 후일 "나보다 젊고 힘도 좋은 야마다가 싱커를 장착하면 큰 위협이 된다고 느꼈다. 팀에 같은 유형의 투수가 두 명은 필요 없으니까" 라고 생각했다며 털어놓았다. 그리고 야마다는 아다치가 싱커를 세세하게 가르쳐 주지 않고 "나는 이렇게 싱커 그립을 잡지만 투수마다 나름 방법이 다르니 그 뒤는 알아서 생각해 보라"는 식으로 힌트만 준 것에 대하여 "오히려 선배가 생각할 기회를 준 덕분에 나 자신만의 싱커를 익힐 수 있었다. 만약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주었다면 나의 싱커는 아다치의 아류작에 불과했을 것"이라며 아다치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8] 다만 정규시즌 때와는 달리 야마다의 일본시리즈 성적은 1977년을 제외하곤 그다지 좋지 못하다. 위에서 말한 오 사다하루에게 끝내기 홈런을 얻어맞은 1971년 일본시리즈 3차전을 비롯해 1시합 14피안타를 포함해 피홈런 6개(시리즈 기록)를 기록한 1978년 일본시리즈, 후반부에 아카헬 타선에게 무자비하게 난타당하는 모습을 보이며 0승 3패(시리즈 단일 기록)를 기록한 1984년 일본시리즈 등 일본시리즈에서는 등판할 때마다 썩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리즈 통산 성적은 6승 9패 1세이브에 그쳤으며, 일본시리즈 통산 패전(9패), 통산 피안타(122개), 통산 피홈런(23개) 역대 1위라는 썩 달갑지 않은 기록을 보유 중에 있다. [9] 반대로 올스타전은 통산 7승을 거둘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였다. [10] 그런데 이날 상대 타자이던 오치아이 히로미츠에게 홈런 세 방을 맞았다(...). 200승 당시 하이라이트 영상 [11] 기요하라 가즈히로에게 뽑아냈다. 재미있는 것은 1987 시즌 개막전에 기요하라에게 홈런을 얻어맞았다. 통산 200승 상황의 데자뷰? [12] 이날 경기는 함께 한큐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후쿠모토 유타카의 현역 마지막 시합이기도 했다. [13] 당초엔 프런트가 자진 사임의 형태로 물러나게 하려 했으나, 야마다가 "그럼 내 스스로 팀을 도망치거나 내던진 것이 되지 않느냐. 그런 건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맹렬히 반대해서 결국 격한 논의 끝에 해임으로 처리되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중도해임이 결정되었을 당시가 히로시마 원정을 치를 때라 선수단과 인사를 나눈 뒤 야마다만 홀로 나고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얄궃게도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자신의 해임 소식이 열차 전광판에 첫 소식으로 나오는 걸 봐야 했다고 한다. [14] 잔여 시즌은 수석 코치이던 사사키 쿄스케가 감독 대행으로 지휘했고, 그 후 팀 성적이 크게 상승하며 주니치는 그 해 리그 2위로 시즌을 마쳤다. 그리고 이듬해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감독직에 올랐다. [15] 밑에 언급되는 야마다 자서전에 수록된 이종범의 책 추천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