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마다 히자시는 해당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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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 히사시의 수상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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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일본시리즈 최고 수훈 선수( MVP)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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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 히사시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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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 히사시 山田久志 | Hisashi Yama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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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8년 7월 29일 ([age(1948-07-29)]세) |
아키타현 노시로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아키타현립 노시로고등학교 |
신체 | 176cm, 77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언더핸드 스로) |
사회인야구 | 후지제철 카마이시(1967~1969)[A] |
프로입단 | 1968년 드래프트 1순위( 한큐) |
프로경력 | 한큐 브레이브스 (1969~1988)[A] |
지도자 경력 |
오릭스 블루웨이브 투수코치 (1994~1996) 주니치 드래곤즈 투수코치 (1999~2000) 주니치 드래곤즈 수석 겸 투수코치 (2001)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2002~2003)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 ( 2009 W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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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직 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現 야구해설가.한큐 브레이브스의 최전성기를 이끈 원클럽맨 프랜차이즈 선수이자 일본프로야구 언더핸드 스로 투수들 중 통산 최다승인 284승을 기록한 투수다.
2. 프로 입문 전
1948년 7월 29일 아키타현의 노시로 시 태생인 야마다는 고교 선수였던 형 츠토무의 뒤를 이어 야구를 시작했고, 형의 모교이던 노시로 고교로 진학했다. 원래 포지션은 3루수 였지만 2학년 여름 고시엔 대회 예선 때 자신의 실책으로 끝내기 패배를 당한 것을 계기로 투수로 전향했다고. 고등학교 졸업 당시 와세다대학, 아지아대학 등 에서 입학 제의가 왔으며 부모도 대학 진학을 권유했으나 사회인야구팀 후지제철 가마이시에 입단했다. 후지제철 시절부터 투구폼을 사이드암 스로에서 언더핸드 스로로 바꾸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3. 현역 시절
현역 시절 역동적인 투구폼을 자랑하던 야마다
1967년 드래프트 회의 때 하위권인 11번으로 니시테쓰 라이온즈에 지명 되었으나 거부하였고, 이듬해인 1968년 한큐에서 1위로 지명[3]하였지만 척추 분리증으로 인한 허리 통증으로 재활에 들어가는 바람에 약 1년을 쉬고 1969년 시즌 도중 비로소 한큐 유니폼을 입었다.[4]
입단 첫해엔 7경기 등판에 1패, 평균자책 5.40 으로 부진했으나 2년차 시즌인 1970년 팀의 주력 투수이던 요네다 테츠야, 가지모토 타카오, 아다치 미츠히로 사이에서 실력을 드러내며 선발 한 자리를 꿰차고 10승 17패, 평균자책 3.19로 나름대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1971년 22승을 거두고 평균자책 홀더(2.37)가 된 것을 시작으로 1986년까지 17시즌 연속 두 자리 승수를 거두는 등 명실상부한 한큐의 에이스로 이름을 날렸다.
야마다는 언더핸드 스로 투수임에도 속구 스피드가 상당하여 힘을 앞세우는 파워피칭으로 타자들을 압도하곤 했는데, 당시 한큐 감독이던 니시모토 유키오가 항상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컨트롤이다"라고 다그쳐도 야마다는 "무슨 말씀을! 직구에 힘만 있으면 한가운데로 던져도 절대 못 칩니다!" 라고 대놓고 반발할 만큼 상당한 배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야마다가 은퇴한 지 20년 이상 지난 후, 옛 스승을 문안하러 온 야마다에게 니시모토가 그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까지 나한테 정면으로 대든 녀석은 네놈밖에 없다" 며 쓴웃음을 지었다는 얘기도 있다.[5]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정면 승부만 고집하다 1971년 일본시리즈 3차전 때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오 사다하루에게 끝내기
그러나 1972년 시즌 이후 고질적인 무릎 통증으로 자신의 무기이던 구속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1973~1975년까지 두 자리 승수는 거두었지만 평균자책이 야마다답지 않게 3점대 후반에서 4점대 초반을 오가는 부진에 빠졌다. 결국 야마다는 팀 대선배이자 동료인 아다치 미츠히로에게 전수받은 싱커를 새로운 구종으로 장착[7]하며 기교파 투수로 변신, 1976년 26승 7패 5세이브, 평균자책 2.39로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다. 또한 한큐의 1975~1977년 3년 연속 일본시리즈 제패에도 큰 공을 세웠고 그 중 1977년엔 2승 1세이브를 기록하며 한큐의 일본시리즈 3연패에 크게 공헌하며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8][9]
이후로도 한큐의 에이스로 활약한 야마다는 1982년 4월 29일 롯데 오리온즈를 상대로 통산 200승을 거두었고,[10] 1975년부터 1986년까지 12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라는 진기록도 세웠다. 1986년 14승을 끝으로 연속 두 자리 승수 시즌이 17년에서 중단됐고, 이듬해인 1987년(그해 7승 7패, 평균자책 3.72)에 통산 2,000탈삼진을 달성[11]했으나 이미 야마다의 기량은 눈에 띄게 쇠퇴했다. 결국 1988년 4승 10패, 평균자책 4.88의 시즌 기록을 끝으로 장장 20년 동안 이어 온 현역 생활을 마감, 그라운드를 떠났다. 추가로 야마다는 이해 한큐 브레이브스의 시즌 최종전이자 한큐의 이름을 걸고 치르는 마지막 경기였던 1988년 10월 23일 대 롯데 오리온즈 홈경기 더블헤더 2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완투승을 기록, 본인의 현역 마지막 경기와 더불어 한큐 구단의 마지막을 승리로 빛내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12]
야마다의 통산 성적은 654게임 등판 3865이닝, 283완투 31완봉, 284승 166패 43세이브, 2058탈삼진, 평균자책점 3.18이다.
4. 은퇴 이후
현역에서 물러난 야마다는 NHK, 닛칸스포츠 등에서 해설가로 일하다 1994년 한큐의 후신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투수코치로 현장에 복귀해 1995-1996시즌 2년 연속 퍼시픽리그 제패와 1996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했으나, 에이스 투수를 혹사시키는 경향이 강했던 오기 아키라 감독과 투수 기용 문제로 갈등을 일으켜 1996년을 끝으로 코치직에서 물러났다.이후 다시 해설가 생활을 하던 중 1999년 주니치 드래곤즈 투수 코치로 취임해 1999년 센트럴리그 우승을 함께했고 2002년 호시노 센이치의 후임 감독으로 임명되어 취임 첫 해엔 팀을 리그 3위로 이끌었으나 다음 해인 2003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해임당했다.[13][14]
2004년부터 CBC(중부일본방송)의 해설가로 활동 중이며, 2009년 WBC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로 감독인 하라 다쓰노리에게 투수 기용의 전권을 거의 다 위임받아 마운드를 이끌며 일본의 WBC 2연패에 공을 세웠다.
2006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5. 여담
- 선동열이 1999년 6월에 3경기 연속 구원에 실패하고 난 후, 당시 투수코치였던 야마다 히사시에게 이제 더 이상 야구를 못하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들은 야마다 코치가 호시노 센이치 감독에게 건의해 선동열이 2군에서 조정기를 가져주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조정기 후 1군에 복귀한 선동열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그해 9월 30일 주니치의 센트럴리그 우승결정 순간 팀의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
- 2003년에 본인의 자서전이 한국어판으로도 번역되었다. 책제목은 <승부근성을 가진 사람이 먼저 성공한다>이다.
6. 관련 문서
[A]
후술하겠지만 지병 때문에 드래프트 지명 후 바로 프로에 입단하지 않고 이듬해 시즌 후반기에 입단했다.
[A]
[3]
이 해 한큐의 드래프트는 1위
야마다 히사시, 2위 가토 히데지, 7위
후쿠모토 유타카라는 3명의
명구회 회원을 배출한 희대의 황금 드래프트였다.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로 손꼽히는 1968년 드래프트에서도 가장 풍작을 거두었던 팀이 한큐였다.
[4]
여담으로 계약금을 많이 받기 위해 구단에 부상을 숨기는 선수들이 많은 상황에서 야마다는
허리가 아프니까 치료한 뒤에 입단하겠다며 솔직하게 실토한 것을 기특하게 생각한 한큐 구단 임원이 사이닝
보너스를 더 얹어 주었다고 한다.
[5]
당시 철권통치의 대명사로 경기 중이라도 형편없는 플레이를 벌인 선수에게 주먹을 날리는 것을 서슴지 않던 니시모토 앞에서 대든다는 것은
목숨은 내다 버리는 것이라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야마다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실력을 가진 선수였으니 니시모토가 참고 넘어간 듯 하다.
[6]
단, 원체 언더핸드 투수가 피홈런에 약하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7]
야마다는 직구 중심의 피칭에 한계를 느끼고 아다치에게 싱커를 가르쳐 달라고 했지만 아다치는 "직구가 통한다면 싱커는 던지지 않는 게 좋다" 며 싱커 그립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야마다는 굴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매일같이 연구를 거듭하였고 이 모습에 감명받은 아다치는 마음을 바꾸어 야마다에게 싱커 던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다치는 후일 "나보다 젊고 힘도 좋은 야마다가 싱커를 장착하면 큰 위협이 된다고 느꼈다. 팀에 같은 유형의 투수가 두 명은 필요 없으니까" 라고 생각했다며 털어놓았다. 그리고 야마다는 아다치가 싱커를 세세하게 가르쳐 주지 않고 "나는 이렇게 싱커 그립을 잡지만 투수마다 나름 방법이 다르니 그 뒤는 알아서 생각해 보라"는 식으로 힌트만 준 것에 대하여 "오히려 선배가 생각할 기회를 준 덕분에 나 자신만의 싱커를 익힐 수 있었다. 만약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주었다면 나의 싱커는 아다치의 아류작에 불과했을 것"이라며 아다치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8]
다만 정규시즌 때와는 달리 야마다의 일본시리즈 성적은 1977년을 제외하곤 그다지 좋지 못하다. 위에서 말한
오 사다하루에게 끝내기 홈런을 얻어맞은 1971년 일본시리즈 3차전을 비롯해 1시합 14피안타를 포함해 피홈런 6개(시리즈 기록)를 기록한 1978년 일본시리즈, 후반부에
아카헬 타선에게 무자비하게 난타당하는 모습을 보이며 0승 3패(시리즈 단일 기록)를 기록한 1984년 일본시리즈 등 일본시리즈에서는 등판할 때마다 썩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리즈 통산 성적은 6승 9패 1세이브에 그쳤으며, 일본시리즈 통산 패전(9패), 통산 피안타(122개), 통산 피홈런(23개) 역대 1위라는 썩 달갑지 않은 기록을 보유 중에 있다.
[9]
반대로
올스타전은 통산 7승을 거둘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였다.
[10]
그런데 이날 상대 타자이던
오치아이 히로미츠에게
홈런 세 방을 맞았다(...).
200승 당시 하이라이트 영상
[11]
기요하라 가즈히로에게 뽑아냈다. 재미있는 것은 1987 시즌 개막전에 기요하라에게 홈런을 얻어맞았다. 통산 200승 상황의 데자뷰?
[12]
이날 경기는 함께 한큐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후쿠모토 유타카의 현역 마지막 시합이기도 했다.
[13]
당초엔 프런트가 자진 사임의 형태로 물러나게 하려 했으나, 야마다가 "그럼 내 스스로 팀을 도망치거나 내던진 것이 되지 않느냐. 그런 건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맹렬히 반대해서 결국 격한 논의 끝에 해임으로 처리되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중도해임이 결정되었을 당시가
히로시마 원정을 치를 때라 선수단과 인사를 나눈 뒤 야마다만 홀로
나고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얄궃게도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자신의 해임 소식이 열차 전광판에 첫 소식으로 나오는 걸 봐야 했다고 한다.
[14]
잔여 시즌은 수석 코치이던 사사키 쿄스케가 감독 대행으로 지휘했고, 그 후 팀 성적이 크게 상승하며 주니치는 그 해 리그 2위로 시즌을 마쳤다. 그리고 이듬해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감독직에 올랐다.
[15]
밑에 언급되는 야마다 자서전에 수록된
이종범의 책 추천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