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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군/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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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실제 사례
2.1. 동아시아
2.1.1. 한국사
2.1.1.1. 고구려2.1.1.2. 백제2.1.1.3. 신라2.1.1.4. 고려2.1.1.5. 조선
2.1.2. 중국사
2.2. 유럽
3. 가상의 암군

1. 개요

2. 실제 사례

2.1. 동아시아

2.1.1. 한국사

2.1.1.1. 고구려
2.1.1.2. 백제
2.1.1.3. 신라
2.1.1.4.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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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5. 조선

2.1.2. 중국사

2.2.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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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상의 암군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암군/창작물]


[1]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쇼군이 아니었다. [A] 당연하지만 이런 군주는 어쩔 수가 없다. 장애에 의한 실수 또는 무능을 일방적으로 탓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A] [4]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태조대왕 [5]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태조대왕 [6]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미천왕 [7]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무령왕 4번 항목 [8] 安原王代의 政局 運營과 大對盧 爭鬪 [9] 평원왕대 정국 운영의 특징과 그 함의 [10] 618-629년 영류왕의 대외정책과 고구려-당ㆍ신라 관계의 변화 [11] 고구려 영류왕 후기 대외정책의 변화와 연개소문의 정변 [12] 다만 장군으로써의 능력과 군주로써의 능력은 별개이다. [13] 개로왕의 왕권강화와 국정운영의 변화에 대하여 [14]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동성왕 [15]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의자왕 [16] 조원숙, < 新羅 善德王代 度僧 施行과 佛敎政策> (2009) [17] 서영교,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 [18] 신라 진성여왕대의 재이와 농민반란 [19] 신라시대 선덕, 진덕, 진성 여왕의 정치리더십 비교연구 [20] 신라의 멸망과 朴氏王家 #, ## [21] 고려 초 康兆의 政變과 中臺省의 등장 — 선휘원·은대와 중대성의 치폐과정에 담긴 의미 — [22] 고려 목종·현종대 실시된 사면과 은전의 내용 분석과 그 특징 [2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2. 귀족사회의 전개와 동요 4) 의종대의 정치혼란 [24] 그 예가 김보당의 난. 주도자인 김보당의 경우 평소 의종의 실정에 비판적인 인물이라서 무신정변 당시에는 무사했었던 것이다. [25] 원 간섭기 원종ㆍ충렬왕의 정치적 행적 [26] 고려 충선왕의 정치개혁과 元의 영향 [27] 고려 충숙왕대 인사정책 연구: 재추의 관직겸임 양상을 중심으로 [28] 고려 후기에 친원파 권문세족이 전국의 땅을 집어먹은 상태에서 왕들은 토지개혁 부문에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걸 건드리는 건 기존 권력층한테 "한번 겨루어볼래?"라고 파이트 신청하는 거랑 다를 게 없다. [29] 당시 권문세족 농장은 면세 면역이었다. [30] 이 부분이 진짜 독특한 건데, 우리 역사상 왕권을 강화할 때 임협 집단을 이용하는 경우는 없다. 보통 기존 권력 집단과 타협, 흡수하거나, 시종 공신들을 낙하산으로 투하한 다음 권력을 밀어줘서 거물을 만들거나, 통혼을 통해 처가빽을 만들거나 친가빽을 만들어 동원하지, 천한 건달, 조직들을 끌어들여 왕권 강화한 건 충혜왕이 처음이다. 중국에서는 전한 고조 유방과 명 태조 주원장의 사례가 있긴 한데, 그 쪽은 아예 출신이 임협집단이니 같이 시작한 인재들도 그 쪽 출신인 것이었다. [31] 쉽게 말해 기존 친원파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권과 유통 구조를 탈취하고, 토지를 집어먹는 수단을 없앴으며, 보란듯이 권문세족들에게만 적용되는 세금을 걷는 데다 자기들하고 통혼 같은 걸로 타협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왕이었다. 때마침 친원파들의 음행이 심하다 하니 왕이 그들을 제거할 명분은 충분했다. [32] 물론 어느 정도 충혜왕에게 불리한 기록만 남았을 공산도 있지만, 저 재평가 역시 남은 기록을 통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33] 원의 쇠퇴와 공민왕의 반원정책 [34] 한국사 연대기 [35] 고려사 [36] 한국사 연대기 > 고려 > 우왕 [37]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2. 사림세력의 진출과 사화 4) 갑자사화 [38] 게다가 애초에 성리학 군주 끝판왕인 성종이 엄연히 왕위에 앉아 있는 마당에 후궁 주제에 중전인 윤씨한테 감히 대들었다가는 그 즉시 끔살 당했을 것이다. 당장 후궁은 자신의 친자한테도 무조건 존칭을 써야 했다. [39] 다만, 조선이 워낙 왕권이 강한 나라다보니,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군약신강 기조가 된 것일 뿐이다. 때문에, 효종 시기부터는 다시 왕권이 강해지기 시작해서, 숙종 시기부터 정조 때까지는 연산군과 맞먹는 수준의 절대왕권이 구축되었다. 대중들이 생각하는 진짜 군약신강 기조가 나타난 것은 철종 대부터다. [40] 패륜의 대명사인 증조부 세조와 이복형 연산마저도 자신의 친자식들은 끔찍히 아꼈다. 애초에 왕이 공식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죽인 것은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와 중종 단 둘밖에 없다. 그나마 자식을 굉장히 미워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인조까지 셋이다. 소현세자는 청이 소현과 원손들을 볼모로 인조의 왕권을 위협했고, 사도세자는 아예 정신병자가 되어 도저히 왕위를 이을 수 없는 상태였다. 물론 따지고 보면 이런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도 인조, 영조의 자업자득이다 그런데 복성군은 어떠한 이유도 없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아 죽은 셈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적장자 인종이 18세로 성년이었기에 혈통 면에서 밀리는 복성군을 죽여야만 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41] 중종대(中宗代) 속찬증보(續撰增補) 사업과 그 정치적 함의 [42] 임진왜란 이전부터 심질(心疾) 즉 조현병이 있다고 스스로 고백했고, 날이 갈수록 증세가 점점 심해졌다. # [43] 현종 3년 9월 5일, 현종개수 3년 9월 5일, 현종 4년 4월 13일, 현종개수 4년 4월 13일, 현종 4년 9월 18일, 현종개수 4년 9월 18일, 현종 9년 4월 13일, 현종개수 9년 4월 13일, 비변사등록 숙종 14년 1688년 04월 15일 (음) [44] 인조 1년 8월 10일, 인조 1년 윤10월 28일, 인조 1년 12월 7일, 인조 3년 11월 24일, 인조 4년 2월 11일, 인조 4년 2월 13일, 인조 4년 3월 16일, 인조 4년 12월 13일, 인조 14년 8월 1일 [45] 율곡 이이는 명종 대에 발생한 해주의 수미법(收米法)으로 불렸던 사대동(私大同)을 본떠서 공물작미(貢物作米) 그리고 공안개정(貢案改正) 등의 대책을 주장했고, 류성룡은 이를 거의 받아서 이를 실현하려 했으나 애초에 1결당 1두만 걷어도 될 정도로 공물부담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해주의 사정이 전국에 적용될 리가 만무했고 그마저도 중앙으로 들어온 얼마 안 되는 쌀은 군량으로 대기에 급급했다. 건의한 류성룡은 몰라도 군량 부족과 같은 매번 그때그때 벌어지는 단기적인 문제외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선조에게 '공납제 폐단을 개선하겠다.' 같은 식의 장기적인 정책 목표에 대한 관념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전혀 성과를 얻지 못한채 공납제 폐단을 개선하는 수단인 공물작미(貢物作米)에 대해서는 이후로도 선조가 떡먹다가 죽을 때까지 거의 15년간 논의 자체도 전혀 진전이 없었다. [46] 이것이 제대로 시행된 것은 광해군 즉위 직후 이원익의 건의로 이루어진 경기선혜법이라는 경기에서의 시범사업이 처음이었다. 단지 왕 하나 바뀌었는데 어느 관서가 재원을 관리할 것인지 어느 관서의 누가 경각사(京各司)의 공물 납입 담당자인지 누가 경각사(京各司)에 직접 공물을 납입할 것인지 사주인(私主人)을 인정할 것인지 같은 주요 쟁점이 이전에는 전혀 논의 자체가 안 되다가 이 정도 성과를 집권 몇년 만에 바로 얻어낸 것이다. 다들 개혁 주장하는 와중에 말해봐야 씨알도 안 먹히는 무능하고 수구적인 왕 하나가 개혁의 걸림돌로 40년 동안 죽지도 않고 있었으니까 이원익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도 어찌보면 당연했다. 선조 29년 10월 21일 딸깍 버튼 한번 누를 의지조차도 없는 그야말로 무능의 극치였다. [47]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 [48] 물론 광해군 대에 보듯 '그 시간도 됐고 궁궐이나 짓겠다'라는 발상보다야 나았다고 할 수 있겠다. [49] 선조 38년 9월 28일 당연히 조선이 고려보다 부유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데 조선초기 농업생산량 증가와 사회의 안정화로 인한 인구증가로 국가생산은 크게 증가했고 여러가지 폐단으로 골머리를 앓던 선조시기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무정부상태에 가까웠던 고려말기보다는 정부재정도 튼튼했다고 봐야 한다. 출처 [50] 임진왜란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3~400명으로 조선군 1만을 대적할 수 있다는 여진족(여진족 1명당 조선군 25~33명에 대적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들이 3만(앞의 기록을 감안하면 사실상 75만~99만에 달하는 대군이다.)대군으로 공격해온 니탕개의 난을 결과적으로 막아낼정도는 되었다. 강대국 명나라가 건국 100년도 안 되어서 2만 정도 적들에게 50만 대군이 참패한 토목의 변같은 굴욕을 겪은걸 생각하면 조선은 200년간 여러가지 폐단으로 군사력이 약해졌음에도 상당히 선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업적은 병조에서 이이가 해낸 것으로, 선조는 이이의 십만양병설 같은 국방 강화 대책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동시기 1억이 넘는 인구대국 명나라가 장부상 병력 300만이 무색하게 사르후 전투에서 10만 동원하는 것도 버거워했던 것에서 보이듯이, 전근대 농업국가가 이전부터 이어져오던 폐단들을 전부 해결하고 국가의 모든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건 불가능했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그러나 나라가 가난하고 약하다고 불평부터 하는 것이 지도자의 자질이 훌륭했다고는 할 수 없으니, 이는 선조의 '남탓' 버릇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말이라도 최대의 책임감으로 진력하여 나라를 살리려 애썼는데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해 한탄한 군주라면 평가가 달랐으리라. [51] 연산 2년 1월 3일 [52] 선조(조선)/평가/부정적 평가/치세의 핵심 업적이 부족하다는 견해 [53] 재위 4년까지는 괜찮았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광해군의 재위기간이 15년이 되는데 거의 재위기간 약 3분의2, 즉 11년 동안 막장 암군/폭군 짓을 한 것 [54] 선조의 찌질한 견제와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광해군의 흑화에 한몫했다는 의견도 있다. [55] 다만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 같은 업적 이후 백년간 개혁의 효시가 되었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C] [57] 10년 간의 위기: 정묘-병자호란기의 공론정치 비판 [58] 인조(仁祖)대 재이(災異)에 대한 인식과 대응 [59] 순조대 전반기 정국 변동과 의리론의 추이 [60]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2. 세도정치의 전개 > 1) 순조대의 세도정치 > (2) 순조 친정 초기(순조 4년∼11년) [61] 순조(純祖) 19세기 전반, 세도 정치 극복에 실패하다 [62] 정조가 비상한 두뇌를 가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똑똑하다고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는 법이다. [63] 고종의 친정체제 형성과 그 성격 [64] 만력 전반기 명의 정세와 임진전쟁 참전과정 [65] Reform and Regicide: The Reign of Peter III of Russia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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