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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ffffff,#1f2023><bgcolor=#ffffff,#1f2023><(> 토론 - 역사 속의 암군 문단의 인물에 볼드체 삽입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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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 암군/목록 문서의 실존인물 예시 목록 문단에는 나무위키에서 정한 근거 신뢰성 순위 6순위 이상의 자료들에서 명확하게 암군 혹은 부정평가가 높다고 명시된 군주들만 추가하며 각주로 그 근거 출처를 반드시 밝혀놓는다. 또한 암군이라는 평가의 근거 출처가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 군주들은 목록에서 삭제를 원칙으로 한다.||
1. 개요
- 암군/목록 문서의 실존인물 예시 목록 문단에는 나무위키에서 정한 근거 신뢰성 순위 6순위 이상의 자료들에서 명확하게 암군, 혹은 부정평가가 높다고 명시된 군주들만 추가하며 각주로 그 근거 출처를 반드시 밝혀놓는다. 또한 암군이라는 평가의 근거 출처가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 군주들은 목록에서 삭제를 원칙으로 한다.
-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을 경우나, 전제군주제에 가까운 태국, 모로코,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한 완전한 입헌군주제하의 군주는 제외한다.
- 공화정 체제의 지도자도 기입하지 않는다.
- 독재자 역시 기입하지 않는다. 단, 군주에게 실권이 없는 국가의 실권자들(예: 막부 정권의 쇼군 등 전근대 일본의 실권자[1])이나 군주 없는 군주국의 섭정으로서 독재를 저지른 인물은 예외로 간주한다.
- ★: 폭군으로도 평가를 받는 경우
- ◆: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경우[A]
- ◇: 육체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A]
- ▲: 시해 또는 전사당한 경우
- △: 폐위되거나 강제로 양위당한 경우
- ◎: 역사 왜곡, 관점 차이 등의 논란이 있어 평가가 극명하게 갈려 암군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경우. 논란이 있는 경우 관점에 따라 충분히 명군이라고 볼 수 있다.
2. 실제 사례
2.1. 동아시아
2.1.1. 한국사
2.1.1.1. 고구려
- 모본왕(48 ~ 53)★▲◎: 성품이 사납고 잔인하여 사람을 깔고 앉거나 베개로 삼는가 하면, 함부로 죽이는 등의 폭정으로 인해 신하 두로에게 시해당했다.[4] 다만 역사 왜곡일 가능성이 있다.
- 봉상왕(292 ~ 300)★△: 재위기간 동안 자연재해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궁핍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백성들을 동원해 궁궐을 증축하는 등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등의 폭정으로 인해 창조리에게 폐위되는 원인이 된다.[6]
- 문자명왕(492 ~ 519): 치세를 들여다보면 아버지 장수왕이 나라를 강력하게 만들며, 아들 안장왕이 다시 복구 했으니 망정이지 다른 시기 였다면 그대로 고구려가 퇴락했을 수준이었다. 말년의 의자왕이나 연산군 같은 폭군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암군의 반열에 들어가며, 고구려가 남쪽으로 더 진출하지 못하게 만든 원흉이다.이 시기 무령왕에게 한강 유역을 내주고, 안장왕때 한강 유역을 되찾았기 때문.[7]
- 안원왕(531 ~ 545)◎: 사실 기록상으로 실정을 벌인 것은 별로 없다. 오히려 도량이 넓었다는 긍정적인 뉘앙스의 평가 및 재위 말을 제외하면 왕이 국정주도권을 가지고 있었고 조정 내의 구체적인 혼란상을 확인하기 어렵다고 하는 평가가 있을 정도. 그런 것처럼 재위 중반까진 그냥 평범히 보냈다. 다만, 안원왕의 왕위계승 문제와 왕권이 약해지고 대대로의 권력이 강화되었고 이를 둘러싼 갈등이 점차 두드러지게 되는 후계자 선정 실패는 안원왕의 실정으로 보고 있다.[8] 물론 문자명왕 때부터 생긴 문제점이 안원왕 시기에 터진 것이라 안원왕 한 명만의 잘못으로 몰빵해버리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 표를 추가한다.
- 영류왕(618~642)▲◎: 지나친 친 당(親唐) 정책으로 내부의 불만을 초래하였으며, 신라가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여 빼앗으면서 신라와의 대외정책도 실패로 돌아갔고, 빈약한 정치력으로 무리수를 두다가 정치세력 간 갈등이 심화돼 본인 목숨도 잃었다.[10][11] 다만 고구려-수 전쟁 당시 명장이었던 만큼 능력은 있었고[12] 마냥 폭군 + 암군은 아니었기에 ◎ 표를 추가한다.
2.1.1.2. 백제
- 개로왕(455 ~ 475)▲△◎: 도림과의 바둑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했다는 이야기와 도미 부부 설화로 암군이란 부정적 이미지가 있지만, 최근에는 여러 연구들을 통해 나름대로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애썼다는 긍정적 평가도 발굴되었다. 다만 왕권의 권위와 위엄을 세우기 위하여 화려한 왕궁 건설과 개로왕의 무리한 토목공사의 추진으로 민심과 평판은 갈수록 악화돼가고 백제의 국력은 날로 피폐해져서 이 실책으로 인해 개로왕의 전제왕권은 장수왕의 공격을 받고 붕괴되기에 앞서 내외적인 모순이 격화되면서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13]
- 말년의 동성왕(479 ~ 501)▲△◎: 집권 중후반까지만 해도 왕권 강화 정책과 대외 정책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어 웅진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명군으로서 백제의 중흥기를 잘 이끌어갔지만, 집권 말기 측근 정치에 빠지고 대규모 토목공사와 자연재해로 민심 이반을 겪으며 신하들의 구휼 요청도 무시하고 궁에 틀어박혀 향락만 실컷 즐기는 등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 듯한 모습을 보였으며, 결국 위사좌평에까지 임명하며 신임하던 신하 백가가 일으킨 반란에 휘말려 시해된 점에서 동성왕의 정치적 한계로 지적된다.[14]
- 말년의 의자왕(641 ~ 660)△◎: 집권 후 15년까지는 부친 무왕 대 쌓아온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정국을 이끄는 등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당나라와 거리를 두면서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영토를 확장하는 등 업적이 많았다. 그러나 집권 15년을 지나면서 말년에 여색과 향락에 빠져 충신을 멀리했고 대외관계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대당관계가 파탄나서 당나라가 신라와 동맹을 맺은 뒤 협공을 초래해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는 원인이 된다.[15]
2.1.1.3. 신라
- 선덕여왕(632 ~ 647): 당시 신라는 대외 전쟁이 빈번했던 시기에 무리한 토목공사는 비용과 인력 문제에서 많은 어려움을 발생시킬 있었는데 선덕여왕은 불교를 통해 현실의 어려움을 타파하고자 했으나, 무리한 사찰 및 사탑의 건립 사업과 숭불사업으로 인하여 기층민의 여러 계층의 불만이 생겨났고, 비담의 난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란을 마주한 상황에서 그 위기를 해소할 근본적인 해결책을 뭐라도 제시하지 않고 불사에 과하게 치중하여 국력 탕진을 가속화하는 등 여러 실책으로 인해 대중의 인식과 달리 학계에선 부정적인 평가가 압도적이다.[16][17]
- 진성여왕(887 ~ 897)◎: 흔히 매체에서의 언급 탓에 암군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기록만 가지고 마냥 암군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미묘한 게 사실이다. 오히려 그녀에게 실책을 일방적으로 다 떠넘겼다는 평가 역시 공존하는 중이며 더군다나 이 무렵의 신라는 이미 진성여왕 즉위 전부터 몰락하고 있었던 나라였다.[18] 다만, 중요한 인재활용에서 실패하였고 군사력 지지기반에서도 통치력 부재의 허약한 리더십을 가진 점과 농민들이 각지에서 못 살겠다며 난을 일으키는 혼란기였음에도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해 혼란상을 나 몰라라 하고 방치만 한 점은 명백히 쉴드 여지가 적은 편이다.[19]
- 경애왕(924 ~ 927)▲△◎ : 과거에는 한국사 대표 암군 중 한 명이라는 악평을 들어야 했지만, 제사 장소인 포석정에서 술이나 마시며 놀고 먹다가 후백제군에게 잡혀 견훤에 의해 억지로 자살했다는 부분은 왜곡이라는 견해가 많으며, 실상은 계절 문제로 간절히 제사를 지내다가 정보 부족으로 습격에 당한 것으로 보는 설이 많다. 다만 종교에 대한 의존으로 방어에 대한 대책 대신 포석정에서 신들의 가호를 비는 행사나 현실적인 대응 대신 무모한 외교 정책을 나서게한 점은 경애왕의 실책으로 본다.[20]
2.1.1.4. 고려
- 목종(997 ~ 1009)◆▲△◎: 초창기에는 적극적으로 통치하는 모습을 보이고, 업적도 많이 남기는 등의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자신을 지지해주어야 할 모후 천추태후가 김치양과 불륜을 저지른 걸로도 모자라,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를 왕위에 올리려는 짓 후계 문제가 발생했고, 이 문제는 대부의 기름창고에 일어난 불이 번져 천추전을 태운 사고로 인해 정치적으로 표면화됐다. 또 이 일 때문에 목종은 병이 나서 칩거한 채 궁궐을 폐쇄하고 정무를 보지 않아서, 정국의 혼란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21]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면과 수반된 은전의 내용과 성격 등이 당시 추진된 정책의 방향 등을 미리 제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심지어 내부 갈등으로 정권의 몰락까지 초래한 요인 등을 낳기도 했다.[22]
- 의종(1146 ~ 1170)▲△: 무신정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암군이라는 평가를 벗어날 수 없는 임금이다.[23] 그러나 의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더더욱 막장이었는지라, 의종 복위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었다는 게 아이러니다.[24]
- 충렬왕(1273 ~ 1298.3)(1298.10 ~ 1308)△: 원종대에 원 간섭기가 시작됐지만 그때까지는 외면적인 지배를 당했다면 충렬왕대에는 아예 원의 부마국이 되어 일본정벌에 동참하는 과정을 통해 원의 복속이 더욱 강화되어 갔다는 점과 카다안의 침입 당시의 행적 및 고려의 노비개혁을 반대했고, 원의 통해 왕권을 강화해 충렬왕 이후 고려는 원에 의존하는 자세가 더욱 심화되어 갔으며 고려 관원 또한 이에 대한 저항의식은 보여지지 않으며, 고려는 이제 내재적으로까지 원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25]
- 충선왕(1298)(1308 ~ 1313)△◎: 국정 전반에 걸쳐 강도 높은 개혁을 했지만 개혁안들을 정치세력과 연결시켜 경제현상을 정치사에 함몰시켰으며, 당시 개혁이 지녔던 한계로 인한 국정실패로 고려가 성장하기 못한 걸로 지적된다.[26]
- 충숙왕(1313 ~ 1330)(1332~1339)◎: 고려 국왕 중 정치적 시련을 많이 격었으며, 즉위 직후에는 부왕 충선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심왕옹립 세력 및 입성운동파 세력의 정치적 공격에 시달렸고, 내부적으로는 정치, 경제적 혼란을 마주하였다. 다만 인사정책을 통해 어느 정도 개혁을 한 긍정적인 면모도 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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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왕(1330 ~ 1332)(1339 ~ 1343)★▲△: 고려판
해릉양왕으로 온갖 난행을 펼치다가 원나라에 끌려가 죽었다. 사실 도덕적 측면에선 영락없는
사이코패스 왕이었지만, 21세기 들어선 정치 운영과 정책적 측면에선 또 일부 개혁적 요소도 있었다는 식의 약간의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하는 53권짜리 《한국사》 중 제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에 역대 '충(忠)' 자 돌림 왕들의 항목을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충혜왕에 대해서는 왕이 음행을 일삼았다는 사실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 운영과 정책 시행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 왕은 상업 활동의 진흥과 유통 구조의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했고, 사급전의 혁파 등 토지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28] 더불어 각종 세목을 신설해 권력층을 견제하였다.[29] 원의 간섭으로 폐위당한 경험이 있어 악소배를 비롯한 측근 세력을 광범위하게 형성하여[30] 왕권 강화를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원 세력인 기철, 고용보와 대립하게 되었다. 즉, 충혜왕의 개혁 시도는 전방위적으로 친원파들을 압박하는 것[31]이었고 고려 정국은 충혜왕파 대 친원파로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 같은 정치 상황 속에서 충혜왕은 고용보 등에 의해 체포당하여 원에 압송되었고 곧 악양현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했다. 기철 등 부원 세력은 충혜왕의 왕권 강화로 위축당하자 왕을 체포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위기 국면을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원으로서도 충혜왕의 개혁 정치가 원나라의 고려 종속 정책에서 일정한 수준 벗어난 것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즉 충혜왕의 폐위에는 원의 고려에 대한 종속 정책과 부원 세력의 정치적 이해 관계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원은 충목왕 즉위 후 충혜왕 대의 정치를 전면 부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왕의 폐위에 대한 고려 정치 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표방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사》 제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그가 이런 권력을 개인의 폭정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좀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용했으면 고려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저렇게 권문세족을 짓누르고 획득한 재정이나 권력을 백성을 위해서 썼다면 지지가 높았겠지만, 왕과 신흥 세력인 악소배들이 깽판치는데 사용해 버렸으니 백성들 입장에선 왕이나 권문세족이나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32] 그가 폐위된 것도 결국 자신의 행실로 인한 빌미를 스스로 제공한 탓이라고 본다면 굉장히 아쉬운 부분이다.
- 충정왕(1349 ~ 1351)★△◎: 난폭한 행동을 일삼는 폭정과 외척의 전횡으로 국정을 문란케 했다.[33] 다만 당시 충정왕은 나이가 너무 어려 스스로 정치를 주도해가지 못했고, 승자인 공민왕 측에서 폐위의 정당성을 위해 조작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는 반론도 있다.[34]
- 말년의 공민왕(1352~1374)★◆▲◎: 반원정책으로 고려를 개혁하여 각종 정책으로 망해가는 고려를 일으켜 세운 좋은 면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고려 말기의 인재들을 의심하여 함부로 숙청하거나 노국대장공주 사후에는 각종 기행과 난행으로 겨우겨우 일으켜 세운 고려의 멸망을 가속화 시킨 암군으로 전락한채 암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35]
- 우왕(1374 ~ 1388)★▲△◎: 정국운영 과정에서 자신을 추대한 측근 세력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인임을 중용해 대다수의 정치적 문제를 이인임에게 맡겼고, 이는 측근에 의한 정권 농단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게 된다. 최영이 정국을 장악했을 때도 우왕은 똑같은 방식으로 변화된 상황에 대처했다. 이는 우왕에게 있어 취약한 지지기반을 보완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나, 이러한 선택은 새로이 대두하고 있던 정치세력들과의 공조를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종국에 우왕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안겨주게 됐고, 특히 이 상태에서 요동 정벌을 무리하게 시도했다가 우왕대의 측근정치의 폐단으로 위화도 회군이라는 사건이 터져 우왕이 폐위되는 원인이 됐다.[36]
2.1.1.5. 조선
- 연산군(1494 ~ 1506)★△: 무오사화 이전까지만 해도 폭군은커녕 암군과도 동떨어진 군주였고, 무오사화 때 잠시 흔들리다가도 갑자사화 이전까지는 나름 진정되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갑자사화 이후 2년간 저지른 패악이 그 원인과 그 이전 10년의 행적으로도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37] 갑자사화가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수를 위한 것이라는 쉴드가 있지만, 이게 뭔가 말이 안 되는 것이 성종의 두 후궁은 윤씨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기록도 전혀 없으며[38], 조선 시대의 율법으로는 부친의 후궁 역시 모친과 같은 수준으로 대우해야 하므로 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것은 명백한 패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록상으로도 이미 연산군은 즉위 혹은 그 이전부터 모친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갑자사화는 윤씨의 죽음을 빌미로 양신을 숙청하고 전제권력을 얻기 위함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연산군은 전제권력을 거머줬기는 했지만, 권력을 무분별하게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놀아재끼면서 권력남용을 했기에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 및 시스템을 망가뜨렸고, 결국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연산군 시대가 조선 시절 전체 중에 가장 왕권이 강한 시기였던 만큼, 이후에는 군약신강 기조가 이어지게 된다[39]. 아이러니하게도 연산군은 폐비의 소생인데다가 이후 중전이 된 정현왕후가 중종을 낳았는데도 불구하고 즉위할 때도 모자란 데 없이 즉위하였다.
- 중종(1506~1544)◎: 재위 기간 내내 자신의 왕권 강화만을 위해 조광조, 김안로 등의 공신들을 꼭대기에서 고꾸라뜨리는 권력 암투에만 골몰하였다. 조광조와 김안로의 행적에 관해서는 설왕설래가 있지만, 권력의 최정점에서 한순간에 고꾸라트리는 식의 권력 암투로 인해 중종 재위 내내 수많은 사화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중종은 폭군의 대명사인 이복형 연산군보다도 훨씬 더 많은 신하들을 죽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 복성군까지 죽이기까지 했다.[40] 중종 뿐만 아니라 당시 사대부들의 인식으로는 몰랐겠지만, 연산군 대에 개발된 연은분리법을 폐지한 것은 일본의 경제력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는 나비 효과가 되어서 돌아왔다. 어쨌든 자신의 아버지인 성종을 본받겠답시고 《 동문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覧)》, 《 대전속록》을 각각 《 속동문선》, 《 신증동국여지승람》, 《 대전후속록》으로 이른바 속찬증보(續撰增補)[41] 한 것 정도의 업적은 남겼다. 이 시기에 강원도 양전이 1522년(중종 17년, 중종 17년 11월 30일), 전라도 양전이 1524년(중종 19년, 중종 19년 12월 28일 1, 중종 19년 12월 28일 2), 평안도 양전이 1544년(중종 39년, 중종 39년 12월 28일)에 이루어졌다.
- 선조(1567 ~ 1608)◆[42]◎: 그나마 왜란 종결 후 여민휴식(與民休息)이라는 기조를 내세워서 토지 복구, 국가 재정 감축, 세금 감면 등을 행하기는 했으나 당장의 성과를 낼 수 있는 기발한 정책을 내놓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후 현종 대에 숙종 대에 입안 절수(立案折受) 규제 강화[43]와 같은 선조 대에 규제 완화[44]의 부작용들을 수습하기 위한 해결책들을 제시해야 했던만큼 세부계획에 있어서 치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장기적으로 성과를 내기에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이거나 하는 대안을 선조 대에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이후에 실시된 대동법 같이 국가의 구조적 문제를 직접 건드리는 대안을 제시하고 제대로 실시한 적은 선조 대에 전혀 없었다.[45][46] 어떻게 보면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고상하게 돌려서 이것을 원칙으로 간주하겠다고 승인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선조라는 왕이 집권한 동안에는 무엇인가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온 개선책이 실시되고 성과를 낸 적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전란 전에는 원칙이 없었고[47] 전란 후에는 그나마 여민휴식(與民休息) 같은 그것 자체로는 합리적인 원칙을 제시하기는 했으나 세부계획이 뻔하고 허술해서 민간의 자생능력에 대부분 의지하는 것이 사실상 전부였다.[48] 업적이 없는 것이야 관대하게 넘어가 줘서 그렇다고 치더라도 조선 정부의 세제나 세수구조가 어떠한지 파악조차도 못하고 조선이라는 국가 전체의 가난으로 치환하는, 그것도 심지어 수백 년 전의 고려와 비교하며 한탄하는 그 유명한 망언[49][50]을 보면 도첩제 존폐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은 연산군만도 머리는 좋기라도 한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51] 정책적 성과를 내는 능력은 하다못해 중종, 명종 부자보다도 좋다고는 할 수도 없고[52] 출범 이후 아무런 일도 제대로 못해본 정공도감(正供都監)을 스스로 날려먹은 것을 보면 이정청(釐整廳) 설치 그리고 이정절목(釐整節目) 도출까지는 어떻게 이뤄낸 철종만도 한참 못하다. 그나마도 앞서 언급한 왕들조차도 전혀 명군 축에 못 드는 범부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머리를 따지기 이전에 그냥 사람 자체가 왕으로서 거의 전적으로 문제해결력이 없다시피 극도로 무능했는데 전제군주제 사회라서 자동으로 왕 자리를 거저먹은 폐혜가 아닌지 의심을 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광해군(1608 ~ 1623)★△◎: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연산군과 더불어 폭군으로 여겨져 왔고, 근현대에 와서는 재평가의 기류도 많았으나, 결국엔 연산군 급은 아니더라도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평이 다수다.[53] 세자 시절 광해군은 임진왜란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줌으로써 명군의 재목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는데,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54] 열심히 국가를 말아먹었고 결국은 폐출됐다. 따라서 광해군이 무익한 암군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긍정적인 총평을 내리기엔 대단한 무리가 있다. 특히 내정에서 가혹한 궁궐 공사로 재정파탄을 초래했으며, 세자였을때와 달리 민간 사회의 복구에 별 관심을 주지 않았고, 대동법 같은 산업 혹은 구휼 정책 확대에 대체로 반대를 해왔으며,[55][C] 많은 신하들과 왕족을 죽이는 옥사를 벌이고 국가를 망가뜨렸다. 특히 영창대군을 무리하게 죽이는 등 패륜을 일삼았고 간신배들을 끼고 살며 그 똥물에 본인도 자멸했다. 세자 시절의 활약으로 국민 영웅에 가까운 평가를 받고 왕위에 올라 존호가 전체 조선 국왕 중 가장 긴 48자나 될 정도로 왕권이 안정적이었음에도 방계이자 별다른 능력도 없는 인조에 의해 폐위되었다는 것은 광해군의 폭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방증한다. 그럼에도 최근 일각에선 임진왜란을 비롯해 이순신 등을 주제로 한 영화 및 드라마가 성행, 전술한 선조의 의심병 말기 환자짓이 대중들에게 제대로 각인되었고, 마치 사도세자의 비극과 같은 류로 광해군도 저것에 악영향을 받은 바람에 미쳤을 것이라는 동정 여론도 많이 생겨났으나, 후대나 선대에 비해서도 더 나쁜 암군 / 폭군이라는 평을 피하기 어렵다.
- 인조(1623 ~ 1649)◎: 다방면으로 말아먹었지만 특히 외교적 측면에서 실책(=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많이 저질렀다는 평가가 있다. 외교적 문제가 발생했는데도 인조와 그의 신료들이 국가위기시에 요청되는 공론정치의 적극적 측면을 이용하지 못했고, 신하들이 소극적으로 자문만하거나, 전쟁이 임박해 있는 데도 시비의 문제를 따지며 회의만 거듭하는 우유부단함을 보이곤 했다.[57] 또한 아들인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의심하여 잔인하게 학대했다. 다만 민생 구휼에 힘쓰는 태도를 보여서 기우제를 친제하거나 내탕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하는 등의 행위는 민생 구휼에 인조가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기록이 있어 이러한 상황은 인조대 진휼청의 역량이 향상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는 업적은 남겼다.[58]
- 순조(1800 ~ 1834)◆◇: 세도정치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여 삼정의 문란을 방치한 왕으로 평가된다. 사실 순조는 인간적으로는 호인이었고, 정치적으로도 어지러운 시국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어느 정도 개혁의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였던 영조와 아버지 정조에 의해 만들어진 강력한 왕권에만 의존된 정국을 어린 순조는 잘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홍경래의 난을 계기로 지쳐버려 이후 정치적 식물인간이 되어 수십년간 정무에 손을 놓아버렸다.[59] 애초에 순조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문제가 심각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홍경래의 난 이후 순조는 정신 건강을 해치게 되어 국가운영에 일관성을 잃게 되었고, 11년경에는 결국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후 12년 3월에 회복은 되었으나 정치력의 복구는 이루지 못하여 이전까지의 그의 노력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60] 자연재해, 홍경래의 난, 안동 김씨의 발호, 건강 악화 등을 겪은 순조는 1814년(순조14) 이후 국정에서 한 발 물러섰다. 신료들이 순조에게 적극적으로 국정에 임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순조는 이후 10년이 넘도록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1819년(순조 19) 임선(任㸁)은 상소에서 임금이 너무 침묵을 지켜 이해와 공사(公私)의 분별이 권력자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결재가 밑에서 처리된다고 비판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순조는 별다른 입장을 취하지 않았고 임선은 조정 신하들을 없애려 한다는 반격을 받아 유배당했다.[61] 계속 건강이 나빠지면서, 순조도 본인의 문제를 자각은 하고 있어 나중에는 아들인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는데 원래 대리청정을 맡기면 신하들이 형식적으로라도 반대를 하겠으나 이 때는 신료들 모두가 이 대리청정을 환영할 정도로 당시 조선은 왕권의 권위 공백의 문제가 심각하였다. 왕권에 의해 돌아가는 나라에서 왕이 정무를 이런식으로 아예 던져버리자 외척이 거대한 왕권을 손에 넣고 나라를 뒤흔드는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고, 조선은 본격적으로 몰락한다. 물론 고조할아버지 숙종 이래로 직계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운영체제에서, 험난한 정치적 풍파와 여러 암살 위협 속에서 살아남아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영조, 정조와는 달리 순조는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즉위하여 초기부터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를 시작했다는 핸디캡이 있었다. 그래서 적절한 타이밍과 시절만 잘 만났더라면 암군 정도까지 평가받을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동정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세도 정치의 씨앗을 남긴 부왕 정조도 최근 들어서는 평가가 나빠지고 있다.[62] 어쨌든 결과적으로 순조는 유능한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조선 몰락의 시초를 제공한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기다 자신의 왕위를 이어받아야 할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도중 23세에 요절한 것도 이에 영향을 미쳤다.
- 고종(1864 ~ 1907)◎: 우유부단하고 사실상 조선(대한제국)을 멸망시킨 망국의 군주라고 까이기도 하고, 선대들의 실책을 떠안은 채 나름 독립을 위해 힘을 쓴 비운의 군주라고 동정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고종은 장성했음에도 계속 국정대리인으로써 활동하려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못 마땅해 하였고 이에 자신의 아내인 중전 명성황후의 친인척인 여흥 민씨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아버지에 맞서기 위해 그들을 끌어들였다. 흥선대원군은 결국 중립파와 여흥민씨 일파의 단합으로 강제로 물러나갔으나 안동김씨처럼 자리를 잡은 여흥민씨들과 다양한 정치세력이 공존할 수 있는 체제를 구상하지 못한 고종의 한계로 인해 여흥 민씨 세력이 개항 이후 권력을 독점해 국왕이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 실책을 저지른 점이 있다.[63]
2.1.2. 중국사
2.2. 유럽
- 러시아 제국
- 표트르 3세(1762)▲△◎: 7년 전쟁의 결과를 완전히 엎어버린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만으로도 암군의 자격이 충분하다. 다만 조너선 듈(Jonathan Dull)과 같은 근대사학자들의 최근 견해에 따르면, 표트르 3세가 외교상으로 실용적인 판단을 했다는 견해가 중론이다. 1762년 러시아가 패색이 짙어진 프로이센에 대한 적대적인 입장을 계속 유지했을 경우엔 프로이센이 완전히 패망할 것은 기정사실이었고, 이렇게 되면 프로이센은 당시 폴란드처럼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영토가 분할당해 과거의 패권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프로이센이 몰락한다는 것은 곧 중부유럽에서 오스트리아가 단일 강국으로 부상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것은 더 나아가 유럽 대륙의 힘의 균형을 붕괴시킬 수도 있는 문제가 되었다. 또한, 러시아 역시 비대해진 유럽 영토를 노리는 오스트리아-프랑스를 비롯한 중서부 유럽 세력과 각축전을 벌여야 하는데다, 비록 결과적으로 참전하지 않았다지만, 당시엔 그것을 몰랐을테니 오스만 제국의 참전도 경계할 필요성이 높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너무 호구처럼 다 내줘서 그렇지(...) 어느 정도는 아예 납득 불가능한 결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표트르 3세는 어느 정도는 비운의 개혁군주로 재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황태자 시절부터 종교의 자유를 법으로 보장하는 것을 비롯해 서유럽식 자유화를 추진하고 싶어 했던 그는 짧은 재위 기간에 220개가 넘는 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비밀 경찰제 폐지, 왕실지 내 농민 대우 개선, 농노 대우 개선, 귀족들의 해외 여행 자율화, 귀족들의 의무교육제 도입 등, 불과 재위 6개월 동안 220개 가까이 되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 때문에 수구적인 러시아 귀족들의 반발을 받아 폐위되었다는 시각도 있다.[65] 그를 폐위하고 즉위한 아내 예카테리나 2세가 계몽군주를 표방하여 개혁정책을 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정책에서 반동적인 면모를 보인 것도 그녀가 귀족들의 눈치를 보며 정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3. 가상의 암군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암군/창작물]
[1]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쇼군이 아니었다.
[A]
당연하지만 이런 군주는 어쩔 수가 없다. 장애에 의한 실수 또는 무능을 일방적으로 탓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A]
[4]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태조대왕
[5]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태조대왕
[6]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미천왕
[7]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무령왕 4번 항목
[8]
安原王代의 政局 運營과 大對盧 爭鬪
[9]
평원왕대 정국 운영의 특징과 그 함의
[10]
618-629년 영류왕의 대외정책과 고구려-당ㆍ신라 관계의 변화
[11]
고구려 영류왕 후기 대외정책의 변화와 연개소문의 정변
[12]
다만 장군으로써의 능력과 군주로써의 능력은 별개이다.
[13]
개로왕의 왕권강화와 국정운영의 변화에 대하여
[14]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동성왕
[15]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의자왕
[16]
조원숙, <
新羅 善德王代 度僧 施行과 佛敎政策> (2009)
[17]
서영교,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
[18]
신라 진성여왕대의 재이와 농민반란
[19]
신라시대 선덕, 진덕, 진성 여왕의 정치리더십 비교연구
[20]
신라의 멸망과 朴氏王家
#,
##
[21]
고려 초 康兆의 政變과 中臺省의 등장 — 선휘원·은대와 중대성의 치폐과정에 담긴 의미 —
[22]
고려 목종·현종대 실시된 사면과 은전의 내용 분석과 그 특징
[2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2. 귀족사회의 전개와 동요 4) 의종대의 정치혼란
[24]
그 예가
김보당의 난. 주도자인
김보당의 경우 평소 의종의 실정에 비판적인 인물이라서 무신정변 당시에는 무사했었던 것이다.
[25]
원 간섭기 원종ㆍ충렬왕의 정치적 행적
[26]
고려 충선왕의 정치개혁과 元의 영향
[27]
고려 충숙왕대 인사정책 연구: 재추의 관직겸임 양상을 중심으로
[28]
고려 후기에 친원파
권문세족이 전국의 땅을 집어먹은 상태에서 왕들은 토지개혁 부문에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걸 건드리는 건 기존 권력층한테 "한번 겨루어볼래?"라고 파이트 신청하는 거랑 다를 게 없다.
[29]
당시 권문세족 농장은 면세 면역이었다.
[30]
이 부분이 진짜 독특한 건데, 우리 역사상
왕권을 강화할 때
임협 집단을 이용하는 경우는 없다. 보통 기존 권력 집단과 타협, 흡수하거나, 시종 공신들을 낙하산으로 투하한 다음 권력을 밀어줘서 거물을 만들거나, 통혼을 통해 처가빽을 만들거나 친가빽을 만들어 동원하지, 천한 건달, 조직들을 끌어들여 왕권 강화한 건 충혜왕이 처음이다. 중국에서는
전한 고조 유방과 명 태조
주원장의 사례가 있긴 한데, 그 쪽은 아예 출신이 임협집단이니 같이 시작한 인재들도 그 쪽 출신인 것이었다.
[31]
쉽게 말해 기존 친원파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권과 유통 구조를 탈취하고, 토지를 집어먹는 수단을 없앴으며, 보란듯이 권문세족들에게만 적용되는 세금을 걷는 데다 자기들하고 통혼 같은 걸로 타협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왕이었다. 때마침 친원파들의 음행이 심하다 하니 왕이 그들을 제거할 명분은 충분했다.
[32]
물론 어느 정도 충혜왕에게 불리한 기록만 남았을 공산도 있지만, 저 재평가 역시 남은 기록을 통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33]
원의 쇠퇴와 공민왕의 반원정책
[34]
한국사 연대기
[35]
고려사
[36]
한국사 연대기 > 고려 > 우왕
[37]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2. 사림세력의 진출과 사화 4) 갑자사화
[38]
게다가 애초에
성리학 군주 끝판왕인 성종이 엄연히 왕위에 앉아 있는 마당에 후궁 주제에 중전인 윤씨한테 감히 대들었다가는 그 즉시 끔살 당했을 것이다. 당장 후궁은 자신의 친자한테도 무조건 존칭을 써야 했다.
[39]
다만,
조선이 워낙 왕권이 강한 나라다보니,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군약신강 기조가 된 것일 뿐이다. 때문에,
효종 시기부터는 다시 왕권이 강해지기 시작해서,
숙종 시기부터
정조 때까지는
연산군과 맞먹는 수준의 절대왕권이 구축되었다. 대중들이 생각하는 진짜 군약신강 기조가 나타난 것은
철종 대부터다.
[40]
패륜의 대명사인 증조부 세조와 이복형 연산마저도 자신의 친자식들은 끔찍히 아꼈다. 애초에 왕이 공식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죽인 것은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와 중종 단 둘밖에 없다. 그나마 자식을 굉장히 미워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인조까지 셋이다. 소현세자는 청이 소현과 원손들을 볼모로 인조의 왕권을 위협했고, 사도세자는 아예 정신병자가 되어 도저히 왕위를 이을 수 없는 상태였다. 물론 따지고 보면 이런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도 인조, 영조의
자업자득이다 그런데 복성군은 어떠한 이유도 없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아 죽은 셈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적장자 인종이 18세로 성년이었기에 혈통 면에서 밀리는 복성군을 죽여야만 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41]
중종대(中宗代) 속찬증보(續撰增補) 사업과 그 정치적 함의
[42]
임진왜란 이전부터 심질(心疾) 즉
조현병이 있다고 스스로 고백했고, 날이 갈수록 증세가 점점 심해졌다.
#
[43]
현종 3년 9월 5일,
현종개수 3년 9월 5일,
현종 4년 4월 13일,
현종개수 4년 4월 13일,
현종 4년 9월 18일,
현종개수 4년 9월 18일,
현종 9년 4월 13일,
현종개수 9년 4월 13일,
비변사등록 숙종 14년 1688년 04월 15일 (음)
[44]
인조 1년 8월 10일,
인조 1년 윤10월 28일,
인조 1년 12월 7일,
인조 3년 11월 24일,
인조 4년 2월 11일,
인조 4년 2월 13일,
인조 4년 3월 16일,
인조 4년 12월 13일,
인조 14년 8월 1일
[45]
율곡 이이는 명종 대에 발생한
해주의 수미법(收米法)으로 불렸던 사대동(私大同)을 본떠서 공물작미(貢物作米) 그리고 공안개정(貢案改正) 등의 대책을 주장했고, 류성룡은 이를 거의 받아서 이를 실현하려 했으나 애초에 1결당 1두만 걷어도 될 정도로 공물부담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해주의 사정이 전국에 적용될 리가 만무했고 그마저도 중앙으로 들어온 얼마 안 되는 쌀은 군량으로 대기에 급급했다. 건의한 류성룡은 몰라도 군량 부족과 같은 매번 그때그때 벌어지는 단기적인 문제외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선조에게 '공납제 폐단을 개선하겠다.' 같은 식의 장기적인 정책 목표에 대한 관념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전혀 성과를 얻지 못한채 공납제 폐단을 개선하는 수단인 공물작미(貢物作米)에 대해서는 이후로도 선조가 떡먹다가 죽을 때까지 거의 15년간 논의 자체도 전혀 진전이 없었다.
[46]
이것이 제대로 시행된 것은 광해군 즉위 직후 이원익의 건의로 이루어진
경기선혜법이라는 경기에서의 시범사업이 처음이었다. 단지 왕 하나 바뀌었는데 어느 관서가 재원을 관리할 것인지 어느 관서의 누가 경각사(京各司)의 공물 납입 담당자인지 누가 경각사(京各司)에 직접 공물을 납입할 것인지 사주인(私主人)을 인정할 것인지 같은 주요 쟁점이 이전에는 전혀 논의 자체가 안 되다가 이 정도 성과를 집권 몇년 만에 바로 얻어낸 것이다. 다들 개혁 주장하는 와중에 말해봐야 씨알도 안 먹히는 무능하고 수구적인 왕 하나가 개혁의 걸림돌로 40년 동안 죽지도 않고 있었으니까 이원익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도 어찌보면 당연했다.
선조 29년 10월 21일 딸깍 버튼 한번 누를 의지조차도 없는 그야말로 무능의 극치였다.
[47]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
[48]
물론 광해군 대에 보듯 '그 시간도 됐고 궁궐이나 짓겠다'라는 발상보다야 나았다고 할 수 있겠다.
[49]
선조 38년 9월 28일 당연히 조선이 고려보다 부유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데 조선초기 농업생산량 증가와 사회의 안정화로 인한 인구증가로 국가생산은 크게 증가했고 여러가지 폐단으로 골머리를 앓던 선조시기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무정부상태에 가까웠던 고려말기보다는 정부재정도 튼튼했다고 봐야 한다.
출처
[50]
임진왜란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3~400명으로 조선군 1만을 대적할 수 있다는
여진족(여진족 1명당 조선군 25~33명에 대적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들이 3만(앞의 기록을 감안하면 사실상 75만~99만에 달하는 대군이다.)대군으로 공격해온
니탕개의 난을 결과적으로 막아낼정도는 되었다. 강대국 명나라가 건국 100년도 안 되어서 2만 정도 적들에게 50만 대군이 참패한
토목의 변같은 굴욕을 겪은걸 생각하면 조선은 200년간 여러가지 폐단으로 군사력이 약해졌음에도 상당히 선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업적은 병조에서 이이가 해낸 것으로, 선조는 이이의
십만양병설 같은 국방 강화 대책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동시기 1억이 넘는 인구대국 명나라가 장부상 병력 300만이 무색하게
사르후 전투에서 10만 동원하는 것도 버거워했던 것에서 보이듯이, 전근대 농업국가가 이전부터 이어져오던 폐단들을 전부 해결하고 국가의 모든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건 불가능했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그러나 나라가 가난하고 약하다고 불평부터 하는 것이 지도자의 자질이 훌륭했다고는 할 수 없으니, 이는 선조의 '남탓' 버릇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말이라도 최대의 책임감으로 진력하여 나라를 살리려 애썼는데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해 한탄한 군주라면 평가가 달랐으리라.
[51]
연산 2년 1월 3일
[52]
선조(조선)/평가/부정적 평가/치세의 핵심 업적이 부족하다는 견해
[53]
재위 4년까지는 괜찮았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광해군의 재위기간이 15년이 되는데 거의 재위기간 약 3분의2, 즉 11년 동안 막장 암군/폭군 짓을 한 것
[54]
선조의 찌질한 견제와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광해군의 흑화에 한몫했다는 의견도 있다.
[55]
다만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 같은 업적 이후 백년간 개혁의 효시가 되었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C]
[57]
10년 간의 위기: 정묘-병자호란기의 공론정치 비판
[58]
인조(仁祖)대 재이(災異)에 대한 인식과 대응
[59]
순조대 전반기 정국 변동과 의리론의 추이
[60]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2. 세도정치의 전개 > 1) 순조대의 세도정치 > (2) 순조 친정 초기(순조 4년∼11년)
[61]
순조(純祖) 19세기 전반, 세도 정치 극복에 실패하다
[62]
정조가 비상한 두뇌를 가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똑똑하다고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는 법이다.
[63]
고종의 친정체제 형성과 그 성격
[64]
만력 전반기 명의 정세와 임진전쟁 참전과정
[65]
Reform and Regicide: The Reign of Peter III of Russia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