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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1 18:14:31

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르

파일: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르.jpg
이름 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르
Fernando Sánchez de Tovar
출생 미상
카스티야 연합 왕국
사망 1384년
대서양 해상
아버지 루이 페르난데스 데 토바르
어머니 엘비라 루이스 카베자 데 바카
아내 멘키아 데 파디야
자녀 후안 페르난데스 데 토바르
직위 카스티야 해군 제독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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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스티야 연합 왕국 제독. 잉글랜드와 포르투갈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생애

레온 왕국에서 활약했던 토바르 가문 출신인 루이 페르난데스 데 토바르와 엘비라 루이스 카베자 데 바카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1355년 1월 5일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에 의해 라 메스타 협의회의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1359년 페드로 왕과 아라곤 국왕 페로 4세간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갤리선 선장으로서 해군 원정에 참여했다. 1366년 엔리케 2세와 페드로의 내전 당시 엔리케 2세를 지지하기로 마음먹고, 칼라호라 시를 그에게 넘겼다. 1367년 나헤라 전투에 참전했고, 패배후 엔리 2세와 암브로시오 보카네그라와 함께 아라곤 왕국으로 도피했다. 1369년 몬티엘 전투에서 페드로를 굴복시킨 엔리케 2세가 카스티야 국왕에 복위한 뒤 과르다 시장과 겔베스 영주에 선임되었다.

1368년 11월 20일, 엔리케 2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와 톨레도 조약을 체결해 카스티야 해군을 프랑스에 지원하기로 했다. 1373년, 페르난도는 갤리선 15척을 이끌고 브레스트를 포위하는 프랑스군을 지원했다. 그 결과, 브레스트 시는 1373년 8월 6일에 함락되었다. 1374년 9월 22일 카스티야 해군 제독 암브로시오 보카네그라가 사망한 뒤 세고비아에서 왕의 특허를 받고 카스티야 해군 제독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에 갤리선 15척을 이끌고 잉글랜드 해상으로 쳐들어간 그는 포르투갈 5척, 장 드 비엔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와 합세한 뒤 와이트 섬과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잇따라 습격했다. 1375년 장 드 비엔의 함대에 합류한 그는 3월 21일 생소뵈르르비콩트 포위전을 치르는 프랑스군을 지원해 공략에 기여했다.

1375년 6월 27일, 잉글랜드와 프랑스같의 브뤼헤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해군 작전은 그대로 이어졌다. 1375년 8월 10일, 부르뉴프에 있던 여러 카스티야 선박이 잉글랜드군의 공격을 받고 침몰되거나 나포되었고, 여러 선원이 살해되었다. 1377년 6월, 페르난도는 이에 보복하기 위해 갤리선 13척을 이끌고 아르플뢰르로 항해해 장 드 비엔과 합세한 뒤, 잉글랜드 해안의 여러 항구에 병사 5,000명을 상륙하려 했다. 그해 6월 29일 라이 마을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뒤이어 로팅딘을 급습해 약탈을 자행하고 루이스 수도원장을 살해했다. 7월 20일 포크스톤을 파괴했으며, 뒤이어 포츠머스, 다트머스, 플리머스를 습격했다. 7월 28일, 프랑스-카스티야 연합 함대는 재보급과 원정 재개를 위해 아르플뢰르로 귀환했다. 3주 후, 장 드 비엔과 페르난도는 와이트 섬으로 공격해 약탈을 자행했지만, 수비대가 성을 끼고 결사적으로 저항하자 물러났다. 이후 함대는 윈첼시 항을 공격하는 편대와 헤이스팅스 및 폴을 공격하는 편대로 나뉘었다. 윈첼시는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헤이스팅스와 폴은 약탈당했다.

1379년 5월, 엔리케 2세가 사망했다. 뒤이어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 후안 1세를 그를 카스티야 제독에 계속 선임했다. 1380년 여름, 샤를 5세가 카스티야 사절과 협정을ㅇ 체결한 후, 새로운 프랑스-카스티야 연합 합내가 잉글랜드 해안을 공격하기로 했다. 페르난도는 갤리선 20척을 이끌고 세비야에서 출발해 7월 8일 라 로셸에서 프랑스 제독 장 드 비엔을 만났다. 그들은 먼저 윈첼시로 가서 적 함대를 격파하고 아르플뢰르로 귀환해 선박과 승무원을 보급받은 뒤 런던을 공격하기로 했다. 8월 24일, 그들은 아르플뢰르에서 출항한 뒤 템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런던 외곽의 그레이브센드 마을을 급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측이 갤리선 2척을 템즈 강에 가라앉혀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게 막아놓고 항전하자 철수했다.

1380년 7월 15일,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는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와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그들은 다음 해 여름에 잉글랜드군이 포르투갈에 상륙하여 포르투갈 국왕이 모집한 군대와 합세한 뒤 카스티야를 침공하고,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위에 오르게 하기로 했다. 우너정대 지휘관은 곤트의 존의 형제이자 케임브리지 백작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에게 맡겨졌다. 1381년 6월 12일, 포르투갈 해군 제독 주앙 아폰수 텔로는 갤리선 21척, 나오 4척을 이끌고 리스본에서 출항해 카스티야 함대를 파괴하려 했다. 한편 페르난도는 갤리선 17척을 이끌고 세비야에서 출항해 케임브리지 백작의 군대를 수송하는 잉글랜드 수송선을 파괴하려 했다.

1381년 6월 17일, 두 함대는 알가르베 인근에서 조우했다. 페르난도가 휘하 함대를 이끌고 세비야로 귀환하자, 주앙 아폰수 텔로는 적이 도망친다고 믿고 추격했다. 그러나 기동성이 좋지 않았기에 갤리선 10척이 뒤쳐졌다. 그걸 목격한 페르난도는 우엘바 인근의 살테스 섬 부근에서 뱃머리를 돌린 뒤, 석궁병이 화살을 효과적으로 퍼부을 수 있도록 갤리선을 비스듬하게 배치하도록 했다. 이후 벌어진 살데스 섬 해전에서, 카스티야 함대는 완승을 거두었다. 포르투갈 갤리선 1척만 겨우 빠져나왔고, 나머지 배는 나포되거나 침몰했으며, 주앙 아폰수 텔로는 생포되었다. 페르난도는 대승을 거둔 뒤 세비야로 귀환했다.

한편, 랭글리의 에드먼드는 별다른 방해 없이 리스본에 상륙했다. 그러나 페르난도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갤리선들을 이끌고 타구스 강 어귀를 봉쇄하면서, 잉글랜드군은 카스티야 선박들이 악천후로 인해 철수한 12월 중순까지 항해할 수 없었다. 1382년 봄, 페르난도는 다시 함대를 이끌고 리스본 앞에 섰고, 칸타브리아 해 항구에서 파견된 선박 26척과 합류했다. 그들은 적 선박 요격에만 국한되지 않고 리스본 외곽과 엠브레가스, 프리엘라스, 빌라노바, 팔멜라, 알마다 등 인근 마을에 상륙하여 가옥, 과수원 및 농작물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그러던 중, 후안 1세는 플란데런 반란군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던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로부터 플란데런 선박들을 공격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후안 1세는 이에 따르기로 하고, 페르난도 휘하 장성인 페르난 루이즈 카베자 데 바카 휘하 함대를 파견했다.

1382년 8월 10일, 페르난두 1세와 후안 1세가 엘바스 평화 협약을 맺었다. 페르난두 1세는 양국의 화해를 위해 외동딸 베아트리스를 후안 1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이때 맺은 결혼 조약에 따르면, 페르난두 1세가 남자 아이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 포르투갈 왕위는 베아트리스에게 넘어가고 그녀의 남편은 포르투갈의 왕을 칭할 수 있지만 실제로 통치를 하지는 않고 베아트리스의 어머니 레오노르 텔레스가 섭정을 맡기로 했다. 또한 베아트리스가 낳은 자식은 포르투갈 왕국을 물려받지만,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왕위는 후안 1세에게 돌아가며, 그 다음엔 후안 1세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엔리케 왕자에게 넘어갈 것이었다. 1383년 10월 23일 페르난도 1세가 사망한 뒤, 베아트리스가 포르투갈 여왕이 되었다.

후안 1세는 베아트리스와 자신을 포르투갈의 통치자로 선포하는 내용의 선언서를 포르투갈 전역에 보내고 알폰소 로페스 데 테하다를 포르투갈 총독으로 선임해 리스본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이 훼손될까 두려웠던 포르투갈 상인 계급은 자국이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백성들을 선동해 11월 말부터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1383년 12월 6일 아비즈의 영주이자 페르난두 1세의 이복 동생인 주앙이 포르투갈의 섭정 레오노르의 애인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를 암살하면서 반란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알바로 파리스의 선동에 넘어간 백성들이 리스본에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카스티야의 앞잡이로 간주된 리스본 주교 마르티뉴 아네스(Martinho Anes)를 살해한 뒤 주앙 왕자를 지도자로 옹립했으며, 포르투갈 제독 란사로테 페사냐도 베자 시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키고 포르투갈 국왕을 자칭했다.

레오노르 텔레스가 산타렝으로 도주한 뒤 도움을 요청하자, 후안 1세는 포르투갈을 정벌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친히 육군을 이끌고 리스본으로 진군했고, 페르난도는 해상 봉쇄를 위해 대서양으로 진군했다.( 리스본 공방전) 페르난도가 리스본 해안을 봉쇄하고 있던 1384년 6월 17일, 루이 페레이라가 지휘하는 포르투갈 함대가 접근했다. 당시 포르투갈 함대는 선봉대 5척, 중앙에 보급품을 실은 선박 12척, 후면에 갤리선 17척으로 구성되었다. 카스티야 함대 최고 사령관 아판 데 리베라는 타구스 강어귀에서 적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요격하자고 제안했지만, 페르난도는 넓은 바다에서 요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논쟁은 후안 1세가 개입해 아판 데 리베라를 지지하면서 해결되었다.

1384년 6월 18일, 타구스 강 어귀에서 해전이 벌어졌다. 그 결과, 카스티야 해군은 적선 4척을 침몰시키고 적병 2,000명을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포르투갈 수송대가 봉쇄를 돌파하고 리스본에 필요한 식량과 보급품을 전달했다. 그 후 주앙이 반격을 개시해 타구스 강 좌안에 있는 알마다 성을 공략했다. 이에 페르난도는 갤리선 16척을 비롯한 함대를 이끌고 해상에서 리스본을 향한 공성전을 벌였다. 그러나 리스본 수비대는 강력히 저항해 이 공격을 격퇴했다. 이후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이들이 쓰러졌는데, 페르난도 마저도 전염병에 걸렸다. 8월 17일, 후안 1세로부터 세비야로 물러나라는 지시를 받은 페르난도는 세비야로 이동하던 중 기함인 산 후안 데 아레나스에서 병사했다. 그의 유해는 세비야로 옮겨진 뒤 산타 마리아 대성당의 산 클레멘테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페르난도는 생전에 엘비라 루이스 카베자 데 바카와 결혼해 후안 페르난데스 데 토바르를 낳았다. 후안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카스티야 제독이 되었지만, 1385년 8월 14일 알주바호타 전투에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