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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18:21:28

행주 기씨

1. 행주 기(奇)씨
1.1. 실질적인 기원1.2. 족보상의 시초 (기자~기우성~기순우)1.3. 족보 재정립 후 역사 (기순우~기찬)
1.3.1. 기황후 기철로 인한 위기
1.4. 기찬 이후1.5. 기타1.6. 실존 인물
1.6.1. 발해1.6.2. 고려1.6.3. 조선1.6.4. 대한민국1.6.5. 북한
2. 행주 기(箕)씨

1. 행주 기(奇)씨

{{{#!wiki style="margin: -15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160><tablebordercolor=#FFD700> 幸州 奇氏
행주 기씨
}}}
관향 <colbgcolor=#fff,#191919>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
시조 기우성(奇友誠)
중시조 기순우(奇純祐)
집성촌 황해도 금천군 좌면 암사리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 향산리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신풍2리
전라남도 장성군 동화면, 황룡면
전라남도 무안군 운남면 연리
경상북도 경주시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나정리
인구 27,379명(2015년) | 국내 81위
링크 행주기씨 대종중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등과 함께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리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들 중 하나.

고려시대 행주현(幸州縣)(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유명한 인물로는 원나라 혜종의 황후 보현숙성황후 기씨(기황후), 기황후의 오빠인 부원배 기철, 성리학자 기대승, 시인 기형도, 축구선수 기성용 등이 있다.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와 동본이라는 전승이 있다.

본관이 행주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는 중부지방을 기반으로 분포해 있었으나, 중종(조선) 대에 관직에 진출해 있던 13세손 기준이 스승이었던 조광조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교살당하면서 원래 그리 많지 않던 일족의 대부분이 지방, 특히 처가나 외가 쪽의 인척관계를 통해 지방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호남지역으로 피신했던 기준의 형 기진의 아들인 기대승이 다시 가문을 일으켜세워 번성하게 되었기에 현재의 지역별 분포를 보면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장성군에 압도적으로 많다.[1] 특히, 광주광역시 중에서도 광산구 임곡동에 가장 많이 자리했는데, 그 지역 유지(임곡농협 조합장, 임곡중, 광일고등학교 설립자 등)들이 전부 기씨일 정도이다. 경상북도로 이동한 집단도 있어 고령군 경주시에도 집성촌이 있다. 그 외에 북한 지역에도 기씨들이 꽤나 번성했는데 대체로 황해도 지방에 집성촌이 있다.

현재 인구는 2015년 기준 27,379명이다.

1.1. 실질적인 기원

고려사 등의 기록을 되짚어보면 고대의 기자에 대한 기록 이후 기씨가 역사서에 처음으로 등장한 건 일리천 전투(936년 9월)에 고려군 본대 좌강(左綱)[2]의 지휘관으로 참전한 원윤(元尹)[3] 기언(奇言)이 최초이다. 또한 944년에 건립된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寧越 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에 마찬가지로 원윤의 품계를 가졌던 기오(奇悟), 기달(奇達)이라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참고로 이 탑비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거의 다 고려의 건국공신이자 혜종(고려)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정종(고려) 광종(고려)을 옹립한 세력에 해당한다. 또 다른 이른 기록으로는 목종(고려) 대 국왕의 주치의였던 태의(太醫) 기정업(奇貞業)의 사례가 있다. 기정업은 목종의 최측근이었던 만큼 정국이 불안정해지자( 김치양 천추태후) 같은 근위세력들과 함께 목종을 위해 궁궐에서 교대로 숙직을 했단 기록이 있다.[4]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건 기탁성(奇卓誠)이라는 인물에서부터이다. 기탁성은 모습이 단아하고 궁술과 마술(馬術)에 능하여 의종(고려) 대에 하급 장교였던 교위(校尉)가 되었는데 말타기와 격구(擊毬)를 즐겨하는 의종의 눈에 들어 견룡(牽龍)이 되어 왕의 곁에 있게 되었다. 견룡이란 고려시대에 궁궐을 숙직하며 지키던 숙위군(宿衛軍)으로서 말단의 무관직이었으나 국왕과 가까이 할 수 있어 권문세가의 자제들이 자리를 다투는 자리였다고 한다. 즉 기탁성은 의종의 근위대가 된 것이다. 후에는 근위대장급인 위장군(衛將軍)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정중부 무신정변에 가담하여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정권의 권신이 되었다. 기탁성은 명종(고려) 대에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일어난 서경유수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부원수로 참전하기도 했으며 이때 후에 무신정권의 집권자가 되는 우봉 최씨 최충헌을 발탁하여 그의 출세길을 열어주었다.

즉 정리해보면 기탁성 이전의 기씨는 크게 별다른 기록이 없다는 점이나 기정업이 의관, 기탁성이 무신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군반씨족 등의 하급귀족 정도에 해당하는 위치였던 걸로 보이나, 기탁성이 라인을 잘 타 출세하자 기윤위, 기윤숙, 기필선, 기필준 등의 후손들도 관직에 올라 권세를 이어갔던 걸로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관직에 올랐던 중요한 인물임에도 정작 세계나 가족관계, 비슷한 시대의 인물로 보이는 시조 기순우나 그 아들 기수전과의 관계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5] 다만 고려사절요에서 덕종의 치세가 2년째이던 해에 발해인 기질화(奇叱火) 등 11인이 고려에 귀부했다는 기록을 놓고볼 때 기씨 성은 발해에서 기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씨들이 발해에서 왔음을 추론하면 936년에 기언(奇言)을 시작으로 기씨가 처음 언급되는 것이 설명될 뿐만 아니라 기씨들이 유력한 문반 씨족이 아닌 하급무관 가문에서 시작을 끊어 출세한 배경이 더더욱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926년[6], 대광현이 발해인 수만 호(戶)를 이끌고 고려에 귀부했을 때 왕건이 그의 좌우 장상과 군관들에게 벼슬을 내린 기록이 있다. 더군다나 기씨의 관향인 행주, 즉 고양~파주 일대는 발해 유민들이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7] 이러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기언(奇言)과 그 이후의 기씨들이 발해계였음을 추론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8]

1.2. 족보상의 시초 (기자~기우성~기순우)

《행주기씨보(幸州奇氏譜)》와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에 따르면 시조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창건했던 상나라의 왕족 기자(箕子)의 48대손 기우성(奇友誠)이다.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마한(馬韓) 건마국[9]의 초대 왕이었던 기자의 40대손 준왕(準王)의 후손인 기자의 47대손 마한 8대 원왕(元王) 훈(勳)에게는 아들로 우성(友誠), 우평(友平), 우량(友諒)의 3형제가 있었는데 우성은 백제로 가 행주 기씨(幸州 奇氏), 우평은 고구려로 가 태원 선우씨(太原 鮮于氏), 우량은 신라로 가 청주 한씨(淸州 韓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족보가 대체로 그렇듯이 사료와의 교차검증은 부실하다. 기자 동래설에 대해 자세한 건 기자 항목 참조.

선조(조선) 영의정을 지낸 기자헌(奇自獻)의 동생이었던 기윤헌(奇允獻)의 집에 선계의 기록이 있었는데, 이괄의 난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1688년( 조선 숙종 24년) 족보를 개편할 때 이곡(李穀)이 지은 기황후(奇皇后)의 아버지 경장헌왕(敬莊獻王) 기자오(奇子敖)[10]의 행장(行狀)을 따라서 고려 인종 때 정2품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낸 기자오의 5대조이자 기우성의 65대손 기순우(奇純祐)를 1세조로 기록하게 되었다.[11]

그러니까 정리하면 시조 기우성은 기자조선 건국자 기자의 48대손이고, 1세조로 모시고 있는 기순우는 기우성의 65대손이자 기자의 113대손이다.

1.3. 족보 재정립 후 역사 (기순우~기찬)

시조 기순우의 아들(2세)은 문하평장사 기수전(奇守全)이며, 3세는 4형제로 기윤위(奇允偉), 기윤숙(奇允肅), 기필선(奇弼善), 기필준(奇弼俊)이 있었는데 이 중 기윤위와 기윤숙이 고종(고려) 때 장군으로서 이장대(李將大)의 난을 평정하고 여진족의 침입을 각각 격퇴하였다. 명종(고려) 때는 부원수 기탁성(奇卓誠)이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충렬왕 때는 기자오가 나얀(乃顔)의 난을 평정하였다.[12] 기자오의 딸은 1333년 원나라 공녀로 끌려갔다가 1334년( 충숙왕 복위 3년) 14세 때 원혜종의 후궁이 되어 40년( 충혜왕 복위 1년) 제2황후로 책봉되면서 보현숙성황후 기씨, 줄여서 기황후가 되었다. 두산백과

기황후와 기철 남매가 고려에서 횡포를 부리고 있었을 당시, 행주 기씨 가문 모두가 기철 일파에 붙었던 것은 아니었고 공민왕의 심복이었던 신돈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던 7세 기현(奇顯, 1303 ~ 1371)과 8세 기중수(奇仲脩, ? ~ 1371) 부자도 있었다. 만약 저때 모든 기씨가 기철 일파와 함께하다 몰살당했다면 아예 후손이 남지 못했을 것이다. 기현은 신돈에게 자택도 내줄 정도로 극렬 지지자였으나 신돈이 몰락할 때 다른 측근들과 함께 제거당했다. 기중수는 기현의 아들이었으며 역시 신돈의 몰락 때 함께 죽었다.

조선 전기의 청백리로 유명한 청파(靑坡) 기건(奇虔)[13]이 바로 기현의 증손자인데[14] 황해도 연안군수(延郡守)로 있을 때 주민들이 붕어잡이로 고충을 겪는 걸 보고 부임 3년 동안 한 번도 붕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제주목사로 부임했는데 주민들이 전복따기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똑같이 전복을 한 번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시호는 정무(貞武=정무공).

1.3.1. 기황후 기철로 인한 위기

원혜종의 황후인 기황후의 오빠였던 기철(奇轍)은 3세 4형제 중 기윤숙의 현손(7세)으로 원간섭기의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큰 권세를 누렸지만 성격이 포악하여 횡포를 부리다 몽골의 영향을 배제하는 배원(排元) 정책을 펴던 공민왕이 일으킨 병신정변에 의해 궁궐에서 연회를 즐기던 도중 측근 권겸(權謙)과 함께 철퇴에 맞아 죽었다. 당시 고려에 있던 기철의 형제와 아내와 자식들도 한꺼번에 몰살당했으며 측근들까지 죄다 숙청당했다. 그의 악명이 얼마나 높았는지 시신은 저잣거리에 버려졌고 흥분한 백성들이 칼로 난도질해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기철의 아들인 기사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 8세)[15] 원나라 말기 요동성을 근거지로 한 군벌이었는데 공민왕이 아버지 기철을 죽이자 고려와 대립하였으나 제1차 요동정벌 때 고려의 원정군에게 진압당하여 몽골로 달아났다. 즉 공손씨의 동연과 유사한 요동 기씨 정권(...)이 짧으나마 존속한 적이 있다. 그 이외에도 기황후는 덕흥군 왕혜(王譓)를 고려의 왕으로, 조카인 기삼보노(奇三寶奴)를 고려의 세자로 삼기 위해 원나라의 군대로 고려를 침공하나, 패배하고 만다. 기황후에겐 기철 말고도 다른 형제들도 있었기 때문에 기삼보노가 기철의 아들이었는지는 불명이다.

기씨 중에서는 기황후와 기철 남매가 가장 유명하지만 기철의 후손은 기사인테무르의 후손이 중국이나 몽골에 남아있다면 모를까 한국에서는 아예 끊겼고 현재 남아있는 기씨는 대부분이 기묘사화 이후로 전국에 각각 흩어졌던 후술할 기건의 손자 12세 기찬(1444~1492)의 후손이다.

1.4. 기찬 이후

조선 중기의 인물인 12세 기찬(奇襸), 1444~1492)[16]은 3세 4형제 중 3남인 기필선의 후손으로 행주 기씨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기찬은 조선 성종(조선) 대의 문신이며, 13세에 해당하는 아들 5형제로 파평 윤씨 소생인 기형(奇逈), 기원(奇遠)과 안동 권씨 소생인 기괄(奇适), 기진(奇進), 기준(奇遵)을 남겼다. 이 중 5남 기준은 조광조의 제자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스승과 같은 파벌이었고 사림파의 일익을 담당하다가 결국 기묘사화에 휩싸여 자결하였고 거의 전 가문이 지방으로 도피하게 되었다.[17] 사후 사림파가 복권되면서 추증된 시호는 문민(文愍, 문민공).

13세 차남 기원(1481~1522)의 후손 중에는 성리학자로 이름을 드러낸 호남의 은덕군자(隱德君子) 금강(錦江) 기효간(奇孝諫)과 송암(松巖) 기정익(奇挺翼)이 있으며, 조선 후기 성리학의 6대가로 일컬어지며 노사학파(蘆沙學派)를 만든 기정진(奇正鎭)도 있다. 그가 강학하던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의 정사(精舍)인 담대헌(澹對軒)은 1924년 후손들이 중수하여 고산서원(高山書院)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13세 4남 기진(1487~1555)의 네 아들 중 차남은 성리학자로서 퇴계 이황과의 사단칠정논변으로 유명한 인물인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 14세)이 있었다.

13세 5남 기준(1492~1521)은 1남 1녀 중 외아들인 가구(可久) 기대항(奇大恒, 1519 ~ 1564)이 있었다. 기대항은 기묘사화로 인해 교살당한 기묘명현 기준의 아들이었기에 사림파의 동정을 사서 빠른 출세를 하였다. 높은 관직에 오른 뒤에는 명종(조선)의 교시를 받아 심의겸 등과 함께 당시 권세를 누리던 외척 이량 일파의 탄핵을 진두지휘하여 그를 몰락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에 사림들을 보호한 공이 있다 하여 정견(貞堅, 정견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허나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관찰사 수령 시절에는 횡포를 많이 부려 백성들이 원망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등 민간의 평은 영 좋지 못하다. 그리고 기대항의 손자 16세 기자헌(1562 ~ 1624)은 광해군 시절 영의정까지 진출하였다.

기찬 대 이후로 조선 중기의 유력 명문가 중 하나가 되었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행주 기씨 집안에서 이렇다할 관직을 배출하지 못했다. 이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기동민이 2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행주 기씨 최초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1.5. 기타

예전 기씨들이 기재되어 있던 고문서를 보면 윗부분이 설 립(立)으로 씌여있던 '竒'로 표기된 것이 많았으나 현대에는 윗부분이 큰 대(大)로 표기되어있는 '奇'를 사용한다. 이체자 관계에 불과하고 둘 다 기씨를 뜻하므로 다른 성씨가 아님을 유념하자.

본관인 고양시 덕양산 행주산성에는 기씨의 선조들이 마셨다는 기감천(奇甘川)이라는 우물과 선조가 태어났다는 기가(奇家)바위-기자암(奇子岩)에 대한 전승이 내려온다.[18] 기감천을 설명하는 팻말에는 옛날에 기씨가 그 일대에서 거주했었으며 기황후도 어릴 적에는 그 근처에서 살았다는 일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역사상의 기록과의 비교를 통해 추정해볼 때 행주 기씨는 아무리 늦어도 호족들이 할거하던 후삼국시대에서 고려 초중기에는 이미 덕양산과 행주산성 일대를 근거지로 삼았던 중소호족이었던 걸로 보인다.[19]

고구려 영류왕대에 당나라에 문물도입을 위해 요청해 파견된 팔학사인 홍천하(洪天河), 은세통(殷世通), 봉수현(奉壽賢), 길녕(吉寧), 방비(房丕), 위령(魏齡), 목중(睦衶), 기모(奇牟)[20]가 한반도에 도래해 각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승이 존재한다.[21] 이 '팔학사동래설'은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다분히 전설적인 이야기로 여러 버전이 있어 심지어 시대와 멤버도 매번 바뀐다.[22] 그런데 당나라에서 고구려에 도래했다는 팔학사의 경우 시기상으로 고구려 말기인 영류왕~ 보장왕 대에 들어왔다고 나오며 또한 고구려 멸망 후 신라에 가서 살았다는 후속내용도 종종 등장한다. 이에 대해 당나라에서 한반도에 도래했다는 중국계 성씨의 경우 고구려, 백제의 멸망 후 고구려, 백제계 유력층이 차별을 피하기 위해 중국계를 참칭했다는 설이 있는데 팔학사동래설 또한 이러한 경우가 전설로 각색되어 전해진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가설에 따른다면 기씨 또한 원래는 더 북방을 기원으로 하는 가문이었으나 고구려의 멸망에 따라 남하해 정착하게 되었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한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에 청주한씨의 자손들이 이 곳에 정착하여 행주기씨로 개성했다는 구전이 있다. 행신동에 있는 가라산(加羅山) 공원에는 그들의 제사단으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는 산신제단이 있다. 묘하게도 가라는 일본어로 ‘한(韓)’의 훈독인 카라(から)와 닮았다.[23]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원당역 근처에 행주 기씨 문중의 무덤이 있다. 일반인은 출입 금지이고, 행주 기씨만 출입이 가능하다.

1.6. 실존 인물

기순우를 1세조로 하여 현재 26세손 우(宇), 27세손 도(度), 28세손 노(老), 29세손 서(舒), 30세손 호(浩) 항렬자가 많이 쓰인다.

1.6.1. 발해

1.6.2. 고려

1.6.3. 조선

1.6.4. 대한민국

* 기의성(1988):DJ,래퍼 라스키아

1.6.5. 북한

2. 행주 기(箕)씨

기자의 후예라 일컬어진다. 행주를 본원으로 한다. 위의 기씨도 기자의 후손이라 일컬어지고 본원도 행주로 같고 최근의 인구조사 때 처음 나타난 성씨라 한자를 오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다. 1930년 인구조사 때에 3가구(경북 포항, 강원 인제, 평남의 덕천 등에 1가구씩)가 나타났다. 1960년 조사에서는 인구가 134명으로 성별순위 258성 중 185위, 1975년도 조사에서는 249성 중 180위였다.


[1] 대표적으로 기성용이 있다. [2]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 선봉대를 제외한 본대는 좌강(左綱), 중군(中軍), 우강(右綱), 삼군원병(三軍援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 중 좌강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참전한 것이다. 참고로 좌강의 지휘관 중 하나가 그 유명한 후백제 견훤이었다. [3] 고려의 향직(鄕職) 품계로 6품에 해당한다. [4] 대부(大府)의 기름 창고에 화재가 나서 불길이 천추전(千秋殿)으로 번졌다. 왕이 전각과 대부 창고가 불타고 잔해만 남은 것을 보고는 비탄에 잠겨 병환이 나서 정사를 돌보지 못하였다. 왕사(王師)와 국사(國師) 두 승려와 태의 기정업, 태복(太卜) 진함조(晉含祚), 태사(太史) 반희악(潘希渥), 재신 이부상서 참지정사(宰臣 吏部尙書 參知政事) 유진(劉瑨), 사부시랑 중추원사(吏部侍郞 中樞院使) 최항(崔沆), 급사중 중추원부사(給事中 中樞院副使) 채충순(蔡忠順) 등이 은대(銀臺)에서 번갈아 숙직하고, 지은대사 공부시랑(知銀臺事 工部侍郞) 이주정(李周楨), 우승선 전중시어사(右承宣 殿中侍御史) 이작인(李作仁)과 왕의 총애를 받던 신하인 지은대사 좌사낭중(知銀臺事 左司郞中) 유충정(劉忠正), 합문사인(閤門舍人) 유행간(庾行簡) 등도 함께 내전(內殿)에서 교대로 숙직하였으며, 친종장군(親從將軍) 유방(庾方), 중랑장(中郞將) 류종(柳宗)·탁사정(卓思政)·하공진(河拱辰)은 전각 출입문 가까이에서 계속해서 숙직하고, 형부상서(刑部尙書) 진적(陳頔)도 또한 내전에 들어가 숙직하였으며, 호부시랑(戶部侍郞) 최사위(崔士威)는 대정문 별감(大定門 別監)이 되어 여러 궁궐의 문을 닫아걸고 엄중히 경계하면서 오직 장춘전(長春殿)의 대정문(大定門)만 열어두었다. [5]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도 주요인물로 등장하였다. [6] 혹은 934년. 보통 926년쪽이 맞는 걸로 본다. [7] 발해 멸망 이후 고려에 귀부한 발해인들의 다수는 한반도 중북부에 걸쳐 정착하였다. [8] 다만 이미 고구려대에도 성씨를 사용하고 있다가 유민들의 분산으로 각각 고려와 발해에 나눠지게 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당장 조선대에는 명백히 한 나라에 살고있던 기씨가 현대에는 남북분단 이후 남북한에서 각각 나눠져 분포하고 있다. [9] 현대에는 고고학의 발달로 준왕 집단이 남하하여 세운 나라가 마한 소국들 중 목지국이 아닌 건마국이라는 게 증명되었다. [10] 기씨 중 유일하게 원나라 왕작(王爵)을 받은 인물이다. 사실 한국사에서 이렇게 왕작을 받은 인물 자체가 손에 꼽힌다. 다만 살아서 받은 건 아니었고 기자오가 고려의 충신이었고 딸이 황후가 되었기에 사후추증되었다. 처음에는 영안왕(榮安王)으로 추증되었는데 이후 경왕(敬王)으로 격상된다. 2자호보다 1자호가 더 급이 높기 때문. 시호는 장헌(莊獻)으로 왕호와 시호를 합쳐 경장헌왕(敬莊獻王)이 된다. [11] 사실 기순우의 위에 한 명이 있는데 바로 그의 아버지인 기문유(奇文儒)이다. [12] 나얀은 몽골 제국의 시조인 칭기즈 칸의 동생이자 동방 3왕가의 시조 중 한 명인 테무게 옷치긴의 후손으로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과 대립하다 몰락했다. [13] 아호인 청파가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의 집이 현 청파동 일대 부근인 만리재(한자로는 萬里峴만리현)에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혹은 청파라는 단어 자체가 푸른 언덕이란 뜻이기 때문에 지명이 먼저 있었고 거기서 청파라는 아호를 딴 것일 수도 있다. 거주지명을 아호로 쓰는 경우도 상당히 흔했기 때문. [14] 기현의 장남인 기중평(奇仲平)의 손자가 되는데 기중평 또한 신돈 일파가 숙청될 때 같이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15] 사인테무르는 몽골식 이름. 당시 몽골 제국은 동아시아의 패권국이었으며 고려도 원간섭기 동안 몽골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성씨에 영어식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고려 왕족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한국식 이름과 몽골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개중에는 아예 몽골식 이름만 가진 사람들도 있었는데 기사인테무르도 그런 케이스. [16] 시호는 정렬(貞烈, 정렬공). 넷상에는 기찬홍(奇禶弘)이라는 표기도 있으나 만가보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형인 기유(奇裕), 동생들인 기저(奇褚), 기주(奇裯), 기정(奇禎)도 모두 외자 이름인 걸로 보아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이름인 찬은 넷상에 禶(제사 이름 찬)과 襸(고운 옷 찬)의 2가지 표기가 있는데 두 글자가 너무 비슷해서 헷갈린 것으로 보인다. 일단 형제들의 이름과 비교해 봤을 때 襸(고운 옷 찬)쪽이 맞는 걸로 보인다. [17] 이때 기씨뿐만이 아니라 많은 가문들이 피난을 갔는데 사림파의 수장이었던 조광조의 가문인 한양 조씨 또한 말할 것도 없이 지방으로 대거 피난을 갔다. [18] 바위에서 태어났다는 것 같다. 비슷한 사례로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이 태어났다는 허가바위-공암의 전설이 있다. 아마도 토테미즘과 관련된 전승인 것 같다. [19] 한국의 성씨는 모화사상을 걷어내고 보면 이런 식으로 후삼국시대~고려의 호족에서 유래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20] 이름이 정확히 똑같은 고구려 유민 고모(高牟)라는 인물의 묘지명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 다만 묘지명이 작성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고모는 당나라에 투항한 인물로 그대로 당나라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러므로 고모는 한반도로 왔다고 전해지는 기모와 동일인일 수 없다. [21] 이 여덟 성씨 중 은(성씨)씨가 한국에서 유일하게 기씨와 본관을 공유한다. [22] 관련이 있는 실제 기록으로는 영류왕 7년(624) 당나라에서 사신으로 형부상서 심숙안(沈叔安)을 파견할 때 같이 도교의 도사(道士)가 천존상(天尊像)을 갖고 와서 노자의 도덕경을 왕과 귀족들에게 강론했다는 기록과, 보장왕 2년(643), 권신 연개소문의 초청에 따라 도사 숙달(叔達) 등 8인이 도덕경을 가지고 들어와 그들을 절에 거처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이 사건이 당대인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던 일이었다면 후대에도 전해져 각색에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23] 다만 일본어 훈독인 카라(から)는 가야에서 유래한 말이었다. 가장 교류가 많았고 가까웠던 가야가 한반도를 비롯한 외국의 대명사로 굳어졌던 것. 또한 이는 상기한 팔학사동래설과 같은 이주정착 계통의 설화가 되는데, 한씨의 자손이 이주했다는 부분은 원래 이주정착 설화가 존재하다가 후대에 한씨와 기씨가 동계로 여겨지면서 덧씌워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 [24] 奇라는 한자의 단순한 음가상 고유어나 말갈식 이름을 음차하다 보니 우연히 그 한자가 쓰인 것일 수도 있고, 또는 발해에도 이전부터 기씨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나타내는 걸 수도 있다. 叱(질)은 사이시옷을 나타내는 표기로 쓰였기 때문. 만약 동일인물이라면 다시 돌아가서 아직 남아있던 친인척과 동료들을 데려온 것일 가능성도 있다. [25] 원나라가 아예 멸망한 건 아니었고 이후는 북원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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