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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16:51:11

사구정변


1. 개요2. 조나라의 사구정변
2.1. 배경2.2. 공자 장의 반란2.3. 결과2.4. 무령왕 배후자설
3. 진나라의 사구정변
3.1. 배경3.2. 시황제의 붕어 은폐3.3. 유서 조작과 부소의 죽음3.4. 몽씨 형제의 죽음3.5. 결과3.6. 의문점3.7. 허구일 가능성3.8. 가정 : 만약에 부소가 황위를 계승했다면?
3.8.1. 통일 유지설3.8.2. 멸망설3.8.3. 전국시대 재시작 설3.8.4. 총평


沙丘政變

1. 개요

사구는 중국의 고지명으로 오늘날 허베이성 싱타이시 광종현이다.

역사에서 사구정변은 두 차례 있었다. 기원전 295년 조나라에서 한 번, 기원전 210년에 천하통일을 이룬 진나라에서 시황제가 천하 순행 도중에 사망하면서 호해가 형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제위를 차지한 사건으로 또 한 번 있다. 저주받은 땅이다

두 사건을 구분하기 위하여 조나라의 사건은 '사구의 난', 진나라의 사건은 '사구의 변'으로 칭하는 듯.

사구정변 외에도 상나라 주지육림 또한 이 사구에 있었다고 한다.

2. 조나라의 사구정변

2.1. 배경

전국시대 조무령왕의 정실 부인은 한나라 출신으로 그의 아들인 공자 장(公子 章)은 무령왕의 뒤를 이을 태자였다. 정실 부인이 죽은 후 무령왕은 한 미녀를 꿈에서 만났고 이에 한 대신이 그 형상을 닮은 미녀인 맹요를 바친다. 그후 맹요도 죽게 되는데 무령왕은 자신을 즐겁게 해준 맹요에게 자신은 준 것이 없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그의 아들인 공자 하(公子 何)를 태자로 세운다. 이렇게 어이없이 폐위당한 공자 장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안양군으로 분봉하고 전불례를 보내여 보좌하게 한다. 그후, 무령왕은 왕위를 태자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주부(主父)의 신분으로 정사에 관여한다. 하지만 보좌관으로 보내진 전불례는 오히려 공자 장의 야심을 자극하여 반란을 부추겼고 한편으로는 무령왕 본인도 무슨 생각에서인지 대군 지역을 공자 장에게 넘겨주어 대왕으로 봉하겠다는, 그러니까 나라를 둘로 가르겠다는 황당한 계획까지 세웠다가 당시 상국이었던 비의(肥義)[1]의 만류로 단념한다.[2]

2.2. 공자 장의 반란

결국 조혜문왕 4년(기원전 295년), 사태가 터지고 만다.

당시 세 부자는 사구 지역에서 따로 별거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공자 장은 비의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비의가 사전에 대책을 세웠기 때문에 혜문왕을 죽일 수 없었고 여기서 제3의 인물인 공자 성과 이태가 군사를 이끌고 난입하여 반란을 제압한다. 공자 성은 무령왕의 숙부뻘 되는 사람으로 무령왕의 호복기사 개혁을 반대하다가 실각당한 인물로 당연히 자신의 지위를 되찾으려는 속셈이었다.

2.3. 결과

결국 실패한 공자 장은 무령왕의 거처로 피신하지만 무령왕도 공자 장을 보호할 수 없었고, 공자 장은 결국 살해당한다. 하지만 사태가 이로서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공자 성과 이태는 무령왕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던 만큼 무령왕의 추궁이 두려웠고 그렇다고 직접 죽이기에는 명분이 없다 보니 결국 사구의 행궁을 포위하여 무령왕을 사실상 감금한다. 물론 음식 같은 건 일절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3개월의 포위 끝에 무령왕은 굶어죽는다.

2.4. 무령왕 배후자설

그동안 사구정변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공자 장이 야심을 주체하지 못 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며 무령왕 본인은 피해자' 라고 여겨졌다. 하만 근래에 와서는 해석이 달라졌다. 무령왕이 왕위를 물려준 이 후 점차 실각당하자[3] 다시 권력을 되찾으려고 공자 장을 끌어들였다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이 관점대로라면 공자 장의 대왕 분봉 시도도 단순한 미안한 감정 때문이 아닌, 권한과 명분을 심어주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4]

3. 진나라의 사구정변

3.1. 배경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시황제 군현제 도입, 문자와 도량형, 화폐 등을 통일시키는 등 급진적인 개혁을 실시해 성과를 거두었지만 갑작스럽게 이루어져 백성들의 불만이 컸으며, 진나라의 통치 이념인 법가 사상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져 각 지역에서는 가혹하고 무거운 통치가 이어졌다. 까다로운 법률과 무거운 형벌로 인해 민심은 피폐해진 상황이었는데, 부소는 법을 엄하게 하는 것에 대해 염려해 간언했지만 시황제는 노해서 부소를 북쪽의 상군으로 파견해 군대를 감독하도록 했고 몽염은 그 군대의 장군이었다.

또한 시황제는 나이가 들면서 죽음을 두려워해 불로불사나 미신에 집착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재정을 낭비하기 시작했다. 호가 진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는 점괘를 믿어 몽염에게 만리장성을 쌓게 하거나 자신이 꾼 꿈 속에서 나온 홍의동자가 자기 나라를 빼앗을 것이라는 해몽을 믿고 5차례 순행길에 올랐다.

승상 이사, 중거부령 조고를 포함해 5차에서는 공자 호해까지 시황제의 순행에 대동했는데, 그 와중에 사구에서 시황제가 사망한다.

3.2. 시황제의 붕어 은폐

시황제는 평원진에 이르러 병이 생겼지만 신하들은 시황제가 죽어간다는 말을 싫어해 함부로 말하지 못했으며, 시황제는 몽의에게 산천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도록 여러 산을 돌아다닐 것을 명령했다. 시황제는 병이 심해지자 부소에게 돌아와서 상사에 참여해 함양에 안장하라는 내용이 담긴 조서를 썼지만 사자에게 조서를 주기 전에 사망했다.

이사는 시황제가 외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인해 모든 공자와 천하에 변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5]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발상하지 않았으며, 시황제의 관을 수레에 싣고 예전에 총애받던 환관을 함께 타게 해서 가는 곳마다 음식을 올리는 시늉을 하면서 신하들이 예전과 다름없이 국사를 상주하면 환관이 수레 안에서 상주된 일을 허가하는 식으로 속였다.

여름철에 시황제의 수레에서 시신이 썩는 악취가 나자 수행관원들에게 소금에 절여서 말린 물고기 1석을 수레에 싣게 해서 시신의 악취와 어물의 냄새를 구분하지 못하게 했으며, 직도를 따라 함양에 도착한 후에 발상했다.

3.3. 유서 조작과 부소의 죽음

사자가 이르러 편지를 보고 부소는 울면서 안으로 들어가 자살하고자 했다.
몽염 부소를 제지하며 말했다. 폐하께서 바깥에 계시며 태자를 세우지 않았으며, 신을 시켜서 30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변경을 지키게 하고 공자가 감독하도록 했으니 이는 천하의 중임입니다. 지금 사자 한 명이 왔다가 곧바로 자살하면 어찌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겠습니까? 청하기를 다시 용서를 빌고 다시 간청한 후에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사자가 몇 번이나 재촉했다. 부소는 사람됨이 인자했기에 몽염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죽음을 내렸는데 어찌 다시 용서를 청한단 말이냐! 그리고 곧 자살했다.
-사기 이사 열전

이사, 호해, 조고를 포함한 5, 6명 정도의 환관만이 시황제가 사망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호해는 조고에게 서법, 옥률, 법령을 배운 적이 있어 그를 총애했다. 조고는 호해를 설득하고 이사와 모의해서 시황제가 부소에게 보내는 조서를 뜯고 사구에서 시황제의 유조를 받은 것처럼 꾸며서 호해를 태자로 삼도록 했으며, 부소에게는 한치의 공훈도 없으면서 비방하는 일만 많아 효성스럽지 못하고 몽염은 부소에 대해 바르게 시정하지 못했다는 죄목을 들어 자결하라고 했다.

사자의 조서를 받은 부소는 그 내용을 보고 울면서 자살하려고 했는데, 몽염은 부소에게 자신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변방을 지키게 했고 태자에게는 그 군대를 감독하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기에 한 사람의 사신이 왔다고 해서 자살한다면 그 진위를 알 수 있겠냐면서 다시 용서를 간청한 후에 자살해도 늦지 않다고 만류했다. 사자가 여러 번 자살을 독촉하자 부소는 아버지께서 자식에게 죽음을 내린 것을 어찌 다시 용서를 간청하겠냐면서 자살했다.

3.4. 몽씨 형제의 죽음

몽염은 명령을 의심해 다시 한번 명을 내려달라고 청했다가 사자가 몽염을 관리에게 넘겨 양주현에 감금시켰으며, 사람을 파견해 몽염의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부소가 죽은 것을 안 호해는 몽염을 놓아주려고 했지만 조고는 몽씨가 다시 귀하게 되어 정권을 잡으면 자신을 원망할까봐 두려워했다.

뒤늦게 몽의가 돌아왔고 조고는 몽의가 법대로 처리해 자기를 위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는데, 조고는 호해에게 충성하는 척 하면서 몽씨를 없애기 위해 선제(시황제)께서 현명한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했지만 몽의로 인해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고 모함하면서 그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 이로 인해 호해가 몽의를 대의 옥에 가두었고 조고가 호해를 모시면서 밤낮으로 몽씨 형제를 헐뜯고 그들의 죄를 찾아내 탄핵했으며, 영자영 조나라, 제나라 등이 멸망한 이유가 중신들을 함부로 죽였기 때문이라고 하면서[6] 몽씨 형제를 죽이지 말 것을 간언했지만 호해는 듣지 않았다.

호해는 사자를 보내 몽의, 몽염에게 죽음을 내리도록 조서를 보냈으며, 몽의는 정당한 죄명으로 죽게 해달라고 했지만 사자는 호해의 뜻을 알았기에 몽의의 말을 듣지 않고 죽였다. 몽염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있어 그 세력이 진나라를 배반하기에 충분하고 조상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 의리를 지킨다면서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는데, 사자가 명령을 받고 집행할 뿐이라 이 말을 전할 수 없다고 하자 몽염은 한탄하다가 음독 자살을 한다.

3.5. 결과

이세황제는 이 사건으로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위를 찬탈한 황제가 되었으며, 당연히 이 과정을 도운 조고가 낭중령이 되어 나라의 실세가 되었다. 이세황제(와 조고)는 자신이라는 전례가 남아버린 이상 자신과 똑같이 황위를 찬탈할만한 경쟁자들을 배제하기 위해 다른 형제자매들을 몰살시켰으며, 또한 선제( 시황제)의 후궁중에서 자식이 없는 자들을 궁궐 밖으로 내쫓는 건 옳지 않다며 그대로 무덤에 순장시켰다. 거기에 사기의 이사 열전을 보면 이런 일련의 학살극 속에서 호해의 형제중 한명인 '공자 고(高)'라는 인물은 자신이 직접 자살할테니 가족들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간곡히 청했고, 호해는 정황상 이 약속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근데 하필 그 다음 도읍 함양을 먹은 게 희대의 깡패라는 게 문제

진시황릉 배장갱에서 발굴된 시체는 골격등을 보면 대부분 어리거나 젊은 나이에 죽었으며, 두개골에 화살촉이 박혀있거나 사지가 토막나있는 잔혹하게 죽은 시체가 많아 위 사건의 관계자들이 묻힌 곳이 배장갱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실제로 이 중에서 딱 하나 이상할 정도로 깔끔한 남자 유골이 1구 있는데, 이게 위의 '공자 고' 일화에 나온 장본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증거로 제기되는 중.

이세황제가 비정상적으로 승계하고 승계 1순위인[7] 장남 부소가 죽은 것은 백성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승계였다.[8][9] 당장 벽촌의 하층민인 진승조차도 호해의 승계를 두고 "2세( 이세황제, 호해를 가리킴)는 작은 아들로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세간에서는 초나라 항연과 더불어, 부소가 살아서 숨어있다는 헛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마침 진나라의 폭정으로 분노한 사람들은 부소나 항연을 사칭하며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 사건의 결과가 워낙에 충격적이다보니 유방 여치의 행보에도 영향을 준다. 유방은 폐태자를 시도했다가 이세황제를 거론하며 결사반대하는 숙손통 등 신하들에 가로막혀 포기해야 했고, 여후는 사구정변을 그대로 재현하려다가 내전이 벌어지면 감당할 자신 있느냐는 역상의 제지로 그만두어야 했다.

3.6. 의문점

사기 이사 열전에 실려있는 대화의 내용은 옆에서 직접 보고 듣지 않으면 도저히 알기 힘들 정도로 구체적이다. 따라서 저런 사실을 저렇게 명확하게 알아낸 경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곤 한다.

물론 상식적으로 당자사들이 최측근들에게 전달 했거나, 조고에게 죽을 위기에 몰린 이사가 마지막 발악으로 발설 했거나, 시황제가 붕어할 때 모시던 궁관들이 전달했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다만 정보가 전보다 쉽게 공개되는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대통령이 비밀스럽게 하는 말을 명확하게 알 수 없는데, 조선 사관처럼 병풍 뒤에 몰래 숨어서 받아적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비밀스러운 대화 내용이 알려지긴 다소 어려운 상황에서 이 정도로 구체적인 대화의 내용을 대체 누가 어떤 방식으로 알 수 있었을지 조금은 의심스럽다. 그리고 이걸 당사자와 연결고리도 없는 사마천이 어떻게 알았는지도 알 수 없다.

때문에 기록과 달리 부소의 자살 명령이 이세황제의 조작이 아니라 실제로 시황제가 내린 명령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망 직전 시황제는 당시 태자 부소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말년에 수은 중독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의심이 많았다. 더불어 호해도 비록 작은 아들이었지만 후계자로 유력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인데, 이 주장이 실려있는 책이 2009년 발견된 전한 초기의 목독인 조정서(趙正書)다. 여기에는 시황제가 순행 중 위독해지자 스스로 이사, 조고 등과 상의해서 영호해를 태자로 책봉하고 부소를 처형한 후 승하했다고 쓰여 있는데, 문제는 조정서는 객관성과 신빙성에서 논란이 있다는 것. 이 목독의 본문에서 시황제를 가리켜 조나라 출신인 정이라고 깎아내려서 '조정서'라는 제목이 붙었고,[10] 시황제를 꼬박꼬박 '진왕'이라고 서술하며 황제 취급도 안해준다. 신빙성도 논란이 있는데, 비록 개인이 편찬했지만 정사(正史)에서도 최고로 치는 '사기'와 사구정변의 기록이 상당히 다른 탓이다.[11]

게다가 부소는 착하고 어질어 아버지의 분서갱유를 말렸다가 눈밖에 나서 국경으로 내쫓겼기 때문에 이미 정이 떨어진데다 수은중독으로 정신이 이상해진 시황제가 부소를 죽였어도 말이 안되는 소리는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딱 거기까지. 여기에는 오히려 만리장성이 중요한 국책사업이라 그에게 맡겼을지도 모른다는 반론이 있고[12] 또 정말 마음에 안들어 국경으로 내쫓았어도, 죽기 전에 마음을 고쳐 부소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는 말을 해도 이상할 건 없다. 사실 진짜 계승시킬 마음이 없으면, 숙청 될 자식에게 언제든 반란을 꾀할 수 있는, 진나라의 주력 30만 대군을 움직일 대장군의 직책을 주고 명장 몽염까지 곁에 두게 한 부분이 말이 안 된다. 몽염은 본인의 능력이 탁월했을 뿐 아니라 몽씨 가문은 진나라에서 위세가 매우 높은 무관 가문이어서[13], 부소와 결탁해 버리면 시황제에게 대단히 큰 위협이 됐을 것이다.

다만 조고 외에도 호해와 이사를 비롯해서 그들의 측근들이 현장에 있었고, 아무리 은밀하게 모의해서 유서를 조작한다고 하더라도 이사와 조고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으슥한 산속에 들어가서 밀담을 나눈 후 직접 종이를 구해와, 손수 먹을 갈아서 글을 쓰고, 자기 손으로 도장을 꺼내와서 찍었을 리는 없다. 물론 시중을 들거나 이런 실무를 담당한 이들은 믿을 만한 측근들이었겠지만, 이사와 조고가 죽고 진나라까지 멸망한 후에도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상술했듯이 이사가 숙청될 때 마지막 발악으로 누설했을 수도 있다. 또 역사적으로 교통이 발달하지 않던 고대에 왕위계승자가 멀리 있다면 바로 가까이 다른 왕족이나 다음 계승자가 추대를 받아 등극한 사례도 있다.[14]

다른 기록이나 증거가 나오기 전까진 당시 역사를 기록한 사마천의 사서를 정사로 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15] 정황상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점도 있을순 있겠으나 다른 교차검증을 할 만한 사료가 나오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다.

3.7. 허구일 가능성

최근 2015년, 북경대학에서 『조정서』라는 간독을 발굴했는데, 조정서에는 진시황이 호해를 후계자로 삼으라는 이사의 말에 대해서 허락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사기는 진시황의 죽음과 호해의 즉위에 관한 여러 가설 가운데 하나를 취사 선택하였을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3.8. 가정 : 만약에 부소가 황위를 계승했다면?

이사가 조고의 유혹에 넘어가 호해를 옹립하지 않고, 시황제가 남긴 유언대로 만리장성 축조 현장에 가 있는 부소가 다음 황제라고 공표하여 부소가 황위를 계승하여 2세 황제가 되었더라면 중국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3.8.1. 통일 유지설

일단 적서 차별이 심하던 법가 국가 진나라에서 부소는 혈통적으로 시황제의 장남임으로[16] 정통성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또한 만리장성 축조 현장에서 장성 건설에 종사하는 최정예 30만 병력 및 명장 몽염이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있으므로 무력으로도 맞설 상대가 없다. 또한 행실도 올바랐고 흠잡을 데가 없었기 때문에 타국 출신 인물들 백성들조차도 부소에 대해서는 좋게 여길 정도였다. 진승 오광이 궐기할 때 초나라 출신인 항연은 물론이요 진나라 출신, 그것도 시황제의 친아들인 부소를 사칭한 것만 봐도 그의 평가가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는 부분.
실제로 군주국에선 의외로 초대가 제일 불안정하다.[17] 이때문에 초대 군주가 엄청 장수하거나 하는 게 아닌 이상 빨라도 2대, 3대 군주까지는 올바르게 내려가야 나라로서의 기틀이 잡히고 체제가 안정된다.[18] 한마디로 진나라가 망한 결정적 계기는 초석을 다듬은 시황제를 이어 기틀을 세워야할 2대 황제에 호해 '따위'가 올라서 그렇다는 게 현대로선 사실상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19] 인망 있고 자애롭고 유능하고 관대한 부소가 이세황제가 되어 시황제의 가혹한 통치에 지친 백성들을 적당히 위무했다면, 진나라는 중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진나라는 봉건제로 되돌아가버린 대륙에 강림한 항적의 초나라 및 후대에 벼락 출세한 유방 한나라와는 달리 주나라 때부터 대대로 내려져온 오랜 제후국이란 튼튼한 전통이랑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강력한 이점도 있었다. 부소가 즉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반란 대신 현 진 제국 체제에 순응하는 길을 택했을 사람이 더욱 늘어났을 것은 분명하다.

부소가 명군이나 범군까지는 갈것도 없이 암군만 아니었어도 된다. 아니, 심지어 호해나 다름없는 위인이었어도 진의 재통일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진의 국력은 전국시대 당시 국가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는 6국의 합종을 6대1 맞짱으로 가볍게 털어버릴 정도였고 이는 진의 멸망시점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20] 진이 멸망한 가장 큰 윈인은 중앙정부가 사실상 붕괴하여 행정체계가 망가진 점에 있다. 봉기 초기 몽염의 30만 정예와 조타의 남방군은 써보지도 못하고 사라지고 각지의 진군은 지휘부재로 우왕좌왕하다 각개격파로 허무하게 소멸된 원인도 중앙정부가 제기능을 못했기 때문이다. 장초의 대군이 함곡관에 육박하기까지 몇달동안 군의 집결은커녕 관중에서 새로 징병조차 못해서 죄수를 데려다쓸 지경이니 말 다했다....[21] 부소는 그 존재만으로도 강력한 정통성이 있었기 때문에 호해와 같은 혼란과 숙청은 없었을 것이고 조고와 같은 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할 동기도 약했을 것이다. 즉 부소가 호해와 능력이 비슷하더라도 진 조정이 큰 혼란없이 제기능을 했을 가능성이 높은것이다.

중앙정부와 행정 체계가 잘 유지되는 나라는 군주가 아무리 폭군이어도 단기간에 망할래야 망할수가 없다.[22] 시황제가 폭정은 많지만 적어도 이 두가지는 철저히 유지했다. 부소 수준의 능력과 인품을 가진 사람이 뒤를 이었다면 단기간에 이 두가지를 망가뜨리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제대로된 국가 체계도 없고 구심점도 없는 반군연합 따위야[23] 시황제의 통일전쟁 상대였던 육국보다 난이도가 휠씬 낮으므로 중앙정부가 진의 국력을 제대로 뽑아 썼다면 어렵지 않게 토벌에 성공했을 것이다.[24]그랬다면 진나라의 통일은 확립되고 중국사에서 한나라의 역사적 위치를 진나라가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다.그럼 현재 한족은 진족이 되었을테고 한자는 진자가 되었을거다. 실제로 국호인 China가 진에서 유래한 걸 보면 그렇게 될 확률이 높긴 하다.

3.8.2. 멸망설

진나라의 멸망은 이세황제 호해의 뻘짓뿐만이 아니라 가혹한 법가 통치랑 온갖 정벌과 건설 공구리 로 천하를 피폐하게 만들고 민심을 떠나게 한 시황제 및 통일 제국 진나라의 취약성에 한계가 있었다는 반론도 있다. 진승의 난을 시작으로 한 전국적인 봉기는 호해가 즉위한지 바로 다음 해에 일어난 일이다. 아무리 조고와 호해가 막장이라도 단지 1년 사이에 이정도로 폭발적인 파급력을 불러왔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시황제 때부터 곪았던 것이 터졌을 뿐인 것. 실상 이세황제가 한 것이라곤 혜제처럼 선대가 한 것을 그대로 돌리면서 논 것 외에 크게 없음에도 둘의 경우가 완전히 반대인 것이 누구 탓일지는…[25] 애초에 진나라의 천하 통일에도 춘추전국시대 각국을 완전히 통합하는 것은 힘들었고 결국 시황제 사후 옛 육국 지역에서는 부흥 운동을 일으킨다. 진나라의 멸망은 그 전례없는 천하통일의 후유증이라는 것.[26]

또 하나의 문제점은 부소는 당시 국경 외곽인 상군에 있었다는 것이다. 시황제의 명령 때문에 부소는 상군에서[27] 만리장성 건설 감독을 맡고 있었는데 진나라 수도 함양(오늘날 시안)과 당히 먼 지역이다. 그리고 가뜩이나 부소는 진시황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는 데다 부소는 왕의 장남일 뿐 정식 계승자 직위인 태자 직위를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사기에 따르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지만 황족 중 누군가가 부소의 승계 유서를 조작하거나 혹은 부소의 계승에 반대해서 함양이나 함곡관의 문을 걸어잠글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함양을 선점한 세력과 몽염 등 부소 일파간의 진나라 내전의 가능성이 높았고 이런 상황에 육국 반란까지 겹친다면 진나라로서는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단, 부소가 왕위를 계승받는 상황이라면 그에 맞는 조치가 함께 취해졌을 것이긴 하다. 예를 들어 시황제가 사망하기 직전에 미리 부소를 함양으로 부르라고 하던가... 그리고 어떤식으로 가정해도 호해가 황제가 되는것보단 리스크가 적은 게 사실.

초한시대 당시 인물들 같은 경우엔 계포가 '진시황이 그렇게 국력을 낭비[28]해대니 진승에게 빌미를 준 거 아니냐?'고 까는 등 호해보단 시황제에게 더 책임을 물었던 듯. 실제로 장한이 처음 한 말이 당장 데려갈 군대가 없다는 것이기는 했다.(정확히는 적이 코앞이라 당장 징집할 시간이 없다고 한거라 맞지않다. 흔히 여산릉에 노역형중인 죄수들만 끌고 나간것으로 잘못된 이해가 퍼져있는네 죄수부대로 처음에 출병하고 이후 징발한 대규모 병력을 추가로 지원 했다는 기록이 사기에도 나온다)

3.8.3. 전국시대 재시작 설

부소가 육국의 부흥 운동을 진압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함곡관 서쪽으로 후퇴하여 옛날 육국 유민들의 반발을 막아 옛 진나라 본토는 건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렇게 되면 진 제국은 일시 축소되고 전국시대로 돌아가는 형세가 된다.[29] 서진? 실제 위의 통일설에서 언급한대로 부소는 다른 지역은 물론 원래 진나라 국민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반대로 호해의 평가가 개판이었던 이유가 행적 자체가 나쁜 이유도 있었지만 적서 차별이 심한 법가 국가 진나라에서 장남을 제치고 제위에 오른 것 자체가 엄청난 감점 요소였다.[30] 이 때문에 호해가 등극한 직후 대규모 숙청을 벌여 형제는 물론이고 특이하게도 누이들까지 잔혹하게 죽이고 수많은 대신과 말단관리까지 처형하여 조정에 사람이 없을지경이라는 표현이 쓰일만큼 참사가 벌어진다. 부족한 정통성에 무리수를 두어 사실상 중앙정부가 반송장이 되어 버린것이다. 그리고 진나라 백성들이 호해는 싫어했지만 진나라 왕족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는데 우선 조고가 이세황제를 시해했음에도 황제로 즉위하지 못하고 시황제의 자손(?) 자영을 황제로 받들어야 했고, 광무 대치 때 유방이 항적을 비난하는 10개 죄목 가운데 시황제의 무덤 도굴과 진왕 자영 살해를 가지고 항적을 비난한 것으로 보아 진나라 왕실에 대한 지지가 제법 남아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고, 이런 진 왕실의 지지는 항복한 자영을 자비를 베풀어준 유방이 옛 진나라 본토인 관중 지역을 빠르게 장악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때문에 진나라 계승 1순위인 부소가 제위를 계승했다면 적어도 과거 진나라 백성들의 민심은 다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시황제의 문제도 크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반란이 터진 건 무능함이 여기저기 널리 퍼진 이세황제 호해때라는 걸 고려해보면[31] 적어도 부소의 재능이면 반란해 볼 사람들도 좀 더 지켜볼 수준은 되었을 것이고 부소와 육국의 유민들이 협상을 해볼 여지도 있을 것이며 적어도 함곡관이나 몽염의 군대 등으로 적어도 영호해처럼 단 2년만에 순식간에 망하진 않았을 것이고, 조금만 장기전으로 간다면 진나라 반란군이 초한전쟁 때 보여준 심각한 갈등으로 자멸하거나 적어도 함곡관을 넘을 동력은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란 세력의 수장이 누구인지 생각해보면 가정이 틀릴 것같지 않다 하지만 그런걸 노려보기 전에 망했을 수도 있다.
거기에 또 까이는 호해와 달리 부소는 초나라 반란군 진승이 사칭할 정도로 높게 평가받았기 때문에 협상의 가능성도 높았다. 실제 항적이 금의환향과 초나라 원숭이 행보에서 보여주듯이 반란군의 목적은 진나라를 멸하고 대체 신통일 왕조 건국보다는 과거 봉건 제도와 육국의 자치권의 부활 정도였는데[32] 이런 상황에서 호해보다 평가가 나은 부소가 즉위했다면 진나라 황제가 천자가 되는 주나라식 봉건 제도를 다시 도입하는 방향으로 반란군과 협상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물론 항적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신 제후국끼리 치고받다가 진나라가 재통일 할 것 같지만. 부소의 인품을 생각해보면 폭군도 암군도 아닐 테니 대의명분이 없고 그럼 반란이 크게 따를 리도 없을 것이다. 물론 대의명분 없이 병력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민심은 잃었을 것이고 민심버린 분 인품 쩌는 분중 누가 최후의 승자였는지 보면 결과는 나온다. 물론 그 민심버린 분이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장수라는걸 감안해보면 진나라가 그런 게 가능할 때까지 '군사적으로' 버텨야 한다는 가정이 붙기는 한다.[33] 긍정적인 점은 대부분인 오합지졸인 반진봉기세력과 달리 제대로된 육국의 정예한 군대를 상대로 통일전쟁에서도 활약하고 두만선우가 통합한 흉노도 박살낸 몽염이 멀쩡히 살아있을거고 실제로 "적이 코앞이라 징집할 시간이 부족해서" 죄수들 데리고 싸운 장한이 패해서가 아니라 조고의 트롤링때문에 항복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순수하게 군사적인 상황도 호해와는 비교도 안되게 유리하다. 긴말할거 없이 아무 대응도 안한 호해도 봉기가 시작하고 2년가까이 버텼다

3.8.4. 총평

정리하자면 애초에 진나라의 초대 황제 시황제 대에서 너무 많은 뻘짓이 일어난 것 때문에 나라가 무너지는 건 거의 확정일 수도 있지만 만약 부소가 안 죽었다는 가정이면 몽염과 정예 30만도 고스란히 남았을 것이고 부소의 인품과 군사력 등등을 보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은 가정이다. 대장군 몽염과 정예 30만 명에게 인정받을 정도에 진나라 최후의 명장이라는 장한도 있으므로 호해와는 다르게 개념인으로 보이는 피를 이은 부소라면 어떻게든 민심을 수습해서 선대의 문제점들을 처리해가며[34] 적어도 진나라를 수습해 서진이 동진으로, 북송이 남송이 된 것처럼 진나라 본토라는 명목은 꽤나 잘 유지 가능할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더불어 항우 등 반진연합군의 개판인 연합 상황을 생각해보면 제2의 시황제로써 육국의 부흥운동을 평정하고 재통일을 이룩하여 아무 문제없는 평화로운 통치를 했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있다.
[1] 북방 호인(胡人) 출신이다. 당연히 후한 삼국지 시대의 비의(費禕)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2] 이 때 훗날 평원군으로 불리게 되는 무령왕의 또다른 아들인 조승 또한 진나라가 분열되어 종국에는 분가가 본가를 몰아낸 사례를 언급하며 반대했다. [3] 그럴만 했던 게 무령왕은 오직 병권을 쥐고 대외 군사업무에 치중하려고 주부의 자리의 올랐고 내정을 혜문왕에게 맡겼다. 이는 혜문왕 입장에선 병권 없는 왕의 위치란 것은 언제 내쫒겨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으로 여겼을 것이다. 권력 앞엔 자식도 없는 법이고 애초에 정통성도 없이 왕위에 올랐으니 견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4] 다만 이건 당시 조혜문왕이 성년도 아니었고, 정치경험이 적었던데다가 무령왕은 원래부터 태자 교체 건이나, 진나라 탐방을 직접 가는 등 국정 운영을 즉흥으로 행하던 인물이었다는 반박도 존재한다. [5] 시황제가 죽은 사구는 오늘날 허베이성 인근으로 진나라 변경 중 가장 먼 지역이었고 후술할 부소가 위린시에 있어서 함양에 더 가까이 있었다. [6] 실제로 조나라는 그놈의 곽개 이목을 쫓아내면서 망했고 제나라도 제경왕 후승만 총애하다가 망했다. 그리고 이 모든건 진나라가 꾸민 일이다. 즉 영자영의 말은 "우리가 조나라, 제나라 망하게 한 방식으로 망하게 할 생각입니까?" 라고 한 셈이다. [7] 시황제는 죽을때까지 직접 태자를 책봉하거나 하진 않았으므로, 어디까지나 기존의 서열로 따졌을 경우. [8] 진나라의 중심 사상인 법가 성리학 못지 않게 적서 차별이 심한 사상이다. 물론 진나라도 서자가 왕이 되기도 했지만( 진소양왕, 장양왕) 소양왕은 형이 죽어서 즉위한 사례고 장양왕은 타고난 서열 자체는 낮았지만 그래도 아버지인 효문왕에게 정부인인 화양부인에게서 난 적자가 없었으며 본인이 그 화양부인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효문왕 생전에 후계자로 공인된지라 계승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9]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호해의 형제자매들에 대한 처분이다. 물론 어느 역사에서나 왕위다툼이 있어왔고 승자가 패자를 죽이는 일 또한 흔하게 있어왔다. 그러나 호해와 마찬가지로 황제 1인이 황가 일원 대다수를 싹쓸이해버린 경우는 정말로 흔치않다. 오스만 제국처럼 이게 그냥 당연히되는 나라이거나 남제처럼 개막장인 경우가 아닌 이상은 일어날 수 없는 사례로 특히나 중국사에서는 더더욱 보기 드물다. 하다못해 그런 나라라도 형제들을 학살했지 누나, 여동생까지 죽이진 않았으며 후궁까지 학살하는 일도 없었다. 즉 호해의 이런 행동은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가지 않고서는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할 만큼 엄청나게 정당성이 없는 계승이라는 뜻이다. [10] 시황제의 씨(氏) 조(趙)와 한자는 똑같다. 그러나 이 '조정서'의 제목은 아버지 장양왕이 조나라 인질 핫바지 때 그를 낳았다고 폄하하는 의도가 있다. [11] 사기는 시황제가 평원진 지역에서 병에 걸렸다고 하고, 조정서는 백인 지역에서 병에 걸렸다고 하는 식. [12] 정말 시황제가 부소를 아꼈으면 옆에다 두고 국무를 거들게 했을 거라는 주장이 있는데, 결국 진시황을 승계한 호해는 단 한 번도 정무를 거든 적이 없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13] 몽염의 할아버지인 몽오는 소양왕 때부터 육국의 수십 개의 성을 빼앗은 명장이고 아버지 몽무는 창평군 반란을 진압하고 통일전쟁에서 초왕을 사로잡는 등 굵직한 행적을 많이 남겼다. [14] 신라 원성왕 김주원 참조. 물론 후대의 윤색이라는 설도 있다. 금애종도 완전 같지는 않지만 위기상황에서 친족 완안승린에게 제위를 넘기긴 했다. [15] 한나라 입장에서는 호해가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정통성 측면에서 도움이 될 수 있으니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리 사마천이 사실에 입각한 역사를 작성하고자 노력했어도, 이 시대로부터 200년 뒤의 인물인 만큼 남아있는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할수밖에 없었고. [16] 공식 후계자인 태자는 아니었다 진시황은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때문인지 죽을때까지 태자를 지정하지 않았다 이거 때문에 호혜가 부소를 제끼고 황제가 될 수 있는 배경이되었다. [17] 여기서의 불안정은 약하다의 의미완 다르다. 암군이 나라를 말아먹어 망하는 것과 나라로서 여겨지지도 못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고 나라로서의 불안정함은 후자를 뜻한다. [18] 하다못해 중국사에서 으뜸가는 성군인 수문제가 다스린 수나라도 수양제의 폭정 한번에 망했다. 물론 수문제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 중 하나인 것 못지않게 수양제도 중국 역사상 가장 악랄한 폭군 중 하나였긴 하지만... [19] 한문제, 당태종, 송태종, 명성조등의 사례를 보면 알듯이 즉위 방식이 반란이나 정변등 뒤가 구린 임금이라도 업무능력은 확실히 좋았기에 초창기에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고 확증받는 황제들도 많다. 즉 정통성이 딸려도 능력이 확실하기라도 하면 상관없었을텐데 호해는 정통성도 능력도 심지어 의지조차도 없었다. 실제로 호해 즉위 이후에도 당장에 그렇게 정통성이 부족함에도 정작 진나라 본토에서는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고 진승과 오광도 처음에나 부소와 항연을 사칭했다는데서 보면 옛 육국 사람들에게 정통성이 있는 왕이 즉위했냐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20] 실제로 진 멸망부터 초한쟁패가 끝날때까지 4년도 채 안걸렸다. 아무리 소하가 내정 천재라 해도 4년만에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어낼 순 없었을테니 초한쟁패 당시 쏟아져나온 끝없는 물량과 자원은 진나라가 가지고 있던 것을 거의 그대로 써먹었단 소린데, 이 물량과 자원은 한나라가 몇번이고 초나라에게 대규모 교전에서 털리고도 끝없이 나올 정도였다.물론 너무 많이 써댄탓에 후반가면 거의 오링나서 북방이민족에게 털리긴 했지만 [21] 게다가 이세황제의 병크도 한몫 했는데 봉기가 일어났을 때부터 이세황제가 재빠르게 진압을 명하기만 했어도 그래도 멍하니 함곡관 앞까지 대군이 몰려오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세황제가 유학자들이고 뭐고 다 불러놓고 대책을 내놔봐라 해서 대책을 내놨는데 그 대책이란 "이놈들은 보통 도적떼들이 아니니 재빨리 때려잡아야 합니다."라는 너무 당연하지만 효과적인 대책이었다. 그런데도 이세황제는 받아들이기는 커녕 불쾌해하며 심지어 그런 말을 한 이들을 죄다 죽여버리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 더욱이 숙손통이 이세황제를 달래기 위해 "쟤네들은 실은 별것 아닌 도적떼고 가만 놔두면 알아서 진압될 겁니다." 라고 말하자 좋아한걸 보면 몽염이 살아있는들 결과는 비슷했을 것이다. [22] 단적으로 명나라의 경우, 중앙집권 체제가 진나라보다 훨씬 발달해있던 것을 감안해도 장장 120년 동안 암군들만 걸려서(중간중간에 괜찮은 인물이 나오긴 했지만 재위기간이 너무 짧았다) 호해가 넷이나 나왔다고 할 만한데, 그런데도 명나라는 많이 망가졌어도 당장에 망하지는 않았다. [23] 실제로 뭉쳐도 될까말까인데 이들은 함곡관에 닿기도 전에 분열부터 했다. 반면 유방은 자기 세력만으로 어택을 날렸고 항적은 거록대전을 통해 근방에 있는 제후들을 다 자기 밑으로 모이게 했기에 분열없이 함곡관 공략에 성공했다. [24] 사실 후대의 역사를 보면 폭군 한명의 폭정으로는 기껏해야 쿠데타나 발생하지 멀쩡하던 나라가 망하기도 쉽지않다. 특히 그 폭군이 능력은 있다면 불가능에 가깝다. 이미 어느정도 망조가 든 나라에 결정타 역할을하는 게 보통이고, 멍청하기까지해서 대규모 원정을 대실패하는 정도는 해야 겨우 가능한 정도. 시황제의 폭정을 훨씬 뛰어넘어 중국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꼽히는 수양제 조차도 전국적인 반란이 시작되었을때 뜬금없이 조정을 버리고 혼자 강도의 별궁에 처박혀 허송세월을 보내지만 않았다면 수습이 가능했을 거라는 견해가 많다. [25] 각자 선대의 정치로 인한 부분은 배제해도 승계과정과 정통성이 하늘과 땅차이고 전국시대의 잔존세력이 숨죽이며 남아 있던 호해와 구시대 세력이 싹 날라가고 주의할게 공신과 외척정도만 남은 혜제는 주어진 환경이 비슷한 게 드믈정도라 이둘의 결과로 선대를 평가하는 비교에 의미는 없다. 그리고 조고의 허수아비를 넘어 따가리로 보일 지경에 불과한 호해와 달리 혜제는 그 여후를 상대로도 폭주를 그나마 억제해서 혜제 생전엔 여씨일가의 전횡은 없었다. [26] 서주가 망한 후 진나라 통일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500여년에 달한다. 그 500여년동안 분열된걸 갑자기 합친다면 후유증이 없을 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초나라 같은 경우는 그 시작이 황하 문명과는 다른 남쪽에서 발생한 이질적인 국가였다. 이처럼 중원화 되었다고는 해도 이질적인 국가들까지 모조리 통합한다는 것은 엄청난 행정적 부담이 따를 가능성이 있다. [27] 상군은 산시성 인근으로 부소는 만리장성 공사장인 오늘날 위린시에서 건설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28] 맞는 말이긴 하지만 진의 거점인 관중 일대의 낭비된 국력과 피폐해진 땅을 기반으로 천하 통일한 게 바로 다음 타자인 유방이다... [29] 물론 진나라 중심 체제로 개편된다면 서주시대 재림이다. 서주보다야 본토가 넓긴 하지만. [30] 그것도 다른 적합한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가령 장양왕은 아버지인 효문왕에게 적자가 없었고 적모인 화양부인이 자신을 지지해서 계승할 수 있었다. 심지어 효문왕이 죽기 직전에 지명한 것도 아니고 이미 죽기 7년 전에 후계자로 지정된 상태였다) 이해 불가능한 이유로 올랐으니 뒷말이 없는 게 이상하다. [31] 그전에도 기미가 없던 건 아니지만 시황제 생전에는 있어봤자 장량의 암살 미수 사건 정도였고 대부분의 반란군도 때만 보면서 쉬쉬하고 있었다. [32] 물론 말이 이랬지 진승 등 여러 이들이 왕을 칭한데서 보듯 진나라 멸망은 몰라도 봉건 제도나 육국의 자치권은 허울에 가까웠을 것이다. [33] 가령 항적이 봉기를 일으켜서 진나라를 터는데 1년도 안 걸린다면 이런 가정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실제로 항적조차도 자기 힘으로 함곡관을 깨부수진 못했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은 가정도 아니다. 다만 항적이 강해도 너무 강해서 함곡관으로 버티는 것만 가능하지 나머지 반진연합군을 깨부수는건 못하거나 힘들 것이다. 어찌되었든 함곡관만 아니면 적을 몰살시키다시피 하는 적을 상대로 쉬이 덤비진 못할테니. [34] 일단 만리장성의 건설 의도 자체는 합당한 것이었다. 오랑캐는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했고 기나긴 중국의 국경상 그걸 차단하기 위한 합리적인 방법이 만리장성인 것도 맞다. 문제는 그걸 너무 서둘러 짓겠다고 강제 징병과 너무 엄격한 규율을 정하여 백성들을 동원한 것이 문제라는 것. 즉 장기 플랜을 세우고 합당하게 노역자들을 대접해 주면서 착실히 쌓았으면 민심이 그리 문제될 리가 없다. 그 당시에 공사 현장에 동원되는 건 백성의 의무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 어느 정도 납득할 선은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