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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38:52

박제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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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 시절2. 관직 생활3. 을사조약4. 박제순 내각
4.1. 이근택 암살 미수 사건4.2.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발령4.3. 헤이그 특사 사건4.4. 백성들의 반발과 사임
5. 사퇴 이후6. 사망

1. 어린 시절

1858년 12월 7일 경기도 용인에서 박홍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 선대를 거슬러가면 선조의 딸 정안옹주(선조)와 박미 부부의 8대손, 여말선초 대신 박은의 16대손이다.

그의 부친 박홍수는 유신환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동문이었던 김윤식과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으며 박홍수의 아들인 박제순도 김윤식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를 유지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특별히 암기에 뛰어났고 일찍 글을 깨우쳤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모두 낙방하게 된다.

2. 관직 생활

1883년(고종 20)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1883년 4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를 시작으로 10월 주차 톈진종사관, 1884년 1월 기연해방군사마, 3월 주차 텐진독리통상사무 종사관에 임명되었다. 1885년 3월 홍문관 부교리, 5월 사헌부 장령, 1886년 1월 주톈진대원, 2월 주차 톈진통상사무를 역임하고 4월에 귀국했다. 1886년 7월 승지로 임명되면서 다시 톈진으로 부임하여 1887년 6월까지 근무했다. 1887년 7월 톈진에서 귀국한 뒤 11월까지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참의내무부사, 경주부윤에 임명되었다. 1888년 5월 인천항 통상사무 감리, 1889년 3월 전환국 총판이 되었다. 1890년 1월 내무부 협판으로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주재 공사에 임명되었으나 현지에 부임하지 않았다. 1890년 10월 형조참판, 12월 공조참판, 1891년 1월 한성부 좌윤, 3월 형조참판, 6월 성균관 대사성, 9월 한성부 우윤, 10월 호조참판, 1892년 7월 예조참판, 8월 형조참판, 1893년 3월 호조참판을 지냈다.

1893년 3월 11일 동학교도들이 척왜양창의를 내세운 보은 집회가 날로 확산되자 3월 25일 고종의 밀명을 받아 위안스카이 청나라 군대의 파병 문제를 협의한바 있다. 1893년 7월 이조참판, 8월 여주목사를 거쳤고 1894년 4월 장흥부사로 임명되면서 보외시행사를 겸했고 6월 전라도관찰사, 7월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충청도관찰사로 재임 중 관군 및 일본군과 연합해 공주에서 동학 농민군 진압에 앞장섰다. 1895년 10월 중앙으로 돌아와 제용원 태복사장에 임명되고 11월 외부협판이 되어 제3차 김홍집 내각에 기용되었다. 아관파천 직후인 1896년 2월 중추원 1등 의관으로 승진했으며 8월 외부협판으로 외부대신 서리를 맡았다가 10월 외부대신, 11월 농상공부대신 겸 외부대신을 맡았다. 1899년 1월 청국의약전권대신으로 한청 조약, 간도 행정관리권 교섭, 경흥· 의주 개방 단행과 같은 주요한 외교 교섭을 주도했다. 1899년 6월 궁내부철도용달회사 사장을 맡았고 10월 외부대신, 비서원경, 장례원 장례를 겸했다.

1900년 3월 직조학교 교장, 12월 형법교정 총재도 겸하면서 육군 참장에 임명되었다. 1900년 3월 거제도 협약을 맺었고 1901년 3월 벨기에와 수호통상조약, 4월 일본과 소총 및 탄약 매입 계약을 체결했다. 1901년 8월 만한교환설이 대두되자 한일 제휴를 상주하였고 10월 의정부 찬정에 임명되었으며 11월 특명전권공사를 겸하면서 만한교환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의향을 탐지하고 한일 동맹, 망명자 문제, 재정 원조 등을 타진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일본국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902년 1월과 3월 주청전권공사에 임명된 후 일본과 청나라에 삼국 동맹을 제안했지만 간도 문제를 둘러싼 한청 양국의 의견 대립과 일본의 반대로 성립되지 않았다. 1904년 1월 귀국해서 외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4월부터 11월까지 원수부 회계국 총장, 법부대신, 관제이정소 의정관을 역임했다. 1905년 3월 농상공부대신, 6월 학부대신, 7월 농상공부대신을 맡았는데 8월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한국 연해 및 내하 항행에 관한 약정서」에 반대하며 사직소를 올렸다. 9월 평안남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가 10일 후 외부대신으로 다시 입각했다. 이후 먼 친척인(사촌형 박제당의 손자, 즉 삼종손) 박영효를 사면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3. 을사조약

고종실록 (1905.12.1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의정부 의정대신이며 학부대신 이완용,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군부대신 이근택 등이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요지는 이러하였다.
'생각건대 신 등이 훌륭한 왕조에 죄를 짓고 삼가 처분을 기다린 날도 대체로 며칠이 되었는데 (중략) 가만히 보건대 시국에는 역시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신 등이 요즘 상소문들을 보았는데 거기에서 규탄하고 논의를 버린 것들은 대체로 신들이 인정하는 잘못과 같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그들은 나라가 이미 망하고 종묘사직이 존재하지 않으며 백성들은 노예로 되고 강토는 영지로 되었다고 인정하는데 이렇듯 이치에 어긋나는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저 무리들이 과연 새 조약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조약 체결의 과정에 대하여 말한다면 일본 대사 이등박문이 서울에 올 때에 어린애들과 심부름꾼들까지도 다 이제 중대한 문제가 꼭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과연 11월 15일 두 번째로 폐하를 만나본 뒤에 심상치 않은 문제를 제출하니 폐하가 곧 승인하지 않고 의정부에 맡겼습니다. 이튿날 16일 참정 대신 한규설, 탁지부 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및 신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이근택은 대사가 너무 조르기 때문에 이 해우관에 가서 모였고 경리원 경 심상훈도 그 자리에 있었으며 신 박제순은 공사 임권조의 요청에 의하여 혼자서 이 공사관에 갔습니다. 그런데 모두 전날 제출한 문제를 가지고 이것저것 묻고 대답하고 하였으나 신 등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밤이 되어 헤어져 돌아와 폐하의 부름을 받고 나가서 묻고 대답한 말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이어 '내일도 또 일본 대사관에 가서 모일 텐데 만약 그들의 요구가 오늘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라면 신 등도 응당 오늘 대답한 것과 같이 물리쳐 버리겠습니다'라고 하고는 물러나왔습니다. (중략) 폐하가 말하기를, '그러나 아까 이미 나의 뜻을 말하였으니 잘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으며 한규설과 박제순 두 사람은 말하기를, '신 등이 한 사람은 수석 대신이고 한 사람은 주임 대신으로서 폐하의 지시를 받들어 시행하는 데 불과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여덟 사람이 일제히 물러나 나오는데 한규설과 신 박제순은 폐하의 지시에 따라 도로 들어가서 비밀리에 지시를 받고 잠깐 뒤에 다시 나와 모두 휴게실에 모이니 일본 공사가 어전에서 열린 회의에서 어떻게 결정되었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한규설이 대답하기를 '우리 황제 폐하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뜻으로 거듭 말씀드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사가 말하기를, '당신네 나라는 바로 전제국이니 황제 폐하의 큰 권한으로써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면 나는 이 조약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으로 알지만 여러 대신들은 정부의 책임에 대해서 전혀 캄캄하여 오로지 폐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러한 대신들은 결코 묘당에 들어갈 수 없으며 참정 대신과 외부 대신은 더욱이 갈아버려야 하겠습니다. (중략) 다음으로 (대사가) 외부 대신에게 어떻게 했는가 하고 물으니 신 박제순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명령아 아니라 바로 교섭이니 찬성과 반대가 없을 수 없습니다. 내가 현재 외부 대신의 책임을 맡고서 외교권이 넘어가는데 어찌 감히 찬성한다고 말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사가 말하기를 '이미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지시가 있었으니 어찌 명령이 아니겠습니까. 외부 대신은 찬성하는 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중략) 신 이지용, 신 권중현, 신 이완용, 신 심근택 및 민영기, 이하영은 다 문구를 첨삭하는 마당에서 변론하는 것이 있었으나 이때 한규설은 몸을 피하기 위하여 갓도 쓰지 않은 맨머리로 폐하의 침실에 뛰어들었다가 외국인에게 발각되어 되돌아 들어왔습니다. 마침 그때 양편에 분분하던 의견이 가라앉아서 일본 대사가 직접 자기가 붓을 들고 신 등이 말하는데 따라 조약 초고를 고치고 곧 폐하에게 바쳐서 보고하도록 하여 폐하가 자세히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가 부강해진 다음에는 이 조약이 무효로 되어야 하니 이러한 뜻의 문구를 따로 첨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하여 다시 폐하가 지시하니 대사가 또 자기가 직접 붓을 들어 더 적어 넣어서 다시 폐하가 보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조인하는데 이르렀던 것입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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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체결 당시 작성된 대한제국 측 문서와 일본 측 문서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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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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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정부(日本國政府)와 한국 정부(韓國政府)는 두 제국(帝國)을 결합하는 이해공통주의(利害共通主義)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국이 실지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때까지 이 목적으로 아래에 열거한 조관(條款)을 약정한다.

제1조 일본국 정부는 동경(東京)에 있는 외무성(外務省)을 통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監理指揮)할 수 있고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와 영사(領事)는 외국에 있는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전히 하는 책임을 지며 한국 정부는 이후부터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한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闕下)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京城)에 주재하면서 직접 한국 황제 폐하를 궁중에 알현하는 권리를 가진다. 일본국 정부는 또 한국의 각 개항장과 기타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곳에 이사관(理事官)을 두는 권리를 가지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밑에 종래의 재한국일본영사(在韓國日本領事)에게 속하던 일체 직권(職權)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 사무를 장리(掌理)할 수 있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의 조관에 저촉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한다.

이상의 증거로써 아래의 사람들은 각기 자기 나라 정부에서 상당(相當)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기명(記名) 조인(調印)한다.

광무(光武) 9년 11월 17일
외부 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

메이지(明治) 38년 11월 17일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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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순 : 대감, 사무는 위기에 절박했으므로 우리들의 생사가 판가름나는 중요한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물러서는 것은 단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일 뿐입니다. 의정부의 여러 대신들의 의지와 기개를 살펴보고 지난 일들을 미루어보아 확신할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대감께서와 외부대신인 이 사람, 둘이서라도 고집해서 물러서지 않는다면 이토가 제 아무리 버틴들, 효과가 없으면 자연히 되돌아 쫓겨나갈 것이 아닙니까.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외론이 어떠할지 모를 일입니다. (중략) 이미 이 사람의 뜻은 정해져 있습니다. 힘이 미치지 못하면 죽을 따름이지요. 가사에 대해서는 이미 유서를 족질에게 부탁했으므로 다른 걱정은 없습니다.

한규설 : 다른 대신들이 설혹 다른 의견을 제출한다 해도 주무 대신이 끝까지 버티고 부결하면 무슨 조약이더라도 성립이 될 수 없으니 두 어깨가 무겁겠오.
1905년 10월 을사조약 체결 당시 박제순은 처음 고종과 각료들이 회담할 때 참정대신 한규설과 함께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했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이 결과를 바꾸기 위해 내각의 관리들을 감금하고 억압한 후, 관료들의 의견을 물었다. 당시 외부대신이었던 탓에 박제순은 다른 이들보다 먼저 지명되어 "어제 하야시 공사와 회견할 때에 대략 의견을 말한 바와 같이 본 협약안에 대해 단연코 거부하기로 한 것인데, 이를 외교 담판으로 본인에게 타협하라고 하는 것은 감히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명령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않는가"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토는 "명령이란 무슨 뜻인가. 폐하의 명령이라면 조인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은가"라고 했다. 박제순은 명령이라며 반대하다 말꼬리를 잡힌 것이다. 그는 한두마디 변명을 하다가 자신의 말을 취소할 수 없게 되었고 이토는 "당신은 절대적으로 이 협약안에 반대한다고는 볼 수 없다. 폐하의 명령만 내린다면 조인할 것으로 본다고 믿는다"고 찬성으로 간주하자 그는 침묵하고 말았다.[1] 이 이후의 회의에서는 이완용 이하영이 대세를 장악했다. 그들의 논리는 조약의 체결을 거부하면 일본이 무력으로 한국을 침략할 것이므로 차라리 체면을 살리면서 이를 들어주자는 것이었다.

결국 을사조약 체결에서 외부 대신으로서 학부 대신 이완용의 입장에 찬성해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자 민족 반역자가 되었다. 다만 한규설과 조약문 수정에 참여하지 않기는 했다.[2] 그렇지만 이후에도 무책임으로 일관한 탓에 경술국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체결 직후 일제가 그의 외무대신관인을 훔쳐 강제로 서명했다고 한다. #

4. 박제순 내각

파일:TqwniMCh.jpg
《조선귀족열전》
(朝鮮貴族列傳)
(박제순은) 오적 중에서 글도 있고 교활해서 오랫동안 전 국민의 타매[3]를 견뎌왔다. 그러나 외부의 압력이 날로 심한 것을 우려해서 지위는 높고 녹봉은 후하지만 일찍부터 밤이 되면 방황했다.
이때 나인영 오기호의 옥사가 일어나자 박제순은 크게 두려워하기 시작해서 사람들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니 차라리 피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고 약간 공분을 토하면서 사직했다"고 한다. 당시 나인영 등이 폭탄을 미국인이 보냈다라며 박제순과 이지용에게 보냈는데 박제순 집안 사람이 열려고 하는 것을 박제순이 막아 겨우 살아났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황현, 매천야록

을사조약 체결 직후 박제순과 을사조약에 동의한 을사오적들을 처단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체결 닷새 후인 1905년 11월 22일 박제순은 오히려 참정대신에 임명되어 을사조약 직후 정국을 이끌게 되었다. 박제순은 권중현, 성기운, 이하영 등과 친일 내각을 구성해 정국을 이끌어갔지만 을사조약 체결에 대한 비난은 거셌다. 내부대신(현재의 행정안전부장관)은 이지용이 유임되었고, 탁지부대신(현재의 경제부총리)에도 민영기가 유임되었으며, 학부대신(현재의 교육부총리)도 이완용 그대로 유임되었다. 군부대신(현재의 국방부장관)에 권중현 전 농상공부대신이 임명되었고, 법부대신(현재의 법무부장관)에 이하영이 임명되었다. 농상공부대신(현재의 농림축산식품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 성기운이 임명되었다.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된 인물들이지만 이완용을 제외하면 오히려 조중응, 이병무, 윤덕영 등의 강성 친일파들에 비해 온건파들이다. 송병준, 이용구 등의 일진회는 이들이 친일 성향이 약하다며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을사조약으로 국가의 외교권을 박탈당한 사건의 총책임자를 또다시 재신임하는 것에 이어 오히려 승진시켰다는 것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박제순 내각은 탄생부터 삐걱대고 있었다.

4.1. 이근택 암살 미수 사건

파일:기산도.jpg
파일:李根澤.jpg
기산도와 암살시도를 당한 이근택 당시 군부대신
군부대신 이근택씨가 재작일 하오 12시경 그의 별실과 함께 막 옷을 벗고 취침하려 할 무렵에, 갑자기 양복을 입은 누구인지 모르는 3명이 칼을 들고 돌입(突入)하여, 가슴과 등 여러 곳을 난자하여 중상을 입고 땅에 혼절한 바, 그의 집 청직(廳直)이 김가(金哥)가 내실에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괴이히 여겨 탐문하고자 하니, 갑자기 양복 입은 3명이 안에서 급히 나와 놀라 누구냐 하고 물은 즉, 이들이 역시 칼로 김가를 타격하여 귀와 어깨에 부상을 입히고, 곧바로 도망갔다. 이 군부대신은 한성병원에서 치료중이나 부상이 극중(極重)하여, 위험이 팔구분(八九分)이라더라.
대한매일신보 1906년 2월 18일, <이씨봉자(李氏逢刺)>

1906년 2월 16일 밤, 유약소 소속의 기산도 이근택 당시 군부대신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는 당시 을사오적에 대한 삼엄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이근택에게 13곳의 자상을 입히는데 성공하지만 끝내 암살에는 실패한 채로 체포된 사건이 발생한다. 이근택은 중상을 입은 채로 호송되어 새벽 2시경에 한성 병원 특별실에서 치료를 받았고 이후 1달간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졌으며 하인 역시 자신의 집에서 치료를 받았다. 기산도는 현장을 빠져나왔지만 인조 수염을 현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덜미를 잡혀 1906년 2월 18일에 체포되었다. 기산도는 공초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하여 5적을 주살하기로 한 이가 800명이라고 밝혔고 5적 주살을 지시한 이는 "고 민충정( 민영환), 조충정( 조병세), 심창정( 심상훈) 3인"이라고 밝혔다. 이 일로 참정대신 심상훈이 체포되었고 관련자 수십 명이 추가로 체포되었다. 기산도는 "오적을 살해하려는 사람이 어찌 나 혼자이겠느냐? 탄로난 것이 그저 한스러울 뿐이다"라고 입장을 밝혔고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박제순을 비롯한 을사조약 체결자들에게 상당히 불안함을 안겨주게 되며 을사오적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4.2.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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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 일본 과는 무관하니 철저히 조사 후 보고하라"
- 박제순

러일전쟁 직후 일본은 독도의 지정학적 가치에 눈독을 들였고 1905년 2월 22일 일본은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발령해 독도를 일본령으로 편입하는데 요지는 '독도는 주인이 없는 무주지이므로 일본령으로 편입한다'라는 것이었다. 1906년 3월 울릉도를 방문한 일본 시마네 현 관료들은 당시 울도군수 심흥택에게 일본이 독도를 자신의 영토로 편입했다는 것을 알렸고 이 일은 강원도관찰사 이명래를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보고된다. 박제순 당시 참정대신은 이에 대해 일본의 행위를 비판하며 "독도는 일본 땅과는 무관하니 철저히 조사 후 보고하라"라며 이명래에게 다시 조사하라고 지령을 내려 사실 관계를 조사했으나 박제순 본인이 체결한 을사조약으로 인해 외교적으로 어떠한 대응도 할 수 없었다.

4.3. 헤이그 특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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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1504231843_23110923047588_4.jpg
《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érence de la paix)》
1907년 7월 5일자 기사

고종은 계속되는 일제의 침탈을 최대한 막아내고자 하였으며 의외로 보일 수도 있으나 박제순 참정대신을 비롯한 몇몇 관료에게 이를 전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4] 그렇지만 고종은 끊임없이 이를 추진해 이용익 전 탁지부대신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해 제1차 한일협약의 부당함과 일제의 침탈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이용익 전 탁지부대신은 원래 보부상 출신으로 발이 빨라 하루에 천 리를 걷는다는 둥, 축지법을 쓴다는 둥의 소문이 붙은 인물로 이 밀령을 성실히 수행할 적임자로 보였으나 이용익이 출국해 중국 상하이 연해주를 오가던 도중 김현토라는 인물에게 살해당하며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후 고종은 사실상 유폐당하며 누구를 어디서 만나는지 모두 감시당하는 상황이어서 이준 검사를 파견했고 이준이 서울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합류해 이준과 이상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이범진을 찾아갔다.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특사 일행은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여기서 10일 가량 소요하며 활동에 필요한 외교 서류들을 준비하는 한편 니콜라이 2세를 만나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1906년에는 이미 러일 협약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처음 이범진에게 만국평화회의 초청 사실을 알렸던 1904년과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결국 이들은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지 못했으며 고종의 친서만 외무부에 접수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범진의 주재로 러시아 호위병의 호위를 받아가며 베를린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러나 대한제국 사절단의 만국평화회의 회의장 입장이 거절되며 고종의 마지막 승부수는 사실상 실패로 끝나게 되고 이는 고종의 강제 퇴위, 박제순의 실각, 경술국치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4.4. 백성들의 반발과 사임

파일:오적 암살단.png
오적 암살단의 모습.
왼쪽부터 차례대로 이기, 나철, 홍필주, 오기호
.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본과 친일파들은 고종에게 퇴위하라며 압박하기 시작했다. 고종은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을 달래기도 하면서 자신의 퇴위를 막아보고자 했으나 이완용은 고종을 믿지 않았고 이완용은 1906년 12월 박제순에게 "고종을 그대로 두면 정부 대신을 빈번하게 경질해서 친일 내각이 붕괴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는 내각이 일치협력해 황제에게 대항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지만 박제순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송병준이 박제순 내각을 강하게 비난하며 나섰으며 심지어 1907년 5월 2일 일진회는 박제순 내각 탄핵문을 제출하기도 했는데, 박제순 내각이 덜 친일적이라는 게 이유였다. 박제순 등 내각 인사들에 대한 암살 시도 역시 일어나 자리에 계속 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박제순은 1907년 5월 22일 사임했고 그 자리는 이완용이 차지했다.

내각 인사들도 교체되어 내부대신은 이지용에서 임선준, 군부대신은 권중현에서 이병무, 농상공부대신은 성기운에서 송병준으로 교체되었다. 본래는 이들만 교체하려 했으나 민영기 이하영도 사의를 고집해 탁지부대신은 민영기에서 고영희, 법부대신은 이하영에서 조중응으로 교체되었다. 이는 비교적 온건적인 친일 성향을 갖고 있던 이들에서 강경한 친일파들로 교체되어 고종을 퇴위시키기 위한 내각이나 다름없었고 결국 이들의 압박으로 고종은 황제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고종은 이완용이 궁궐에 들어와도 만나주지 않고 박제순의 사직 후 매일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저주했다고 전하고 있다.

5. 사퇴 이후

파일:091152026000.jpg
노년의 모습[출처]

참정대신에서 물러난 이후 집에 틀어박혔고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친했던 김윤식 등을 초청해 를 읊고 을 마시며 짧은 운둔 생활을 지냈다고 한다. 정미 7조약 때인 1907년에는 대한제국 중추원 고문, 1909년에는 이완용 내각의 내부 대신을 지냈다가 이완용이 명동성당에서 이재명에 의해 부상을 입게 되면서 내각총리대신 권한대행을 맡았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동의하며 이완용 등과 함께 경술국적이 되는데 조선총독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으로도 활동하면서 6년여 동안 매년 1600원, 자작 작위와 함께 10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은사공채의 원금은 5년 거치 50년 이내 상환으로 연 5푼의 이자가 매년 3월과 9월에 지급되었다.[6] 1915년 11월 다이쇼 덴노 즉위 대례식에 참석한 후 《경학원잡지》(1915.12)에 " 하늘을 바라보고 성인을 우러르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립니다."라는 즉위 대례식 헌송문을 천황에게 지어 바쳤다. 이후에는 경학원 대제학이 되어 유교 진흥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유람을 즐기기도 했다.

6. 사망

파일:<매일신보> 1916.6.22.4면.jpg
1916년 6월 22일 매일신보에 실린 부고
"매국적 제순이 죽어, 생전의 산 갓흔 죄를 지고"
- 신한민보 (1916.07.27)

1916년 6월 20일 당시 만 57세에 경성에서 병으로 사망했는데 사망 후 천황의 특지로 종3위에 서위되었다. 박제순의 자작 작위는 그의 아들 박부양에 습작되었으며 을사오적 가운데에서는 가장 먼저 사망한 인물이다.

1945년 광복 이후 을사조약 한일강제병합에 협조해 을사오적 경술국적에 포함된 친일반민족행위자였으니 당연하게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그의 작위를 습작한 박부양과 함께 선정되었으며 2006년 대통령직속기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 조사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1] 한규설에 따르면 박제순은 "4개조안을 수락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지 않았으므로 찬성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이토가 위협하자 "조약 체결에 대해서는 나는 모르겠오,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했고, 이에 이토는 "외부대신이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니 찬성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오"라고 하였다. [2] 반대하거나 중립의 입장을 지켰던 이하영, 민영기는 조약문 수정에 참여한다. [3] 침 뱉고 꾸짖음 [4] 헤이그 특사 사건 직전 고종은 박제순과 상의를 했었다고 한다. [출처] 《이미지로 보는 한일병합사(映像が語る日韓併合史)》 [6] 1910년대 10만 원은 현재의 시가로는 15∼20억에 달하는 거금이다. 당시 10만 원의 5% 이자는 5,000원, 현재의 시세로 따졌을 때 최대 1억 원의 이자를 매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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