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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부(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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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산하 기관4. 소속 관원5. 복장6. 청사7. 매체에서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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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元帥府

대한제국 원수부.
통수권 기관으로, 대한제국 황제의 직속 기구였다.

2. 상세

대한제국에는 이미 국방을 담당하는 부서 군부가 있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선포 직후 독립협회의 부상, 수차례의 쿠데타 모의, 독살 미수 사건 등 고종과 대한제국을 위협하는 정치적, 사회적 불안 요소가 많았다. 기존 군 고위급 인사들은 친일정권의 개혁 아래 상당수 친일 인사로 변모하였다. 믿을만하던 장교들은 친일정권에 의해 축출되고 좌천되었다. 이원회나 신정희는 고령이어서 은퇴하였고 비교적 젊은 홍계훈마저 을미사변 당시 사망했다. 시위연대마저 힘을 못 쓰게 되고 남은건 충성하는 소수의 간부들과 의병에 가담한 병력쁜이었다. 게다가 일제는 독립협회를 앞세워 고종의 대한제국 군사력 강화 방해에 힘을 쏟았다. 그래서 고종은 군사 조직을 황제를 중심으로 모을 필요성을 느꼈다.

친일파가 정권과 군을 장악한 시점에서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일제에 강력하게 저항하며 근대화를 주도했다. 일본군 군사고문과 한성 주차군 등의 감시를 받던 친위대는 을미의병 진압을 위해 한성을 떠나버렸고, 순간적으로 한성 내 힘의 공백기가 생기자, 러시아 수병들이 입경했고 곧바로 신용할 수 있는 보부상과 순검들, 그리고 친위대에 소속되지 않은 공병대 등이 이를 적극 지원하면서 아관파천을 성공시킨다. 이에 불안 요소들을 정리한 후인 1899년(광무 3년) 6월 2일에 원수부 관제를 반포하여 군부를 능가하는 황제 직속 군령 기관인 원수부를 창설했다. 그리고 고종 스스로 대원수(大元帥)가 되어 육, 해군 가릴 것 없이 대한제국군 전체를 통솔했다. 원수부는 고종의 국방력 증강 계획의 정점에 해당한다. 그 이전에도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부터 최대 관심사가 국방력 강화였다. 아관파천 감행으로 왕권을 회복한 이래 대한제국 창건을 거치며 고종이 최우선으로 추진한 정책이 바로 첨단 무력의 확보였던 것이다.

유사한 기관은 비슷한 시기 프로이센 왕국군 독일 제국군 군사내각(Militärkabinett)이다. 1814년 설립된 프로이센 군사내각은 프로이센 국왕/독일 황제에 군사적인 조언을 하는 황제 개인 직속의 부서인 내각시스템[1]의 하나로, 프로이센 전쟁부나 참모본부와는 독립된 존재였다. 군사내각장관(Chef des Militärkabinetts)은 군사 관련 주요 부서들 중 유일하게 황제를 주마다 여러 차례 만나 논의할 수 있었으며, 참모부나 전쟁부 같은 다른 부서를 거치지 않고 황제와 독대가 가능했다. 독일 황제는 군사내각과 함께 군 문제를 비밀리에 처리했다. 군사내각은 갈수록 거대해져 빌헬름 2세 시기에 가서는 군사권력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다만 이 프로이센의 군사내각 시스템이 대한제국의 원수부 시스템에 영향을 끼쳤는지는 불명이다.
파일:대원수 예복.png
파일:대원수복 고종 원수복 순종.png
<colbgcolor=#29176e> 대원수 예복 <colbgcolor=#29176e> 대원수 예복을 입은 고종(왼쪽)과 원수 예복을 입은 순종(오른쪽)
파일:대원수 상복.png
파일:대원수 상복 고종.png
대원수 상복 대원수 상복을 입은 고종
파일:대원수보 1.jpg 파일:대원수보 2.jpg
대한제국의 국새 대원수보(國璽 大元帥寶). 고종 황제가 제국군 대원수로서 결재할 때 사용했다.
대원수가 국방과 용병, 군령을 장악했고 군부와 서울 및 지방 각 부대를 지휘, 감독했다. 이는 군권 전부를 황제가 직접 가진다는 의미였다. # 모든 군령은 황제가 직접 원수를 경유해 하달했다. 원수는 황태자가 역임했다.

원수부 설치 후 군대편성, 교육기관, 충원계획 등 군부 권한 대부분을 원수부에서 가져갔다. 따라서 군부는 힘이 약해져 일반 사무행정의 군정권만 가지게 되었다. 또한 도성을 방어하는 친위대 시위대, 궁궐을 지키는 경호대를 원수부 소속에 두었고, 이밖에도 헌병, 포병, 공병, 치중병, 군악대 등을 만들어 완전한 근대식 군대 편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중이던 1904년(광무 8년) 9월에 일제는 군제개혁을 실시하여 원수부를 이름뿐인 기관으로 전락시켰고 그해 말에는 완전히 폐지해 황제의 군권을 약화시켰다. 이후 일제는 원수부의 권한을 군부로 넘겼다. 원수부가 폐지된 후 촬영된 순종의 군복 차림 사진을 보면 팔소매 계급장을 대장 계급장으로 착용하고 있어,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원수부 폐지와 함께 대원수, 원수 계급 자체가 없어지고 황제와 황태자의 계급이 대장으로 격하된 것으로 추정된다.

3. 산하 기관

원수부에 속해있던 주요 관서 및 업무들이다.

4. 소속 관원

무관만 될 수 있었다. 각 국마다 국장(장성급), 부장, 국원, 하사가 있었다. 국장은 대원수(황제)의 뜻을 받아 내각의 각 부 대신들에게 지령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국장 명칭은 1900년( 광무 4년)에 총장으로 바뀌었다. #

군무국에는 부장 2명, 영관 국원 6명, 위관 하사 10명을 두었고, 검사국에는 부장 1명, 영관 국원 4명, 위관 하사 8명을 두었다. 기록국에는 국원 2명, 위관 하사 4명을, 회계국에는 부장 1명, 영관 국원 3명, 위관 하사 8명을 두었다. 군무국장과 검사국장은 모든 보고를 원수(황태자)를 통해 대원수(황제)에게 전달했다. #

또한 원수부 사무직에 본 부 직원 정원말고도 각 부대의 현직 무관 중 25명을 선별하여 각 국마다 배치하여 대부분의 임무를 겸임시키되 사무의 번간에 따라 종사하게 했다. 이들은 영관 4명, 정위 5명, 부위 6명, 참위 10명이었다. #

5. 복장

대한제국 원수부 관제 제4조에서 원수부 무관들의 복장을 규정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모자는 어용(황제용) 모자와 동일한 양식으로 하되 품계 표지 만 계급에 따른다.
2. 견장은 어용 견장과 동일 양식으로 하되 위관은 수가 없다.
3. 식대는 장관은 황색에 은사로 이화를 가식하고 영위관은 황색만 쓴다.
4. 식서는 장관, 영관, 위관이 일체 패용한다.
5. 본조에 규정한 것 외에는 육군 복장 규칙에 의한다. #
대한제국 원수부 관제 제4조

황제(대원수)와 동일한 디자인의 군모와 견장 등 복제에서도 특별 대우를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6.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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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문
상림원(배후림) 흥복전 의효전
흥덕전 장옹대 양희당
운교 생물방 소주방 어재실 양이재 함희당
사성당 우중배설청
내재실 선원전
좌중배설청
제기고
숙경재
돈덕전 생양문
환벽정 구성헌 덕경당 가정당 정관헌 수인당 양심당 포덕문
수풍당 흠문각 만희당 석조전 준명당 즉조당
명례궁터
석어당 함유재 구여당
중명전 평성문 석조전
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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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colbgcolor=#e3ba62> 덕수궁 원수부
德壽宮 元帥府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건축시기 1899년 (창건) / 1912년 (철훼)
파일:원수부 청사.png
<colbgcolor=#e3ba62> 대안문(왼쪽)과 원수부 청사(오른쪽)
[clearfix]
경운궁(현재의 덕수궁) 대안문 옆 북쪽 담장에 걸쳐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사진에는 대안문 바로 옆에 있는 건물만 보이지만, 호머 헐버트가 쓴 《더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에는 건물이 두 쌍이며 그 사이에 작은 문이 있는 것으로 나와있다. #
파일:원수부 지도.png
<colbgcolor=#e3ba62> 《더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에 나온 원수부. 32번이 대안문이다.
원래 군부 기관은 궁궐 밖에 있었는데 궁 안에 둔 것은 군을 직접 관리하여 황제권을 강화하려는 고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벽돌로 지었으며 2층 건물이었다. 지붕 굴뚝이 있던 것을 보아 실내에 난방 시설을 설치했던 듯 하다. #

원수부 폐지 후에도 건물은 남아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였던 1912년에 조선총독부에서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철거했다.

7. 매체에서

충청남도 논산시에 있는 시대극 촬영장 선샤인랜드에서 대안문과 함께 재현해놓았다.

8. 관련 문서


[1] 프로이센의 내각시스템은 비밀민간내각(Geheimes Zivilkabinett), 군사내각, 해군내각(Marinekabinett)로 구성되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대통령비서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군사 부문까지 관장한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