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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10:09:30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1. 개요2. 발령3. 실존 여부에 대한 의문점4. 국제법적 측면에서의 시마네현 고시5. 한국 정부의 입장

1. 개요

北緯三十七度九分三十秒東經百三十一度五十五分隠岐島ヲ距ル西北八十五浬ニ在ル島嶼ヲ竹島ト稱シ自今本縣所属隠岐島司ノ所管ト定メラル
오키 섬에서 북서쪽으로 85km 떨어진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0분 지역의 도서 지역을 다케시마라고 칭하며, 이 현(시마네현)에 소속된 오키 섬의 소관으로 한다.[1]
일본 제국 시마네현의 고시 중 하나로, 1905년 2월 22일에 발령되었다. ' 다케시마( 독도)는 주인이 없는 무주지이므로 일본령으로 편입한다'는 내용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러스크 서한과 더불어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이다.

현재는 원본이 남아있지 않다. 시마네현에 따르면 해당 문서는 소실되어 원본 문서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문서는 시마네현청에서 지방 촌 사무소로 배부된 사본 중 남아 있는 것을 수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2. 발령

대한제국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통해 독도를 자국령으로 선포하고 지방관을 파견했다. 그러나 독도의 경도 및 위도를 기록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독도의 지정학적 가치에 눈독을 들였고, 이곳이 무주지라는 근거를 들어 무주지 선점을 주장하며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독도를 자국령으로 편입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언급된 '독도'의 경도 및 위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 항해 기술과 측량 기술이 뒤떨어지던 시절에는 자국에 어떤 섬이 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고, 섬의 존재가 지도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섬을 가리키는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되지 못했다. 대한제국이 가리키던 독도는 실제로는 독도가 아니라 다른 섬을 언급한 것이라거나 잘못 기록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1905년 시마네현에서 고시 제40호를 발령할 때에는 독도의 위도와 경도를 자세히 기록해서 이 문제를 비껴나갔다.

3. 실존 여부에 대한 의문점

2013년에 '독도 일본에 알리기 운동연대' 회장 배삼준이 시마네현청에 가서 시마네현 고시를 보자고 하니, 직원에게 시마네현 고시 원본은 불에 타 소실됐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마쓰에 소요 사건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 자체가 고시의 실존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문제는 시마네현에서 보관하고 있는 고시 사본에 있다. 현재 시마네현 고시 40호는 유일하게 시마네현청에 단 1장 보관되어 있는데, 이 문건은 1905년 2월 22일 당시 시마네현에서 발간됐던 '시마네현령(島根縣令)'이나 '시마네현 훈령(島根縣訓令)' 어디에도 수록돼 있지 않다. 더구나 이 문건에는 시마네현지사의 직인(관인)은 찍혀있지 않고 회람(回覽)이라는 주인(朱印)만이 찍혀 있을 뿐이다. 이런 문서는 누구나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일본이 내세우는 시마네현 고시 40호는 사본인지도 확실하지 않으며, 시마네현 고시 40호는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고시가 아니라 관계자 몇몇이 돌려본 회람에 불과하였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보관본에는 시마네현 지사의 직인이 없고 단지 '회람용'이라는 표식만 있는데 이는 사본이라고 보기 어렵다.

또한 시마네현 고시가 실렸다는 《산인(山陰) 신문》에는 고시를 제정했다고 하는 날짜(1905년 2월 22일)의 이틀 뒤인 24일자 기사 '잡보(雜報)'란에 조그마하게 '다케시마로 정하고 일본 땅으로 하기로 했다'고는 돼 있으나, 그 근거로 '시마네현 고시 40호'라는 문서 이름은 나와 있지 않고 고시의 제정일자도 나와 있지 않다. 이 신문기사의 의미는 일본이 독도를 편입한 사실을 만인에게 알렸음을 증명하는 것인데, 기사에 그런 중요한 사실도 빠져 있다. 또한 산인 신문은 관보가 아닌 시마네현이라는 조그만 지역의 지방지이기 때문에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공포한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일본은 "1905년 1월 28일 각의(閣議)에서 '독도 편입'을 결정하고 이를 내무대신에게 위임했다. 내무대신은 다시 시마네현 지사에게 이를 지시했다."고 시마네현 고시 제정 경위를 밝히며 일본 외무성에서 제작한 '다케시마 이해를 위한 10 포인트'라는 홍보 팸플릿에서 '독도 편입' 근거로 각의 결정문 사진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 문제의 고시를 제정하고 공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이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는 관보(官報)나 공보(公報), 현보(縣報) 등에 실려 있지도 않다. 일본 외무성 홍보자료에도 산인 신문 '잡보' 란에 실린 것만 거론하고 있다. 공보나 현보에 해당 고시가 실렸다고 해도 전국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영토 편입에 대한 공포 방법으로는 국제법적으로 유효하지 않다고 한다.

물론 시마네현 고시 40호의 원본이 없다고 해서 증거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문제의 고시는 1905년 2월 22일에 제정됐다는데, 한국은 1905년 그 해에 일본에 의해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5년 뒤에는 국권까지 박탈당하여 일본이 패망하는 1945년까지 독도를 내놓으라고 할 형편이 되지 못했고, 제3국 역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적도 없어 독도를 둘러싼 시비가 없었다가 1946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회담이 시작된 지 3년 뒤인 1949년 처음으로 이 고시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을 위해 1951년 일본과 연합국 48개국이 맺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당시 일본은 독도를 강탈한 땅이 아니라 고시 제정을 통해 국제법적으로 합법하게 편입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고시 사본을 제출하지는 않았다. 국제법 학자나 미 국무부 자료에 정통한 학자들도 그런 자료를 본 적이 없다고 밝혔고, 한국 외교부에서도 사본을 소장하고 있지 않다. 지금까지도 일본은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한다고 항의하면서도 정작 편입의 근거라고 주장하는 고시 사본은 제출하고 있지 않다.

독도련 회장 배삼준은 일본 국회도서관에 가서 이 고시가 관보에 공포가 된 일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1905년분을 다 살펴봤지만 없었다. 그와 연락한 간사이대학 교수 구로다의 말로는 사전에 비밀로 하라고 위에서 지령이 내려가서 관보에 실리지 않았을 것이라 한다. 한국인들이 알면 독도 편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관보 등재를 고의로 기피했다는 것이다. 이는 추정에 불과하지만,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제정하고 공포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기사 관련내용

4. 국제법적 측면에서의 시마네현 고시

국제법에서는 다수의견 내지 통설로는 영유의 선점에서 첫째로 무주지일 것과 둘째로 해당 국가가 계속 점유할 의지가 있는 지를 중요하게 판단한다.

이와 관련된 국제법 판례로 팔마스 섬 사건(Island of Palmas case, 1928)[2]에서는 선점의 경우 통고의 의무가 없다고 판시한 바 있다.
네덜란드 정부가 이 영토에 대한 종주권을 수립한 것을 타국에 통고할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통고는 다른 기타의 공식적 행위(formal act)와 같이 명백한 규정의 결과로서 적법한 조건(condition of legality)으로 된다. 아프리카 대륙에 관한 1885년에 채택된 이러한 규칙은 당연히 기타의 지역에 적용되지 않는다.
An obligation for the Netherlands to notify to other Powers the establishment of suzerainty over the Sangi States or the display of sovereignty in these territories did not exist. Such notification, like any other formal act, can only be the condition of legality as consequence of an explicit rule of law. A rule of this kind adopted by the Powers in 1885 for the African continent does not apply deplano to other region.
출처: 해당 사건의 판결문

특히, 팔마스섬을 심리, 판결한 판사인 후버는 영토가 자국과 근접하다고 주장하는 근접이론에 대하여는, 그것이 해당 영토가 자국 영토임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또한, 멕시코에서 클리퍼턴 섬 관련하여, 프랑스가 이 섬을 선점하였다고 해도, 이를 자국인 멕시코에 통고하지 않아 선점의 규칙을 위반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중재재판소는 통고 의무는 베를린 의회 일반의정서 제34조에 규정된 것이지, 이 사건에서는 해당 통고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프랑스 점령의 규칙성 또한 타 강대국에 통보되지 않은 점이 의문이었다. 그러나, 이 통고의 정확한 의무는 이 조 베를린 법 34조에 규정되어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상기 언급한 이 사건에 적용되지 않는다.
La régularité de l'occupation française a aussi été mise en doute parce qu'elle n'a pas été notifiée aux autres Puissances. Mais il faut observer que l'obligation précise de cette notification a été stipulée par l'art. 34 de l'acte de Berlin précité, qui, comme il a été dit plus haut, n'est pas appliquable au cas présent.
출처: 해당 사건의 판결문
즉, 통고 의무가 규정된 조약으로는 베를린 회의 일반의정서 제34조는 아프리카 대륙 내의 땅을 취하게 될 때 그리고 보호관계가 성립될 때 여타 베를린 일반의정서 당사국들에게 통지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 규칙은 베를린 회의의 대상인 콩고 등 아프리카 대륙 내 땅에 적용될 뿐이다.

따라서, 시마네현 고시와 관련하여 공시·공고 및 통고되지 않았다는 등의 이론은 국제법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역으로, 국제관습법이나 상설재판소 판례 및 다수의 국제법 학설에 의하면 통고의 필요는 없다고 하거나 선점의 요건으로 언급하지 않았고(가령, 휘튼이나 뤼버·울지) 통고·공시가 필요하다는 것은 소수의 학설에 불과하다.

5. 한국 정부의 입장

현대 대한민국 정부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문서의 실존 여부와 상관없이 1904년 9월의 신고호 행동일지, 1904년의 한일의정서, 1900년의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독도를 한국령으로 명기한 것, 1877년의 태정관 지령 등등, 그 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울릉도에 살면서 육안으로도 보이는 독도에서 어업을 했다는 걸 당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독도는 한국령임이 명확하다는 공식 입장을 취하고 있다.


[1] 일본 내각관방 홈페이지에 올라온 고시 스캔본에서 발췌. 출처는 여기 [2] 현재 국가영역과 영유권 분쟁에 있어 핵심적인 내용이 되는 실효적 지배(effective display) 등 거의 대부분의 개념이 해당 사건 판결문에서 등장하였으며, 현대 영유권 분쟁 문제에 있어 기념비적이고 매우 중요한 판결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