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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lling Stones 1964 |
The Rolling Stones No. 2 1965 |
Out of Our Heads 1965 |
Aftermath 1966 |
Between the Buttons 1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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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1967 |
Beggars Banquet 1968 |
Let It Bleed 1969 |
Sticky Fingers 1971 |
Exile on Main St. 1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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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ats Head Soup 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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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록밴드 롤링 스톤스에 대한 평가와 이들의 음악적 영향력에 대해 서술한 문서이다.2. 음악 성향
"롤링 스톤스라는 밴드가 원래 하려던 음악은 ‘로큰롤(Rock & Roll)’이었으나, 아무래 노력해도 흑인 특유의 ‘롤’을 못 살려서 차선책으로 ‘
록’을 추구했더니 지금의 음악이 되었다."
— 키스 리처즈
— 키스 리처즈
롤링 스톤스의 음악은 고전 블루스와 로큰롤에 뿌리를 두고 있다.[4] 특히 밴드 초창기에는 고전 블루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으며, 1960년대 초반 영국의 블루스 음악을 주도하던 알렉시스 코너 밑에서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같은 아티스트들과 함께 밤새도록 블루스 음악을 연마하였다. 실제로 롤링 스톤스 커리어 초기는 고전 블루스 곡들을 그 당시 영국 사운드에 걸맞게 커버하는 블루스 커버 밴드였다. 이는 당시 재거-리처즈보다 영향력이 높던 브라이언 존스의 음악 성향에서 비롯된것이다.[5] 그렇기에 롤링 스톤스가 작사 작곡에 눈을 뜨기 전에는 이렇게 고전 블루스 혹은 로큰롤 음악들을 커버하거나, 비틀즈가 써준 곡을 발매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블루스 커버 활동을 이어가다가 재거-리처즈 콤비의 시너지를 알아본 당시 매너지 앤드류 루그 올드햄에 의해 브라이언 존스에서 재거-리처즈로 권한이 많이 넘어가게 되었고 밴드의 음악 성향도 로큰롤 비중이 상당히 커진다. 롤링 스톤스는 당시 고전 블루스를 로큰롤과 같이 거칠게 재해석하는 음악을 계속하여 블루스 록과 하드 록이라는 장르를 개척하게 되고 펑크 록의 탄생에도 기여하게 된다. 이외에 비틀즈의 영향과 당시 시대에 큰 영향을 받아 사이키델릭적인 실험에도 롤링 스톤스는 동참하였다. 그러다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시 그들의 뿌리인 블루스로 돌아오게 되고 당시 유행하던 시카고 블루스를 넘어 블루스의 원형인 델타 블루스까지 파고들게 된다.[6] 그 앨범이 Beggars Banquet이다.[7] 블루스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는 인기가 아예 없었지만 미국인들에게는 가장 사랑받는 음악장르인 컨트리 뮤직과 소울에도 탐닉하게 된다.[8] 블루스애호가인 롤링 스톤스에게는 의외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컨트리 뮤직과 잘 맞아 롤링 스톤스는 컨트리 록을 개척하게 된다. 또한 사이키델릭처럼 충동적인 실험에 그치지않고 후기 앨범들까지도 컨트리 뮤직을 넣으면서 블루스, 로큰롤과 더불어 컨트리 뮤직은 롤링 스톤스의 새로운 뿌리가 된다. 이 선택이 신의 한수가 되어 후에 블루스, 컨트리 뮤직, 소울, 로큰롤음악이 한데 뭉친 음악을 지칭하는 루츠 록이라는 용어를 만들게 된다.[9] 또한 영국 밴드들을 푸대접하고 블루스, 컨트리 뮤직, 소울등의 미국음악 편식이 심한 롤링 스톤의 지지를 당시부터 지금까지 받게 된다. 후에 롤링 스톤스와 같이 음악을 시작하던 밴드들이 해체하고 난 뒤에도 디스코음악과 팝음악을 블루스, 로큰롤 스타일로 재해석해 앨범을 만들게 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생존하게 된다.
또한 롤링 스톤스 음악의 특징이라면 테크닉보다는 그루브를 중시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현 세대까지 인기 있는 레드 제플린, AC/DC, 퀸 등의 밴드들은 각각 로버트 플랜트, 본 스콧/ 브라이언 존슨, 프레디 머큐리라는 폭발적인 가창력을 가진 보컬, 그리고 지미 페이지, 앵거스 영, 브라이언 메이라는 훌륭한 테크닉을 가진 기타리스트를 보유한 밴드라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롤링 스톤스는 제시된 밴드들과는 달리 화려한 솔로 플레잉을 즐겨하는 멤버는 믹 테일러 정도밖에 없었으며, 이 또한 후술할 ‘롤링 스톤스 4대 명반’이 발매됐을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만 활동했다. 보컬인 믹 재거는 기교가 거의 없는 투박한 보컬 스타일을 갖고 있었으며, 키스 리처즈는 솔로잉보다는 리프메이킹에 치중한 리듬 기타리스트였다. 찰리 와츠 또한 폭발적인 드러밍이 아닌 그루브를 중시하였으며, 베이시스트인 빌 와이먼도 마찬가지였다.[10]
다만 상술한 믹 테일러가 활동한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는 당시에 유행했던 레드 제플린의 영향을 받아 롤링 스톤스도 화려한 기타 솔로를 자주 넣었다. 신작들의 수록곡들에 웬만하면 기타 솔로가 들어갔고, 라이브 공연에서도 원래는 기타 솔로가 없던 여러 곡들에서 믹 테일러가 화려한 솔로를 연주하기도 했다. 또한 음원보다 더 빠른 속도와 더 풍부한 기타 사운드를 들려주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의 하드 록 열풍에 따라 롤링 스톤스가 더더욱 인기를 끌 수 있던 요인이 되기도 했다.
2.1. 롤링 스톤스 4대 명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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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ggars Banquet | Let It Bleed | Sticky Fingers | Exile on Main St. |
주로 ‘롤링 스톤스 4대 명반’이라고 하면 위의 4개의 앨범을 가리킨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이 롤링 스톤스 4대 명반이라는 것은 “세계 X대”라는 말을 좋아하는 일본에서 만든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롤링 스톤스의 커리어에는 이 네 음반들 외에도 Aftermath, Some Girls라는 음악적 평가가 높은 또다른 명반들이 더 존재한다. 즉 전 세계적으로 통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11] 이 외에 유사품으로는 ‘ 핑크 플로이드 3대 명반’과 ‘세계 3대 기타리스트’ 등이 있다.
이 음반들의 공통점으로는 모두 연달아 나왔으며, 브라이언 존스의 영향력이 거의 없거나, 브라이언 존스의 탈퇴 후에 제작된 앨범이라는 것이다. 즉 브라이언 존스는 롤링 스톤스의 초기 리더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4대 명반들은 브라이언 존스의 영향력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또한 4개 중 Beggars Banquet를 제외한 나머지 세 앨범에 모두 믹 테일러가 참여했다는 공통점도 있다.[12] 그리고 또한 롤링 스톤스 음악의 최고 조력자인 위대한 프로듀서 지미 밀러가 모두 참여한 앨범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이후에 다시는 지미 밀러에게 프로듀싱을 맡기지 않아서 아쉬워하는 팬들이 많다. 롤링 스톤스가 자주 사용하는 악기들 피아노[13], 관악기[14], 리듬 기타, 리드 기타, 흑인 코러스 등의 다양한 사운드를 촘촘하지만 어지럽지않게 밀도있게 믹싱하는 그만의 사운드를 그리워하는 팬들이 많다.
3. 평가 및 음악적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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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 스톤스는 진정한 가장 위대한 로큰롤 밴드로 최후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메탈,
랩,
펑크,
뉴 웨이브,
팝 록, 어떤 것이든 당신은 모두 롤링 스톤스의 영향력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아무도 그들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다.
밥 딜런 #
올뮤직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롤링 스톤스는 대중음악 사상 3번째로 많은 영향력을 끼친 음악가이다.
록밴드로만 한정지었을 시에는
비틀즈에 이어 2번째이다. 이러한 공로 때문인지 비틀즈,
비치 보이스,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와 함께
영어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밴드이기도 하다. 사실 음악가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이 있으나[15], 롤링 스톤스 만큼은
비틀즈,
더 후 등과 더불어 현역 당시나 현재나 똑같이 평가가 높은 밴드 중 하나이다. 특히 록 음악 중에서도 로큰롤 음악과 블루스 음악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상징으로 평가받을정도로 영향력이 크다.밥 딜런 #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아티스트에서 25위권 안에 든 영국 밴드는 단 3개밖에 없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롤링 스톤스이다. 나머지 두 밴드가 비틀즈와 레드 제플린이니 할 말은 다 한 셈이다. 이 중에서도 롤링 스톤스는 4위이며, 순수 록밴드로만 한정지었을 시에는 위의 올뮤직의 분석 결과와 마찬가지로 2위이다. 즉 영국 출신이지만 미국 평론가들 또한 매우 높게 평가하는 몇 안 되는 영국 록밴드인 것이다. 사실 이렇게 고평가를 할 만한것도 한 것이, 로큰롤 장르를 록 음악으로 발전시킨 비틀즈와 더불어 롤링 스톤스는 로큰롤과 블루스 장르를 록 음악으로 발전시킴으로써 록이라는 장르의 정체성과 근본을 더욱 더 탄탄하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당장 블루스 록의 시초로 꼽히는 곡은 롤링 스톤스의 (I Can't Get No) Satisfaction이며, 하드 록의 시초 또한 더 후와 더불어 롤링 스톤스가 거론된다. 블루스 록과 하드 록이 이후 음악계를 이끌게 되는 메탈과 얼터너티브 록의 뿌리인 것을 감안하면 롤링 스톤스는 록 음악을 형성한 밴드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렇게 롤링 스톤스가 록 음악이라는 장르의 정체성을 잡아주었기 때문에 후대에 펑크 록이나 글램 록, 그런지 등의 정체성 강한 록의 세부 장르가 등장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펑크 음악의 시초라고 평가받는 뉴욕 돌스와 이기 팝이 비주얼적이나 음악적으로 강하게 보이기 때문에, 롤링 스톤스가 펑크 음악의 전신이였다는 말은 과장이 아닌듯 보인다.[16]
이처럼 전체 음악 장르가 아닌 ‘ 록 음악’이라는 장르에만 한정지었을 시 롤링 스톤스는 비틀즈보다도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가령, 보컬과 기타의 분업체계를 롤링 스톤스가 먼저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으며, 스튜디오에서의 실험에 집중했던 비틀즈와는 달리 롤링 스톤스는 수많은 공연 경험으로 라이브 실력을 쌓았다. 국내외의 여러 록 커뮤니티와 록 평론가들에게 비틀즈 이상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여기에 하드웨어 적으로는 롤링 스톤즈 이동식 스튜디오를 설립하여 다른 밴드에게 이를 빌려주었고, 여기서 탄생한 음악도 매우 유명하다.
4. 음악 외적으로 미친 영향
음악적인 영향뿐만 아니라 외적인 스타일로도 록 음악가의 이미지를 형성했다고 평가받는다. 현세대에서 락스타 하면 떠올리는 거칠고 섹시하며 반항적인 이미지를 최초로 내세운 음악가가 바로 재거-리처즈 듀오였다. 물론 장발에 치렁치렁한 가죽옷을 입고 헤드뱅잉하면서 샤우팅과 현란한 속주를 한다는 락스타의 이미지는 레드 제플린의 플랜트-페이지가 최초이긴 했으나, 플랜트-페이지가 동시에 내세운 거칠고 섹시한 이미지는 재거-리처즈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이는 후대의 록 음악가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기에 건즈 앤 로지스의 액슬- 슬래시, 에어로스미스의 스티븐 타일러- 조 페리 등의 수많은 퇴폐적이고 섹시한 프론트맨 듀오를 앞세운 록밴드들을 양산했다.또한 더 후와 더불어서 대중들이 흔히 말하는 ‘관객 조련’을 최초로 한 밴드이기도 하다. 롤링 스톤스의 프론트맨인 믹 재거는 관객 조련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1960년대 중반에 무대 위를 마구 뛰어다니거나 막춤을 추고 관객의 환호성을 유도하는 등의 뛰어난 무대 장악력을 통해, 악기를
롤링 스톤스는 라이벌인 비틀즈처럼 대중음악을 넘어 다른 대중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록밴드로 평가받는다. ‘악동’이라는 이미지를 최초로 내세운 연예인답게 롤링 스톤스는 1960년대 중후반 당시 반문화의 상징으로 일컬어졌다. 더 위로 올라가면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데뷔초에 기성 세대의 비위를 건드렸던 반문화의 아이콘이 있지만 그는 베트남 전쟁 참전 이후에는 격렬한 로큰롤 곡보다는 잔잔한 발라드곡을 부르며 보수적인 성향으로 바뀌었다고 비판을 받았다. 따라서 롤링 스톤스는 영화 배우 제임스 딘 같이 대중문화 최초의 반문화의 아이콘으로 여겨진다. 엘비스와 비교하면 롤링 스톤스는 데뷔초부터 60년이나되는 지금까지 기성세대, 메인스트림과 타협하려는 시도자체를 거의 하지않았다.[18] 비록 60년대 중후반에 보여주었던 진보적인 정치성향이 보수적인 정치성향으로 바뀌었더라도 그들은 입에 발린말이나 메인스트림, 대중들이 원하는 말, 가식적인 행동 따위를 거의 하지 않았다. 또한 영화감독과의 협업도 많은데 68 혁명 시절에 프랑스 누벨바그의 전설적인 영화감독 장뤽 고다르가 롤링 스톤스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으며 미국 역사상 최고의 영화감독중 한명이자 롤링 스톤스의 광팬으로 유명한 마틴 스코세이지가 이들의 공연 실황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재거-리처즈의 록스타로서의 이미지는 많은 대중문화의 오마주 대상이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믹 재거를 대놓고 오마주한듯한 캣츠의 럼텀 터거와 키스 리처즈를 오마주하였고 후에 키스 리처즈가 직접 참여하기도한 잭 스패로우가 있다. 이렇듯, 재거-리처즈보다 순전히 음악을 잘하는 록스타들은 많지만 그들이 록스타라는 이미지, 영향력면에서 압도적인 넘버원이라는 것은 다른 대중매체에서도 그 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정치, 사회적 영향력 또한 매우 컸다. 비틀즈의 멤버들, 특히 존 레논이 진보적인 정치 성향으로 영미권에서 신좌파주의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잡았던 반면, 롤링 스톤스의 성향은 보수주의, 즉 우파였다. 믹 재거는 강성 보수당 지지자이며, 키스 리처즈는 노동 계급 출신이지만 이라크 전쟁과 브렉시트를 지지한 것으로 보아 보수 성향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멤버들은 정치 성향을 밝힌적이 없다.[19] 그러나 재밌게도 롤링 스톤스는 Gimme Shelter, Paint It Black, Street Fighting Man 등의 곡들을 통해 히피들과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을 피력하면서 히피를 대표하는 밴드로 인식받고 있다. 오히려 68혁명에 대해 보수 우파의 의견을 대변한 것은 비틀즈였다.[20] 이렇기에 당시 히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침과 동시에, 그냥 지지 정당만 보수당이고 실제 성향은 진보나 리버럴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21][22]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중산층을 혐오하고 매우 진보적인 성향으로 유명한 섹스 피스톨즈의 보컬인 쟈니 로튼은 중산층 출신의 믹 재거를 죽이고 싶다고 발언한 적 있다.[23]
5. 롤링 스톤스에게 영향을 준 아티스트들
- 브리티시 인베이전 아티스트들[25]
- 비틀즈 : 초창기에는 비틀즈가 써준 곡들을 발매하였으나, 이후에는 상호간 영향을 주고 받았다.
- 더 후 : 1960년대 중반부터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함께 한 밴드로서 무대 매너와 음악성 등 여러 방면에서 상호간 영향을 주고 받았다. 피트 타운젠드 특유의 풍차 돌리기 퍼포먼스를 키스 리처즈가 먼저 시도했다는 주장도 있으며[26], 더 후 특유의 악기 부수기 퍼포먼스와 호텔 박살내기(…) 등의 퍼포먼스를 롤링 스톤스가 1970년대에 그대로 따라했다.
- 스몰 페이시스 : 키스 리처즈가 스몰 페이시스의 보컬인 스티브 매리엇의 광팬이었다.
- 야드버즈( 레드 제플린) : 마찬가지로 블루스 록의 선구자라고 평가받는 밴드답게 서로 음악적 영향력을 주고 받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레드 제플린 멤버들과 롤링 스톤스 멤버들 모두 서로의 데뷔 전부터 알렉시스 코너의 밑에서 블루스를 공연하면서 같이 알고 지냈다고 한다.[27] 대표적으로 존 폴 존스는 브라이언 존스의 영향을 받아 보틀넥 주법으로 연주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1970년대 롤링 스톤스의 음악은 당시 유행하던 레드 제플린에게 영향을 받아 좀 더 하드해 졌다는 특징도 있다.[28]
- 크림
-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 크림과 지미 헨드릭스는 롤링 스톤스와 함께 1960년대 후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함께 이끌면서 상호간 영향력을 주고 받았다.
- 소울 음악 아티스트들
- 오티스 레딩 : 오티스 레딩이 관악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키스 리처즈가 Sticky Fingers에 도입하였다고 한다.
- 템테이션
6. 롤링 스톤스가 영향을 준 아티스트들
더 후와 레드 제플린이 하드 록, 헤비 메탈, 프로그레시브 록 장르에 큰 영향을 주었다면, 롤링 스톤스는 블루스, 로큰롤 같은 록 음악의 전통적인 장르와 펑크, 글램 록, 그런지, 루츠 록 등의 록의 세부음악 파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블루스, 로큰롤에 있어서는 롤링 스톤스의 영향력을 뛰어넘는 아티스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포크 음악의 전설이지만 로큰롤 숭배자인 밥 딜런이 롤링 스톤스보다 뛰어난 로큰롤 밴드는 전에도 없고 앞에도 없다고 평가했으니 말 다했다.- 퀸 : 음악적으로는 레드 제플린, 데이비드 보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으나, 멤버들은 롤링 스톤스의 영향력 또한 언급하였다. 특히 프레디 머큐리가 프론트맨으로서의 정체성을 구상하는데 로버트 플랜트와 더불어 믹 재거도 많이 참조하였다고 한다.
- 이기 팝 : 음악성 및 무대 매너의 측면에서 롤링 스톤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펑크 록 아티스트이다.
- 프린스 : 롤링 스톤스의 Honky Tonk Women을 커버하였고 믹 재거의 섹슈얼한 프론트맨으로서의 이미지에 많은 것을 영향 받았다. 다만 키스 리처즈는 그가 맘에 안들었는지 악담을 퍼부었다.[29]
- 화이트 스트라입스 : 시기로 보면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에 가깝지만 음악 자체는 그런지의 영향도 크다.
- 건즈 앤 로지스 : 롤링 스톤스보다는 레드 제플린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밴드였지만, 리듬 기타리스트인 이지 스트래들린이 롤링 스톤스, 특히 키스 리처즈의 광팬이었다. 그렇기에 지미 페이지 스타일을 추구하던 슬래시와 스타일 면에서 충돌하여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밴드가 롤링 스톤즈의 Wild Horses와 Sympathy for the Devil을 커버한 적이 있으며 보컬 액슬 로즈도 Exile on Main St.를 가장 좋아하는 앨범 5개 중 하나로 뽑은 적이 있다. 액슬 로즈와 이지 스트래들린은 후에 롤링 스톤스와 같은 무대에서기도 한다.
- 그린 데이 : Rip This Joint 등 여러 곡들을 커버하였고 음악적인 영향을 받았다.
[1]
Rock이 록 음악으로서의 형식과 테크닉만을 뜻한다면 Roll은 로큰롤 정신부터 그루브, 소울까지 지칭한 표현이다. 60년동안 로큰롤 음악만 파온 롤링 스톤스를 생각해보았을때 정말 찰떡같은 표현이다.
[2]
참고로 로큰롤 음악의 또다른 래전드인
엘비스 코스텔로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3]
키스 리처즈와 롤링 스톤스의 블루스, 로큰롤 사랑을 엿볼수있는 인용구이다.
[4]
로큰롤 음악이라는게 애초에 블루스 음악의 파생인지라 두 음악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애초에
블루스는
재즈와 더불어 대중음악의 뿌리이다.
[5]
브라이언 존스는 로큰롤보다 압도적으로 블루스 음악을 좋아하였다.
[6]
델타 블루스를 재해석하기 시작한건 스톤스가 최초라고 한다.
[7]
당시 마약 때문에 힘들어하던
브라이언 존스가 제발 다음 앨범은 블루스로 해달라고 울었다고 한다.
사이키델릭 시절에 나름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브라이언 존스지만 그때까지도 블루스 음악을 가장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8]
당시 밴드와 친하게 지내던
그램 파슨스의 영향이라는 썰도 있고 영국에서 인기가 시들해가던 밴드가 미국 시장을 공략하기위해 그런 음악을 추가하게되었다라는 썰도 있다.
[9]
참고로
루츠 록이라는 용어는 롤링 스톤스가 활동하던 시절에 쓰이던건 아니고 후에
CCR이나
톰 페티같이 미국 본토적인 성향이 강한 음악을 분류하기 위해 평론가들이 만들게 된 용어이다. 저 위의 두 아티스트도 롤링 스톤스의 영향을 정말 많이 받았기에
루츠 록의 개척자를 롤링 스톤스로 보는 평론가들도 많다.
[10]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그루브를 중시했다고 기교를 못 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키스 리처즈의 기타 솔로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이는 키스 리처즈와 같이 리듬 기타리스트인
더 후의
피트 타운젠드도 마찬가지이다.
[11]
다만 롤링 스톤스의 디스코그래피에서 이 네 앨범의 평가가 가장 높은 것은 사실이다.
[12]
참고로
Let It Bleed에서
믹 테일러의 비중은 매우 적었다.
[13]
세션으로는 주로 롤링 스톤스의 오랜 동료인 이안 스튜어트와 니키 홉킨스가 참여했다.
[14]
주로 바비 키스가 참여했다.
[15]
이러한 사례로
레드 제플린을 들 수 있다. 레드 제플린의 경우 인기와는 별개로 현역 당시에는 미국 평론가들에게 악평이 자자한 밴드였으나, 1980년대에
메탈리카,
밴 헤일런,
건즈 앤 로지스 등 레드 제플린의 영향을 짙게 받은 헤비 메탈 음악가들이 음악계를 지배하게 되고, 1990년대 미국에서
하드 록과
헤비 메탈의 영향을 받은
그런지 열풍이 불면서, 헤비 메탈의 시조새 격인 레드 제플린의 평가가 표절 전문 밴드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밴드 중 하나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16]
여담이지만 키스 리처드는 그들의 앨범
Exile on Main St.이 최초의 그런지 앨범이었다고 농담한적이 있다. 물론 음악은 그런지 음악과 상이하지만 원초적이고 퇴폐적인 태도에 있어서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본듯 하다.
[17]
참고로 이 퍼포먼스는 키스 리처즈가 하던걸 피트 타운젠드가 따라하였다라는 주장이 있다.
[18]
물론
믹 재거가 영국 여왕의 기사 작위를 받아 팬들이 잠깐 실망을 하기도 했다..
[19]
비틀즈,
더 후,
핑크 플로이드,
블랙 사바스 등 당시 활동했던 대부분의 영국 록 밴드들은 정치적으로 노동당이나 진보를 지지했다. 물론 정치 성향을 아예 밝히지 않았던
레드 제플린이나, 보수 성향인
필 콜린스와
에릭 클랩튼 등 예외도 있지만, 롤링 스톤스처럼 정치 성향을 밝힌 멤버중 아무도 진보쪽이 아닌 경우는 드물다.
[20]
다만 Revolution은 ‘근거와 동기가 부족한 혁명’을 비판하고 있기에, 완전한 보수의 의견이라고 보기에는 힘들긴 하다. 그러나 68혁명을 지지하면서 실제로 참여한 롤링 스톤스에 비해서는 굉장히 보수적인 입장인 것.
[21]
믹 재거는 1968년 당시 실제로 68혁명에 참가한 적이 있다. 철저한 진보주의자였던 존 레논과 다른 비틀즈 멤버들이 사태를 관망하다가 혁명에 회의적인 의견을 보인것과는 대조적.
[22]
비슷하게도
브라이언 메이도 환경 운동에 열심히 참가했던 것으로 인하여 정당만 보수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2015년부터는 노동당 지지자로 선회하며 좌파로 전향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믹 재거는 사상만 중도우파적이며 리버럴에 가까울 뿐 아직까지도 골수 보수당 지지자이다.
[23]
다만 훗날에 롤링 스톤스를 칭찬했던 것을 보면 그냥 펑크 록 아티스트로서의 컨셉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존 라이든은 자신이 현역 때 디스했던
핑크 플로이드,
더 후,
레드 제플린 등의 밴드들의 음악을 사실은 좋아하고 이들의 팬이라고 밝혔다.
[24]
의외로 모든 브리티시 인베이전 밴드들이 우상시했던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해서는
믹 재거가 별로 안 좋아한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당장
비틀즈와
레드 제플린만 해도 엘비스 프레슬리를 숭배하는 정도이다.
[25]
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음악성이 함께 발전하였다.
[26]
롤링 스톤스 50년의 악행 50년의 로큰롤 참조
[27]
레드 제플린 데뷔 이전에는 런던이 아닌
버밍엄에서 활동했던
로버트 플랜트나
존 본햄은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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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1970년대 라이브 공연에서는 기타 사운드가 더 하드해지고, 원래 기타 솔로가 없는 곡들에서도
믹 테일러가 화려한 속주 솔로를 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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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설가로서의 컨셉일 가능성도 있고, 정말 맘에 안 들었을수도 있다. 일단 이 분은
자기네 보컬과
자신의 절친에게도 악담을 퍼붓는 양반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