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저 맥케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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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수상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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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 1973년 | 1974년 | ||||||
맥스 플라이셔 | 데이브 플라이셔 | 월터 란츠 | 텍스 에이버리 | 프리즈 프레렝 | |||||
1974년 | 1975년 | ||||||||
척 존스 | 아트 배빗 | 윈저 맥케이 | 그림 네트윅 | 월트 디즈니 | |||||
1975년 | 1976년 | ||||||||
존 허블리 | 페이스 허블리 | 노먼 맥라렌 | 로버트 캐넌 | 휴 하먼 | |||||
1976년 | 1977년 | ||||||||
루돌프 이징 | 마이클 말테스 | 조지 팔 | 워드 킴볼 | 윌리엄 해나 | |||||
1977년 | |||||||||
조셉 바베라 | 멜 블랭크 | 오스카 피싱거 | 빌 스콧 | 밀트 칼 | |||||
1978년 | |||||||||
제이 워드 | 어브 아이웍스 | 딕 휴머 | 칼 스탈링 | 한스 콘리드 | |||||
1979년 | 1980년 | ||||||||
클라이드 제로니미 | 빌 멜렌데즈 | 매 퀘스텔 | 오토 메스머 | 올리 존스턴 | |||||
1980년 | 1981년 | ||||||||
프랭크 토머스 | 칼 하워드 | 폴 줄리안 | 라번 하딩 | T. 히 | |||||
1981년 | 1982년 | ||||||||
빌 피트 | 빌 타이틀라 | 존 휘트니 | 켄 헤리스 | 켄 엔더슨 | |||||
1982년 | 1983년 | ||||||||
브루노 보제토 | 준 포레이 | 도날드 W. 그레이엄 | 마크 데이비스 | 에릭 라슨 | |||||
1983년 | |||||||||
프레드 무어 | 클라렌스 내쉬 | 볼프강 레이더먼 | 레오 살킨 | 스티븐 보수스토 | |||||
1983년 | 1984년 | ||||||||
윌프레드 잭슨 | 다우스 버틀러 | 데이비드 핸드 | 잭 키니 | 마이클 라 | |||||
1984년 | 1985년 | ||||||||
로버트 매킴슨 | 리처드 윌리엄스 | 해밀턴 러스크 | 로버트 아벨 | 프레스턴 블레어 | |||||
1985년 | |||||||||
조 그랜트 | 존 핼러스 | 스털링 홀러웨이 | 짐 맥도날드 | 필 먼로 | |||||
1985년 | 1986년 | ||||||||
벤 워셤 | 프레더릭 백 | 샤머스 컬해니 | 윌리엄 T. 허츠 | 이르벤 스펜스 | |||||
1986년 | 1987년 | ||||||||
에머리 호킨스 | 존 란즈베리 | 폴 드리센 | 잭 해나 | 빌 리틀존 | |||||
1987년 | 1988년 | ||||||||
모리스 노블 | 켄 오코너 | 노먼 퍼거슨 | 멜 쇼 | 랠프 박시 | |||||
1988년 | 1989-1990년 | ||||||||
밥 크렘펫 | 티사 데이비드 | 가와모토 기하치로 | 버질 로스 | 아트 클로키 | |||||
1989-1990년 | |||||||||
힉스 로키 | 알렉스 로비 | 돈 메식 | 데즈카 오사무 | 레스터 노브로스 | |||||
1991년 | |||||||||
레이 해리하우젠 | 허버트 클린 | 밥 커츠 | 유리 노르슈테인 | 조 시라쿠사 | |||||
1991년 | 1992년 | 1993년 | |||||||
루스 키산 | 레스 클라크 | 스탠 프레버그 | 데이비드 힐버만 | 조지 더닝 | |||||
1993년 | 1994년 | ||||||||
로이 E. 디즈니 | 잭 잰더 | 에드 베네딕트 | 아서 데이비스 | 장 밴더 필 | |||||
1995년 | 1996년 | ||||||||
줄스 엥겔 | 반스 게리 | 댄 맥로린 | 메리 블레어 | 버니 매티슨 | |||||
1996년 | 1997년 | 1998년 | |||||||
타카모토 이와오 | 윌리스 H. 오브라이언 | 마이런 왈드먼 | 폴 윈첼 | 에위빈드 얼 | |||||
1998년 | 1999년 | ||||||||
미야자키 하야오 | 어니스트 핀토프 | 레이 패터슨 | 마르셀 얀코비츠 | 콘 페더슨 | |||||
2000년 | |||||||||
노먼 맥케이브 | 호이트 커틴 | 루실 블리스 |
21세기 수상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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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 2002년 | |||||||
빌 저스티스 | 피트 알바라도 | 밥 기븐스 | 진 하젤튼 | 플로이드 노먼 | |||||
2002년 | 2003년 | 2004년 | |||||||
셔먼 형제 | 진 디치 | 존 헨치 | 썰 라벤스크로프트 | 돈 블루스 | |||||
2004년 | 2005년 | ||||||||
버지니아 데이비스 | 아놀드 스탱 | 코니 콜 | 프레드 크리펜 | 타이러스 웡 | |||||
2006년 | 2007년 | ||||||||
안드레아스 데자 | 겐디 타르타콥스키 | 빌 플림턴 | 존 케인메이커 | 글렌 킨 | |||||
2007년 | 2008년 | 2009년 | |||||||
존 크릭팔루시 | 마이크 저지 | 존 라세터 | 닉 파크 | 팀 버튼 | |||||
2009년 | 2010년 | ||||||||
제프리 카첸버그 | 브루스 팀 | 브래드 버드 | 에릭 골드버그 | 맷 그레이닝 | |||||
2011년 | 2012년 | ||||||||
월터 페리고이 | 뵈르게 링 | 로널드 설 | 테리 길리엄 | 오스카 그릴로 | |||||
2012년 | 2013년 | 2014년 | |||||||
마크 헨 | 오토모 카츠히로 | 스티븐 스필버그 | 필 티페트 | 디디에 브루너 | |||||
2014년 | 2015년 | ||||||||
돈 러스크 | 리 멘델슨 | 조 랜프트 | 필 로먼 | 타카하타 이사오 | |||||
2016년 | 2017년 | ||||||||
데일 베어 | 캐롤라인 리프 | 오시이 마모루 | 제임스 백스터 | 스티븐 힐렌버그 | |||||
2017년 | 2018년 | 2019년 | |||||||
웬디 틸비 아만다 포비스 |
랄프 이글스톤 | 안드레아 로마노 | 프랭크 브랙스톤 | 곤 사토시 | |||||
2019년 | 2020년 | ||||||||
헨리 셀릭 | 론 클레먼츠 | 존 머스커 | 윌리 이토 | 수 C. 니콜스 | |||||
2020년 | 2021년 | 2022년 | |||||||
브루스 W. 스미스 | 루벤 A. 아퀴노 | 릴리언 슈워츠 | 스즈키 토시오 | 피트 닥터 | |||||
2022년 | 2023년 | ||||||||
에블린 램바트 | 크레이그 맥크라켄 | 로테 라이니거 | 히사이시 조 | 마시 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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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하타 이사오 高畑 勲 | たかはた いさ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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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출생 | 1935년 10월 29일 |
일본 제국 미에현 우지야마다시[1] | |
사망 | 2018년 4월 5일 (향년 82세) |
일본 도쿄도 이타바시구 | |
국적 | 일본 |
필명 | 다케모토 데츠(武元 哲) |
학력 | 도쿄대학 문학부 ( 불문과 / 학사) |
가족 | 아버지 타카하타 아사지로 |
소속 |
토에이 애니메이션 톱 크래프트 스튜디오 지브리 (1985 ~ 2018) |
수훈 |
자수포장 (1998년) 프랑스 문예공로훈장 2등급 오피시에 (2015년) |
지지 정당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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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브리 스튜디오를 설립한 애니메이션 감독 중 한 명.2. 생애
1935년 10월 29일 일본 미에현 우지야마다시(現 이세시) 에서 타카하타 아사지로(高畑浅次郎)의 자녀로 태어났다. 위로 두 명의 형과 한 명의 누나가 있고 막내였다. 1943년에 부친이 오카야마현에 있는 한 중학교(현재의 고등학교에 해당한다)의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오카야마시로 이사했다.국민학교 4학년생인 만 9살 때에 1945년 6월 29일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오카야마시는 미군의 무차별 폭탄 공습을 받았고, 바로 윗누나와 함께 도망치다가 가족과 헤어지고 하필이면 마을 한가운데로 들어가버려서, 소이탄이 마구 쏟아져서 화재가 일어난 곳으로 들어가서 죽을 뻔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누나는 그 화재에서 부상을 당했고 오랫동안 화상의 상처가 남았다고 한다. 이윽고 새벽이 되어 강둑에서 차가운 검은 비를 맞고 정신을 차리는 체험을 했는데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경험이었고 이후 인생에 강렬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날부터 이틀 동안 가족을 찾아서 방황했는데 어느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고 아무 것도 못 먹고 누가 고구마 쪼가리 하나 던져주는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런 체험을 했으니까 타카하타 이사오는 그런 (시니컬한) 성격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성격파탄자"라고도 말했다. [출처: 꿈과 광기의 왕국]
이후 대학에 진학해서 도쿄로 상경해 명문 도쿄대학 불문과를 전공하고 졸업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3형제 모두가 도쿄대를 졸업한 집안이었다. 대학 동기로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가 있다.
1955년에 일본에서 극장 개봉한 프랑스의 장편 애니메이션 왕과 새의 원형이 된 "사팔뜨기 폭군"(1952)을 보았는데, 프랑스 시인 자크 프레베르가 각본을 쓴 작품이었다. 이 작품으로 쟈크 프레베르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엄청난 영향을 받고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기로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사상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 놀랐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고 메모를 적고 영화속의 나오는 밀실의 평면도도 고찰해서 그렸다고 한다. 당시 1950년대의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몇 년 전까지는 귀축영미 적국이었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영화가 극장에서 차례차레 개봉해서, 연일 매진사태로 큰 인기였다. 그는 디즈니 와는 다른 노선의 프랑스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감명을 받았다.
그의 대학교 졸업 논문은 쟈크 프레베르의 작품 연구였고, 훗날 2004년에는 자크 프레베르의 명시집 《Paroles》을 처음으로 일본어로 완역했다. 장편으로 개작한 왕과 새(1980년작)의 자막 번역도 맡았다. 지브리의 붉은 돼지의 극중 삽입곡 체리가 익어갈 무렵(원곡은 프랑스의 Le Temps des cerises)의 일본어 가사 さくらんぼの実る頃♪ 번역도 해서 극장용 팜플렛에 실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1959년에 토에이 동화에 입사했다.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하는 데도 입사가 가능한 것은 토에이가 연출조수를 공모해서 뽑은 제1기생이었고, 도쿄대 졸업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애니메이션 제작은 미천한 직업이라는 인식이라 회사에서는 "도쿄대학 졸업자가 애니메이션을 하러 왔다고?" 하고 크게 놀랐었다고 한다.[3] 입사동기로는 하늘을 나는 유령선과 동물 보물섬을 연출한 이케다 히로시(池田宏)와 프로듀서 출신으로 훗날 톱 크래프트를 설립하고 초창기 스튜디오 지브리의 실질적 CEO 역할을 한 하라 토오루와 애니메이터로는 코타베 요이치가 있다. 평생의 라이벌이자 절친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1963년에 입사해서 4년 늦은 입사 후배였다.
입사 당시 토에이 동화에는 여러 작화반이 있었고, 어쩌다 오오츠카 야스오반에 배속이 되었고, 호기심이 넘쳐났던 때라 여러가지를 물어봤는데 그는 싫어하는 내색이 없이 잘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장난꾸러기 왕자의 오로치 퇴치에서 연출 보조로 데뷔했다. 이때 감독이었던 세리카와 유고에게 영화적인 연출법을 전수 받아 그를 스승으로 언급한다. # 세리카와 말로는 타카하타는 현장 관리나 사람을 다루는 건 신인인데도 자신보다 잘 했다고 한다. 한참 선배인 애니메이터가 고집을 부리거나 뭔가 이상한 걸 내놓으면 논리적인 말로 맞대응해서 할 말이 없게 만들곤 했다고. 오로치 퇴치는 타카하타가 아니었으면 그 퀄이 안 나왔을 것이라고 한다.
아침에 늦게 지각 출근해서, 책상에 앉아 아침식사 대용으로 식빵을 파쿠파쿠(우걱우걱) 씹어 먹는다고 별명이 '파쿠상(パクさん)'이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오시이 마모루는 애칭으로 그를 '파쿠상'이라고 불렀다. 타카하타도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몰라도, 본인이 연출한 늑대 소년 켄의 콘티 책의 표지에는 PAC(파크)라고 크게 적어넣었다.
선배였던 오오츠카 야스오의 말로는 타카하타는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일본 최고 명문대 도쿄대학 출신이었고 노년의 사진만 보면 믿기 힘들지만 어릴 때는 꽤 귀염상에 #젊은 시절의 타카하타 이사오의 모습 말도 잘 해서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토에이의 여성 직원들이 도시락을 만들어서 그의 자리에 바쳤지만 그는 항상 지각을 했기 때문에 오오츠카 야스오가 그 도시락을 몰래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반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왜 인기가 없었냐는 스즈키 토시오의 질문에 오오츠카 야스오는 " 얼굴." 이라고 즉답했다.[4]
1963년에 TV 애니메이션 "늑대소년 켄"으로 연출에 데뷔했다. 그림을 썩 잘 그리지 못하는데도 연출로 올라가는 속도가 이례적으로 빨랐는데 다름이 아니라 도쿄대학 출신이라 그렇다. 고학력자니까 뭘 시켜도 잘하겠지 하고 토에이에서도 덜컥 큰일을 맡긴 것이다. 능력도 출중했고.
이 때의 작화감독이었던 오오츠카 야스오가 발탁해서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의 처음으로 극장용 영화의 연출을 맡았다.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은 작품성에선 인정을 받았지만 시간과 돈은 너무 많이 소비하고 흥행에서도 토에이 동화가 한 번 망할 뻔할 정도로 실패하여 회사에서 입지가 좁아졌다. TVA 연출 보조로 강등당했다.
이후, 망할 뻔한 토에이 동화의 코스트 다운 경영 정책에 맞서 싸운 노동조합의 노사분규의 진통으로, 회사측은 대규모의 인력정리를 감행했다.
1971년 6월, 타카하타는 미야자키 하야오, 코타베 요이치와 함께 토에이를 떠나 A 프로덕션으로 이적한다. 흥행 실패로 다시 한번 영화의 감독을 맡을 일도 요원했고, 먼저 이적해 있던 오오츠카 야스오 선배와 도쿄 무비의 사장 후지오카 유타카가 말괄량이 삐삐를 TVA로 만들거라며 스카웃 제의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타카하타는 혼자서 갈 수는 없었고 유능한 미야자키 하야오와 코타베 요이치는 꼭 필요했다. 유망한 그 둘을 자신의 욕심 때문에 장래를 망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면서도 설득했다. 미야자키는 바로 함께 떠나기로 결단했으며 코타베는 아내 오쿠야마 레이코가 남는 조건으로 주변에 용인울 받은 후에 9월에야 간신히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훗날 밝혀진 비화를 읽어 보면, 이미 토에이 동화를 떠나 1주일 후에는 다른 회사로 이적하기로 한 날에도, 노조 운동을 하면서 동료 직원들 앞에서 열성적으로 연설을 하면서 절대로 회사를 그만둬서는 안되고 끝까지 남아서 투쟁해야 한다고 외쳤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정작 자신들은 회사를 옮길 계획인데 왜 그런 말을 했냐고 타카하타에게 물어 봤을 때, 노조 간부의 입장(타카하타 이사오는 1961년 토에이 동화가 노동조합을 만들었을 때부터 부위원장으로 노조 간부였다)에서는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개인의 입장과는 다르다고 말해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사람은 대단하다' 라고 감탄을 했다고 한다.
도쿄 무비의 실제작을 맡았던 A프로덕션에서 말괄량이 삐삐를 TVA로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원작자가 끝내 애니화를 허락하지 않아서 기획은 엎어지고, 할 일이 없어진 상태에서, 오오스미 마사아키가 갑자기 감독직을 내팽개치고 떠나버린 루팡 3세(애니메이션 1기)로 투입되어 미야자키 하야오와 연출을 했다. 다만 타카하타는 루팡이라는 캐릭터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미야자키에게 대부분 맡기고 조언이나 다듬어주는 작업 정도만 했다고 한다. 말괄량이 삐삐같은 양질의 문학 작품을 애니화 하겠다고 회사를 옮겼는데[5], 결국 루팡 3세같은 성인만화 원작의 바보같은 시시껄렁한 것을 만들게 된 처지에 놓이자, 토에이 동화에서 남아서 노조 운동을 하면서 고생하는 동료들에게 면목이 없고 미안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연출자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1972년, 그 다음 작품으로 당시 일본에서 불었던 팬더 열풍과 엎어진 삐삐 기획을 접목한 단편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과 속편인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 우천 서커스의 편'을 감독했다. 어린이 관객에게 호응이 좋아서 스태프들은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이즈음 새로 창립된 즈이요 영상( 닛폰 애니메이션의 전신)의 사장이 타카하타를 스카웃했고, 미야자키, 코타베도 그를 따라 A프로덕션을 떠나 함께 옮겼다.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해외 로케이션 취재를 시도한, 그리고 그 전까지는 일본 애니업계에서는 없던 장면설정( 레이아웃) 담당(미야자키 하야오)와 캐릭터 디자인(코타베 요이치)라는 전문 분야직을 새로 만들어서 맡겨서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1974)을 만들어서 큰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연이어 세계명작극장 시리즈 노선으로 엄마찾아 삼만리와 빨강머리 앤을 연출하고 이 역시 비평과 시청률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시청률의 사나이'라고 불리며 방송국에 가면 국장이 마중나와 인사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처음으로 TVA 26화 시리즈의 연출을 맡은 미래소년 코난(1978)는 8화까지 만들고는, “어떡하지? 다 끝났어” 라고 스토리가 턱 막혀버렸는데, 이때 타카하타 이사오가 대타로 9화와 10화의 그림 콘티와 연출을 해 주었다. 그는 꼼꼼하게 1화부터 전부 본 다음에 미야에게 잇따라 물었다고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 “그때 그게 참 싫었지.” 미야자키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는데, 그곳에서 다카하타가 새로 문제를 만들어둔 덕분에 미야자키는 다시 11화 이후부터 이어나갈 수 있었다.
1980년에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으로 옮겨, 야심가 후지오카 유타가 사장이 세계 시장을 겨냥해서 사운을 걸고 만든 대작 리틀 네모의 감독직을 맡기로 했다. 그리고 제작 연습을 겸해서 1981년에 꼬마숙녀 치에 첫번째 극장판을 감독하여 흥행에도 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에는 6년간 공을 들인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첼로 켜는 고슈를 공개해서 호평을 받았다. 그
하지만, 사공이 많은 배인 리틀 네모는 의견 조율이 안되고 좀처럼 제작이 진행되지 않자 1983년에 텔레콤을 퇴사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1981년에 회사에 불만을 품고 먼저 텔레콤을 떠난 상태였다. 그리고 이 무렵 제작 준비를 위해 미국 LA에 머물렀을 때, Frédéric Back[6]의 작품 crac!을 접하고 감명을 받고 이후 작품 스타일에 큰 영향을 받는다. 훗날 그를 찾아가서 직접 만나기도 했다. Frédéric Back도 1998년에 스튜디오 지브리를 방문하고 타카하타 이사오와 재회하기도 했다. 유튜브 영상
천공의 성 라퓨타, 마녀 배달부 키키 등의 미야자키 작품에서 프로듀서 혹은 음악 연출을 맡는 한편 자신의 작품도 만들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프로듀서를 맡아준 은혜를 갚는 차원에서 선배가 만들고 싶어하는 작품의 프로듀서를 맡기로 하고 제작비를 지원한 강과 인간의 관계와 썩어가는 하천을 청소해서 되살린 공무원과 마을 사람들을 다룬 문화 다큐멘터리 실사영화 야나가와 호리와리 이야기(1987)는 절반도 못 만들었는데 돈먹는 하마처럼 제작비를 바닥을 내더니, 급기야 미야자키 하야오가 살던 저택을 저당잡히게 만들었다.
이윽고, 1988년 " 반딧불의 묘", 1991년 " 추억은 방울방울", 1994년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등을 감독했다. 1999년, " 이웃집 야마다군"을 개봉했으나 흥행에서는 참패했고 한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반딧불이의 묘의 경우는 개봉 날짜까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몇 장면에서 색칠을 못하고 선화(線畵)로만 움직이는 미완성인 채로 상영하게 된 것에 책임을 지는 것으로 연출직을 폐업할 것을 결심했지만, 미야자키와 주변의 만류와 권유로 다시 애니메이션 감독직을 맡기로 했다.
추억은 방울방울을 만들기 전에는, 같은 일본공산당을 지지하는 콘도 요시후미(1976년 부터 일본 공산당의 당원)와 함께 아동문학가 시카타 신(しかたしん) 원작의 [국경(国境) 1986-89의 3부작]이라는 소설 작품을 원안으로 만주국과 조선반도의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면서, 일본인의 현지인 차별의 실태를 폭로하려는 기획을 준비했는데 1989년에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고 그 영향으로 기획은 흐지부지 백지화가 되었다. 만일 만들어졌다면 한국인 입장에서는 대단히 흥미로운 소재였다. 일본 블로그 내용 소개 (일본어)
반딧불이의 묘 이후로는 리얼리즘 노선와는 정반대인, 12세기부터 시작한 일본의 전통 에마키에 대해 연구를 했다. 일본 미술과 애니메이션의 원류는 선화(線畵)라고 생각했고, 영향을 받은 Frédéric Back의 작품세계처럼 배경과 인물이 일체화 된 예술성을 추구한 이웃집 야마다군과 가구야공주 이야기를 만든다. 그러나, 너무나도 달라진 그의 영화는 일반 관객들에게 외면을 받았다.
2013년 가구야공주 이야기를 통해 14년 만에 복귀. 이것이 은퇴작이 된다. 이 작품은 스폰서를 하기로 한 닛폰 테레비의 회장인 우지이에 세이치로가 돈은 얼마나 들어도 좋으니 죽기 전에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작품을 보고 싶다는 제안으로 시작된 기획인데, 제작비는 역대 최고 51억 엔이 들고, 총 제작 기간은 질질 끌어서 8년이 걸렸는데, 정작 돈을 대준 그 인물은 개봉하기 전에 죽어버려서 완성작을 보지도 못했고, 흥행은 들인 제작비 회수도 못하고 폭망해 버린 웃지 못할 뒷이야기가 있는 작품이다. 더구나 카구야 공주 이야기는 타카하타가 토에이 동화 재직 시절 구상한 기획이었고, 이것을 이제 와서 굳이 만들 생각도 없었는데 스즈키 토시오가 이거를 영화로 만들어라 만들어라 1년 가까이 설득해서, 겨우 승락하고 만들고 싶지도 않은 것을 억지로 만든 거라서 마지막 유작이 이런 식이라 뒷맛이 씁쓸한 작품이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차기작 구상에 의욕적이라서 헤이케모노가타리를 베이스로 한 신작도 구상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제작은 성사되지 않았다. 가구야공주 이야기를 만들 때 프로듀서였던 니시무라 요시아키가 지브리를 퇴사하고 차린 스튜디오 포녹에서 20분 단편 규모로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원래는 가구야공주 이야기 보다는 이 작품을 애니화하고 싶어했는데, 타카하타가 의지하는 애니메이터 타나베 오사무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은 그리고 싶지 않다"고 해서 무산된 기획이었다.
2018년 4월 5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야자키 하야오, 스즈키 토시오는 평생 담배를 입에 물고 다닌 골초였고, 타카하타 이사오도 골초였지만 [7] 노년에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었고 과로도 안 하고 살았는데 셋 중에서 가장 먼저 폐암에 걸린 것이 타카하타인 걸 보면 아이러니컬 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담배를 끊은 뒤로도 늘 같이 다니는 지인인 미야자키와 스즈키가 옆에서 줄담배를 피워댔으니 끊었다고 해도 건강에 별 도움은 안 됐을 것이다.
3. 연출 특징
타카하타 이사오는 미야자키 하야오에 비해서 화려하기보다는 수수하고 차분한 스타일을 즐겨했고, 세계명작동화 시리즈들을 만들었지만 미야자키에 비해서 일찌감치 일본색이 강한 작품들을 연출했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대한 치밀한 묘사로 토미노 요시유키는 "감히 말한다면 미야자키와 타카하타의 연출실력은 구로사와 아키라보다 위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했을 정도다.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일본 애니메이션 연출 역사상 최초로 레이아웃의 중요성을 강조한 인물. 레이아웃의 신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눈에 쏙쏙 들어오게 만들어진다. 타카하타의 콘티는 정말 대충 그리기로 유명했으며 (최악의 경우 선만 늘어서있는 정도였다고) 나중에는 아예 콘티 그리기 귀찮다고 콘티 담당을 따로 두고 구두로 지시하거나 직접 연기해서 지시를 내리는 방식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가 지시한 배치대로 만들면 이해하기 쉽고 정돈된 영상이 나왔기 때문에 모두 감탄했다고 한다.
타카하타 이사오 작품의 특징은 별 거 아닌 이야기를 하는데 굉장하다는 것이다. 전개는 엄청나게 느리고 하는 이야기도 소소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 정도인데 굉장하다. [8] 캐릭터들의 감정 묘사나 행동에 대한 디테일이 굉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보게 만든다. 희노애락 같은 단편적 감정 외에도 복합적인 감정을 동시에 묘사한다. 대사 이외의 행동과 눈치로만 표현하는 연출도 굉장히 많다. [9] 그의 스타일을 예로 들자면 일류 배우만 나오는 애니메이션. 그래서 그의 작품은 나이를 먹고 봐야 그 진가를 볼 수 있다고도 한다. 이런 연출의 비결은 집요한 인간 관찰이었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늘 타인을 관찰하며 인간이 어떤 상황에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를 연구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일본식 일상물 애니메이션의 시조를 타카하타 이사오로 분류하기도 한다.
남성 연출가이지만 여성을 표현하는데 정평이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여성을 메인으로 한 작품이 많지만 이해하고 표현하는데는 늘 어려움을 겪었는데 [10] 타카하타는 막힘이 없었고 미야자키가 많은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스즈키 토시오는 '미야자키가 그리는 여성은 동경, 타카하타가 그리는 여성은 존중. 타카하타가 그려내는 여성이 더 리얼하다' 라고 평하기도 했다. # 그래서 타카하타 작품은 여성 팬이 굉장히 많다. 타카하타는 이에 대한 비결로 "계속 행동을 관찰했다." 라고 하기도 했다. 특별히 자신이 여성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거나 이해를 하는 건 아니고 본 대로 그리는 것이라고 한다. 타카하타는 특히 말광량이 소녀, 철 없는 소녀 연출 전문이었다.[11][12] 물론 말괄량이가 아닌 여성 연출도 잘했다. 반면 미야자키는 청초하고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미소녀 연출 전문이었다.
화면 구도와 캐릭터의 포즈를 매우 다양하게 쓴다. 이에 대해서 안노 히데아키는 "미야자키 씨는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리는 감독이라 그리기 어려운 구도나 장면이 나오면 "아이씨 그리기 귀찮아." 하고 빼버리고 자신 만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타카하타 씨는 직접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고 남에게 시키는 입장이라 그리기 어렵든 말든 알 바가 아니었다.", "그의 구도 잡기는 마치 오즈 야스지로와 같다. [13]" 라고 하기도 했다. #
구도를 잡을 때는 화면에 왜곡을 거의 안 넣고 눈으로 보는 것 같은 영상을 만든다. 토미노 요시유키, 오시이 마모루 등 후배들이 애니메이션의 연출에 카메라 렌즈의 개념을 도입해 영화처럼 보이는 영상을 만들었지만 타카하타는 이를 싫어해서 화면에 렌즈에 의한 왜곡을 잘 넣지 않았다고 한다. 광각 효과만 약하게 넣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런데 또 리얼한 레이아웃만 하는 건 아니고 상상, 환상의 세계를 표현할 때는 폴 그리모의 왕과 새의 영향을 받은 비현실적인 레이아웃을 쓰기도 한다.
작화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성우를 정하고, 그 캐릭터의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목소리 연기를 미리 녹음하는 선녹음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데, 이때 녹음을 하는 배우의 표정이나 연기를 비디오에 담아 그림을 그릴 때 참고했다. 이런 방식을 사용하면 목소리와 그림의 타이밍이 맞을 뿐만 아니라 입 모양이나 얼굴의 움직임까지 재현할 수 있어서,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다카하타의 작품이 보통 애니메이션과 다른 점은 이런 부분에 있다.
부드럽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추구해서 작화 매수 (프레임)을 엄청나게 많이 쓰는 감독이다. 이게 애니메이션 제작에 있어 돈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것인데 그는 돈 걱정은 전혀 안 하고 그저 물 쓰듯이 제작비를 마구 끌어 썼다고 한다. 스즈키 토시오에게 제작비 걱정을 감독이 왜 하냐? 그건 프로듀서가 걱정할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상대하던 프로듀서들은 굉장히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다른 작품의 배는 제작비가 들어갔으며 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51억 엔이라는 터무니 없는 금액을 썼다. [14] 오늘날 기준 가구야공주 이야기는 일본에서 작화 매수를 가장 많이 쓴 애니메이션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평범한 일상을 그려내는 작품이라 티가 안 나서 그렇지 미야자키 하야오보다 돈을 더 많이 쓰는 감독이었다. 스즈키 토시오 말로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내가 지브리에서 돈을 벌면 타카하타가 다 쓴다. 나는 타카하타가 작품 만들 돈을 버는 기계다." 라고 투덜댄 적도 있다고 한다.
벚꽃을 상당히 좋아하는지 작품에 벚꽃이 중요한 포인트로 꽤 자주 나온다. 빨강머리 앤 같은 서양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도 벚꽃 같은 게 나온다. 유럽에도 벚꽃이 있긴 하니까 고증 오류는 아니지만.
애니메이션 감독 중에선 나무를 심은 사람을 만든 프레데릭 백을 존경하며 말년 작품인 이웃집 야마다 군과 카구야 공주 이야기는 나무를 심는 사람 특유의 색연필 작화를 의식한 영상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연출과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르게 신 기술 도입에 긍정적이었다. 이웃집 야마다군과 가구야공주 이야기는 디지털 기술도 적극 사용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당장 개인 책상에 LCD 모니터로 보이는 기기가 있었을 정도였다.[15]
음악에 소양이 있고 피아노도 잘 쳤다고 한다. 제자 토미노 요시유키는 그의 집에 피아노가 있어 "저 피아노는 뭐지? 아내 분이 치나?" 라고 생각했는데 타카하타가 "내가 치는 건데."라고 해서 "이 사람 못하는 게 뭐야?" 라는 생각이 들었고 일반인은 천재를 따라갈 수 없다는 절망을 느꼈다고 한다. #출처 스즈키 토시오의 지브리의 땀투성이 2022년 1월 9일 방송 가구야공주 이야기의 곡 중 몇 개는 타카하타가 직접 만들었는데 샘플 곡을 뭘로 만들었냐면 하츠네 미쿠로 만들었다. 다만 샘플이었고 본편에 쓴 곡은 제대로 다른 사람들이 연주하고 불러서 사용했다. # 그래서 작품의 음악 선정도 뛰어나다. [16] 타카하타가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의 프로듀서를 할 때는 주로 음악을 많이 담당했다고 한다. 히사이시 조를 발탁한 사람도 타카하타였다.
화면 외각 테두리에 꽃, 보석 등으로 이루어진 사각 형의 장식물을 넣어 등장인물의 외모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거나, 그 캐릭터에게 반했다는 것(콩깍지)을 표현하는 연출을 자주 한다. 이 연출을 일본 애니메이션에 퍼뜨린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17] 다만 타카하타도 리얼을 추구한 작품에선 이 연출을 쓰지 않는다.
4. 관련 인물
- 스승
- 영향을 받은 인물
- 자크 프레베르
- 프레데릭 백 (Frédéric Back)
-
폴 그리모 (Paul Grimault)
- 프로듀서
- 콘티 담당
- 애니메이터
- 제자
- 추종자
5. 기타
- 대학 전공이 프랑스 문학과였지만 의외로 프랑스어는 기초적인 것 이외에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대학 생활을 게을리해서 외국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그때 자크 프레베르의 문학을 만난 것은 자신의 인생의 축복이라고 했다. 타카하타 작품이 좋아 일본에 찾아온 프랑스인 애니메이션 연구가 Ilan NGUYEN 와 교류를 나눴다고 하며 [24] 외국에 나갈 때는 그와 함께 다니며 통역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타카하타 작품의 프랑스어 번역은 이 사람이 타카하타의 감수를 받아가며 작업해 번역이 정확하다. 이렇게 계속 프랑스인과 교류를 나누고 계속 프랑스를 오고가면서 프랑스어 실력이 늘어 2004년 노년의 나이에 자크 프레베르의 책을 번역하고 왕과 새의 자막을 제작하기도 했다.
- 타카하타 이사오는 꽤나 느긋하고 행동이 굼뜬 사람이었다는 증언은 곳곳에 남아있다. 옛날 사진을 봐도 왠지 소파에 누워있는 사진이 꽤 되는 편이다. 토에이 동화 시절 별명이 나마케모노[25] ( 나무늘보)였다. 토에이 동화 시절부터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를 '나마케모노(나무늘보)의 후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 작품이 끝나면 출근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의 집으로 가서 "파쿠상, 이러면 안돼요. 어서 일어나서 회사에 가요."라고 데리고 왔다고 한다. 그가 세계명작극장 등을 만들 때 펑크를 안 낸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옆에서 부지런하게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미야자키는 입만 열면, “파쿠상을 돌보는 게 지긋지긋하다”라고 불평했다고 한다. [출처: 지브리의 천재들] 가구야공주 이야기의 개봉과 함께 프로듀서가 밝히는 작업 과정의 뒷 비화가 공개되었는데,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얼마나 제대로 작업을 하지 않고 게으름을 부렸는지 알 수 있다.( 원문) 전성기 시절에도 대부분의 작업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위임하고 본인은 미야자키의 폭주를 통제하거나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주로 해서 작업량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스즈키 토시오는 타카하타의 게으름에 대해 "그는 머리 속에서 영상과 스토리 구상이 완벽하게 떠오르지 않으면 작업을 안 한다." 라고 했다.
- "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년 개봉) 때는 느린 제작 속도탓에 프로듀서가 서너 명이 교체되기도 했다. 그 중의 한 명이 타카하타 이사오의 입사동기였던 하라 토오루로 호루스의 흥행참패의 책임을 추궁받고 토에이 동화를 퇴사하고 1972년에 톱크래프트를 설립한다. 톱크래프트는 훗날 스튜디오 지브리로 재창립하게 된다.
- 카구야 공주 이야기의 담당 프로듀서를 맡게된 신입 사원 니시무라 요시아키(훗날 스튜디오 포녹)는 제작기간이 질질 연장되어 작품이 완성될 때는 결혼하고 자식까지 낳은 후였다고 하며, 하루 종일 타카하타 감독곁에 붙어서 그가 늘어놓은 장광설에 맞장구 쳐주는 것이 일이었다고 한다. 박학다식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즐겼다고 하며, 스즈키 토시오의 목격담으로 그 말빨 세기로 유명한 오시이 마모루와 대화하다가, 오시이가 약간 시건방진 소리를 하자 타카하타가 한 마디 쏘아 붙였는데 오시이는 말문이 턱 막히고 분위기가 싸해졌다고 한다.
-
애니메이션 연구가
히카와 류스케도 아마츄어 평론가 시절 타카하타 이사오를 처음으로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 서로 인사도 나누기도 전에 녹음기부터 꺼내 들고 다짜고짜 녹음을 하기 시작하자, 타카하타가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엄청 꾸중을 듣고 한 40분 정도 설교를 들었다고 한다. 히카와는 그 전에
데자키 오사무를 인터뷰 취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는 무척 친절해서 애니메이션 감독은 데자키처럼 다들 성격이 좋은 줄 착각했다가 타카하타를 만나서 신나게 깨졌다고 한다. 그런데 타카하타는 화가 어느 정도 풀리자, 이번에는 묻지도 않았는데도 이야기를 술술술 마구 쏟아냈다고 한다.
수다쟁이 기질. 출전: 練馬にいた! アニメの巨人たち
- 미야자키 하야오와는 오랜 동료이자 친구로서 미야자키의 사상에 타카하타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둘은 1963년 해질녘 버스 정류장에서 미야자키가 네리마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도중 처음 만났다. 미야자키는 타카하타의 첫 인상을 온화하고 영리해 보이는 청년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좋은 콤비이기도 했고 미야자키에게 연출면에서도 영향을 끼쳤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두 사람이 함께 작품을 만드는 일은 사라졌다. 타카하타는 자칫 폭주할 수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발상에 냉정한 관객의 시선에서 제동을 거는 브레이크의 역할을 했으며 그랬을 때 미야자키는 매우 화를 내면서도 결국은 타카하타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했다고 한다. 각종 서적에서도 여러번 언급되고 오오츠카 야스오도 인증한 매우 유명한 일화다. 그래서 미야자키 작품에 타카하타가 별 것도 안 했음에도 프로듀서나 감수 역으로 스태프롤에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 타카하타가 미야자키 옆을 떠나 따로 작업하고부터의 미야자키 작품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모노노케 히메부터 타카하타는 미야자키에게 간섭하는 걸 그만뒀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모노노케 히메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후의 미야자키 작품은 관객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본인이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면서 폭주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미야자키 본인도 이 점은 알고 있는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스토리가 줄곧 치히로/센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것에 대해 "이러면 파쿠상(타카하타 이사오의 별명)한테 혼나는데." 라며 콘티를 그리는 내내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스즈키 토시오의 증언) 그리고 평론가 마치야마 토모히로와 후배 감독 오시이 마모루도 이 점을 지적했다.
- 토미노 요시유키가 스승으로 꼽는 사람으로 " 도쿄대학까지 나와놓고 왜 이런 시궁창 업계에 들어와있는가"라고 생각했으나 타카하타 이사오가 진심으로 즐겁게 일하고 있어서 이 일을 계속해봐도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안 그랬으면 진작에 그만뒀다고.
- 일본의 대문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와 같은 도쿄대학 불문과 동기이지만 이 후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서로 면식이 있는 사이는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조금의 접점이 있다고 하면 1955년 당시 도쿄대학의 학우회의 기관지에 오에는 자신의 첫 소설 작품이었던 '화산'을 게재하였고 타카하타는 영화 연구회의 동인지를 기고했다고 한다.
- 정치적으로 일본공산당 지지자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인 면에서도 일본 제국의 침략 전쟁을 크게 비난했다. 1945년 9세 때 오카야마 공습을 직접 겪었기 때문. 《국경》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만주국의 실태와 난징 대학살을 고발하는 작품을 같은 일본 공산당 지지자이며 당원인 콘도 요시후미와 만들려고도 시도했지만 천안문 사태로 인해서 기획은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반딧불이의 무덤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극우 성향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물론 이건 아주 크게 잘못 알려진 것이다. 반딧불이의 무덤도 딱히 피해자 행세물이 아니다.
- 친구 코타베 요이치가 만든 드라마 나츠조라의 등장인물 사카바는 코타베 요이치 자신을 모델로 한 캐릭터지만 연출가인 것도 그렇고 극중 묘사는 타카하타 이사오의 이야기도 섞여있다. 코타베 요이치 + 타카하타 이사오라 보면 될 것이다.
- 도라에몽의 애니판을 살린 인물이기도 하다. 도라에몽은 지금의 장기 시리즈 애니메이션이 나오기 전에 망한 애니메이션이 나온 적이 있어 원작자가 애니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도라에몽의 애니화를 어떻게든 하고 싶던 신에이 동화의 쿠스베 산키치로 사장이 지인 타카하타 이사오에게 원작자와 방송국을 설득할 기획서를 써달라고 했고 작품이 맘에 든 타카하타는 "이 작품은 매우 훌륭하니 더 추가하지 말고 그대로 만들면 된다." 라고 하면서 각본가도 빼버리고 1화에 2 에피소드를 방영하는 원작 존중의 원칙이 담긴 기획서를 제출했고 모두가 만족하여 도라에몽이 장기 시리즈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
- 미야자키가 후배의 작품에 굉장히 까칠하고 부정적으로 반응했던 것과 다르게 타카하타 이사오는 후배들 작품이나 이른바 오타쿠 애니메이션도 표현을 잘하면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한다. 키타쿠보 히로유키 말로는 지브리에서 자신의 작품을 칭찬해준 건 타카하타 이사오 뿐이었다고 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부정적으로 봤지만 타카하타 이사오는 괜찮다고 하기도 했다.
- 오시이 마모루에 따르면 미야자키나 토미노는 그래도 아내에게는 잘 해주는 편이었는데 타카하타는 직장에서는 인격자였지만 집에 가면 아내를 막 대했으며 그 모습은 마치 폭군 마르크스 주의자였다고 한다, 고로와의 대담에서는 '하야오가 타카하타 씨처럼 가족들한테 자기 영화 보라고 강요했냐'고 물어봤을 정도. 출처 그래서 오시이는 "왜 사회주의자는 이상향을 꿈꾸면서 가정에선 실천하지 않는가." 하는 고민을 했었다고 한다.
- 미야자키와 타카하타의 결정적인 차이는 마감이 닥쳤을 때 나온다고 한다. 미야자키는 마감이 닥치면 "이건 생략하거나 더 쉽게 고쳐야겠군" 하고 타협해서 작품을 완성하지만 타카하타는 절대 타협하지 않으며 "공개를 미뤄. 내가 잘못한 게 아니고 애니메이터들이 느리게 그려서 그런 걸 어쩌라고" 라고 하면서 미뤄버린다고 한다.
- 스즈키 토시오는 타카하타에 대해서 "굉장히 차갑고, 박정한 사람이다. 스태프를 고생시켜도, 회사에 피해를 줘도 죄책감이 없다.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준 스태프에게도 감사를 표하지 않는다." 라고 하면서도 "그런데도 카리스마가 있어서 늘 사람이 따른다. 그 카리스마는 마력이라고 해도 좋다. 타카하타의 마력에 빠지면 평생 그에게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라고 평했다. 실제로 스태프를 엄청나게 고생시키기로 유명한 감독인데도 그와 계속 같이 일하는 스태프가 많았다. 미야자키와 스즈키도 그의 마력에 빠져서 평생 빠져나오지 못하고 고생한 피해자라고 한다.
-
스즈키 토시오는 "
미야자키 하야오는 관객에게 보여주려고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타카하타 이사오에게 보여주려고 작품을 만드는 겁니다." 라고 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콘티 작업 중 타카하타가 사망했을 때 미야자키는 충격으로 2 달 동안
콘티 작업을 하지 못 했다고 한다. 2023년 방영 다큐 프로페셔널에서 미야자키는 "내 작품들은 타카하타 이사오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게 맞다." 라고 밝혔다.
- 2023년 방영 다큐 '프로페셔널'에서 밝히길 원래 미야자키는 타카하타를 싫어했다고 한다. 연출하면서 미야자키가 그린 거에 "이건 안 돼. 넌 이것 밖에 못 하냐." 라면서 계속 리테이크를 먹이고 논리적이면서 핵심을 뚫는 말로 속을 긁어서 "뭐야 이 인간!" 하고 분노했다고 한다. 그래서 반복해서 가져가는 사이에 뭔가 그에게 끌리게 되었고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뭐든 흠을 찾아내는 그에게[26] 인정을 받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정받기 전에 타카하타가 죽어버렸다고 한다. "평생 짝사랑." 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타카하타 이사오를) 만나버렸으니 어쩌겠습니까." 라고 한다.
- 타카하타는 콘도 요시후미와 친했고 콘도의 작업물은 자주 칭찬했는데 미야자키는 강한 질투를 느꼈다고 한다. "내가 필요한 거 아니었냐." 라고 생각했다고.
-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결말은 죽은 타카하타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제작 중에 타카하타가 죽어서 그와 결별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 작품의 캐릭터 '큰할아버지'는 타카하타 이사오라고 한다.[27] 당초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생을 다룬 작품이라는 해석이 주류였는데[28]미야자키 본인 말로 뒤집힌 거라 "이게 그런 내용이었다고?" 라고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 스즈키 토시오 말로는 미야자키는 타카하타를 정말 좋아해서 그의 필적도 타카하타를 따라하는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비교해서 보여줬는데 별로 차이가 없었다.
6. 작품 목록
6.1. 애니메이션 영화
<rowcolor=#fff> 년도 | 제목 | 감독 | 각본 | 비고 |
1968 |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 ○ | ||
1972 |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 (판다코판다) |
○ | ||
1973 |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 비온날의 서커스 | ○ | ||
1981 | 꼬마숙녀 치에 | ○ | ||
1982 | 첼로 켜는 고슈 | ○ | ○ | |
1987 | 야나가와 수로 이야기 | ○ | ○ | [29] |
1988 | 반딧불이의 묘 | ○ | ○ | |
1991 | 추억은 방울방울 | ○ | ○ | |
1994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 ○ | ○ | |
1999 | 이웃집 야마다군 | ○ | ○ | |
2010 | 극장판 빨간머리 앤 그린 게이블로 가는 길 | ○ | ○ | [30] # |
2013 | 가구야공주 이야기 | ○ | ○ | [31] |
6.2. TV 애니메이션
- 감독으로 표기되지 않고 '연출' 혹은 '시리즈 디렉터'로 표기되는데 옛날엔 애니메이션 만드는 놈 주제에 무슨 감독 직함을 다느냐하여 감독인데도 감독으로 표기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해서 그런 것이다. 이 작품들의 감독은 타카하타 이사오다.
<rowcolor=#fff> 년도 | 제목 | 감독 | 각본 | 비고 |
1971 |
루팡 3세(애니메이션 1기) 2쿨 |
○ | [32] | |
1974 |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 ○ | ||
1976 | 엄마 찾아 삼만리 | ○ | ||
1979 | 빨강머리 앤 | ○ | ○ | [33] |
1981 | 꼬마숙녀 치에 TV판 1기 | ○ |
6.3. 그 외
- 연출
- 프로듀서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 천공의 성 라퓨타(1986)
7. 외부 링크
- 일본 방송 타카하타전(高畑勲展) 유튜브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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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톱 크래프트 · 스튜디오 지브리( 연표) | ||||
관련 인물 | ||||
미야자키 하야오 |
스즈키 토시오 |
콘도 요시후미 타카하타 이사오 | 미야자키 고로 |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 히사이시 조 | 그외 관련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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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시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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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 ||||
극장 장편 애니메이션 |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 | 천공의 성 라퓨타 | 반딧불이의 묘 | 이웃집 토토로 | |
마녀 배달부 키키 | 추억은 방울방울 | 붉은 돼지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 |
귀를 기울이면 | 모노노케 히메 | 이웃집 야마다군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
고양이의 보은 | 하울의 움직이는 성 |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 | 벼랑 위의 포뇨 | |
마루 밑 아리에티 | 코쿠리코 언덕에서 | 바람이 분다 | 가구야공주 이야기 | |
추억의 마니 | 붉은 거북 | 아야와 마녀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 |
지브리 신작 애니메이션 | ||||
(1)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경우 톱 크래프트에서 제작했으나 미야자키가 저작권을 가지기로 하고 제작한 작품이고 미야자키가 지브리에 저작권 관리를 위탁해 스튜디오 홈페이지 작품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 ||||
TV 애니메이션 | ||||
바다가 들린다 | 기브리즈 | 아야와 마녀 | ||
단편 애니메이션 | ||||
On Your Mark | 빙글빙글 | 고래 잡기 | 고로의 산보 | |
메이와 아기고양이버스 | 상상속의 비행 기계들 | 상상의 기계들 중 파괴의 발명 | 기브리즈 에피소드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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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니노쿠니 시리즈 중 1편을 한정으로 스튜디오 지브리가 제작을 검수하는 방식으로 참여함. |
[1]
現
미에현
이세시
[2]
말년의 인터뷰에서
일본공산당을 지지하지만 당원은 아니라고 밝힌 적이 있다.
[3]
도쿄대학 출신 감독
나카무라 료스케도 "내가 아는 선에선 도쿄대학 출신 애니메이션 감독은 타카하타 이사오 밖에 모른다." 라고 했다.
[4]
출처 '스즈키 토시오의 지브리의 땀투성이 3'
[5]
스즈키 토시오의 말에 의하면,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도 애니화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6]
프랑스계 캐나다 사람이라 인명 표기가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여러가지가 있다. (대표작은
나무를 심은 사람)
[7]
그래서 타카하타가 금연하기 전에는 세 사람이 모여서 회의를 하면 연기로 가득해서 화재현장 같았다고 한다.
[8]
반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을 하면 상당히 빠르고 비일상적인 묘사의 작품이 많이 나온다.
[9]
이런 연출 경향은
토미노 요시유키에게 이어졌다.
[10]
그래서 리얼하다기보단 이상적인 존재로 그려질 때가 많다.
[11]
하이디, 앤, 치에 등.
[12]
타카하타의 스승인
세리카와 유고도 이런 캐릭터 연출이 전문이었다.
[13]
그만큼 깐깐하다는 소리다. 오즈 야스지로는 소품을 밀리미터 단위로 배치하는 감독이다.
[14]
10억 엔만 써도 돈을 많이 쓴 것인데 51억 엔이면 엄청난 금액이다. 이 제작비로 적자가 안 나면 100억 엔 이상 흥행해야 하는데 2020년대에는 100억 엔 흥행 애니가 종종 나오고 있지만 이 당시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니면 100억 엔 흥행은 꿈도 꿀 수 없는 시기였다. 즉 개봉 전부터 이미 적자가 확정된 작품이다.
[15]
미야자키 하야오도 결국 신티크 액정타블렛을 도입하기에 이르렀으나 오차범위에 대한 불만 때문에 다시 포기한다.
[16]
반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음악에 관심이 없어 음악은 전부
히사이시 조에게 맡겼다.
[17]
그가 보던 유럽 영화나 유럽 애니메이션에서 먼저 나온 연출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이걸 쓴 건 타카하타 이사오이다.
[18]
타카하타가 천재라고 생각해서 타카하타가 신인일 때 논크레딧으로 종종 콘티를 그려줬다고 한다. 크레딧이 없어서 잘 알려져있지 않다.
[19]
토미노는 여러 사람을 만나며 연출을 배웠지만 자신의 스승이라 단언할 사람은 타카하타 이사오라고 했다.
[20]
자신은 영화 팬이지만, 애니메이션의 방법론은 타카하타의 하이디를 보고 배웠다고 한다. 어머니가 타카하타 팬이라 하이디만 봐서
우주전함 야마토를 못 봤다고 한다. 업계에 들어오고 스즈키 토시오와 미야자키의 주선으로 타카하타를 알게 되었는데 굉장히 좋은 분이었다고 한다. 다만 같이 작품을 할 사람은 도저히 아니었다고 한다. '앵커'라는 작품을 만들 때 타카하타와 싸워서 그만뒀다.
[21]
포스트 타카하타 이사오로 거론되는 인물로 실제로 타카하타 이사오는 생전에도 하라 케이이치를 눈여겨보고 고평가했다고 한다.
[22]
이토 토모히코는 호소다 마모루 애니메이션 역대 부감독 대담 인터뷰에서 호소다가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소리를 듣고 "아닙니다. 호소다 씨는 타카하타 이사오입니다." 라고 하기도 했다.
[23]
엄마찾아 삼만리를 최고의 작품이라 극찬했으며 자신의 연출은 타카하타 이사오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그래서 타카하타에게 작품을 같이 하고 싶다고 러브콜도 해봤는데 왠지 안 부르더라고 한다.
[24]
그가 일본 비자를 신청할 때 타카하타가 직접 보증을 섰다고 한다.
[25]
카타가나로 ナマケモノ로 쓰면 나무늘보라는 뜻이고 히라가나 なまけもの는 게으름뱅이라는 뜻이다.
[26]
이를 알려주는 일화로
바람이 분다에
축음기가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타카하타가 보더니 "미야자키. 진짜 비싼 축음기는 금속 바늘이 아니고 대나무 바늘을 써. 그게 더 비싸고 소리가 좋아." 라고 지적해서 고쳤다. 미야자키는 "고마워요. 그런 거 관찰하고 기억하다 지적하는 사람은 파쿠상 밖에 없어." 라면서 고마워했다. 싸운 건 아니고 미야자키는 오히려 타카하타가 자기 실수를 지적하자 굉장히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27]
작중 설정은 책을 너무 읽어서 머리가 이상해진 괴짜 천재이다.
[28]
물론 그런 내용이기도 하고 그것도 인정했다. 그것보다 타카하타가 우선이었다는 것.
[29]
미야자키 하야오가 프로듀서 겸 제작한 실사 다큐멘터리 영화
[30]
TV판 1화부터 6화 분량의 재편집판. 예전에 편집해놓고 창고에 박혀있던 걸 꺼내서 극장 개봉했다.
[31]
공동 각본 - 사카구치 리코
[32]
1기 감독이 도망간 상태에서 이어받은 거라 2쿨 분량부터는 미야자키와 공동 감독이었다. 실질적으론 미야자키가 중심이었고 타카하타가 조언을 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33]
50화 중 36개 화 각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