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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0:26:57

이웃집 야마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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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경우 톱 크래프트에서 제작했으나 미야자키가 저작권을 가지기로 하고 제작한 작품이고 미야자키가 지브리에 저작권 관리를 위탁해 스튜디오 홈페이지 작품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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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니노쿠니 시리즈 중 1편을 한정으로 스튜디오 지브리가 제작을 검수하는 방식으로 참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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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야마다군 (1999)
ホーホケキョ となりの山田くん
My Neighbors The Yamadas
파일:to_narita-img848x1200-1510997513xsl1az3027.jpg
<colbgcolor=#d31213><colcolor=#ffffff> 장르 애니메이션, 가족, 일상, 코미디
감독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 조수 이무라 켄지
각본 타카하타 이사오
원작 이시이 히사이치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
목소리 출연 마수오카 토루, 아사오카 유키지 外
음악 야노 아키코[1]
주제가
미술 타케시게 요지
작화감독 코니시 켄이치
제작사 파일:일본 국기.svg 스튜디오 지브리
배급사 파일:일본 국기.svg 쇼치쿠
개봉일 파일:일본 국기.svg 1999년 7월 17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6년 6월 8일
상영 시간 104분
제작비 20억 엔
일본 박스오피스 15억 6,500만 엔[2]
대한민국 총 관객 수 2,979명
국내 스트리밍
[[넷플릭스|
NETFLIX
]]




상영 등급 파일:영등위_전체관람가_초기.svg 전체 관람가

1. 개요2. 예고편3. 시놉시스4. 등장인물5. 제작 과정6. 평가7. 흥행8. 기타

[clearfix]

1. 개요

家内安全は、世界の願い。
집 안의 안전은, 세상의 소원.

스튜디오 지브리 제작,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극장 애니메이션. 1999년 일본에서 개봉했다.

만화가 이시이 히사이치가 1991년부터 아사히 신문에서 연재 중인 4컷 만화 노노짱(ののちゃん)[3]이 원작인데, 원작이 4컷 만화다보니 여러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타카하타 이사오가 가족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구상하던 중 프로듀서인 스즈키 토시오의 제안으로 만들게 됐다. 과거 타카시와 마츠코의 결혼부터 노보루와 노노코가 태어나고 자란 과정과 현재 야마다 가족들의 일상을 바탕을 한 이야기가 전개되며 각 에피소드 마지막에 유명 시인들의 하이쿠를 인용하면서 여운을 남긴다.

제작은 타나베 오사무가 타카하타 이사오의 지시대로 콘티를 그리고 작화를 수정해가면서 만들었다. 작화감독은 코니시 켄이치가 맡았는데 기본 작화는 타나베 오사무의 콘티대로 완성되고 코니시 켄이치는 이것을 색연필 작화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제작진 ▼
* 원작 - 이시이 히사이치(『 이웃집 야마다군 』 『 노노 짱 』)

2. 예고편

예고편

3. 시놉시스

4컷 만화를 보는 것 같은 독특한 구성의 <이웃집 야마다군>은 이웃에 함께 살고픈 괴짜 가족 이야기. 폭주족에게 정의의 사자로 살아보지 않겠냐는 권유를 진지하게 하는 당당한 할머니 시게와 가장의 권위 내세우고픈 소심한 아빠 타카시, 저녁식사 메뉴가 유일한 고민거리인 건망증 심한 엄마 마츠코, 작심 3초의 나날을 보내는 평범한 아들 노보루, 가족 특히 오빠 일이 제일 걱정인 막내딸 노노코. 오늘 하루도 이들의 일상은 부산하기만 한데...

4. 등장인물

5. 제작 과정


스즈키 토시오가 밝힌 이웃집 야마다군 제작 비화 1 ▼
||나는 이시이 히사이치의 팬으로, 그가 《 아사히 신문》에 연재했던 「이웃집 야마다군」을 매일 챙겨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이 만화를 영화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기획에 들어간 것은 「모노노케 히메」를 제작하는 도중이었다. 「모노노케 히메」는 초대작(超大作)인 데다 주제도 무겁다. 그래서 다음에는 완전히 다른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이제 주인공들이 넘어지거나 고꾸라지는 즐거운 영화를 보고 싶지 않은가? 내가 「이웃집 야마다군」에 주목한 배경에는 그런 동기도 있었다.
다카하타 감독의 작품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이른바 히어로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스토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큰 사건이 아니다. 남들에게는 사소한 일이지만 본인에게는 큰 문제라서 희로애락의 감정이 솟구치는데, 그런 모습을 꼼꼼하고 세심하게 그려나가는 것이다. 다카하타 감독 영화의 매력이다. 그렇다면 「이웃집 야마다군」이야말로 그를 위한 작품이 아닐까.
이번에도 역시 그는 좀처럼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았다.
“지금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방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잘만 하면 오즈 야스지로 감독 작품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몹시 화를 냈다. 그렇지만 나는 일단 기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카하타라면 어떻게든 영화로 만들 방법을 찾아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결국 다카하타 감독은 내 설득에 뜻을 굽혔다. 그는 준비 단계에서 이렇게 말했다.
“원작의 재미는 어디까지나 4컷 만화일세.”
장편 영화라고 해서 그곳에 다른 요소를 덧붙이면 세계관이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는 일단 원작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뽑아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그것을 토대로 최초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나는 90분에서 길어도 두 시간을 예상했는데, 완성된 시나리오는 무려 다섯 시간이 넘고 말았다. 4컷 만화에서 그만한 시나리오를 만들어내다니! 그는 역시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데 천재다.
그때부터 시나리오를 줄이는 작업에 들어갔는데, 그는 대뜸 이렇게 선언했다.
“너무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제외하겠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나리오를 줄이는 일은 매우 괴로운 일이다. 가능하면 가장 재미있는 부분을 남기고 싶은 게 감독의 마음이 아닐까? 그런데 그는 가장 웃기는 에피소드부터 제외하겠다는 것이다.
최종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을 때, 그제야 겨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에피소드에서 배를 잡고 웃으면 관객은 다음 에피소드로 들어갈 수 없다. 만화책이라면 충분히 웃고 나서 페이지를 넘기면 되지만, 영화의 경우에는 관객이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줄 수 없다. 그래서 일부러 피식 웃는 정도로 마무리하고 다음 에피소드로 들어간다. 이것이 다카하타 감독의 의도였다.

그런 식으로 분량을 줄이는 한편, ‘우리 집의 부부간의 도리’, ‘부자간의 대화’, ‘야마다 가족의 명절 풍습’ 등 내용별로 장(章)을 구성하고, 장과 장 사이에는 ‘뒷모습에 눈물만 흘리누나’, ‘가을밤의 분위기를 깨뜨릴 이야기런가’처럼 하이쿠를 끼워넣었다. 그렇게 해서 다섯 시간이 넘는 시나리오가 1시간 44분으로 줄어들었다.

마지막 부분에 월광가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 단카이 세대를 배려해서 넣었다고 한다. 아버지인 다카시가 어린 시절에 동경했던 히어로라면 뭐니 뭐니 해도 월광가면이었으니까. 정의의 사도는 항상 나쁜 녀석들을 혼내주고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 히어로는 어떻게 되었는가? 다카하타는 그것에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중년이 된 다카시가 예전에 동경했던 정의의 히어로를 떠올리는 에피소드를 덧붙였다. 그 덕분에 관객은 향수를 느낌과 동시에 지금의 시대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에피소드 전반부에 관객이 깜짝 놀라는 장면이 있다. 다카시가 폭주족을 야단치러 가는 장면에서 그때까지 3등신이었던 캐릭터가 리얼한 그림으로 바뀌는 것이다. 만화라고만 생각했던 관객에게 리얼한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다카하타 감독의 계획된 연출이었다.
“관객은 화면을 통해 2차원의 그림을 보고 있지만, 뇌 안에서 보고 있는 건 그림 안쪽에 있는 사실이네.”
이것이 애니메이션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3등신 캐릭터에서 리얼한 캐릭터로 바꿈으로써 그런 사실을 의식하게 만들고, 그 앞에 진짜가 있음을 암시한다. 즉, 관객에게 애니메이션의 본질을 알려준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런 연출을 포함해 에피소드의 취사 선택과 절묘한 구성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완성된 영화를 보았을 때, 원작자인 이시이 히사이치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 4컷 만화가 이런 식으로 영화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스즈키 토시오가 밝힌 이웃집 야마다군 제작 비화 2 ▼
||시나리오와 그림 콘티가 진행되면서 작화 작업에 들어가야 할 시기가 되었다. 이번에 다카하타는 “원화의 러프한 선을 살리면서 수채화 느낌으로 채색하겠다”라는 새로운 표현 방법을 제시했다. 그것을 감안하면 작화에 최소한 2년이 걸린다. 시나리오의 최종 완성을 기다리긴 너무 늦을 것 같아 나는 우선 스태프를 모으기로 했다. 스태프가 모이면 다카하타 감독을 자극해 작업 속도가 오르지 않을까 하는 작은 속셈도 있었다.
작화의 중심은 타나베 오사무 모모세 요시유키로 정했다. 다나베는 「추억은 방울방울」에서 크게 활약한 애니메이터로, 그의 실력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었다. 한편 모모세는 TV 애니메이션 CG 분야에서 경험을 쌓았던 만큼, 주로 그쪽 방면에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또한 다카하타가 꼭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애니메이터가 있었다. 오쓰카 신지였다.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서 크게 활약해준 사람이지만, 쉽게 일을 맡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실력 있는 애니메이터 중에는 특이한 사람이 많은데, 그들은 스스로 납득하지 않으면 일을 맡지 않는다. 오쓰카도, 다나베도 모두 지브리의 직원이다. 그래도 태연하게 일을 거절한다. 마음속으로는 ‘회사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해!’라고 소리치지만,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 설득하는 수밖에는…….
이번에는 다행히 다나베가 의욕을 불태우고 있어서 둘이 오쓰카를 설득했다. 내가 영화 내용과 다카하타 감독의 의도를 전하면서 꼭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오쓰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의 내 실력으론 힘듭니다.”
“그러지 말고 같이 해요. 오쓰카 선배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그는 대답 대신 가지고 있던 보자기를 펼치고는 두터운 종이다발을 꺼냈다.
스즈키 씨가 이번에 「이웃집 야마다군」을 만든다고 해서 매일 아침 4컷 만화를 잘라두었지요. 그걸 보면서 어떻게 하면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지 나름대로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제 실력으론 어렵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나와 다나베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설득해도 끝까지 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 뒤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설득은 실패로 끝났지만 마지막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이웃집 야마다군」에 나오는 캐릭터는 3등신이다. 그것을 애니메이션에서 움직이게 하는 경우에는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치게 되는데, 그중에 ‘걷는다’는 기본 동작이 있다. 다리가 짧으면 움직임을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건 어떻게 할 생각인가?”
오쓰카의 질문에 다나베는 책상 위에 검지와 중지를 세우고는 천천히 움직였다.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쓰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연구한 결과,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프로 중의 프로인 두 사람은 그것으로 충분히 통하고 있었다. 마치 소설에 나오는 검호의 세계 같았다. 결국 오쓰카는 원화의 일부를 도와주었다.
지브리에는 그들 이외에도 회사의 기풍에 맞지 않는 애니메이터가 몇 명 있다. 실력은 뛰어나지만 제시간에 출근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감독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다. 현장에 놔두면 일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해서 「이웃집 야마다군」이 끝나고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집을 한 채 빌려 그런 검호들을 모아두기로 했다. 직원뿐만 아니라 누구를 데려와도 좋다고 했더니, 외부에서 실력이 뛰어나고 행동이 불량한 검호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그곳에 정식으로 제4스튜디오라는 이름을 붙여 실력이 필요한 어려운 일에 대비하도록 했다. 오쓰카와 다나베도 그곳에서 일을 했는데, 막상 필요할 때는 도움을 거절하기도 해서 프로듀서로서는 여간 애를 먹은 게 아니다.
그들 중에 하시모토 신지라는 뛰어난 애니메이터가 맨 처음에 ‘가을의 기나긴 밤·도라야키와 바나나’라는 에피소드를 그렸다. 남편이 술에 취해 집에 와서 “배고픈데, 뭐 먹을 거 없어?”라고 말했더니, 아내가 바나나를 주고 차를 타주는 장면이다. 완성된 작품을 보고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마치 만담을 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특히 감탄한 것은 3등신을 다루는 방법이었다. 3등신은 다리가 짧고 구부러지지 않아서 앉는 동작을 그리는 일이 매우 어렵다. 그런데 하시모토가 그린 그림에서는 아내가 낮은 탁자까지 걸어와 자연스럽게 스윽 앉는다. 어떻게 한 걸까? 애니메이션은 1초에 24컷으로 이루어지는데 자세히 보니 앉기 전의 한두 컷에서 키가 절묘하게 커지는 게 아닌가. 그 덕분에 다리를 구부려 앉는 장면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앞으로 작화를 진행할 때 좋은 샘플이 될 것 같아서 스태프를 모아 그 장면의 상영회를 열었다. 그때 미야가 참석해 그 장면을 보고 물었다.
“이거, 누가 그렸나?”
“하시모토 신지라는 사람입니다.”
미야는 대답을 듣자마자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얼마 뒤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만들 때, 미야는 하시모토에게 같이 일하자고 권했다. 대번에 능력을 간파한 것이다. 그런데 제작 도중 의견이 맞지 않아 미야는 도중에 그를 스태프에서 제외했다.
“내가 필요한 건 성실하게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야.”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팀워크다. 그런데 제4스튜디오의 검호 같은 사람들이 지브리의 기술적인 수준을 지탱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은 미야도 알고 있다. 둘 중에 하나는 선택하는 일이 미야 본인에게도 힘들었으리라.
참고로 하시모토는 「가구야공주 이야기」에서 공주가 기모노를 벗어던지고 질주하는 장면을 그려서 다시 이름을 날리게 된다.
( 스튜디오 지브리를 다룬 [꿈과 광기의 왕국]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한 여성 스태프이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작화에 재능이 있는 인재도 지브리에 들어와서 일하다가 맞지 않아서 스스로 그만 두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

스즈키 토시오가 밝힌 이웃집 야마다군 제작 비화 3 ▼
||지브리에서는 「 모노노케 히메」 때부터 채색과 CG에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했다. 그 새로운 도구와 기술을 보고 다카하타 감독은 당치도 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셀화 애니메이션은 어린아이의 놀이나 학습에 사용하는 색칠공부책 같은 방식이었다. 원화 담당자가 대충 그린 그림을 동화 담당자가 깨끗한 선으로 정리하고, 마무리 담당자가 선으로 구분된 면을 그림물감으로 칠하는 것이다.
다카하타가 세운 목표 중 하나는 원화의 힘찬 터치를 그대로 살리는 것이었다. 그것도 이상론을 말하면 첫째, 전편을 한 애니메이터의 터치로 만들고 싶다. 둘째, 수채화처럼 선에서 삐져나와 색을 칠하거나 반대로 칠하지 않은 부분을 남겨두고 싶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원화와 채색용 선을 그린 그림, 삐져나온 곳이나 칠하지 않은 곳의 범위를 지정하는 그림까지 전부 세 장을 준비한 다음, 그것을 컴퓨터로 합성하는 공정이 필요하다. 즉, 단순히 계산해도 보통 작업의 세 배의 시간이 걸리게 된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CG도 마찬가지다. 다카하타는 단순히 CG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CG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표현을 추구했다. 그가 예로 든 것이 디즈니의 「 미녀와 야수」 CG였다.1992년 개봉 당시에 춤추는 장면의 CG가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전문가적 입장에서 그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정작 멋진 것은 영화의 앞부분, 주인공이 노래를 부르며 집을 나와 앞쪽으로 걸어나온 뒤,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컴퓨터를 이용해 상당히 긴 움직임을 카메라 한 대로 따라가듯 찍었는데, 만약 옛날처럼 멀티플레인 카메라(multiplane camera)로 찍었다면 조금 과장해서 수십 미터의 촬영대를 만들어야 한다.
즉, CG를 사용함으로써 옛날에는 불가능했던 촬영이 가능해졌고. 디즈니에는 이미 그런 기술을 활용할 줄 아는 우수한 스태프가 있었던 것이다. 완성된 영상만 보고 그런 촬영기법과 의의를 완벽하게 이해한 다카하타도 대단하다. 실제로 「이웃집 야마다군」을 제작하는 도중에 디즈니의 책임자가 견학하러 왔는데, 다카하타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다카하타는 옛날부터 새로운 기술에 대해 굉장히 탐욕스럽게 매달리는 면이 있었다. 미야가 그런 그를 보면서 “일본의 셀 애니메이션 기술은 대부분 다카하타 씨가 발명했지”라고 말할 정도였다.

새로운 표현과 기술에 집착하면 작업은 당연히 지연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다카하타 감독은 ‘어떻게든 개봉일을 맞춰야 한다’는 마음이 애초에 강하지 않은 사람이다.
나 역시 이때는 개봉일을 맞춰야 한다는 압박이 거의 들지 않았다. 다카하타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도 했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바빴기 때문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지브리의 모체인 도쿠마 그룹의 부실채권 문제가 본격화하면서, 그 뒤처리에 쫓기고 있었다. 아침에는 주거래은행인 스미토모 은행에 갔다가 낮에는 도쿠마 쇼텐에 들르고 밤에는 지브리로 돌아오는 일을 매일 반복했다.
영화에 전념할 수 없는 상태가 계속되자 다카하타로부터 날벼락이 떨어졌다.
“프로듀서가 회사에 없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내가 아무리 사정을 설명해도 이해해주지 않았다.
“스즈키 씨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지? 당신은 이 영화의 프로듀서가 아닌가? 그렇다면 영화를 만들어야 하잖아!”
정론인 만큼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홍보가 시작되었다. 「이웃집 야마다군」이 지금까지 나온 지브리 영화와 다르다는 것은 알지만 홍보는 예전 방식대로 하기로 했다. 내용은 코미디라도 홍보에서는 진지함을 강조하기로 한 것이다.
일본인은 기본적으로 건전하고 진지한 영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카피라이터인 이토이 시게사토가 만들어준 카피는 ‘집안의 안전은 세계의 바람’이었다. 나는 그 카피를 바탕으로 ‘웃음과 눈물과 감동’ 코드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을 통해 지금의 사회와 세계 문제를 바라보는 진지한 영화라는 점을 강조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다카하타가 반대했다. ‘영화 내용과 광고 카피가 맞지 않는다. 필요 이상으로 진지함을 내세우는 것은 억지다. 영화의 본질을 제대로 홍보해달라.’ 이것이 다카하타 감독의 주장이었다.
그는 이전부터 내가 만든 카피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 붉은 돼지」 때는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어 돼지가 된 남자의 이야기’라는 내가 만든 서브 카피에 대해, 작품에 없는 내용을 말해도 되냐고 화를 냈다. 「 모노노케 히메」의 ‘살아라’라는 카피를 보고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프로파간다(propaganda) 냄새가 난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단지 영화의 히트를 위해서는 그런 카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카하타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낸 히트는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 추억은 방울방울」 때도,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때도 나는 스튜디오를 유지시키기 위해 어떻게든 영화를 히트시키려고 발버둥 쳤는데, 그는 그 결과에 위화감을 가진 것이다.
이번에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방침을 바꾸기로 했다. 관객이 광고를 보고 어떻게 느낄지, 영화가 히트할지 말지는 뒤로 돌리고, 그가 받아들일 만한 방식으로 홍보하기로 한 것이다.
그 시점에서 새로 카피를 생각했을 때, 작품 안에서 발견한 것이 후지와라 선생님의 ‘적당히’라는 말이었다.
- 일본의 거장,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최고 걸작 탄생. 주제는 ‘살아라’가 아니라…… ‘적당히’.
- 다섯 가족과 한 마리가 자아내는 웃음과 눈물과 감동, 매일 계속되는 ‘어디 보자, 그리고 뭐였더라?’
- 「모노노케 히메」를 능가하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국민영화 제2탄!
- 일본의 모든 국민들에게 행복과 기운을 선사하는 거장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일단 최고 걸작 탄생.
- 드디어 내일, 적당한 시간에 와주십시오.
정말로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 이래선 아무도 극장에 오지 않으리라.심지어 개봉 후의 광고에서는 영화 관계자들을 향해 이쪽의 메시지를 전하는 대사를 인용하기도 했다.
- 인생, 포기가 중요합니다.
- 케 세라 세라. 될 대로 되라!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런 패러디는 내 주특기다. 생각해보면 「이웃집 야마다군」 역시 패러디 정신으로 시작한 작품이 아닌가!
다카하타 감독은 바뀐 홍보 방식에 한마디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련의 광고를 지켜본 베테랑 여성 애니메이터가 진지한 얼굴로 내게 항의를 했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그토록 ‘살아라’라고 해놓고 이번에는 ‘적당히’라고 하다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마음은 이해한다. 일반인 중에도 그녀처럼 느낀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면 관객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관객이 오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홍보한 것은 모든 지브리 작품을 통틀어 오직 그때뿐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스즈키 토시오는 가구야 공주 때도 타카하타 감독이 의도하지도 않은 '가구야 공주가 저지른 죄와 벌'이라는 선전 문구를 집어넣어서 그를 화나게 했다.) ||

스즈키 토시오가 밝힌 이웃집 야마다군 제작 비화 4 ▼
|| 배급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발단은 도쿠마 사장의 한마디였다. 변덕이 심하다고 할까 장난을 좋아한다고 할까, 도쿠마 사장은 항상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 모노노케 히메」의 엄청난 히트에 고무되어서 그런지,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배급사를 도호에서 쇼치쿠로 바꿔서 히트하게 만들겠어!”
지금까지 영화가 히트한 이유는 도호의 전폭적인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과 똑같은 배급 체제를 유지하자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도쿠마 사장을 설득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내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갔다.
일본 영화 흥행의 넘버원은 누가 뭐래도 도호고, 당시 쇼치쿠는 지방 극장과의 계약 문제로 오사카의 서쪽에서 규슈 지역에 이르는 서일본에서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극장이 거의 없었다.
부실채권 문제가 온몸을 짓누르는 데다가 다카하타에게서는 날벼락이 떨어지고 최종적으로는 극장도 없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상황으로, 이렇게 수많은 문제가 한꺼번에 밀어닥친 적은 처음이었다. 결국 배급 수입은 8억 엔 남짓. 참담한 결과로 끝났다. 하지만 미리 각오하고 있어서 그런지, 충격은 크지 않았다.
개봉한 지 어느 정도 지나 흥행 실패가 명확해졌을 무렵, 도쿠마 사장이 나를 호출했다. 전 사원이 모인 도쿠마 그룹 총회에서 「이웃집 야마다군」의 결과를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도시오, 이번 「이웃집 야마다군」의 실패 원인은 배급을 쇼치쿠로 바꿨기 때문이야. 내 잘못이지. 영화 흥행은 뜻대로 안 되더군.”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런데 총회에서는 연단에 오르자마자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웃집 야마다군」은 흥행에서 참패했습니다. 그 모든 책임은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에게 있습니다. 지금부터 왜 그렇게 됐는지 스즈키 프로듀서가 직접 설명하겠습니다.”
도쿠마 사장의 독불장군 같은 스타일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방 먹었다!’
마음속으로 당황하면서도 나는 어금니를 악물고 단상에 올랐다.
“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큰소리로 말하면서 힐끔 쳐다보았더니 도쿠마 사장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쳐서 이렇게 덧붙였다.
“원인은 배급사를 도호에서 쇼치쿠로 바꾼 것이었습니다. 앞으로는 배급사를 제대로 선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런 수치를 당하는 줄도 모르고, 다카하타는 뒤풀이에서 스태프를 앞에 두고 이런 인사말을 했다.
“가령 히트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에 관여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시다!”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덜컹 내려앉고 식은땀이 흐르는 일들이 많았지만, 나는 「이웃집 야마다군」을 정말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홍보나 흥행에서 여러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사에 남을 만한 작품인 것만은 사실이다.
1999년 9월, 「모노노케 히메」의 미국 개봉에 맞춰서 뉴욕 현대 미술관(MoMA)에서 스튜디오 지브리의 전 작품을 상영했다. 상영회의 마지막 날, 모든 행사가 끝난 후에 뉴욕 현대 미술관의 영화 부문 책임자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상영회에 협조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혹시 「이웃집 야마다군」을 뉴욕 현대 미술관의 영구보존 작품에 추가해도 되겠습니까?”
대단히 영광스러운 제안이었다. 물론 그 자리에서 승낙하고, 그 후로도 한동안 그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웃집 야마다군」을 더없이 사랑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지브리의 투자자이기도 한 니혼 테레비의 우지이에 세이치로 회장이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도시오 씨, 지브리 영화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뭔지 아나? 「이웃집 야마다군」이라네. 비록 크게 히트하지 못했지만 난 다카하타 씨를 아주 좋아한다네.”
그러고는 다카하타의 작품을 한 편 더 만들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런 우지이에 회장의 간절한 바람은 「 가구야 공주 이야기」로 이어지게 된다.||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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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흥행

개봉 당시 평론가들은 호평했지만 115만 명의 관객 동원과 15억 6천 5백만 엔의 흥행 수익과 7억 9천만엔의 배급 수익[7]으로 부진했다. 마녀 배달부 키키 이후 지브리 작품 중 가장 낮은 흥행.[8] 흥행 참패의 원인은 야마다군이 그동안 지브리 작품들과 이질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원작의 영향이 있긴 하지만 그림체나 채색 방식도 기존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과 차이가 있었고, 신문 만화라는 원작 특유의 감성에 아이들은 공감하기 어려웠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내용이 전반적으로 잔잔하고 각각 다른 에피소드들을 전개하는 옴니버스 스타일이라 특별히 기승전결의 구조를 찾을 수 없어 극장용 애니메이션치고는 흡입력이 떨어졌다. 야마다군의 흥행 참패로 인해 타카하타 이사오는 2013년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연출하기 이전까진 어떠한 작품 활동도 하지 않았다.

지브리 애니 중 유일한 쇼치쿠 배급 작품이다. 쇼치쿠가 배급한 이유는 지브리의 후원자였던 토쿠마 쇼텐의 사장 토쿠마 야스요시가 토호랑 대판 싸웠기 때문. 그래서 당시 쇼치쿠의 내부 사정으로 지브리의 신작인데도 제대로 개봉이 안 된 것도 흥행 실패의 원인이다.

프로듀서이자 이 작품을 만들자고 제안한 스즈키 토시오 말로는 제작비는 모노노케 히메와 비슷해서 20억 엔 이상이 들었다고 한다. 엄청난 적자가 난 셈이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내부 스태프 100명 외부 스태프가 200명, 인건비가 1년에 1조 엔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짧은 기간에 만들 수록 제작비가 적게 드는데. 이 작품은 10개월 정도로 만들고 싶었는데, 20개월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훗날 8년이 걸린 가구야 공주 이야기에 비하면 그나마 양반이다.

8. 기타


[1] 사카모토 류이치의 전 부인 [2] 배급 수익은 7억 9,000만 엔. [3] 원래 제목은 이웃집 야마다군이었지만 1997년에 주인공의 변경과 함께 제목도 바뀌었다. 사자에상 시공이지만 장기 연재된 탓에 몇몇 부분에서 설정이 바뀌기도 한다고. 이 제목으로 바뀐 뒤 아직도 연재중이다. [4] 89년생, 녹음 당시 노노코와 같은 나이였다. [5] 원작 연재 초기 때는 중학교 1학년이었으나 연재 도중 학교 후배가 등장하면서 2학년으로 바뀌었다. [6] 당시 닛테레 아나운서. [7] 흥행 수익에서 극장 측이 몫을 가져가고 남은 수익. [8] 1999년 일본내 영화 흥행 순위 8위로, 마녀 배달부 키키부터 지브리 작품은 개봉 당해 일본 내 흥행 순위 1위를 기록했다. [9] 셀합성이 있으면 두 개 이상. 그나마 그때는 셀을 아직도 사용했고 디지털이어도 그 영향이 남아 있었기에 두 개 이상은 합성하지 않았다. [10] 그리고 이게 마음에 들었는지 다카하타 감독은 가구야 공주에서 이 짓을 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