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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 에이버리

파일:Annie_Award.png
윈저 맥케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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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pbs.twimg.com/CcL5j4zWwAAlxsl.jpg
Red Hot Riding Hood 제작 중 혹은 인터뷰 중의 모습.
"In a cartoon you can do anything."[1]

1. 개요2. 생애3. 연출 특징4. 여담5. 관련 인물6. 참여 작품들7. 다큐멘터리

1. 개요

Tex avery

1908.2.26 ~ 1980.8.26

본명은 Frederick Bean Avery(프레더릭 빈 에이버리), 텍사스 주 출신 미국인 애니메이터 & 성우 & 애니메이션 감독.

2. 생애

에이버리가 애니메이션 경력을 시작한 때는 1928년으로, 처음엔 로스엔젤레스에서 몇 달간 자동차 페인트칠, 창고 작업, 야간 부두 작업, 과채상 보조 등의 여러 질낮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윙클러 스튜디오로 입사해 오스왈드 단편의 셀 잉크 작업을 맡기 시작했고, 얼마 뒤 유니버설 스튜디오 카툰즈로 이직해 본격적인 애니메이터 활동을 시작했다. 입사한 처음엔 잉크 작업 담당으로 일했으나 이듬해(1931년)부터 4년여 간 빌 놀런(Bill Nolan) 휘하에서 원화 애니메이터로 활동하며 오스왈드 래빗 단편[2]의 원화를 그렸다. 한창 애니메이터 업무를 하고 있던 1933년 여름, 스튜디오 내부 사무실에서 잠시 장난을 치던 순간 종이 클립 1개가 에이버리의 왼쪽 눈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시력을 잃었지만 본인의 활동에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3] 유니버설에서 일을 하는 와중에 점점 작품에 대한 자신의 더 많은 통제권을 원하기 시작했으며, 오스왈드 단편 중 두 편에서 사실상 감독으로 연출을 맡았으나 훗날 인터뷰에서 두 작품에 대해 끔찍했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4]


벅스 버니의 공식 데뷔작 A Wild Hare 영상.

자신에게 급료적인 면에서 불만족스러움을 느끼게 되어 약 6주간 일부러 분량 이하의 작업을 한 뒤에 1935년 4월 해고당해 유니버설 스튜디오 카툰즈를 떠났다. 바로 이틀 뒤에 미리 만나고 있던 여자친구와 결혼해 오리건에서 신혼생활을 즐겼지만, 지니던 자금이 떨어지자 일자리를 구하러 로스엔젤레스로 돌아와 당시 워너브라더스의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였던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에 구직을 요청했다.[5] 감독이 2명뿐이던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에서 3번째 레귤러 감독으로 배치되었고, 근무하는 직원 규모가 크게 늘어나 새 스탭이 일할 작업 공간이 협소한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당시 스튜디오 주변에 있던 5방짜리 벙갈로로 밥 크렘펫, 척 존스, 버질 로스(Virgil Ross), 시드 서덜랜드(Sid Sutherland)와 함께 이사하였다.[6]

워너에서의 첫 연출 작품으로 에이버리는 Gold Diggers of `49[7] 편 이후에서부터 포키 피그를 디즈니 풍의 현실적인 묘사에서 밥 크렘펫의 캐릭터 디자인을 수용해 만화풍 캐릭터로 변경하는 것과 에이버리 자신의 독창적인 개그를 애니메이션에 덧입히면서 서서히 애니메이션 연출가로써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1937년 개봉 작품 Porky`s Duck Hunt에서 이름없는 단역 캐릭터로 처음 등장한 대피 덕한테 통제불능적 성격과 마구 웃음을 지르는 묘사를 덧입혀 대피가 관객들의 주목을 얻게끔 유도해줬다. 이후 1940년 개봉 작품 A Wild Hare에서 이름없는 단역 토끼에 불과했던 벅스 버니의 디자인과 엘머 퍼드의 디자인을 변경함과 동시에 What's up, Doc?이란 캐치프레이즈를 추가해 관객들의 호응을 얻은 캐릭터로 자리매김해주기도 했다.


jerky turkey 영상.

1941년 개봉된 The Heckling Hare에서 결말의 개그 씬이 제작 과정에서 편집당한 것으로 인해[8]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의 설립자이자 루니 툰 제작자인 리언 슐레진저(Leon Schlesinger)와 큰 말싸움을 벌였고, 4주 동안 정직 상태에 있다가 워너브라더스를 떠나 잠시 파라마운트에서 Speaking of Animals 시리즈 중 3편을 작업한 후[9] 같은해 가을 메트로-골드윈-메이어로 이직해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써의 활동을 지속해나갔다. MGM은 에이버리가 워너브라더스에서 일하던 때보다 많은 예산과 수준 높은 제작 환경을 지원했고, 보다 개별적인 개그와 애니메이션 연출 역량 활용의 촉매제 역할을 해줬다. 그 결과로 1942년 개봉된 선전 애니메이션 the blitz wolf는 아카데미상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수상 후보작으로 지명되기도 했었고,[10] 드루피, 나사빠진 청설모(Screwy Qquirrel), 고양이 블래키(Blackie the Cat) 단편을 포함해 Red Hot Riding Hood에서 시작된 빨간 두건을 기반으로 각색한 단편 애니들은 에이버리의 대표격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1950년에 애니메이션 작업 중에 쌓여갔던 자신의 과로를 풀기 위해 1년을 휴식했고, 그 사이 월터 란츠 스튜디오에서 이직한 애니메이터 딕 런디(Dick Lundy)가 드루피 & 바니 베어(Barney Bear) 단편의 감독을 맡으면서 복귀 후엔 그와 공동 감독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에 임했다. 1948년의 파라마운트 판결로 인한 카툰 제작 예산 감소로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 디자인과 배경도 UPA처럼 심플한 디자인과 그림체로 변화하기 시작했을 무렵 에이버리는 중대한 슬럼프에 빠졌으며[11], 1953년엔 mgm을 나와 옛 일터인 유니버설 픽쳐스(의 월터 란츠 스튜디오)로 이직했지만 칠리 윌리 등의 단편을 포함해 몇 편만 제작에 참여했고, 1955년 유니버설에서 다시 빚어진 급여 분쟁으로 월터 란츠 스튜디오를 떠난 이후 극장용 애니 제작에선 물러났으며 10여 년 동안 레이드, 프리토-반디토(frito-bandito), 쿨에이드 등의 TV 광고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집중했다.

마이클 배리어 웹페이지 에세이 자료에 의하면, 1970년대 초기 아들이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 것과 이혼을 겪은 것으로 인해 말년 즈음엔 내적으로 우울하고 괴로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12] 70년대 후기엔 MGM에서 활약한 윌리엄 해나 & 조셉 바베라 콤비의 해나-바베라 프로덕션의 작품들에 참여하다가 말년(1980년)에 The Kwicky Koala Show[13]의 원작자를 맡았고, 같은 해 한 주차장 안에서 갑자기 쓰러졌는데 8월 26일 악화된 폐암으로 인해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세인트 조셉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14] 척 존스의 언급에 의하면 (척 자신이나 혹은 다른 애니메이터와 함께) 에이버리가 야구 경기를 볼 때 했었던 마지막 말은 "I don’t know where animators go when they die, but I guess there must be a lot of them. They could probably use a good director though"이었다고 하며, 시신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포레스트 라운 메모리얼 파크에 매장되었다.

3. 연출 특징

윈저 매케이의 애니메이션 업계 활동을 밑거름으로 제작된 플라이셔 스튜디오, 디즈니 단편의 수많은 작품들은 1920년대 후기 침체 국면에 있었던 미국의 극장용 단편 애니메이션을 다시 활성화시켰으나, 내적으론 정석적이고 평면적인 전개의 스토리텔링과 뮤지컬에 치중된 연출에서 정체해가고 있었다. 에이버리는 활동 당시의 인기 매체인 영화에서 나오던 슬랩스틱 개그를 더욱 광폭화시키고, 기존의 애니메이션에서 두드러진 공식들의 연이어 뒤집고 풍자하는 변혁적인 연출을 시도하였으며, 터마이트 테라스에서 함께 일했던 밥 크렘펫, 척 존스 등 동료 연출가들과 후대의 애니메이터, 연출가들의 작품에 선구적으로 무수한 영향을 주었다. 사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인터뷰 등지에서 그의 작품을 감상한 수많은 사람들이 에이버리의 애니메이션 연출에 대해 언급하며 호평하는 등 전반적인 재조명을 받았다.

에이버리가 1번째로 데뷔시킨 캐릭터이며 옷가지 없이 마구 웃어대는 대피 덕이 등장한 지 얼마 뒤, 월터 란츠 스튜디오에서도 비슷한 민폐형 캐릭터가 활약하는 딱따구리를 데뷔시킨 것처럼 다른 영화사에서 일하던 애니메이터들과 제작자들의 참고 작품이자 모방 작품으로 이목을 끌었으며, 업계에서 돋보였던 에이버리의 만화적 표현이 담겨진 코미디 & 개그 연출들은 현대기의 미국 애니메이션 작품들에서도 광범위하게 응용되었다. 톰과 제리가 슬랩스틱 코미디로써의 캐릭터 & 전개 설정의 표본이자 오마주로 자리매김했다면, 텍스 에이버리가 연출한 작품들은 현재 미국 애니메이션의 슬랩스틱 코미디의 구조와 공식들의 초석이 되었으며 톰과 제리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파일:external/orig01.deviantart.net/tex_avery_by_htfman114-d5rqw3q.jpg

그림자 캐릭터 연출이나 과장된 캐릭터 동작 묘사, 캐릭터가 필름의 셀을 벗어났다 들어오는 것과 관객들에게 농담을 건네는 제4의 벽 돌파 연출, 그에 어우러진 과장된 개그를 덧입혀 보편화시킨 등으로도 후대의 애니메이션 업계인들과 역사가들한테 칭송을 얻었다. 생전엔 에이버리의 명성이 높게 주목받지 못했지만[15] 60년대 후기부터 애니메이션 역사가들이 그와의 교류를 진행하면서 애니메이션 전문 매거진에 차츰 에이버리의 작품들을 언급하기 시작했고, 사후 80년대 후기(현대기)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다큐멘터리와, 에이버리가 연출한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카툰네트워크, 부메랑 등지의 케이블 채널에서 재방영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기 MGM/UA에서 VHS를 발매한 것은 그의 팬덤이 형성되기 시작한 기반이 되었으며, 2000년대 중기엔 DVD 발매 등의 작품에 대한 광매체화와 인터넷의 영향으로 에이버리의 작품들에 대한 손쉬운 시청이 가능해졌다.

4. 여담


파일:external/vignette4.wikia.nocookie.net/PHOTO_16346505_66470_18660554_ap.jpg

5. 관련 인물

6. 참여 작품들

MGM 관련 연출 작품 목록 (접기 클릭)
* blitz wolf, the early bird dood it(1942)
  • dumb-hounded, Red Hot Riding Hood, who killed who, one ham's family, what's buzzin' buzzard(1943)
  • screwball squirrel, batty baseball, happy-go-nutty, big heel-wahta(1944)
  • the screwy truant, the shooting of dan mcgoo, jerky turkey, swing shift cinderella, wild and woolfy(1945)
  • lonesome lenny, the hick chick, northwest hounded police, henpecked hoboes(1946)
  • hound hunters, red hot rangers, uncle tom's cabana, slap happy lion, king-size canary(1947)
  • what price fleadom, little 'tinker, half-pint pygmy, lucky ducky, the cat that hated people(1948)
  • bad luck blackie, senor droopy, the house of tomorrow, doggone tired, wags to riches, little rural riding hood, out-foxed, the counterfeit cat(1949)
  • ventriloquist cat, the cuckoo clock, garden gopher, the chump champ, the peachy cobbler(1950)
  • cock-a-doodle dog, daredevil droopy, droopy's good deed, symphony in slang, car of tomorrow, droopy's double trouble(1951)
  • Magical Maestro, one cab's family, rock-a-bye bear(1952)
  • little johnny jet, t.v. of tomorrow, the three little pups(1953)
  • drag-a-long droopy, billy boy, homesteader droopy, the farm of tomorrow, the flea circus, dixieland droopy(1954)
  • field and scream, the first bad man, deputy droopy, cellbound(1955)
  • millionaire droopy(1956), cat's meow(1957)

에이버리의 작품에서 나온 연출 기법 & 공식을 탐구해 보려면 https://tvtropes.org/pmwiki/pmwiki.php/Creator/TexAvery를 참조할 것.

7. 다큐멘터리



[1] 그가 연출한 단편 screwball squirrel에서 나온 대사. 1975년 출간된 Tex Avery: King of Cartoons에도 서술되어 있을 만큼 에이버리와 그의 작품들에 대한 영향력을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이 시기에 제작된 오스왈드 래빗 단편은 월트 디즈니가 판권을 상실하여 유니버설 내 스튜디오에서 제작 중이던 상태였다. [3] 이런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에이버리와 인터뷰를 진행한 경력이 있던 마이클 배리어가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였는데, 당시 유니버설 스튜디오 내부 애니메이터들이 종종 고무줄, 종이 도구를 사용해 일하던 동료 아티스트의 머리를 겨누는 장난을 치는 경향이 있었으며 한 애니메이터는 와이어로도 쓰이던 종이 클립을 사용해 장난을 1단계 발전시키기로 했다.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에이버리는 한 동료 아티스트가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뒤로 돌아봤었는데 그 순간 날아온 종이 클립이 에이버리 본인의 왼쪽 눈을 강타했었다고 한다. [4] Tex Avery, King of Cartoons - 1975(저자 조 아담슨), 애니메이션 역사가 마이클 베리어(Michael Barrier)의 언급(2003)) 출처. [5] 에이버리는 면접 과정에서 리언 슐레진저한테 자신이 경험 많은 감독이라고 살짝 거짓말로 설명했었지만 스튜디오에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고용되었다고 한다.(마이클 배리어의 언급(2003)) [6] 여기서 만들어진 사무실은 'termite terrace'(터마이트 테라스, 열악한 사무실의 환경상 흰개미가 들끓었던 작업소라는 의미.)란 별명을 얻었다. [7] 여기서 49는 골드 러쉬가 시작된 1849년을 의미. [8] 영어 위키피디아 문서의 오리지널 결말 문단 참조. 원본( 감독판) 필름은 유실된 상태이다. [9] 애니메이터 마사 시걸(martha sigall)의 언급(2005년) [10] 총통각하의 낯짝에 밀려 수상받진 못했다. [11] 1988년 방영된 Tex Avery: The King of Cartoons 다큐멘터리의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내용에 의하면 자신이 아는 지인들한테 사용할 수 있는 개그는 모두 사용했으며 얼마나 신선하게 이를 유지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12] 다행히도 딸인 낸시 에이버리 어클리(nancy avery arkley)와 그녀의 자녀들은 생존해 있다. [13] 에이버리가 작고한 뒤, 이듬해(1981년)에 방영했다. [14]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보이는 스튜디오에서 일할 때 흡연하는 모습들로 보면 이 습관이 악영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15] 다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러 차례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으로 후보에 올랐던 것과 당대 미국 애니계의 흐름을 보면 주목받지 못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16] Above all,(Avery) steered the Warner Bros. house style away from Disney-esque sentimentality and made cartoons that appealed equally to adults, who appreciated Avery's speed, sarcasm, and irony, and to kids, who liked the nonstop action. Disney's "cute and cuddly" creatures, under Avery's guidance, were transformed into unflappable wits like Bugs Bunny, endearing buffoons like Porky Pig, or dazzling crazies like Daffy Duck. Even the classic fairy tale, a market that Disney had cornered, was appropriated by Avery, who made innocent heroines like Red Riding Hood into sexy jazz babes, more than a match for any Wolf. Avery also endeared himself to intellectuals by constantly breaking through the artifice of the cartoon, having characters leap out of the end credits, loudly object to the plot of the cartoon they were starring in, or speak directly to the audience. [17] 이후 에이버리의 작품들에서 드러난 연출 기법과 공식들을 분석한 도서 Le Mystère Tex Avery를 쟝 두셰, 쟝 피에르 베르토메, 마르셀 고트리브와 협력으로 집필해 1988년에 발간하기도 했다. [18] 안노 히데아키는 1996년 당시의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톰과 제리랑 텍스 에이버리의 작품들을 좋아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으며, 유아사 마사아키도 영향을 주로 받은 작품으로 인터뷰에서 텍스 에이버리의 작품을 언급하기도 했다. [19] 단, 창작자는 이 작품을 텍스 에이버리 작품에 대한 오마쥬라고 소개했으며, 텍스 에이버리의 딸이었던 낸시 에이버리가 자녀들의 대학 등록금을 부담하고자 작품에 텍스 에이버리의 이름을 쓰는 데 동의했다. # [20] 에이버리의 작품들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1920~30년대의 미국 영화들과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코미디 영화 배우들이었다. [21] 서유럽(정확히는 프랑스)에서 미국 본토보다 몇 년 앞서 평론계에 명성을 얻게 된 요인에 대해 정확한 계기는 영어 위키피디아의 관련 항목들에선 나와있지 않으나, 에이버리의 작품을 분석한 평론가들의 견해와 사회문화적인 여건을 종합하여 추측해 볼 때 작품들의 분위기가 고전적인 반영웅이 나오는 매체들을( 돈 키호테, 레 미제라블 등) 선호하는 유럽인들의 성향에 의도하지 않게 어우러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22] 서로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의 '터마이트 테라스'라 불린 작업실에 같이 일했던 절친, 거의 말년(1975년)에 서로 밥 크렘펫에 대한 견해가 담긴 편지 #를 보낸 일도 있었으며, 서로간의 말년까지 교류를 활발히 이어갔다. 척은 에이버리의 부고를 접하고 며칠 뒤 로스엔젤레스 트리뷰 지에 추모사를 기고했으며, 동시에 그한테 받은 6가지 영향점을 서술하기도 하였다. 기사 이미지 자서전 Chuck Amuck에서도 에이버리를 천재로 평가하며 그의 명석함에 대해 무지했었던 마이너 시절의 본인에게 애니메이션은 타이밍의 예술이며, 모든 코미디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사실을 일깨워준 멘토이자 버스터 키튼, 찰리 채플린, 해리 랭던, 로렐과 하디와 같은 타이밍의 대가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23] 워너 브라더스에서 활동할 당시, 루니 툰 제작 과정에서 서로 교류했던 동료 애니메이션 연출가. [24] 원동화 애니메이터로써 실력이 드높은 애니메이터였으며, 당시 에이버리 본인이 연출한 작품들에서 주요 애니메이터로 기용했지만 프리즈나 척과 마찬가지로 허물없는 친구나 다름없이 지냈다. [25] 터마이트 테라스 내부의 애니메이터와 감독들과도 큰 탈 없이 원만한 사이였지만 크렘펫에 대해선 (위의 편지에서 나온 이야기로 인하여) 말년쯤엔 애매하게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도 척 존스처럼 절연 관계까지 가진 않았으며, 이 사태는 크렘펫과 척 둘 중 어느 1명만 잘못이 있다고 판정지을 순 없다. 2년 후(1977년) 편지를 읽고 척에게 답변한 점들에 대해 같이 만난 밥의 지인 밀트 그레이(milt gray)한테 유감을 표하고 사과하기도 했다. [26] 194~50년대에 같은 스튜디오에서 일하면서 안면을 쌓았으며, 훗날 에이버리를 해나-바베라 프로덕션의 작품 제작에 참여시켜주기도 했다. [27] 에이버리가 극장용 단편 애니메이션 연출가에서 은퇴한 이후 서로 교류하였던 애니메이터이자 친구. [28] 유니버설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하던 시기, 에이버리가 그의 휘하에서 원화 애니메이터로 일했었다. [29] 단편 카툰엔 별다른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지만, 에이버리의 카툰은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다고 예상하여 MGM 카툰 스튜디오에서 그의 작품들을 제작하는 제작자로 활동했다. 에이버리와 Blitz Wolf 단편 제작과 symphony in slang 단편 제작 전후에 불협화음을 빚은 적도 있었다고.(전자는 제작 완료 후에 아직 전쟁의 승패가 확실히 결정되지 않았는데 히틀러를 너무 거칠게 묘사했단 지적을 들었다고 하며, 후자는 작품의 플롯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해 제작하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30] 개인적으로 소심스러운 면이 공통적이었던 서로의 성격상 대놓고 경쟁하던 관계는 아니었지만 194~50년대에 디즈니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들이 제작에 참여한 디즈니 단편들에서 에이버리의 기법들이 오마쥬된 작품들이 많았고, 1970년대에 에이버리 또한 한 인터뷰에서 우리(터마이트 테라스)는 디즈니가 하지 못했던 것을 시도하러 노력했다고 언급한 장면이 있었다. [31] 루니 툰 & 메리 멜로디즈 단편의 193~50년대 음악 뮤지션. [32] MGM의 193~50년대 단편 카툰 음악 뮤지션. [33] 에이버리가 작품을 만들 때 주로 기용한 스토리 작가1. [34] 에이버리가 작품을 만들 때 주로 기용한 스토리 작가2. [35] MGM에서 드루피를 담당한 전담 성우이자 영화 배우. [36] 애니메이션 역사가이자 웹사이트 CartoonResearch의 설립자. [37] 1966년 미국 최초의 애니메이션 전문 매거진을 발간한 애니메이션 역사가. [38] 원래는 로버트 매킴슨, 멜 블랭크, 척 존스도 인터뷰할 예정이었지만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