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22:56:18

공자/평가

{{{#!wiki style="margin:-10px" <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파일:공자_투명.png 공자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0,#fff> 생애 및 사상 생애 및 사상
평가 평가
관련작위 문선제 · 연성공 · 기타 작위
가족 공자 가문 군주
저서 논어 · 춘추
현대 대중매체
기타 기타 · 공자식인설 · 공자평화상 · 공부가주 · 안연이 공자에게 인을 물었다 · 공자학원
}}}}}}}}} ||

1. 평가
1.1. 국내1.2. 현대 중화권1.3. 서양의 평가

1. 평가

1.1. 국내

유학이 한국 사회에 들어온 이래로 공자는 맹자와 더불어 공맹이라 불리며 유교 사회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최치원은 <난랑비서>에서 "집에 들어와선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공자의 취지이다. "면서 한국의 ' 풍류'라는 전통적인 가르침 안에 이미 공자의 가르침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공자의 인(仁)사상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말했던 홍익인간(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의 정신과 일치하는 면이 있어 예로부터 한국인의 정서와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고도 볼 수 있다. 삼국유사가 거꾸로 유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삼국유사를 지은 사람이 불교에 충실했던 일연 스님임을 생각해 볼 때, 홍익인간은 공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사상이 아니라 불교의 자비정신과 연관되어 있다고 봐야되며, 한국사회에 유교가 잘 정착했던 것은 '한국에 있던 내재적인 정신 문화'와 '외부에서 들어온 공자의 유교문화 - 인(仁)사상'이 일치하는 면이 있어 받아들이기 쉬웠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아무튼 공자의 사상이 들어온 이후 수많은 유학자들이 유교의 가르침을 통해 과거에 등용되어 학문을 펼쳤으니, 한국에서의 그 위상은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공자의 사상은 현대에도 많은 영향을 끼지고 있다. 유교적 불교, 유교적 기독교, 유교적 자본주의 등으로 변형되어 한국사회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이러한 유교화된 사상들은 유교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 중 공자의 인(仁)사상은 '친족 중심에서 그 외연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여러 문제를 야기시킨다. 특히 혈연, 지연, 학연 중심의 엘리트 사회 구성과 그에 따른 부정부패는 공자 사상의 고질적인 문제로 제기되어 왔으며, 이런 반감으로 인해서 1999년에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나와 흥행을 하기도 하였고 그에 대응해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나오기도 했다.

공자의 경(敬)사상 역시, 조선 후기 신분질서를 강화하고자 변질되었던 성리학이 일제강점기, 군사정권때 까지 이어져 나이가 조금이라도 많다면 깍듯이 높임말을 쓰는 상명하복의 예절로 변질되어 버렸다. 하지만 공자는 공자 자신의 나이보다 많거나 비슷한 또래의 제자들이 있었다. 오늘날 같이 한살 차이에도 민감하게 순서를 매겨서 윗사람의 말에 강제적으로 존대말을 요구하는 이러한 문화는 한국이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군대문화를 청산하지 못한 변형된 유교문화의 잔재라고 봐야 한다.

현대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공자의 사상 중 일부가 현대 법치주의와 평등주의 사상에 반대되는 부분이 있어서 꾸준히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논어》에서 공자가 "오직 여자[1]와 소인은 다루기 어려우니, 가까이 하면 겸손하지 않고, 멀리 하면 원망하느니라" 라고 말한 부분과, 《공자가어》의 '삼종지도와 칠거지악' 부분 등은 여자를 매우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했기 때문에 평등주의적 관점에서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삼종지도는 어려서는 아버지와 남자 형제를 따르고, 시집을 가서는 남편을 따르며, 남편이 죽은 뒤에는 자식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데, 삼종에서 종(從)은 '쫓아가서 모신다'는 의미이다. 이 부분은 시대적 한계가 잘 보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칠거지악은 칠출(七出)이라고 하는데, 남자가 여자를 쫓아낼 수 있는 7가지 경우이다. 근데 이것은, 반대로 여자가 남자를 가지지 아니하는 오불취(五不取)도 있어서, 칠출에서 여자의 나쁜 점을 열거하고 오불취에서 남자의 나쁜 점을 열거하므로, 최근에는 칠거지악에 대해서 잘 언급하지 않는다. 유교의 나쁜 점을 논할 때, 삼종지도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삼종지도가 그만큼 악랄하다고 볼 수 있는데, 여자를 밥짓는 존재로 보고 집밖을 나가지 못하도록 구속하기 때문이다.[2] 현대의 학자들은 공자는 사람을 그렇게 중시하고 '내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마라'라고 까지 말했는데, '저렇게 여자를 낮추어보고 속박하는 말을 했을리가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삼종지도처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사람을 가두어두려고 하는 것은 공자가 말하는 예(禮)와도 큰 차이가 있다. 사람과 예의를 중시했던 공자가 저런 말을 할 이유가 없을 뿐더러 여성을 비하하는 부분은 몇구절에만 한정되어 있어서, 최근에는 '후대의 제자들에 의해서 덧붙여진 문장이 아닌가'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 까지 삼종지도의 말은 공자의 말로 여겨져 왔으며 또한 이러한 구절들을 가지고 공자의 권위를 이용해서 조선 중기(숙종 이후)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자의 자유를 구속하고 단지 밥짓는 존재로 여겨왔던, 과거의 미숙함은 반성하고 고쳐져야 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250년 전도 아니고 2500년 전 사람에게 현대의 성평등 개념을 들이미는 것은 어불성설인 데다, 이는 딱히 공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서양 철학의 대부들도 공유하고 있다는 걸 생각할 필요는 있다.

아무래도 국내에서는 유교 가부장제와 연관되어 해석되다 보니 유교의 총본산인 공자에게 유독 가혹하게 성차별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고는 하는데, 가부장제는 유교의 산물이 아니며, 고대 그리스와 고대 중국은 여성에게 교육과 정치 참여의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성차별주의자라는 평가를 하는 사람은 찾기 힘든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억울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애초에 유교 자체도 공자가 뿅 하고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정리하여 생겨난 것이다.

물론 아예 부정적인 것만 있는건 아니라, 어른에 대한 공경이나 호학(好學) 사상같은 공부 장려 문화는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다만 이것도 현대판 입시지옥 수능제도의 문제점이나 제사 문화 등의 비합리성 등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해서 문제지만. 뭣보다 과거 유교 국가의 현실은 하류층에게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글을 읽고 쓰면서 유학을 공부하는 것은 오로지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것이다.

법치주의적인 문제에서도 연관되는 것이 있다. 효(孝)와 체제 가운데 무엇을 우선하냐는 문제를 두고 논어에 이런 구절이 있는데, "섭공(葉公)이 공자에게 말하였다. '우리 고장에 마음이 곧고 바른 사람이 있는데,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이를 고발하였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고장의 곧은 사람은, 그와 같지 아니합니다. 아비는 자식을 위하여 숨기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숨기니, 진실로 곧음이란 그 가운데 있습니다' "라고 말한 부분은 우리나라 현행법에도 '효'의 개념으로 일부 반영되어 있어 논란이 되는 구절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유교적 전통을 받아들이고 체화시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부분 엄연히 우리의 고유한 .의식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효’라는 우리 고유의 전통규범을 수호하기 위하여 비속이 존속을 고소하는 행위의 반윤리성을 억제하고자 이를 제한하는 것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 2008헌바56
국내 형사소송법 제224조 및 제235조가 바로 그러한 부분이다. 이 법률로 인해 자녀는 절대로 자기 또는 배우자의 부모를 고소, 고발할 수 없지만[3] 부모는 자녀를 상대로 자유롭게 고소, 고발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상대로 거짓 고소, 고발해도 자녀는 방어할 수가 없다. 이 법률 때문에 자녀가 부모를 무고죄로 고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위헌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헌법재판소 유교적 전통을 이유로 들어 합헌 결정을 내린 바람에 엄청난 추궁에 시달렸으며, 이에 따라 국내에서 공자의 위신도 매우 추락하였다.

1.2. 현대 중화권

중화권에서도 공자는 오랜 기간 성인으로 대접받았지만, 청나라 말기 서방 세력의 침입을 받고 근대의 서양식 사고관이 퍼지기 시작하며 유교는 당시 서방에게 청이 뒤쳐지게 된 원흉 취급받게 되는데, 연장선상에서 지식인층으로부터 공자도 격하받게 되었고 이때부터 전근대성의 상징마냥 까이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였는데, 마오쩌둥식 근대화 과정에서 중국의 후진성·전근대성의 원인을 역사 속에서 찾았고 이 때 타깃이 된 것이 유교의 수장인 공자였다. 이에 따라 한동안 중국에서는 '공자 지우기'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마오쩌둥이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한 뒤에는 조상 숭배가 금지됐고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 시절에는 공자를 깎아내리는 비림비공운동이 전개됐다.[4]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대혁명 와중에 취푸의 상당수 유적이나 문화재가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파손되는 수모를 겪었다.[5]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지나고 나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자성론이 사회전반적으로 확산되자 공자의 위상도 다시 회복되기 시작한다. 취푸의 유적과 문화재도 복원작업에 들어갔다. 이후 소련이 붕괴되면서 일종의 신토불이 사상과도 결합되어 근대 공산주의 이전에도 중국엔 위대한 사상가들이 있었다는 식으로 공자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졌다.[6]

다만 문화대혁명의 여파가 워낙 강했기에, 중국 내에서는 여전히 공자를 고리타분하거나 전근대의 상징으로 보는 경우도 적지 않기도 하고 입으로는 공자를 존경한다고 하면서도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많다.[7]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htm_2016090705932219754_99_20160907091105.jpg
파일:external/pressian.wcms.newscloud.or.kr/20110130145523.jpg
2011년 중국 천안문 광장의 마오쩌둥 사진 맞은편에 10m 높이의 공자 동상이 세워졌다.
2012년 취임한 시진핑은 2013년 11월 산둥성 취푸에 있는 공자묘를 참배하고 또 공자연구원에서 연설했다. 공산당 창당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시진핑은 2014년 5월 베이징대의 유학자 탕이제 교수를 예방했다. 시진핑이 2014년 9월 공자 탄생 2565주기를 기념하는 회의에 참석해 담화를 발표했다.

2015년 6월부터는 중국 정부의 주요 부처 공무원들이 중국고전철학 전문가로부터 공자를 비롯한 옛날 학자들에 대한 강의를 듣는 것을 의무화 시켰다고 한다. 상공부, 교육부 등 중국 정부의 관료들은 당시 날짜를 정해 돌아가면서 하루에 2시간씩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2500년도 더 된 시절에 공자가 했던 발언 등을 들으며 효도 등 유교 사회에서 강조됐던 덕목을 따를 것을 권고받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시진핑이 유교사상 배우기를 강조하는 것은 서구 정치사상을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해석했다.

천라이 칭화대 국학연구원 원장이 2015년 7월 중공중앙기율검사위원회와의 인터뷰에서 “유가 문화가 중국 공산당원의 수양에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의 학습에도 초청을 받아 강연했다. 대륙 신유학자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중국 정부가 유학을 존중하겠다는 신호로 보는가 하면 전통 사상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찾으려는 시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 ‘ 중국몽’ 제시를 탈 서구 프레임이 가동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대륙 신유학의 대표자 격인 베이징사범대학 천밍 교수는 ‘중국몽’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로부터의 탈피로 설명한다.

반면에 간춘쑹 베이징대 교수는 조금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국가와 신유가는 여전히 긴장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공산당이 유가를 이용하려 한다면 유가는 공산당을 교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만 공자가 복원되는 것은 좋은데 그 과정에서 공자의 이름이 지나치게 상업화된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중국 사교육 업계에서 공자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예삿일도 아니고 공부가주나 공부채도 특산물화되어서 중국 전역에 팔려나가고 있다.

그래도 여기까지였으면 지역 발달을 위한 이해할법도 한 조치라고 볼 수도 있지만 취푸 시 당국에서 단순 지역홍보를 넘어 유적지 일부를 호텔로 전용하거나 심지어 공자의 이름을 내건 복권을 발행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돈벌이를 위한 행보를 보이고 빈축을 사고 있다. 이러한 상업화가 얼마나 노골적인지 공자가 중국 최고의 브랜드라는 비아냥 조의 농담이 나올 정도.

다만 이러한 돈벌이가 취푸시 재정이나 공자 가문에게는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공자 가문 후손들[8]이 이러한 상업화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 돈벌이를 해서 이익을 얻는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공자 복원은 국가주도로 이루어지는 만큼 공자에 공산당 끼워팔기를 하고 있다. 이게 너무 심해서 미국에서는 2018년에 공자학원이 스파이 혐의로 폐쇄되었을 정도 결국 공자학원은 2020년을 기점으로 전세계적으로 폐쇄 행렬이 줄을 이었다.

중화민국에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국부천대로 마지막 연성공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인 쿵더청이 직접 제례를 지내고 '중화 문명'의 적통임을 주장하는 대만에선 당연히 공자에 대한 평가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은 본성인들의 영향력이 강해졌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자에 대한 관심도는 여전히 강하다.[9]

1.3. 서양의 평가

로타 폰 팔켄하우젠의 저서인 <고고학 증거로 본 공자시대 중국사회>[10]에 따르면, 공자는 주나라 정치인인 주공 단의 정치 철학을 이상화하여 주나라의 의례 제도 개혁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런데 공자가 생각했던 것처럼 서주 초기에 (상나라와는 다른 주나라만의) 의례 제도 개혁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공자는 주공에 의해, 상나라와는 다른 주나라만의 의례 제도가 수립되었다고 보았고, 그때의 의례 제도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제로 고고학 유물을 통해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상대의 의례 제도는 주초에 계승되었고, 주초부터 공자 대까지 최소한 두 번 이상 의례 개혁이 있었다. 공자가 회복하고자 했던 의례 제도는 기원전 850년, 즉 서주 말기 이왕 혹은 여왕 대의 일이라는 것. 의례 제도 개혁을 단행했던 이유는 정치적 혼란과 특권 계층의 유지에 있다. 주나라의 왕위는 부자상속이므로 제7대 천자 의왕이 죽고 그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동생이 왕위에 올라 제8대 효왕이 되었다. 후에 의왕의 아들은 효왕의 사망 이후 제9대 이왕으로 즉위했다.

바로 이 시기의 부자 상속의 단절과 회복에 대한 정치적 혼란을 시정하기 위해 의례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상하질서를 바로 잡고자 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 특권 계층인 귀족의 수가 많아졌고, 특권을 누리는 귀족의 수가 많아지면 국가의 입장에선 자원이 너무 많은 이들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고 이는 손해라는 것이다. 또한, 특권을 상속하기 위한 귀족 내부의 다툼도 심해지게 되니 의례 제도를 개혁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제사라는 행위는 단순히 조상의 넋을 기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바로 그 조상의 후손이며 조상의 제사를 위해 공동체가 집단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공동체의 내부적 단결과 집단적 기억[11]을 하는 기능이 있다.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기원전 850년 의례 제도의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실제로 그 시기에 갑자기 주 문화권 내부에서 의례 제도가 개혁되어 나타난다. 요약하자면, 결국 공자는 주공 대가 아닌 기원전 850년 의례 제도 개혁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그 시기의 의례 제도를 주공 때 의례제도라고 잘못 파악하였다는 것. 이러한 이유는 공자와 공자 이후의 유학자들의 철학적인 공상 때문이다. 주공 시절을 이상화하다 보니 역사상의 사실관계보단 주공, 혹은 주초를 유가적인 이상화 했다는 것.

그 밖에 라이프니츠는 공자의 사상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고, 근대 이후 이름난 소설가였던 헤르만 헤세는 그의 최대의 걸작 유리알 유희에 공자의 예악사상을 녹여넣었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카스탈리엔은 마치 동양의 한림원같은 느낌을 주며, 대가는 이들의 수장으로서 동양에서 말하는 군자의 풍모와 매우 비슷하다.

[1] 여기서는 여자 일반이 아닌 첩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다. 이 경우 뒤의 소인 역시 가정의 하인, 노비 등을 지칭한다고 해석. [2] 실제로 공자가어 삼종지도 관련 문장에 그대로 나온다. [3] 성폭력, 가정폭력, 아동학대의 경우는 각각 특례법에 따라 예외적으로 직계존속을 고소할 수 있다. [4] 마오는 " 린뱌오 중국국민당이나 모두 공자를 존경하고, 법가(法家)에 반대하는 무리이다. 법가는 역사를 전진시켰고, 공자는 역사를 후퇴시킨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며 이 둘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 유명한 비공비림(공자와 린뱌오를 비난하자) 열풍이 여기서 기인한 것이다. [5] 이 때문에 마지막 연성공 쿵더청은 평생 중화인민공화국을 증오해서 후일 대륙에 남았던 친족들이 공부가주를 대접하자 불편한 기색을 보였고 곡부에도 방문하지 않았다. [6] 이는 당시 중공 정부의 입김도 알게 모르게 개입되었는데, 마르크스-레닌 더 나아가면 마오쩌둥식 공산주의 사상이 무너지던 냉전 막바지 시절 중공엔 이를 대체할만한 새로운 사상이 필요했고 그게 공자라는 것. 즉, 왕조 시대를 까는 중공이지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 왕조 시대를 지탱하던 국가에 대한 충을 강조하는 유교를 다시 끌어오는 모순된 행보를 보여준 셈이다. [7] 멀리 갈 것 없이 한국만 해도 공자를 성인으로 추대하면서도 한편으론 전근대의 상징인냥 까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제사 문화에 대한 개인/연령대별 시선과도 비슷하다. [8] 물론 대만에 있는 직계 혈통은 아니고 남종계통이거나 방계 혈통이다. 직계는 대만으로 건너갔으며 최후의 연성공인 쿵더청은 그 후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공산당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다시는 본토에 돌아오지 않았다. [9]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정작 중화민국의 국부격인 쑨원이나 후계자 장제스는 신앙심 깊은 개신교 신자였다는 것이다. 허나 당초에 2천년 넘게 뿌리뻗은 유교와는 달리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중국+타이완 내 기독교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이러니 본인이 개신교라도 유교를 존중해줄 수 밖에 없다. 당장에 본인 및 측근과 실세들이 가톨릭 신자라고 국민 대다수가 믿던 불교를 탄압한 응오딘지엠은 비참하게 몰락했다. [10] 이 책은 특이하게 문헌 자료를 거의 택하지 않고 고고학 자료에만 의존한다. 이는 문헌에 개입된 '철학적 공상' 내지는 '주대의 이상화'가 실제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 [11] 조상의 후손임과 누가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후손들간 위계(대종-소종), 자신들이 같은 공동체임을 기억하는 것 등.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521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521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