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20:42:27

공문십철

공문십철(孔門十哲)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덕행제일
안회
(연국복성공 안자)
민자건
(비공 민손)
염백우
(운공 염경)
중궁
(설공 염옹)
언어제일 정사제일
재아
(제공 재여)
자공
(여공 단목사)
염유
(서공 염구)
자로
(위공 중유)
문학제일
자유
(오공 언언)
자하
(위공 복상)
}}}}}}}}} ||

공문십철 (孔門十哲).

1. 개요2. 유래

1. 개요

중국 철학자 공자가 말한 열 명의 우수한 제자를 뜻하는 말.

석가모니 십대제자, 예수 12사도와 같은 개념의 인물들이다.

2. 유래

德行、顏淵・閔子騫・冉伯牛・仲弓。言語、宰我・子貢。政事、冉有・季路。文學、子游・子夏。
덕행(德行)에는 안회(顔淵)·민자건(閔子騫)[1]·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 언어에는 재아(宰我)· 자공(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冉有)· 자로(子路), 문학에는 자유(子游)(일명 언언) ·자하(子夏)(일명 복상)가 뛰어났다.”
논어 선진편

공자는 제자가 약 3천여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뛰어난 제자를 가리켜 '72현(賢)'이라고 칭했다. 십철은 또 그 중에서도 최고를 뽑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공자의 제자하면 안회 자로, 자공 정도가 인지도가 높다. 하지만 기준은 모호하다. 민자건같은 경우에는 몇 구절의 기록밖에 없지만 그 효행담 하나로 십철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그 밖에도 증자(일명 증삼曾參)·자장(子張)(일명 전손사)·유약(有若) 등 뛰어난 제자가 있었으므로 십철이라고 한정한 것은 뒷날 학자의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공문십철 중에서 유달리 재아(재여)가 특이한데, 자로나 자공을 꾸짖을 때, 가르침을 위해서 꾸짖는 거라면 재아를 상대로 할 때는 비난조 일색이다.《논어》에서 재아는 삼년상이 너무 길다면서 1년상으로 단축을 주장하자 공자는 "넌 고작 1년상으로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하냐?"라고 말하자 재아 또한 "네 편합니다."라고 응수한다. 그러자 공자는 자포자기하고 재아가 나가자 "사람은 태어나고 3년 동안은 부모 보살핌을 받기 때문에 삼년상이라는 기간이 의미를 갖게 되는 건데, 재여는 부모에게 사랑받은 기간이 3년도 안 되는가 보다."라고 비꼬는 내용이 나온다. 다른 편에서는 공자가 재아의 낮잠자는 모습을 보고 "썩은 나무에 조각을 할 수 없고 썩은 흙으로는 담을 쌓을 수도 없다. 내가 재여를 뭐하러 꾸짖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재여와 같은 자로 인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난 재여를 만나기 전에는 그 사람 하는 말만 보고도 그 사람을 믿었는데, 이젠 말에 행동까지 같이 보고 나서야 믿는다. 재여한테 내가 참 크게 배웠다."라며 엄청난 비난을 한다.

이밖에도 팔일편 21장 노나라 애공이 사당에 대하여 재아에게 물었을 때 재아가 “하나라에서는 사당에다 소나무를 심었고, 은나라에서는 잣나무를 심었으며, 주나라에서는 밤나무를 심었는데, 백성들로 하여금 전율하게끔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고, 공자가 이 말을 듣고는 “이루어진 일인지라 말할 필요가 없으며, 끝난 일인지라 바로잡을 필요도 없으며, 이미 지나간 일인지라 책망할 필요도 없어졌다.”[2]라고 대답했다고 나온다. 옹야편 24장에서는 공자에게 와서 "인덕이 있는 사람은 비록 누가 와서 ‘우물 안에 사람이 빠져 있다’고 말해도 따라서 우물에 들어가 사람을 구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가 공자에게 “어찌 그렇게까지 할 수야 있겠는가. 군자는 우물에 데려가도 빠뜨릴 수는 없고, 잠깐은 속일 수 있어도 사리분별도 못하게 할 수는 없다.”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사마천의 사기 ‘중니제자열전’에는 재아는 나중에 제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멸족당하는데 그때 공자가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내용도 실려있 다. 즉, 공자는 재아가 예도 부족할 뿐더러 자기수행할 태도조차도 못 갖췄다고 보았다는 것. 그런데도 공문십철에 재아가 들어간 것을 생각하면 유교적 예법이 아닌 다른 방면으로 재주가 뛰어났다고 추측된다. 아니면 재아가 반란에 가담했다가 죽었으므로 그가 공자의 제자였기는 하지만 공자도 두 손 두발 다 들 정도로 답 없는 인간이었다는 점을 유학자들이 굳이 강조하려고 저런 부정적인 얘기만 남겼거나. 하지만 사기보다 먼저 쓰인 춘추좌씨전, 여씨춘추에서 재아의 반란을 부정하는 기록들도 있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있다.

사기열전 중니제자열전에서는 재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공자의 제자 중 하나인 담대멸명(자는 자우)은 굉장히 못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공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정작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그가 공자에게서 독립해서 장강에 이르었을 때 그를 따르는 제자가 300명이나 되었다. 이를 들은 공자는 "나는 말 잘하는 것으로 사람을 골랐다가 재여에게 실수하였고, 생김새만을 보고 사람을 가리다가 자우에게 실수하였다."라고 한탄하였으니, 이는 재여가 언변에 있어서 공문십철에 뽑힐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에 걸맞은 인성을 갖추지 못했음에 대한 후회라고 하겠다.

특히 증삼이 포함되지 않은 것에 송유(宋儒, 송나라 시대의 유학자들)의 불만이 생겨서 주희(주자, 朱子)의 《논어집주(論語集注)》는, 십철의 장(章)과 그 전장(前章)의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따라 (陳), (蔡)에 갔던 사람은 이제 내 곁에는 한 사람도 없다.(子曰從我於陳蔡者皆不及門也)>는 대목을 합쳐서 한 장을 이루고, 십철은 공자가 진나라, 채나라에서의 재난 때에 동행했던 제자만을 뽑았기 때문에 증자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풀이했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 점에서 무리가 따르는 풀이로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정자(程子)[3]는 공문십철로 일컬어지는 제자보다 더 훌륭한 제자도 많고, 결국 공자의 도를 전수한 제자는 증자인데도 공문십철에 포함되지 않았다면서, 공문십철이 세속의 말이라며 깠다. 정자의 말은 즉 공문십철이란 말이 공자가 인정한 훌륭한 제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멋대로 지어낸 말이라는 것이다.

이 10명 중에서도 최고 수제자로 꼽히는 사람은 안회로, 십철 중 유일하게 '자(子)' 칭호를 받고 안자로 불리는 데다가 공묘나 성균관 대성전에서도 위패가 공자 바로 앞에 배치되는 등 최고 대우를 받고 있다.

[1] 민자건의 후손인 민칭도가 북송 대에 고려에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귀화해 여흥 민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화가 있으나 다른 설화에서는 민칭도가 민굴(또는 마암굴)에서 나와 스스로 민씨를 칭했다고 한다 한다. 민칭도 이전에 이미 민씨를 칭하는 역사적 인물들이 발견되므로 설화의 신빙성이 의심된다. [2] 즉 재아가 뭣도 모르면서 아는 척 대답했다고 깐 것이다. [3] 정호(程顥)도 높여서 정자라고 부르고, 그 동생 정이(程頤)도 높여서 정자라고 부른다. 여기서 말하는 정자는 정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