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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28:54

맹자(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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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목차3. 명언4. 맹자와 맹자학5. 관련 고사성어6. 원문(한자)7.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맹자()는 맹자와 그의 제자들의 어록을 엮은 유교 경전이다. 다만, 저자가 누구인지는 다소 논란이 있다. 보통은 '여러 사람이 썼다고 보기에는 문체가 일관되었다는 점', '맹자 사후의 어휘 등이 보인다는 점' 등으로 인해서, 맹자가 주도하여 쓰고 후대에 교정된 부분이 있다고 본다. 사실 이런 저자 논란들은 고대에 쓰여진 서적 대부분(논어, 대화편, 아리스토텔레스 서적, 성경 등)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다. 맹자는 각국이 총력전을 펼치며 국력을 효과적으로 끌어올리고 투사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국 전국시대 후기에 저술된 책이기에 단순한 철학책이 아닌, 엄연한 실용정치 서적이다.

후한대까지만 하더라도 텍스트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고, 편(篇)만이 나뉘어져 있었고, 또 한대(漢代) 초를 거치면서는 맹자를 가탁한 위작 4편[1]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이것을 후한 말의 조기(趙岐, ? ~ 201년)가 위작 4편을 제외한 7편의 장구(章句)를 나누고 주석을 달아 텍스트를 정립하였다. 이때 조기가 주석을 달지 않은 위작 4편은 점차 잊혀져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 때문에 문헌학자들이 뒷목을 잡으며 아쉬워 하지만, 맹자는 비교적 일찍 주석작업이 진행되어 통행본 텍스트가 잘 보존된 사례로 꼽힌다. 이 점은 《순자》(荀子)나 《장자》(莊子)와 같은 전국시대 문헌들의 최초 주석이 늦어진 것과 비교[2]해서 가장 특기할 만한 부분이다. 《장자》만 봐도 이 작업이 늦어지면서 B급 글쟁이들의 앤솔로지(...)가 되어버려서 전체 33편 중 내편 7편을 제외하면 '장자의 글'인지, '장자의 사상을 담고 있는지' 조차도 의심스러운 경우가 있을 정도[3]니 맹자의 경우는 조기에 의해 탈락된 편이 있긴 해도 다행인 셈.

맹자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평가되는 텍스트는 3개이다. 먼저 《맹자주소》(孟子注疏)를 들 수 있다. 조기는 장구를 나누면서 주(注)를 달았는데, 이것을 저본으로 하여 송나라 때 손석이 소(疏)를 달아 《맹자소》(孟子疏)를 썼고, 이것이 13경 주소에 포함되어 합본이 되면서 성립된 것이 바로 《맹자주소》. 이것이 주희가 성리학을 집대성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하게 읽힌 텍스트였다. 그 다음으로는 남송 때 주희가 쓴 《맹자집주》를 들 수 있다. 성리학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사단(四端)과 성선(性善)에 대한 논리가 바로 이 작업을 통해서 정립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후 성리학이 관학의 지위을 차지하면서 가장 주된 텍스트로 읽혔다. 마지막으로 청나라 때 초순(焦循, 1763-1820)이 쓴 《맹자정의》가 있는데, 고증학적인 성과가 반영된 것이다. 그 외에 다산 정약용도 《맹자요의》라는 주석서를 냈는데, 이것은 《논어고금주》 같은 전면적 주석이 아니라 의문나는 부분에 대해서만 주석을 단 것이기 때문에 앞의 세 저작과 비교하기는 어렵다.[4]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맹자집주》가 많이 읽혔으며, 지금도 맹자 독해의 기본으로 여겨지고 있다.

구어체에다가 매우 축약되어 있는 논어에 비해 생략이 적어서 문장이 매끄럽고, 읽기 쉽다고 인식되기도 하지만, 사실 맹자처럼 배경지식이 많이 필요한 문헌도 없다. 문장이야 술술 읽히기는 하지만, 뭔 뜻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한문 초심자가 공부할 때 논어를 첫 텍스트로 해야 하는지, 맹자를 첫 텍스트로 해야 하는지는 사실 개인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5] 그래도 전통적으로 맹자가 '문리'를 트이는 용도로 자주 선호되기는 했다.[6][7]

춘추시대에 비해 전국시대 들어서면서 언어가 더 정밀해졌다는 말도 있지만, 20세기 말의 고문헌 발굴로 인해서 공자의 손자 자사시대 때 이미 중국 문헌이 매우 고차원적으로 작성됐다는 것이 유물로 입증되었다.

사실 주옥같은 명언과 재기 넘치는 명대사(?)도 많아서, 고전은 골치 아프다는 편견을 버리고 읽으면 의외로 재미있는 게 맹자다. 맹자의 말투를 보고 있으면, 왕한테 건방지다고 끔살 당하지는 않을지 걱정될 정도로 독하다(...) 사실 그래서 더 재밌다. 도덕 시간에 성선설을 주장한 사람 정도로만 흔히 기억되는 맹자의 독설가, 정치사상가로서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맹자라는 경전 전체에 걸쳐서 조세에 대한 맹자의 의견이 자주 피력되는데 거의 항상 동일하다. 맹자는 시장의 질서 유지는 국가와 그 군주가 마땅히, 또한 반드시, 쥐고 행사해야할 권한이지만 그 외의 영역에서는 시장을 들쑤시지 말라고 주장한다. 보통, 군주들이 시장을 들쑤시는 이유는 세금을 때릴 건수를 늘리기 위함이고, 이것은 상인들이 아주 극혐하기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이면 상공인들이 모조리 다른 나라로 도망쳐버려 나라에서 부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특히 당대에 이중과세가 너무나 지나쳤는지 세금 언급이 나오는 족족 이중과세 멈춰!란 이야기로 수렴한다.

2. 목차

3. 명언

하늘이 내리는 재앙은 그래도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가 불러 들인 재앙으로부터는 살아날 수가 없다.
공손추 상 4 [16]
자기를 굽히면서, 남을 곧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없다.
이루 상 [17]
스스로 모질게 구는 자와는 함께 이야기할 것이 못된다.
스스로 돌보지 않는 자와도 함께 일할 것이 못된다.
예의가 아닌 것을 말함은, 스스로 모질게 군다(自暴)라고 한다.
내 자신이 '인(仁)에 살고 의(義)를 따르는 것'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돌보지 않는다(自棄)고 말한다.
이루 상 10 [18] 자포자기가 여기서 나옴.
사람을 살피는 것은, 눈동자보다 좋은 것은 없다.
눈동자는 능히 자기의 악(惡)을 가리지 못한다.
마음이 올바르면 곧 그 눈동자가 맑고, 마음이 올바르지 않으면 곧 그 눈동자가 흐리게 된다.
그 말을 듣는 것은 그 눈동자를 살펴 보는 것이니, 사람이 어찌 숨길 수가 있겠는가?
이루 상 15 [19]
사람의 병은 남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하는 데에 있다
이루 상 23 [20]
사람은 하지 않는 일이 있은 연후라야,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이루 하 8 [21]
큰 사람은 말을 함에 신용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행하는 데에 결과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오직, 의로움(義)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루 하 11 [22]
만장이 물어 말하였다. "감히 교우하는 방법에 대하여 여쭈어 보겠습니다"
맹자께서 대답 하셨다. "나이를 끼어 넣지 말고, 귀함을 끼어 넣지 말고, 형제를 끼어 넣지 말고 사귀어라.
사귀는 것이란, 그 사람의 덕(德)을 벗으로 하는 것이니,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만장 하3 [23]
한 상자의 밥과 한 그릇의 국을 얻으면 살게 되고, 얻지 못하면 죽게 되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큰 소리로 모욕하면서 주면, 지나가는 행인이라도 받지 않고
발로 차서 주면, 구걸하는 사람이라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고자 상 10 [24]
무릇 사람이 어찌 감당하지 못한다고 근심하리오!
하지 않았을 뿐이다.
고자 하2 [25]
사람들은 언제나 과오를 저지른 뒤에야 마음 속에서 곤란했던 바를 고칠 수 있고,
이리저리 생각들을 견주어 보고 난 뒤에야 구하고자 함이 안색으로 드러나며,
소리로 낸 뒤에야 깨닫게 된다.
안으로는 법도있는 가문과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
밖으로는 대적하는 나라와 외환(外患)이 없다면,
그런 나라는 언제나 멸망한다.

그런 후에야, 우환 속에서는 살 수 있으되 안락 속에서는 죽게 됨을 알게 되는 것이다
고자 하15 [26]
사람은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 한다면, 부끄러워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진심 상6 [27]
해서는 안 될 것을 하지 않고, 욕심내서는 안 될 것을 욕심내지 말아야 한다.
진심 상 17 [28]
하고자 함이 있는 사람은 우물을 파는 것과 비슷하다.
우물 파기를 아홉 길이나 해 내려 갔다고 하여도 샘솟는 데에까지 이르지 못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물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진심 상 29 [29]
그만 두어서는 안 될 곳에서 그만 두어 버리는 사람은, 그만두지 않을 곳이 없을 것이다.
진심 상 44 [30]
맹자가 양혜왕을 뵈었다.[31][32][33][34]
왕이 말하였다.[35] "어르신께서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않고 오셨으니, 역시 내 나라에 이로움이 있겠습니까?"[36]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하필 이로움(利)을 말하십니까? 다만 인의(仁義)만이 있을 뿐입니다.[37]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하겠느냐'고 말하시면, 대부(대신)들은 '어떻게 하면 내 집이 이로울까' 말하며, 선비나 백성들은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까' 말합니다. 윗사람이나 아랫사람 모두가 서로의 이익만을 취하게 된다면 나라는 위태로워 질 것입니다. 만승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천승의 집안이며, 천승의 나라에서 그 왕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백승의 집안입니다. 만승이 천승을 취하고, 천승이 백승을 취함이 많지 않은게 아니건만은, 진실로 의리를 뒤로 미루고 이익만을 앞세운다면 모든 것을 다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무릇 어질면서 부모님을 버린 사람은 없으며, 의로우면서 임금을 뒷전으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의만을 말씀하실 것이지 하필이면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양혜왕, 상(上)편-
맹자가 "만일 왕께 어떤 사람이 와서 '제 힘은 백 균의 무게는 충분히 들 수는 있지만 깃털 하나는 들 수 없고, 제 시력은 가을날의 짐승 터럭을 살필 수는 있지만 수레에 실은 땔감 더미는 볼 수 없습니다'라고 한다면 왕께서는 그 말을 인정하겠습니까?"라고 묻자, 왕은 "아닙니다"고 했다.
그러자 맹자가 말했다.[38]
"지금 왕의 은혜가 금수에게 미칠 정도로 충분하면서도 그 공적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는 것은 유독 무슨 까닭입니까? 그렇게 볼 때 깃털 하나를 들지 않는 것은 힘을 쓰지 않기 때문이고, 수레에 실은 땔감 더미를 보지 않는 것은 '시력'을 쓰지 않기 때문이며, 백성들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것은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께서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되지 못하는 것은 실은 하지 않기 때문이지 못 해서가 아닙니다."[39]
-양혜왕, 상-
맹자가 말했다.
"고정적인 생업이 없으면서 항심(恒心)[40]을 지니는 것은 오직 선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일반 백성의 경우는 고정적인 생업이 없으면 그로 인해 항심도 없어집니다. 만일 항심이 없다면 방탕하고 편벽되고 간사하고 사치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죄에 빠지는 데 이른 이후에 그것을 좇아서 형벌에 처한다면, 그것은 백성들을 그물질해 잡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진 사람이 임금의 지위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그물질해 잡는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밝은 왕은 백성들의 생업을 제정해 주되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충분하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릴 만하게 하여, 풍년에는 언제나 배부르고 흉년에도 죽음을 면하게 합니다. 그렇게 한 후에 백성들을 몰아서 선한 데로 가게 하므로 백성들이 따르기가 쉽게 됩니다.
지금은 백성들의 생업을 제정해 주되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리기에 부족하여, 풍년에는 내내 고생하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래 가지고서는 죽음에서 자신을 건져 낼 여유조차 없는데 어느 겨를에 예의를 익히겠습니까? 왕께서 만일 어진 정치를 시행하려고 하신다면 어째서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오 무(畝) 넓이의 집 둘레에 뽕나무를 심으면 오십 세 된 노인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고, 닭과 돼지와 개 등의 가축을 기름에 있어서 적절한 시기들을 놓치지 않으면 칠십 세 된 노인이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백 무 넓이의 밭을 농사짓는 데에 일손 바쁠 때를 빼앗지 않으면 여러 식구의 가족이 굶주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상(庠)과 서(序)에서의 교육을 엄격하게 시행해 효도와 공경의 의미를 거듭해서 가르치면 머리가 희끗한 사람이 길에서 짐을 지거나 이고 다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칠십 세 된 노인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일반 백성들이 굶주리거나 헐벗지 않게 하고도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양혜왕, 상-
개와 돼지가 사람의 음식을 먹는데 단속할줄 모르고, 길에 아사자가 있는데 (식량을) 풀 줄을 모르며, 사람이 죽고 나니 말하기를 ‘내가 한 게 아니다. 시절이 그러한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이 어찌 사람을 찔러 죽이고 ‘내가 한 게 아니다. 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왕께서 시절을 탓하지 않으시면 천하의 백성이 올 것입니다.
-양혜왕, 상- [41]
만장이 물었다.
"요임금이 천하를 순임금에게 주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아니다. 천자라도 천하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가 없다."
(중략)
맹자가 대답했다.
"순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하자 모든 신들이 제사를 받아들였으니, 이것이 곧 하늘이 받아들인 것이다. 또 순에게 정사를 맡기자 정사가 잘 되어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백성들이 받아들인 것이다. 하늘이 천하를 주고 백성들이 천하를 주는 것이므로 천자가 천하를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만장, 상-
군자에게 세가지 즐거움[42]이 있으니 왕 노릇 따위에 비할소냐
부모님께서 살아계시고 형제가 탈이 없는 것이 첫째 즐거움이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봐도 거리낌이 없음이 둘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43]이 셋째 즐거움이다.
-진심(盡心)편- [44]
맹자가 말했다.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볍다. 그러므로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음을 얻으면 제후가 되고, 제후의 마음을 얻으면 대부가 된다. 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제후를 바꾼다. 이미 살진 희생을 마련하고 제물로 바친 곡식이 정결하며 때에 맞게 제사를 지냈는데도, 가뭄이 들거나 물난리가 나면 사직의 신을 바꾼다."
-진심, 하-

맹자는 왕의 앞에서 거침없이 의견을 피력하기로도 유명하였다. 양혜왕 편부터 그 진가가 드러나는 구절이 많다. 설교만 줄창 늘어놓는 맹자 앞에서 왕이 '난 호색(好色)하여 왕도 실천은 어렵겠소' 하며 하며 회피하니 맹자는 '왕께서 호색하시되 백성과 더불어 호색하시면 도대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라며 받아치고,[45] 왕 앞에서 대놓고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에 비유해서 말씀드리지요'하며 면박 비슷하게 말을 시작하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이 전쟁으로 말해보겠다며 왕에게 논변을 펼친 것에서 나온 말이 바로 '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46]

맹자 관련 고사와 명언 가운데 쓸데없이 맹모삼천지교만 강조해서 학부모 등골을 빼먹는데, 사실 이 뒤에 더 중요한 이야기가 나온다. 공부를 포기하고 돌아온 맹자를 보면서 어머니가 옷감을 찢으며 공부를 도중에 그만두는 건 짜던 옷감을 도중에 찢는 것과 같다고 다그치는 장면, 어머니가 병들어 죽음이 가까워오자 아들에게 할 일을 하라고 말하고 어머니 자신은 아들의 짐이 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리는 내용 등등...

4. 맹자와 맹자학

『맹자』에 대한 연구는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양한시대(兩漢時代) 조기(趙岐)가 『맹자장구』를 지어 상술한 『맹자』 7편을 각기 상, 하로 나누어 14편으로 편집하였다. 이후 당송시대에 이르러 『맹자』를 경전으로 승격시키려는 운동이 일어났고, 그 결과 『맹자』는 경전으로 승격되는 데 성공하고 십삼경의 하나가 되었다. 이 시기에 『맹자』의 주석이 대량으로 발생하였다.[47]

1370년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신하가 할 수 없는 말을 했다(非臣子所宣言)”면서, ‘맹자’에서 마음에 안 드는 구절을 뺀, ‘맹자절문(孟子節文)’이라는 새로운 책을 만든 적이 있다. 과거시험도 거기에서만 출제했다. #

청나라 시대 『맹자』 연구는 날로 정밀하고 세밀해져 맹학(孟學)이 의리(義理)·고거(考據)·사장(辭章) 여러 방면을 포함하여 내용이 풍부하고 형식이 다양하여 결산하고 거울로 삼을만한 곳이 적지 않다. 건륭제·가경제 시기에 『맹자』의 집일(輯佚)·교감(校勘) 작업 달성은 더욱이 흥성기에 도달하여 예전 사람의 성취를 적지 않게 초월하여 대진(戴震)의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최술의 『맹자사실록(孟子事實錄)』이 시대의 역작을 얻었다. 이 이후 초순의 『맹자정의(孟子精義)』(30권)은 전 시대 사람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흡수하여 더욱더 많은 학자들의 학설을 모두 모이게 하였다.

5. 관련 고사성어

등의 말이 맹자에서 유래된 말이며, 생활, 학교 등 일상용어 중에도 맹자에서 온 말이 있다. 그러나 요즘엔 어째 그 자신의 사상보다 교육열을 나타낸 맹모삼천지교, 맹모단기지교만 두드러진 것 같다. 해당 문서 참조.

6. 원문(한자)

한문 원문 및 국문 번역
한문 원문 및 영문 번역
맹자집주 서설

7. 매체에서의 등장



[1] 성선변(性善辯), 문설(文說), 효경(孝經), 위정(為政) 등이다. [2] 순자는 당나라 때 양경에 의해서, 장자는 서진 때 곽상에 의해서 최초 주석이 이루어졌다. 경전의 최초 주석 작업은 단순히 자구를 풀이하는 것을 넘어서서 편장을 나누는 역할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른 시기에 이루어질 경우, 텍스트의 변개가 적다. [3] 엄밀히 말해 장자가 '내편, 외편, 잡편'의 괴랄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도 결국 텍스트 정립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너도나도 장자의 이름을 가탁해 글을 쓴 것들이 제대로 구분되지 못해서 생긴 현상이다. [4] 그래도 등문공장구 정전장의 내용이 실은 2장이 합쳐진 것이라는 주장과 같은 참신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5] 이처럼 논어와 맹자는 특징이 극단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논어부터 배우자는 사람은 맹자를 마지막에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맹자부터 배우자는 사람은 논어를 마지막에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사나 제자백가 사상에 배경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접근할 경우 공자 명언집에 가까운 논어부터 시작하고 현실 정치를 논하는 맹자를 공부하는 게 알맞으며, 반대로 중국사, 철학, 정치학, 경영학에 기본적인 소양이 있는 상태에서 깔끔한 텍스트로 한문을 배우는 것을 선호한다면 맹자 부터 시작하는 편이 좋다.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전통적으로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순으로 읽었으나, 이는 유학을 공부하는 관점에선 알맞아도 한문 공부할 때 이 순서를 따르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진 않는 편. [6] 그래서 나온 소리가 '맹자를 3천번(혹은 3백번) 읽으면 탁하고 문리가 트인다.'는 전설이다.(...) [7] 또한 문장적 특징으로 인한 선호를 차치하더라도, 그 내용상, '배우고 때맞추어 익히니 역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전-혀 공감되지 않는(...) 학업 권장 발언에서부터 시작하는 《논어》와는 달리, 《맹자》는 1장(양혜왕: 왕도정치와 " 역성혁명론"에 관한 내용이다.)부터 "왕께서는 하필 이익에 대해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라는 발언으로 왕의 명치를 가격하면서(...) 시작하는지라 학생들이 보다 흥미를 느낄 수 있으므로 역시 《맹자》가 선호되는 편. 결국 공부도 재미가 있어야 하게 된다 그래도 내용이 내용인지라 잘 놈들은 잔다 [8] 진(秦)나라의 압박을 피하고자 수도를 안읍(安邑)에서 대량()으로 천도했기에 혜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9] 명칭 자체는 당대 기준으로 멸칭이 아니지만, 칭호가 바뀐 일 자체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 위신이 박살난 사건인지라 제목을 양혜왕으로 잡은건 의도적인 비꼼이다. [10] 이 중에는, 복속되기를 택하였음에도 위협 받는 것에 대해 조언을 요청하는 제후가 있었는데, 맹자는 그런 경우, 상대가 바라는 것은 당신의 땅이므로 도망치는 것이 낫다고 간언하며 옛 왕의 사례를 언급한다. 땅을 포기하고 도망가더라도, 왕이 백성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백성 중에 왕을 따라 같이 도망칠 사람이 있을 것이며, 혹, 왕이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죽기를 택하더라도 그를 따를 사람이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렬한 최후를 맞아 역사에 명예를 남기거나, 아니면 도망쳐 후사를 도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조언이다. [11] 맹자 전체를 통틀어 맹자가 본게 아니라, 맹자를 찾아가는 유일하다시파한 경우다. 그러나 결국 무산되었다. [12] 맹자는 자신과 별 연이 없을 만큼 너무 일찍 죽은 아버지의 장례보다, 자신이 감히 제후들에게 쓴 소리를 뱉고 다녀도 될 만한 실력을 갖출 기회를 열어주며 헌신한 어머니의 장례를 더 성대하게 치렀다. 여기서 맹자는 어머니의 장례에서 제기 개수를 많이 썼는데, 이것은 예법이전에 제례의 원칙을 어기는 행동이었기 때문에 그 맹자라 하더라도 이걸 지적 받는 다 하면 그에 대해 핑계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본 편에서 맹자가 지적 받은 것은 제례를 어긴 것이 아닌, 장례에 돈을 더 쓴것을 지적한 것으로 논점이탈이다. 따라서 맹자는 그 비난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무시한다. 인신공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후로도 제기를 더 쓴 것에 대해는 어째서인지 의문을 표한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을 보면 맹자의 비웃음은 아주 정당해보인다. [13] 이것은 이후 공손추 편에서 맹자가 자신의 태도가 자뻑 따위가 아닌 정당한 부동심이라 주장하는 근거의 기초가 되어준다. 또한, 이것은 맹자와 같은 부동심을 가지고 호연지기를 지닌 사람을 대적하지 말라는 후대 학자들의 경고로써 붙은 편집이기도 한 것이다. [14] 이후 공손추 편으로 가자마자 부동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맹자가 하는 주장은 아주 간단하다, 겨우 그런 사소한 흠집에 연연하는 자는 천명을 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맹자는 과연 그의 간언을 무시한 제후들이 모조리 망하는 것을 보았기에 그에 대한 아주 확실한 마음을 다잡게 되었고, 그런 기이한 흐름? 기운? 뭐라 말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두고 호연지기라는 두루뭉실한 별명을 붙여주었다. 결국 맹자가 옳았고, 실제로 그의 간언을 거부한 자들 모두가 망하고, 최후에 승리한 것은 난데없이 나타난 진나라였으니 맹자의 부동심은 그의 오만 따위가 아니라 정의로운 판단이었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15] 이걸 나이 40 넘으면 자동으로 현자가 된다는 의미로 믿는 대책없는 사람들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가득하다. [16] 天作孼猶可違(천작얼유가위) 自作孼不可活(자작얼불가활) [17] 枉己者(왕기자) 未有能直人者也(미유능직인자야) [18] 自暴者不可與有言也(자포자불가여유언야) 自棄者不可與有爲也(자기자불가여유위야) 言非禮義(언비례의) 謂之自暴也(위지자포야) 吾身不能居仁由義(오신불능거인유의) 謂之自棄也(위지자기야) [19] 存乎人者(존호인자) 莫良於眸子(막량어모자) 眸子不能掩其惡(모자불능엄기악) 胸中正則眸子瞭焉(흉중정즉모자료언) 胸中不正則眸子眊焉(흉중부정즉모자모언) 聽其言也(청기언야) 觀其眸子(관기모자) 人焉廋哉(인언수재) [20] 人之患在好爲人師(인지환재호위인사) [21] 人有不爲也而後(인유불위야이후) 可以有爲(가이유위) [22] 大人者言不必信(대인자언불필신) 行不必果(행불필과) 惟義所在(유의소재) [23] 萬章問曰(만장문왈) 敢問友(감문우) 孟子曰(맹자왈) 不挾長(불협장) 不挾貴(불협귀) 不挾兄弟而友(불협형제이우) 友也者(우야자) 友其德也(우기덕야) 不可以有挾也(불가이유협야) [24] 一簞食一豆羹(일단사일두갱) 得之則生(득지즉생) 弗得則死(불득즉사) 嘑爾而與之(호이이여지) 行道之人弗受(행도지인불수) 蹴爾而與之(축이이여지) 乞人不屑也(걸인불설야) 萬鍾則不辯禮義而受之(만종즉불변례의이수지) [25] 夫人(부인) 豈以不勝爲患哉(기이불승위환재) 弗爲耳(불위이) [26] 人恒過然後(인항과연후) 能改(능개) 困於心(곤어심) 衡於慮然後(형어려연후) 作徵於色(작징어색) 發於聲而後喩(발어성이후유) 入則無法家拂士(입즉무법가불사) 出則無敵國外患者(출즉무적국외환자) 國恒亡(국항망) 然後(연후) 知生於憂患而死於安樂也(지생어우환이사어안락야) [27] 人不可以無恥(인불가이무치) 無恥之恥(무치지치) 無恥矣(무치의) [28] 無爲其所不爲(무위기소불위) 無欲其所不欲(무욕기소불욕) [29] 有爲者辟若掘井(유위자비약굴정) 掘井九軔(굴정구인) 而不及泉(이불급천) 猶爲棄井也(유위기정야) [30] 於不可已而已者(어불가이이이자) 無所不已(무소불이) [31] 맹자의 1장 1편. 한 마디로 첫 페이지이기 때문에 유명세가 높다. 이게 얼마나 널리 퍼졌냐면 김시습의 시에도 흥부전에도 심지어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보이는 오광대나 들놀음에서 대사로까지 등장한다. 흥부전 -박통 속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나,"맹자 견양혜왕하신데,왕왈수불원천리이래하시니,역장유이이오국호이까. 마상에 봉한식하니, 도중에 송모춘을, 가련 놀보 망하니, 불견상전인가." 놀보가 듣고 하는 말이, "어디 그게 박 속이냐, 정녕한 서당이지. 귀글은 당음(唐音)인데, 강포(江浦)가 놀보 되고, 낙교(洛橋)가 상전되니, 그것은 웬일인고."-. 동래야류 연희본 -'이전에는 대들보 양자를 씨더니 많은 남이 정간목에 다 듈어가고 맹자(孟子)가 견양혜왕(見梁惠王) 자자(子字)를 씨오.'- [32]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이 구절은 맹자'양혜왕 이어야 할 것이나, 맹자양혜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위혜왕(魏惠王)'이 아닌 '양혜왕(梁惠王)'이라 기록한 것 자체가 예우 따위 집어치우겠다는 소리다. 사실, 이 구절은 일반적인 중국 고서의 ~자왈 도입 구절을 완전히 뒤틀은 것이다. 보통, 이런 책들은 자호가 붙을 정도로 유명한 스승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책에서 논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를 선언하는 목적으로 ~가 말하였다 는 도입 구절을 가지는 것인데, 여기선 맹자가 말하였다가 아니라 맹자가 뜬금없이 양혜왕과 마주쳤다는 늬앙스의 문구로 해괴한 시작을 하고 있다. 일단은 양나라의 혜왕이 예물로써 맹자를 초빙한 것이라곤 하나, 실상 이후 전개를 보면 양혜왕이 개인 정원에서 놀다가 뜬금 없이 지나가던 맹자와 마주친 상황이다. 여러모로, 맹자가 초청에 응해서 온 것이 맞긴 한건지, 아니면 맹자가 그냥 스스로 찾아온 것인지, 아니면 그냥 양나라에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만난 것인지 도통 확신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이한 분위기의 대화가 이어진다. [33] 굳이 현도 아닌 견을 써놓고 (관을 상대로 견 한다는 것은 관을 비꼰다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하물며 그 상대가 관의 최고 직책자인 군주라면...) 심지어 양혜왕이란 멸칭에 가까운 칭호를 쓴 것은 명백히 의도된 것이다. 손빈을 등용한 제나라에게 처참히 패하고 국토를 모조리 빼앗긴 후 대량(大梁) 땅으로 도망치듯 천도하였기에 위나라는 양나라로 불리게 되었다. 즉, 모든 것을 잃은 자에게 희망을 되세겨주는 쓴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상황으로, "~가 말하였다"는 도입 선언에 익숙한 독자라면 아! 하고 탄성이 나올 법한 도입이라 할 수 있다. 과연, 맹자라는 서적에서는 군주라 해도 특별히 예우하는 기록은 없다시피하다. 비단 양혜왕 뿐만 아니라, 맹자가 만나는 사람은 신분의 고하 무관, 죄다 見을 쓴다. "맹자가 ~를 만나셨다" 나 "맹자가 ~를 뵈었다" 같은 서술조차 아니며, 전술하였듯 견이란 말은 꽤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는고로, "맹자가 지나가다 ~와 마주쳤다" 조차 정확한 해석이라 하기 어려울 만큼 중의적인 표현이다. 요컨데, 소크라테스가 뜬금 없이 누구를 붙잡고 산파술을 벌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수준의 의미로 보면 된다. [34] 다만 아직 성읍국가 전통이 남았기에, 정작 당대인은 위신이 떨어진 상황이라 인식할 지언정 멸칭으로까지 받아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언제까지나 맹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당대인 기준) 실례로 우리가 은나라라고 알고 있는 국가의 정식 국호는 원래 상나라였다. 은이라고 알려진 이유는 멸망 당시 수도의 지명이 은(殷)이었기 때문. 그 전 박(亳), 비(庇), 엄(奄) 등에 천도했을 시기에는 박나라, 비나라, 엄나라라고 불린 사례가 있으며, 현대에도 마이너하나마 박 시대, 비 시대, 엄 시대하는 식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또한 당장 위나라의 전신격인 진나라 역시 수도를 익(翼)에 두던 시기 익나라라고 불린 적이 있다. 예외적인 사례가 초나라인데, 수도를 천도한 기록이 제법 되는데도 국호의 별칭이 없다. 영(郢) 시대가 워낙 길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태생이 이민족이라 그런지는 불명. [35] 보통 고서들에서 ~이 말하였다는 고서에서 가르침을 주는 스승을 먼저 거론하는데, 여기서는 거꾸로 가르침을 받고 있는 인물이 ~왈을 먼저 가져가는 기묘한 서술이다. [36] 초청에 응한 것이든, 아니면 맹자가 자진해서 찾아간 것이든, 아니면 진짜로 그냥 지나가다가(...) 만난 것이든, 저명한 스승과의 대화 기회가 생긴 것 만으로도 모든 것을 잃은 양혜왕에겐 엄청난 기연인 것이다. [37] 독자들이 ? 하게 만드는 기묘한 도입부, 그리고 무례한 수준의 서술인 "견" 사용, ~왈 이라는, 일반적으로는 맹자왈로 시작해야할터인데 엉뚱하게 가르침 받는 군주가 먼저 가져가버린 서술이 되어있는 지를 알려주며 또 한번 아! 하고 탄성이 나오게하는 구절이다. 좋음은 인의의 결과라는, 당연한 상식이지만 모두가 쉽게 망각하는 원론을 짚어주는 것이 맹자의 첫 부분이므로 '이 쓰일 수 밖에 없었고 본래 맹자가 말하였다고 시작해야할 것을 왕이 말하였다로 거꾸로 서술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38] 이 왕(제나라 선왕)은 도살되려는 소가 불쌍해서 차마 볼 수 없다고 하였다. [39] 이 부분의 원문이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에도 나왔던 '불위야 비불능야(不爲也 非不能也)'. 정도전 역을 맡았던 배우 조재현은 드라마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대사로 꼽기도 했다. [40] 흔들림 없는 도덕적인 마음. [41] 狗彘食人食而不知檢, 涂有餓莩而不知發; 人死, 則曰: 『非我也, 歲也.』 是何異於刺人而殺之, 曰: 『非我也, 兵也!』 王無罪歲, 斯天下之民至焉. [42] 이른바 군자삼락 [43] 교육학에서는 이것을 교육(敎育)이라는 단어의 어원으로 본다. [44] 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在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 [45] 王曰, 寡人有疾, 寡人好貨. 對曰, 昔者公劉好貨 詩云, 乃積乃倉, 乃裹餱糧, 于橐于囊. 思戢用光. 弓矢斯張, 干戈戚揚, 爰方啓行. 故居者有積倉, 行者有裹糧也, 然後可以爰方啓行. 王如好貨, 與百姓同之, 於王何有. [46] 孟子對曰, 王好戰, 請以戰喩. 塡然鼓之, 兵刃旣接, 棄甲曳兵而走. 或百步而後止, 或五十步而後止. 以五十步笑百步, 則何如? 曰, 不可, 直不百步耳, 是亦走也. 曰, 王如知此, 則無望民之多於隣國也. [47] 손석의 『맹자음의』와 주희의 『맹자집주』가 이 무렵에 완성되었으며 명나라 때에는 『사서고』, 『사서경학고』, 『사서인물고』가 차례로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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