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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6-05 01:20:52

SK 와이번스 프런트 퇴진운동

1. 개요2. 배경
2.1. SK 프런트의 지원 문제2.2. 프런트와 김성근의 대립
3. 발단4. 전개 형태
4.1. 김성근 경질 이전4.2. 김성근 경질 이후
4.2.1. 문학구장 소요 사태4.2.2. 프런트 퇴진운동 4.2.3. 문학구장 현수막 시위
5. 평가

1. 개요

2011년 SK 와이번스 김성근 감독 경질 후 SK 팬덤에서 프런트를 상대로 벌인 퇴진 운동. 처음에는 김성근과의 재계약을 촉구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이후 김성근 감독이 시즌(2011년은 계약만료 시즌) 종료 후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다음날 경질되면서 프런트에 대한 사퇴를 촉구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당시 이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김성근의 감독직 복귀를 원하는 게 아니고, 어디까지나 프런트의 행동을 문제 삼아 이를 규탄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2011년 LG 트윈스 청문회 사건과 함께 당시 야구 팬덤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

2. 배경

2.1. SK 프런트의 지원 문제

당시 퇴진 운동 주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김성근이 SK 와이번스 감독을 맡고 있는 동안 전력 보강이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내용이 있다. 요컨대 FA, 현금 트레이드를 통한 적극적인 전력 보강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스카우트의 무능으로 실력있는 신인 지명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주장.

실제로 당시 SK 프런트는 외부 영입에 소극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며, 이진영의 FA 이탈 또한 LG와의 현금 경쟁에서 10억 이상 차이가 났다는 것이 확정적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SK 프런트가 투자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 SK 구단의 총 운영비는 약 300억 원으로 대한민국 프로 스포츠 팀 중 최다액이었다. 이는 사실 당연한 문제였는데, 매일 우승을 밥먹듯이 하다 보니 선수단 연봉이 급속도로 치솟을 수밖에 없었고 일본인 코치 등 외부 코치 영입이 많고 코치단 규모도 컸던 김성근 사단 스타일상 애초에 드는 돈 자체가 컸다. 즉 외부 영입이 없었다는 김성근 감독 및 지지 팬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이미 돈이 많이 드는 상황에서 추가적인 지원이 어려웠던 것이 사실.

무엇보다 만 수년동안 성적이 바닥을 치는 특별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SK는 최상위권 성적을 자랑했고 강병철-조범현 2대에 걸쳐 쌓은 기반으로 평균연령 20대 중반의 젊은 팀이라 FA나 현금 트레이드 같은 즉각적인 외부 수혈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김성근이 재임한 2007~11년 사이에는 쓸만한 FA가 매물로 나오지도 않았으니, 큰 투자를 할 가치가 없었던 것.[1]

다만 당시 대표적인 문제는 신인 지명. 그나마 2008년 모창민, 2009년 박현준,[2] 2010년 박종훈 정도가 1군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정도였고, 김성근 감독 시절 SK에서 뽑은 신인 선수 중 주전급으로 성장한 선수는 2009년 김태훈 정도를 제외하면 전무했다. 단순히 김성근 감독 문제라면 나중에라도 성장해야 하는데 그 이후로도 이 시기 선수들은 거의 실패로 끝났다는 것.

이처럼 부족한 스카우트 능력에 대한 비판은 당시에도 굉장히 심했는데, 결정적으로 2011년 1라운드 지명자였던 서진용 문제로 팬덤이 굉장히 시끄러웠다. 서진용은 당시 1라운드 1픽으로 지목되었지만, 그전까지 경력이 거의 전무한 무명 선수였기에 전부 당황하였다. 오직 어깨가 싱싱하다는 이유로 뽑았는데, 정말 그런 이유라면 3-4픽 정도로 뽑아도 괜찮을 선수를 가장 중요한 1픽으로 지목했다는 것.

특히 당시 MLB에서도 주목했던 제물포고 에이스 이현호가 SK에 대한 애정을 계속 표현했기에, 당시 SK 스카우트에 대한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심지어 입단하자마자 무릎 부상이 발견되어 육성선수로 전환되었다. 이후 서진용이 2017년 핵심 불펜으로 성장하면서 의외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지만, 2라운드에까지 이현호를 거르면서 김민식을 지명했고 김민식은 제대로 된 활약 하나 없이 은퇴하였다.

기존 서술에서는 이에 대해 선수들은 성장 시간이 필요한 것이니 당시 뽑힌 선수들이 활약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거란 서술이 있었는데, 전술했다시피 당시 뽑은 선수들은 2009 김태훈 외에는 이후로도 마땅한 활약이 별로 없었다.오히려 김성근에 대한 비판으로 김광현, 최정이 각각 투수조, 타자조 막내였다는 것이 많이 나오는 비판인데, 김광현이 2007년 지명이었고 최정, 정근우가 2005년 지명이었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김성근 시절 들어온 선수들은 경험치를 쌓아야 할 시기이니 1군에 못 드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자신이 들어오기 직전 지명된 선수까지 모두 활용한 김성근은 선수를 못 키웠다는 비판이 나올 건덕지도 없어진다.

이 과정에서 김성근은 타 팀에서 방출된 가득염, 안경현, 윤재국을 자유계약으로 데려오고, 최동수, 권용관, 안치용, 이재영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는 등 노장 선수를 열심히 수집하여 빈 뎁스를 메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프런트와 지속적으로 충돌하였다.[3]

2.2. 프런트와 김성근의 대립

또한 팬덤 내에서는 자기 팀의 야구를 옹호하고 보호해야 할 프런트가 언론을 통해 앞장서서 김성근의 야구를 비난했으며, SK 와이번스 신영철의 막걸리 야구 발언이 그 대표적인 예라는 주장이 나왔다.

사실 양측간 대립의 시작은 2006년 계약과 2008년 재계약부터 시작이었다. 2007년 SK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부터 프런트에서 그의 사단도 아니며 원하지도 않은 이만수를 수석 코치로 부임시켰고,[4] 타 팀 감독의 계약기간이 3년인데 반해 2년 단기 계약을 맺었으며, 2007 시즌 초 홈구장 만원 사례에 마치 팀의 간판인 것처럼 대규모 팬티 퍼포먼스를 벌인 것을 볼 때, 프런트의 의도에 따른 2년 후 차기 감독이 이만수인 것은 기정 사실이나 다름없었던 것.

하지만 예상 외로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2연속 우승을 하며 최고의 성과를 거뒀고, 그에 따라 2009년 3년 재계약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단 내 김성근 감독의 영향력도 커지게 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고 볼 수 있다. 2009년 이만수가 1군 수석코치에서 밀려나 2군 감독으로 이동하게 된 것도 그러한 맥락으로 해석 가능하다. 게다가 재계약 후 나온 당시 신영철 구단 사장의 막걸리 야구 발언, 김성근 감독의 이진영 등 FA 유출과 소극적인 영입 태도에 대한 구단에 불만을 나타냈던 것은, 당시까지는 그러려니 넘어갈 문제였지만 이 시기 들어서는 이것이 프런트와 감독간 파워 게임을 하는 이상기류였다는 것이 파악되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 달리, 애초에 2011년 초 SK는 "감독 최고 대우는 당연하다"며 김성근 감독 재계약을 천명한 상태였다. # 하지만 정작 언론에는 그렇게 말해놓고 재계약 관련해서는 계속 지지부진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정작 김 감독이 아닌 이만수의 거취 문제 등을 주로 이야기하며 같이 갈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

어떤 의미에서는 애초에 같이 갈 수 없는 동거였다. 특히 김성근 감독은 OB 시절 OB 프런트가 이광환을 내세우면서 자신을 몰아내는 과정을 이미 겪었던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대놓고 차기 감독인 이만수와의 파워 경쟁은 필연이었던 것. 심지어 재계약 과정에서까지 프런트가 자신보다는 이만수 거취를 오히려 더 이야기하는 상황 속에서, 김성근은 차라리 그럴 바에는 내가 먼저 나간다라는 결론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3. 발단

김성근과의 재계약에 불협화음이 계속되던 2011년 7월 중순 경, SK 와이번스 공식 커뮤니티인 용틀임 마당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라졌다. 이에 대해 일부 팬들 사이에선 김성근 감독과의 재계약 불발에 따른 파장을 우려하여 커뮤니티를 폐쇄한 것이란 루머가 돌았다.

같은 해 8월 16일, 김성근은 언론을 통해 이번 시즌을 끝으로 감독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밝히며, SK 와이번스 프런트와 계약 과정에서 상당한 잡음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이에 김성근 사퇴를 두고 곳곳에서 상당한 논란이 일어났다. 하루 뒤인 8월 17일, 구단 측은 구단 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즌 중 사표를 제출한 것은 물론 이를 언론을 통해 내보내기까지 한 김성근에게 불만을 표시하며 그를 전격 경질하고, 코치였던 이만수를 감독 대행으로 임명하였다.

4. 전개 형태

4.1. 김성근 경질 이전

김성근이 직접 사퇴 의사를 밝히기 이전까지는 현수막을 내걸거나 재계약을 촉구하는 문구가 적힌 부채를 나누어 주는 식으로 김성근 재계약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2011년 7월 29일 갑자기 SK 와이번스 공홈 게시판인 용틀임 마당이 갑작스럽게 폐쇄되었고, 이에 문학구장 등지에서 이를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김성근이 감독 직에서 경질되면서 일련 운동은 모두 SK 프런트에 대한 규탄과 퇴진으로 변경된다.

4.2. 김성근 경질 이후

4.2.1. 문학구장 소요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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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 프런트 퇴진운동

문학구장 소요사태 이후 용틀임 마당에서 활동하던 팬들의 주도로 만들어진 네이버의 SK 와이번스 팬카페와 디시인사이드 SK 와이번스 갤러리가 연합하여 프런트 퇴진 운동을 진행했다.

이들은 주로 홈 경기 중 프런트 퇴진 구호를 외치거나 현수막을 거는 방식으로 프런트에 대한 항의했으며, 지하철 무가지[5] 등에 SK 와이번스 프런트의 퇴진을 요구하는 광고를 실기도 했다. 이후 지하철 광고를 추가로 추진하려 했으나 서울메트로 측이 거절해서 무산 되었으며, 몇몇은 SK 본사 등지에서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여기에 DTD의 원흉인 막장 프론트에 분노한 LG 트윈스도 가담, 버스 등지에 프론트를 비판하는 광고를 싣고 온오프라인으로 프론트를 규탄하는 일명 스크루지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편 구단 측은 다시금 일어날지 모를 소요 사태에 대비하여 일정 기간 동안 구장 내외부에 전경과 의경을 배치해 두기도 했고, 이런 지속적인 흉흉한 분위기에 위축되어 원정 팬과 가족 단위의 팬이 크게 줄어들자 구단 측에선 퇴진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을 고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

4.2.3. 문학구장 현수막 시위

9월 30일 삼성전에서 마지막 대형 현수막 시위를 벌였다. 해당 현수막을 발견한 심판진은 외야 쪽으로 이동하여 '타자 시야에 방해'가 되니 현수막을 내리라고 지시했지만, 시위를 벌이던 팬들은 이에 불응하였고, 결국 구단 측 보안 요원과 실랑이로 이어지며 약 10분 정도 경기가 지연되었다.

이 과정에서 구단 측의 보안 요원이 시위를 벌이던 팬들에게 폭행을 당하였고, 결국 현장에서 폭행을 가한 2명이 입건되었다. # 그러나 이 와중에도 현장에 있던 팬들은 이는 보안 요원의 헐리우드 액션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또 이 사건으로 인해 여론이 크게 악화되어 시위를 벌이는 이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졌음에도, 일부에선 기존까지 큰 이슈가 되지 못했는데 이번 일로 주목을 받을 수 있었으니 도리어 잘 됐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5. 평가

퇴진 운동 초기의 소요 사태는 분명히 심각한 범죄였으나, 구단에 불지르고 프런트 물러가라 시위 벌이는 행동을 구단의 독단에 맞서 팬의 권리를 찾기 위한 행동이라며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초창기에 각종 광고를 비롯한 시위를 위한 돈을 모으고자 했을 때는 SK팬이 아니면서도 기꺼이 돈을 낸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 그 방증이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롯데, 한화, LG 등 각 구단 팬들은 감독 못지 않게 프런트의 파행적 행보들을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당시 용마 폐쇄 등 소통 자체를 거부한 SK 프런트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폭력과 파행으로 시작한 이 운동은 끝까지 파행이었다. 현수막 시위에서 경기에 방해될 수 있음을 인지했으면서 일부러 대형 현수막을 이용한 시위를 벌이고, 폭력 사태까지 일으키기 시작하여 경기를 즐기고자 하는 팬들과 타팀 팬들을 방해하고 응원 주체인 선수들을 위축시켰다. 그 결과 그전까지 김성근 경질에 반대하고 프런트의 횡포에 분노하며 해당 행위를 나름 긍정하던 대부분의 온건한 팬들조차 퇴진 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매우 커졌다.

더욱이 이후 시위를 주도했던 이들이 모금한 돈으로 방을 잡고, 친목질을 벌였다는 의혹이 계속 제기되고,[6] 시위 주도 세력 간의 알력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기에 이런 분란은 외부로까지 번져 그간 퇴진 운동을 지지하던 팬덤의 의견을 무시, 묵살하며 독선적인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2011년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응원 팀이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지만, 김성근 감독의 부재가 드러나기 위해 성적부진을 바라거나, 프런트 교체를 넘어서 구단 해체까지 바라는 강경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이들은 초기 범야구팬의 지지 기반을 모두 잃었으며, 아예 이를 김성근 개인 팬질의 일환으로 취급되었다. 이런 상태까지 오자 결국 2011시즌이 끝난 후에는 흐지부지되며 중단되었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SK 와이번스 팬덤은 김성근 감독에 대한 호감과 프런트에 반감을 갖고 있지만 선수들이 있는 한 계속 팀을 응원하는 온건 팬덤 층과 김성근 개인 악성팬으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김성근이 한화 감독으로 영입된 이후 처절하게 실패한 지금은, 노리타를 제외하면 이 운동에 긍정적인 팬덤은 사실상 소멸하였다.

다만 아쉬운 점은, 해당 사건이 지나친 강성 팬덤에 의해 변질되면서 정작 진짜 이야기해야 할 바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다는 점. 당시 퇴진 운동은 본질적으로 팬덤의 의사에 반하여 움직이는 구단, 그리고 경영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그렇다 했을지라도 그 과정에서 소통까지 차단하는 프런트에 대한 반발로 시작한 것이었으며 그 주장에는 나름의 정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지나친 폭력 행위로 반감을 샀으며, 김성근이라는 개인에 대한 충성도가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제일 중요한 프런트 비판에 대한 의식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김성근이 사라진 팀에 대해서는 승리조차 반대하는 형태로 이어졌고, 이는 그래도 선수와 팀을 사랑하는 팬덤과 강경파의 분화로 나아갔다. 결국 프런트가 태도를 바꾸기도 전에 해당 운동은 내부 분열로 자연스레 소멸해버리면서, 프런트가 팬덤과 소통하도록 만드는 실질적 목적까지는 나아가지도 못하고 종료되었다.

[1] 김성근이 갓 부임해 투수 FA 잡아달라 할 때 최향남 제시했다고 SK 프런트가 욕먹었지만, 그 해에 투수 FA 다 털어봐야 박명환, 전병호, 김수경, 권준헌에 SK의 내부 FA인 김원형 뿐이었다. 2007년 이후로도 투수 매물은 한동안 손민한, 최원호(이상 2009), 배영수(2011)같이 상징성이 강하거나 선수생활 막바지라 다른 팀이 잡을 수 없는 선수들 뿐이었다. [2] 그나마도 이쪽은 트레이드 후 LG에서 터졌고, 심지어 승부조작과 연루되며 금지어로 전락하였다. [3] 다만 여기서의 프런트는 어느 정도 인정해줘야 하는 것이, 당시 4:3으로 트레이드된 윤요섭, 박현준, 김선규는 나이는 좀 있기는 하였으나 유망주급이었고 최동수, 권용관, 안치용, 이재영은 누가 봐도 노장들이었다. 당장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는 마이너스인 트레이드였던 것. 다만 해당 트레이드는 박현준의 승부 조작, 새로 들어온 노장들의 2011 준우승 공헌으로 SK의 완벽한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4] 심지어 이만수는 삼성 시절부터 김성근과 썩 좋지 않은 관계였다. [5] 출근 시간 지하철 역사 출입구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료 신문 [6] 꼭 이것만이 아니라도 돈의 사용처가 비교적 투명하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꾸준히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