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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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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기타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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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32년부터 1270년( 고종 19년 ~ 원종 11년)까지 여몽전쟁 중 38년간 고려의 수도였던 강화도의 옛날 이름. 별칭으로 강경(江京), 강화경(江華京)이 있다. 강화도 천도이후, 내성, 중성, 외성의 3중성으로 이루어졌으며 당시에는 황도(皇都)[1]로 불렸던, 임시수도가 아닌 엄연한 정식 수도였다. 강화도의 최정점 시대라고 할수있다.

2. 역사

원래 고려의 양광도(楊廣道) 소속인 강화현(江華縣)이었다. 천도 후 강도(江都) 강화군(江華郡)으로 승격되었고, 본궐이 세워졌다. 강화로의 천도는 무신정권기 대몽항전에서 몽골제국군의 침공을 피하고자 최씨정권의 집권자 최우의 독단으로 갑작스럽게 결정되어 궁궐지나 성의 조성없이 이루어져 전국의 백성들을 징발해서 성과 궁궐 쌓게 되었는데 불과 2년만에 완성되었으며 천도 과정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중에 수도 개경의 모든 거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아수라장이 되었고 직후 이통이 개경에서 반란(이통의 난)까지 일으켰다. 새로운 강도에는 주로 개경에서 넘어온 사람들과 근처의 남경( 서울), 광주( 경기도 광주)에서 합입한 백성 및 피난해온 피난민들이 거주했다.

하지만 한반도 본토를 유린하고 강화도 정부에도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한 몽골 제국에 굴복해 개경으로의 환도와 더불어 내성과 외성, 궁궐 대부분을 허물면서 양광도 인주 소속으로 들어가 강화현이 되었고 그 후 강화부가 되었다. 이후 왜구 병자호란, 병인양요에 의해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어 버렸다.

3. 기타

고려왕릉도 당시 죄다 유골을 여기로 옮겼기도 하며, 고종 홍릉 등 일부 왕릉은 아직도 강화도에 남아있다. 강화도의 고려왕릉은 전쟁통 혼란기에 조성되었기 때문에 왕릉이라고 해도 가 보면 굉장히 초라하다. 이 시기 강도에는 각종 제방이 설치되어 대규모로 둔전제가 이루어지고 각도의 산물이 모여 인구가 10만에 달하는 고려의 대도시였다고 추정된다. 조선 초 한양 인구 20만의 절반이며, 심지어 현재 강화군의 인구보다도 많다!

강화도가 다른 섬보다 넓은 편임을 감안해도 1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먹여살릴 정도로 생산성이 있지는 않으므로 강도시대 둔전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간척도 많이 이루어져 이 시기에 여러 지역의 이 농지로 바뀌었다. 강화도 위성지도를 보면 해안가 지역에서 이 시대 이전에 바다였던 부분을 구별할 수 있다.

4. 관련 문서



[1] 최항 묘지명 중 기록. 원래는 개경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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