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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19:52:05

알카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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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알카에다
القاعدة | Al-Qaeda
파일:지하드 깃발.svg
창설일 1988년
규모 불명
지도자 1대 오사마 빈 라덴[1] (1988 ~ 2011)
2대 아이만 알자와히리[2] (2011 ~ 2022)
3대 사이프 알 아델 (2022 ~ 현재)
참전 소말리아 내전
시리아 내전
사헬 내전
말리 내전
예멘 내전
제2차 리비아 내전

1. 개요2. 명칭의 의미3. 조직 체계4. 조직사
4.1. 배경4.2. 탄생4.3. 9.11 테러 테러와의 전쟁4.4. 아랍 민주화 혁명과 알 카에다4.5. IS와 알카에다
5. 알카에다가 실행한 테러
5.1. 1990년대5.2. 2000년대5.3. 2010년대
6. 이야깃거리7. 매체에서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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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아프간 전쟁 당시 CIA의 지원을 받아 군사 조직으로 성장한 무자헤딘 세력 중 이슬람 극단주의에 경도된 이들이 오사마 빈 라덴을 수장으로 1988년에 설립한 테러 집단. 빈 라덴을 필두로 주요 멤버의 대부분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와하브파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고, 소련에 이은 지하드 대상으로 미국을 선정하여 1998년 아프리카 각지의 미국 대사관 공격과 2000년 USS 콜 테러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해외 미국인들을 넘어 미국 본토 공격에 나서 2001년 9.11 테러를 감행하였다. 이로써 여러 테러 조직 중 하나라고 과소평가하던 미국은 본격적으로 알카에다를 겨냥,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여 소탕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2011년 설립자 빈 라덴이 사살되었고, 그의 측근 아이만 알 자와히리가 후임 지도자가 되었으나 2022년 그 역시 사살된 후에는 과거 임시 지도자였던 사이프 알 아델이 수장으로 있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탈레반이 일시 몰락하며 아프간에서 축출된 알카에다는 내전이 이어지던 소말리아 이라크 전쟁 후 사실상 무법 지대가 된 이라크 등지에 침투하여 세력을 재건하였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에는 중동에 더욱 개입하여 시리아, 리비아, 예멘, 말리 등지에서 득세하였다. 다만 기존에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의 하위 조직이던 ISIL이 칼리파 국을 선포한 후에는 이슬람 극단주의의 선두 주자라는 위상을 잃었다.

2. 명칭의 의미

이름인 "알카에다"에서 "알"은 아랍어의 관사이고, "카에다"는 아랍어로 앉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 "카다(قعدت / qaʕada)"의 파생 단어로 영어식 통용 표기는 Al-Qaeda. 본부, 근간 등의 뜻이다.

3. 조직 체계

지부는 이라크, 예멘, 북아프리카, 차드, 수단, 필리핀, 태국 등 이슬람권이나 혹은 이슬람과 타문화권이 충돌하는 지역 위주로 전세계에 다양하게 퍼져있으며, 서구에서도 알 카에다와 연결된 다국적 테러리스트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인터넷을 이용해 폭탄제조법, 검문통과법 등을 한 큐에 뚝딱 배워 테러를 시도하는 바람에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과연 알카에다가 조직적인 통일성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실제로 반미 과격 테러리스트들의 중소 조직들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형태라고 보는 게 일반적인 연구가들의 시각이다. 일각에선 CIA가 반미 과격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조직들을 데이터화한 데이터베이스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하고 있지만 오사마 빈 라덴의 명백한 존재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일반적이지 않다.

가장 일반적인 설명은, 원래는 강력한 정부조직이 없는 중동의 각 지역의 군벌조직이나 반군들이 알 카에다와는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해 왔으며, 이들중 하나였던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소련에 맞서자,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미국 CIA가 직접 무자헤딘을 지원할 수 없어서 대리로 세운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내세워 무장반군 지원세력으로 투입했다가 처음부터 초강경파 극단주의자였던 빈 라덴이 전쟁 후 국제 테러지원 단체로 변질된 것이 알 카에다라는 것. 이 새로운 방향성이란 바로 미국을 공격하는 것이다. 원래 국제 테러리즘의 역사에서 1991년 이전까지는 소련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국제테러범들은 크게 남미와 중동의 사회주의 집단과 기존 정부군과의 내전에 개입해 재미를 보는 집단이었는데, 소련의 붕괴후 사회주의 군벌집단이 사라지면서 국제 테러집단의 목표가 좀더 소규모 분리주의자들의 테러를 지원하는 것으로 바뀐 것.

다만 오사마 빈 라덴의 목표는 이들보다 훨씬 원대했는데, 각 지역의 테러조직이나 반군들은 당연히 자기 나라 정부와 맞서 싸우는 것이 목표였는데, 오사마 빈 라덴은 이들 지역 정부는 미국의 괴뢰이므로 이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먼저 미국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에 대한 테러'라는 새로운 공통의 목표를 부여하여 이들 지역 테러조직들을 하나로 묶은 뒤 서로 연계되어 지원을 나가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그 정점에 있던 9.11 테러를 통해 오사마 빈 라덴은 전 세계의 자생적 테러집단에 그야말로 슈퍼스타이자 거대 미국에 한방을 먹인 전설과 같은 인물이 되어 자발적으로 알 카에다에 충성하는 추종자들을 양산한 것.

그렇기 때문에 알 카에다를 하나로 묶어주는 오사마 빈 라덴에 맞먹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없다면 금방 연대가 붕괴되고 각자 자기 지역 일에만 신경 쓰는 점조직들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 찾기에 그렇게 혈안이 되었던 것도 단순히 복수를 완수했다는 상징성만이 이유는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2014년에 시리아 내전에서 IS가 알 카에다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이러한 예상은 현실이 되고 있다. IS도 초창기엔 알 카에다보다는 약하지만 이슬람 세력의 통일을 노린다는 원대한 목표를 이상으로 내걸었지만 결국 오사마 빈 라덴급 위상에 따라가진 못하고 지리멸렬하다가 현재는 점조직으로 분열된 상태.

일각에서는 이런 점 때문에 오사마 빈 라덴이 테러를 하지 않고 사업을 했다면 유명한 기업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도 한다. 당연히 실제로도 수많은 기업을 거느리고 알 카에다의 돈줄을 충당했다. 실제 빈 라덴은 사우디의 재벌 가문 출신으로 그의 형제들은 지금도 사우디에서 중장비와 유통사업 등을 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이 소련-아프간 전쟁때 빈 라덴을 세운 이유도 사실 빈 라덴이 영어를 잘해서였다.

4. 조직사

4.1. 배경

왜 이슬람 원리주의가 이토록 폭력적인 집단으로 변질되었냐라는 문제의 원인을 찾으면, 그 시작은 2차대전 이후 제국주의가 철수하고 분할된 중동이 각자 독립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이슬람왕정과 함께 들어선 세속적 성향의 아랍 민족주의[3] 정권에 대한 이슬람 원리주의자[4]의 반발과 대립이 극한으로 치달은 끝에 전쟁을 치르면서 생긴 변화로 볼 수 있다.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는 2차 대전 이후 수십 년간 서로 충돌해 왔다. 2차 대전 이후 독립을 이룬 아랍의 민족주의 정권들은 한결같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대표적으로 중동의 맹주라는 이집트의 사례를 보면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의 쿠데타 이후 집권한 군부독재 정권은 아랍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시리아, 리비아 등과 아랍연합국가 건설을 추진하였고[5], 샤리아 신정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수십 년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슬람주의를 내세운 왕정에서도 원리주의자들은 정권에 불만을 품고 난동을 부렸다. 이들은 서로 지향점이 아예 다를 뿐만 아니라 서로를 실질적으로 가장 큰 위협 대상으로 보았다.

이는, 냉전이라는 당시 시대의 거대한 흐름때문에 당시 석유와 일부 자원 외에 아무것도 없는 중동의 국가들이 독자적 정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절에도 아랍에서 이권을 가진 자들은 석유와 관련된 집단이고, 이들은 일찍이 이슬람 종교집단과 영합해 정치와 종교의 혼재형태로 아랍 민중을 지배해왔고, 비록 식민지긴 했지만 서구의 정치,종교 분리 체제를 경험했다. 따라서 독립 후 기존 기득권은 당연히 이슬람을 내세울 수 밖에 없었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서 정치와 종교의 분리, 나아가 무신론에 가까운 공산주의 체제를 주목했다. 그렇게 가말 압델 나세르등 아랍의 민족주의 공화국들은 초기 공산주의식 군사독재를 통해 기존 이슬람에 영합한 기득권을 탄압해 그들의 힘을 빼려 했고, 그들이 저항하면서 내세운게 오히려 이슬람주의인 것이다.

사실 왕정은 나세르에 대항해 이슬람주의를 내세우긴 했지만, 그곳은 석유가 나는 지역이고 석유 패권을 지배하기 위해 미국과 손을 잡고 미국 중심으로 한 서방에 안정적으로 석유를 공급하는 대신 왕정의 안보를 책임져주고 석유 수익을 독점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서로 동맹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라크나 이란등 산유국임에도 정세가 불안했던 나라는 그 석유를 국유화하려는 민족주의 세력이 결국 공산주의 소련과 무관하지 않기에 미국이 억지로 개입해 무너뜨렸던 것. 그런데 이것이 정작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는 왕정이 돈맛을 보더니 이교도와 손잡고 타락해 자기들만 부를 독점한채 허울뿐인 이슬람주의를 내세운다는 불만을 가졌고, 이란이 결국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지자 이제 다른 왕정도 무너뜨리고 미국도 쫓아내고 이슬람 원리주의로 가자는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각 산유국 왕정이 위기를 느끼고 이들을 탄압할 수 밖에 없었고 원리주의자들의 저항도 거세졌다.


그 갈등에 정점을 찍은 사건이 바로 1979년 11월 20일 이슬람 제1의 성지인 메카 그랜드 모스크를 일단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무장점거해 농성을 벌이던 것을 사우디 군이 유혈 진압한 사태. #. 이슬람중에서도 가장 극단주의 꼴통 집단인 와하비즘을 내세우면서도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슬람 세계에서 그나마 큰형님 대접을 받는 이유란건 단순히 사우디가 돈 많고 힘이 세서가 아니라[6]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의 수호자 역할을 하면서 모든 무슬림들의 종교활동을 후원하고 그들을 먹여살리고 평생 한번 반드시 해야할 성지순례자들을 돕는데 지출을 아끼지 않은 물주 역할을 했기 때문인데[7], 이슬람 제1의 성지에서 성지의 수호자라 자칭하는 사우디 왕가가 같은 무슬림을 총으로 쏴 죽이는 사태를 목도했으니 대다수 무슬림들의 충격과 분노가 하늘을 찌를 수 밖에 없었다. 오사마 빈 라덴이 극단주의에 빠진 결정타가 이 사건이기도 했으니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다. 과거 나세르가 하던 짓을 알라의 이름을 댄 사우드 왕가가 했다니 참을 수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는 단 1명도 없었을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의 분노 여부를 떠나 이때의 충격은, 사우디 왕가에 언제든 이슬람 원리주의와 지하드를 앞세운 왕정반대론자들이 이란의 비호하에 쳐들어올 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심어주었고 이것이 스노우볼처럼 커져 그 이어 터진 이란-이라크 전쟁은 중동 전체에 안보위기를 불러, 끝내 걸프전으로 인해 메카, 메디나를 포함한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이 상시 주둔하게 된 것은 많은 무슬림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가져왔다.

이런 왕정의 탄압에 무슬림 형제단 등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1981년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으로 응답하는 막장 상황이 더 펼쳐졌다.[8] 이라크를 통치하고 있던 사담 후세인 바트당 정권이나,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도 마찬가지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큰 갈등을 빚었다.

중동의 왕정들이 위기의식을 느낀 것과 별개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하고, 그 다음엔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며 중동은 혼란에 빠지고, 당장에 없애야할 주적이 생긴 원리주의자들은 소련을 물리치기 위해 아프간으로 모여 무자헤딘을 결성했고 이를 미국이 지원하는 아사리판이 펼쳐진 상황. 이때만해도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 극단주의에 자극을 받았지만 일단은 영어를 할 줄 알고 사우디 명문 가 출신이라는 점으로 인해 미국에 간택되어 무자헤딘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가면서 투쟁 방향을 상실한 아프가니스탄 참전 무슬림들에게 이슬람 원리주의는 투쟁 방향을 제시하는 효과를 일으켰다. 거기다, 1년 뒤 소련의 해체는 냉전시대 체제경쟁의 산물중 하나였던 국제 테러리즘의 돈줄이 하나 끊겼다는 걸 의미한다. 이로 인해 세계 각지에서 생계형 테러를 일삼던 국제 테러 조직원들이 새로운 밥줄을 찾기 위해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로 모여들었고 이 시기에 빠르게 조직을 키울 수 있었다. 오갈 데 없던 무자헤딘들이 반미성전이란 기치하에 알 카에다를 중심으로 결집해 새로운 일자리를 찾은 것이다. 문제는 10년 동안 총과 폭탄으로 전장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게 결국 또다른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알 카에다는 새로운 전쟁터를 찾기 시작했고 국제 테러리즘과 영합해 중동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장했다.

4.2. 탄생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국은 돌풍작전(Operation Cyclone)이라는 이름으로 파키스탄 정보부(ISI)[9]를 통해서 소련에 저항하는 아프간 내 무자헤딘에게 자금과 무기지원을 하고 있었다. 이슬람 국가들도 이에 동참하였는데, 사우디아라비아는 매년 600만 달러를 지원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특히 무슬림 형제단 단원이었던 압둘라 아잠(Abdullah Azzam)과 그의 제자 오사마 빈 라덴이 창설한 마크탑 알-키타맛(Maktab al-Khidamat,MAK)은 사우디아라비아와 ISI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막대한 자금(당시 기준으로 1년에 최대 6억 달러까지 동원 가능했다)을 이용해 무기를 공급하고 해외에서 오는 무자헤딘 대원들을 훈련시켰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이 배후에서 지원을 하고, ISI가 이를 현장에서 지휘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는 무자헤딘 알선책 역할을 담당했다. 즉,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랍 국가에 득시글한 실업자들을 막대한 돈으로 고용해 아프가니스탄에 무자헤딘으로 보내고, ISI는 미국에서 오는 지원의 분배 및 이슬람 국가에서 고용된 실업자들에게 미제, 중국제, 이집트제 무기를 한가득 쥐어주고는 무자헤딘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파키스탄 대사관에서는 하루에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비자를 내주었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은 하루에만 비자를 수백 명씩 받아갈 정도로 극도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도 아닐 뿐더러, 하루에 비자 수백 개를 발급한다는 것은 실상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마구 비자를 '퍼주었다는' 의미다. 즉 이들의 탄생에는 미국과 두 이슬람 국가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의 지대한 공헌이 있었다.

전쟁 이후, MAK는 막대한 자금력을 이용하여 많은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들을 끌어들었으며 미국으로부터 수백만 달러씩 지원받던 이슬람 과격주의자이자 마약상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의 이슬람 무장 단체인 '헤즈비 알 이슬라미(Hezb-e Islami, 이슬람당)'가 1990년대 초부터 빈 라덴과 손을 잡기 시작하면서 세력은 급속도로 커졌다.

압둘라 아잠은 MAK가 본격적인 이슬람 무장 단체로 발돋움하길 원했고, 빈 라덴은 배후에서 무장 단체들의 자금줄을 맡는 네트워크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원했다. 이는 본질적으로 두 사람의 근본적인 목적이 달랐기 때문인데, 아잠은 MAK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아프간을 지배하고 재건하길 원했으나, 빈 라덴은 MAK의 기존 역할을 유지하며 중동 이슬람 혁명을 확대하는 것을 원했다. 이 차이로 말미암아 스승과 제자 사이는 멀어졌으며, 1988년 중반 이후 갈등은 극에 이르렀는데, 이에 빈 라덴은 우선 자기 세력을 가지고 알 카에다를 창설한다. 1989년 압둘라 아잠이 암살된 이후 MAK는 알 카에다에 흡수된다.

1988년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된 해외 무자헤딘들은 투쟁 방향을 상실하고 혼란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주적 소련이 물러난 이후,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누구를 위해 누구와 싸울지 목표가 없어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참전한 무슬림들은 주로 이집트, 알제리,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 출신이었는데, 이들 국가에서는 이들 무자헤딘들이 돌아오면 감시, 체포, 감금을 일삼고 있었다. 이슬람 원리주의 성향이 강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대규모 게릴라전 경험을 쌓고 온 무자헤딘들을 각 나라의 독재 정권들이 껄끄러워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다수 아랍 국가들이 정권의 무능으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침체되면서 실업자가 넘쳐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자헤딘 입장에선 본국에 돌아간다고 해서 뭔가 뾰족한 상황도 아니었다. 즉 전쟁을 경험한 엄청난 숫자의 전사들이 오갈 데 없는 국제 미아로 전락하면서 그야말로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폭탄이 된 것이다.[10] 문제는 아랍 국가 안에서 아랍 민족주의와의 대결로 터질 폭탄이 미국의 판단 미스로 모두 미국을 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 미스가 미군 사우디아라비아 주둔이었다.

미국과 긴밀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이는 알 카에다가 언제부터 반미, 반유대주의를 표방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전환기는 아프간 전쟁이 끝난뒤 본국 사우디로 돌아가지 못하고 수단에 숨어든 이후부터이며 완전히 돌아 선 건 걸프전 이후라고 보고 있다. 이전부터 미국은 이란 이라크 전쟁 때문에 지속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을 주둔하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이슬람의 두 성지 메카, 메디나의 수호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다른나라 군대가 자국 영토에 주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자국 방위에 불안감을 느낀 사우디아라비아는 결국 이라크로부터 자국을 지키기 위해 미군 주둔을 허용했다. 사실 걸프전 때까지만 해도 미군 주둔은 쿠웨이트 회복을 위한 일시적인 조치로 여겨졌지만, 걸프전 종료 이후에도 사우디 왕가와 미국 간의 합의에 의해서 미군 주둔이 계속된다. 처음에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략하자 한참 수단에서 이슬람주의 테러활동을 했던 빈 라덴은 사우디를 지키겠다며 국왕에게 알 카에다의 참전 허락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고, 결국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진군하자 빈 라덴이 격노해 반미주의 노선을 확립함과 동시에 테러단체로서의 변환도 꾀한다.

4.3. 9.11 테러 테러와의 전쟁

1990년대 이후 알 카에다는 미국을 겨냥한 테러 사건을 잇달아 일으켰다. 1997년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에 폭탄 테러를 가했으며, 빌 클린턴 정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알 카에다의 거점으로 간주되던 아프가니스탄의 훈련기지와 수단의 제약 공장에 토마호크 미사일 공격을 가함으로써 미국과 알 카에다의 갈등은 극단에 이르게 된다.[11]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경고가 있었지만 미국은 알 카에다에 대한 초기 대응을 확실히 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먼저 이들을 너무 만만하게 보았고, 두번째로 90년대에는 오직 미국을 겨냥한 테러만 잇달아 일어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아랍 민족주의 정부들을 향한 무수히 많은 테러 속에서 미국과 연관된 몇 건의 테러가 있었던 것이었다. 세 번째로 소말리아 파병이 모가디슈 전투라는 참담한 실패로 종말을 고하면서 국제적인 군사 개입을 꺼리고 있었기 때문에 독자적, 적극적으로 알 카에다를 토벌하기에는 껄끄러운 상황이었다.

즉 미국이 알 카에다에 대한 초기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이유는, 이슬람 내부 국가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다 불똥이 미국에게 튀는 일은 그 전까지 계속 있어왔던 일이었기 때문에 알 카에다를 초기에 때려잡는 게 아니라, 여지껏 그래왔던 것처럼 아랍 국가 정부를 지원해 아랍 국가가 알아서 때려잡도록 소극적인 대응을 했던 것이다. 이는 걸프전에서도 나타난다. 사담 후세인이 무조건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영토에 다국적군을 단 하나도 배치시키지 않았다.

2000년에는 자폭 보트를 이용해 예멘에 주둔한 미 군함 USS 콜(Cole)[12]호의 오른쪽 선체에 구멍을 내고 미 해군 17명을 죽게 하고 30명을 부상시키는 등 알 카에다의 테러는 과격을 치달았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알 카에다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파일:external/rekisi.amjt.net/o0510039311663033287.jpg

하지만 2001년 9월 11일, 흔히 9.11 테러라고 부르는, 4대의 여객기를 납치하여 미국의 뇌와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뉴욕시 세계무역센터 워싱턴 D.C. 펜타곤에 충돌을 일으키고 백악관을 노린 비행기 납치를 저지르는 희대의 테러를 일으킴으로써 알 카에다의 이름은 전 세계인들에게 각인되었다.

조지 워커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알 카에다를 겨냥하여, 전 세계 모든 테러를 근절하겠다는 소위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알 카에다의 본거지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하면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서막을 알렸고, 곧바로 알 카에다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연관이 있다는 언플을 시작으로 대중을 선동하면서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기나긴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다.

2009년 10월, 이들은 중국 위구르 사태에 개입하겠다고 하면서 세계를 긴장시켰다. 이어서 2010년 4월 10일, 이들은 6월 남아공 월드컵에 테러를 가하겠다고 경고했다. 목표는 6월 12일 열린 C조의 영국(잉글랜드)- 미국 경기. D조에 속한 독일 프랑스도 테러 목표물로 언급되었다.
"경기장에 관중이 가득 찬 가운데 미국-영국전이 생중계되는 도중 폭발음이 진동하고 경기장이 아수라장이 되면서 수십, 수백 명의 시신이 뒹굴게 되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 될 것인가"
하지만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은 테러 없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그러던 2011년 5월 2일, 끈질긴 추적 끝에 파키스탄에서 오사마 빈 라덴 CIA가 입안하고 미국 내 최정예 특수부대가 실행한 넵튠 스피어 작전으로 사살당하면서 리더를 상실하였다. 당시 빈 라덴 사후 알 카에다를 이끌 유력 후보로는 조직 내 2인자인 알 자와히리와 뛰어난 화술로 '설교 전문가'로 자리매김한 안와르 알 올라키가 꼽혔다.

결국 안와르 사다트의 암살을 뒤쪽에서 조종한 실력자인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공식적으로 알 카에다를 이어받았다. 알 자와히리는 아잠과의 내분에서 빈 라덴의 편을 들은 심복이며, 이집트에서 지하 무장 단체를 이끌며 무바라크에 대항하였다. 알 자와히리는 수니파 극단주의자인 만큼 대외적으로는 이란을 비난하였지만, 무바라크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이란과 협력을 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알 자와히리에 반발을 들고 있는 알 카에다 세력도 있기는 있다.

그리고 소말리아 지역의 책임자이자 알 샤바브 민병대의 최고 지휘자인 파줄 압둘라 모하메드(Fazul Abdullah Mohammed)가 소말리아에서 사살되었다.

현지 시간으로 2011년 6월 8일에 알리 데레(Ali Dere)와 함께 4만 달러와 의약품, 랩톱, 휴대전화와 여권을 차에 싣고 아프구예(Afgooye) 부근을 지나던 도중에 소말리아군의 검문소에서 정지하지 않자, 소말리아군이 즉시 사격을 가해 두 사람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 소말리아와 미국 관리들이 죽음을 확인했다.

빈 라덴 이후 2인자로 부상한 아티야 압드 알-라흐만(Atiya Abd Al-Rahman)이 2011년 8월 22일 파키스탄에서 무인기 공습을 받고 사살당했다. 파키스탄 내에 있는 알 카에다는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세력이 약화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011년 9월 30일 안와르 알 올라키가 예멘에서 CIA가 무인기를 대거 동원한 폭격을 받고 사살되었다. 알 올라키의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이 작전의 성공은 빈 라덴의 사살에 이어 알 카에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큰 효과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알 카에다와 연계된 단체인 보코 하람이 테러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북부 나이지리아에서 활동하며 니제르를 비롯한 서아프리카에 훈련 캠프를 차리고 무기를 공급받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2011년 8월 26일 유엔 본부를 테러해 악명을 떨쳤으며 같은 해 12월 25일 교회를 공격했다. 계속된 공격에 나이지리아는 2012년 1월 1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하지만 보코 하람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나이지리아 정부군도 막장이라 보코 하람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나 해주고 있다.

2015년 6월, ISIL에 밀려서 콩라인이 되었던 알 카에다가 결국에는 ISIL의 쿠데타에 의해 조직이 붕괴하였다고 한다. 한때 세상에 악명을 떨치던 알 카에다가 ISIL에 의해 몰락했다는 것은 ISIL이 얼마나 거대화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015년 6월 12일, 알 카에다 아라비아반도 지부(AQAP) 수장인 나시르 알 우하이시[13] 예멘에서 사살되었다.

2017년 12월 미군과 아프간군은 아프간의 알 카에다를 공격하여 알 카에다 남아시아 지부의 2인자 오마르 케타브와 알카에다 대원 80명을 사살하고 27명을 체포했다. #

2019년 2월 22일에 프랑스군은 말리에서 알카에다 조직 수장인 야히아 아부 엘 하마메를 제거했다고 발표했다. #

2020년 6월 4일에 프랑스의 파를리 국방장관은 말리에서 알카에다 북아프리카 지부의 수장인 압델말레크 두르크델을 말리의 알제리 국경 근처에서 제거했다고 밝혔다. #

IS 산하 단체와 알카에다 연계 단체가 서아프리카에서 서로를 배신자라 부르며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했다. #

알카에다의 이인자인 아부 무함마드 알마스리가 2020년 8월에 테헤란에서 이스라엘측에 의해 암살됐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이란측은 부인했다. #1 #2 이란의 국영통신은 알마스리가 이란이 아닌 아프간에서 아프간 국가안보국에 사살됐다고 아프간 외무부 차관을 인용해 보도했다. #

알카에다가 미군 철수가 예정된 아프간에서 탈레반과의 협력을 통해 세력 회복에 나설 가능성을 시사하고 나섰다. #

2022년 8월 2일, 알 카에다의 현직 지도자인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의 드론 공습으로 제거되었다. 아이만 알자와히리는 오사마 빈 라덴과 함께 알 카에다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911 테러에도 관여하였다. #

4.4. 아랍 민주화 혁명과 알 카에다

아랍의 봄으로 혁명 열기가 뜨거운 아랍권으로 알 카에다가 다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국가가 모든 기능이 정지되고 혼란이 일어나면서 알 카에다가 사회에 침입할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냐는 것.

하지만 시민 혁명이 성공하면 오히려 알 카에다에게 큰 타격이 된다는 분석도 있다. 알 카에다에 들어오는 자들은 억압된 사회에 분노해 들어오는 이들이 많은데 튀니지 혁명으로 테러가 아니더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인식이 아랍 주민들에게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 시민 운동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면 굳이 테러 단체에 들어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

또한 알 카에다는 원리주의 집단이라 민주화를 이슬람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민주화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대놓고 '테러는 몰라도 민주화는 안된다 #'고 성명을 발표할 정도. 어찌 보면 알 카에다에게는 미군과의 전투보다 더 큰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본인들은 리비아 민주화 운동 전폭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말과는 달리 많은 것을 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 '리비아 이슬람 전사단' 같은 알 카에다와 연계된 단체가 혁명군으로 참전하기도 했으며, 유출된 무기들이 다량으로 예멘 내 알 카에다로 흘러들어간 것이 확인되어 리비아에서 알 카에다가 개입한 것은 기정사실이다. 또한, 이후 이 리비아, 알제리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지하드를 모집, 투아레그족과도 협력하면서 말리, 니제르, 부르키나파소를 초토화시킨 사헬 내전을 일으켰다.

예멘에서는 알 카에다 아라비아반도 지부(AQAP)가 혼란을 틈타 예멘 내 무자헤딘 세력과 결합하여 샤리아의 군대(Ansar Al-Sharia, 안사르 알 샤리아)라는 이름으로 남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소수지만 장갑차 탱크 같은 기갑전력도 확보한 것으로 보이며 예멘 정부군이나 민주화 세력을 구분하지 않고 다 공격하고 있다. CIA가 드론 공격으로 견제하고 있지만 이들을 막기엔 역부족인 것이 현실. 현재도 수니파-시아파 사이의 내전을 벌이고 있는 예멘 상당수 지역을 장악하고 강압적인 샤리아 통치와 함께 온갖 막장짓들을 저지르고 다니고 있는 중이다.

시리아 민주화 운동을 돕기 위해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병력을 이동 중이라고 한다.

4.5. IS와 알카에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IS)는 원래 알카에다의 하위조직으로 시작했다. 이라크 지역에서 규모를 키워나가 결국 독립했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영향력은 알카에다보다 압도적이어서 젊은 층들을 끌어들여 결국 칼리프를 선언하고는 이슬람 국가를 세워버렸다. 이라크에서 알카에다 직속인 알누스라 전선이 이슬람 국가와 교전을 벌이기도 하는 상황이지만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는 할 수 없을 듯.

사실 빈 라덴을 시작으로 알카에다의 핵심 간부들이 미국의 공격으로 차례차례 사살되는 등, '알카에다'를 내건 활동은 미국의 지속적인 암살과 무인기 공격으로 심각한 압박을 받았다. 이후의 알카에다 간부들은 테러 활동을 꾸미기보다는 숨어다니기 급급한 것이 현실이었다. 그나마 빈 라덴은 이름값이라도 있었지, 빈 라덴 생전에 제2인자로 현재 빈 라덴의 후계자로서 알 카에다를 이끄는 알 자와히리는 원래 빈 라덴만한 카리스마가 없었던 데다가 숨어다니면서 변변한 활동을 하지 못한 탓에 9.11 테러로 쌓았던 테러계에서의 '악명'도 점점 빛이 바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이슬람의 거악이 미국을 상대한다는 알카에다의 구호보다, 전 세대 지도자들이 죽어나간 뒤 새 지도자들이 외치는 '바다 건너 멀리 있는 미국을 상대하는 비현실적 목표보다는 작금의 중동을 통일하기 위해 내부의 배신자, 분리주의자들을 제거하자'라는 IS의 구호가 테러리스트에게 훨씬 와닿다보니 이쪽이 더 어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대로는 알 카에다는 신세대 지하디스트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그저 망상에 빠진 퇴물들의 모임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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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저리 비켜라, 꼬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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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에 '아이만[14]의 알카에다 신병 모집소', " 911팀에 들어오라" 고 쓰여있다.
그리고 칼리프 국가를 향해 나아가는 ISIL의 거대한 전차가 알카에다 수장 아이만 자와히리에게 진흙탕물을 튀기고 있는 만평.
알카에다가 지하드 전선에서 퇴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풍자였는데, 몇년 못가 ISIL이 더 거하게 몰락해 버리면서,
2010년대 후반 들어 잔존 알카에다가 그나마 나은 형편이 된 상황이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이 예측은 IS가 알카에다의 시리아 내 하부조직인 알누스라 전선의 영토를 무혈로 삥뜯고 주민들을 추방하면서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 같은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인지, 아직 알 카에다에 우호적인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탈레반들과 협력하여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인도, 동남아시아로 지부를 확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014년 9월 6일, 미국을 공격하기 위하여 파키스탄군의 해군 함정을 탈취하려는 목적으로 침투를 시도했다가 들통나 실패로 끝났다. 기사.

2015년 한해 테러 공격으로 1620명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전세계 테러 조직 중 4위이다. 나머지는 ISIL 보코 하람, 탈레반으로써 여전히 꾸준한 테러 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기에 IS가 이라크, 시리아 및 지역 일대에서 몰락하는 동안, 잔존 세력 및 기타 반군들을 끌어들이며 조직 재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다.

카부델가두 분쟁을 비롯해 아프리카로 대안을 돌린 IS와 여러차례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말리에선 서로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전투를 벌이곤 했다. #, #

5. 알카에다가 실행한 테러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30여년간 전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테러공격을 계획, 실행했다. 가장 활동이 활발했던 때는 2000년대로, 9.11 테러를 기점으로 전 세계 각지에서 테러활동을 벌이면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경계대상이 되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사망과 ISIL의 등장으로 이전보다 활동이 줄고 세가 쪼그라들었으며, 이 때문에 2020년 이후에는 별 다른 테러를 일으키지 않고 있다.

5.1. 1990년대

5.2. 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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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국제공항에서 전시중인 팬티 폭탄 모형

5.3. 2010년대

6. 이야깃거리

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인터넷상에 자신들이 그 사건을 일으켰다는 식으로 성명서를 발표하는 게 일반적인 패턴이다. 문제는 아랍권의 대표적 뉴스 채널인 알자지라를 통해서 이런 발표를 하는 탓에 한때 서구에선 알 자지라가 알 카에다의 선전 방송국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17]

초거대 입자가속기에 근무하던 과학자 중에 알 카에다 일원이 발견되었다. 하필이면 입자가속기라 하프라이프를 생각한 사람이 적지 않았던 듯. 그러나 그 과학자는 가속기에 대한 테러보단 공격 시설이 될 만한 프랑스 시설들의 정보를 내보내는 게 임무였다.

심지어 헬게이트 소말리아에도 이슬람 극단주의 반군 알샤바브가 알 카에다와 연계하여 소말리아의 알 카에다 테러단체로 활동 중이다. 알 카에다의 조직이 대체로 그렇듯이, 이는 알 카에다가 소말리아에 진출했다기보다는 기존의 이슬람 군사조직이 알 카에다와 연계한 것이다. 7천명 규모로 정부군, UN 평화유지군과 전투 중이며 해적 산업에도 관련이 있으며 우간다에서 연쇄테러를 일으키고 모가디슈 근처에서 군 퍼레이드까지 펼쳤다. #

알샤바브는 2011년 동아프리카 대기근 사태에서 구호단체 NGO들을 서구제국주의의 첨병이라고 간주하여 쫓아내는 병크를 저질렀고, 결국 그들이 점령 중인 소말리아 남부 지역은 최악의 식량 부족을 맞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일이 빚어졌다. 이는 2012년에도 계속 되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정작 자식들한테 "절대 알 카에다에 가입하지 말고 서방대학에서 공부, 졸업 후 직장을 얻고 아내(남편) 얻고 잘 살아라"라고 유언을 남겼다는 말이 있다.

이들이 만드는 선전물로 Inspire이라는 영문잡지가 있다. 이곳에는 사제폭탄을 만드는 방법이 상세하게 나와있고 미국 내에 자생적 테러리스트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테러리스트들은 알 카에다와 연관이 없으므로 추적하여 잡기도 힘들기 때문에, 미 정보당국의 새로운 골칫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퓨 리서치 센터의 2012년 조사를 보면 중동 사람들도 알 카에다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고 한다. "Unfavorable"이라 답변한 비율이 이집트에선 71%, 터키에선 73%, 레바논에서는 98%에 달했다. 이는 이상할 것도 없는 현상인데, 전 세계적으로 아랍인을 알 카에다 조직원으로 싸잡아보는 경향이 생기는 바람에 아랍인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더욱 차별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 카에다는 ISIL보다는 조금 낫다. 오죽하면 ISIL의 수장에게 미국 정부의 현상금을 훌쩍 뛰어넘는 $25,000,000을 현상금으로 내걸었을 정도였다.

거의 언제나 무차별적으로 살인과 학살행위를 자행하는 ISIL에 비해 알 카에다 계열 무장단체들은 그들의 관점으론 이교도 내지 이단인 시아파 기독교인이더라도 무조건적인 포로 학살과 점령지에서 민간인의 대규모 학살만큼은 꺼리는 경향이 있다. ISIL의 전신이 이라크 알 카에다라는걸 생각하면 거기서 거기고 개별 지도자나 지역 조직이 포로와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적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알 카에다 추종자들은 정부군의 차량에 폭탄을 터트리고 반 알카에다 유력 인사를 암살하기는 해도 ISIL 추종자들처럼 이교도의 마을을 습격해 방화하고 주민들을 모조리 참수하는 경우는 드물다. ISIL 추종 세력이 아프리카에서 늘어나기 시작한 2020년대 이후 거의 매일매일 IS 지지 무장단체들이 비무슬림 마을을 습격해 방화와 참살을 일상적으로 저지르고 현장을 인터넷에 업로드해 선전하는걸 생각하면 알 카에다의 악행은 상대적으로 덜하다. 포로 대우에서도 차이가 어느정도 드러나는데, ISIL 추종자들은 포로 역시도 협상조차 없이 학살하는 경우가 잦은 반면 알 카에다는 덮어놓고 죽이는 경우는 적다. 대신 금전적인 요구나 포로 교환 제안을 하거나 외국군의 경우 철수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는 등 조금 더 지능적인 면모를 보인다. 9/11 테러와 런던 지하철 폭탄테러 등을 자행한 이상 알 카에다도 필요하다면 민간인을 스스럼없이 해치는 극악한 광신도 테러리스트들임을 부정할 수는 없어도 알 카에다는 겨 뭍은 개라고는 할 수 있는 셈.

2019년 2월 14일 뉴스에 보면 알카에다 무장 조직원들이 한국에 들어오려고 시도중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유엔 보고서에서 우즈벡 노동자 중 극단주의 출신 인물들이 한국에 들어오려고 시도하는 모양이다. 유엔 "알카에다 무장 조직원들, 한국 입국 시도" 물론 우즈베키스탄 본국 역시 이슬람 극단주의를 적극 억제하는 상황이라서[18] 극단주의자들 입장에서 상황은 녹록하지 못한 편이다.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 탈레반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2022년, 오사마 빈 라덴의 후계자인 2대 지도자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미군의 드론 공습에 의해 사망했다.

7. 매체에서

실제 사건들을 바탕으로 한 게임 메달 오브 아너와 후속작 메달 오브 아너: 워파이터에서 등장한다. 메달 오브 아너 리부트작에선 막상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원인임에도 사용하는 언어로나마 탈레반과 구분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많지 않을 것이므로 대개는 나오는지도 몰랐을 것이다.[19] "늑대들과 함께 질주를" 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나오며, 탈레반과 구분하는 방법은 뭔가 이슬람 테러리스트 같이 생겼지만 탈레반과 다르게 복장이 현대적인 놈들. 후속작 워파이터에선 비중이 커져서 아라비아 지부(AQAP)가 주적으로 등장. 두목은 빈 라덴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나온다.

모던 워페어 리부트판에서는 모티브를 딴 조직이 알 카탈라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약자도 똑같이 AQ. 다만 사상적인 부분에서 딴판인데, 현실 알 카에다와 달리 생뚱맞게 무정부주의를 내세우는 집단이며, 저지르는 테러의 악랄함을 보자면 알 카에다보다는 ISIL 과 유사한 조직이다.[20] 지도자는 소련-아프간 전쟁 당시 배테랑 무자헤딘이었던 오마르 술라만, 그가 사살된 이후에는 칼레드 알 아사드가 이끈다.

미국 드라마 지정생존자에서는 알 사카르라는 이름으로 등장. 알 수 없는 세력이[스포일러] 저지른 테러에 대한 누명이 씌워졌으나, 멍청하게도[22] 조직의 위상을 위해서 부정이 아니라 자신들이 했다고 큰소리를 치는 바람에 지도자는 독살당하고 나머지는 소탕된다.

왠진 모르겠지만 뜬금없게도 개막장 게임으로 악명 높은 포스탈2와 포스탈 3에서도 등장. 포스탈 2에서는 남녀별로 모델이 한 종류뿐이다.[23] 남자 모델은 오사마 빈 라덴 그 자체다. 특히 포스탈 3에선 어떻게 미국으로 들어왔는지 중동 전통 복장으로 미국 길바닥에서 총질한다.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의 세계관에서는 엄브렐러 사가 붕괴된 이후 원 역사대로 미국에 9.11 테러를 일으키고, 이후 암시장에 유출된 엄브렐러의 잔재를 기반으로 해 유통되는 B.O.W.로 미국과 서방세계의 해외 군사 기지나 자산 등을 노리며 전세계에서 크고 작은 테러를 일으켰으나, 이후 세계관 타임라인에서 언급도 되지 않는 것을 보면 레온 S. 케네디 가 소속된 미국 대통령 직속 정보기관 조직인 DSO와 크리스 레드필드가 소속된 UN산하 대 바이오테러 대응 군사기관인 BSAA와 미군 등의 연합작전 및 참수작전으로 원역사처럼 오사마 빈 라덴이 DSO 혹은 BSAA나 미군 측에 의해 사살되고 잔당들도 괴멸되면서 와해된 듯 하다.

아드레날린 24에선 주인공이 택시를 타기 위해 승차거부[24]하는 택시 기사를 내동댕이 치고 시민들 앞에서 알카에다라고 속인 후 택시를 뺏는다.

학습만화 보물찾기 시리즈의 이집트편에서는 알카기다로 패러디되어 등장한다. 오사마 빈 라덴은 알라덴으로 패러디 된건 덤. 팡이가 경악하는 것으로 보아 만화 속 세계관에서도 위협적인 테러조직인 듯하나 어째 명성에 걸맞지 않게 알라덴 포함 단원이 7명뿐이다. 여담이지만 봉팔이는 이들은 알까기단으로 잘못 부르는 바람에 알라덴에게 매번 갈굼당한다.

8. 관련 문서


[1] 2011년 파키스탄에서 사살됨. [2] 2022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의 드론공격으로 사살됨. [3] 아랍계 기독교인이나 아랍 무슬림 할 것 없이 뭉쳐서 아랍인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며, 종교가 정치나 개인의 사상에 지나치게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보는 사상 [4] 이슬람 종교와 개인의 사상은 뗄레야 뗄 수 없으며 모든 무슬림은 샤리아 율법을 따라야한다. 또한 타 종교에 대하여 불관용해야하며 탄압과 배척이 필요하다는 사상 [5] 1958년 시리아와 이집트는 통일아랍공화국이라는 국가연합을 형성하였으나, 1961년 시리아가 이탈하면서 무너졌다. 리비아, 수단 등과는 논의 단계에서 무산되었다. [6] 오히려 제국주의 시대 사우드 가문은 하심 가문이나 다른 대가문에 비해 싸움 못하는 걸로 유명했다. [7] 일례로 메카에 도달한 모든 이들에겐 무료 식수와 식량이 제공된다. [8] 사다트의 후임자가 당시 부통령이였던 호스니 무바라크이다. 무바라크도 통치 내내 이슬람 원리주의자에 대한 탄압 정책을 고수하였고, 자연스럽게 무바라크에 반대하는 파벌의 대표는 무슬림 형제단 무함마드 무르시와 같은 이슬람주의자들이 맡게 되었다. [9] Directorate for Inter-Services Intelligence [10] 이들은 중동권 외의 다른 이슬람권 분쟁 지역을 찾아서 일종의 군사 고문관이나 용병 같은 일을 하기도 했다. 이들중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 극단주의를 선택했던 오마르 알바시르 수단 공화국으로 향했고, 수단 외에도 이런 무자헤딘의 사례로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보스니아 전쟁, 타지키스탄 내전 등을 떠돌다가 마지막 전장인 체첸 사태에서 "체첸의 사자" 로 불리며 악명을 떨친 이븐 알 하타브가 있다. [11] 다만 수단의 제약공장과 알 카에다 간에 실제로 커넥션이 있었는지는 논란이 있으며, 이 제약공장이 남수단의 거의 유일한 제약공장이라서 되려 남수단 아이들에게 필요한 백신 보급을 끊어버렸다는 비난이 거셌다. 게다가 당시 터진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성추문을 덮어버릴 전투라는 음모론까지 나오면서 웩 더 독이란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1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101 공수사단의 장교 이름이다. [13] 알 자와히리에 이은 알 카에다의 2인자이며, 빈 라덴의 개인 비서를 지냈다고 한다. [14] 알카에다 현 수장인 아이만 알 자와히리. [15] 미국인 5명, 인도인 2명. [16] 911테러 911일째되는 날이다. [17]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권위주의 언론탄압이 넘쳐나는 중동에서 알 자지라는 상당히 정상적인 언론에 속한다. [18] 2011년도 당시 여권을 위조해서 우즈베키스탄에 재입국하던 우즈베키스탄인 한 명이 극단주의 단체와 연관 혐의까지 걸려서 우즈베키스탄 정부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이 때문에 한국 내 이슬람주의자들이 인권 구명운동을 나섰다가 실패한 사례도 있었다. [19] 아군들이 AQ라고 언급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20] 오마르가 이끌던 시기에 한해서, 칼레드가 이끄는 워존 시점의 알 카탈라는 반서방주의와 우르크지스탄 국수주의를 내세운다. [스포일러] 미국 국수주의자 세력들이다. [22] 그 테러로 미국 대통령이 사망하는 바람에 미국의 눈이 뒤집혔다는 것을 생각하면 멍청한 것 맞다. [23] 텍스처의 바리에이션은 있다. [24] 승차거부 사유는 온 몸이 젖어 있어서 승차가 안된다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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