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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16:36:37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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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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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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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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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곤노효에 기요우라 게이고 가토 다카아키 와카쓰키 레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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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 8년(736년) 강하
덴표 11년(739년) 강하
<rowcolor=#FFF>
덴표 11년(739년) 강하
덴표칸포 3년(751년) 강하
덴표칸포 4년(752년) 9월 12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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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칸포 7년(755년) 강하
덴표칸포 9년(757년) 강하
덴표칸포 9년(757년)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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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호지 3년(759년) 복귀
덴표호지 8년(764년) 강하
덴표진고 원년(765년)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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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진고 원년(765년) 강하
진고케이운 3년(769년) 5월 강하
호키 2년(771년)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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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키 2년(771년) 복귀
호키 2년(771년) 7월 복귀
호키 2년(771년) 9월 강하
호키 3년(772년) 12월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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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키 5년(774년) 12월 복귀
엔랴쿠 6년(787년) 2월 5일 강하
엔랴쿠 21년(802년) 12월 27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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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랴쿠 23년(804년) 6월 21일 강하
엔랴쿠 25년(806년) 4월 16일 강하
고닌 5년(814년) 5월 8일 강하
<rowcolor=#FFF>
고닌 5년(814년) 5월 8일 강하
덴초 2년(825년) 7월 6일 강하
덴초 3년(826년) 강하
<rowcolor=#FFF>
강하
덴초 5년(828년) 강하
강하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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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
조와(承和) 2년(835년) 강하
강하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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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와(承和) 11년(844년) 강하
닌주 3년(853년) 강하
조간 4년(862년) 강하
조간 12년(870년) 2월 14일 강하
<rowcolor=#FFF>
조간 12년(870년) 2월 14일 강하
간교 4년(880년) 강하
간교 6년(882년) 강하
간교 6년(882년) 강하
<rowcolor=#FFF>
겐나 8년(884년) 6월 강하
닌나 3년(887년) 8월 25일 복귀
닌나 3년(887년) 8월 25일 취득
<rowcolor=#FFF>
닌나 3년(887년) 8월 25일 취득
간표 원년(889년) 5월 13일 강하
간표 3년(891년) 12월 27일 복귀
<rowcolor=#FFF>
강하
강하
강하
강하
<rowcolor=#FFF>
엔기 20년(920년) 12월 28일 강하
강하
강하
강하
<rowcolor=#FFF>
엔기 20년(920년) 12월 28일 강하
강하
조헤이 6년(936년) 강하
강하
<rowcolor=#FFF>
강하
강하
강하
강하
<rowcolor=#FFF>
강하
강하
강하
강하
<rowcolor=#FFF>
덴랴쿠 4년(950년) 강하
덴토쿠 4년(960년) 10월 2일 강하
강하
고호 4년(967년) 복귀
<rowcolor=#FFF>
조겐 2년(977년) 4월 17일 복귀
강하
강하
<rowcolor=#FFF>
조와(貞和) 5년(1016년) 강하
간닌 2년(1020년) 12월 26일 강하
만주 2년(1025년) 12월 29일 강하
겐에이 2년(1119년) 8월 14일 강하
<rowcolor=#FFF>
지쇼 4년(1180년) 강하
분에이 7년(1270년) 12월 20일 강하
고안 10년(1287년) 10월 4일 복귀
에이닌 2년(1294년) 강하
<rowcolor=#FFF>
분포 3년(1319년) 2월 18일 취득
가랴쿠 3년(1326년) 6월 13일 강하
겐토쿠 2년(1330년) 2월 11일 복귀
랴쿠오 원년(1338년) 8월 11일 강하
<rowcolor=#FFF>
분나 5년(1356년) 1월 6일 강하
게이초 10년(1605년) 강하
게이초 14년(1609년) 강하
간분 3년(1663년) 11월 강하
<rowcolor=#FFF>
간포 3년(1743년) 10월 27일 강하
분세이 9년(1826년) 강하
게이오 2년(1866년) 강하
메이지 21년(1888년) 6월 28일 복귀
<rowcolor=#FFF>
메이지 21년(1888년) 6월 28일 강하
메이지 23년(1890년) 12월 24일 강하
메이지 25년(1892년) 12월 26일 강하
메이지 26년(1893년) 11월 15일 강하
<rowcolor=#FFF>
메이지 32년(1899년) 9월 26일 강하
메이지 34년(1901년) 4월 6일 강하
메이지 34년(1901년) 11월 27일 강하
메이지 36년(1903년) 2월 6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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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7년(1904년) 11월 14일 강하
메이지 39년(1906년) 10월 28일 강하
메이지 41년(1908년) 11월 8일 강하
메이지 43년(1910년) 7월 20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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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44년(1911년) 4월 17일 강하
다이쇼 3년(1914년) 1월 21일 강하
다이쇼 4년(1915년) 4월 30일 강하
다이쇼 4년(1915년) 7월 20일 강하
<rowcolor=#FFF>
다이쇼 4년(1915년) 9월 3일 강하
다이쇼 7년(1918년) 5월 29일 강하
다이쇼 9년(1920년) 7월 24일 강하
다이쇼 9년(1920년) 11월 9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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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12년(1923년) 12월 7일 강하
다이쇼 13년(1924년) 5월 3일 강하
다이쇼 13년(1924년) 12월 9일 강하
다이쇼 15년(1926년) 10월 27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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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15년(1926년) 12월 2일 강하
다이쇼 15년(1926년) 12월 7일 강하
다이쇼 15년(1926년) 12월 13일 강하
쇼와 3년(1928년) 7월 20일 강하
<rowcolor=#FFF>
쇼와 3년(1928년) 7월 20일 강하
쇼와 4년(1929년) 12월 24일 강하
쇼와 6년(1931년) 4월 4일 강하
쇼와 6년(1931년) 5월 12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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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8년(1933년) 1월 17일 강하
쇼와 9년(1934년) 3월 26일 강하
쇼와 10년(1935년) 1월 7일 강하
쇼와 11년(1936년) 4월 1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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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11년(1936년) 4월 1일 강하
쇼와 14년(1939년) 4월 2일 강하
쇼와 15년(1940년) 10월 25일 강하
쇼와 16년(1941년) 4월 15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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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16년(1941년) 11월 7일 강하
쇼와 17년(1942년) 10월 5일 강하
쇼와 18년(1943년) 6월 7일 강하
쇼와 18년(1943년) 12월 29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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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20년(1945년) 4월 22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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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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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25년(1950년) 5월 20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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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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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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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7대
이타가키 세이시로
48-4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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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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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제국 제43대 내각총리대신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
파일:s0001l.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87년 12월 3일
교토부 교토시 가미교구 교토교엔
사망 1990년 1월 20일 (향년 102세)[1]
도쿄도 시부야구 일본적십자사의료센터
재임기간 제43대 내각총리대신
1945년 8월 17일 ~ 1945년 10월 9일
서명
파일:HigashikuniN kao.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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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부모 아버지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어머니 데라오 우타코
배우자 야스노미야 도시코 내친왕
자녀 모리히로 왕 (장남)
모로마사 왕 (차남 / 요절)
아와타 아키츠네 (삼남)
타라마 토시히코 (사남)
학력 육군대학교 (26기)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약력 귀족원 의원
제27대 근위사단 제3보병연대장
제14대 제2사단장
제22대 제4사단장
제10대 육군항공본부장
제2대 제2군 사령관
제2대 방위총사령관
제55대 육군대신
치바공업대학 설립자
제43대 내각총리대신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20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08년 ~ 1945년
최종 계급 대장
참전 중일전쟁 }}}}}}}}}
1. 개요2. 생애
2.1. 출신 배경2.2. 종전 이전2.3. 허수아비 내각2.4. 총리 사퇴 이후
3. 기행4. 가족5. 창작물

[clearfix]

1. 개요

일본 제국 구황족( 고후시미 천황의 18대손, 히가시쿠니노미야), 군인, 정치인, 제43대 내각총리대신. 1947년 신적강하 이전의 이름은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東久邇宮稔彦王).

일본 최초의 세습친왕가(世襲親王家)인 후시미노미야 가문의 자손이다. 정확히 말하면 후시미노미야의 20대 당주인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4남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의 9남이다. 즉 후시미노미야에게 있어 분가의 분가인 셈이다. 일본 역사에서 유일한 황족 출신 총리다. 근대 일본에서는 황족은 어지간하면 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고 전후에는 아예 황족의 피선거권도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황족 출신 총리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102세에 사망하여 메이지 20년에 태어나 헤이세이 시대의 개막까지 보았다. 일본 근현대 메이지 - 다이쇼 - 쇼와 - 헤이세이 네 시대를 모두 겪었다.[2]

장제스, 에리히 폰 만슈타인, 버나드 로 몽고메리, 에르빈 슈뢰딩거 등의 인물과 동갑이며 쇼와 천황보다 14살 연상인데 모두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보다 먼저 죽었다.

2. 생애

2.1. 출신 배경

일본 황실에서 친왕의 호칭을 쓸 권리는 직계 황족에게만 한하며 그 외에는 왕(王)의 칭호를 쓰지만 후시미노미야, 가쓰라노미야, 아리스가와노미야, 간인노미야의 가문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대대로 친왕의 호칭을 세습하여 '세습친왕가'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호칭과 더불어 황위 계승에도 우선권을 가져 천황이 후계자를 못 남기고 죽으면 대신 황실의 대를 이을 권리도 있다. 그 가운데 후시미노미야 가문이 가장 오래 존속해 큰 힘이 있었다.

19대 당주 후시미노미야 사다요시(伏見宮 貞敬, 1776-1841) 친왕의 아들들부터 분파 미야케가 생겼다. 사다요시 친왕의 넷째 손자이자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의 4남인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의 18번째이자 마지막 아이이며 9왕자가 바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다. 참고로 후시미노미야는 26대 히로아키(博明) 왕으로 이어지고 구니노미야는 3대로 끝이며 히가시쿠니노미야는 계속 이어지지만 신적강하로 친왕, 왕 칭호는 못 받게 되었다.

2.2. 종전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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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중반의 히가시쿠니노미야
1887년 교토에서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과 테라오 우타코(寺尾宇多子)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천황 소노 사치코의 9녀인 야스노미야 도시코(泰宮聰子) 공주와 결혼했다. 즉 메이지 천황의 사위가 되며 쇼와 천황의 고모부가 되고 쇼와 천황의 아내 고준 황후(나가코)의 친정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이 그의 형이니 고준황후에게는 작은아버지이자 시고모부가 된다. 이방자 여사에게도 작은아버지가 된다.

게다가 쇼와 천황& 고준 황후 내외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가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의 큰며느리이니 쇼와 천황 내외와는 서로 사돈도 된다.

2.3. 허수아비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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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3]

일본 육군 대장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데 1942년에 치바공업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지 이틀 후에 내각총리대신으로 기용되어 전후 첫 총리가 되었지만 당시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한 상태여서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이끄는 연합군이 점령한 상태였고 맥아더가 사실상 일본의 실권자였으니 이 사람은 말만 총리지 사실상 얼굴 마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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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대 총리 취임 후

그럼에도 그는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온 맥아더에게 자주 반항했다. 예를 들면 그는 총리가 되고 나서 이른바 일억총참회론(一億総懴悔論)을 주장했다. 이는 일본의 패전에 대해 정부, 군대, 국민이 모두 참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반성이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전쟁 책임을 최소화하고 향후 있을 전범재판에 대비해 황실의 지위와 신변을 보호하려는 것으로 평가된다. 내각은 일본의 전쟁 책임 추궁 등이 비생산적이라는 입장을 나타냈고 전쟁 책임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서류 등을 파기하는 데 주력했다. 이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억총참회론에 대해 보도 통제를 내렸고 극동국제군사재판 준비를 서둘렀다.

또한 그는 야마자키 이와오(山崎巌) 내무대신을 통해 후줄근한 근무복 차림의 맥아더와 연미복으로 차려입은 쇼와 천황이 대비되어 보이던 맥아더와 쇼와 천황의 사진의 언론 게재를 금지했다. 그러자 맥아더는 명령권자 야마자키 내무대신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내각 총사퇴를 명령하겠다고 통보하여 금지 처분이 해제되었다.

맥아더와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의 갈등은 10월 4일에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치안유지법 폐지 명령을 계기로 폭발했고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명령에 저항할 수 없었던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은 소극적 저항의 의미로 10월 9일에 총리대신직을 포함해 국무대신들 전원과 함께 내각총사퇴를 했다. 그는 전후 첫 총리이면서 최단 재임 총리(54일)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2.4. 총리 사퇴 이후

1947년에 다이쇼 천황의 직계자손을 뺀 모든 일본 황족들과 화족들이 평민으로 강등( 신적강하)되었는데 신적강하 문제가 이슈였을 때[4] 이 사람은 아예 자청해서 "신적강하를 하겠다"고 언론에 밝히면서 "다른 황족들도 동참하기 바란다"고 말했다.[5] 일화들을 보면 이전부터 황족 신분에 부담을 느껴서 오히려 반긴 것으로 보인다.

이후 슈퍼마켓을 열었지만 경영에는 수완이 없어서 얼마 못 가 망했고 1950년에 신흥종교를 만들어 교주로 활약하는 업적을 남겼는데 그 종교의 이름은 히가시쿠니교였으며 얼마 안 가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해체되었다. 이후에는 안보투쟁 당시 이시바시 단잔, 가타야마 데쓰와 함께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퇴진을 권고한 것을 빼면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전후 첫 총리이면서 최단 재임 총리이지만 수명으로는 오히려 역대 최장수 총리[6](102세)라 메이지 시대에 태어나 헤이세이 시대까지 살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2번째로 오래 산(101세)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다이쇼 시대에 태어나 레이와 시대까지 생존했다. 나루히코의 사후에도 100살을 넘기는 사람이 많이 없을 정도로 오래살 았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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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세였던 1988년의 모습

3. 기행

메이지 천황이 같이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는데 설사가 났다는 까닭으로 거절한 일화가 있다. 사실 설사는 거짓 핑계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 천황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신성모독으로 간주했음에도 최소 24살 이전[8]에 이런 일을 벌였다.[9] 나이는 메이지 천황이 히가시쿠니보다 35살, 요시히토 황태자(훗날 다이쇼 천황)가 8살 많지만 그는 엄연히 메이지 천황이 붕어한 뒤에 그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된 사람으로, 예비사위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걸로 벌하기 힘들었을 수 있다. 일단 방계 황족들 중에서도 지위가 상당히 높은 집안 출신이라 넘어갔지만 요시히토에게 한소리 들은 뒤[10] 스스로 신적강하를 신청했다. 이에 메이지 천황이 "이 늙은이를 곤란하게 하지 말라."고 일축하면서 신분을 그대로 유지시켰다. 메이지 천황은 자기 자식들마저도 잘만나지 않을 정도로 대인기피증이 심했다. 따라서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만나는 문제 때문에 황족이 신적강하를 논하는 것이야말로 불편한 일이었을 것이다.

프랑스 유학 사이에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화가라고 속이면서 어떤 노파에게 손금을 봐 달라고 했다. 노파가 손금을 보고 "당신은 일본의 총리를 하겠다."고 했는데 그제서야 신분을 밝히며 '나는 일본의 황족이자 군인이라서 정치를 할 수 없다.'고 말하자 노파가 ' 일본에서 대격변이 일어나겠다. 그래서 총리를 하겠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본인의 회고록인 <やんちゃ孤独>에 따르면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와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 입장을 밝혔으나, 그에 동조하는 사람이 사이온지 긴모치 전 총리뿐이었다고 한다. 물론 당시 일본 지도층에서 사이온지 총리는 '꼬장꼬장한 늙은이', 히가시쿠니는 '황족 중에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무시당했다. 히가시쿠니는 사이온지가 죽은 뒤인 1941년 제2차 고노에 내각 도조 히데키 당시 육군대신에게도 직접 찾아가서 "미국과 전쟁하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도조 본인도 태평양 전쟁 개전에 반대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도조는 고노에 총리가 사임한 후 히가시쿠니를 총리로 추천했다. 이후의 전개는 도조 히데키 항목 참조.

이 사람의 일화를 보면 유독 황족 신분을 싫어한 듯하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관련 자료

4. 가족

메이지 천황의 9녀인 도시코 내친왕과의 사이에서 아들 4명을 낳았다.
일본 황실의 후계자 대책으로 나루히코의 후손이 히가시쿠니노미야 가문으로서 유력한 구황족 복귀 후보로 꼽힌다.

===# 구황족 가계도 #===
쇼와 22년(1947년) 직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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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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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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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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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라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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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창작물

Hearts of Iron IV에서 일본 장군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획득 경험치를 10% 감소시키는 ‘정계와의 연줄’ 트레잇이 달려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3레벨에 3/3/2/2로 스텟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때문에 비교적 자주 쓰이는 장군이다.

[1] 역대 일본 총리들 중 가장 장수했다. [2] 19세기말 ~20세기 초 식민제국이 된 일본,2차대전기,재건기,버블시기를 모두 겪었다. [3] 익숙한 얼굴이 많이 보인다. 맨 앞의 히가시쿠니 총리 뒤로 사진 맨 왼쪽 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이다. 윤봉길 훙커우 공원 의거로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가 되어 짚고 있는 것이다. 그 옆은 당시 해군대신을 맡았던 요나이 미쓰마사 전 총리다. 해당 줄에서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키 큰 사람은 특명담당대신을 맡은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다. 종전 직후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내각출범기념사진에서도 어두운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4] 처음에는 전쟁범죄에 연관된 가문들만이 대상이었다. [5] 황족 신분으로 육군 대장과 총리대신을 역임한 그가 신적강하 동참을 공개적으로 요구한 이상 방계 황족 및 화족들 중 이것을 거부할 힘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이후 일본 황실이 남자아이를 못낳아서 현 나루히토 천황의 아내 마사코 황후는 독한 시집살이로 고생했다. [6] 단순히 일본에서만 최장수가 아니라 전 세계의 총리들을 통틀어서도 가장 오래 살아 기네스북에도 등록되어 있다. [7] 하지만 그의 장남은 모계유전을 몰빵받아서 그가 죽기 20년 전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장손도 조모와 모친의 유전자를 몰빵받은 탓에 1945년생 동갑내기 구본무처럼 74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8] 메이지 천황은 1912년 7월 30일에 죽었다. [9] 실제로 히가시쿠니는 황족들 사이에서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와 비슷한 자유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10] 다이쇼 천황은 천황이 된 후에도 아버지 메이지 천황과는 대조적으로 밖에 자유롭게 나가서 빈민 및 병자들과도 악수하고 학생들의 수영을 지켜보다가 "물이 너무 차갑다"고 지적하며 학생들이 감기라도 들까봐 걱정하였으며 자식들과도 같이 영화를 보고 숨바꼭질을 하는 등 상당히 소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화를 내고 욕을 했다는 서술은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다이쇼 천황 입장에서도 상당히 불쾌하고 욕 나올 일이었다는 뜻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