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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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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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팔달(江左八達) | |||||||
사곤 | 필탁 | 광일 | 완방 | 양만 | 환이 | 완부 | 호무보지 |
胡毋輔之
(269 ~ 318)
1. 개요
고대, 중세 중국의 위진남북조 서진, 동진 시대 인물로 자는 언국(彦國). 연주 태산군[1] 봉고현 출신으로 당대 명사였으며 ' 강좌팔달'의 일원으로 이름을 떨쳤다. 사곤, 왕돈과는 서진 관료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동탁 밑에서 집금오를 지낸 호모반의 증손자다.2. 생애
어릴 적부터 지역에서 총명하기로 무척 유명하여 성년이 되자 중앙으로부터 태위 밑에서 일하는 별가 직책을 제안받았다.호무보지는 처음엔 이를 거절했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하는 수 없이 번창현령 직책을 받아들이고 번창에 부임하였다. 번창의 현령이 된 그는 평소 좋아하던 술을 자제하고 일을 유능하게 처리하니 명성이 높아져 상서령으로 승진했다.
302년, 제왕 사마경 토벌전에 참가해 공을 세워 음평남(陰平男) 작위에 봉해졌고, 사도의 좌장사로 임명되었다. 이윽고 천하가 금세 다시 혼란스워지자 호무보지는 지방관을 맡기를 자청했고, 조정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낙안 태수에 건무장군을 겸하게 했다.
304년, 성도왕 사마영이 장사왕 사마예를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렇게 각지의 번왕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참상 속에서 호무보지는 정사를 내팽개치고(...) 자신의 친구인 사곤, 완수, 왕니 등과 술을 마시며 놀았다고 한다.
306년, 사마영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동해왕 사마월은 호무보지의 명성을 흠모하여 중랑에 임명해 다시 중앙으로 불러들였다가 진류태수로 삼아 중앙에서 내보냈다.
309년, 흉노의 전조 왕미의 군대가 진류를 지나 호관으로 향했는데, 호무보지는 이를 저지하지 않은 죄로 면직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지나 또 사마월에게 등용되어 그의 밑에서 우사마로 일했다.
311년, 사마월이 죽자 화란을 피해 강동으로 피난갔다. 강동에서 세력을 이끌고 있던 낭야왕 사마예는 호무보지를 안동장군에 임명했다. 호무보지는 자신처럼 똑같이 강동으로 피난간 친구 사곤, 필탁, 완방, 광일 등과 재회하여 만날 때마다 항상 술을 마시고 큰 소리로 떠들며 놀았다. 사람들은 이들 8명의 명사 집단을 가리켜 '강좌팔달'이라 불렀다.
이후 양무장군, 상주 자사를 지내다가 318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