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라틴어: Titus Quinctius Flamini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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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229년 말/기원전 228년 초 ~ 기원전 174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조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아버지)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형) 파비아(아내)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아들) |
참전 |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98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 |
동기 |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카투스 |
후임 |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퀸투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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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귀족이자 장군.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침략하던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를 물리쳐 '그리스의 해방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한니발 바르카를 죽음으로 몰아간 인물이기도 하다.2. 생애
고대 로마의 명문 귀족 가문인 퀸크티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퀸크티우스는 '다섯번째'를 뜻하는 퀸투스(Quintus)에서 유래했다. 기원전 471년 티투스 퀸크티우스 카피톨리누스 바르바투스가 처음으로 집정관에 취임한 이래, 이 가문에서 여러 집정관이 선출되었다. 조부는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이고 아버지는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였는데, 두 사람이 어떤 공직을 맡았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기원전 208년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는 그의 사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기원전 230년경에 태어난 형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있었으며, 그는 기원전 299년 말 또는 기원전 228년 초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유년기가 어땠으며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후에 보여줄 행보를 볼 때,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에 상당한 열의를 품고 일찍부터 탐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97년 플라미니누스가 그리스에서 로마로 보낸 사절 퀸투스 파비우스는 그의 아내의 조카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플라미니누스는 고대 로마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인 파비우스가의 여식인 파비아와 결혼했을 것이다. 당시 로마 정계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위시로 한 '파비우스 당'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위시로 한 '스키피오 당'이 대립했는데, 그는 파비우스 당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08년, 플라미니누스는 아풀리아에서 집정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군대에 배속되어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맡았다. 기원전 205년이나 204년 사이에 타렌툼의 사령관을 맡아 브루티움에서 한니발과 맞서고 있는 군대의 보급로를 지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타렌툼은 기원전 212년 한니발에게 귀순했다가 209년 로마에게 도로 정복된 뒤 3만 명의 주민이 노예로 팔려갔다. 그러다 카르타고의 위협으로 고향을 떠난 타렌툼인이 돌아와서 그들의 재산을 되찾을 수 있다는 법이 발표되었다. 플라미니누스는 이 약속을 이행할 책무가 있었다. 그는 이 역할을 잘 했던 것으로 보인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군사적 업적 못지 않은 정의 실현으로 유명해졌다"라고 기록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종결된 뒤,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따랐던 퇴역군인들에게 아풀리아와 삼니아의 농경지를 주는 임무를 맡은 위원회 멤버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위원회에는 3명의 전직 집정관과 2명의 프라이토리가 포함되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직급이 낮았던 그는 의사 결정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기원전 199년, 그는 집정관 선거에 출마해 다음해 집정관에 당당히 당선되었다. 당시 그는 아직 30세가 되지 않았고, 총독을 맡은 적도 없었다. 호민관 마르쿠스 풀미우스와 마니우스 쿠리우스는 이에 항의했지만, 민회와 원로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당선될 수도 있었던 건 탄탄한 집안 배경,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의 인연, 그와 더불어 그리스 문화 애호가였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지원 등 여러 요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제비뽑기를 통해 마케도니아 문제를 배정받았다.
기원전 200년, 로마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상대로 정복전쟁을 벌이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에게 선전포고 했다. 하지만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와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플라미니누스는 가능한 한 빨리 승리를 거두고 그리스를 해방시키고 싶었기에, 이른 봄에 곧바로 발칸 반도로 떠났다. 8,000명의 보병과 8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코르키라에 도착한 그는 에페이로스에서 전직 집정관 타풀루스의 로마군과 합세했다. 마케도니아군이 압소스 강 근처의 산길을 점거하고 있었기에, 로마군은 40일간 발칸 반도 깊숙이 진군하지 못했다. 그러다 현지 양치기들로부터 다른 길을 안내받고, 4,000명의 분견대를 보내 그 길로 가서 적의 후미를 치게 했다. 이에 마케도니아군은 2,000명의 병력을 잃고 테살리아로 후퇴했다.( 아오이 스테나 전투)
그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마케도니아로 직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리스로 이동하여 팔로리아 시를 기습 점령하고 더 많은 도시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아트락 포위전에서 적군의 맹렬한 저항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포키스로 이동하여 겨울을 보냈다. 이 시기에 형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지휘하는 함대는 로도스와 페르가몬의 함대와 연합하여 에레트리아를 점령하고 코린토스를 포위했다. 아카이아 동맹이 로마군의 약진을 보고 필리포스 5세와 관계를 끊고 로마와 손을 잡기로 하면서, 상황은 로마에게 좀더 유리해졌다.
필리포스 5세는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플라미니누스에게 평화를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플라미니누스는 니카이아 인근 해안가에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대표단도 참석하는 조건으로 회담을 열었다. 이리하여 로크리스에서 플라미니누스와 그리스 대표들, 그리고 필리포스 5세가 만나 평화를 논의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그리스, 일리리아, 카라아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고 로마와 손잡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제시한 여러 요구 사항을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필리포스는 부분적으로 받아들였지만, 150여 년간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지였던 테살리아에서 완전 철수하는 것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테살리아 완전 포기 조항은 삭제하고, 나머지 조항은 부분 합의하기로 했다.
이후 그리스 연합 대표단과 플라미니누스의 사절단, 그리고 마케도니아 사절단은 기원전 198년 12월에서 기원전 197년 1월 사이에 원로원에 도착하여 평화를 위한 최종 협상을 하였다. 그리스 연합 대표단은 칼키스, 코린토스, 데메트리아스가 마케도니아 왕국에 있는 한 그리스의 자유는 불가능하며, 이를 두고 다른 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은 당장의 곤경을 벗어나기 위한 술수라고 지적했다. 마케도니아 사절단은 그 세 도시에서 물러날 거냐는 물음에 지시받은 바 없다고 대답했다. 결국 원로원은 평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사절단을 돌려보냈다. 플라미니누스는 전직 집정관으로서 마케도니아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필리포스 5세는 보이오티아 동맹 및 스파르타를 끌여들어 로마에 대항하려 했지만, 두 세력 모두 얼마 안가 로마에게 돌아섰다. 다급해진 필리포스 5세는 로마 본국으로 강화를 요구하는 사자를 보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원전 197년 6월, 플라미니누스는 테살리아 동남부 지역의 펠라이 마을에 이르렀다. 이 시기 필리포스 5세도 마케도니아군을 이끌고 테살리아에 침입한 로마군을 격퇴하려 했다. 이후 벌어진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완승을 거두었다.
그 후 필리포스 5세는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템페에서 연합 대표단의 요구 사항을 모두 받아들였다. 아이톨리아 사절단은 필리포스 5세를 제거하자고 주장했지만, 플라미니누스는 단호히 거부했다. 대신 필리포스의 차남 데메트리오스 왕자를 볼모로 데려갔고, 1천 탈렌트의 배상금을 받았다. 그리스 전역은 플라미니누스를 '그리스의 해방자'로 칭송했고, 필리포스 5세는 두 번 다시 로마에 대적하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마케도니아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로마가 이 일을 계기로 자신들을 지배하려 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던 중 이스트미아 대회에 참석한 플라미니누스는 관중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로마 원로원과 총독은 그리스인들에게 자유를 주고, 수비대를 배치하지 않겠다. 누구에게도 경의를 표하지 않을 권리를 주겠으며, 로마의 법에 따라 살지 않을 권리를 부여하겠다."
관중들은 이 발표에 매우 열광했다. 다들 레슬링 선수들에게 주의를 전혀 기울이지 않았고, 경기가 끝날 무렵에는 플라미니누스에게 달려들어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일부는 그의 얼굴을 마주보며 구세주로 칭송했고, 다른 이들은 그의 손을 만지려고 했으며, 어떤 이들은 그에게 화환과 리본을 던졌다. 어찌나 많은 이가 달려들었는지, 그는 하마터면 질식할 뻔했다고 한다. 대회가 끝난 뒤, 그는 여러 도시에 들러 각 도시의 사람들에게 지배권을 넘겨줬으며, 네메아 대회에서도 다시 한번 그들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발표했다. 약속대로 로마군은 대거 철수했지만, 아크로코린토스, 할키스, 에레트리아 등 3개 요충지에 일부 병력이 남았다.
기원전 196년 여름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안티오코스 3세가 트라키아에 진출하자, 로마 원로원은 그리스에서의 철수를 연기하고 플라미니누스를 그리스 총독에 계속 앉히기로 결의했다. 스파르타 참주 나비스가 아르고스를 포기하려 하지 않자, 그는 아카이아 동맹, 테살리아 동맹, 페르가몬 왕국, 로도스 섬의 지원을 토대로 나비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5만 병력을 이끌고 스파르타로 진군한 그는 나비스의 15,000 병력을 격파하고 스파르타 시를 포위했다. 나비스가 사절을 보내 화해하자고 청하자, 플라미니누스는 아르고스와 모든 해안 도시들을 버리고 용병을 해산하며, 함대를 로마에 넘기라고 요구했다. 나비스는 동의하려 했지만, 휘하 부대가 반발하자 어쩔 수 없이 거절했다. 이후 로마군이 공세를 퍼부은 끝에 도시에 침입하자, 나비스는 비로소 항복하고 플라미니누스가 내건 조건을 따랐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나비스를 참주로 계속 두기로 하고, 아카이아 동맹에 스파르타를 포함시켰다.
기원전 195-194년 겨울, 원로원은 더 이상 그리스에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기로 했다. 플라미니누스는 에페이로스의 아우릭으로 이동한 뒤 바다를 건너 브룬디시움으로 갔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브룬디시움에서 로마로 가는 그의 행렬은 개선식과 유사했다고 한다. 플라미니누스는 원로원 의원들과 만나 그동안의 행적을 보고하고, 적으로부터 빼앗은 무수한 전리품을 보여줬다. 원로원은 즉시 사흘간 개선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첫째 날에는 무기와 조각상이, 둘째 날에는 금과 은, 셋째 날에는 그리스 도시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114개의 황금 화환들이 거리를 통해 운반되었다.
기원전 193년 초, 안티오코스 3세와 평화 협정을 맺기 위해 파견될 예정이던 사절단이 그를 찾아가 문의했다. 그는 사절들에게 안티오코스 3세가 유럽 문제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로마가 이미 유럽의 그리스인들에게 준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시아의 그리스인들에게 자유를 줄 거라고 경고하라고 했다. 사절단으로부터 이러한 통보를 들은 안티오코스 3세는 분개했고,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이후 기원전 193년 집정관 선거에서, 그는 형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를 지지했다. 출마자 중에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도 있었는데,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사촌이었다. 양측의 치열한 경합 결과, 최근에 개선식을 개최해 시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플라미니누스의 지원을 받은 루키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얼마 후 아카이아 동맹이 스파르타의 참주 나비스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원로원은 아카이아인들에게 원조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안티오코스 3세가 언제든지 그리스에 상륙하여 나비스를 도울 수 있었기 때문에, 아카이아 동맹 대표는 플라미니누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는 답신에서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가 이끄는 로마 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어떠한 공세도 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나비스와 무력 충돌을 벌여 승리하였고, 아카이아 지휘관 필로포이멘을 "전쟁의 승리자"로서 플라미니누스보다 높게 평가했다.
안티오코스 3세와의 충돌이 임박하자, 사절단은 아카이아 동맹, 아테네, 할키스, 테살리아를 잇따라 방문했다.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플라미니누스는 안티오코스 3세와 협상하던 아이톨리아 동맹의 대표자 회의에 참석해 모든 모순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이톨리아 동맹은 그리스 해방을 위해 안티오코스를 초대하기로 결의했고, 테살리아의 데메트리아스를 점령하고 칼키스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에우리포스에서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 2세를 만나 할키스의 방어 상태를 살펴본 뒤 데메트리아스로 여행을 떠났다. 그가 파견한 사절 푸블리우스 빌리우스는 데메트리아스 항구에 모인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양쪽에서 서로에게 야유를 퍼붓는 결과만 초래했다. 결국 그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코린토스로 돌아왔다.
기원전 192년 가을, 안티오코스 3세가 테살리아에 군대를 이끌고 상륙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를 해방하기 위해 왔다고 선언하면서, 아카이아 동맹에게 중립을 지키라고 요청했다. 이에 플라미니누스는 아카이아 동맹에게 안티오코스 3세가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그가 이끌고 온 군대가 별로 크지 않으니 로마를 따르라고 권고했다. 이에 아카이아 동맹은 아이톨리아 동맹과 안티오코스 3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플라미니누스는 기원전 191년에도 특사의 권한으로 그리스에 남았다. 그는 집정관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와 아이톨리아 동맹군을 격파한 뒤 그의 수행원으로 들어가서 안티오코스 3세의 열렬한 지지 세력이었던 할키스를 파괴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이후 아카이아 동맹이 자신들에게 합류하기를 원하지 않는 메시니아를 포위하자, 메시니아 주민들은 플라미니누스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는 아카이아인들에게 포위를 풀도록 강요했고, 메시니아인들이 연합의 일원이 될 수 있는 특별한 조건을 개발했다. 또한 사절단은 이전에 마케도니아에 속했던 자킨토스 섬이 로마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아카이아 동맹 대표들이 반발하자, 그는 "껍데기에서 나온 거북처럼, 펠로폰네소스 반도 밖으로 머리를 내밀면 위험하다"며 자신들의 요구를 정당화했다.
그 후 글라브리오의 로마군에 포위된 나프팍토스로 이동한 그는 포위된 자들이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성벽 바로 앞에서 걸어갔다. 성벽에 모인 군중은 그에게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간청하기 시작했다. 플라미니누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손짓했지만, 글라브리오에게 로마의 동맹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가 그럴듯한 구실로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는 동안, 포위전에서 자신의 힘을 낭비할 가치가 없다고 설득했다. 글라브리오는 이에 설득되었고, 그의 중재에 따라 나프팍토스 주민들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그는 뒤이어 아이아에서 열린 아카이아 회의에 글라브리오와 함께 참석했고, 기원전 190년 초 로마로 돌아가서 평화를 요청한 아이톨리아 사절단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맺은 아이톨리아 연합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길 거부했다.
기원전 189년 감찰관 직에 입후보했다. 당시엔 만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가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았지만, 호민관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루툴루스로부터 안티오코스 3세와의 전쟁 중에 전리품 일부를 은닉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대 카토가 고소 위협까지 하자 결국 물러났다. 그는 이 덕분에 감찰관에 무난하게 당선될 수 있었다. 그는 원로원 4명을 제명했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원로원 의원 목록의 선두에 내세웠다. 기원전 187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동생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가 안티오코스 3세로부터 선불금으로 받아낸 500달란트를 횡령했다는 고발을 받았을 때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확실하지 않으나, 대 카토와 스키피오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85년 새 감찰관에 선임된 대 카토는 플라미니누스의 형 루키우스를 원로원에서 추방했다. 여러 문헌에 따르면, 루키우스는 정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갈리아 망명자나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을 임의로 살해했다가, 이 일이 발각되면서 추방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에 반감을 품고 원로원에서 대 카토에 대한 반대를 이끌었고, 감찰관들의 활동으로 손실을 입은 대지주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감찰관들은 플라미니누스 등의 방해공작을 뿌리치고 국가에 훨씬 더 유리한 조건으로 모든 농지 거래를 재협상했다.
기원전 183년, 플라미니누스는 로마에 도착한 스파르타 대표들을 상대로 원로원을 대표하여 협상을 진행했다. 그는 모든 쟁점이 해결되는 협정에 서명했다. 플라미니누스의 요청으로, 이 조약은 아카이아 동맹의 대사에 의해서도 서명되었다. 그 후 그는 마케도니아 왕자 데메트리오스와 비밀 회담을 가졌고, 필리포스 5세에게 데메트리오스를 로마로 다시 보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기원전 183년 여름이나 가을, 그는 로마의 동맹자인 페르가몬 왕 에우메네스 2세와 전쟁을 시작한 비티니아의 왕 프루시아스 1세에게 파견된 사절단을 이끌었다. 그는 도시에 그리스에 들러서 친구 디노크라테스의 계획에 따라 메세니아가 아카이아 동맹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다. 사절단은 나프팍토스에 상륙하여 회의를 소집하자는 제안을 아카이아 동맹 지도자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동맹 지도자들은 사절단이 그리스와 관련하여 권한이 없다는 것을 알고 로마인들이 동맹에 대해 언급하고자 하는 모든 질문에 대한 서면 진술을 요청했다. 폴리비오스는 그가 이 일이 정적들에게 빌미를 제공할 걸 두려워해 아무것도 진술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비티니아 궁정에 도착한 뒤, 사절단은 비티니아 왕에게 에우메네스 2세와의 전쟁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던 중, 그는 한니발 바르카가 비티니아 궁정에 머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와 폼페이우스 트로구스는 한니발의 로마 송환이 사절단의 주요 임무 중 하나였다고 기술했지만, 플루타르코스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플라미니누스의 독단행위였다고 기록했다. 플루타르코스와 리비우스에 따르면, 플라미니누스는 한니발이 아직 살아있는 것에 분노하여 로마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친 적을 은닉한 것에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결국 비티니아 왕은 로마인들에게 한니발을 넘겨주기로 했고, 한니발은 로마인들이 자신을 잡으러 왔다는 걸 알게 되자 평소 소지하고 있던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기원전 180년, 플라미니누스가 데메트리오스에게 보낸 편지가 페르세우스 일당에게 노획되었다. 이 편지는 데메트리오스가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부추기는 것이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 편지는 페르세우스가 조작한 것이었다고 한다. 페르세우스는 이 편지를 근거로 아버지에게 데메트리오스를 처형하라고 요구했고, 필리포스는 이에 따라 데메트리오스를 독살했다. 그러나 아들을 처형한 충격과 로마가 이 일을 가지고 어떻게 나올 지 근심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기원전 179년 사망했다.
기원전 174년, 플라미니누스의 아들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는 아버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경기를 조직했다. 이로 볼 때 그는 기원전 174년에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 티투스는 기원전 150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3. 평가
이탈리아에서는 로마의 그리스 정복의 초석을 다짐으로써 로마 공화국이 로마 제국으로 개편되는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 높이 평가받는다. 만약 로마가 마케도니아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면 이후의 지중해권 역사는 실제와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그리스에서는 당대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을 제외하면 그리스의 해방자로 여겨졌으나, 이후 그리스계 국가들이 남김없이 로마 치하에 놓이게 되고 먼 훗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그리스가 마케도니아 왕국을 자신들의 역사로 여기게 되면서 플라미니누스에 대한 이미지가 해방자에서 침략자로 바뀌었다. 한국으로 치면 신라가 당나라의 도움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대로 멸망시킬 당시에는 당나라가 신라의 은인으로 여겨졌으나, 나당전쟁을 기점으로 당나라에 대한 신라인들의 부정적인 인식이 늘어나고 이후 고려의 후삼국 통일을 기점으로 한민족 전체가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로 여기게 되면서부터 당나라가 침략자의 나라로 취급당하게 된 것과도 비슷하다.
북마케도니아 또한 마케도니아 왕국을 자신들의 역사로 여기기 때문에 플라미니누스를 마케도니아의 전성기를 끝장낸 원흉으로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