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00201><colcolor=#fbe673> | |||
출생 | 생년 미상 | ||
로마 공화국 로마 | |||
사망 | 기원전 210년 (향년 ?세) | ||
로마 공화국 로마 | |||
재임기간 | 고대 로마 집정관 | ||
기원전 245년 | |||
고대 로마 감찰관 | |||
기원전 241년 | |||
고대 로마 독재관 | |||
기원전 21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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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00201><colcolor=#fbe673> 부모 |
父: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 母: 이름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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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이름 미상 | ||
자녀 | 1명 | ||
종교 | 로마 다신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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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집안 중 하나인 파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 때부터 부테오(Buteo)라는 코그노멘을 사용하였다. 형제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부테오는 기원전 247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는 기원전 245년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불부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다. 당시에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는 시칠리아에서 하밀카르 바르카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펼쳤고, 그는 해상에서 카르타고 해군과 교전했다. 플로루스에 따르면, 그는 에기무르에서 적 함대를 격파했지만, 나중에 폭풍으로 인해 전리품을 모두 잃었고 상당수의 함선이 난파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에 귀환한 뒤 개선식을 거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폭풍으로 전리품을 모두 잃었다는 게 사실인지는 불확실하다.기원전 241년부터 감찰관을 맡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218년 한니발 바르카가 사군툼 공방전으로 사군툼을 함락시키자 카르타고에 선전포고하러 간 사절단 대표 파비우스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아니라 그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기원전 216년경, 그는 원로원에서 가장 오랫동안 직임을 수행한 감찰관이었다. 로마군이 칸나이 전투에서 파멸적인 타격을 입은 후, 원로원은 오랜 세월 원로원에서 일한 그를 독재관에 선출했다. 하지만 나이가 많아서 군대를 이끌 수 없었기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페라가 공동 독재관으로서 군대를 수습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는 전장에서 전사한 의원들의 공백을 채우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그는 하루 만에 177명의 새로운 원로원 의원을 임명한 뒤, "독재관이 2명이어서는 안 된다."라는 이유로 사임하였다.
기원전 210년, 감찰관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는 프린켑스 세나투스의 직임을 그의 친척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에게 수여했다. 부테오가 살아있었다면 그가 그 직임을 받았을 테니, 그 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수제자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그는 절도 혐의로 기소된 아들 파비우스 부테오를 손수 죽였다고 한다. 기원전 201년 범무관을 역임하고 사르데니아 총독을 맡았던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는 그의 손자였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