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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스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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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102대 황제
콘스탄티노스 9세
Κωνσταντῖνος Θ΄
파일:Emperor_Constantine_IX.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
(Κωνσταντῖνος Μονομάχος)
출생 1000년/ 1004년
동로마 제국 안티오크
사망 1055년 1월 11일 (향년 50~55세)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재위 기간 로마 황제
1042년 6월 11일 ~ 1055년 1월 11일 (13년)
전임자 조이, 테오도라
후임자 테오도라
부모 아버지 : 테오도시오스 모노마호스
배우자 조이
종교 기독교
자녀 아나스타시아
외손자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

1. 개요2. 국내 정치
2.1. 안정된 대중 정치2.2. 학제 개편 및 원로원 개방2.3. 경제2.4. 군부 제어
3. 대외 정책
3.1. 對 키예프 전쟁3.2. 양자 동맹 체제3.3. 對 페체네그 전쟁3.4. 對 튀르크 전쟁3.5. 3자 구도와 균형3.6. 어려운 이탈리아 정책3.7. 동서 교회 대분열
4. 평가5.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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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102대 황제이자 마케도니아 왕조의 제15대 황제.

그의 가문인 모노마호스 가문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에서 상당히 유력한 가문이었다. 또한 콘스탄티노스 본인은 로마노스 3세가 속하였으며, 역시나 원로원의 중요 가문인 아르이로스(Argyros)로부터 두번째 아내를 맞이한 바 있었다. 또한 그는 당대 유명한 미남이었으며,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 조이가 1042년 6월 12일 그와 결혼하면서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이미 이전에 미남에게 홀려 결혼하고는 남편을 휘어잡으려다 쓴맛을 봤던 조이는 그와 원만하게 지내려고 노력했으며, 심지어 그가 황궁에 정부를 두는 것도 용인했다.

그러나 그는 외국으로 결혼을 간 딸 아나스타시아(Anastasia) 외에 자녀를 두지 못했고, 대신 원로원 의장(Proedros)을 역임한 테오도시오스 모노마호스를 조카로 두었다. 콘스탄티노스 사후, 테오도시오스가 계승권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지만,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해 쉽게 진압된 후 유배되었다.

그의 외손자이자 류리크 왕조 중시조가 바로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로 장녀인 아나스타시아의 아들이다. 어머니의 성인 모노마크를 따랐고, 이후 모노마코비치 가문은 외증손자인 유리 돌고루키를 통해 블라디미르 - 수즈달 공국과 모스크바 공국을 이어 루스 차르국으로 이어지고 현재까지도 생존자가 남아있다.

2. 국내 정치

2.1. 안정된 대중 정치

동로마 제국의 국내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여론 정치를 쉽게 수행했다. 명목상 정실부인이자 계승권자이며 포르피로게(예)니타인 조이를 멀리하고 젊은 애인인 마리아 스클레리나(Maria Sklrarina)를 가까이하다가 1044년 축일 행진 중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는 문제가 있었지만 스클레리나건 외에는 흠집이 될 만한 일은 잘 만들지 않았다. 원로원 정치의 대표자였던 콘스탄티노스는 원로원과 시민대중을 함께 연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대중의 지지를 확고히 얻어야만 정권에 도전할 수도 있는 파플라고니아 카파도키아 출신 군부 인사들에게 명분을 제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결과 1047년, 레온 토르니키오스가 수도권에 가까운 마케도니아의 병력을 독점하여 군사 정변을 시도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였고 변변한 병력 없이 정권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2.2. 학제 개편 및 원로원 개방

원로원과 대중을 긴밀하게 연결하고 화합시키기 위하여 콘스탄티노스는 두 가지 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공교육 제도를 개선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법학 대학과 철학 대학을 수립했다. 이 교육 과정 개정은 교육비 부담을 없앴으며 변호사 자격 시험을 통한 변호사 자격증 제도의 병행으로 공식적인 관료 진출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이로서 기존 대가문 출신이 아닌 일반 평민이나 지방 출신 시민권자도 법관과 같은 전문직이나 학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콘스탄티노스는 원로원의 자격 제한을 크게 개방하여 기존 대가문에 고정되어 있던 숫자를 증가시켰다. 일반 상인 노동자 역시 충분한 품직(品職)을 가질 수 있다면 원로원 의원의 자격을 부여하게 된 것이다. 미하일 4세(1034년 - 1041년) 때 고아원장 요안니스의 품직 개편이 일어난 뒤에는 품직이 단순한 명예 칭호 뿐 아니라 자금을 보유한 사람의 투자 도구 겸 국가의 재원 창출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충분히 대상인들까지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다만 기존 원로원의 제한된 정원이라는 혜택을 누리며 국가 정책을 논해왔던 대가문이나 기존 정치인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미하일 프셀로스(Michael Psellos)와 같은 정치인이자 학자도 이러한 조치가 국가 질서에 혼란을 초래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중 여론은 반감을 느끼게 되었다. 콘스탄티노스 생전에는 이러한 갈등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의 사후에는 양자를 중재할 만한 인물이 사라지게 되었고 결국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의 군사 정변이 일어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2.3. 경제

경제적으로는 콘스탄티노스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다. 특히 과거에는 페리블렙토스(Peribleptos) 수도원 단지 건설 등의 사례를 들어 그의 낭비벽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런 사례는 방대한 국가 예산 전반에 비하면 사소한 건에 불과하였다. 경제적으로 당시 동로마 제국이 처해 있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방에서 계속되는 전쟁이었다. 대체적으로 동서와 북쪽의 삼면에서 전쟁이 지속적으로 일어났으며 군대의 유지, 주둔, 이동, 작전 및 축성에 막대한 경비가 소모되었다. 또한 외부적인 전쟁과 더불어 국내, 교역 경제에서 교역이 팽창함에 따라 금화 수요도 늘어났고 이로 인하여 추가적인 금화 수요가 발생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하여 1040년대까지는 90% 혹은 80% 후반대를 유지하던 금화의 순도는 1050년대에 들어 급격히 하강하여 70%대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바실리오스 2세 때 비축된 국고 적립금도 이 시기에 들어 사실상 거의 바닥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제는 계속 이어지다가 이사키오스 1세 콘스탄티노스 10세에 이르러서는 재정 수지 회복이 중요 현안으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결말은 매우 좋지 않았다. 무려 만지케르트 전투.

결과적으로는 콘스탄티노스 9세가 의도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으며 그의 재임시에는 국고를 어느 정도 희생하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무엇보다도 그 재정 위기의 뒷마무리를 하기에는 콘스탄티노스가 주요 전쟁들이 일단락되자마자 사망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그리고 후임자들은 각자 이런 저런 사정들 때문에 재정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거나, 혹은 해결하더라도 심각한 부작용을 불러왔다. 먼저 미하일 6세는 파티마 제국과는 외교적 친선을 유지하면서 튀르크 문제를 먼저해결하기를 원했고, 그 과정에서 민간 관료, 원로원의 권력을 강화하며 군부를 통제하려 했다. 미하일 6세까지는 치세까지는 제국에게는 아직까지는 긴박한 재정수급의 필요성까지는 없었고, 미하일 6세는 군비로 지출되는 비용을 삭감하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이는 군부의 영향력을 줄이고 민간 관료, 원로원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미하일 6세의 의도도 있었을 것이나, 미하일 6세는 즉위 전까지 오랫동안 재정을 담당하는 관료로 근무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어떻게 돈이 '새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하일 6세는 이러한 시도를 자신들의 영향력을 침해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인 군부의 쿠데타로 제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미하일 6세를 쫓아내고 즉위한 이사키오스 1세는 쿠데타 과정에서 동부에 배치된 주력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였는데, 내전 과정에서 쌍방은 막대한 인명 손실을 보았다. 더구나 주력군이 이탈한 사이 잦은 외침이 벌어지면서 재정수요가 폭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사키오스 1세는 수도원의 면세혜택을 철폐하는 등 재정적으로 강경책을 썼으나 이는 이사키오스 1세를 제국의 정계에서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사키오스 1세는 스스로 제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사키오스 1세 이후 즉위한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재정문제는 해결하였으나 이를 위해 소극적인 군사정책을 펼칠 수 박에 없었으며[1] 동부에 주둔한 금군의 영향력을 감소시켰으며 결과적으로 그의 치세에 튀르크인들은 아르메니아 주요 도시인 아니를 함몰시키고 아나톨리아-이베리아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그 결과는 만지케르트 전투로 이어진다.

2.4. 군부 제어

카파도키아와 파플라고니아계 군부 인사들은 이 시기에도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군 장성들은 전쟁이 잦았던 이 시기에 대중의 주목도 받고 군사적인 실력과 세력을 확고히 자신의 통제 아래 둘 수 있었다. 니키포로스 2세 이래로 오랜만에 전장에서 직접 병력을 지휘하는 유형이 아니라 중앙에서 만사를 관장하는 유형의 군주 이미지를 창출한 콘스탄티노스 9세는 직접적으로 드러내놓고 견제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자신의 친위 세력에 가까운 환관들이나 행정 장관 등을 총사령관으로 지목했다. 이는 정권을 노릴 수도 있는 장성들에게 군대 장악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조치로 보인다. 그도 아닌 경우에는 비교적 중앙 정부의 통제에 충실한 마케도니아군과 같은 서부 지역 출신의 군대를 주요한 작전 단위로 삼았다.

3. 대외 정책

3.1. 對 키예프 전쟁

104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상당히 이름난 키예프 상인이 주민과 말다툼 끝에 격투를 벌여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키예프 루스는 이 사건을 절호의 기회로 보고 바로 전쟁을 시작했다. 요안니스 스킬리치스는 자신의 책 『개요』를 통해 당시 대공 야로슬라프 1세가 북방의 해양에 거주하는 동맹에게서까지 지원군을 받으며 10만의 병력을 동원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1043년 실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출현한 바이킹 함대가 약 400척 - 500척 수준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실제로는 4만이나 5만으로 잡아도 충분히 많은 병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국을 떠난 키예프 군대는 중간에 위치한 바르나(Varna)에 이르러 잠깐 정박하려 했다. 약탈 보급 실시 혹은 전초 기지 마련을 위한 행동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바르나에서 이들을 기다리던 장군은 카타칼론 케카브메노스(Katakalon Kekaumenos). 당시 동로마 제국의 최고참 장성 중 한 사람이자 노련한 장군 중 한 명이었다. 카타칼론은 손쉽게 키예프 군대를 격파했다. 항구에서도 쫓겨난 키예프 함대는 곧바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위치한 보스포루스 해협에 키예프 함대가 들어올 무렵 콘스탄티노스는 키예프 측이 원하는 대로 보상금을 지불하겠다며 화의를 제안했다. 이에 대하여 키예프 측은 사실상 거부를 표명했다. 곧이어 벌어진 전투를 파로스 전투라 한다. 1자 대열로 진영을 구축한 양군은 팽팽하게 대치했다. 일요일 해질녘, 바실리오스 테오도라카노스 장군이 지휘하는 세 척의 전함이 루스의 함대에 돌격, 10여척을 침몰시키거나 빼앗아버리면서 균형은 무너졌다. 키예프 함대는 후퇴했고 그 뒤에는 크림반도에서의 반격 이상의 공격은 불가능했다.

1044년 키예프가 크림 반도의 거점인 케르손(Kherson)을 점령한 뒤에도 양국의 대치는 이어졌다. 1046년, 마침내 콘스탄티노스는 전쟁을 끝내기로 키예프 루스와 합의했다. 이때까지 구금되었던 키예프 국적자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또한 야로슬라프 대공의 아들인 흐셰볼로드 1세를 콘스탄티노스의 딸인 아나스타시아(Anastasia) 공주와 결혼시켰다. 그 아들인 볼로디미르 모노마크는 볼로디미르 2세로서 키예프 대공이 되었다.

이후 블라디미르 모노마크의 후손들은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을 거쳐 모스크바 대공국-루스 차르국으로 이어진다

3.2. 양자 동맹 체제

콘스탄티노스의 주된 외교 활동 중 하나는 당연하게도 동쪽에 대한 정책이었다. 완전히 다른 종교권인 이슬람 세계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고도 신중한 정책이 필요했다. 일단 콘스탄티노스의 등장 시기까지 동로마 제국이 접하고 있던 이슬람 세계는 명목상 파티마 왕조 아바스 왕조라는 시아파, 수니파 각각의 대표자가 있었다. 그러나 아바스 제국은 이 시기에는 시아파인 부와이 왕조의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실제 동로마 제국은 아바스 제국을 상대로 한 외교 활동을 중단한 지 오래였다. 또한 부와이 왕조 역시 부차적인 외교 대상에 불과했고 어디까지나 당시 동방 외교의 주안점은 남쪽에 위치한 파티마 제국이었다.

파티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은 11세기 들어와 시리아 일대의 영역과 알레포 토후국의 종주권을 두고 몇 차례 격돌한 바 있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양국은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먼저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청 앞에 위치한 유서 깊은 무하마드 모스크의 관리권을 파티마 제국에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 파티마 제국은 예루살렘에 위치하였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때 설치된 이래 역시 유서 깊은 성묘교회의 관리권을 콘스탄티노플 정부에 양도할 수 있었다. 파티마 제국은 외국의 대표적인 상징성을 가진 콘스탄티노폴리스 모스크의 보호자를 자처함으로서 이슬람 세계에 위엄을 과시하고 지도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예루살렘 성묘 교회의 관리권과 시리아 - 팔레스타인 - 이집트 대주교들에 대한 권한을 인정받음으로서 해외의 정교도 세력을 관리하고 보호할 수 있다는 반대 급부가 있었다.

이러한 상호 보완적 관계를 콘스탄티노스는 동맹으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1046년, 동로마 정부는 많은 선물을 제공하고 파티마 제국과 동맹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렇게 동로마의 동방 전선은 무난하게 안정되는가 싶었지만...

3.3. 對 페체네그 전쟁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이 멸망한 이후 동로마 제국은 직접적으로 이스트로스 강을 경계로 접하게 되었다. 이는 다뉴브 저지대까지 뻗어 있는 여러 유목민들과 직접적인 접촉이 발생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1020년대 후반부터 페체네그족이나 쿠만족이 국경을 돌파하여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약탈하는 일이 간간이 발생했다. 1047년, 콘스탄티노스는 페체네그족 내부의 내분으로 2개 부족이 이탈하자 이들을 국경 수비대로 기용하기 위해 받아들였다. 바실리오스 2세 이래로 제국 정부는 발칸 산맥 남쪽과 달리 북쪽 모이시아 지방을 자연적인 청야 지대로 편성, 주요 요새지가 아닌 이상 황무지로 방치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곳을 제국의 동맹군으로 들어온 유목민들에게 내주어 정착 및 방위를 담당하게 했다.

페체네그족은 공식적으로 이탈 부족들의 반환을 요구했으며 제국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1047년 12월, 페체네그를 포함한 대규모 유목 민족 집단이 강을 건너옴에 따라 제1차 페체네그 전쟁이 시작되었다.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페체네그 족이 항복하고 시민권을 받아 발칸 산맥 일원에 정착하면서 상황은 정리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048년, 동부 변경으로 파견된 페체네그 군대가 이탈하면서 페체네그 등 유목 민족 집단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양 세력은 1049년 디아키니 전투와 1050년 바실리키-리바스 전투 등 격전을 벌였다. 결국 소모전이 이어지다가 1053년, 페체네그 측의 제안으로 30년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데 합의하였다. 독립적인 유목 집단은 발칸 산맥 북쪽을 계속 점유하였으나 1059년, 이사키오스 1세가 공격을 가하여 쫓아냈다.

페체네그와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져 레부니온 전투에 이르기까지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이어졌다.

이 전쟁에 대규모로 병력을 동원하면서 동로마는 특히 재정적으로 많은 출혈을 감당해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3.4. 對 튀르크 전쟁

1038년 이래로 튀르크 유목민 계열인 셀주크 왕조 이라크 지역에서 흥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부와이 왕조를 밀어내고 아바스 칼리프를 옹립함을 대외적으로 천명했다. 물론 이 당시 동로마 제국은 셀주크가 강적이 될 것으로는 보지 않았으며 이란, 이라크 지역에 대해서 적극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양측의 외교적 접촉은 10여년이 경과한 뒤에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1047년경 셀주크 군대의 일부가 동로마 제국의 동부 변방인 바스푸라칸 지방을 통과하다가 동로마군과 충돌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후 1048년에는 두 차례의 침공이 일어났다. 첫 번째 맹인 하산이 지휘한 2만의 병력은 전방 병력이 쉽게 진압하였으나 두 번째 이브라힘 이날이 지휘하는 10여만의 병력은 바스푸라칸 일대와 아르메니아 변경을 크게 휩쓸었다. 압도적인 병력에 부담을 느낀 동로마군은 방어 자세를 유지하다가 조지아군과 연합, 5만의 병력을 구축하여 맞섰다. 1048년 9월 18일 일어난 카페트론 전투에서 양군은 크게 충돌했다. 전황은 동로마군에 우세하게 끝났으나 총사령관인 조지아의 장군이 포로가 되어 흐지부지한 싸움으로 끝났다.

이후 양자는 1050년경에 평화 조약에 이르렀지만 1054년, 셀주크 군대는 다시 투으룰 베이의 친정을 단행했다. 이때 벌어진 전투가 제1차 만지케르트 전투. 동로마군의 선전으로 셀주크 본군은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진군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이때 이들이 동반하였던 튀르크 유목민들은 이곳에 장기적으로 주둔하면서 계속해서 동로마 동부 변경을 공격하고 약탈했다. 이들이 상당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동부 지역을 위협한 끝에 1060년대 동로마 정계는 발칵 뒤집히게 되었고 만지케르트 전투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3.5. 3자 구도와 균형

카페트론 전투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는 셀주크 제국이 만만하지 않은 상대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동로마의 외교 부처에서는 전투 직후 포로 송환 문제를 겸하여 평화 조약을 두고 바그다드 아바스 정권과의 옛 외교 채널을 가동시키는 등 상황 변화에 대한 적응이 시작되었다. 아바스 칼리프와 셀주크의 토그릴 베그는 양자간에 진행되는 평화 조약에서 파티마 제국이 보유하고 있는 무하마드 모스크의 관리권을 자신들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콘스탄티노스 9세는 제한된 시리아 전선을 맞댄 파티마 제국보다는 셀주크 제국이 더 위협적이고 외교적으로 그만큼 중요한 대상임을 인식했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무하마드 모스크의 관리권은 아바스 칼리프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파티마 제국의 위기는 당분간 이어졌다. 1050년대 들어와 나일 강 하류의 범람이 불규칙해져 기근이 이어졌으며 1052년에는 북아프리카의 지리드 왕조가 파티마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아바스 조에 도움을 요청했다. 아바스 왕조와 셀주크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지리드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요청을 보냈다. 그러나 이 경우 콘스탄티노스는 1046년에 체결된 동맹 조약을 언급하면서 그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또한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파티마 대사단을 영접하며 위로하는 방식으로 상호 우호를 변함없이 유지하고자 했다. 더 나아가 파티마 제국의 기근을 해소해주기 위하여 총 2만 8천톤, 400만 모디오스에 달하는 곡물을, '파티마 시민들의 복리를 위하여' 제공하기로 약조했다.

그런 한편으로 동쪽의 셀주크를 대상으로 한 경계도 늦추지 않았다. 1054년 제1차 만지케르트 전투가 끝난 직후 콘스탄티노스는 마침 발칸에서 제1차 페체네그 전쟁이 끝난 기회를 이용하여 마케도니아의 정예 병력을 차출, 동방 전선에 배치시켜 튀르크 유목민들을 제압할 계획까지 세웠다. 이 계획은 테오도라까지 이어졌지만 군부 내부의 혼선과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의 군사 정변으로 무산되었다.

동맹자와 신흥 강호를 낀 3자 구도의 균형추가 되는 외교를 추진한 콘스탄티노스는 11세기 동로마 대외 정책의 핵심을 설계했다. 그 뒤를 계승한 테오도라나 미하일 6세도 그 기본 기조를 이어갔다. 하지만 점차 파티마 제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으며 1055년 경부터는 시리아를 두고 양국간 전쟁이 발발했다. 이 갈등은 1058년 경까지 지속될 것이었다.

3.6. 어려운 이탈리아 정책

이탈리아 전선은 다른 곳보다 다루기가 더 어려웠다. 수도에서 병력을 증파하려면 필연적으로 함대의 대규모 운용이 필요하고 보급도 어려워 많은 경비가 소모되었다. 반면 이 지역의 용병으로 유입되어 정착한 노르만족은 반란을 일으키고 유지하기가 쉬웠다. 여기에 노르만족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요르고스 마니아키스 장군은 국내 정치에 휘말려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이런 막간을 이용하여 노르만 군대는 남부 이탈리아의 동로마 영토에서 급속하게 세력을 불려나갔다.

1053년부터 이탈리아의 절도사(Katepan)로 부임한 이탈리아 출신 장군 아르이로스(Argyros)는[2] 교황령 및 이탈리아 여러 세력들과 공동으로 제휴하여 노르만 군대를 상대할 계획을 세워나갔다. 하지만 그의 동서 교회 화합 정책에 대하여 콘스탄티노스 9세가 전폭적으로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미하일 1세(1043년 - 1058년)가 이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함에 따라 연합 전선 구축은 어려워져갔다. 1058년, 동로마 국내가 혼란한 가운데 아르이로스 장군이 절도사에서 물러난 공백이 발생하자 로베르 기스카르의 우수한 지휘하에 이탈리아 남부 대부분이 노르만족의 지배에 들게 되었다. 다만 수도에서 증파된 동로마군의 대대적 반격이 1060년부터 재개되면서 양자의 전쟁은 1071년 바리의 함락까지 이어졌다.

3.7. 동서 교회 대분열

자세한 설명은 동서 대분열 문서로.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과 남부 이탈리아 등의 관할권 그리고 동로마 제국 소재 로마 교회에 대한 통제 등을 두고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급기야 1054년, 교황청 대사 일행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를 파문하고 케룰라리오스도 교황청 대사를 맞파문하면서 동서 교회는 공식적으로 분열되었다.

콘스탄티노스 9세는 당시 이미 지병인 관절염 등의 악화로 병석에 있던 상황이었지만 교황청 대사단을 불러들여 적절하게 대우하고 총대주교와 제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다르다는 점을 거듭 확인시켜주었다. 이런 정책하에서는 동서 대분열이 장기화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는 곧 사망해버렸으며 혼란에 휩싸인 동로마 제국은 교회 분열 문제를 후순위로 미루어두었다. 이 분열은 자연스럽게 장기화되어 서유럽권과 동로마 제국의 항시적인 논쟁거리가 되었고 멀게는 4차 십자군 사태까지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4. 평가

미하일 프셀로스 요안니스 스킬리치스 같은 1차 사료에서부터 비교적 현대 연구에 이르기까지 콘스탄티노스 9세의 성취는 상당히 평가 절하되었으며 그 시대에 일어난 경제적 악화를 특히 그의 개인적인 낭비벽에 가져다 붙이는 식으로 책임을 전가하였다. 그러나 Angeliki E. Laiou나 Cecile Morrisson, Costas Kaplanis가 진행한 논의를 통하여 페체네그 전쟁과의 연관성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국제 정치적 역할에 주목한 Michael Angold와 Anthony Kaldellis, Alexander D. Beihammer, Paul A. Blaum의 논저나 국내 정책에 관한 Telemachos C. Lounghis의 연구 등이 2000년대 들어와 본격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 역시 크게 일신되었다.

결과적으로 옛 평가를 주로 담고 있는 국내 시판 도서들과는 달리 오늘날 콘스탄티노스 9세는 학계 일반적으로 공인된 수준에서는 가장 극적인 평가 반전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5. 참고 문헌

Alexander D. Beihammer, Byzantium and the Emergence of Muslim-Turkish Anatolia, ca. 1040-1130, Routledge Press, 2017.
Angeliki E. Laiou, ''Byzantine Economy", Cambridge Press, 2007.
Attaleiates, Anthony Kaldellis Tr, History, Harvard Press, 2012.
John Skylitzes, John Wortley Tr, Synposis of Byzantine history, Cambridge Press, 2011.
Paul Stephenson, Byzantium's Balkan Frontier: A Political Study of the Northern Balkans, 900-1204, Cambridge Press, 2000.

Costas Kaplanis, 'The Debasement of the "Dollar of the Middle Ages"', The Journal of Economic History, Vol. 63, Issue 3, The Economy History Association, 2003.
Paul A. Blaum, 'Diplomacy Gone to Seed: A History of Byzantine Foreign Relations A.D. 1047-57',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Kurdish Studies Vol.18, 2004.
Telemachos C. Lounghis, The Byzantine historians on politics and people from 1042 to 1081, Byzantion Vol.72, No. 2, 2002.


[1] 이사키오스 1세의 강경한 조세정책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세입을 늘리기보다는 세출을 줄여야 했다. 그 결과 튀르크의 침입에 노출된 동부전선에서 제국군은 수동적, 소극적으로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2] 랑고바르드계이다. 바리에서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칸나이 전투(먼 옛날의 전투와 이름이 같지만 로마군이 이겼다.)에서 패한 랑고바르드계 귀족 멜루스(Melus)의 아들인데, 콘스탄티노플로 끌려왔지만 예전 동고트의 테오도리크 대왕처럼, 그저 갇혀있었던 게 아니라 회유 혹은 고급 교육을 받아, 이민족 출신 반란군 수괴의 아들이었는데도 처지가 완전히 바뀌어 남이탈리아의 제국령 전체를 관할하는 총독(Katepano/Catepan)으로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Argyrus (catepan of Italy) 중 'Upon the defeat of Melus, who had rebelled against the Byzantines, at the battle of Cannae in 1018, Argyrus and his mother were captured and taken to Constantinople as prisoners. He was out of confinement by 1038, when he returned to Apulia, then in an uproar over being pressed into service during the Byzantine invasion of Sicily.' 참고로 이 아르이로스는 이름이다. 로마노스 3세 아르이로스와 같은 성씨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