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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파일:은관문화훈장 약장.png
은관문화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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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시인
천상병
千祥炳|Cheon Sang-byeong
파일:천상병1930.jpg
출생 1930년 1월 29일[1]
일본 제국 효고현 히메지시[2]
사망 1993년 4월 28일 (향년 63세)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자택
아호 심온(深溫)
직업 시인, 평론가
수훈 은관문화훈장(2003년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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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colbgcolor=#fff,#1f2023>진동공립보통학교 (중퇴)
안와중학교 (중퇴)
마산중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 경제학 51 / 중퇴)
본관 영양 천씨[3]
배우자 목순옥[4](1972년 – 1993년)
가족 아버지 천두용, 어머니 김일선
누나 천기연, 형 천주병[5]
종교 가톨릭 (세례명: 시몬)
등단 강물 (1949) }}}}}}}}}

1. 소개2. 생애
2.1. 청년 시절2.2. 동백림 사건과 행려불자 생활2.3. 이후
3.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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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파일:천상병술자리.jpg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귀천〉 中-
대한민국의 문학인이자 시인.

〈귀천〉을 비롯한 여러 명시를 남긴 현대 문학계의 거성으로, 대체로 순수한 마음으로 인생을 노래하는 시를 남겼다. 그에 걸맞게 어린이처럼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수차례 전기고문을 당한 탓에 이후 30여 년의 세월동안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통받았다.

술, 그 중에서도 특히 막걸리를 즐겨 마셨으며 문학계에서는 손꼽힐 정도로 대단한 주당이자 기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당장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보이는 그의 어록과 기행만 모아 보아도 책 몇권은 쓸 수 있을 정도이다. 특히 비슷하게 문학계의 주당으로 이름을 드날렸던 시인 김관식과는 절친으로서 서로 죽이 잘 맞았다고 한다. 그의 친구였던 신경림 시인의 회고록과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술을 잘 먹기로 유명했던 김관식 시인은 젊어서부터 술을 많이 먹다가 몸이 금방 닳아서 요절했고, 천상병도 과음으로 인해 간이 쇠약해져 숨을 거뒀다.

2. 생애

2.1. 청년 시절

1930년 1월 29일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아버지 천두용(千斗用, 1900. 9. 8 ~ ?. 9. 3)과 어머니 김일선(金日善)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 막내로 태어났다. 1934년에 잠시 귀국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경상남도 창원군 진동면 진동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 287번지에 본적을 두고 거주하면서 1937년 진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2년을 다니다가 1940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간사이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치바현에 있던 아와(案房)중학교에 입학하여 다녔다. 이처럼 천상병은 자신의 유년시절은 거의 일본에서 보냈다.

1945년 8월, 광복이 이루어지면서 부모와 함께 귀국하여 경상남도 마산시(現 창원시)에 정착하였고, 마산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중학생 시절인 1949년, 그의 시인 〈공상(空想)〉이 《죽순(竹筍)》 11집에 추천으로 실리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또한 이때 담임교사의 추천으로 그의 또다른 작품인 〈강물〉이 《문예》지에 추천되어 실리기도 하였는데, 당시 담임교사가 바로 유치환이었다.

6.25 전쟁 초기였던 1950년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간 근무했다. 1951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지금은 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 산하)에 입학하여 송영택·김재섭 등과 함께 동인지인 《처녀》지를 발간했다. 1952년, 《문예》지에 〈갈매기〉가 추천을 완료받아 시인으로서 정식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1953년, 《문예》지에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 · 〈사실의 한계〉 등의 평론을 발표하는 등 시 문학 뿐 아니라 평론 방면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1954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4학년 1학기 때 중퇴하였다. 이후 1956년, 《현대문학》지에서 집필을 하였고 외국서적을 몇 권 번역하기도 하였다. 1964년에는 김현옥 당시 부산직할시장의 공보실장으로 재직하였는데 이것이 천상병의 생애에 월급쟁이로 직장생활을 한 유일한 이력이었다. 그러나 자유로운 성향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천상병은 그마저도 2년 만에 그만두게 된다.

1960년대 당시의 천상병은 주로 서울 명동 거리를 드나들며 또래의 문학인들과 어울리고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일정한 거처가 없었으므로 친분 있는 지인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더부살이를 하거나 여인숙에 묵기도 했다. 당대의 사람들은 바로 이 천상병과 김관식, 그리고 이현우 등을 문학계의 3대 기인으로 꼽기도 하였다. 김관식은 시인 서정주의 동서였는데 당시 문학계의 대선배였던 월탄 박종화를 "박군"이라 칭하는 등 독설을 잘 퍼붓기로 유명했다. 이현우는 당대의 베스트셀러 소설가 김말봉의 의붓아들이었는데 안정된 생활을 때려치우고 스스로 떠돌이가 되었다가 80년대 이후에는 아예 종적을 감추어 행방불명 상태가 되었다.

2.2. 동백림 사건과 행려불자 생활

1967년, 천상병은 독일 동(東)베를린 공작단 사건, 일명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서 6개월간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천상병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말았다. 동백림 사건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이는 사실 같은 해에 일어났던 6.8 부정총선 규탄 시위를 잠재우기 위해 정치적으로 계획된 간첩조작사건 중 하나였다.

그 황당한 전말은 다음과 같다. 천상병의 술친구 중 한 사람인 강빈구[6] 서독에 유학하던 시절 동독을 드나들던 일이 있었다. 그는 술자리에서 동베를린을 드나들던 경험을 자랑삼아 천상병에게 말해 주곤 했다. 그런 친구가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자 천상병 또한 술자리에서 그 사실을 전해 듣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굴비처럼 엮여 들어가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나 천상병은 평소 친구들에게 푼돈을 뜯어 막걸리를 마시곤 했는데, 강빈구 또한 수차례 천상병에게 약간의 돈을 쥐어주곤 했다. 당시 사건을 수사하던 검사들은 이를 천상병이 간첩으로부터 받은 공작금이라 주장하며 그를 더욱 압박했다.[7]
결국 천상병은 선고유예로 석방되었지만 졸지에 간첩으로 몰려 전기고문을 당하는 바람에 심신(心身)이 크게 병들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체중이 40kg까지 줄었고 성기능을 잃어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치아가 대부분 빠져 버렸을 뿐 아니라 말을 더듬는 버릇까지 생겼다. 신체도 망가졌지만 정신적인 충격도 커서 한동안 정신착란에 가까운 증세를 보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8] 황당하게도 당시 천상병에게 술자리에서 자신이 동독에 넘나든 것을 자랑했던 친구는 별탈없이 무사히 풀려났는데, 이는 그가 말더듬이였기 때문에 검찰이 결국 그를 간첩으로 엮는 데 실패한 탓이었다.

1970년 김관식 시인이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해 〈김관식의 입관〉을 발표했다. 또한 이 해에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시 〈귀천〉이 《창작과비평》지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천상병은 유독 죽음을 소재로 하는 시를 많이 발표했는데, 동백림 사건 당시에 받았던 정신적인 충격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해 가을에 발표한 〈소릉조〉에 따르면, 그는 여비가 없어 추석에도 부모가 묻힌 산소에 성묘하지도 못하고 형제들을 만나지도 못하는 등 경제적으로도 매우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1971년, 천상병은 행려불자, 무연고자로 오해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뒷이야기가 있는데, 천상병은 평소의 버릇처럼 지인들에게 밥을 빌어먹기 위해 부산으로 갔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자 서울행 완행열차에 무임승차했다. 도중에 왜관에서 지인인 시인 구상의 부인이 병원을 하고 있다는 정보만 믿고 한밤중에 열차에서 내렸으나 끝내 길을 찾지 못하고 다시 서울행 열차에 무임승차했다. 이렇게 천상병이 서울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통금이 해제된 새벽녘이었는데, 그는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에 사는 시인 김구용의 집에 찾아가 밥을 얻어먹으려다가 삼선교에서 길에 놓여있는 자전거를 발견했다.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천상병은 무작정 자전거를 잡아 타려다가 마침 그 근처에 있었던 자전거 주인에게 붙잡혀 절도죄로 성북경찰서에 끌려갔다. 그런데 그 곳의 경찰들은 고문 후유증과 음주 및 영양실조로 꼴이 말이 아니었던 천상병을 그대로 택시에 태워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렸다.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일로 천상병이 실종되어 버리자 동료 시인들은 그가 거리를 떠돌다 객사한 것으로 오해하고 그 해에 천상병의 작품들을 모아 유고시집인 《새》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천상병은 살아 생전에 유고시집이 출간되는 진기록을 세우고 만 것이다. 다행히도 책이 출판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천상병이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생존이 확인되었다.[9] 그 당시에 천상병의 친구의 여동생이었던 목순옥(1935~2010) 여사는 수년간 천상병을 간병해 주었는데 그 것이 계기가 되어 1972년 결혼하였다. 김동리 선생이 주례를 서주었다고 한다. 천상병이 아내 목순옥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동거하게 되면서 그의 오랜 방랑 생활도 끝을 맺었다.

2.3. 이후

1979년 시집 '주막에서', 1984년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1991년 '요놈 요놈 요 이쁜놈' 등의 시집을 발표하였다. 간(肝)경화증을 앓다가 1993년 4월 28일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379번지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곳은 이후 384번지로 지번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장암동 384번지에는 현재 수락리버시티 2단지아파트가 들어서있다.

아내 목순옥이 천상병의 사후인 1993년 8월에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라는 글모음집을 펴내면서, 유고시집인 《나 하늘로 돌아가네》를 함께 펴냈다. 이 날은 천상병 시인이 죽은 지 100일 째 되는 날이다.

본래 개신교 신자였으나 말년 즈음에 천주교 개종하였다. 세례명은 시몬.

천상병 시인의 대표작을 원작으로 한 KBS 1TV <인간극장> 9화 '귀천'이 1994년 방영됐다. 정진이 주인공 천상병, 김자옥이 천 시인의 아내이면서 원작자인 동시에 극의 화자인 목순옥 여사로 나왔다. 동명의 연극도 있었으며, 이재상 연출에 주연은 강태기. 이 연극은 마산MBC(현 MBC경남 창원본부)홀에서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는데 당시 천상병 시인의 모교이던 마산고등학교 학생들 단체관람도 했었다. 목순옥 여사는 연극공연 며칠 후 학교를 찾아와 시인의 뜻을 기려 준 후배들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3. 일화

천상병 시인은 많은 일화를 가지고 있다. 여기 실린 것은 그중 유명한 것들로 지극히 일부이다.


[1] 영양천씨대동보 처사공편 1권 1063쪽에는 1월 1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2] 제적등본에는 경상남도 창원군 진북면(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대티리 799번지에서 태어났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 때문에 마산시(現 창원시) 태생이라는 주장도 있다. [3] 처사공파(處士公派) 15세 병(炳) 항렬. 영양천씨대동보 처사공편 1권 1063쪽에는 千炳으로 등재되어 있다. [4] 1935. 3. 5 ~ 2010. 8. 26. 사천목씨(泗川睦氏) 목재문(睦在文)의 딸이다. [5] 千柱炳. 1925년 11월 24일생. [6] 천상병과는 서울대 상과 동기이자 오랜 친구였다. [7] 당시 천상병이 강빈구로부터 받았다는 돈은 100~500원 정도의 돈으로, 1965년부터 1967년 사이에 도합 3만 원의 돈을 받았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큰 돈이었다지만, 60년대 당시의 1만원이 지금의 화폐가치로 약 4만원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간첩에게 받았다는 공작금 치고는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이다. [8] 천상병이 석방되던 날,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기 위해 명동의 금문다방에 데려갔는데, 이때 천상병은 다방에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여기가 뉴욕이냐?"라 묻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9] 천상병의 생존이 알려진 계기도 특이했다. 정신병원에서 천상병의 담당의사는 김종해 박사로, 평소에 수필을 써서 문학에 관심이 있었다. 당시 천상병이 정신착란 증세를 보여 그 신원을 알 길이 없었는데, 어느날 신문을 보다가 천상병이 실종되는 바람에 유고시집이 출간되었다는 기사를 보자 혹시 자신의 환자가 천상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를 신문사에 알렸다. 결국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정신병원을 찾은 문단 동료들은 천상병의 생존을 확인하고 그를 퇴원시켰다. 그러나 천상병은 한동안 정신건강을 회복하지 못해 자신을 찾으러 온 친구들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10] 서양사학자 민석홍의 책으로, 과거에는 대표적인 서양사 개론서 중 하나였다. [11] 김동길 교수가 1928년생, 천상병 시인이 1930년생이라 둘은 친구나 다름없었기에 천상병 시인이 교수님이라고 부르면서 반존대를 하며 친하게 지냈다. "교수님아, 뭐하셔?" 같은 식의 화법이다. [12] 아무리 재라도 형태만 살아있으면 은행에서 쓸 수 있는 돈으로 바꿔준다. 돈 탔다고 그냥 버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