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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1941)

파일:external/nimage.newsway.kr/20160602000371_0640.jpg
성명 정진(鄭珍)
본명 정수황
출생 1941년 11월 22일
만주국 길림성 길림시
(現 중국 지린성 지린시)
사망 2016년 6월 2일 (향년 74세)
학력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 / 학사)
가족 부인, 슬하 1남 1녀

1. 개요2. 생애3. 활동 내역
3.1. 드라마3.2. 연극3.3. 영화
4. 수상 경력5. 여담6.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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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배우. 장동휘, 황정순, 박규채, 도금봉, 김무생, 박정자, 조상건 등처럼 인천에서 자란 배우로 손꼽힌다.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편의 한명회, 임진왜란 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태조 왕건의 능환 등의 명품연기로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1941년 만주국 길림성 길림시(現 중국 지린성 지린시)에서 정미소 기술자였던 아버지 정용풍과 어머니 최정자 사이에서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나 1945년에 가족을 따라 귀국해 경기도 인천시 화평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인천축현국민학교[1]부터 동산중/고등학교까지 재학했다.

초등학교 시절 학예회에서 노래 및 연극 솜씨를 자랑하며 응원단장을 지냈고, 중학생 때는 교회 성가대에서 독창을 맡거나 아동극에서 활약하는 한편, 부모로부터 받은 용돈으로 여러 극장에서 쇼, 국극, 만담, 코미디 영화 등을 보면서 배우의 꿈을 점차 키우며 3학년 때 배우가 되기로 뜻을 정했다. 미추홀종합예술학원 야간부에서 백철의 <문학개론> 부록에 나온 '희곡론'을 터득하며 연기 수업을 받았으나 학원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그럼에도 동산고 시절에는 연극반을 결성해서 유치진의 <별>을 연습했으나 예산 문제로 공연을 못 했다.

그 뒤 서라벌고등학교로 전학했으나 그 학교가 인문계라 연극 공부를 위해 중퇴했고, 서울 충무로의 한국배우전문학원에서 연기 수업을 받은 후 1960년에 비공식적으로 졸업장을 구해다가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1기생[2] 으로 입학하여 이해랑, 양동군, 이근삼 등에게서 배웠다. 특히 이해랑의 눈에 든 그는 1962년 연극 <그 얼굴의 햇빛을>에서 데뷔했고, 졸업 후 군에 입대하여 말단 부대 소총수로 있다가 제대를 얼마 앞두고 백마부대 선발대로 자원하여 베트남 전쟁에 나갔다.

제대 후 1968년부터 이해랑이동극장에 1년 동안 몸담으며 전국을 유랑하다 서울로 정착한 후, 원방각, 사계, 신협, 제작극회 등 여러 극단을 전전하며 배우, 연출가, 분장사로 1인 3역을 맡았다. 1973년부터 5년 간 인하대학교 중앙연극동아리 '인하극예술연구회'에 몸담으며 연출 및 조언자로서 연극학도들을 돕기도 했다. 또한 1973년 이성구 감독 영화 <쥬리아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출연해 은막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의 홈그라운드는 연극이었으나, 주로 정통 연극만 고집한 데다 인기에 연연치 않았기에 연극배우로서의 수입이 녹록지 않아 생계에 문제가 생겼다. 그런고로 1972년경에는 얼마 간 고향 인천에서 소극장운동을 할 당시 친구의 맥주집 사업을 도와준 바 있지만 여의치 않았고, 서울로 돌아가 종암동에서 매형이 운영하던 음반가게도 인수했으나 본인이 연기 활동에 열중한 탓에 실제 업무를 종업원들에게 맡기다 보니 이마저도 1년 못가 폐업했다.

1979년 결혼 후 TBC 탤런트로 특채되어 3.1절 특집극 <땅과 하늘사이>의 일본 앞잡이 역을 연기하면서 본격 데뷔했다. TV 탤런트 활동 초기에는 <형사>, <추적> 등지에서 주로 시정잡배 혹은 노인 연기를 했고, <동녀미사>에선 남사당패 역을 맡는 등 주로 단역을 많이 맡았다.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 김희갑[3][4] 역을 맡아 '김희갑 닮은 꼴'로 배우 인생에서 처음 유명세를 탄 후, <거부실록> '공주갑부 김갑순'에선 주인공 김갑순의 직계 부하 '어보'를 비롯, KBS <TV 문학관> '메밀꽃 필 무렵'의 조 선달, <객주>의 최돌이, <백조부인>의 보일러공 등 점차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아 성격파 배우로 인정받았다.

1984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의 한명회 역으로 처음 주연을 맡아 절정기에 올랐고, 1985년 임진왜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2000년 태조 왕건 능환 역 등으로 이름을 남겼다. 특히 한명회 역할은 레전드로 가히 국민적 인기를 모았다. 유자광 역으로 나왔던 변희봉과 같이 '~는 내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대사가 특히 유명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할은 외모 싱크로율이 매우 높다고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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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MBC의 조선왕조 오백년은 사극 드라마의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2000년대 이후 <인현왕후> 등 일부를 빼곤 재방영 혹은 해외 DVD 판매 등이 되지 않아 사실상 잊힌 작품이 되었으나, 2016년 MBC Archive 개설 후 올드 팬들 사이에서 다시금 회자되고 있다.

허영만 만화 식객을 원작으로 한 두 작품에 모두 출연했는데, 영화에는 성찬의 할아버지, 드라마 자운 선생 역할을 맡았다. 또한 영화 성공시대에서는 유미사 사장 역으로 출연했다.

영화 및 TV 드라마에서 입지를 점차 다져가는 와중에도 간간이 고향 인천으로 가서 레스토랑이나 다방을 빌려다가 '살롱드라마' 형식의 연극을 선보였고, 1984년에는 사비를 털어가며 중구 경동 박문초등학교 옆 건물 1~2층에 '경동예술회관'을 열어 인천 향토연극 정착에 자리매김하려 했으나 연극 인프라가 약한 데다, 초대권에 의존하는 관객 유치 등으로 돈을 벌지 못해 1987년에 문을 닫았다. 그래도 인천 향토연극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여 2002년에는 남동구 구월3동 1347-14번지에 소극장 '진 씨어터'를 열었고, 2003년 극단 '경동예술'을 다시 차렸다가 # 2004년부터 2년간 제4대 인천시립극단 예술감독까지 지냈다.

2015년 9월부터 담낭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와중에도 1인극 <일요일의 마네킹>을 준비해왔으나, 2016년 6월 2일 향년 74세로 숨을 거뒀다.

3. 활동 내역

3.1. 드라마

3.2. 연극

3.3. 영화

4. 수상 경력

5. 여담

6.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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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우 전무송과는 동창이다. [2] 동기로는 배우 김기일, 김무생, 이성웅, 하강일 PD 등이 있다. [3] 실제 외모도 김희갑과 닮은 편이었다. [4] 제4공화국의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 에피소드에서도 같은 역할로 출연했다. [5] 그래도 복혜숙, 장민호, 이치우, 김성원, 김소원, 오승룡, 이도련, 주호성 등처럼 성우 역할까지 가능한 배우들이 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