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봉서의 주요 수훈 이력 ·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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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3년 | ||||||||||||||||||||||||||||||||||||||||||||||||||||||||||||||||||
이름 | 구봉서 | ||||||||||||||||||||||||||||||||||||||||||||||||||||||||||||||||||
분야 | 희극인 | ||||||||||||||||||||||||||||||||||||||||||||||||||||||||||||||||||
은관문화훈장(2등급) | |||||||||||||||||||||||||||||||||||||||||||||||||||||||||||||||||||
연도 | 1992년 | ||||||||||||||||||||||||||||||||||||||||||||||||||||||||||||||||||
이름 | 구봉서 | ||||||||||||||||||||||||||||||||||||||||||||||||||||||||||||||||||
분야 | 희극인 | ||||||||||||||||||||||||||||||||||||||||||||||||||||||||||||||||||
옥관문화훈장(4등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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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78787><colcolor=#fff> 구봉서 具鳳書 | Koo Bong Se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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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6년 11월 5일[1] |
평안남도 평양부 (現 평양시) | |
사망 | 2016년 8월 27일 (향년 89세)[2]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 | |
발인 | 2016년 8월 29일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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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능성 구씨 (綾城 具氏)[3] |
혈액형 | A형 |
학력 |
대동상업고등학교 (졸업) 도요음악전문학교[4] (졸업) |
가족 | 배우자 정계순(1938년생), 아들 4명 |
데뷔 | 1956년 영화 <애정파도> |
종교 | 개신교( 예장통합)[5] |
직업 | 배우, 코미디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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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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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모습 |
"내가 재미있게 말하면 너희들은 웃었지. 슬플 때에도 말이야.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슬프지. 내가 없으면 누가 웃겨주니? 내가 웃으면… 이렇게 말이야."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중에서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중에서
한국의 코미디언. 전성기 때는 1세대 코미디 트로이카( 서영춘, 배삼룡, 구봉서) 중 한명이었다. 다만 구봉서는 당시로서는 고학력[6]인데다가, 매우 지적이고[7], 정극에서도 활약이 대단하여 동료들과 다른 대우를 받았다. 2020년대인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는 MC, 코메디, 정극 전 분야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고 인기를 누린 대스타. 거기에 1세대 코미디언들 중 89세로 가장 오래 살았다.[8]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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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평안남도 평양부(現 평양시)에서 태어나 3살 때인 1929년에 부모님을 따라 경성으로 이사했고, 대동상업고등학교(1945년 졸업)와 일본의 도요음악전문학교(東洋音樂專門學校)[9]를 졸업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가수 김정구의 친형인 김용환이 이끌던 태평양가극단에 들어가 아코디언 악사로 활동하다가,[10] 어느 날 연극 공연을 앞두고 배우 한 명이 도망가는 바람에 배역을 대신 맡아서 출연하게 되었고 대본에도 없는 애드립 위주의 연기로 관객들을 요절복통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다만 공연 후 "대본에도 없는 대사를 쳤다"며 연출자한테 죽지 않을 정도로 맞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구봉서는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고 그 후 1956년 영화 애정파도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6.25 전쟁 당시 국군 장병들에게 위문 공연을 해 주는 부대인 군예대로 복무했을 때 북한군에게 붙잡혀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다른 군예대 대원들과 이동 도중 민가에서 쉬고 있을 때, 갑자기 인민군의 공격을 받았는데 다행히 국군 부대가 지원을 와서 구봉서를 비롯한 군예대를 구출해 주었다고 한다.
1958년 영화 오부자에서 영웅호걸 4형제[11] 중 막내 걸 역할을 맡아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때부터 구봉서는 막둥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당대 최고의 희극배우로 발돋움했다.
영화배우로서 구봉서는 주로 '벼락부자', '남자 가정부', '형님먼저 아우먼저' 등 코미디 영화에 출연했지만 ' 돌아오지 않는 해병', ' 수학여행' 등의 정극 작품에서도 눈부신 연기력을 선보인 바 있다. 특히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는 죽기 직전 남긴 "내가 재미있게 말하면 너희들은 웃었지. 슬플 때에도 말이야.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슬프겠지. 내가 죽으면 누가 너희들을 웃겨주니? 내가 웃으면… 이렇게 말이야." 라는 유언이 극중 최고의 명대사로 남았다.
또한 '수학여행'에서는 작은 섬마을 국민학교 분교에 부임하여 아이들에게 도시의 문명을 접하게 해주려고 좌충우돌 하며 서울 수학여행을 주선하는 인간적이고 자상한 선생님 역할로 호평받았다. 영화 수학여행은 1969년작인데, 서울에 있는 노면전차가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극 중에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반공 영화인 <7인의 여포로> (1965)에서는 지적이고 신사적인 인민군 장교로 나왔는데, 이 때문에 북한 미화로 곤욕을 치를 뻔 했다. 실제로 감독인 이만희는 이 때문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치소에 갇혔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 영화는 그 장교가 남한 여군 포로들에게 감화해서 전향을 결심하고 함께 대한민국으로 귀순하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북한 미화란 주장이 나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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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으로서 최고의 재능을 보여주면서도 정극에서도 탄탄한 연기력, 훤칠한 키와 수려한 외모로 여성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1960년대 초중반 DBS 라디오의 안녕하세요 구봉서입니다, 막둥이 가요만보 등의 DJ로 활약하면서 "이거 되겠습니까? 이거 안 됩니다!", "골라잡아 한 곡조 꽝!" 등등 여러 유행어들을 남기기도 했다.
TV 시대가 개막된 1960년대 이후 구봉서는 TV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1967년 KBS의 코믹 드라마 사직골 구서방의 주연을 맡았고 1969년 개국한 MBC의 코미디 프로그램인 웃으면 복이와요의 고정 출연자로 맹활약 했으며, 그 외 MBC의 시트콤 부부만세에서 배삼룡과 같이 코믹 연기를 선보인 한편 세태풍자 꽁트 프로그램 5분 무대의 MC 겸 출연자로도 호연했다. 이 프로그램에는 김희갑, 송해 등이 출연했고, 나중에 인기가 높아지면서 방송 시간이 2배로 늘어나 10분 무대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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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서가 진행했던 5분 무대의 당시 신문 광고.[12] |
이렇듯 구봉서는 당대 한국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자리 잡으며 김희갑, 서영춘, 배삼룡, 곽규석 등과 함께 한 세대를 풍미한 희극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만으로 수식하기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위의 그의 활약상에도 나타나 있지만, 본업인 코미디 장르뿐만 아니라 진지한 정극 영화 출연도 매우 잦았었고 (400여편 정도에 출연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정극에서도 주연급 역할에 여러 차례 출연하여 상당한 히트작들을 남기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정극과 코메디 영화를 병행했음에도 전혀 정극 배우로서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았다. 또한 각종 TV, 라디오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현장 MC와 스탠드업 코미디로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와 비견될 만하게 다방면으로 활약한 이는 김희갑 정도이나, 정극에서는 조연에 머무르거나, 팔도강산 시리즈를 통해 일찌감치 노역으로 자리잡아 주인공이 되었다는 점에서 구봉서보다는 스타로서 한 수 아래이긴 했다. 구봉서 이후 희극인이 코미디 영화가 아닌 정극에서 주연을 맡아 당대 최고의 여배우와 공연하며 히트작을 남긴 이는 없다.
당시 구봉서는 이후 TV쇼와 예능에 거의 모든 커리어가 집중되어 있는 후대의 한국 코미디언이나 공채 개그맨들과는 다르게 일종의 최고의 코미디언 겸 최고의 정극배우라고 보는 것이 맞으며, 명실상부 한국 연예계 초창기의 멀티 엔터테이너이자 서구권의 짐 캐리, 로빈 윌리엄스, 에디 머피, 빌 머레이와 같이 정극과 코미디를 수시로 넘나들며 어느 한 쪽으로 크게 치우쳐지지 않고 두 장르에서 최정상의 위상을 유지한 서구권의 코미디언스러운 행보를 보였던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지금도 이런 행보를 보이는 한국의 개그맨이나 예능인들은 매우 드물다. 동시대의 배삼룡과 서영춘은 정극에서의 활약이 드물었으며 이주일, 심형래, 이경규, 김국진, 하다 못해 지금의 유재석도 TV쇼 진행자 포지션에 가깝지 이런 입체적인 커리어와는 거리가 멀다.
참고로 심형래와 이경규는 구봉서처럼 배우나 더 나아가서 감독으로서 정극 영화에 꿈이 있었으나, 실패한 케이스들이다. 이주일은 코미디 영화에만 출연했었으며, 김국진은 반달곰 내 사랑이란 정극 드라마에서 좋은 결과를 얻긴 하였으나, 이내 내/외적으로 슬럼프를 맞으며 배우 활동은 끊겼고, 예능 커리어도 한동안 부침을 겪었다. 임하룡은 코미디 연기는 거의 접은 채 아예 배우로 전업했다.
구봉서는 당시로는 드문 일본에서 음악대학을 나온 대졸 학력에 일본어가 능숙하여 늘 손에 일본 문예잡지나 문학소설을 들고 다니며 읽는 등 남다르게 이지적인 면도 있었다. 한마디로 1980년대 이전까지 그는 당대 연예계의 지배자라고 할 만한 위치에 서 있었다고 봄이 옳다.
이 영상은 72년에 방영되어 당대에 명성을 날렸던 코미디였던 '양반인사법'이다. 최후반부가 삭제되긴 했지만, 당시 최고의 코미디언이었던 배삼룡, 구봉서, 송해, 박시명[13] 4인의 개그를 볼 수 있는 희귀한 영상이다. 송해, 구봉서, 배삼룡, 박시명, 순으로 앉아 있다. 당시는 생방에 방청객들이 보는 가운데 개그를 진행했는데도 불구하고 능청스럽게 애드리브를 날리며 연기하는 모습들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21세기에 보아도 꽤 재미있다.
1975년, 농심라면 광고에 곽규석과 출연하여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유행어를 남겼다. 이후 구봉서는 농심을 넘어 국내 라면계를 대표하는 신라면의 첫 광고 모델로 발탁되었다.
1980년대에는 이주일, 심형래 등 여러 후배들의 등장으로 이전과 같은 지배자의 면모는 약해졌으나, 코메디언계의 대부로 1990년대까지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1997년, 자서전 ' 코미디 위의 인생'을 출간했다.
3. 사망
2010년 이후 고령으로 인해 외부 활동을 접고 거의 칩거하던 중, 2016년 8월 27일 새벽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9세.[14] 빈소는 서울성모병원에 차려졌고 8월 29일에 발인을 치렀다. 생전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던 고인의 뜻을 따라 조문객들의 배례(영정에 절하기)도 금하는 등 개신교식 장례를 치렀다.빈소 입구에 조의금은 정중히 사절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는데, 코미디언들 중 어려운 사람이 많으니 조의금을 받지 말라는 고인의 뜻을 존중한 것이라고 한다.( 기사) 또한 1979년부터 경상북도 문경시 소재의 사회복지법인 신망애육원을 37년 동안 후원해 왔으며, 자신이 죽더라도 후원을 끊지 말아달라는 유언을 하나 더 남겼다고 한다. 구봉서 '내가 죽더라도 후원 끊지 말라' 유언
4. 출연 작품
4.1. TV
- 웃으면 복이와요 (1969년~1985년, MBC)
- 일요일 밤의 대행진 (1981년~1988년, MBC)
- 천하한마당 (1986년, MBC)
- 그대가 꽃 (2015년, KBS)
4.2. 드라마
4.3. 시트콤
4.4. 영화
- 애정파도, 1956년
- 눈 나리는 밤, 1958년
- 오부자, 1958년
- 구봉서의 벼락부자, 1961년
- 맹진사댁 경사, 1962년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년
- 남자는 안팔려, 1963년
- 남편은 바람둥이 1963년
- 사위 소동 1963년
- 추격자 1964년
- 욕탕의 미녀 사건 1964년
- 사르븬 강에 노을이 진다 1965년
- 오해가 남긴 것 1965년
- 언제나 그날이면 1965년
- 비밀정보 88번지 1966년
- 만져만 봅시다 1966년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1966년
- 사직골 구서방 1968년
- 팔푼이 사위 1968년
- 팔푼이 며느리 1968년
- 단벌신사, 1968년
- 남자 식모 1968년
- 남자 미용사 1968년
- 남정임 여군에 가다, 1968년
- 막동이 신혼 십개월 1969년
- 무정한 검객 1969년
- 요절검객 팔도검풍 1969년
- 팔푼 부부 1969년
- 억울하면 출세하라 1969년
- 식모 삼형제 1969년
- 여자 기생 1969년
- 수학여행, 1969년 : 서울로 수학여행을 온 지방 학교 아이들을 다룬 영화로 구봉서가 담임으로 나온다. 테헤란 국제영화제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1982년 삼화비디오에서 비디오로 발매했으나 엄청나게 드문 비디오이다. 2000년에 비디오로 재발매하고 DVD도 나왔으나 저화질판이던 것을 2019년에 영상이 복원 보정되어 고화질로 유튜브로 업로드되었다.
- 신세 좀 지자구요
-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 남자 식모 2 1970년
- 당나귀 무법자, 1970년
- 구봉서의 구혼작전, 1970년
- 염통에 털 난 사나이 1970년
- 남자는 괴로워 1970년
- 내일의 팔도강산 1971년
- 우리 강산 차차차 1971년
- 돈에 눌려 죽은 사나이 1971년
- 3인의 검은 표범 1971년
- 부부교대, 1973년
- 운수대통, 1975년
- 마음 약해서, 1980년
- 남자 가정부, 1980년
- 형님먼저 아우먼저, 1980년
4.5. 라디오
- 홀쭉이와 길쭉이
- 노래 실은 희망열차
- 노래는 세월따라
- 안녕하세요 막둥이 구봉서입니다
- 노래하는 유람선
5. 수상
- 1963년 제1회 청룡영화상 특별상(집단연기)
- 1987년 문화포장
- 1992년 옥관문화훈장(4등급)
- 2000년 MBC 코미디언부문 명예의 전당
- 2006년 제13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연예예술발전상(연기)
- 2013년 은관문화훈장(2등급)
- 2016년 MBC 방송연예대상 공로상
2016년 공로상 수상 당시 박명수가 일어서서 고인이 된 대 선배 구봉서에게 존경의 예를 표했고 연이어 무한도전 멤버들과 연예대상에 참석한 참석자들도 기립 박수를 보냈다.
6. 동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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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서의 연예계에서의 입지는 한국 연기자들의 대부 최불암도 존경심을 표할 정도로 대단했으며, 최불암의 방송계 대 선배일 정도로 굉장한 원로 연예인이었다.
1984년 12월 방영된 KBS 특집 쇼 코미디 반세기에 보면 그 옛날 코미디 원로들의 서열관계를 볼 수 있는데. 진행을 맡은 송해가 "막둥이 구봉서 형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패널석에 앉아 있는 원로들이 대부분 구봉서보다 선배이거나 동료인데, MC인 송해가 구봉서보다 후배인 상황이다. 참고로 저기 출연한 사람들 모두가 한국 코미디계의 조상격인 사람들이다.
서영춘은 동생 같이 아끼던 후배이자 동료였는데, 구봉서가 개신교에 귀의하기 전엔 말술에 줄담배를 불사하며 다소 방탕한 삶을 살면서 술은 입에도 못대는 샌님이던 서영춘을 항상 술자리에 끌고 다니면서 서영춘도 구봉서 못지 않은 술고래가 되는 것에 크게 기여(?) 했다고 한다. 애초에 극장 간판을 그리던 화공 출신이라 무대 체질이 아니었던 서영춘은 공연 전에 긴장을 풀고자 소주를 반병 정도 마시고 무대에 올라가던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구봉서는 이후 아내의 권유로 크리스천이 되면서 술담배를 모두 끊었고 술로 인해 건강이 나빠진 서영춘을 걱정하여 술을 끊을 것을 권유했지만 서영춘은 벌컥 화를 내며 "형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무슨 소리 하는거유!!" 라고 대들었고, 구봉서는 아무 말도 못 한채 뒤돌아서서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결국 술로 인하여 간암이 발병한 서영춘은 1986년 11월 1일 세상을 떠났고, 구봉서는 이 일을 두고두고 애통해 했다고 한다. 게다가 하필 서영춘이 세상을 떠난 다음날인 11월 2일은 구봉서의 환갑날이었다. 그래서 당시를 회고하는 언론 인터뷰 때 "전날 영춘이가 죽는 바람에 다음날 자식들이 환갑 잔치를 열어줬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라고 한숨을 쉬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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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서영춘과 함께한 영화. 대부분 출연자가 고인이 되었다.[15] | 백남봉의 빈소에서 유족과 함께 오열하는 구봉서. |
동갑내기 친구이자 동료 코미디언이었던 배삼룡과는 굉장히 막역한 사이였다. 6.25 전쟁 이후 육군본부에서 처음 만나 인연을 맺었으며 MBC 웃으면 복이와요에 동시에 출연하고 1970년대 MBC의 인기 시트콤 '부부만세' 에서도 콤비 플레이를 보이는 등 연예계에서 둘도 없는 단짝으로 친분을 쌓았다. 1970년대 중반 배삼룡이 MBC와 TBC 사이의 피 튀기는 스카웃 싸움에 휘말려 공중에 붕 떴을 때 같이 일하자고 설득하여 그를 MBC에 잔류시켰고, 사업 실패 후 연예계를 떠나 방황하던 배삼룡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복귀시킨 이가 바로 구봉서였다.
2010년 2월, 배삼룡이 노환으로 작고하자 먼저 간 친구를 애도하기 위해 뇌졸중으로 건강이 악화된 몸에도 불구하고 휠체어를 타고 와서 조문을 하는 등 우의(友誼)를 다지기도 했다. 배삼룡이 세상을 떠나기 전 문병을 온 구봉서는 방송 인터뷰에서 "저놈(배삼룡)이 죽으면 난 친구도 동기도 누구 하나 남지 않는다" 라며 서럽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원맨쇼의 달인이던 후배 코미디언 백남봉과도 친분이 깊었는데, 백남봉이 2010년 7월 폐암으로 별세하자 불편한 거동에 휠체어에 의지하여 빈소를 찾아와서는 "(백남봉)이 놈이 살아 생전 성질이 급하더니... 형을 놔두고 동생이 먼저 갔다. 아주 나쁜 놈이다" 라고 고인을 책망하며 통곡하는 모습이 주변 조문객들의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더구나 같은 해 2월에 친구인 배삼룡도 먼저 갔는지라, 형제처럼 아끼던 친구와 후배를 한 해에 전부 보냈으니 남은 자로서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에는 MBC에서 이주일과도 협연했는데, 이주일이 구봉서 앞에서는 꼼짝을 못 하는 점을 이용한 개그를 주로 선보였다. 실제로 구봉서가 이주일보다 14세 위며, 경력 면에서도 훨씬 앞선다. 1980년대 이주일의 위상은 2010년대의 유재석보다 훨씬 더 압도적일 정도였는데, 무명시절부터의 경력도 길고 1970년대 후반부터 쌓아올린 인기와 커리어로 MBC에 출연을 시작한 1985년에는 이미 거물 중의 거물급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런 이주일을 경력빨, 인기빨로 찍어누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코미디계의 거성이 바로 구봉서였던 것이다.
일요일 밤의 대행진[16]의 코너 중 하나인 '이주일의 카운터 펀치'에서 이주일이 구봉서에게 노골적으로 쩔쩔매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영상 소재를 다루다가 구봉서에 대하여 신나게 뒷담화를 하던 이주일이 구봉서가 나타나서 뭐라고 핀잔을 늘어놓자 바로 태도를 바꾸어 굽실거리며 잘못했다고 빌고 온갖 변명을 늘어놓다가도, 소심하게 펀치볼을 치면서 구시렁거리고 깐족거리며 반항(?)하는 이주일의 모습이 웃음 포인트. 고전 코미디 극의 정석인 '권력에 대한 반항'을 잘 활용했다. 해당 영상에서는 이게 시청자 반응이 좋았는지 "지난주에도 그랬지?" "한 번 하고 말려고 그랬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펀치볼 말고)날 쳐라 날 쳐" 라며 서로 티키타카 하는 장면도 있다. 물론 이 시기 TV 코미디는 즉흥극이 없으므로. 사전 대본에 따라 이주일과 구봉서가 합을 맞춘 것.
당시 '이주일의 카운터 펀치'라는 코너 자체가 당시 사회상을 이주일이 날 것에 가깝게 풍자하는 데에서 재미를 찾는 코너였다. 지금보다 심의 검열 수준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빡빡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 당시는 저 정도 풍자도 꽤나 충격적이었다. 이 때 이주일이 아주 센 척 허세를 부리며 사회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원래 이주일의 캐릭터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더듬는 소시민형 스탠딩 코미디인데 여기서는 아주 세게 나간다. 일종의 반전 컨셉인 셈이다. 그리고 코너 말미에 이주일을 잡는 대선배 구봉서를 등장시켜서 센 척 하던 이주일 캐릭터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버린다. 이를테면 이주일의 반전 컨셉을 구봉서란 캐릭터로 한 번 더 꼬아놓은 셈이다.
7.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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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서술했듯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개신교 관련 라디오 광고에도 나오기도 했으며, 절친
곽규석이 생전에 담임목사로 시무했던 미국 한인교회로 종종 찾아갔다고 한다. 구봉서가 개신교에 귀의하게 된 계기는 촬영중 사고로 몸져 누워있는 동안 아내와 온누리교회 신자들이 가정예배를 드린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구봉서가 영화 촬영 중 낭떠러지에서 추락하여 다리에 복합 골절상을 당하여 집에서 정양하고 있었다. 이것을 독실한 개신교 신도였던 아내가 남편에게 전도할 기회라 생각하여 하용조 목사와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구봉서가 누워 있던 안방에서 가정예배를 드렸다.구봉서는 시끄러우니 나가서 하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지만 교인들은 들은 척도 않고 며칠 간 계속 예배를 드렸다. 계속된 예배에 구봉서는 체념하고 성경과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하루는 하용조 목사가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하면서 "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연명하였습니다. 주린 삶을 살았겠지요" 라고 하자 구봉서가 벌떡 일어나 "흥! 메뚜기에 석청? 고 단백질에 로열젤리만 자셨구만!"[17] 라고 일갈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과 교인들은 빵 터져서 배를 부여안고 방바닥을 데굴데굴. 이 일을 계기로 이 구봉서는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고 개신교에 입교했다.
- 자녀들에게는 굉장히 엄한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딴따라라고 놀림받는 아이들이 자신을 우습게 보지 않도록 일부러 좀 더 엄격하게 대한 점도 있다. 비단 구봉서 뿐 아니라 옛날 코미디언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연예인들은 자식들을 엄하게 교육시켰다고 한다. 배삼룡이나 서영춘, 이주일 또한 방송이나 무대에서 우스꽝스러운 연기로 밥벌이를 했을지언정, 집에서는 호랑이 같은 무서운 아버지였다. 구봉서는 "친구들이 아버지 놀린다고 기죽어서 다니면 애비한테 혼쭐날 줄 알라!"며 항상 당당하게 나서라고 훈계했다고 한다.[18]
- 워낙에 장수하는 바람에 후배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계속 지켜봤다. 백남봉, 서영춘, 이주일 등은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그의 후배들이다. 특히 이주일의 경우, 구봉서보다 14년 늦게 태어났지만, 되려 14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사망 일자가 공교롭게도 8월 27일로 같다.
- 2010년대 와서야 고백하며 알려진 것인데 1965년 영화 '광야의 결사대' 촬영 당시를 회상하며 “촬영 도중 원래대로 폭탄 터지는 장면에서 한 발만 떨어지면 될 상태였는데, 겁이나 두 발짝 가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아주 으스러졌다. 수술받고 잘 안정하면 낫던 것이지만 당시 한국 의료기술이 엉망이라 대충 접합하여 지금까지도 아프다. 하지만, 그걸 전혀 드러내지 않았었다."라고 방송에 나와 이야기했다. 2년동안 병원을 자주 가야했는데도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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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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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기사를 검색해보면 기자들이 연 나이로 적어서 상당수가 향년 90세라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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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성 구씨 25세손 ○서(○書) 항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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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도쿄음악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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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평창동 예능교회의 전신인 연예인교회의 창립 멤버이자 장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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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학교 졸업. 이때의 전문학교는 단과대에 해당한다. 6.25 직전과는 달리 당시엔 국졸조차도 드문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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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술하듯 일본에서 전문학교를 나왔다. 읽는 것은 일본어가 편해서 항상 손에는 일본어로 된 책이 들려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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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가장 단명한 사람은 서영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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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개그맨이라 평가받는 가수이자 배우, 희극인이며 가수
윤항기와
윤복희 남매의 부친
윤부길은 같은 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했지만 중퇴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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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후술하는 영화 '오부자'의 포스터에도 아코디언을 들고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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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이름이 첫째부터 영, 웅, 호, 걸 이었다.
[12]
참고로 "하오"는 오후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20시 55분.
[13]
朴時明. 1924년 생으로, 이 4명 가운데 가장 연상이었고
꺼벙이라는 별칭으로 인기를 누렸다. 평소
오토바이 광으로, 그 당시 고가이던 대형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다 뒤에 태운 후배 코미디언을 사망하게 하는 등 여러 번 교통사고를 일으켰고, 결국 사고로 머리를 다친 후유증으로 이 4명 중 가장 먼저 1986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
[14]
이때 구봉서는 딱 졸수였지만 생일을 넘기지 못해 졸수를 보지 못했다.
[15]
'요절복통 팔도검풍'이라는 영화인데 1969년에 개봉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영화가 걸 프롬 리오(Girl from rio)일 정도로 아주 오래된 영화이다.
[16]
일밤의 전신 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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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실제로도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선 이 메뚜기와 석청 이야기가 해석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18]
예전엔 연예인이면 딴따라라며 덮어놓고 하대하는 경향이 사회 전반적으로 짙게 깔려 있었다. 조선시대 까지 남사당패 등 지금의 연예인 역할을 하던 사람을 광대라며 천민 취급하던 문화가 남아 있었던 것.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특히나 배우나 가수와는 다르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계속 보여줘야 하는 코미디언은 더더욱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