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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3:36:05

제2차 야시-키시네프 공세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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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야시-키시네프 공세
러시아어: Ясско-Кишинёвская операция
독일어: Operation Jassy-Kischinew
영어: Second Jassy–Kishinev offensive
제2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의 일부
파일:제2차 야시-키시네프 공세.png
루마니아 왕국에 진입하는 소련군
날짜
1944년 8월 20일 ~ 29일[1]
1944년 8월 30일 ~ 10월 3일[2]
장소
루마니아 왕국, 소련 몰도바 SSR
교전국 [[틀:깃발|]][[틀:깃발|]][[소련|]]
[[틀:깃발|]][[틀:깃발|]][[루마니아 왕국|]][3]
[[틀:깃발|]][[틀:깃발|]][[미국|]][4]

[[틀:깃발|]][[틀:깃발|]][[루마니아 왕국|]][5]
지휘관 [[틀:깃발|]][[틀:깃발|]][[세묜 티모셴코|]]
( 스타브카 대리)
[[틀:깃발|]][[틀:깃발|]][[로디온 말리놉스키|
로디온 말리놉스키
]]
(제2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표도르 톨부힌|]]
(제3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미하이 1세|]]
[[틀:깃발|]][[틀:깃발|]][[요하네스 프리스너|
요하네스 프리스너
]]
(남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오토 뵐러
(뵐러 군집단 사령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막시밀리안 프레터-피코
(제6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이온 안토네스쿠|
이온 안토네스쿠
]]
[[틀:깃발|]][[틀:깃발|]][[페트레 두미트레스쿠|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
(루마니아 제3군 사령관)
결과
소련의 승리
소련 루마니아 왕국 점령
영향
루마니아 왕국의 추축국 탈퇴
독일 국방군 헝가리 왕국 유고슬라비아로 밀려남
전력[6] [[틀:깃발|]][[틀:깃발|]][[소련군|]]
병력 1,314,200명[7]
포 14,851문
전차 및 자주포 1,874대
항공기 2,200기
[[틀:깃발|]][[틀:깃발|]][[독일 국방군|]]
병력 500,000명
포 7,600문
전차 및 자주포 170대
항공기 800기
[[틀:깃발|]][[틀:깃발|]][[루마니아군|]]
병력 405,000명
피해 규모[8][9] [[틀:깃발|]][[틀:깃발|]][[소련군|]]
전사 및 실종 13,197명
부상 53,933명
포 108문
전차 및 자주포 75대
항공기 111기
[[틀:깃발|]][[틀:깃발|]][[독일 국방군|]]
전사 및 실종 100,000명[10]
포로 115,000명
포 3,500문
전차 및 자주포 830대
항공기 338기
[[틀:깃발|]][[틀:깃발|]][[루마니아군|]]
사망 8,305명
부상 24,989명
실종 60,283명
포로 93,600명[11]

1. 개요2. 1944년 가을의 발칸 전선
2.1. 소련군2.2. 독일군
3. 전투 서열
3.1. 소련군3.2. 독일군
3.2.1. 8월 1일3.2.2. 9월 28일
4. 전개
4.1. 포위망에 갇힌 6군4.2. 루마니아의 추축국 탈퇴4.3. 소련군의 루마니아 장악
5. 결과6. 미디어

[clearfix]

1. 개요

제2차 야시- 키시네프 공세 혹은 야시-키시네프 작전은 바그라티온 작전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남쪽에서 진행된 하계 공세의 마지막 작전이었으며 공세의 목표는 루마니아와 발칸반도로의 진출이었다. 이 작전의 여파로 루마니아는 추축국에서 탈퇴하여 독일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은 중부 집단군과 비슷한 수준으로 괴멸됐다.[12] 독일군은 그나마 전력을 보존한 뵐러의 8군을 중심으로 전력을 수습하여 헝가리로 후퇴했으며 그리스에 주둔하던 E집단군[13]도 유고슬라비아로 급히 후퇴했다.

2. 1944년 가을의 발칸 전선

2.1. 소련군

소련군은 작년 남부전선에서의 대공세 이후 적절한 보충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므로 대부분의 사단이 5,000명이 되지 못했고 근위사단과 정예부대들만이 5,000명을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드네프르 강 근방에서 무차별적으로 징집한 전력들의 수준은 당연히 한심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병력의 수적 우세는 그 자체로 큰 전력이었으며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의 격차는 10:1 정도로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전까지는 독일군은 기갑과 항공 전력을 집중운용하고 소련군은 모든 제대에 대체로 분산하여 운용했으므로 그나마 반격이 가능했지만 이 정도로 격차가 벌어지니 그조차도 불가능할 것이 분명해졌다.

소련군은 6군을 또다시 포위섬멸할 계획이었다. 돈바스 공세 멜리토폴 전투에서는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려고 작정한 듯 압도적인 전력을 집결시켰다. 또한 스탈린그라드에서와 마찬가지로 측면의 루마니아 3군과 4군이 목표였다. 소련군은 1차 목표로 6군이 섬멸되면 루마니아를 장악할 루마니아 작전을 차후 공세로 준비하고 있었다.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북쪽부터 40군, 7근위군, 27군, 4근위군을 배치했고 2선에 52군과 53군, 기동 제대로 6전차군과 고르시코프 기병-기계화 집단을 보유중이었다.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5충격군, 37군, 46군을 배치하고 2선에 57군을 배치했으며 기동 제대는 4근위기계화군단과 7기계화군단을 보유중이었다. 소련군이 보유한 전력은 90개 사단과 9개 기동군단[14] 휘하 1,300,000명의 병력[15]과 14,000문의 포, 1,800대의 전차 및 자주포, 1,800대의 항공기였으며 흑해 함대가 전투함 10척과 잠수함 30척, 상륙정과 기타 군함 440척과 항공기 800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2.2. 독일군

드네프르 강 전투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의 여파로 공세가 끝난 4월 당시에 독일군의 주력은 우크라이나에 몰려 있었다. 제1차 야시-키시네프 공세에서 소련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반격을 가해 조금이나마 밀어내는데 성공한 이후 6월에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시점에서도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과 서부전구의 B 집단군 다음가는 강력한 기갑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8월 시점에서는 중부집단군과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10개 사단이 차출됐고 기갑사단 6개를 포함하여 기갑 전력도 많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정치적 상황 역시 악화일로를 달리고 있었다. 북쪽의 3개 집단군과 달리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은 루마니아군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다. 전투에 관한 건 독일군이 담당하고 있었으나 루마니아 지역에서의 모든 작전은 안토네스쿠의 동의 혹은 허가가 필요했다. 소련군이 이미 루마니아 영내에 들어온 상태에서 안토네스쿠는 소련과 비밀리에 협상 중이었고 8월에 히틀러를 만났다. 여기서 히틀러가 루마니아에 가능한 최선의 지원을 약속하자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로 돌아왔다. 구데리안 OKH는 프리스너에게 유사시 루마니아에 주둔 중인 모든 독일군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고 후퇴에 대한 자율권을 줄 것을 제안했으나 협상 과정에서 루마니아군의 협력을 위해 루마니아의 영토를 한 치도 내주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바람에 히틀러는 이를 거부했다. 루마니아 전선은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을 담보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었다.

항공 전력 역시 심각하게 밀리는 상태였다. 8월에 4항공함대는 1,000기의 항공기를 보유중이었으나 대부분의 전력이 7월부터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게다가 플로이에슈티의 유전도 보호해야 했으므로 전선을 지원할 수 있는 항공기는 300기가 채 안됐다. 그렇다고 플로이에슈티와 부쿠레슈티 근방에 배치된 항공기가 많았냐 하면 그것도 아닌게 6월 시점에서는 250기정도가 이 근방에 있었으나 미국의 15공군이 계속해서 유전지대에 공습을 가하면서 8월에는 40기로 줄어있었다.

기갑전력도 마찬가지로 8월 19일 현재 집단군이 가용 가능한 기갑전력은 기갑사단 3개와 기갑척탄병 사단 1개 뿐이었다. 만약 완편상태였다면 기갑군단 1개의 전력에 해당하므로 소련 1개 전차군과 비슷한 규모였겠지만 제일 강력한 사단이 52대의 장포신 4호전차와 33대의 3호 돌격포를 보유중인 "대루마니아" 기갑사단이었다.[16] 후방에서 재편중인 20기갑척탄병사단은 가용 가능한 전차가 2대였고 13기갑사단이 35대의 4호전차를, 10기갑척탄병사단이 전차 없이 돌격포 20대를 보유중이었다. 다시 말해 전술적인 규모의 예비 기갑전력이 전차 89대와 돌격포 53대뿐이었으며 절반이 루마니아군이었으므로 전투력이 얼마나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7개의 돌격포 여단과 3개 독립 돌격포 대대가 보유한 183대의 3호 돌격포와 26대의 42호 돌격곡사포, 제93중전차엽병대대[17]가 보유한 25대의 나스호른이 추가로 있다는 것이었다.

독일군은 카르파티아 남쪽 끝에 8군, 프루트 강 드네스트르강 사이에 루마니아 4군, 드네스트르 강에 6군, 흑해 연안에 루마니아 3군을 배치했으며 전선에 50개 사단과 5개 여단 휘하 381,023명의 병력과 2선에 128,682명을 포함한 약 500,000명의 독일군과 405,000명의 루마니아군, 400대의 전차 및 자주포, 전선에 당장 투입할 수 있는 항공기 300기 정도를 보유중이었다.

3. 전투 서열

3.1. 소련군[18]

3.2. 독일군

3.2.1. 8월 1일[23]

3.2.2. 9월 28일

4. 전개

4.1. 포위망에 갇힌 6군

8월 20일, 소련군이 야시-키시네프 작전(Ясско-Кишиневская операция)을 시작됐다.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이아시 북서쪽에서 루마니아 4군 지역을 강타했고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티라스폴 남쪽에서 6군과 루마니아 3군 사이의 지경선을 강타했다. 이아시 북서쪽에서 27군은 루마니아 4군과 6군 사이에 있던 미트 그룹을 돌파했고 루마니아 4군단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버렸다. 6전차군이 돌파구로 밀고 들어왔고 독일 4군단은 시레트 강과 프루트 강 사이의 전선을 어떻게든 유지해보려 했지만 저녁이 되자 57기갑군단과 7군단 사이에 30km에 이르는 돌파구가 생겨버렸다. 이아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테르구 프루모스(Târgu Frumos) 바로 북쪽에서는 7근위군과 고르시코프 기병-기계화집단이 공세를 개시했다.

남쪽에서 30군단은 소련군을 간신히 막아냈지만 루마니아 3군의 29군단[38]은 막지 못하고 밀려났다. 15,306보병사단, 루마니아 4산악사단은 곧바로 서쪽으로 밀려났다. 13기갑사단이 나서서 잠시나마 적을 늦출 수 있었지만 29군단은 일부가 포위되면서 첫 날부터 큰 타격을 받았다. 프리스너는 아직까진 상황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남쪽에서의 공격은 북쪽에 비해 약했기에 방어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북쪽에서도 어느정도 밀려나도 이아시 남쪽 2차 방어선인 트라야누스 방어선(Trajan Postion)에서 충분이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21일이 되자 6군과 루마니아 3군 사이의 간격은 30km에 달했고 소련군은 걷잡을 수 없이 진격하고 있었다. 톨부힌은 4근위기계화군단과 7기계화군단을 투입했다. 북쪽에서는 고르시코프 집단의 23전차군단이 테르구 프루모스 남쪽에서 트라야누스 라인을 돌파해버렸고 루마니아군은 무너져내렸다. 돌파구는 폭 60km에 깊이가 최대 30km에 달했으며 이아시가 소련군에게 점령됐다. 6군 좌익의 7군단도 4근위군에게 밀려나버렸다. 게다가 안토네스쿠는 기동 방어를 옹호하던 이전과 달리 베사라비아 땅은 루마니아의 영토이기 때문에 절대 내주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펼쳐 독일군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루마니아군의 상당수는 전투를 거부했으며 심지어 루마니아 기갑사단도 전선에 투입되는 것을 거부했다. 프리스너는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6군에게 서쪽 카르파티아 산맥 방향으로 탈출할 것을 명령했다. 히틀러의 현지 사수 명령을 무시하면서까지 내린 명령이었지만 소련 기동제대는 이미 6군 후방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22일,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 우익의 7근위군은 시레트 강을 넘어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었고 고르시코프 집단은 프루모스 남쪽의 바카우로 진격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6군의 철수를 허가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남쪽에서는 톨부힌이 5충격군만 드네스트르 강 동쪽에 남기고 37군과 57군을 서쪽으로 진격시키면서 46군은 다뉴브 소함대와 함께 남쪽에서 상륙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23일이 되자, 13기갑사단은 와해되었고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브를라드(Bârlad) 후시(Huși) 까지,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콤라트(Komrat) 프루트 강까지 진격했다. 6전차군의 선봉인 18전차군단과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선봉인 4근위기계화군단, 7기계화군단은 만나기 직전이었다. 후시 근처에서 10기갑척탄병사단이 반격을 가했지만 1개 사단으로 막기엔 역부족이었고 6군의 탈출 희망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남쪽에서는 46군이 진격방향을 틀어 드네스트르강 하류에서 루마니아 3군단을 포함한 루마니아 3군 대부분을 포위했다.

4.2. 루마니아의 추축국 탈퇴

8월 23일, 루마니아에서는 쿠데타가 발생했고 미하이 1세는 독일과의 관계 단절을 거부한 안토네스쿠를 체포했다. 미하이 1세는 루마니아가 소련 영향권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방연합국 밑으로 들어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단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진 않고 유예기간을 둬서 독일군에게 당장 루마니아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루마니아군이 적으로 돌아서자 독일군은 순식간에 앞뒤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전선은 사라져버렸고 아군과 적군을 피아식별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24일에 부쿠레슈티에 SS부대들과 루마니아 주재 독일 무관들이 도시를 장악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히틀러의 명에 따라 4항공함대가 부쿠레슈티를 폭격했다. 또한 히틀러는 안토네스쿠를 구출하기 위해 독일 특수부대 브란덴부르거즈를 투입했지만 안토네스쿠의 행방을 알 수가 없어서 그를 구출하는 데 실패했다.

이제 6군이 포위되고 괴멸될 것이 기정사실화되면서 독일군에게는 재앙이 닥쳐오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육군최고사령부는 더이상 투입할 예비대가 없었다. 북부 집단군은 1,2,3 발트 전선군에게 밀려 리투아니아에 갇히기 직전이었으며 중부 집단군은 1,2,3 벨라루스 전선군에 맞서 전선을 안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북우크라이나 집단군도 1 우크라이나 전선군에 밀려 폴란드 서부로 밀려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육군최고사령부는 그나마 보유한 기갑사단 몇 개로 여기저기 돌려막기를 하고 있었기에 발칸 반도 자체를 안정시킬 병력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방군최고사령부도 마찬가지였다. 서부전구사령부[39](OB West, Heeresgruppe D)는 팔레즈 포위전으로 B 집단군과 서부기갑집단이 큰 피해를 입었고 용기병 작전으로 G 집단군이 필사의 탈출을 하고 있었다. 케셀링의 남서전구사령부[40](OB Südwest, Heeresgrupp C)도 마지막 방어선인 고딕 라인에서 연합군을 막기 위해 격전을 치루는 중이었다. 결국 독일군은 바익스의 남동전구사령부[41](OB Südost, Heeresgruppe F)에서 병력을 차출해야했다. 여기서도 모든 전력이 유고슬라비아에서 파르티잔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어 있었으나 전선 자체가 붕괴될 위기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그리스와 크레타를 지키던 E 집단군[42]을 그리스에서 후퇴시키고 2기갑군[43]을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국경으로 이동시켰다. 그때까지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은 자력으로 루마니아에서 탈출하여 전선을 재건해야했다.

24일이 되자 고르스코프 집단은 바카우(Bacau)를 점령하고 시레트 강을 건넜다. 6군의 대부분은 아직도 프루트 강 동쪽에 있는 상황이었다. 북쪽에서 40군과 7근위군은 카르파티아 산맥의 17군단을 공격했으며 동쪽에서 5충격군은 키시네프를 점령했다. 25일, 루마니아가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26일,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카훌(Kagul)에 도달하면서 2개의 큰 포위망 안에 6군과 루마니아 3군의 독일 및 루마니아 사단 18개가 갇혀버렸다.

27일, 6전차군은 폭샤니(Focșani)를 점령했고 29일, 플로이에슈티에 입성했다. 같은 날 흑해함대와 46군은 상륙작전을 통해 콘스탄차에 입성했다. 이 사이, 잠깐 포위망 보완을 위해 내려온 4근위군이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고 6전차군은 서쪽이로 진격중이었기 때문에 잠깐의 공백이 생겨 독일군이 탈출을 시도했으나 23전차군단이 내려오면서 독일군은 거의 탈출하지 못했다.

6군은 괴멸되었으며 루마니아가 소련편으로 돌아서면서 9월이 되자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은 200,000만명의 독일군과 극히 일부의 헝가리군만 남게 됐다. 루마니아가 사실상 항복하고 루마니아 국경을 지키던 루마니아군과 독일군이 괴멸되면서 소련군은 야시-키시네프 작전을 마무리하고 루마니아를 장악하기 위한 새로운 공세를 개시했다. 소련은 루마니아 지원을 위해 50개 사단을 루마니아로 진군시키고 34개 사단을 포위망 정리를 위해 남겨두었다.

4.3. 소련군의 루마니아 장악

독일의 장군 하인츠 구데리안이 자신의 자서전에서 말했듯이 루마니아의 배신으로 독일의 전선은 곳곳이 붕괴되었다. 또한 루마니아가 총부리를 독일로 돌리면서 독일의 전선 붕괴는 가속화 되었다. 이 상황에서 소련군이 루마니아를 장악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8월 25일 루마니아 제1산악사단이 브라쇼브와 프레데알 고개[44]를 점령해서 독일군의 증원이나 후퇴를 막았다. 이어서 루마니아 제2군단이 지우르지우[45]를 점령해 해상으로의 피난도 차단시켰다. 소련군과 루마니아군에 의해 포위가 된 독일 제6군은 항복했지만, 일부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헝가리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다뉴브강을 따라 진군을 계속한 제53군은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도달했고, 시민들의 환영 속에 8월 31일 부쿠레슈티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수도가 점령을 당했어도 아직 잔존 세력은 남아있었다. 윙클러 전투단(Kampfgruppe Winkler)은 바커우 북서부에 있는 부자우 계곡에 있었고, 오토 뵐러 장군이 이끄는 제8군은 트란실바니아 지역으로 후퇴를 할 준비를 시작했다. 트란실바니아를 방어하기 위해 헝가리 제2군이 급히 투입되어 독일군 제6군과 제8군의 잔존부대와 함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이 방어선은 맥없이 무너졌다. 왜냐하면 9월 14일 헝가리 제1기갑사단과 제6예비사단이 포병의 엄호 아래 루마니아군을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소련군의 신속한 증원으로 실패로 끝이났고, 공격으로 인해 방어선에 공백이 발생하자 소련군과 루마니아군은 신속하게 공세에 나섰다. 소련 제27군과 루마니아 제4군은 10월 8일 투르다[46]를 점령하고 10월 11일에는 북부 트란실바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인 클루지나포카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서 소련군과 루마니아군은 루마니아 전 영토 내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데 성공을 하였다.

5. 결과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소련군의 손실은 다른 작전에 비해 매우 낮았다. 소련군은 이 승기를 기점으로 발칸반도 전체를 독일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만들었고 독일은 발칸반도에서 자신의 세력을 급속도록 잃었고, 또한 독일이 통제하고 있던 주요한 석유산지인 플로에슈티를 잃음으로서 연료 부족 문제가 매우 심각해졌다. 이 연료 부족 문제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가 처음으로 전쟁에서 패배하겠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작전의 성공에 따라 1940년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소련이 루마니아로 부터 빼앗은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아는 소련의 영토가 되었고, 이 지역의 루마니아인들과 루마니아군은 추방이 되거나 발치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루마니아가 자신의 편이 되자, 소련은 빼앗긴 영토에 대한 보상으로 당시 헝가리가 점유하고 있던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주겠다고 약속했고, 전쟁이 끝나고 그 영토는 루마니아가 점유하게 되었다.

6. 미디어



[1] 야시-키시네프 공세작전 기간, 이 기간을 실질적인 제2차 야시-키시네프 공세기로 본다. [2] 부쿠레슈티-아라드 공세작전 기간 [3] 8월 23일 ~ 29일 [4] 항공 지원 [5] 8월 20일부터 23일까지 [6] 야시-키시네프 공세작전 기간만 포함 [7] 전투 병력 886,491명 [8] 이는 소련측 기록으로 소련군의 피해규모가 공세 규모에 비해 굉장히 적은 느낌이 있다. 교차검증이 되지 않고 소련측 병력에 누락된 병력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긴 힘들다. 독일측의 피해 역시 과장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독일군이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9] 야시-키시네프 공세작전 기간만 포함 [10] 독일군의 유해 발굴을 진행하고 있는 '독일 전쟁 무덤 위원회'에 따르면 몰도바 전역에서 전사한 독일군은 약 150,000명, 루마니아 전역에서 전사한 독일군은 약 38,000명이라고 한다. [11] 몰도바 역사 협회 주장: 최대 17만 명 [12]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이미 한 번 전멸했던 6군은 여기서 한 번 더 전멸하고 다시 재건된다... [13] 연합군의 그리스 상륙을 대비하여 독일 제12군을 개편한 부대로 명칭만 집단군이고 야전군급 제대였다. 바익스의 남동전구사령부(F 집단군) 소속 [14] 기병, 전차, 기계화 군단 각 3개씩 [15]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 771,200명,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 523,000명, 흑해 함대와 도나우 전대 20,000명 [16] 참고로 이 시기 독일 완편 기갑사단은 180대 정도의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했다. [17] 93중구축전차대대 [18] 9월 1일 기준 [19] 9월 10일에 원수로 진급 [20] 9월 12일부터 제6근위전차군 [21] 9월 13일에 전차병상장으로 진급,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에서 6전차군을 이끌었던 장군이다. [22] 9월 12일에 원수로 진급 [23] 예비대를 제외한 모든 제대의 순서는 북쪽부터 남쪽 순서로 작성함 [24] 9월 23일부터 남부집단군으로 개칭 [25] 8군 예비 [26] 8군은 두개로 분할되어 17군단은 루마니아 4군 좌익에, 미트 그룹은 루마니아 4군 우익에 배치되어 있었다. [27] 4군단 사령부로 구성 [28] 군단 예비 [29] 군단 예비 [30] '대루마니아'라는 뜻 [31] 군단 예비 [32] 군단 예비 [33] 두미레스쿠가 사령관이긴 한데 사실상 독일군이 예비대 투입에 관해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34] 겨울폭풍 작전 당시 프레터-피코 분견군을 이끌던 장군이다. [35] 군단 예비 [36] 참고로 이 남부집단군은 독일 국방군에서 네번째 남부집단군이다. 첫번째는 폴란드 침공, 두번째는 바르바로사 작전 청색 상황, 세번째는 쿠르스크 전투 드네프르 강 전투를 치뤘다. [37] 3기갑군단 사령부로 편성 [38] 대부분 루마니아군이었다. [39] D 집단군 사령부가 서부전구사령부를 구성했다. [40] C 집단군 사령부가 남서전구사령부를 구성했다. [41] F 집단군 사령부가 남동전구사령부를 구성했다. [42] 집단군이지만 담당 범위가 넓어 집단군이었을 뿐 야전군 규모의 제대로 휘하에 여기저기 흩어진 군단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43] 이름만 기갑군이고 발칸 반도로 이동한 시점부턴 배속된 기갑전력이 없었다. [44] 루마니아 중부와 남부를 잇는 고개 [45] 지우르지우주의 주도로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의 외항 [46] 소금 광산이 유명한 도시로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교통의 요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