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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22:07:12

정민철/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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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뷔와 전성기
1.1. 1992년1.2. 1993년1.3. 1994년1.4. 1995년1.5. 1996년1.6. 1997년1.7. 1998년1.8. 1999년
2. 일본 진출과 몰락
2.1. 진출 이전의 분위기2.2. 2000년
2.2.1.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기용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2.2.2. 정민철의 추락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으며 요미우리의 행보도 합리적인 것이었다는 주장
2.3. 2001년2.4. 일본 시절 총평
3. 선수 시절 후반부
3.1. 2002년3.2. 2003년3.3. 2004년3.4. 2005년3.5. 2006년3.6. 2007년3.7. 2008년3.8. 2009년
4. 평가5. 주요 쟁점
5.1. 저평가된 에이스?5.2. 1990년대 최고 투수 논쟁

1. 데뷔와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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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동구 출신으로, 일본 진출 시절을 제외하고 출생부터 은퇴까지의 선수생활을 모두 대전에서 보낸 충청 토박이이자 프랜차이즈 스타로, 대전신흥초, 충남중, 1992년 대전고를 졸업하고[1] 고졸지명으로 대전을 연고로 하는 한화 이글스의 전신인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였다. 150Km/h대 초반의 빠른 직구를 주무기로 선발 투수진의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데뷔 첫해부터 바로 선발진에 투입되어 데뷔 첫 해 14승, 이듬해 1993년엔 13승을 거두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1992년부터 1997년까지 56완투를 기록했는데, 1990년대 활약한 투수 중에 이 기록을 넘어서는 투수는 아무도 없다.

정민철의 전성기 당시 팬들은, 정민철이 늘 실제 성적에 비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덜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인데, 무엇보다도 팀 성적이 좋지 않았다.[2] 게다가 묘하게도 매년 승수가 13승 아니면 14승으로 딱 고정되어버린 탓에 다승왕과 거리가 멀어, 투수의 승수를 최우선으로 따졌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약간 푸대접 받았던 것도 한 이유. 또 아래에서 내내 언급되겠지만, 기묘하게도 거의 매년 정민철보다 드러나는 성적이 더 나은 투수가 있거나, 이슈가 될만한 투수가 등장하곤 했다. 그로 인해 선수시절 내내 KBO MVP, KBO 골든글러브를 한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1.1. 1992년

프로에 처음 입단했을 당시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일단 동기[3]들이 박찬호,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 등으로 고교 시절부터 이름값이 화려했으며, 정민철은 최고구속이 아직 138km/h 정도밖에 나오지 않던 완성되지 않은 투수였기 때문. 하지만 당시 정민철을 보았던 사람들은 볼끝이 좋아 대형투수의 자질이 엿보였다고 한다. 당시 대학야구의 강호였던 고려대 계명대가 이런 정민철의 포텐셜에 주목하여 스카웃 제의를 보내올 정도였다고 하며, 김영덕 감독이 ' 박찬호와 정민철은 꼭 잡아달라'라고 했다는 말은 오래된 한화 팬들이 모이면 항상 나오는 이야기기도 하다. 어쨌거나 1992년에 정민철은 자발적으로 빙그레를 찾아가 입단 계약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프로에 직행하기보다 일단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당시 야구계에서는 드문 사례였다.[4]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중학교 때 키가 자라지 않아서 1년 유급을 했기 때문이라고. 오퍼도 받고 했으니 마음만 먹으면 대학으로 갈 수는 있었다지만, 이 유급 경력이 이후 선수 생활에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프로에 가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때 정민철이 프로에 바로 입단한 것은 신의 한 수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조성민, 박찬호처럼 해외에 진출한 선수들은 그렇다 쳐도, 동기생인 박재홍[5], 차명주, 전병호 등 경쟁 상대가 한 둘이 아니었다. 이들과 같은 해에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에 입단했다면, 이름 값에서 밀린 정민철의 프로 데뷔가 과연 순조로웠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데뷔 첫 해, 정민철을 주목한 이는 거의 없었다. 팀내에서도 1차 지명 신인인 대졸 출신 지연규[6] 가 훨씬 조명받던 시기라 해외 전지훈련에서도 제외됐었다. 그런데 지연규가 아마 시절 때의 무리와 스프링캠프 시절의 과도한 구위 끌어올리기로 컨디션에 난조를 보였고, 대신 정민철이 개막전 엔트리에 들게 되었다. 비록 LG와의 개막 2연전에 만루홈런을 맞기도 했지만, 이후 불펜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 해태전에서의 호투를 바탕으로 선발진에 합류했다.

평균자책 2.48, 195⅔이닝, 14승 4패 7세이브, 11완투로 신인, 그것도 고졸 출신 투수로서는 기대를 뛰어넘는 기록을 남겼으나 하필이면 같은 해 염종석이 있었다.[7]

염종석은 평균자책 2.33로 시즌 1위를 차지했으며 17승 9패 6세이브, 13완투를 기록해서 정민철보다 앞선 성적을 기록한데다가, 데뷔 첫 승부터 9승까지의 승리가 완투승이라는 것도 이슈가 되었다. 둘이 완투 대결을 했는데 3:1로 롯데가 이긴 경기도 있었다. 게다가 한국시리즈에서도 둘의 명암이 엇갈린 탓에[8] 결국 신인왕과 골든글러브가 염종석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정민철의 콩라인 전설이 시작된다

당시 정민철과 염종석의 활약은 종전까지 대졸 후 입단이 당연시되던 한국 프로야구에서, 고졸 신인의 선전 가능성을 확인시킨 사례로 기록되었다.

1.2.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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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KBO 리그 승률 1위
프로 2년차 때 군복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위병이 된 관계로 18경기 밖에 출장하지 못한다.[9][10] 그런데 18경기 중에 10경기를 완투한다.[11] 게다가 이 18경기 중에 13승을 찍어 승률 1위를 차지했다. 적어도 93년의 정민철은 불운과는 거리가 멀었고 실력=성적이었던 셈.

한편 방어율은 2.24였으나, 하필 1993년은 프로야구 역대 최강의 투고타저 시즌에 꼽히는 해로[12] 5위에 그쳤다. 중무리들이 득실거리던 시기였고 정민철 본인도 이닝수가 적어서 비교하기가 애매한 편. 사실 선발투수만 따지더라도 당시 커리어하이였던 조계현 때문에 2위.

1.3.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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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KBO 리그 평균자책점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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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KBO 리그 탈삼진 1위
평균자책점 2.15, 탈삼진 196, 218이닝 투구로 세 부분 1위를 찍었다. 덧붙여서 경기당 평균 투구수는 124.5개. 그런데 문제는 승수가 적다는 것. 이 탁월한 성적으로 10패를 찍었다. 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2자책, 1자책 패배가 수두룩하다. 게다가 당시는 투수의 승수를 최우선으로 여기던 시대. 14승 밖에 못했다고 투수 트리플 크라운으로 쳐주질 않았다. 응? 사실 이닝 부문은 당시나 지금이나 따로 시상이 없기에 지금 기준으로도 트리플 크라운이 아니긴 하다마는.

아무튼 결국 이 놈의 승수가 모자란 덕분에 투수 KBO 골든글러브 정명원에게 돌아갔다. 이때 정명원의 성적은 방어율 1.36, 40세이브. 뛰어난 성적이지만, 정민철은 선발투수이고 정명원은 마무리투수이기 때문에 21세기였다면 문제가 되었을 법하다.[13]

정명원의 소속팀은 태평양 돌핀스로 당시 한화 이글스보다 더한 비인기 팀이라 팀빨에 밀린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정명원이 골든 글러브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정명원이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40세이브를 기록했으며 시즌 초부터 페이스가 굉장히 빨라서 기록 도전 사실이 시즌 내내 이슈가 되었기 때문.[14] 게다가 사실 이전해인 1993년에 선동열이 마무리 투수로 전업해서 41 세이브 포인트로 기존 기록을 갈아치웠었는데, 40세이브포인트 기록은 깨졌지만, 40 세이브 기록은 남아있으니 여기에 도전해보는 게 어떨까...라는 분위기가 시즌 시작할 때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던 분위기였다.

여담으로 이해 한화는 빙그레 주축 멤버들의 부상과 노쇠화로 인해 지독한 물방망이였는데 한용덕과 정민철 원투펀치의 엄청난 활약 덕분에 공동 3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1.4. 1995년

1995년은 방어율 3.21에 13승을 기록했다. 우수한 성적이지만 정민철치곤 좋은 성적이 아니다. 사실 손가락 부상이 있었던 탓에 달랑(?) 162이닝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시즌 후에는 일본에서 펼쳐진 제2회 한일 슈퍼게임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슈퍼게임 직후, 일본 후쿠오카 돔에서 펼쳐진 제1회 아시아퍼시픽 슈퍼베이스볼 대회[17]에도 참가하였다. 정민철은 호주전에 선발등판해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고 승리투수가 되었다. 19951123 관련기사 참고로, 한화 이글스는 결승에서 대만의 퉁이 라이온스에 패해 아쉽게 준우승을 차지한다. 19951124 관련기사

1.5. 1996년

1996년, 방어율 3.03에 13승을 기록했다. 그리고 12패도 기록했다. 219⅔이닝으로 그해 최다 이닝을 기록했다. 우수한 성적이지만, 같은 팀의 구대성이 미쳐 날뛴데다가[18] 선발투수 중엔 정민태가 이 해 각성했고, 주형광이 다승1위[19], 탈삼진 1위를 기록했으며 선발투수로서 종합적인 면으론 조계현이 압도적이었다.

1.6. 1997년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1997 KBO 리그 탈삼진 1위

208⅔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2.46을 기록. 그런데 14승 11패를 기록했다.[20]

타이틀 복도 없었다. 1위를 기록한 부문은 160삼진의 탈삼진 1위 달랑 하나 뿐이며, MVP는커녕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조차 이대진에게 밀렸다.

21세기 이후의 관점으로 볼 때 1997년 골든글러브 수상은 명백히 문제가 있다. 일단 이 해 방어율과 다승 1위는 김현욱이 차지했는데, 문제는 이 성적이 김성근에 의해 만들어진 성적이라는 비판이 있었고, 구원투수로서 올린 성적이라는 것도 문제였다.[21][22] 바로 이 때문에 김현욱을 뽑기가 애매하다고 생각한 기레기들이 대안을 찾아나섰는데, 그들이 선택한 것이 정민철도 아닌 이대진이었다. 1997년 당시 선발투수로서 이대진의 성적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이 정민철에 비해 확실히 못하다. 게다가 정민철은 아래에서 언급될 노히트 노런까지 기록했다.

결국, 문제는 패전 횟수가 많았다는 것이다.

MLB에서조차 펠릭스 에르난데스가 방어율 2.27에 13승 12패로 사이영 상을 수상한 게 겨우 2010년의 일이다. 그런데 1997년도 한국프로야구였으니... 당시에 투수 스탯으로 다승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두말하면 잔소리. 게다가 팀 성적도 영향이 있었다. 정민철의 소속팀 한화 이글스는 8개 팀 중 7위를 기록한데 반해, 방어율 2.46로 11패 한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깐 이대진의 소속팀 해태는 정규시즌 1위에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했기 때문. 한마디로 우승팀 버프도 작용한 셈.[23][24]

한편, 이 해 정민철은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될 기록 하나를 남겼다. 바로 1997년 5월 23일 OB 베어스를 상대로 기록한 퍼펙트 게임에 가장 가까웠던[25] 무사사구 노히트 노런.[26] 이 경기가 끝난 뒤 정민철의 인터뷰가 유명한데, " 퍼펙트 게임을 놓쳐서 아쉽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정민철은 "강인권 선수의 리드가 좋아 노히트 노런을 달성할 수 있었다."라고 대답했다. 오오 대인배. 불행히도 이 경기는 남아 있는 영상자료가 없다.

나중에 해설위원 시절 서경석의 유튜브에서 이 경기에 대해 회고하면서 당시에는 만족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아까워서 강인권과 연락도 뜸해졌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는데 #, 공교롭게도 2020년 정민철이 단장으로 있던 한화 신임 감독으로 강인권이 검토되다 탈락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23년을 기다린 복수라는 드립이 흥했다. #

시즌 후인 10월, 미국 애리조나 교육리그에 참가한다. 당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운집했던 관계로 정민철 본인도 (5일 로테이션 속에서) 전력을 다해 던졌고, 실제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등 몇몇 구단은 적극적으로 영입을 검토할 만큼 관심을 보인다. 19971023 관련기사 19980302 관련기사 19980307 관련기사 그러나 이 교육리그 참가는, 결과적으로 정민철의 야구인생을 (나쁜 쪽으로) 가르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데...

이에 관련해, 정민철 본인이 훗날 은퇴결정 후 직접 언급한 인터뷰가 있다. 20090714 관련기사

- 1998년에 팔꿈치 부상이 있었는데.
▶팔꿈치 부상은 투수라면 누구에게나 있죠. 1997년 마무리캠프를 애리조나에서 했는데 한달동안 트리플A팀들을 상대로 5일 로테이션으로 공을 던진 적이 있었죠. 그 때 스카우트들도 있고 해서 사실 무리를 했어요. 해외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거든요. 그 뒤 후유증이 있었는데 참을 수 있었어요. 해외진출이란 목표가 있고 의지가 있으니까 이겨내게 되더라구요. 지금은 그게 안되지만(웃음).[27]

1.7. 1998년

정민철이 본격적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한 시즌.

일단 팔꿈치 부상으로 6월과 7월을 통째로 날려 보냈는데, 이렇게 장기간 로테이션에서 빠진 것은 이때가 선수생활 처음이었다. 전반기에 거둔 승리가 단 1승밖에 없었다. 그동안의 혹사를 아는 많은 팬들은 정민철도 '여기까지인가?' 라는 두려움에 시달렸는데, 복귀하자마자 1피안타 1실점 호투를 기록한다.[28] 그리고 후반기에만 9승을 거두며 가까스로 7년 연속 10승 기록을 이어갔다.

하지만 정민철의 상태는 예전 같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일단, 이전까지 밥 먹듯이 하던 완투가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이 해 유일한 완투가 1경기밖에 없었다. 물론 감독이 들에서 이희수로 바뀌며 관리받기 시작한 이유도 있긴 하지만, 복귀 이후 구속 감소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 한편 구단 측은 성적부진과 부상으로 로테이션을 걸렀다는 핑계로 다음해 연봉을 동결했다.

1.8.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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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진출 직전인 1999년의 모습.
방어율 3.75, 18승8패. 정민철이 15승 이상을 기록한 시즌은 99년이 유일하다.

하지만 외견상의 성적에 비해, 구위는 점차 떨어지고 있었다. 방어율은 3.75로 이전의 정민철 성적을 감안해보면 좋아보이지는 않지만, 이승엽의 시즌 54홈런으로 대표되는 타고투저 시즌인 관계로[29] 시즌 6위로 무난한 기록. 201 2/3이닝을 던질 정도로 이닝 소화 능력도 건재했다.[30] 이정도면 예년에 비해 다소 부진했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평범한 팬들조차 구속이 떨어진 것을 감지할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정민철 본인의 증언이나 200이닝을 소화했던 것을 볼 때, 그동안의 혹사로 인한 구위 감소가 의심되었던 상황이었지만, 당시는 혹사 문제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던 시절인데다가, 정민철의 나이도 겨우 만 27세였다. 특별히 통증이 있다거나 수술을 필요로 하지도 않아서, 본인 스스로는 자기 몸 상태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2014년 시점에서 되돌아 본다면, 이 때 정민철의 상황은 그야말로 원조 윤석민.[31]

그래도 이해에 프로 시절에서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기쁨을 누렸다. 한국시리즈 당시 손톱이 갈라져 베스트 컨디션의 투구를 선보이지는 못했지만, 1차전과 4차전의 선발로 등판하여 팀의 우승에 공헌했다.

또한, 시즌 중인 9월에 서울[32]에서 펼쳐진 2000 시드니 올림픽/야구 아시아예선[33]에도 참가해, 한국의 올림픽티켓 획득에 공헌하기도 한다. 특히 일본과의 결승전에 선발등판해 3.2이닝 2실점의 투구를 선보였다.

한국시리즈 직후인 11월에 일본에서 펼쳐진 제3회 한일 슈퍼게임에도 참가한다. 그리고 3차전[34]에 선발등판해 3이닝 1실점의 투구를 선보였다.

그리고 1999시즌을 마지막으로 정민철은 FA가 되어 일본진출을 선언한다.

2. 일본 진출과 몰락

미안하죠. 그 분 저 영입하고 바로 짤리셨어요.(...)
- 야시장 엠스플 텔레비전에서 시청자가 한 "요미우리 스카우트한테 안 미안하신가요" 질문에 답하며

2.1. 진출 이전의 분위기

사실 1998년 시즌 이후 시점에서 정민철은 이미 구단 승인 하에 해외진출이 가능하다는 자격을 갖춘 상태였다. 당시 관련 자격 조건은, "해외 진출 가능: 7시즌, FA취득: 10시즌"이었다. 대졸선수가 대부분인 당시 여건상 해외진출이나 FA나 다 늙은 뒤에나 가능한 극악한 조건이지만, 정민철은 당시에 유일무이한 고졸 출신 해외 진출 대상자였다. 비슷한 대상자였던 이대진은 팔이 갈려서 1998년도 이후 더 이상 그 구위를 찾지 못한다. 참고로 류현진 이전에 30세 미만의 나이로 해외진출한 한국프로야구 출신 투수는 이상훈과 정민철 단 두사람 뿐이다.

사실 제도 시행 이전부터 정민철의 존재는 일본 구단들에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중반 무렵 스프링캠프에서 한화의 연습경기 상대였던 한 일본 팀 감독이 "정민철 같은 투수를 가진 한화 감독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한숨을 내쉬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정민철 본인의 경우, 이미 해외진출 의사를 명확히 밝힌 상태였다. 해외진출 자격을 처음으로 갖춘 1998년에는 일단 한화 구단이 “팀 우승은 한번 하고 가야지”라는 핑계로 불허했으나, 1999년은 시즌 시작 전부터 사실상 해외진출을 약속한다. 이는 다음해인 2000 시즌 종료 이후 정민철이 FA 자격을 취득하기 때문. 그러니까 1년 먼저 해외 진출하면 거액의 이적료를 받지만, FA되면 그런 거 없다는 것. 따라서 99년 시즌 시작 전부터 정민철과 구단 사이에 해외진출이 약속된 상황이었다. 마침 1999년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선수나 구단이나 해피하고 쿨하게 해외진출이 가능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오릭스 블루웨이브였다. 이전부터 한국 선수에게 관심을 가져왔던 오릭스는 1999년 10월 14일 최초로 정민철, 구대성, 정민태의 신분조회를 공식 요청, 선빵을 날렸다.[35] 하지만, 10월 말 경 거물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신분조회를 요청하고 나선다. 일본에서 가장 명문으로 알려졌고 자본력이 앞서는 요미우리가 표면에 등장하자 오릭스는 그야말로 데꿀멍에 닥치고 버로우. 결국 정민철 영입에 나서는 일본 팀은 사실상 요미우리가 유일무이한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11월 19일에 MLB사무국에서도 크보에 공식적으로 정민철의 신분조회를 요청하며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시스템 상 어느 팀에서 요청한 것인지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후보는 세 팀. 정민철에게 이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 시애틀 매리너스, 한국 선수라면 닥치는대로 찜부터 하는 것으로 유명한 시카고 컵스, 한일 슈퍼게임에 스카우터를 파견한 콜로라도 로키스가 유력한 후보. 하지만, 나중의 전적을 볼 때 십중팔구 컵스였던 것으로 보인다.[36]

따라서 분위기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vs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이 되었는데, 이게 2010년대라면 팬들이 “아니 왜 메이쟈 안 가고 일본 감?”이라며 난리법석을 부렸겠지만, 때는 서기 2000년. 메이저에서 평범한 선발 중 일인이 될 바에는 일본에서 에이스 노릇하는 게 더 명예롭다고 여겨지는 시절이었다. 따라서 전반적인 여론은 일본 진출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영입 의사는 당시 기준으로는 제법 적극적이었다. 시애틀은 이미 2년 전부터 정민철을 지켜봤다고 알려졌으며, 컵스 또한 일단 한번 와보시라고 비행기 티켓을 보낼 정도였다. 선수 본인은 끝까지 요미우리 vs 므르브를 놓고 갈등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컵스를 상대로 트라이아웃 참여 의사까지 밝힌 상태였다. 기사

하지만 결국 선택은 요미우리였다. 계약금 1억엔, 연봉 5천만엔, 이적료 2억 5천만엔.[37][38] 저 위 링크에서 본인이 언급했듯이 아무래도 MLB에서 평범한 투수가 되는 것보단 일본에서 에이스가 되는 것이 더 가능성도 높고 더 매력적이라고 느꼈던 듯하다.[39] 거기에 정민철을 해외로 보내는 한화 구단 역시 요미우리로 이적시키는 게 MLB 포스팅보다 더 많은 이적료를 챙길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일본행을 추진한 것도 있다.[40]

그런데 1998, 99시즌 항목에서 언급했듯이 정민철의 구위가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의구심은 존재했다. 부정적인 것은 아예 보도 자체를 하지 않았던 당시 언론 관행 상 이 문제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한화팬들은 이 문제로 근심, 걱정, 초조, 불안,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웬만한 야구 관계자들도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던 상태.[41]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데다가 ‘팔꿈치 통증’이라는 직접적인 이유가 있는 이상, 몸만 멀쩡해지면 구위가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 또한 존재했다.

2.2.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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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의 모습.

다음은 당시 타임라인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개막 이후 2군에서 썩음 → 5월 중순에서야 1군 등판, 호투함 → 로테이션 문제로 2군행 → 한달 만에 1군 올라와 완봉함 → 다음 두 경기 시원하게 말아먹음 → 2군으로 간 뒤 다시는 못 올라옴. 2군에서 분노의 호투함.

정민철이 일본 무대에서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2가지 의견이 엇갈린다.

2.2.1.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기용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

무엇보다도 요미우리는 처음부터 정민철을 땜질용 선발로 써먹을 속셈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 요미우리가 정민철을 영입할 이유 자체가 의문투성였는데 정민철의 영입 시점에서 당시 요미우리의 외국인 투수 슬롯은 과포화상태였고, 그중 한 자리는 그 유명한 발비노 갈베스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남은 자리는 단 하나 뿐이었다. 문제는 이 한 자리를 놓고 세 명의 투수가 경쟁을 해야 했던 것. 그나마 그 자리도 애초에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럴 메이라는 선수였는데, 98년과 99년에 한신 타이거즈에서 어느 정도 실적을 올린 선수로, 99년 말에 계약금+연봉 1억 5천만엔의 거액으로 정민철보다 앞서 계약한 상태였던 것이다. 위키피디아 일본의 메이 항목

심지어 남은 경쟁자는 조성민으로 한국인이었다. 그러니까 요미우리는 이미 존재하지도 않은 선발 자리를 놓고 한국인 두 명을 경쟁하게끔 한 것인데, 실제로 정민철에게 주어진 기회 자체가 달랑 4경기에 불과하며, 뒤의 두 경기는 누가 봐도 말아먹긴 했지만 앞선 두 경기는 누가 봐도 완벽한 호투였다. 2군 성적도 매우 좋았다. 그럼에도 이상할 정도로 기회를 안 준 요미우리의 행보를 볼 때 처음부터 정민철의 영입은 보험용 6선발 내지 로또였고, 정민철이 아무리 호투했어도 기존 투수진이 건재하다면 활용할 생각이 없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가지 웃긴 건 사실 외국인 투수 중 한명인 갈베스는 6경기 만에 2군으로 쫓겨나 다시는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는 것.[44] 정민철이 1군에 올라 올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긴 했는데, 이마저도 몇 경기 기회도 안 주고 5선발체제로 전환해 아예 외국인 투수 한 자리 없이 시즌을 보내기로 결정해버린다. 그러니까 선발 자리가 있건 없건 정민철을 쓸 생각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때 당시 요미우리가 정민철과 한국 언론에게 댄 핑계가 그 유명한 “로테이션 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선발 로테이션이 꼬였다고 용병 투수를 한 달씩 2군에 보내는 팀이 과연 어딨을까? 덧붙여서 일본 역시 1군 말소 기간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10일이다. 로테이션이 꼬였다고 2군 보내면 기본적으로 10일은 썩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민철 본인을 비롯, 한국에서 이 얘기를 납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론적으로, 요미우리는 자기들이 쓰지도 않을 남의 나라의 에이스 투수를 다른 팀보다 앞서는 현금동원력을 이용해 영입한 뒤, 성적과 상관없이 2군에서 썩게 했다는 것. 게다가 처음부터 정민철과 함께 정민태도 영입하려고 했으며 실제로 2000 시즌 종료 후에 현대에서 정민태를 영입하는데 성공했다.[45]다시 한 번 말하지만, 외국인 투수 자리는 두 자리다. 한 자리는 이미 채워져 있었고 남은 한 자리를 한국인 투수 이 경쟁해야 한다. 이게 어쩌다보니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요미우리가 처음부터 이런 계획을 세웠다는 거다.

현지 팬들도 비슷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구글에 鄭ミン哲[46]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한 블로그에 따르면,
はっきり言って、投球内容はまったく記憶にないが、この頃の巨人は無駄に韓国人投手があふれていたので、在籍してた事だけはよく覚えている。
資料によると、2年間のレンタル移籍だったとのこと。本人が希望したらしいが、巨人というチームが悪かった。
メイやガルベス、マルティネスなど外国人選手がたくさんいた時期。
完封した翌日に外国人枠の関係で二軍落ちした事もあった。
韓国では実績を残してた投手らしいが、こういうのを飼い殺しというのか。
솔직히 말해서 투구 내용은 전혀 기억에 없지만, 이 당시 거인은 쓸데없이 한국인 투수가 넘쳐나고 있었으므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 만은 잘 기억한다. 자료에 따르면 2년 임대 이적이었다는 것. 본인이 희망한 것 같지만,[47] 거인이라는 팀이 좋지 않았다.[48]
메이, 갈베스, 마르티네즈 등 외국인 선수들이 많이 있었던 시기였다. 완봉한 다음날 외국인 할당량 문제로 2군으로 내려가는 일도 있었다.
한국에서 실적을 남기고 있었던 투수인 것 같지만, 이런 걸 바로 기르면서 죽이기飼い殺し[49]라고 하는 것이려나.

2.2.2. 정민철의 추락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으며 요미우리의 행보도 합리적인 것이었다는 주장

하지만 정민철의 등판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잘 던진 두 경기에서 이닝, 실점, 탈삼진, 볼넷 등 외견상의 수치는 흠 잡을 데가 없으나, 구속 하락이 완연했다. 첫 경기의 최고 구속은 141km/h, 평균 구속은 137km/h이었고, 바로 다음 경기에서는 아예 140km/h을 넘긴 공이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투수라도 기본적인 구속이 나오지 않으면, 몇 경기 지나지 않아 다른 팀들의 분석을 통해 호구 잡힐 것이 뻔하고 (류현진만해도 메이저리그에서 제구력과 변화구로만 평정하는 이미지여도 막상 평균구속이 90마일에 못미치는 날이면 고전하는경우가 부지기수다)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2군에서 잘 던졌다지만,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1군은 1군, 2군은 2군. 이게 한국이었다고 가정해보자. 150km/h를 던질 수 있는 파이어볼러라고 알려진 외국인 투수를 영입했는데 140킬로를 던지는 것도 버거워하고 있다? 5월도 되기 전에 팬들이 스카우터 해고를 주장했을 것이다.

애초에 요미우리가 정민철의 계약에 앞서 따로 대럴 메이와 계약한 것도, 정민철의 구속 저하에 대한 우려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 정민철의 구속 저하 사실은 모두에게 알려져 있었던 상태인데, 상기한 대로 정민철이 요미우리에 입단하기 1년 전인 1999년 당시 한국 언론의 보도내용을 보면 유별날 정도로 정민철의 구속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었다. “구속은 안 나왔지만 잘 던졌다”는 식으로. 요미우리가 바보가 아닌 이상 계약 전에 설마 이 사실을 몰랐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입을 결정한 것은 "전성기 정민철"이라는 카드가 그만큼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고, 몸에 특별히 큰 부상이 있는 것도 아니니 구속 문제는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일단 영입해서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 보기로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요미우리는 2000년 내내 정민철의 구속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정민철이 잘 던질 때도 못 던질 때도 패스트볼의 구속에 초점을 맞추었고, 2군에 있을 땐 '성적은 필요없고 구속은 올라왔는가?'라는 식. 하지만 끝끝내 정민철은 전성기 시절의 구속을 회복하지 못했다.

로테이션 문제도 핑계가 아니라 실제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갈베스가 빠져서 한 자리가 났다고 해도 여전히 남은 5선발이 멀쩡히 돌아가고 있었으며, 일본의 6선발은 곧 한국의 5선발과 마찬가지. 즉, 일본이라 해도 일년 내내 6명의 선발을 돌리는 팀은 없다. 남은 다섯 명 중 한 명을 빼면 되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불가능한 일. 당시 요미우리의 선발 다섯 명은, 구와타 마스미, 우에하라 고지, 쿠도 키미야스, 다카하시 히사노리[50], 대럴 메이 였다. 그러니까 레전드만 세 명에, 초특급 신인에, 이미 일본에서 실적을 올린 외국인 투수 까지 있었다는 것. 게다가 시즌 최후반에는 사이토 마사키가 복귀해서 6선발 자리를 메꾼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사이토는 사와무라 상만 3번을 차지한 요미우리를 넘어 당시 일본 야구계의 전설적인 레전드이다. 즉, 시험삼아 올리고 싶어도 자리 자체가 없었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도 구단 내에서 정민철을 써 보자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1군 투수코치인 카토리 요시타카[51][52]와 1, 2군 총괄 투수코치였던 미야타 유키노리[53]는 1군에 자리가 빌 때마다 정민철을 천거했다. 하지만 정작 감독인 나가시마 시게오가 구속이 안 오르는 정민철을 탐탁지 않아 했다고...[54][55][56]

2.3. 2001년

시즌 시작 전부터 거하게 꼬이면서 시작했다. 이전 해인 2000년 8월 정민철이 2군에서 식빵을 씹고 있을 때 요미우리는 현대와 정민태 이적을 두고 협상을 시작했으며, 11월에 영입에 성공한다. 이적료 5억엔, 계약금 1억엔, 연봉 1억 2000만엔.[57] 당시 정민철 팬들이 정민태를 싫어했던 이유 중 하나[58][59] 하지만 정민태도 억울한 것이, FA 계약으로 자유롭게 건너간 게 아니라 양 구단간 합의 하에 이적료를 받고 이적한 것이었다. 즉, 정민태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현대 유니콘스와 요미우리가 정한 일이라는 것.[60]

2월에는 퇴출설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기사 덧붙여서 이 해는 조성민이 부상당한지 3년이 지난 시점. 이미 지난해 복귀 등판이 10경기가 있었기 때문에, 조성민 역시 본격적으로 1군행을 노리고 있었고, 외국인 투수 대럴 메이가 건재한 상황에서 남은 1군 외국인 투수 자리는 단 한자리 뿐이었는데 그 한자리를 놓고 한국인 투수 세 명이 경쟁해야 하는 사태가 된 것.[61]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민철은 00년 여름 이후 요미우리에게 기회를 못 받았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의외로 2001년에 제법 기회를 받았다. 일단 시즌 개막은커녕 스프링캠프에서조차 1군에서 행방불명 상태.[62] 하지만 개막 얼마 뒤에 시범 경기 중 발목 부상 당한 정민태를 제치고 1군 승격. 4월 26일에 01시즌 첫 등판이 있었고, 이후 로테이션 일정을 따라 선발로 네 번, 불펜으로 네 번 등판했다. 그러니까 2000년과 달리, 그리 길지는 않지만 제대로 로테이션에 포함된 기간이 있었던 것.[63]

의욕상실 + 부담감 + 훈련부족 탓인지 00년보다 확실히 안 좋은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볼넷이 크게 늘었다. 당연하지만 볼넷 증가는 투구 밸런스가 무너졌을 때 나타나는 첫번째 증상이다. 사실 시즌 시작하기도 전에 계약해지니 한국복귀니 하는 얘기가 나오는데 할 마음이 있었을리가 없다.

역시나 정민철이 2군에 내려가자마자 곧장 한국복귀설이 흘러나왔다. 어쨌든 7월에는 2군 경기에 몇차례 등판했으며, 2000년과 마찬가지로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8월부터는 2군에서도 행방불명. 8월 후반에 1군행이 암시 되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이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저 상황에서도 정민철을 챙겨준 미야타는... 일본에 있던 내내 정민철에게 유일하게 따뜻한 남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64]

한편, 9월 말에는 스카우트 실패 책임을 지고 요미우리 대표가 경질됐다.

10월이 되고 시즌이 끝나자 정민철은 바로 한국에 복귀했다.

2.4. 일본 시절 총평

先発だと鄭ミン哲ってのもおったけど空気やった
선발이라면 정민철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공기였어.

2014년, 한 2ch유저의 코멘트.

간단히 말해 무지와 안이함이 불러온 결과. 당시 정민철의 몸 상태는 2014년 윤석민과 매우 흡사하다. 구속은 떨어졌지만 "부상당했다"라고 볼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선수 본인이나 영입한 요미우리나 설마설마 했던 것. 사실 정민철은 130개의 공을 던지며 완투나 완봉을 한 경기도 있었고, 2군에서도 꾸준히 성적을 냈다. 즉, 구속 저하는 있었지만 부상이 있어 못 던질 상태도 아니었고, 커맨드가 일정한 수준을 유지했다는 얘기. 따라서 1군에서 꾸준히 기용했다면, 특급이나 1급은 아닐지라도 5~6선발로 로테이션 한 축은 그럭저럭 맡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당시에 정민철이 팀에 불만을 품었던 것도,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2000년 2군 경기 중엔 144km/h를 기록한 경기도 있었다. 구속 저하 문제를 최우선으로 삼고 컨디션 관리에 주력했다면, 가능성은 낮지만 어느 정도 전성기 때의 폼을 회복했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1, 2군을 오락가락하는 통에 의욕상실에 부담감에 부상까지 발생하는 등 삼중고를 겪어야 했으니.

문제는 그 많고 많은 팀 중에 하필 요미우리였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요미우리는 일본 최고 명문구단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는 팀이고, 소위 말해 순혈이 아닌 선수에게는 굉장히 냉정한 팀이다. 거기다 정민철은 자기도 모른 사이에 구단 내부의 순혈 vs 비순혈 파벌 싸움에 휘말려들기까지 했다. 정민철 본인이 훗날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갔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당시에는 이런 사정에 완전히 무지했다.

결국 정민철이나 요미우리나 최악의 결과가 되어버렸다.

3. 선수 시절 후반부

3.1. 2002년

파일:02-06정민철.png
한화 이글스 2기 시절의 모습.

요미우리와 계속하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해짐에 따라 한화가 정민철 복귀에 대해 협상에 나선다. 이때 정민철의 신분이 FA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됐는데, 이 과정에서 정민철 측은 메이저리그에 가겠다고 을러대기도 했지만 당연히 MLB는 이 시점에서 정민철에게 1밀리의 관심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 결국 고향팀에 애정이 큰 정민철이 양보해서 FA 신분이 아님을 인정하고, 2002년 1월 계약서에 사인하며 2년 만에 한화로 복귀하게 된다.

이때 연봉은 4억원. 당시 시점에서 최고 연봉이다. 일본 진출 직전인 1999년 연봉이 1억 500만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인상률.[65] 하지만, 뒤늦게 계약한 이승엽이 삼성과 4억 1000만원을, 이종범이 KIA와 4억 3000만원, 미국에서 돌아온 이상훈이 4월에 LG와 4억 7000만원에 계약하면서 눈깜짝할 사이에 리그 연봉 4위로 추락. 사실 이 당시 팬들 사이에서조차 "정민철의 상태를 고려하면 너무 비싼 것 아니냐"는 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정민철은 망했다. 설마 이 정도까지 망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망했다.

26경기 138이닝, 방어율 5.35, 7승 13패.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000년대의 팬들이 기억하는 육수 흘리는 아저씨가 바로 이 시즌부터이다. 덧붙여 이 해에 같은 팀의 송진우가 220이닝을 던지며 2.99 방어율을 찍은 탓에 비참함은 두 배였다. 정민철의 상태가 예전같지 않다는 것을 아는 팬들조차 설마 이 정도 성적은 찍을 줄 몰랐다. 당시 골수팬들이 시즌 전에 예상한 성적은, 흥하면 1999년 정도일 것이요, 못해도 4점대 초중반 정도. 정민철의 구속이 추락한 것은 이제 더이상 숨길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구위와 커맨드는 여전히 수준급이라고 봤으며 실제로 1999년에도 어느 정도 성적을 보여줬기 때문. 하지만 시범경기부터 신나게 털리며 심상찮은 모습을 보이더니, 복귀 이후 첫 경기이자 팀의 개막 시리즈 두 번째 경기에서 그것도 2할대 승률로 몰락한 롯데를 상대로 1이닝만에 4실점 강판을 당했다. 그리고 복귀 이후 두 번째 경기에서 2이닝 7실점. 결국 한달간 2군행 신세를 졌다.

다만, 정민철이 이 해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다. 2군에서 복귀한 후에는 그럭저럭 한 경기 말아먹고 한 경기 잘 던지고를 반복했다. 심지어 완봉 직전까지 간 경기까지 있었을 정도.

대체적으로 이 시기 주변의 평가는, 요미우리 시절 후반부에 불안정한 처지 때문에 운동을 게을리 해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로 시즌을 출발했고, 일본 진출 실패의 경험으로 의욕을 잃은데다가, 초반에 운 나쁘게 크게 실점하는 경기 탓으로 심리적으로 쫓기게 만들었다는 것.

3.2. 2003년

26경기 11승 10패. 방어율 4.00, 139와 2/3이닝, 132탈삼진

일단 연봉은 1억원이 깎여 3억에 계약했다.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방어율 4.00이 썩 좋아보이지 않다만, 이 해는 모든 크보 투수들의 성적이 고만고만했던 시절이다. 방어율 1위가 3.01의 셰인 바워스로 역대 유이한 3점대 리그 방어율 1위를 기록한 시즌.

하지만 2002년과 마찬가지로 기복이 좀 심했고, 이로 인해 이닝을 많이 먹지 못했다. 게다가 이 해 정민철의 뒤를 이어 요미우리에서 복귀한 이름 한 글자 다른 투수가 방어율 3.31에 17승을 찍으며 상대적으로 묻히기도 했고.[66]

이렇게 정민철이 부활의 기미를 보이자 구단은 연봉을 다시 5천만 원 올려주었다. 정민철도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이 해 10월 선수 인생 처음으로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다.[67]

한편, 경기중 부러진 방망이에 다리를 다친 정민철에게 삼성 선수들이 번트를 해댄 사건이 있었던 것이 바로 이 해이다. 기사

3.3. 2004년

54이닝, 0승 6패, 방어율 7.67,

은퇴해인 2009년을 제외하면 1승도 못 거둔 해는 이 해가 유일하다. 2009년과 일본시절을 제외하면 이닝 수도 가장 낮다. 2002년과 2003년은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지만 04년은 두 말 할 것 없이 시즌 내내 못했다. 원인은 팔꿈치 수술 실패. 뼛조각 제거 수술은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고 재활 기간도 짧지만, 투구 매커니즘이 망가져 버렸다. 재발에 대한 불안감 탓인지 폼이 무너져 팔꿈치 다른 부위에 통증이 발생한 것.

당시 정민철은 진지하게 '아 이제 은퇴를 준비해야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2004시즌 이후 스프링캠프에서 당시 감독 복귀 직후 뇌경색으로 쓰러졌다가 돌아 와서 본인 몸 챙기기도 힘들었던 시기의 김인식 감독이 정민철에게 다가오면서 "야 민철아, 너 진짜 빵승이냐?"라고 하면서 그에게 훈련일지용 공책을 주고 신경써 주는 모습을 깐 거 아닌가?[68] 보여주자, 다시 힘을 얻어 2005시즌부터 재기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고 하여 훈련에 매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3.4. 2005년

일단 연봉이 1억원 삭감되면서 시즌이 시작됐다. 각종 인터뷰에 따르면, 이 무렵부터 소위 말하는 제구력 투수로 변신을 꾀했다. 빠른 공보다 커브를 위주의 커맨드를 앞서는 스타일로 바꾼 것. 그리고 이 시즌에 프로 데뷔때부터 오랫동안 달던 55번을 후배 윤규진에게 물려주고 23번으로 바꾸게 된 시즌.

이 변화로 전반기에는 제법 괜찮은 결과가 나왔다. 6월 말까지는 부활, 에이스의 복귀라는 소리까지 들렸었다! 이때까지는 방어율이 3점대 중후반에 7승으로 다승 1위를 노렸었다! 그런데 6월 29일 경기에서 갑작스러운 팔꿈치 통증으로 1이닝 만에 강판된다. 그리고 7월부터 슬금슬금 성적이 내려갔다. 선발 로테이션은 어떻게 지켰다만 이닝이팅이 급격하게 줄어들었으며 초반에 와장창 무너지는 경기가 많았다.

결국 최종 성적은 115⅔이닝 9승 3패, 방어율 4.82.
이때 당한 팔꿈치 부상이 남은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로 14년 만에 마침내 인대가 손상된 것. 검사 결과 대부분의 의료진은 수술을 권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으나 만 33세의 나이로 수술을 받는 것도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 결국 재활을 선택한다.

체고의포수 신경현에게 2루 도루저지 송구에 등짝을 맞았다. #

3.5. 2006년

130⅔이닝 7승 13패, 62탈삼진, 방어율 3.93.

팔꿈치 상태가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스타일 변화는 여전히 좋은 성과를 낳았다.

또한 이 시즌은 일자별 성적을 다시 돌이켜보면 승운이 유독 따르지 않았던 시즌이기도 하다. 당장 시즌 첫 등판이었던 4월 11일 LG전에서 5⅔이닝 2실점으로 무난하게 던지고도 패전, 5월 19일 두산전과 25일 삼성전 역시 각각 6⅓이닝 2실점, 6이닝 2실점(1자책)으로 오히려 투구 내용이 더 좋아져 2경기 연속 QS를 기록하고도 연속 패전, 이런 식으로 5+이닝에 3실점 이하 투구를 하고도 패전을 쌓은 경기가 무려 6경기나 있었다.[69] 다만 8월까지 나름 순항하며 시즌 평균자책점도 3.47까지 떨어뜨렸었으나, 9월 들어 5번의 선발 등판 중 앞서 4번 모두 5이닝을 못채우는 부진투를 거듭한 부분이 아쉬웠다. 그래도 시즌 마지막 등판이었던 9월 29일 현대[70]와의 경기에서 7이닝 3피안타 3탈삼진 2실점으로 유종의 미를 제대로 거두면서 팀 역시 3위 굳히기를 할 수 있었다.

전성기 시절 성적을 생각하면 씁쓸한 정규시즌 기록이었으나, 팀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가을야구에 진출했고, 정민철은 플레이오프 2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5⅓이닝 1실점으로 짭짤한 활약으로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한 몫 보탰다.[71] 한국시리즈에서도 2경기 선발 등판하여 기대 이상의 선전을 해주었다. 하지만 이 해는 바로 류현진이 데뷔한 해. 그리고 문동환의 부활로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게다가 리그 방어율이 3.58로, 1994년 이후 가장 낮은 방어율을 기록한 투고타저 시즌이었기에 정민철의 정규시즌 ERA+는 95.5로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이었다.

3.6.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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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부터 슬슬 살이 불기 시작했다...

26경기 155⅓이닝, 12승 5패, 66탈삼진, 방어율 2.90.

2006 시즌 종료 뒤 FA자격을 취득했으나 잔류 의사를 밝히고 신청을 포기했다. 구단은 프랜차이즈 스타임을 대우해서 2년 총액 9억에 계약했다. 사실상 선수 인생 첫 FA.[72]

1997년 이후 10년 만에 방어율 2점대를 기록했다. 내용상으로도 매우 좋았던 편. 무엇보다도 이닝을 많이 먹어준 덕분에 한화 마운드 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사사구 숫자와 피홈런 숫자도 작년에 비해 도리어 훨씬 줄었다. 다만 전성기 시절에 비해 삼진이 적고 피안타가 많은 것이 아쉬운 점. 방어율에 비해 FIP이 높지만 잊기로 하자

덕분에 시즌 초반 부상으로 전력 이탈된 문동환의 빈 자리가 훌륭하게 메워졌다. 때문에 언론이나 팬들 모두가 에이스 부활을 외쳤으며 일구상 재기 선수상을 차지했다. 올드팬들은 류현진과 원투 펀치를 형성한 정민철을 보며 “新 舊에이스 동시에 활약한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카더라. 한편, 정민철의 부활로 김인식은 또 한차례 재활공장장 이미지를 덧붙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영원할 것 같던 송진우 옹께서 선발로는 사실상 수명을 다하여 계투진에 합류함에 따라 류현진- 송진우-정민철 선발 트리오가 동시에 활약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어졌었다.[73]

이 해 프로 통산 최연소(35세 2개월 27일), 최소경기(347경기) 150승을 달성했다.[74] 참고로 150승을 거둔 투수는 KBO 리그 37년 역사 중에서 송진우(210승), 정민철(161승),양현종(현역),이강철(152승) 단 네 명이다.

더불어 이 해에 통산 20번째 완봉승을 거뒀는데 이 기록으로 선동열에 이어 윤학길과 함께 통산 완봉 순위 공동 2위에 올라서게 되었다. 하지만 2007년의 활약은 정민철의 회광반조나 다름없는 시즌이었으며, 2008년부터 다시 미끄러지게 된다.

3.7.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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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⅓이닝, 6승 10패, 방어율 5.23.

부진의 이유는 딱 봐도 나이 탓. 정민철의 나이도 어언 37세. 30대 후반이 되면 부상이 없어도 투수든 타자든 갑자기 기량이 하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정민철은 몸이 특별하게 아픈 부분은 없었고, 최고 구속도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긴 했으나... 체력이 더 이상 예전같지 않았고, 요 몇 년간 쏠쏠했던 커브의 구위도 후반기 들어 완연히 떨어지는 부분에서 세월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시즌 내내 부진했던 것은 아니고, 올림픽 브레이크 이전까지 그 나이를 먹고도 선발 로테이션을 한번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던지면서 7월 15일 LG전 5⅓이닝 1실점(무자책) 승리투수로 이미 6승을 찍었었고, 7월 26일 당시 무시무시한 타선을 보유한 롯데를 상대로 6이닝 2실점(1자책)으로 호투했었다.[75] 그래서 전반기까지만 해도 21경기 등판하여 108⅔이닝을 소화하면서 6승 8패 ERA 4.89를 기록, 평균자책점은 몇 경기 거하게 터지면서 다소 높긴 했었어도 선발 마운드를 계속해서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올림픽 브레이크를 이용해 휴식을 적절히 취하면 후반기에는 작년 못지 않게 호투를 해줄 것으로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었으나... 쉬고 왔더니 별안간 살이 꽤 오른 모습을 보인데다 투구 내용 마저 딴 사람이 되어버렸다. 특히 전반기 21경기 등판 하는 동안 피홈런 단 7개만 허용하던 투수가 후반기 단 4경기 만에 피홈런 6개를 기록한 부분은 그저... 지못미. 특히 후반기에는 4번의 선발 등판 모두 5이닝도 못 채우고 강판된 부분도 한화의 4위 사수 실패에 결정적 역할을 해버렸다.[76]

결국 2008 시즌 한화 투수진은 그야말로 처참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사실 정민철은 팀 내에서 세 번째로 많은 이닝을 소화해낸 투수였다(!). 류현진이 165⅔이닝을 던져서 규정이닝을 소화했을 뿐, 2위인 송진우 조차 132⅔이닝을 던져서 정민철과 엇비슷했던 수준이었다. 나머지 선발은 누가 던졌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미미한 수준. 이 해 선발진이 이닝을 먹지 못하자 한화의 불펜 혹사는 그야말로 정점을 찍었으며, 훗날까지도 한화 팬들이 김인식을 욕하는 이유가 되었다.

한편, 이 해 160승 고지를 돌파했다. 통산 160승 투수는 KBO 역사에서 송진우, 정민철 단 두 명 뿐이었고 이후 2023년 양현종이 160승을 기록한다.[77]

3.8. 2009년

두 번째 FA를 맞이했지만 예상대로 신청하지 않고 연봉 2억 1천에 도장을 찍었다. 오프시즌에 체력적인 문제를 보강하기 위해 애를 썼으며, 떨어진 구위를 되살리기 위해 릴리스포인트를 앞으로 당기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1, 2군을 왔다갔다하면서 위기에 상당히 약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2009년 6월 6일 SK전에서 3회초에 실책성 3루타를 맞은 후 계속 안타를 맞아 결국 한 이닝에 6점을 내주고 강판 당하는 경기에 이어, 6월 11일 롯데전은 아예 2이닝도 채우지 못하고 1⅓이닝 5실점(3자책)을,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던 6월 18일 LG전에서는 4이닝 5실점으로 또 다시 무너지면서 1군에서는 더 이상 정민철의 공이 통하지 않는 모습을 연거푸 보여주었다. 문제는 신인이라면 이게 경험치 쌓는 것이라고 커버라도 쳐주고 2군에서 다시 갈고 닦게 만들 수라도 있지만, 정민철은 어느덧 프로생활 황혼기를 맞은 1972년생, 38세였고 고참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한화라는 팀에 큰 약점으로 잡혀버렸다. 당장 해당 시즌은 정민철이 선발이라 하면 상대팀 팬들이 거의 이긴 경기라고 점칠 수준에 이르렀으니... 거기다가 살도 예전보다 더 많이 쪄서 전성기 시절 미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결국 6월 중순을 끝으로 정민철을 1군에서 볼 수는 없었고 정규시즌 기록 역시 0승 6패를 거두는 데에 그쳤다.

전후사정을 볼때 이미 시즌 전부터 구단쪽에서 은퇴시킬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9년 시즌은 한화 이글스의 몰락이 세살 꼬마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해진 해였고, 구단 안팎으로 리빌딩 요구에 대한 목소리가 거세던 때이다. 실제로 구대성을 제외[78]로한 한화 베테랑 투수들인 송진우, 문동환, 최상덕 등이 이 해에 한꺼번에 은퇴했다. 이런 상황은 정민철 본인도 감지하고 있었을 터. 구단이 플레잉 코치 자리를 제의하자 큰 갈등없이 받아들이고 보직을 이동, 사실상의 은퇴 수순을 밟았다. 결국 송진우의 대기록을 제대로 좇지도 못한 채 2009시즌 후반기에 은퇴를 선언했다.

2009년 9월 12일, 은퇴식을 가졌다. 하지만 은퇴 경기는 후배 양성을 위해 자진해서 거절했다. 은퇴 경기를 위해 1군에 등록될 경우, 후배 선수 중 한 명이 자신을 대신해서 10일간 1군 엔트리에서 빠져야 되기 때문. 항상 순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정민철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은퇴식이 있는 2009년 9월 12일에는 한화의 홈구장인 대전구장은 무료 입장을 시행하였으며 'ACE 23'이라고 새겨진 수건을 입장객 전원에게 증정하였다. 이날 히어로즈 VS 한화 이글스의 경기는 김혁민의 막장투구로 히어로즈가 9점을 먼저 올리면서 패배로 끝을 내는가 싶었지만, 4회말 분노의 3 홈런으로 한화가 스코어 9:7까지 따라잡으며 분전, 5회 말 클리닝 타임에 시행된 정민철의 은퇴식 이후에는 한 점도 내주지 않고 9회말 이범호의 1타점 적시타 후 이도형이 또 다시 조용준을 상대로 끝내기 3점홈런을 날리며 9:11로 승리하였다. 이날 한화는 무려 9점 차이를 뒤집는[79] 저력을 보여주며 정민철의 은퇴식에 승리로 화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불암콩콩코믹스에도 나와있다. 중간부분부터 보면 된다.

은퇴와 동시에 구단은 그의 등번호 23번을 KBO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였다. 다만, 이 영구결번과 관련해서 약간의 논란이 있다. 기타사항을 참조.

4. 평가


다음은 일본 진출 이전의 정민철을 메이저 진출 이전의 류현진과 비교한 표이다.
선수 활약한 시즌 경기수 이닝 완투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정민철 8 시즌 219
(시즌 평균 27.4)
1,503
(1G당 평균 6.8이닝)
109
(시즌 평균 13.6)
62
(시즌 평균 7.8)
10 59
(시즌 평균 7.4)
2.80 1,223
(9이닝 당 평균 7.3)
442
(9이닝 당 평균 2.6)
1,189
(9이닝 당 평균 7.1)
류현진 7 시즌 190
(시즌 평균 27.1)
1,269
(1G당 평균 6.7이닝)
98
(시즌 평균 14)
52
(시즌 평균 7.4)
1 27
(시즌 평균 3.9)
2.80 1,081
(9이닝 당 평균 7.7)
383
(9이닝 당 평균 2.7)
1,238
(9이닝 당 평균 8.8)
흔 한 도 플 갱 어 들 의 성 적 표.xls

피안타, 피볼넷, 자책, 심지어 평균 승-패까지 클래식 비율면에서 완전히 판박이 수준. 방어율 2점대 투수가 매년 7패, 8패 하게 만드는 한화 클래스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단, 9이닝당 탈삼진 수에서 류현진이 앞서며 완투 횟수는 정민철이 앞선다. 또한, 정민철은 데뷔 첫 해 불펜 투수로 출발했으며 매 시즌 3~4회 가량 불펜 등판이 있었다. 즉 선발등판만 고려했을 경우, 정민철의 선발 1G당 평균 이닝은 7이닝을 넘을 듯하다. 조정 방어율이나 FIP 등은 잊기로 하자. 2014년 시점에 그런 게 알고 싶다면 본인이 일일이 직접 계산해야 된다.[87]

7시즌 이상 평균 방어율 2.80을 찍은 에이스들이 13~4승에 7~8패를 찍은 것에서 알 수 있겠지만, 당시 정민철 등판 경기의 모습은 류현진 경기와 분위기가 매우 흡사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의 팬이 전성기 당시 정민철 등판 경기가 어떤 식이었는지 알고 싶다고? 아주 간단하다. 류현진이 쌔빠지게 고생했던 경기들을 떠올리면 되는 것이다.

다만 두 사람의 투구 스타일은 차이가 있다. 류현진이 완급조절과 체인지업으로 경기를 풀어나갔다면, 정민철은 강력한 직구 구위로 강행 돌파했던 타입. 최고 구속이 150을 못 넘겼다는 것만 빼면 야구 만화 주인공같은 스타일이었다는 것. 게다가 류현진은 순수 선발투수였으니 김영덕 - 강병철 시절에 구원투수 알바까지 뛰었던 정민철에 비해 그나마 사정이 좀 낫다.

결론적으로,

류현진 베타 버전. 20년 전부터 눈에 익은 한화의 일상.

선수 시절 후반부는 배영수를 떠올리면 된다. 틈틈이 희망고문 시즌이 있었다는 것까지 비슷하다. 다만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는데, 배영수는 팔꿈치 인대 손상으로 몰락하기 시작했고, 정민철은 팔의 고장으로 인한 구속 저하가 내리막의 원인이라는 것. 게다가 배영수는 팔꿈치 수술 이후에는 꾸준하게 로테이션을 지킨 반면, 정민철은 오히려 뒤늦게 팔꿈치에 본격적인 문제가 생기면서 기복이 심해졌다.[106] 2004년에 불거진 팔꿈치 부상으로 인한 공백이 너무 컸다. 부상 전후 성적을 따져봤을 때 2004년과 2005년의 부상 공백이 그의 성적에 큰 손해를 가져온 것은 분명한 사실. 2003년과 2006년 성적이 전성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적어도 리그 평균은 된다고 말할 수준이었고, 심지어 2007년에는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기 때문.

5. 주요 쟁점

5.1. 저평가된 에이스?

일단 정민철 본인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데뷔 때부터 당시 드물했던 여고생 팬이 존재했으며, 매일 수십 통의 팬레터가 날아 들어왔다. 세련된 외모에 입담까지 갖춘 만 스무 살 에이스 투수. 2000년대 이후에 데뷔했으면, 매일같이 기자들이 인터뷰를 따기 위해 기다렸을 것이다.[107]

리그 최정상 투수들에게 약간 모자란 성적을 거두어서 성적에 비해 수상내역이 부실하다.

거듭 지적하지만, 정민철은 승수를 많이 챙기지 못했던 투수였다. 당시의 야구 보도는 승리투수에게 철저하게 맞춰져 있었다. 7이닝 1실점, 8이닝 2실점 등으로 아무리 많이 던지고 실점이 적어도, 승패와 무관하거나 아예 졌다면 그저 기사 말미에 “잘 던졌으나 아쉽게도” 한 줄 설명, 끝. 동시대의 에이스 정민태 조계현은, 승리투수가 되어 스포츠지 1면 사진을 채웠던 것과는 대조적.

게다가 인터넷이 없어 팩스로 원고를 보내던 시절이다. 해태 타이거즈처럼 매년 우승권이 아닌 지방 팀 경기의 경우, 취재 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팀 전담 기자는 커녕 지방경기는 서울에서 경기 결과만 팩스로 받아 기사로 싣는 경우가 태반. 차라리 서울팀 소속이었다면 오고가며 기자들과 접촉하여 흥미 위주 기사라도 따내었을텐데... 누구는 시합 전날 짬뽕을 먹었네, 시즌 끝나고 낚시를 갔네 하는 시시콜콜한 얘기가 보도되는데 왜 우리 민철 오빠는 기사가 안나온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언론 보도에서 1990년대 초반에는 “선동열 다음 투수”라는 수식어를 붙였고, 1990년대 후반부에는 “리그 최고 투수”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그러니까 저평가는 아니었던 셈.

취재 여건이 달라진 1990년대 후반에도 정민철은 여전히 스포트라이트와 거리가 멀었다. 선동열 일본 진출에, 박찬호에, 이승엽까지 50홈런을 때려내던 시절이라 초점이 이들에게 맞춰졌던 것. 즉, 분명 리그 최고 투수로 언급은 되는데, 정작 신문기사의 양은 적었다는 것.

결국 이런 요소들이 겹치면서 일본 진출 이전까지 정민철 관련 언론의 보도내용은 매우 부실해서, 객관적인 경기 결과 외의 내용은 거의 보도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여기에 두고두고 아쉬움이 많았던 한화팬들이 정민철에 대해 지금까지 “비인기 팀이라 저평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5.2. 1990년대 최고 투수 논쟁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긴 하겠지만, 2000년대 이후 이 문제를 얘기할 때 대부분 1990년대 최고 선발 투수는 정민철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처음에 이 문제에 민감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한화 팬들. 바로 위 대목에서 언급한대로 한화팬들은 정민철이 전성기 당시 저평가 당했다고 인식했었으며, 여기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다. 때문에 가장 먼저 이 떡밥을 꺼내들었고 활발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108]

그런데 한화 팬 여부를 떠나서 이 문제는 많은 야구팬들에게 흥밋거리가 되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후보군 중에서 누구 한명 확실히 빼어나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 끗 차이로 판단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1980년대 최고 투수 논쟁은 그다지 치열하지 못하다. 선발은 최동원, 종합은 선동열. 끝
특히 야갤 대표 떡밥 중 하나가 정민철 vs 정민태이다. 둘 다 1992년 데뷔에 요미우리에 진출, 이름마저 비슷해서 종종 비교되지만 사실 둘의 행보는 많이 다르다. 정민철은 데뷔하자마자 돌풍을 일으키며 리그 수위 투수로 자리잡았지만 정민태는 프로 초기 병역비리, 토미 존 수술 등으로 부침을 거듭하다 비로소 팀이 현대로 바뀌면서 빛을 보기 시작한다. 또 정민철은 현역시절 15승은 못하는 에이스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109] 특별히 역대급 커리어하이 시즌도 없었지만[110] 말년에도 제2의 전성기를 맞는 등 선수생활 내내 꾸준히 성적을 낸 반면, 정민태는 1996년부터 2003년까지 KBO 6년간 100승(15-13-17-20-18-17승), 1994년부터 9년 연속 규정이닝, 5년 연속 200이닝, 포스트시즌 10승, 투수 골든글러브 3회 선정(98, 99, 03) 등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고 부상으로 급격히 쇠락하게 된다. 2004년까지는 정민철 127승, 정민태 124승이었으나 이후 정민철은 34승을 추가해 명예롭게 은퇴한 반면 정민태는 무승 10패로 폭망해 누적 기록이 크게 벌어졌다.

참고로 이 내용은 정민태/선수 경력 문서에도 기재되어 있다.


[1] 대전고 시절 고교 졸업 당시에는 이렇다 할 활약이 없었다. 1990년 봉황대기 우승때는 1년 선배 안희봉(이후 연세대 진학)이 주역이었고, 당시 2학년이었던 정민철은 별다른 역할을 못했다.. [2] 정민철이 입단한 1992년은 빙그레의 마지막 전성기였다. 1993년 5위를 끝으로 전성기를 이끌던 김영덕 감독은 퇴임했고, 롯데 감독인 강병철이 오게 되는데, 강병철은 널뛰기스러운 성적인 3-6-3-7-7을 찍고 1998년 시즌 중에 경질되었다. 이후 1999년에 우승을 했지만, 그 뒤로 정민철은 요미우리로 떠났고, 2004년까지 계속해서 내리막을 타게 된다. [3] 유급한 경력이 있어 1년 후배들과 프로 입단 동기이다. [4] 당시에는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는 국제대회(예: 올림픽, 아시안게임) 출전 자격이 철저히 아마추어 선수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프로 선수도 국제대회 출전, 입상을 통한 병역특례가 가능해져 고교 졸업 후에 바로 입단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5] 광주일고 시절 투수를 겸했던 박재홍은 연세대 진학 후 타자로 정착한다. [6] 결국 지연규는 부상에 허덕이다 1998년을 끝으로 은퇴했지만, 2001년에 복귀했고, 30대 중반의 늦은 나이인 2002년에 비로소 의미있는 활약을 하게 되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정민철이 내리막을 타던 시기에 지연규가 계투진에 등장했던 것. [7] 그 해 정민철이 기록한 특정 팀(vs 쌍방울전) 3완봉승은 1986년 빙그레 한희민이 거둔 순수 신인 특정 팀 최다 완봉승(vs 청보전)과 타이 기록이다 [8] 4차전에서 정민철은 패전 투수, 염종석은 승리 투수. [9] 당시 병역법상 방위병은 일과 이후 프로 경기에 출장할 수 있었다. 이종범 역시 같은 케이스로 일치감치 군 문제를 방위병+반토막 출장으로 해결한다. [10] 대전구장 조명탑 붕괴 사고로 인해 청주에서 2달 가량 홈경기를 치러 방위병인 정민철은 홈경기임에도 출전할 수 없었다. [11] 구원등판 경기가 한번 있었기 때문에 선발 17경기 중 10번을 완투한 것이다. [12] 선동열이 전설의 방어율 0.78을 찍었던 게 바로 이 1993년이다. 2위는 OB 베어스의 김경원이 기록한 1.11, 이게 선동열 이외의 선수가 기록한 시즌 최저 방어율이다! [13] 참고로 정명원은 50게임 105이닝을 등판했는데, 21세기 기준으로는 혹사이긴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순수한 마무리 투수 수준의 등판. 즉, 218 이닝, 9완투를 한 정민철에 비하면 팀 공헌도가... [14] 무엇보다도 당시 경기수가 126경기였던 걸 감안해야 한다. 실제로 다음 40세이브 기록은 무려 8년이 지나 경기수가 133경기로 증가한 2000년에 두산 베어스 진필중이 달성하기 전까지 나오지 못했다. [15] 고시엔 구장. [16] 나가라가와 구장. [17] 한국 한화 이글스, 일본 다이에 호크스, 대만 퉁이 라이온스, 호주 야구대표팀, 이렇게 4개국 팀이 참가한 대회이다. 2000년대에 열린 아시아시리즈와 거의 비슷한 성격의 대회로, 1회대회만 개최되고 폐지된다. [18] 방어율, 다승, 구원, 승률 1위를 싹쓸이 하며 최초의 30-30을 기록한 박재홍을 누르고 MVP가 된 그 해이다. 심지어 이 성적은 마무리 투수가 달성한 기록이다. [19] 18승으로 구대성과 동률 [20] 데뷔 이후 매년 승수가 13 아니면 14로 고정되어 있었고, 두 자리 숫자 패전을 기록한 게 벌써 세 시즌 째이다. 게다가 2000년대 이전 야구계는 투수 스탯 중에서 승수를 최우선으로 여겼다. 정민철이 성적만큼 대접을 못 받았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때문. [21] 마무리도 아닌 구원투수로서 최초이자 최후의 20승 투수이다. 이 성적이 정말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닌지는 차치하더라도, 과연 김현욱이 선발투수로서 출장했을 때 이 정도의 성적을 낼 수 있을지는 확실히 장담할 수 없는 노릇. [22] 게다가 이 무렵에는 박찬호의 활약 덕분으로 팬들과 언론들이 메이저리그를 접하면서, 과연 투수의 성적 중에 승수가 최우선인가? 선발투수와 구원투수가 같은 가치를 지니는가? 등의 의문을 본격적으로 가지기 시작한 때였으며, 한국야구에서도 투수 분업화가 어느 정도 정착한 시기였다. [23] 선동열이 일본 진출하면서 언론에서 주야장천 이대진을 후계자로 밀어붙인 점도 있고. [24] 한편 정민철과 더불어 1990년대 투톱 선발 중 한명이었던 조계현도 골든글러브를 단 한 번도 타지 못한 상태였는데, 하필 이 해부터 쇠퇴가 시작돼서 골든글러브 후보로 언급조차 안 되고 콩라인전설의 마지막을 찍어야 했다. [25] 2022년 4월 NC 다이노스와의 개막전 맞대결에서 SSG 랜더스의 선발투수로 나선 폰트가 9이닝 퍼펙트를 달성했지만,정규이닝 동안 타자들의 득점지원을 받지 못하고, 10회말 김택형으로 투수가 교체되면서 무산됐다. [26] 8회 1사에서 포수 강인권 포일 뒤 낫아웃 출루 허용으로(타자는 심정수) 퍼펙트 달성에 실패했다. 그 다음 날 스포츠 신문 1면에는 "아, 퍼펙트..."라는 제목으로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27] 인터뷰 원문에는 1998년 애리조나 마무리캠프(교육리그)ㅡ1999년 팔꿈치 부상이라고 언급되어 있지만, 정확하게는 1997년 10월 애리조나 마무리캠프(교육리그)ㅡ 1998년 팔꿈치 부상이 맞다. [28] 7월 24일 LG 트윈스 상대로 8회 1사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다가 김동수에게 솔로 홈런을 얻어맞고 피안타+실점을 기록한 것. 그리고 마운드를 내려가면서 노 디시전이 되었다. [29] 리그 방어율 4.98로 2014년 이전까지 최고 기록. [30] 다만 정민태가 230이닝이라는 압도적인 투구를 소화해서 최다 이닝 투구를 기록하지는 못했다. 그해 1999년에는 정민태가 투수 각 부문에서 독보적인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20승으로 최다승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리그 전체 방어율이 4.98인 타고투저의 해에 2.54를 기록했을 정도였다. [31] 에이스 투수→혹사→부상→회복→그런데 왠지 구속이 5킬로 떨어짐+하필이면 해외진출 직전 [32] 잠실야구장. [33] 정식명칭은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로 개최되었다. [34] 후쿠오카 돔. [35] 저 당시 정민철은 1992-99년간 8시즌을 뛰어 7시즌을 이미 채웠고, 구대성은 1993-99년간 7시즌을 뛰었으나 1993년 21이닝만을 출장하여 실질적으로는 6시즌을 뛴 것으로, 정민태 또한 1992-99년간 8시즌을 뛰었으나 1992년 26이닝, 1993년 9이닝만을 뛰어 실제로는 6시즌을 뛴 걸로 간주되어 해외진출을 하지 못한다. 정민태와 구대성은 2000년 시즌이 끝나고 일본으로 진출하는데, 오릭스는 정민태 영입전에서 또 요미우리에게 지고(...), 기어이 구대성을 가져가는데 성공했다. [36] 정민태와 고등학생이었던 권윤민도 동시에 신분조회 요청이 들어왔는데, 이중 권윤민은 며칠 뒤 컵스와 계약했기 때문. 물론 여러팀에서 동시에 신분조회 요청이 들어왔을 수도 있다만... [37] 다만 확실히 공개된 액수가 아니라 추정보도된 액수이다. 연봉의 경우 8천만엔이라는 설도 있다. [38] 1999년 11월 환율(100엔=1153원) 기준으로 계약금은 약 11억 5천만원, 연봉은 5억 7천만원 이상, 이적료는 29억원 가량 된다. 거기에 이 물가는 20년도 더 전인 1999년 당시의 물가로, 지금으로 치면 이적료로만 거의 40억 이상에 해당되는,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큰 액수였다. [39] 일본위키에 따르면 정민철이 당시 일본의 인기 걸그룹 SPEED의 팬이었다는 정보가 있었다. 설마... 이게 일본행에 영향을 미친 것일지도. [40] 불과 1년 전인 1998년 초, MLB 진출을 원했던 LG 이상훈을 보스턴으로 이적시키기 위해 포스팅 입찰 과정을 거쳤으나 당초 기대와는 다르게 고작 응찰액 60만 달러에 그쳐 일본 주니치로 선회했던 적이 있다. 이후 2002년 당시 리그 최상급 마무리였던 진필중이 포스팅을 통해 MLB 문을 두드렸으나 첫 번째는 무응찰, 두 번째는 겨우 2만 5천 달러라는 굴욕적인 결과가 나와 두산이 포스팅 수용을 거부했고, 같은 해 삼성 임창용 역시 포스팅 시스템을 거쳤으나 응찰액 65만 달러에 그쳐 좌절됐던 사례를 생각하면, 정민철 역시 MLB 포스팅을 거쳤을 경우 요미우리가 제시한 이적료에 비해 한창 못 미치는 금액이 나와 한화 측에서 이적을 거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41] 1998년 하반기부터 정민철 경기를 중계할 때마다 해설자들이 거의 빠짐없이 ‘구속하락'을 언급하다가, '하지만 여전히 공끝은 좋음’, ‘정민철 정도면 베테랑이니까’ 라는 식으로 멘트를 마무리하던 상태였다. [42] 일본야구는 6선발제이다. 물론 '일본의 6선발=한국의 5선발' 취급 [43] 한편 조성민은 이틀 뒤 인 13일에 선발등판해서 부상 이후 2년 2개월 만에 승리투수가 됐다. (5이닝 6피안타 3실점 1자책.) 이후 18일에 구원 등판한 것이 조성민의 그 해 마지막 1군 등판이었다. [44] 명목상 이유는 6경기 등판 6패에 무릎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어율은 3.26으로 준수했었는데 갈베스는 이전부터 고약한 성질머리로 유명했고, 매년 태업 의혹도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2군행에 불만을 품고 구단과 갈등을 빚어 다시는 1군에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45] 2000년 정민태는 말 그대로 미쳤다. 18승 6패를 거두면서 공동 다승왕, 플레이오프 MVP를 거두었다. 다만, 정민태는 1996년부터 2000년까지 83승을 거두면서 리그 최강의 선발투수로 군림했으며, 매 해마다 200이닝 이상을 소화했다. 심지어 1997~1999년은 이닝 소화율 1위, 2000년은 이닝 소화율 2위를 했다. [46] 일본은 珉(민)자를 쓰지 않는다. [47] 이 부분은 이 사람의 오해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요미우리 쪽이 먼저 영입의사를 밝혔다. [48] 뉘앙스 상 요미우리의 대우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정민철이 팀을 잘못 골랐다는 뜻 [49] '쓸모도 없는 가축을 죽을 때까지 키운다'라는 뜻으로, 무쓸모한 사원을 한직에 앉혀두고 썩힐 때 하는 말이다. [50] 우에하라에 이어 2년 연속 터진 특급 신인 투수였다. [51] 1979~1997년까지 요미우리와 세이부에서 중간계투와 마무리 투수로 활약한 우완투수이다.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로 대회 우승에 기여했다. [52] 다만 카토리는 이듬해 거인에 입단한 정민태는 굉장히 싫어했다. 2001~2002년 당시 대놓고 언론이 보도할 정도였고, 정민태도 훗날 인터뷰에서 불화가 사실이었다고 증언했다. [53] 선수생활 당시 주로 등판하는 시간이 8시 30분이어서 8시 30분의 남자라는 별명을 가진 구원투수였다. 거인의 일본시리즈 V9 당시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모리 마사아키와 팀메이트였다.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쿠도 키미야스 궈타이위엔 등을 육성했다. 투구 이론과 투수 육성법이 이름났으며 코치 경력만 24년에 달한다. [54] 당시 거인 내의 보이지 않는 역학 관계도 이를 부채질 한 것으로 보인다. 나가시마 시게오는 자기 팀 선수 이름도 제대로 몰랐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미야타는 과거 나가시마 1차 정권 당시 나가시마와의 불화로 쫓겨난 뒤 니혼햄, 세이부, 주니치 투수코치를 맡으며 그 수완을 인정받아 1999년 요미우리 1, 2군 총괄코치로 금의환향한 케이스이다. 거인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팬이라면 짐작하겠지만, ''' 요미우리 순혈 vs 평민팀에 빌붙었다가 돌아온 진골의 상황이었다는 것. [55] 실제로 나가시마는 인터뷰에서 대놓고 "그 녀석(미야타)은 밖에서 들어왔으니까"라고 까기도 했다. 덧붙여 훗날 정민철의 코칭 스타일도 미야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기사 [56] 또한 나가시마는 베테랑이나 연차가 앞서는 선수를 우선적으로 챙기는 성향이 있었다. 당시에도 '정민철보다 갈베스에게 기회를 주자.' → '갈베스를 퇴출해야 된다고? 그럼 다음 기회는 당연히 먼저 고생한 조성민에게 줘야지.'라는 식. [57] 정민철의 금액과 마찬가지로 추정액이다. 이적료의 경우 알려진대로라면 역대 최고액이지만, 워낙 당시에 자존심 문제로 부풀린 액수를 언론에 흘린 경우가 많아서. 여하간 계약금 제외 정민철의 2배 금액이다. [58] 사실 당시 정민철 팬들은 이전부터 정민태를 그리 곱게 보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 정민태가 빼어난 성적을 올리면서 정민철이 묻힌 감이 없지 않은데다가 하필이면 이름도 비슷했기 때문. [59] 야구를 모르는 사람에게 정민철 얘기를 하면 “현대 선수?”라고 반문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고 전해진다. [60] 2001년 현대는 요미우리에서 받은 정민태의 이적료와 조웅천, 조규제를 신생팀 SK에 트레이드해 받아온 이적료로 팀을 운영하였다. 전년도까지만 해도 자금력이 풍부했던 현대였지만, 2001년부터 현대그룹 왕자의 난으로 인해 그룹이 뿔뿔히 흩어진 상황에 이어 현대 구단을 소유하던 현대전자가 하이닉스로 사명을 바꾼 뒤 지원을 모두 끊어버렸던 상황이었다. [61] 선수들간의 관계가 묘했는데 정민철과 조성민은 함께 동계훈련을 했다. 그러나 조성민은 정민태의 입단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62] 당시 정민철 왜 안 올리냐고 묻는 한국 기자들에게, 투수 코치가 '130 킬로도 못 넘기는데 어떻게 올리냐'고 한숨쉬었다고. [63] 다만, 땜질용 6선발이라는 단서가 붙어있었지만. [64] 물론 비순혈 외부영입파인 미야타도 자기 모가지가 걸려있는 상황이었긴 했고, 실제로 2001년 시즌 종료 후 미야타도 퇴단한다. [65] 1999년에는 1억 5400만원을 받은 현대 정명원이 리그 연봉 1위였을 정도로, 특급 선수들의 연봉이 1억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지만, 2000년부터 FA제도 시행+삼성과 현대의 자존심 싸움까지 겹치기 시작하며 이승엽 정민태가 프로스포츠 역사상 첫 3억대 연봉을 찍을 정도로 최고 연봉 기록이 1년 단위로 1억씩 오르던 시절이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최고 연봉이 3억, 4억으로 껑충 뛰는 것에 대해 언론에서 제법 비판이 많았다. [66] 사실은 정민태 역시 망가진 상태에서 회광반조를 보였던 것이다. 바로 다음해인 2004년부터 정민태는 정민철보다 더 못난 성적을 찍어대고 더 빨리 은퇴했다. [67] 송진우도 이때 같은 병원에서 같은 수술을 받았다. [68] 정민철에게 다시 제대로 해보라는 말도 하였다. 깐게 아니라 재기할 준비를 하라는 메시지를 준 것이고 이는 선발에서 뺄 마음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69] 야만없 이긴 해도 여기서 3승만 따냈어도 시즌 10승 10패 정도의 기록이 된다. [70] 당시 정규시즌 2위가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 사실상 미리보는 플레이오프나 다름이 없었다. [71] PO 한정으로는 어찌보면 1999년 KS 진출 때보다 이 때가 더 나은 활약이었다. [72] 한화는 베테랑에게 쏠쏠하게 대우해줬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정민철과 관련해서는 남는 장사를 했다. 일단 일본 진출 당시 요미우리로부터 이적료만 2억 엔을 챙겼고, 복귀 당시 정민철의 신분이 FA가 아니었기 때문에 단년 계약에 계약금 없이 연봉 4억으로 싸게 잡을 수 있었다. [73] 다만 다음 해 송진우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관록투로 선발 마운드를 지켜내면서 류-송-정 선발 트리오를 잠시나마 볼 수 있었다. [74] 2023년 현재, 이 기록은 최연소는 양현종(34세 2개월 18일), 최소경기 기록은 김광현(327경기)에게 넘어갔다. [75] 다만, 이 경기 직후 당시 김인식 감독은 "정민철이 아슬아슬한 마구를 던져서 한 점밖에 주지 않았다"는 승리 인터뷰를 했다. 결과적으로는 호투지만 사실은 정민철의 상태가 아슬아슬하다는 뉘앙스. [76] 한편 LG의 김재박 감독은 한화의 후반기 성적부진에 대해 기자와 나눈 대화에서 "송진우나 정민철이 부진하다고는 하지만 원래 4, 5점 정도는 주지 않았나?"라고 언급했다. 기사 물론 말이 안 되는 소리인 게 정민철의 07년 방어율은 2.90, 06년 방어율으로 3.93이다. 원래 4, 5점씩 줬다면 저 성적이 나올 수가 없다. 김재박이 2010년 이후 백수 신세인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77] 여담으로 160번째 승리를 기록한 2008년 6월 10일 대구 삼성전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이날 경기 직전 정민철은 원정 숙소에 깜빡하고 유니폼을 두고 왔고 후배 류현진의 유니폼을 입고 선발로 등판할 예정이었다. 그 순간 대구구장 1루 관중석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은 관중을 발견했고 그 관중으로부터 유니폼을 빌려 입고 경기를 치렀다. 이 유니폼은 정민철이 과거에 직접 입었던 것으로 절친한 팬에게 친필 사인을 해서 선물로 준 유니폼이었다. 그 유니폼 덕에 정민철이 류현진의 유니폼을 입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경기 후 유니폼 주인인 팬에게 유니폼을 돌려줬다고 한다. 그야말로 그 팬은 초대형 계를 탄 셈. 그날의 일화가 보도된 기사. [78] 여기는 이 해까지 원포인트 릴리프로써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심지어 성적도 던지면 던질 수록 더 좋아져 2009 시즌 시작은 10점대 방어율로 시작했다가 최종 3.72로 마감했을 정도. [79] 이 기록은 2003년 5월 27일 현대 유니콘스가 처음 기록한, KBO 최다점수차 역전승 타이기록이다. 그리고 이는 2013년 5월 8일 SK가 두산을 상대로 10점차 역전승을 거두며 갱신. [80] 2014년 후 기준. 2015년판 기록대백과 참고. 여담으로 송진우와 통산 평균자책점이 같다. [81] 1위가 전천후로 구른 것 치고는 선발승만으로도 163승이라서 순수 선발승으로 쳐도 2위다. 참고로 정민철의 선발승은 157승. 결국 콩라인 [82] 당연히 1위는 송진우. [83] 당연히 1위는 송진우. 역대 2위이자 우완 1위는 선동열...이 아니라(!) 1,749개의 이강철. 선동열은 역대 3위이자 우완 2위이다. 이렇게 된 것은 선동열은 1군에서 뛴 시즌이 11시즌에 불과하지만 이강철은 17시즌간 1군에서 뛰었기 때문에 꾸준함으로 기록을 세운 것이다.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421&aid=0004566077] [85] 1위는 선동열이며 윤학길과 공동 2위이다. [86] 통산 다패 1위는 송진우, 2위 김원형, 3위 염종석 순이다. [87] 파크팩터를 고려하지 않은 조정ERA는 정민철이 142, 류현진이 147이다. [88] 그러나 통산 승리 1위인 송진우가 계속 승수를 쌓아갔고 정민철은 송진우와 같은 해에 보다 일찍 은퇴를 선언했다. 송진우가 예전에 "내 다승 기록에 가장 먼저 도달할 선수는 정민철이다"라고 한 말과는 달리 결국은 통산 3위에 그치고 만 것이다. [89] 일본 진출 전까지의 ERA는 2.80였는데 복귀 이후의 평균 성적만 따지면 ERA가 4.71로 폭등했다. [90] 다만 정민철도 당시 다른 투수들과는 달리 커리어 내내 보직파괴를 거의 당하지 않고 선발 로테이션은 꾸준히 지켜졌다는 것(393경기 370 선발) 역시 감안해야할 것이다. [91] 다만 윤학길은 200+이닝 시즌 중 3회를 1990년대 이후에 기록했다. [92] 일단 100완투 윤학길이 압도적이다. 2위 최동원(81완투)과 3위 장호연(79완투)도 타의 추종을 불허. 4위인 선동열(68완투)부터는 한 등위마다 불과 1~2개 씩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나뉠 정도. [93] 코치경력을 포함하면, 강병철은 롯데에서 타격코치 1년, 감독 8년으로 도합 9년을 일했고, 한화에서 수석코치 3년, 감독 5년으로 한화에서 일한 기간도 의외로 길다. 다만 롯데 감독 이미지가 더 큰데, 롯데 사상 감독을 세 번씩이나 지낸 유일한 인물인데다가 단 두 번 있는 우승을 유일하게 해낸 인물이기 때문. [94] 김응용은 1995년 전까지 사실상 해태 2군이 없고, 그때까지도 선수단이 소수정예로 운용됐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있다. 2군 체계가 조금씩이나마 잡혀가던 1994년 이후 완투 숫자가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게 그 증거. [95] 김인식, 김성근도 유명하다지만 이 두사람은 그래도 혹사에 완급조절이라도 있었다. 1년 혹사하면 다음해 다른 투수로 갈아탄다던가 [96] 송진우, 이강철, 조계현등은 단일시즌으로 따지면 정민철을 앞서고 이들도 장기간에 걸쳐 혹사 당했지만, 혹사의 꾸준함에 있어선 정민철이 우위에 있다. 정민태도 만만찮다지만, 이들에 비하면 한발짝 뒤에 처져있고. [97] 다만 투수 분업화가 이뤄져서 완투 숫자만 줄었을 뿐, 전체적인 혹사는 이때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당장 1999년에 200이닝을 넘겼다. [98] 68완투 29완봉으로 무려 43%이다. [99] 한편, 완투머신 윤학길은 75%으로 비교적 높은 편이었고 이상군 한용덕은 각각 69%, 68%으로 낮은 편이었으며, 송진우는 75%였다. 장명부는 61%로 가장 낮았다. 장명부는 이기고 있든 지고 있든 무조건 본인이 안 내려가고 버텼으니 뭐. [100] 송진우는 실제로 젊은 시절에는 제구력이 안 좋은 투수였다. 1989년과 1992년에는 2이닝당 1개가 넘는 볼넷을 내주기도 했고, 환골탈태(?) 직전인 2001년에도 9이닝당 4.18개의 볼넷을 기록했다. 2001년까지의 통산 9이닝당 볼넷은 3.76개. [101] 같은 인터뷰에 따르면, “1995년에 대구 경기였는데 신인 왼손타자가 대타로 나오더라. ‘애송이 쯤이야’ 했는데 계속 내 공을 파울로 쳐내더라. 7구째인가 8구째까지 끈질기게 버티더니 결국 내 공을 쳐서 빗맞은 안타로 만들었다. 허 참. 그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저 녀석 꽤 괜찮은 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102] 그리고 그 신인타자가 이승엽이었다고 한다. [103] 송진우, 정민철, 이강철, 김원형, 한용덕 [104] 대표적인 게 1994년 방어율 2.15로 10패, 1997년 방어율 2.46으로 14패... [105] 몇몇 정민철빠들은, 1996년 구대성의 18승 중에는 정민철 경기 분식회계승도 제법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106] 정민철 본인은 각종 인터뷰 등에서, 2004년 이전까지 “투수라면 누구라도 있을 법한 수준의 통증”이 있었을 뿐 특별한 부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밝혀왔다. [107] 정민철은 2000년대에 성적이 떨어졌음에도 이글스 팀원들 중 기자들로부터 가장 이야기가 많이 인용된 선수였다. [108] 참고로, 같은 이치로 2000년대 최고 선발 떡밥도 있다. 유력 후보인 손민한에게도 저평가 내지 불운 타이틀이 붙어있기 때문. 하지만 롯데 팬들이 뒤통수치고 달아난 배신자 손민한을 옹호해 줄 이유가 없어 정민철만큼 흥하진 않는다. [109] 정민철은 1999년 18승으로 징크스를 벗어났으나 그 해의 다승왕은 20승의 정민태... 당시 해설자들은 에이스의 상징인 15승을 돌파하지 못하는 그에게 1% 부족하다는 논평을 많이 했다. [110] 평균자책점, 탈삼진, 이닝 3관왕을 쓸어온 1994년이 MVP나 골든글러브에 가장 근접했지만, 이때도 MVP는 크보 최초로 200안타, 100도루, 타율 4할에 도전했던 선수, 골든글러브는 역대 최다세이브를 경신한 투수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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