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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6:20

왕준(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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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濬
(206년 ~ 286년 1월 18일[1])

1. 개요

서진의 장군으로 는 사치(士治).

사례 홍농군 사람으로, 오나라의 말제 손호를 붙잡아 동오를 멸망시킨 주역. 즉, 삼국지를 마무리하는 인물인 셈이다.

2. 생애

젊었을 때부터 학식이 뛰어나고 큰 뜻을 지니고 있었으나, 명성을 구하려 하지 않았기에 주변에서 높은 평가를 얻지는 못했다. 뒤에 주에 초빙되어 하동의 종사로 출사한 뒤, 당시 양주자사(凉州刺史)였던 서막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 뒤로 오랫동안 무슨 이유 때문인지 관직에서 활동하거나 승진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데, 그 기간동안 왕준의 행적이 어떠했는지는 미지수이다.[2]

오랜 시간이 지나서 왕준은 정남장군(征南將軍) 양호의 참군(參軍)이 되어 양호에게 우대받았는데, 양호의 조카 양기가 '왕준은 비록 품은 뜻은 크지만 사치스럽고 절의가 없어 깊이 믿을 인물이 못 됩니다'라고 말했으나, 양호는 왕준을 '그는 큰 재주를 지녔으며 바라는 바를 다 이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하며 변함없이 신임했다. 그리고 양호의 사람 보는 눈은 적중했다.

왕준은 뒤에 익주로 옮겨져 파군태수(巴郡太守)와 광한태수(廣漢太守)를 지냈는데, 그는 임지의 병역을 가볍게 하여 군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러던 272년, 아문장(牙門將) 장홍(張弘)이 반란을 일으켜 익주자사(益州刺史) 황보안(皇甫晏)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장홍은 먼저 황보안이 멋대로 군대를 일으켜서 역모를 꾀하였다고 조정에 거짓 보고를 올리는 한편 그 보고문을 황보안의 잘린 머리와 함께 수도로 보내왔다. 그러나 황보안의 휘하에 있었던 다른 관리들의 상소로 인해 거짓이 들통나게 되자 익주 전역을 휩쓸며 노략질을 일삼았는데, 왕준이 광한에서 토벌군을 일으키니 때마침 조정에서 왕준을 익주자사로 삼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왕준이 장홍을 토벌하여 참수하고 그의 삼족까지 모두 죽여서 반란을 평정하니 사마염이 왕준을 우위장군(右衛將軍), 대사농(大司農)으로 임명하여 중앙 조정으로 불러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왕준의 기략을 알고 있는 양호가 몰래 표를 올려서 왕준을 계속 익주자사로 있게 하자고 청하니 그에 따라 왕준은 계속해서 익주에 머무르게 되었다.
왕준은 익주를 다스리면서 촉한의 옛 신하인 하반을 중용하고 익주 주변의 이민족들을 복속시켜 내정을 다지는 한편, 용양장군을 겸하면서 오를 토벌하는 것을 목표로 수군을 양성하고 양양에 주둔한 양호와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등 외정 또한 착실히 준비해나갔다.

277년에 건위에서 진서라는 사람이 종교를 만들어 사람들을 가르쳐 술과 생선을 놓고 청결을 존중했는데, 부모나 처자의 장례라도 시신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등 장례 방식이 달라 왕준은 이를 불효라 여겨 진서를 붙잡아 주살했다. 또한 진서의 가르침을 받은 파군태수 당정 등을 면직시켰고 사당을 파괴해 그 곳에 심은 나무를 거두어 배의 건조 재료로 압수했으며, 그래도 부족하자 분묘에 심어진 나무들을 시장에서 사들였다.

그는 279년 겨울에 직접 표문을 올려서 오 정벌을 상주하고 두예도 사마염에게 결단을 촉구하니 마침내 사마염이 오 토벌을 개시하게 되었다. 280년 1월, 왕준은 용양장군 겸 익주제군사로 성도에서 군대를 이끌고 출발하였으며, 영안(永安)에서 파동감군(巴東監军) 당빈의 군대를 합류시킨 후 함께 장강을 타고 내려간다. 이후 왕준은 오의 방어선을 무력화시킨 뒤 서릉, 낙향(樂鄕) 등을 무너뜨리는 연승을 거듭하였고, 결국 건업의 석두성으로 육박해 손호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로써 동오까지 멸망해 서진의 천하통일이 달성되었다.

그러나 왕준보다 일찍 건업 근교로 나아와 동오의 중앙군을 섬멸하고 중앙군의 총대장인 승상 장제를 죽이는 전과를 올린 왕혼이 군령을 내려 일단 대기했다가 나아가자고 했는데, 마침 순풍이 불었기에 왕준이 왕혼의 군령을 무시하고 바로 나아가 손호의 항복을 받아내었으므로 이때부터 왕혼은 왕준과 불화하게 되었다. 왕준은 왕혼을 배려해 손호가 왕혼의 진영을 거쳐 가도록 했지만 왕혼은 이에 더욱 부아가 치밀었는지 사마염에게 따로 표를 올려 '왕준이 군령을 어기고 먼저 나아가 동오의 궁을 불태우고 물자를 약탈했다'라고 모함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왕혼의 위세가 지대했기에 왕준이 큰 공을 세웠음에도 그를 탄핵하는 조정 관리들의 의견들이 빗발쳐서 왕준이 사마염에게조차 힐문받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왕준의 거듭된 해명과 사마염의 참작으로 인해 처벌되지는 않았다.

오 토벌의 공적으로 보국대장군 겸 영보병교위가 되었다. 교(校)는 오직 5개였는데 이 영을 설치한 것은 왕준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관리가 또한 상주하길 보국대장군은 법도에 의하면 고관이 아니므로 사마도 두지 않고 관기(官騎)도 지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으나 조서는 정진(征鎮)의 규칙에 의거하여 대거(大車) 500을 주고 병사 500명을 증가시켜 보국영(輔國營)으로 하였으며 친기(親騎) 100명 관기(官騎) 10명에 사마를 두었다. 또한 양양현후(襄陽縣侯)에 봉해지고 식읍이 10000호로 늘었다. 아들 왕이(王彝)를 양향정후(楊鄉亭侯)에 봉하고 식읍을 1500호로 하고 비단 10000필, 의상 한 벌, 금전 30만과 음식을 내렸다.

왕준은 스스로 공이 크다고 생각하였는데, 왕혼 부자와 강성한 호족들에게 억눌리고 누차 관리들이 상주로 탄핵당했기에 매번 나아가 황제를 볼 때마다 정벌의 노고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상황을 늘어놓고 혹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인사도 없이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황제는 매번 그를 용서하였다.

익주호군 범통(範通)은 왕준의 인척인데, 어느 날 왕준에게 그의 공적이 아름답지만 처신이 훌륭하지 못한 것은 한스럽다고 말했다. 이에 왕준은 등애처럼 되는 게 두려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오랜 시간 동안 모함을 당함으로 인해 마음이 편벽되게 되어 응어리진 감정들을 없앨 수 없었다고 답했다.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왕준의 공로는 크나 보상이 적다고 여겼는데, 특히 박사 진수(秦秀), 태자세마 맹강(孟康), 옛 온령 이밀(李密) 등은 더불어 표를 올려 왕준의 억울함을 다퉜다. 황제는 마침내 왕준을 진군대장군으로 옮기고 산기상시를 더하며 후군장군을 겸하도록 하였다. 왕혼이 왕준에게 찾아왔는데 왕준은 왕혼에게 혹여 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경비를 삼엄하게 설치한 뒤에 만나보았으니 그들 사이에 서로 시기하여 방비했다.

왕준이 오나라를 평정한 이후 업적이 높고 자리가 중함으로 인해 다시는 소박하게 생활하지 않고 마침내 화려한 음식과 의복으로 마음껏 사치를 누리며 안일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가 불러 이끌어 주는 인사 중에는 촉 지방의 사람이 많았는데 옛 기반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이후에 왕준은 무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옮기고 특진을 가하며 산기상시, 후군장군은 전같이 겸하였다.
왕준은 태강 6년에 죽었는데 당시 나이가 80세였고, 시호를 무(武)로 하였다. 백곡산에 장사지냈는데 대규모의 무덤 공사를 하여 담장의 둘레 길이가 45리이고 방면마다 하나의 문을 열었고 소나무 측백나무가 무성하였다. 아들인 왕구가 자리를 이었다.

3. 후손

왕구의 동생은 왕창(王暢)인데 산기랑을 지냈다. 왕창의 아들은 왕수(王粹)인데 태강 10년 무제는 조서를 내려 왕수로 하여금 영천공주(潁川公主)와 결혼하게 하였으며 벼슬은 위군태수에 이르렀으나 나중에 석륵에게 살해되었다.

동진이 건국된 이후엔 왕준의 후손들은 나라에 채용되지 않았다. 당시 왕준의 손자 두 명이 있었는데 나이가 60이 넘었다. 환온이 강릉에 진주하면서 표를 올려 말하길, 왕준의 집안이 몰락하여 집안이 텅텅비어 강변에서 입에 풀칠하고 있는 와중에 제사에 채소로 만든 국조차 제대로 장만하지 못한다며 한고조가 기업을 정하자 악의의 후손을 구했고 (진나라) 세조는 현자를 표창하여 제갈량의 후손을 임용했는데 하물며 본조에 공을 세우고 진나라가 (옛 오나라가 있던) 강좌에서 중흥하였으니 공이 커 마땅히 후손을 돌보아야 한다고 했으나 황제가 고려하지 않았다.

4. 미디어 믹스

4.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048.jpg
삼국지 12, 13, 14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모든 능력치가 70~80대의 만능형의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초기작인 4나 5의 경우 무력이 80대였으나 8부터는 70대 초반으로 깎였다. 그래도 위나라에서는 A-급의 장수로써 크게 활용이 가능하며 수명이 매우 길다.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4 시나리오 6에서 임관된 상태에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력 86/무력 83/지력 79/정치력 72/매력 82에 특기로 외고, 풍문, 화공, 보병, 기병, 해전, 화계, 내분, 연환, 호통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5에서의 능력치는 무력 84/지력 80/정치력 64/매력 80에 진형은 학익, 안행, 수진, 특기로 화계, 수계, 분기, 속공, 강행, 수신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6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81/무력 83/지력 76/정치력 64/매력 77에 꿈은 대의다. 전술 시뮬레이션 최후의 스테이지인 오 토벌전의 총대장으로 출진한다.

삼국지 8에서의 능력치는 무력 72/지력 83/정치력 80/매력 84.

이번작을 기점으로 무력이 70대로 하향되었지만 다른 능력치들이 모두 80 이상이다. 능력치 성장 타입은 장군이나 지력과 정치력이 웬만한 참모형 무장 뺨 치는 수준으로 높은데 이 때문에 전능 특기를 얻지 못해도 용맹, 지낭, 지략, 특기를 각각 얻어낸다면 모든 능력치를 100으로 만들 수 있다. 보유 특기는 경비, 반계, 노병, 수군, 정찰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82/무력 73/지력 82/정치력 70. 병법으로는 분투, 연사, 투함, 충차, 파괴를 가지고 있다. 후반기 장수 중에서는 손에 꼽을 만한 능력치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81/무력 71/지력 79/정치력 70/매력 78에 특기는 10개이며,(기술, 훈련, 화시, 일제, 진정, 은밀, 지리, 나선, 위압, 제독) 장강을 타고 손호를 잡은 일화를 반영하였는지 제독 특기를 가지고 있다. 총 능력치합 379는 조예와 동급인 공동 39위.[3] 후기 시나리오에선 손꼽히는 인재다.

삼국지 11에의 능력치는 통솔력 81/무력 73/지력 77/정치력 71/매력 75에 여전히 균형잡힌 능력치에 병기, 수군 적성이 S, 창병 적성과 노병 적성은 A인 데다가 수명까지 길어서 내정이나 전투 어느 쪽에서든 쓸 만하다. 다만 보유 특기가 조선이라 고증은 잘 되었어도 그다지 효율성이 없다. PK라면 육성으로 강화시킬 여지는 충분히 있다.

삼국지 12에서의 일러스트는 오른손으로 깃발을 위로 들어올리고 있으며 능력치는 통솔력 81/무력 73/지력 77/정치력 71이고, 병종이 기병에 전법은 총돌격이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전작과 동일하며 이와 달리 기병 적성이 낮고 창병과 궁병 적성이 A급이다. 여담으로 수군을 이끈 경력이 있는데 수영 특기가 1레벨조차 없다가 PK에서 농업 2, 훈련 5, 순찰 1, 분전 3, 수영 5로 고증 오류가 해결됐다. 전수특기는 훈련으로 전법은 방원진.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81, 무력 73, 지력 78, 정치 71, 매력 76로 전작과 달리 지력이 1 상승했다. 개성은 붕벽, 조달, 위무, 조타, 탐욕, 주의는 패도, 정책은 수군육성 Lv 4, 진형은 어린, 학익, 추행, 투석, 전법은 제사, 경파, 투석, 구축, 강습, 시람, 친애무장은 서막, 양호, 혐오무장은 없다.

4.2. 영걸전 시리즈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수군 병과로 나온다. 참고로 범용 회심 대사를 사용하며, 퇴각 대사가 없다. 처음에는 그저 그랬지만 거듭된 지형등의 환경변화 패치로 인해 쓸만한 수군 → 수군의 희망으로 입지를 다지게 되며 왕준의 왕을 별명으로 따 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4.3. 삼국전투기

왕준의 수군 양성 경력을 반영하여 실제로 해군에서 복무했던 NBA의 전설 데이비드 로빈슨으로 패러디되었다. 처음 등장한 삼국 통일 (1)편의 타이틀 컷을 차지하기도 했으며 소개컷에서는 위진 최초의 해군제독으로 양호의 수하였지만 그보다 15살 연상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삼국 통일 편에서 처음 등장. 익주자사로 재임 중 양호가 오를 정벌하기 위해 가장 필요할 것이 무엇이냐 묻자 곧바로 수군이라고 답했다. 양호도 그에 동의하며 동시에 익주의 장강 상류가 수군 양성에 용이하다고 말했다. 왕준은 대사농[4]의 자리까지 포기하며 익주자사로 남아 수군 양성에 힘쓸 것임을 주장했다.[5]

삼국 통일 (3)편부터 왕준의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세었다. 화수로는 2편 지나갔을 뿐이지만 작중 시간 상으로는 7년이 넘게 지나갔으니 충분히 있을 법한 일.

이후 왕준은 수군 양성에 힘썼고, 실제로 강한 전함과 수군들을 양성했지만 여러 이유로 오 정벌이 지연되면서 7년 넘게 함선들을 놀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묘사됐다. 그리고 279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왕준, 두예는 하루가 멀다하고 오를 정벌하자고 상소를 올렸으며 장화가 쐐기를 박으며 결국 오 정벌을 허락받게 되었다.

오 정벌 때에는 장강을 따라 익주에서 건업으로 진격해 나갔다. 건평태수 오언은 진이 수로로 진격하는 것을 막고자 철쇄를 설치해놨지만, 왕준은 양호가 죽기 전에 넘긴 자료를 토대로 이를 모두 알고 있었기에 당빈을 시켜 뗏목을 떠내려보내게 하여 철쇄를 제거, 건평을 무시하고 진격을 이어나갔다. 당빈이 건평을 무시해도 되겠냐고 묻자 왕준은 어차피 건평에는 병력도 없고, 최전방을 비워 둘 수도 없을 터이니 자신들을 쫓아오지 못 할 것이라 답했다. 건평의 오언은 상대하기 껄끄러운 장수라고 나름 고평가해준 건 덤. 이후 도준이 없는 이릉을 간단히 점령한 뒤[6] 이도감 육안과 수군독 육경을 전부 사살했다. 두예가 주지를 낙향으로 보냈을 무렵 왕준도 낙향으로 내려와서 요격을 나온 낙향독 손흠을 당빈으로 하여금 박살내게끔 하기도 했다.

이후 강릉에서 두예의 명을 기다리다가 그에게서 계속 진격을 이어가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고 감격하여[7] 편지에 울면서 절을 올린 뒤 다시 건업을 향해 공격을 이어갔다. 이후 호분, 왕융과 연계하여 하구, 무창을 무너뜨리며 건업으로 향했다. 왕준은 무서운 속도로 건업으로 치고나갔는데, 빠른 이동에 집착하여 왕혼을 그대로 무시하고 자기만 건업으로 진격했으며 손호의 항복을 받아내며 오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하지만, 이 일이 화근이 되어 왕혼에게 모함을 받아 공이 조금 축소됐다. 왕준은 의외로 쿨하지 못해서 툭하면 그 때의 변명과 자신의 공을 이야기하고 다녔다고 묘사되기도 했다.[8]

4.4. 삼국지평화

왕담(王澹)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1] 음력으로는 285년 12월 7일이다. [2] 서막이 양주자사로 부임한 기간이 조예가 위의 황제로 즉위하고 제갈량이 북벌을 시작할 무렵부터 중앙으로 소환되는 240년 이전까지임을 감안하고, 왕준의 하동종사 이후의 관직 기록이 270년 무렵에 양호의 참군사로 임관하는 것임을 생각해본다면, 가능한 한 짧게 잡아도 왕준의 관료행적이 무려 30년동안 공백이었다는 말이 된다. [3] 물론 조예는 본인이 군주로 나올 경우 아이템, 옥새 빨을 받아 더 능력치가 올라간다. [4] 이전에도 언급된 적이 있었지만 현대로 치면 재정부 장관으로 나라의 돈줄을 쥐어잡고 있는 엄청난 직위다. [5] 애당초 관직에 오른 것부터가 양호의 천거 덕분에 늦게나마 오른 것이기에 양호의 대사를 위해서라면 관직 이름 정도는 하나도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 대인배의 면모를 보였다. [6] 아무리 서릉(이릉)독 도준이 부재했다지만 너무 간단히 점령하는데 성공해서 왕준 본인도 이게 정말 유비가 박살났던 그 이릉 맞냐고 조금 어이없어했다. [7] 왕준은 무창까지는 두예의, 무창부터는 왕혼의 명을 들어야 했는데 두예의 이 편지가 왕준의 고삐를 풀어준 것과 다름없었다고 묘사됐다. [8] 이 때 주변 대신이 속으로 '그냥 가만 있으면 왕혼만 찌질이 되고 알아서 평가가 올라갔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지나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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