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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4 15:51:09

하반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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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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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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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攀
(244? ~ 301)

삼국시대 촉나라,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효흥(惠興)으로 익주 촉군 비현 사람. 하포의 아들.

그의 다섯 형제는 모두 유명했으며, 젊어서 성숙하고 괄목할 만한 외모를 가졌으며,[1] 촉나라를 섬겼고 약관에 군의 주부, 상계리 등을 역임하다가 주의 초청을 받아 종사가 되었다.

황보안이 하반에 대해 왕좌지재라 평가하면서 하반을 불러 주부로 삼았으며, 272년에 장홍이 익주자사 황보안을 살해하면서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모함했다. 이 때 하반은 모친상을 당하고 있던 때로 하반은 양주로 나아가 황보안의 무고함과 원통함을 알렸으며, 왕준이 익주자사가 되자 하반은 부름을 받아 별가에 임명되었다.

왕준이 오나라의 정벌을 꾀하면서 하반은 왕준의 지시로 조정으로 가서 오나라를 토벌할 시기에 대해 헤아리게 했으며, 하반은 왕준의 지시로 양호에게 가서 오나라를 토벌할 계책을 알리고 무제가 하반이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 훌륭하면서 뛰어나다고 여겨 하반을 낭중으로 임명하고 왕준의 군사 일에 참여하게 했다.

280년에 진나라가 오나라를 공격해 손호가 항복했는데, 왕혼은 왕준이 자신보다 먼저 가서 손호를 항복시킨 것에 분노해 왕준을 공격하자고 했다. 이에 하반이 왕준에게 손호를 왕혼에게 보낼 것을 권해 일을 해결했으며, 하반은 왕준의 보국사마가 되면서 관내후에 봉했다.

이어서 형양 현령이 되어 모든 일을 쉽게 처리해 명성을 얻었다가 정위평이 되었으며, 당시 제갈충이 촉의 선비라는 이유로 하반을 가볍게 여겼다가 의심되는 사건을 함께 처리한 일로 탄복하게 되었다. 선성태수에 임명되었지만 가지 않았고 산기시랑이 되었으며, 양준이 정권을 잡고 많은 사람들을 친족으로 세워 이전에 봉한 작위들을 떼어낸 것이 심해 은혜로 이를 지키려 하자 석숭과 함께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양준을 주살한 공으로 서성후에 봉하고 읍 1만 호, 비단 1만 필 등을 하사받았으며, 동생 하봉, 조카 하규도 후로 봉했다. 하반은 봉호, 비단 등 반 정도 사양하면서 남은 것은 종친 등에게 나눠서 거의 자신에게 들어온 것이 없었다. 월기교위를 지내다가 292년에 한중군의 서성현은 그의 공국이 되었다.

익군교위, 동강교위 등을 지냈고 양주자사를 3년간 지내다가 대사농이 되었으며, 연주자사로 옮겨 응양장군을 더하자 하반은 이를 사양했다. 성찬, 변수 등이 직책에 임하라고 권하고 조서에서 하반에게 직책에 임하라고 했지만 하반은 병을 칭해 가지 않았으며, 사마륜이 노해 주살하려고 하자 하반은 하는 수 없이 병 중에도 부름에 응했다가 낙양에서 58세에 사망했다.

양주, 익주를 다스리는 것에 올곧아 방치된 자들을 불러들였으며, 진수, 염예, 비립 등 촉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이 마을에서 비방을 당한 것이 10여 년이었고 하반은 자세한 정황을 밝혀 그들의 원통함이 퍼지는 것을 모면했다.

하반은 현직에 있으면서 가문이 매우 가난해 첩이나 음악이 없었으며, 오직 빈궁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에 힘썼다.

사관은 하반에 대해 사마륜의 명을 좇아 군자된 사람으로 일에 임한 자라 볼 수 있다고 했으며, 공정해서 원통함이 퍼진 것을 많이 돌렸다고 평가했다.


[1] 이 부분은 진서가 아닌 화양국지에 있는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