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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왕
알브레히트 2세 Albrecht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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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 알브레히트 2세 (Albrecht II) | ||
출생 | 1397년 8월 10일 | ||
오스트리아 공국 빈 | |||
사망 | 1439년 10월 27일 (향년 42세) | ||
헝가리 왕국 네스메이 | |||
재위기간 | 로마왕 | ||
1438년 3월 18일 ~ 1439년 10월 27일 | |||
오스트리아 공작 | |||
1404년 9월 14일 ~ 1439년 10월 27일 | |||
보헤미아 국왕 | |||
1438년 5월 6일 ~ 1439년 10월 27일 | |||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 | |||
1437년 12월 18일 ~ 1439년 10월 2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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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000> 배우자 |
룩셈부르크의 엘리자베트 (1422년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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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안나, 엘리자베트,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 | ||
아버지 |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4세 | ||
어머니 | 바이에른의 요한나 조피 | ||
형제 | 마르가레테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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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제3대 독일왕,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합스부르크 왕조 초대 국왕, 보헤미아 왕국 합스부르크 왕조 제2대 국왕이다. 오스트리아 공작으로는 알브레히트 5세이다.2. 생애
1397년 8월 10일 오스트리아 공국 빈에서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4세[1]와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1세의 딸 요한나 조피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바이에른란츠후트 공작 하인리히 16세와 결혼한 마르가레테가 있었다. 7살 때인 1404년 아버지가 니더외스터라이히의 클로스터노이부르크에서 사망한 뒤,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5세로서 오스트리아를 물려받았다. 세 삼촌인 내지 오스트리아(Innerösterreich)[2] 공작 빌헬름[3], 레오폴트 4세, 에른스트 강철공[4]은 오스트리아 공국의 통제권을 놓고 끊임없이 분쟁을 벌였다. 그 바람에, 그는 1411년 레오폴트 4세가 사망하면서 분쟁이 수그러든 후에야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훗날 프라이징(Freising)의 주교로 발탁되는 베르톨트 폰 베힝겐과 라인프레히트 폰 바시로부터 우수한 교육을 받았다.1420년 3월 교황 마르티노 5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이단 세력인 후스파를 상대로 십자군을 선포했다. 알브레히트 5세는 이에 호응해 베라운 인근에서 독일왕 지기스문트와 합세한 뒤 프라하로 진군했지만, 수도몌르 전투와 비트코프 전투에서 얀 지슈카가 이끄는 후스파 반란군에게 연이어 참패했다. 1421년 9월 28일, 프레스부르크에서 지기스문트의 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이때 엘리자베트는 헝가리-크로아티아와 보헤미아의 추정 상속인으로 지정되었지만, 지기스문트가 또다른 딸을 낳을 경우 헝가리-크로아티아와 보헤미아 중 하나만 가지고 여동생은 다른 하나를 상속받게 되었다. 만약 지기스문트가 아들을 낳는다면, 두 왕관 모두 지기스문트의 아들에게 주어질 것이었다. 알브레히트 5세는 모라바 변경백국을 아내의 지참금 형식으로 받았다. 1422년 4월 19일 빈에서 열린 화려한 결혼식에서 엘리자베트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이후 지기스문트로부터 후스 전쟁을 떠맡은 알브레히트 5세는 군사적 수단 뿐만 아니라 교회에 충성하는 멜크 수도원의 개혁을 통해 후스파의 확산에 대항하려 했다. 여기에 더해 다른 이단 교리와 유대인들을 박해했다. 이 시기에 빈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대거 추방되거나 살해되었고, 유덴플라츠(Judenplatz: 빈 유대인 공동체)에 있던 오르 사루아 유대교 회당이 파괴되었다. 1423년 룬덴부르크 공방전을 치르다가 얀 지슈카와 야코프 프로코프가 이끄는 후스파 반란군의 역습을 받자 프레스부르크로 후퇴했다. 이후 헝가리 보조병의 지원을 받고 크로메르지시 전투에서 후스파를 격파했다. 1424년, 알브레히트 5세는 모라바의 모든 적 진지를 점령한 뒤 프리비슬라프에서 얀 지슈카의 부대와 대치했다. 얀 지슈카는 그의 군대와 대치하던 중 병사했다.
1425년 7월 25일, 지기스문트와 함께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와 상호 지원 동맹을 맺고, 그 대가로 차기 황제선거에서의 지지를 확보했다. 이후 야코프 프로코프를 지도자로 세운 후스파의 모라바 침공에 맞섰으나 패배했고, 트르제비치, 즈노이모 일대가 파괴되었다. 특히 도나우강 북쪽 지역은 1425년 11월부터 1431/14432년 사이에 후스파 습격대의 잇따른 공격을 받았다. 1427년 3월 후스파가 츠베틀 수도원을 파괴한 뒤 이듬해에 브르노를 포위 공격했다. 하지만 브르노 수비대가 결사 항전한 덕분에 함락을 면할 수 있었다.
1431년 후스파 십자군이 타호프 전투에서 야코프 프로코프가 이끄는 후스파에게 참패했다. 반면에 알브레히트 5세의 군대는 1431년 10월 바이트호펜 안 데어 타야(Waidhofen an der Thaya)에서 후스파를 격파했다. 하지만 후스파를 무력으로 제압할 가능성이 희박해졌다고 여기고 이후로는 후스파와의 타협을 시도했다. 1433년 평화 협상이 시작된 후 후스파의 습격은 잦아들었고, 1434년 1월, 바젤 공의회는 2년간의 협상 끝에 후스파의 고유 신앙 및 관습을 인정하고 압류했던 재산을 돌려주기로 하였고, 보헤미아 의회는 바젤 공의회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타보르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항전하려 했다. 1434년 5월 30일 양형파+가톨릭 지원군과 타보르파가 리파니 전투에서 격돌했다. 그 결과 타보르파가 섬멸되었고, 야코프 프로코프가 전사하면서 후스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1437년 12월 18일, 지기스문트는 즈노이모에서 알브레히트 5세와 만나던 중 사망했다. 이에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귀족들은 그를 차기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선출했다. 한편 보헤미아에서는 로쥼베르크의 올드르지흐 2세와 흐라트체의 멘하르트가 이끄는 친 오스트리아 진영이 1437년 12월 30일 알브레히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추대했지만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알브레히트는 1438년 1월 1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1438년 3월 18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황제선거에서 선제후들의 만장일치로 독일왕 '알브레히트 2세'로 선출되었다.
1438년 6월 29일, 알브레히트는 군대를 이끌고 프라하에 입성한 뒤 프라하성의 성 비타 대성당에서 보헤미아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그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보헤미아인들이 대거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보헤미아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후 보헤미아 반란 세력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던 그는 1439년 오스만 술탄국이 헝가리로 쳐들어오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이동하다가 1439년 10월 27일 네스메이에서 이질로 사망한 뒤 세케슈페헤르바르에 묻혔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알브레히트 2세 이래로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줄곧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이들은 6촌이자 후임 독일왕인 프리드리히 3세의 직계 후손이지만, 막시밀리안 1세, 카를 5세, 페르디난트 1세를 제외하면 알브레히트 2세의 후손이기도 하다. 알브레히트 2세의 증손녀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5]가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의 중시조 페르디난트 1세와 결혼하여 명맥을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3. 가족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알브레히트 2세 (Albrecht II) |
<colbgcolor=#fff3e4,#331c00>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4세 (Albrecht IV, Duke of Austria) |
<colbgcolor=#ffffe4,#323300>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3세 (Albrecht III, Duke of Aust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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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 (Albrecht II, Duke of Aust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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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르트의 요하나 (Johanna of Pfi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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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의 베아트릭스 (Beatrix of Nurem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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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5세 (Friedrich V, Burgrave of Nurem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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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센의 엘리자베트 (Elisabeth of Meiss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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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요하나 조피 (Johanna Sophie of Bava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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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1세 (Albrecht I, Duke of Bava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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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4세 (Ludwig 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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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 여백작 마르그리트 2세 (Marguerite II, Countess of Hainau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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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제크의 마우고르자타 (Małgorzata of Brie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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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제크 공작 루드비크 1세 (Ludwik I, Duke of Brie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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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쿠프의 아그니에슈카 (Agnieszka of Głogów)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튀링겐 방백부인 아나 (Anna, Landgravine of Thuringia) |
1432년 4월 12일 | 1462년 11월 13일 |
튀링겐 방백 빌헬름 3세 슬하 2녀 |
2녀 |
폴란드 왕비 엘리자베트 (Elizabeth, Queen of Poland) |
1436년 | 1492년 6월 7일 |
카지미에시 4세 슬하 6남 6녀[6] |
1남 |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 (Ladislaus Postumus) |
1440년 2월 22일 | 1457년 11월 23일 |
그는 생전에 아내 엘리자베트와의 사이에서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장녀 아나(1432~1462)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막내 아들인 튀링겐 방백 빌헬름 3세와 결혼했으나 자녀를 두지 못했고, 튀링겐은 베틴 가문 본가로 회수되었다. 차녀 엘리자베트(1438~1505)는 리투아니아 대공이자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와 결혼했고, 후에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왕이 되는 울라슬로 2세와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는 얀 1세 올브라흐트,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즉위했다가 폴란드 국왕도 겸한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형들이 죽은 후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모두 물려받은 지그문트 1세 등을 낳았다. 아들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는 그가 사망한 지 4달 후인 1440년 2월 22일에 유복자로 태어났다. 초기에는 나중에 누나 엘리자베트와 결혼하는 카지미에시 4세의 친형인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가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울라슬로 1세로 선출되었다가 오스만 술탄국 무라트 2세와의 바르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라디슬라우스가 헝가리-크로아티아의 단독 국왕이 되었다. 라디슬라우스는 나중에는 보헤미아 국왕으로도 선출되었지만 자식 없이 일찍 사망했고,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계통은 단절되었다.
4. 대중매체
만화 소녀전쟁에서 묘하게 취급이 나쁘게 등장한다.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도 지기스문트의 뒤를 이어 황제위에 오르는데 지기스문트가 원역사보다 일찍 세상을 뜬 덕에 원역사보다 빨리 즉위한다. 여기서는 후녀디 야노시를 섭정으로 삼아 주인공이 주창한 반오스만 전선에 힘을 보태주며 뒤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뒤통수를 쳤을때는 달마티아를 안주면 도움 안주겠다는 사실상의 강짜를 부리며 베네치아를 엿먹이는 등 제국에 여러모로 큰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