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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2 06:52:53

에노의 마르그리트 2세

파일:에노의 마르그리트 2세.jpg
성명 에노의 마르그리트 2세
Marguerite II de Hainaut
생몰년도 1311년경 ~ 1356년 6월 23일
출생지 에노 백국 발랑시엔
사망지 에노 백국 케누아
아버지 기욤 1세 드 에노
어머니 발루아의 잔
형제 장, 기욤 2세, 필리파, 장, 아녜스, 이자벨, 루이
남편 루트비히 4세
자녀 마르가레테, 안나, 엘리자베트, 루트비히 6세, 빌헬름 1세, 알브레히트 1세, 오토 5세, 베아트릭스, 아그네스, 루트비히
직위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에노, 홀란트, 질란트 여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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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의 황후, 에노, 홀란트, 질란트 여백작.

2. 생애

1311년경 에노 백국 발랑시엔에서 에노 백작 기욤 1세 드 에노와 발루아 백작 샤를의 딸인 발루아의 잔의 장녀로 출생했다. 형제로 장[1], 기욤 2세, 필리파, 아녜스[2], 잔[3], 이자벨[4]이 있었다. 1314년 가을, 아버지 기욤 1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갈등을 벌인 끝에 바이에른 공작이며 로마 왕의 유력 후보인 루트비히 4세와 동맹을 맺었다. 당시 루트비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내세운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히리 1세와 황위를 놓고 경쟁하고 있었고, 부유한 저지대 국가의 지원을 받기를 원했기에 그와 동맹을 맺는 걸 받아들였다.

1323년 8월 15일, 기욤 1세는 튜튼 기사단 사령관 콘라드 폰 군델핑겐, 로이히텐베르크의 영주 울리히 1세 등 루트비히 4세의 사절단과 논의한 끝에 비텔스바흐 가문과 아베느 가문의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 장녀 마르그리트와 루트비히 4세간의 결혼 계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결혼 계약서에는 기욤 1세가 47,000파운드라는 상당한 금액을 딸의 지참금으로 지불하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결혼이 완료된 후 이 금액의 절반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결혼 첫해가 끝난 후에 지불하기로 했다. 그 대가로, 루트비히 4세는 아내의 연간 수입이 최대 11,000파운드에 달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자금의 수령을 보장하기 위해. 마르그리트는 결혼이 완료된 직후 카우브, 퓌르스텐베르크, 라이헨슈타인 및 린덴펠스 성을 소유했으며, 카우브 성 아래의 관세 수입 역시 소유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 4개 성을 1324년부터 1329년까지 소유했다가, 루트비히 4세가 1319년에 사망한 형제 팔츠의 루돌프 1세의 후손에게 반환하면서 소유권을 상실했다.

1324년 2월 25일 쾰른에서 마르그리트와 20살 위의 루트비히 4세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마르그리트는 바이에른으로 이주했고,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5명과 딸 5명을 낳았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이자 연대기 작가 요하네스 폰 빈터투어에 따르면, 마르그리트는 남편이 유대인을 선호하는 걸 반대했다고 한다. 요하네스의 설명에 따르면, 1336년 3월경에 황제가 유대인을 박해한 살인 집단을 알자스에서 강제로 떠나게 하자, 마르그리트는 사순절 기간에 루트비히에게 닭 요리를 대접했다. 루트비히 4세가 "사순절 기간에는 닭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걸 모르는가?"라고 묻자, 마르그리트는 남편이 유대인처럼 행동하는 것 같으니 이제 고기 요리도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다고 답했다. 루트비히 4세는 이 말을 듣고 자기 행동에 대해 속죄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327년 루트비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요한 22세를 응징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진군했을 때, 마르그리트는 기병 500명과 궁병 800명을 이끌고 뒤따라가서 스플뤼겐 고개를 건너 1327년 5월 3일 코모에서 남편과 합세했다. 이후 남편이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1년 반 동안 그의 곁에 머물렀다. 1328년 1월 17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남편과 함께 신성 로마 황제 및 황후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1336년 초가을에 남편의 동의를 얻어 삼촌인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교황 베네딕토 12세가 1336년 11월 23일에 필리프 6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트비히 4세가 전임 교황에게 받은 파문이 해제된 후에야 동맹을 맺으라고 권고한 것을 볼 때 필리프 6세가 루트비히 4세와 동맹을 맺기를 청원한 것으로 보인다.

1337년 4월, 마르그리트의 처남인 율리히 백작 빌헬름 5세 폰 율리히가 이끄는 황제 대표단이 베네딕토 12세와 협상하기 위해 아비뇽에 찾아갔다. 교황은 루트비히 4세와 타협하려는 듯 보였지만, 파리 고위 대사관의 설득을 받고 타협을 거부했다. 이에 루트비히 4세는 프랑스 국왕의 훼방 때문에 교회와 화해하지 못했다며 비난했고, 1337년 7월부터 시작된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를 지지했으며, 에드워드 3세를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의 제국 대리자"로 선임했다. 에드워드 3세는 1338년 9월 코블렌츠에서 열린 제국 회의에 참석한 뒤 루트비히 4세에게 4,000 길더를 선물하고 마르그리트에게 2,400 길더를 선물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4세는 나중에 방침을 바꿨다. 마르그리트는 제국 장관인 울리히 호프마이어를 필리프 6세의 궁정에 보내 루트비히 4세가 이제 백년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중재자 역할을 하길 원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필리프 6세 역시 루트비히 4세가 교회와 화해하는 걸 도와주기로 했다. 그러나 1342년 4월 25일 베네딕토 12세가 사망한 뒤 새 교황이 된 클레멘스 6세는 루트비히 4세 타도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루트비히 4세와 교황청간의 화해는 이뤄지지 않았다. 1346년 4월 13일, 클레멘스 6세는 루트비히 4세를 다시 파문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루트비히 4세의 후손들 역시 파문했다. 또한 교황은 모라비아 후작 카렐을 새로운 로마 왕으로 세우려 했다.

1345년 9월 26일, 에노 백작이자 마르그리트의 형제인 기욤 2세 드 에노가 프리슬란트를 공략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다가 워렌스 전투에서 프리지아인들에게 참패해 목숨을 잃었다. 당시 기욤 2세에겐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기욤 2세의 살아남은 네 자녀인 마르그리트, 필리파, 잔, 이자벨 모두 상속권이 있었다. 잔과 이자벨의 남편들은 상속권을 쟁취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지만,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필리파 왕비가 에노 여백작이 되도록 주선하려 했다. 그러자 루트비히 4세는 아내의 상속권을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걸면서, 이를 통해 저지대 국가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1346년 1월 15일 뉘른베르크에서, 루트비히 4세는 마르그리트를 홀란트, 질란트, 프리슬란트 영주로 삼겠다고 선언했고, 마르그리트는 봉건 영주로서 남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또한 루트비히 4세는 마르그리트가 에노 여백작으로서 칭호를 갖는 걸 허락했지만, 에노 백국 영지는 황실 영지에서 분리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마르그리트는 9살짜리 아들 알브레히트와 대규모 측근들과 함께 로렌을 거쳐 에노로 이동했고, 1346년 3월 14일 몽스에서 도시의 자유를 존중하고 에노, 홀란트, 질란트의 통일성을 보장하겠다고 맹세했다. 9일 후, 그녀는 발랑시엔에서도 거의 같은 방식으로 선서했다. 그 후 그녀는 홀란트와 질란트를 여행하며 지역 귀족들의 충성 서약을 받는 대가로 그들의 특권을 확인했다. 하지만 1346년 3월 21일 발랑시엔에서 특별 세금 부과에 반발한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종탑 입구를 무너뜨리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폭동에 연루된 40명이 체포되었고, 그중 16명이 참수되었다. 또한 에노의 귀족과 성직자들은 마르그리트에게 몇 가지 사항을 시정할 것을 요구했다. 1346년 6월 3일, 귀족과 성직자의 대표 12명은 마르그리트로부터 자유를 부여받은 도시의 시민들도 그곳에서 영구적으로 거주해야 하며 영주가 언제든지 농노를 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한 승인을 받았습니다. 에노 귀족들은 이를 통해 도시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농노제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1346년 9월 7일, 루트비히 4세는 마르그리트의 차남 빌헬름이 어머니가 사망할 경우 어머니를 계승해야 하며, 빌헬름이 자식 없이 죽으면 삼남 알브레히트가 어머니의 뒤를 이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 대가로, 신성 로마 제국의 차기 황제가 될 장남 루트비히는 어머니의 영지 상속을 포기했다. 또한 루트비히 4세는 아내가 자율적으로 자기 영지를 통치하는 걸 보장하고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 필리프 6세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뒤, 에드워드 3세는 1차 칼레 공방전에 착수하면서 필리파에게 마르그리트와 회담을 가지라고 지시했다. 필리파와 마르그리트는 1346년 10월 이프르에서 만났고, 마르그리트는 잉글랜드 왕과 루트비히 4세의 동맹을 복원하기 위해 루트비히 4세를 설득하는 데 동의했다. 그 대신, 필리파는 군사적 수단을 통해 자신의 상속권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347년, 마르그리트는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남편과 논의하려 했다. 이때 마르그리트는 자신이 저지대 국가를 떠나는 동안 삼촌인 보몽 영주 장을 에노 총독으로 삼았으며, 아들 빌헬름에게 홀란트, 질란트, 프리슬란트 관리인으로 세웠다. 또한 어린 아들 오토에게 뉴 질란트에 대한 권리를 부여했다.

1347년 10월 11일, 남편 루트비히 4세가 곰 사냥을 하던 중 뇌일혈에 걸려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 후 1346년 11월 26일 본에서 모라비아 후작이며 그동안 루트비히 4세의 대립 왕으로 자처하던 카렐이 카를 4세로서 로마 왕에 선출되었다. 독일 귀족들이 대부분 카를 4세 편으로 붙어버렸기 때문에, 마르그리트는 자기 아들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올리려는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녀는 루트비히 4세 생전에 정해진 대로 에노 백작위를 아들 빌헬름 1세에게 넘겨줬고, 1348년 1월 5일 홀란트와 질란트 백국의 정부와 프리슬란트 통치권을 아들 빌헬름에게 넘겨줬으며, 뉴 질란트의 자치권에 대한 오토의 주장을 확인했다. 그녀 본인은 생애가 끝날 때까지 에노에서 통치를 행사하기로 했다. 이때 그녀는 빌헬름으로부터 얀간 10,000골더의 연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빌헬름 1세는 자기 영지에서 반항하는 귀족들과 전쟁을 치르느라 수입을 제대로 거두지 못했고, 이에 따라 마르그리트에게 줘야 할 연금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 이 때문에 모자간의 관계는 점점 악화했다. 1350년 3월, 마르그리트는 에노로 돌아온 뒤 빌헬름 1세와 대립하던 귀족들의 추대로 에노 여백작에 복위했다. 1350년 5월 25일, 빌헬름 1세는 이에 대응해 도르드레흐트, 엘프트, 라이덴, 하를렘, 암스테르담, 알크마르 등 수많은 도시를 기반으로 한 대구파와 동맹을 맺었다. 같은 해 9월 5일에는 마르그리트를 지원하는 후크 동맹이 체결되었다. 이후 마르그리트를 지지하는 후크 파와 빌헬름 1세를 지지하는 대구 파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1351년 1월 20일, 마르그리트는 분쟁의 지속을 피하고자 아들 빌헬름 1세에게 연간 2,000길더의 수입을 지불할 테니 질란트의 행정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양보는 합의로 이어지지 않았다. 연대기 작가 요한 폰 베케에 따르면, 마르그리트는 자신에게 맞서는 빌헬름 1세에게 극도로 분노해 아들을 잡으면 몸을 절단하겠다고 외쳤다. 그 이야기를 절해들은 빌헬름 1세는 자기가 어머니를 잡으면 적절하게 대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1351년 7월 30일, 마르그리트는 교회의 지원을 받기 위해 발랑시엔에서 클레멘스 6세의 "로마 왕은 먼저 교황의 승인을 얻어야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선언에 동의를 표하면서, 자신은 항상 교회에 충실하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마르그리트는 장남 루트비히의 지원을 받았고, 질란트 귀족 대부분의 지지를 확보했으며, 도르드레흐트 시민들에게 항구에서 상품을 하역하고 특정 기간 동안 판매용으로 전시할 권리를 인정해주고 그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또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지지도 확보했다. 그녀는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안심시키기 위해 1351년 5월 6일 자신이 프랑스에 대항해 잉글뢘드와 손잡은 게 아니라고 선언했다.

1351년 6월 10일, 잉글랜드군의 지원을 받은 후크파가 대구파를 상대로 비레 인근에서 소규모 해전을 벌여 격퇴했다. 이에 대구파는 1351년 7월 4일 비레 인근 해안에서 재차 해전을 벌여 후크파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때 잉글랜드 지원군 지도자는 살해되었고, 마르그리트를 지지하는 많은 귀족이 전사하거나 생포되었다. 빌헬름 1세는 1년 안에 후크파에 귀속되었던 도시 및 마을 17개를 공략하거나 항복하도록 강요했다. 내전이 갈수록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마르그리트는 1351년 9월 에드워드 3세의 지원을 받기 위해 런던으로 향했다. 에드워드 3세는 초기에는 마르기르트를 추종하는 후크파를 지원했지만, 나중엔 입장을 바꿔 1352년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딸인 레스터 여백작 모드를 빌헬름 1세와 결혼시키고 자기편으로 회유했다.

결국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지 못한 마르그리트는 1354년 12월 7일 삼촌 장 드 보몽과 사촌이자 리니 영주인 발레랑 2세 뤽상부르리니의 중재에 따라 빌헬름 1세와 화해했다. 이날 두 사람 외에도 에노와 저지대 국가의 몇몇 성직자 및 귀족들이 몽스에 모였고, 두 당사자 간의 화해가 승인되었다. 빌헬름 1세는 그녀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고, 마르그리트는 빌헬름 1세를 용서하기로 했다. 또한 마르그리트는 홀란트, 질란트 및 프리슬란트에 대한 아들의 주권을 받아들였고, 빌헬름은 마르그리트가 에노 여백작으로 칭하는 것을 인정하고 일회성 퇴직금 40,000길더와 연간 연금 7,000길더를 지불하겠다고 했으며, 마르그리트가 죽은 후 빌헬름 1세가 에노에서 그녀의 뒤를 잇기로 했다.

그 후 에노에서 여생을 보낸 마르그리트는 1354년 5월 3,700파운드의 연금을 받는 대가로 자신을 프랑스의 가신이라고 선언했으며, 1354년 7월 7일 조례를 통해 임금 지급과 다양한 상품의 구매 및 판매에 대한 최대 관세를 도입했다. 벽돌공의 일일 요금은 3수스, 장인의 일일 요금은 15헬러로 설정되었다. 또한 군인들을 위한 정확한 복장 규정이 그녀의 주도로 제정되었다. 그 외에는 관리들에게 정치 문제를 일임하고 조용히 지내다 1356년 6월 23일 케누아에서 사망했다. 사후 아버지 기욤 1세가 묻힌 발랑시엔의 미노라이트 교회에 안장되었다. 아들 빌헬름 1세가 그녀의 뒤를 이어 에노 백작에 공식 취임했다.

3. 가족



[1] ? ~ 1316, 요절 [2] ? ~ 1327 [3] 1315 ~ 1374, 율리히 공작 빌헬름 5세의 부인 [4] 1323 ~ 1361, 나무르 백작 장 1세의 아들인 로베르 드 나무르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