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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08 15:22:22

수도몌르 전투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후스파 십자군3.2. 후스 강경파(타보르파)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후스 전쟁 시기인 1420년 3월 20일, 얀 지슈카가 이끄는 후스파 군대와 후스파 십자군이 맞붙은 전투. 십자군은 후스파의 궤멸을 꾀했으나 막심한 피해만 보고 실패했고, 후스 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2. 배경

1419년 독일과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지기스문트는 이복형 바츨라프 4세가 죽으면서 보헤미아 왕국 왕위까지 올랐다. 하지만 보헤미아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가하던 후스파는 지난날 지기스문트가 얀 후스의 신변을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여 콘스탄츠 공의회로 불려들인 뒤 화형에 처해지는 걸 방관한 것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어서, 그가 보헤미아 왕위에 오르는 걸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얀 지슈카를 비롯한 강경파의 반발이 극렬했다.

1419년 7월 30일, 후스 강경파는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를 점령한 뒤 시의원들을 밖으로 내던졌다. 이후 산악 지대인 타보르에 성채를 세우고 민병대를 훈련시켜 전투에 대비했다. 1419년 12월, 후스파 농민군 300명은 얀 지슈카의 지휘하에 바겐부르크(Wagenburg)를 활용하여 자기들을 추격해 온 귀족 판관 보후슬라프의 2,000여 군대를 네크미르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리하여 단순한 소요로 그치는 듯했던 후스파의 봉기는 규모가 점점 커졌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1420년 3월 1일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지기스문트의 요청을 받아들여 후스파를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 결성을 촉구하는 칙서를 동유럽의 제후들에게 내렸다. 이에 동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모집에 응한 기사들이 지기스문트에게 모여들었는데, 그 숫자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후 후스파 십자군은 보헤미아로 쳐들어가 타보르에 은거하고 있는 후스파를 먼저 격멸하려 했다.

1420년 3월 25일, 2천여 명의 십자군 기병대는 타보르로 진군하던 중 수도몌르 평원의 요새를 점거하고 있던 후스파를 발견했다. 당시 후스파 군대의 숫자는 400명에 불과해서, 도저히 승산이 없어보였기에 처음에는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십자군이 항복을 받아주길 거부하고 전원 몰살시키려 들자,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끝까지 항전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후스 전쟁의 본격적인 첫 전투인 수도몌르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후스파 십자군

3.2. 후스 강경파(타보르파)

4. 전투 경과

얀 지슈카는 중무장한 기사 2,000명을 상대하기 위해 주변을 요새화했다. 그는 전 병력을 바겐부르크에 들어간 뒤 적군이 바겐부르크에 돌진할 때 핸드 캐논 석궁을 발사하여 적을 제압하게 했다. 게다가 그들이 위치한 장소는 비록 평원이긴 했지만, 사방에 큰 연못과 습지대가 많아서 말이 빠르게 지나가기 힘들어서 기병의 돌파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었다.

십자군은 바겐부르크 주변을 에워싼 뒤 돌격했지만, 거대한 마차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다 마차 위에 숨은 적이 석궁과 핸드 캐논을 난사했기 때문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했다. 스트라코니체의 구호 기사단 천 명이 먼저 접근해봤지만 격퇴당했고, 슈테른베르크의 페테르 폰 코노피쉬트가 이끄는 왕당파 기병 천 명이 뒤이어 돌격하여 마차 근처까지 이르렀지만, 습지에 빠져 버렸다. 이에 그들은 말에서 내려 진군하려 했지만, 곧 수렁에 빠져서 제대로 나아갈 수 없었다. 후스파는 이 틈을 타 이들에게 화살을 퍼부어 많은 적병을 사살했다.

하지만 십자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앞세워 끈질기게 진군했고, 마침내 날이 저물 무렵에 마차에 도착하여 마차를 부숴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에 얀 지슈카는 전군에 마차를 타고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후스파는 마침 안개가 낀 틈을 타 적의 추격을 따돌리고 유유히 전장을 빠져나갔다. 이리하여 수도몌르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후스파는 이 전투에서 30명이 포로로 잡히고 바겐부르크 3대가 파괴되는 손실을 입었다. 또한 지휘관 중 한 명인 슈비호프의 브레넥(Brenek of Švihov)이 전사했다. 반면 십자군은 막심한 손실을 입었고, 적을 완전히 섬멸하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얀 지슈카는 타보르 성채에 몸을 숨겼다가, 프라하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자 각지의 후스파 민병대를 규합하여 비트코프 전투를 치른다.